촉진하는 밤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초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거야
증발할거야 사라질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연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P.18~21)
이 느린 물
이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밖에는 고통이, 이 느린 물이,
이 치명적인 물이, 죽음의 자매가 내리는데,
당신은 잠이 오나요?*
그녀는커튼을 들추고
창문 앞에 서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창문 하나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상상했다
저 사람은 불만 켜둔 채로 깊이 잠든 걸까
불이 꺼진 어떤 방에도 잠들지 못한
누군가가 있을까
언제나 잠이 오지 않던 사람
어쩌다 단잠을 잔다면 가장 큰 행운을 얻은 듯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사람
충분하다는 건 기쁘다는 것과 좀 달랐다
그녀는 완전하게 기뻐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모든 일에서 분노를 잔향처럼 느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죽음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생동안 사랑해온 단 한 명을 대하듯 했다
그녀의 방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그녀가 조용히 슬리퍼를 끌고
먹을 것을 챙겨 먹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시를 썼다
약간의
약간의
아주 작은 웃음 속에서
맹렬히
맹렬히
거의 모든 것과 맞서다가
그 방에서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이대로 고요히 사라지고 싶다고 혼잣말을 했다
안쪽으로
안쪽으로
뱅글뱅글 파고들고 파고들고 파고들다가
그것이
사랑을 시작하는 얼굴이란 걸
알아챌 때도 있었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느린 비] 나혜석 에밀리 디킨슨 외<슬픔에
게 언어를 주자. 세계 여성 시인선> 공진호 옯김. 아티초크, 2016.
(P. 22~24)
무한 학습
어떤 사람을 떠올리기 위해 노거수를 바라보는 일
나는 그럼으로써 사랑을 더 크게 만드는 중이다
그녀는 거기까지 가서 굳이 그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평생 동안 들어왔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정성스러운 음식을 내어놓듯 대답을
들려주었다
자개장이 골목에 버려져 있을 그때가 가장 아름답지
않나요, 하는 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눈 밭에 누워 잠자는 날로 정해놓는
다면
그나마 이상적이지 않을까요, 하는 식으로
노거수가 열매 대신 수액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하여
회한과 수치와 죽음을 읽어 내는
모독을 그렇고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는 헤
픈 솜씨를
넝쿨이 풀들이 찢어진 비닐봉지들이 제멋대로 안착하
여 일부가 되어가는 몸을
이백칠십오만 사천구백팔십한번째 사람이 다가와 두
팔을 벌리고 안아볼 때에
아무리 짓이겨도 튕겨 나가는 도마 위의 마늘 한 알 처럼
그녀는 오늘도 단단하고 맵게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녀
가 그녀를 위하여 그녀답게
꽃이 시들지 않아 꽃병을 비울 수가 없어 화가 난 사람
을 떠올리면서
꽃을 노려보는 일, 나는 그럼으로써 사랑이 비대해지
는 걸 경계하는 중이다
어떻게 말해보아도 부족하다 쇄골 아래까지만 피가 도
는 질병처럼 부족하다
벼랑에서 황금빛 테두리에 갇힌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구성원으로서
올무를 손에 들고 이 황혼을 등지고 서 있다면 누군가
목을 매러 왔다가
걸어두고 간 올무가 크리스마스트리의 오너먼트들처
럼 치렁치렁하다면
나는 그 노거수를 찾아가 바라보며 듣는 중이다 그녀
웃음소리를
(P.144~146)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에서.-
김소연 詩人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새 시집을 이틀 동안 읽으며 아름답고 쓸쓸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듯 늘 그렇듯이 강건하고 결국은 사랑에 대한 삶의 詩集.
"슬픔을 나누기 위해 달려왔으나/ 우리가 나누는 것은 축복일지도 몰랐다/ 설사 간간이 울먹인다 해도"(34쪽, '우리의 활동')
황현산 선생님께서 생존해 계셨다면, <수학자의 아침>의 발문에서처럼 또 "씩씩한 소연아"라는
서두를 건네셨으리란 애틋함과 아쉬움을 생각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밤"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를 뜻하는 것은 공들여 찾아낸 모욕 중의 하나이다* (테오도르 W 아도르노 [122 모노그램]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옮김. 길, 2005. P.251)"
"가속이 붙는 밤 귀한 것들을 벼랑 끝에 세워둔 것처럼 기묘하고 능청스러운 밤" "푸른얼음처럼 지면서 버티기 열의를 다해 잘 버티기 어둠의 엄호를 굳게 믿기 위해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복하지 않기" (70~71, '푸른얼음')
"함박눈이 밤새 내려 이 집과 저 집 사이를 하얗게 가두고 말았군요" "그런 인사말 같은 것들이/ 나를 추월해서 앞서가버릴때까지/ 속도를 늦춥니다 (85쪽 '꽃을 두고 오기)
"다시 말해줘/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줘/ 물 얼룩 위에 쏟아진/ 물과 같이(94쪽 '공연')
"시는 시밖에 모르고 시는 시를 모방하고/ 영영 시를 떠나지 않습니다" (114쪽 '남은 물')
"죽은 줄 알았다는 부주의의 주변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힘들이 안간힘을 다할 때"
"새떼가 대륙을 건너갈 때/ 가수면 상태로 날 수 있다는 문장 위에 (130쪽 '백만분의 1그램')
"어떤 사람을 떠올리기 위해 노거수를 바라보는 일" "나는 그럼으로써 사랑을 더 크게 만드는 중이다" (144쪽 '무한 학습')
속엣말과 현실어와 시어가, 비와 눈보라와 바람처럼 바로 지금 '같이' 노래하는, 정말 김소연 詩人은 詩로서 실존하고 현존하는구나, 아름다운 탄식이 춤처럼 흘러간다. '그녀가 그녀를 위하여 그녀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