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국토대장정

 

 

 

 

                            모든 길은 확정적으로 주어졌다

                            깃발은 19세기식 수염을 휘날리면서

                            쁩쁘쁘 트럼펫을 부는 구름의 입술들

                            귓전에서 따갑게 손뼉 치는 가로수 가지들

                            사흘째부터 우리는 서로 말을 잃었다

                            사흘째부터 취침 시간에는 어머니 사랑해

                            소감문에 적어야 할 명단만 늘어났다

                            잘했어 이제부터 너희는 빛나는 청춘이야

                            이마에 도장을 꽝꽝 찍으며

                            아침부터 태양은 머리 위에서 홍알거렸고

 

                            이력서 한 줄처럼

                            각자의 땅만 내려다보고 묵묵히 걸어간 동안   (P.25 )

 

 

 

 

 

 

                            국지성

 

 

 

 

                              우리에게도 집중력은 있지만

                              우리에게 집중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만 집중되길 바란 건 아니었으나

                              우리의 공부와 무관한 곳에서 대학 건물은 올라가고

 

                              초고층 주상복합을 보고 온

                              할아버지는 역시 고성장 시대야, 너만은 키가 커라

                              소년의 다리를 자꾸 잡아 늘였습니다

                              관절의 부드러움을 위해

 

                              아파? 괜찮아 얘야, 노동은 유연성이라더구나

                              발라봐, 발라봐, 오일이란다, 쇼크는 없단다, 할배는 머니

                              라 부른단다, 할머니를 줄여 그리 불렀단다, 투자하면 돌아

                              오잖아, 너도 장차 여자를 만날 때는

 

                              할아버지, 제가 돋보기로 놀길 바랐셨나요

                              검은 종이를 태우는 건 재미있지만

                              선택과 집중으로 벌레를 태워 죽이긴 싫어요

                              죄송합니다, 지금도 저는 매미를 못 잡습니다, 무능합니다

                              저를 벌레 보듯 하는

                              공터에는 돋보기를 쓴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하느님, 당신조차 이제는 시력이 나빠지셨습니까

                              골고루 비를 나누소서

                              당신이 든 태양은 돋보기처럼 말이 없다가

                              한쪽에선 폭염이,

                              한쪽에선 폭우가.  (P.26 )

 

 

 

 

 

 

                              부지깽이 소셜 클럽

 

 

 

 

 

                                누군가 엉덩이를 툭 치고

                                누군가 귀에 바람을 불어 넣고

                                벽에 붙어 당신은 후끈댔어

                                벽을 킁킁 쳐대며

                                불꽃처럼 당신은 아무 곳으로나 흩어졌다

 

                                영혼을 들쑤신 자 누구나

                                구식 사이키 조명에 따라

                                비보이의 엉키는 스텝에 따라

                                드라이아이스 연기에 갇혀버린지 오래

                                누가 단속이라고 외치면

                                모두 덜덜 얼어붙는 순간

                                당신은 혼자 잘 타는 숯덩이

                                당신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 테이블로 운반해줄께

 

                                - 다 같은 놈들인가요

                                신선한 이분을 찍어주세요, 부킹!

 

                                자정이 되면 당신의 주사는 시작된다

                                기호 1번 2번 또 몇 번을 달고

                                무대에 올라 당신은 고래고래 소리치지

                                사람들은 얼씨구나 춤추고

                                나는 먹다 버린 과일의

                                표면만 살짝 깎아 공약처럼 새 안주로 내놓고

 

                                자, 거짓말 같은 밤의 쇼가 끝나갑니다

                                집으로 돌아들 가세요

                                우리도 내일 장사를 준비해야지요

                                새벽에 야시장에서 사과 박스가 온답니다

                                안에 든 게 뭐냐구요? 제대로 안주를 달라구요?

                                어이 고릴라, 부지깽이 들고

                                이 손님 좀 저 끝방으로 모시고 가!  (P.50 )

 

 

 

 

 

                                                                -박강 詩集, <박카스 만세>-에서

 

 

 

 

 

 

 

 

 

 

 

 

2007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박강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박카스 만세』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 후 6년 만에 내놓는 첫 시집으로 표제작 「박카스 만세」를 비롯해 총 60편의 시를 담았다. ‘갑을사회'에서 '88만원 세대'로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비애를 현실적인 시어와 현장감 넘치는 이미지로 표현한 『박카스 만세』는 “모든 희망을 담지한 주체인 갑으로부터 국지성 혜택의 한계 조건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을로 바뀐 삶의 내력이 심리적으로 구조화되는 과정을 리얼한 관찰과 적실한 이미지”(조강석 문학평론가)로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박카스”, “우루사” 등 ‘피로 완화’를 연상시키는 언어들을 동원해 역으로 회복 불가능한 현대인들의 피곤함을 포착한 것이 눈여겨볼 만하다. 박강의 시 세계에서 이러한 피로를 유발하는 것은 계급적 좌절감이다. 시민에서 민중으로 올라갔다 서민으로 내려와 살아가는 서글픔을 드러낸 「위생의 제국」은 정치.사회적 주체인 시민이 역사.철학적 주체인 민중으로 고양되었다가 경제적 객체인 서민으로 전락한 것이 청년 세대가 느끼는 불안의 실체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서민들의 마음에 내재화된 심리적 강등의 구조물이 바로 박강의 시이지만, 한편 추락을 조롱하고 낭만을 응용함으로써 한 줌 희망을 삶에 적용하는 것 역시 박강의 시다. 절망을 소망으로 이겨내는‘을’들의 노래가 우리 시대의 피로를 어루만져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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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8 11:39   좋아요 0 | URL
서로서로 손잡고 이 나라 이 땅 두 발로 디디면 세상이 달라지겠지요...

appletreeje 2013-06-29 09:38   좋아요 0 | URL
예, '서로서로 손잡고' 이 땅을 함께 두 발로 걸어가다보면
세상이 달라지리라 희망합니다...

2013-06-28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이란 놀라우리만치 짧다. 이제 기억 속에서 삶은 내게 다름과 같은 정도로 응축된다. 예를 들어 평범한 삶이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 하나 없이 행복하게 흘러간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나는 어떻게 한 젊은이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거라는 염려 없이 말을 타고 이웃마을로 가겠노라 결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카프카가 우리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이웃마을>이라는 제목으로다른 글을 썼을까? 물론 문제는 이웃마을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혁명의 달리기를 혼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다니, 쯧쯧.....혁명의 달리기는 이어달리기인 것을, <이웃마을>에 대한 브레히트의 해석이었다. 앞만 보고 나아갈 때 삶은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삶은 뒤에서부터 앞으로 흝어 내리는 책이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죽음의 침상에 누운 당신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이미지들, 그게 바로 완결된 삶이다. <이웃마을>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이었다. 나에게 '이웃마을'은 '이웃'인 당신의 '귀'로 보인다. 불행한 우연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해도 전언이 도달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의 귀. 목소리는 이웃인 당신의 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돈다. 당신의 귀에 가 닿고 싶고, 당신의 따스한 심장에 깃들고 싶다. 그러나 이웃인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전언을 보낼 때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윤리적 주체로서 내가 할 일이다.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전언이 나를 향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하고, 가능한 제대로 이해하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내세울만한 나의 공로로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됨 역시 내가 보낸 전언을 수신해준 누군가에 기대고 있음을 통렬히 깨달은 결과여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후기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선전하는 핑크빛 행복 속에서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언은 점점 더 자주 실종되고 답변을 기다리는 송신자의 가슴은 점점 더 타는 목마름으로 바스러진다. 전언이 품고 있는 삶의 시간과 장소를, 그 구체성과 개별성을 오롯이 살펴 듣는 '나의 이웃'을 희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욕망인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새겨듣는 이웃이 여기 있다고 말한다. 새겨들은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이웃에게 전송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언들이 발화한 사람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 하는 건 아니다. 이 전언들에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듣는 사람의 귀/목소리가 서로 섞여 있다. 이 글들에는 조금씩 미끄러지고 지연되는 타자 인정과 서툰 관계 맺기의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그러나 심장의 온기를 담아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투영할 수 없는 자아와 타자가 만나 말을 하고 듣는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송신과 수신 사이의 불완전한 연결은 물질적인 환경 이상의 것이다. 의미한 것과 이해한 것 사이의 간극은 모든 소통행위의 존재론적 한계고 이 한계야말로 자아의 윤리적 주체성이 구성되는 출발지점이다.   (P.5~7 )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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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7 21:42   좋아요 0 | URL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끼리
어깨동무를 하면서
서로 돕고 서로 아껴서 서로 사랑하지요.

차별을 없애는 길은
작은 사람끼리 손을 잡는 데에 있다고 느껴요.

appletreeje 2013-06-28 09:32   좋아요 0 | URL
차별을 없애는 길은
작은 사람끼리 손을 잡는 데에 있다.-

그런데 때때로 작은 사람들끼리도
손을 잡지 않을 때도 많아 슬픈 세상입니다..

2013-06-27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8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6-28 09:46   좋아요 0 | URL
요즘은 소통이 화두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심한 불통의 시대이기 때문이라 생각되더라구요.
이 책 차별이라는 송신이 수신자에게는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
조금은 마음을 열고 차별이 아닌 이해의 시선을 타인에게 보여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편집과 구성이 매우 탁월했던 것 같아요 ㅎㅎ

appletreeje 2013-06-29 09:04   좋아요 0 | URL
결국,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은
저 사람은 나랑 다르지만, 저 사람도 나랑 같은 사람이고 주체라는
마음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는 일이라 생각 들어요.

'너무 붙이지도 않고 너무 떨어뜨리지도 않게'-
그리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삭제된 채 허공에 붕 뜬 '착한' 소수자들을 사회적 변화의 주체로 맞이하고 그 노력을 함께해나갈 수 있는 장소를 열어나가는 것이 반차별운동의 중요한 역할이겠지요.

히히..드림님의 이 책의 리뷰가 늘 그랬듯이
특히 마음에 많이 와닿았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

숲노래 2013-06-30 15:41   좋아요 0 | URL
작은 사람 스스로 작은 사람인 줄 생각하지 못하면
큰 사람이 되고픈 생각에 스스로 괴롭히고
이웃과 동무도 힘들게 하지요.

그래도,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으로 돌아와서
큰 사람(이를테면 공룡)들로 이루어진 세상은
머잖아 무너지고 마는 줄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appletreeje 2013-06-30 16:51   좋아요 0 | URL
히히..저는 작은 사람끼리
서로 아끼며 다정하게 사랑하며 살아 갈래요. ^^
 

 

 

 

 창밖에서, 허스키하고 은밀 다정한 ' 아~옹!' 소리가 나 화들짝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담장 목련나무, 옆집의  어두운 구석 창고 앞에서 시커멓고 커다란 수컷 고양이 한 마리 안에다

대고 노래를 하는 중이다. 왠지 반갑고 좋아서 나도 그애에게 '야~아~옹!' 인사를 하니 휙 나를

초록눈으로 올려다 보더니 스윽 뒤를 돌아 저벅저벅 걸어 그 집 대문을 통해 점잖게 나가 버린다.

아요..너 왜 그러니..난 네가 좋아서 야옹,했는데..ㅠ.ㅠ  그렇게 숫기가 없이 점잖아서 어디

사랑은 하겠니?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괜히 녀석의 구애를 본의아니게 훼방 놓은 듯 해 무척

 미안 쏘리, 하구나.

 이 녀석은 참 점잖은 고양이다.

 어느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 고양이는 구애중 이렇게 내가 부르면 휙~고개를 돌려 노려보며,

 낮은 음성으로 '야아아..옹!!' 성질을 내며 끄덕도 않고 계속 애인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는데 비해

 좀 전의 초록눈의 깜장 고양이는 참 점잖구나..에구..점잖기만 해서 다 좋은 건 아닐텐데..사내

 가 뚝심도 있고 밀어부치는 박력도 있어야 애인을 품에 안을 수 있을텐데..에이구, 이 또 무슨

 아침부터 오지랍퍼 근심을 떠는 나..ㅠ.ㅠ

 문득, 지난 겨울 눈 내리는 밤길을.. 늙고 병든, 다리도 절뚝이고 눈도 애꾸눈이고 꼬리도 짤린

 과거 동네짱이었던 늙은 남편고양이와 이 골목 최고 얼짱녀인 미모의 그녀 고양이가 함께

 눈 위에 발자국을 나란히 찍으며.. 걸어가던 아름다운 뒷모습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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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7 09:34   좋아요 0 | URL
고양이와 놀면서 하루를 여는 아침이로군요!

appletreeje 2013-06-27 09:44   좋아요 0 | URL
녱..!^^ 야~옹..ㅎㅎ

드림모노로그 2013-06-27 10:21   좋아요 0 | URL
고양이와 노는 나무늘보님의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ㅋㅋ
생후 40일된 슈나이저가 아랫 집 고모네 입양되었는데 ㅎㅎ
생긴 것이 딱 고양이 같이 생겼습니다 ㅋㅋ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네요 ㅋㅋ
하는 짓이.. 꼭 그....
늘 그렇듯이 행복한 하루 되세요 ㅎㅎ

appletreeje 2013-06-27 10:47   좋아요 0 | URL
ㅋㅋ,
슈나이저~!! 저도 슈나이저 좋아해요. 생김새가 마치 영국신사같고 토이같기도 해서요. ^^ 근데 3대 악마견, 비글 코키와 함께..ㅋ
평소 삶이 좀 지루하신 분들께 리얼리틱 생기와 활력과 고민을 삼종세트로 선물해주는 구여운 강아지죠.~^^
하는 짓이..꼭 그... 뭐요, 뭐요..? ㅎㅎ

드림님! 오늘도 즐겁고 좋은 하루 되세요.~

수이 2013-06-27 12:44   좋아요 0 | URL
친구네서 고양이 봤다가 완전 여신과 같아서 그 미모에 홀딱 반해버렸어요;;;;
둘째를 포기하고 고양이를 키울까 생각중이에요;;;;;;;;; 후훗


appletreeje 2013-06-27 13:24   좋아요 0 | URL
터키 앙고라나 페르시안 고양이는 정말 우아하고 여신같죠~^^
느무느무~ 예뻐요.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 울 로미도 페르시안이었는데..ㅠ.ㅠ

앗, 그래도 둘째를 우선 보시고, 그 후에 고양이를 키우셔야죠~~ㅎㅎ

보슬비 2013-06-28 22:44   좋아요 0 | URL
저도 고양이들 보면 '냐옹'하게 되더라고요. 가끔은 눈인사도 나누기도 하는데, 제대로 먹히기는 힘들지요. ㅎㅎ 그래도 가끔 이웃사는 고양이가 다리 비벼줄때 좋았는데, 토토가 엄청 짖어대서 오래있지는 못하더라고요.

신사고양이 맘에 들어요.

appletreeje 2013-06-29 09:14   좋아요 0 | URL
고양이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자기과 싸우자는 의미로 생각한데요.
그래서 저는 실눈을 뜨며 '야~옹. 야~옹~' 부르면 아주 가끔 드믄 일이지만 상대고양이도 함께 눈을 가늘게 뜨며 깜박깜박 인사를 하는데 일명,
'고양이 키스'라 하지요. ㅋㅋ

저도 그 날의 그 점잖은 녀석이 많이 마음에 들어 왔어요. ^^
 

 

 

 

 

 

                      마르세유

 

 

 

 

 

                         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부두에 어시장이 열리지 않는다

                         오반느 길에는

                         레전드 야매 담배가 3유로이고

                         그 옆에는 싸고 맛좋은 피자집이 있다

                         로마시대 조선소 박물관은

                         재개장 날짜 약속을 몇 번이나 어겼으며

                         햇볕을 찾아 나설 때 스쳤던 사람을

                         백화점에서 다시 스친다

                         집 앞에 있던 차는

                         파로 공원 앞길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어둑한 길가에서 돈을 찾으러 코드를 누르던 영감이

                         오늘은 바케트를 끼고 지나간다

                         소리소리 지르던 그 거지는

                         자기 벤치를 떠나 이사를 갔고

                         관광객은 여전히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사진을 찍어댄다

                         카페의 늙은 가르송은 철물점에서 나사 못을 고르고

                         카시스에는 시를 선물로 적어주는 가게가 있으며

                         마르세유와 카시스를 오가는 버스 운전수는

                         길모퉁이 브리스 옷집으로 들어간다   (P.16 )

 

 

 

 

 

 

 

                       나는 어디에 가 닿을 것인가

 

 

 

 

                          생각나니?

                          나 원래 동주였던 거

                          릴케였다가

                          푸시킨이었으며

                          네루다였다가

                          수영이었던 거

                          두진이었던 거

 

                          시인처럼 슬픔이 깊어지기를

                          명수처럼 쓸쓸한 시가 내게 오기를

                          정만처럼 신들린 듯 시를 써대다가.....

 

                          이들 모두의 숨죽인 밤들이

                          내게 등불이었음을.

 

                          그 불빛 아래

                          나 아직 언 손을 부비우나,

 

                          사랑을 잃고도 살았으며

                          더 쓸쓸해지기 전에 발길을 돌리고

                          여전히 내일 쓸 체력을 걱정하는 중이니

 

                          나 어디에 가 닿을 것인가?   (P.22 )

 

 

 

 

 

 

                      체 게바라

 

 

 

 

 

                           게바라가 왔다

                           오래된 항구 마르세유에

                           자신의 얼굴 사진이 찍힌 가방을 팔러

                           가난한 인민들이 모두 나와

                           열광하는 일요일 아침 벼룩시장에

                           게 게바라*가 왔다

 

                           빛나던 청춘은 남아메리카 산중에 묻어두고

                           자본 폭발중인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혁명이 시장을 거쳐 모드로 바뀐 걸 아느냐며

                           이 가게 저 가게 기웃댄다

 

                           그의 혁명 조국은 여전히 가난과 자부심이 넘치고

                           그의 혁명 동지 피델 카스트로는 연로하여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입원 가료중인 이때

                           세상 모든 것이 비주얼로, 모드로 자리를 바꾸는 이때

 

                           내 청춘에 꽂혀 펄럭이던 깃발은

                           현란한 비주얼의 복판에서

                           게 게바라로 팔린다

 

                           먼 곳을 바라보는 몽상적인 눈빛

                           단돈 10유로   (P.40 )

 

 

                            *Gue Guevara. Che Guevara의 중국산 유사상표.

 

 

 

 

 

 

                      전조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노신의 수상록이 있었지

 

                            그 책을 읽고 싶다

                            한 번은 읽었을 텐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없고

 

                            나는 그 책을 버린 것 같다

                            잡지 등등과 한 묶음으로

                            집 앞 쓰레기통에 내놓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살았다

                            그리고 나는 여러 꽃들을 보았지만

 

                            내일의 꽃을 본 적은 없고

                            저녁에 그 꽃을 주워본 적도 없다

 

                            빨리 돌려본 필름 속처럼 바삐 살며

                            나는 어느 때 꽃을 잊었으리

 

                            세월이 한참을 지나는 지금

                            아침 꽃을 왜 저녁에 주워야 하는지 알게 된 지금.....

 

                           "꽃은 내일 필 것이다"

                            그래, 그 영원한 전조로서의 삶을 알 것도 같은 지금   (P.46 )

 

 

 

 

 

                                                 -손월언 詩集, <마르세유에서 기다린다>-에서

 

 

 

 

 

 

 

 

 

 

 

 

 

 

● 편집자의 책 소개

교정지를 통톡하는 내내 나는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한 남자의 초상을 떠올렸다. 나이가 실제보다 많아 보이기도 젊어 보이기도 하는, 우렁찬 듯 촉촉한 눈빛을 가진 남자. 그가 십수년 세월 동안 파리 근교와 마르세유를 오가며 응시했을 낯설지만 푸근하고, 아름답지만 쓸쓸한 어느 시간의 손때 묻은 풍경들. 이국의 지인이 보내온 염장 맞을 우편엽서 같다가도 이내 공간 경계를 넘어 똑같은 품격과 물성으로 인간 공통의 환부에서 어혈을 추스르는 물파스 같은 시선의 잔향들. 일상의 속됨과 고결함을 같은 페이지 무게로 뒤적이며 현재와 과거, 고향과 타향의 물리적 변이를 감싸려드는 느긋하고 차분한 음성의 결들…… 손월언의 시들은 내게 그렇게 보이고 들리면서 때로 크고 따뜻한 손이 되어 순전히 자워적일 수밖에 없는 영혼의 체기를 달랜다. _강정, 발문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죽는 대로 죽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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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6 10:40   좋아요 0 | URL
관광객이라면 사진을 찍지 않고는 아무것 남길 수 없으니
사진을 찍을밖에 없으리라 생각해요.

길손이나 나그네라면 마음에 담을 테니
굳이 사진을 안 찍겠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시를 쓸까요...

appletreeje 2013-06-26 17:51   좋아요 0 | URL
사진을 찍든 안 찍든 저마다 바라보고 느끼고 간직하고 싶은
풍경과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세계와 자신을 둘러싼 공감이나 사랑 좋은 꿈 좋은 마음이
과실처럼 무르익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흘러 넘칠 때, 시를 쓰지 않을까요..^^

2013-06-26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래된 신발

 

 

 

                              1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들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

                             드럽게 흙을 묻히고

                             재수 없게 똥도 밟아보고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에도 풍덩 빠져보고

                             빙판에선 꽈당 미끄러져도 보고 싶은

                             오래된 신발 한 켤레.

                             24년째

                             흙 한톨 묻혀보지 못한 채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들고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발에 신겨 있다고 다 신발인가

                             제 발로 길을 걸어가야

                             제대로 된 신발 노릇 하는 게지

                             죽기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거나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

                             마비된 사지(四脂)를 싣고

                             흰 구름처럼 둥둥

                             땅 위를 떠다니는 꿈이여!

 

                              2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는 짚신을 버렸고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버렸고

                             지난겨울

                             막내 동생도 현관에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영영 떠나버

                           렸다

                             나도 언젠가 너를 버려야 하리

                             대문 밖

                             허공 속으로 길게 난 발자국들이

                             저렇게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P.18 )

 

 

 

 

 

                           봄비

 

 

 

 

                                꽃이 피면 핀다고

                                좋아라, 깔깔거리며

 

                                꽃이 지면 진다고

                                슬프다, 눈물 지으며

 

                                피면 피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울고 웃는 사람 하나 있어

                                나는 그냥 좋더라

 

                                그런 사랑 하나 내 가슴에 살고 있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더라   (P.26 )

 

 

 

 

 

 

                         불편한 이웃

 

 

 

 

                               배롱나무 속에서 쓰르라미가 운다

                               배롱나무 꽃은 매일 밤낮을 피고 지는데

                               자신의 박복한 운명을 탄식하는 듯

                               목을 놓아 쓰르라미가 운다

                               겨우 보름 남짓을 살면서

                               씹 한 번 하고 죽겠다고

                               피를 토하며 쓰르라미가 운다

                               그래야 자신이 인내한 시간이 의미가 있고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그 길이 곧 황홀한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쉼 없이 절규하는 쓰르라미

                               어쩌면

                               생(生)은 울다 가는 것이라고 넋두리하며

                               씨-입 씨-입 씨-입......

                               하루종일 각혈하는 쓰르라미 때문에

                               더욱더 얼굴 붉히며 피어나는

                               민망한 배롱나무 꽃,

                               배롱나무 꽃들   (P.100 )

 

 

 

 

                                                                -황원교 詩集, <오래된 신발>에서-

 

 

 

 

 

 

 

 

 

 

 

 

 시인 황원교는 1959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강원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ROTC 21기 포병장교로로 임관, 전역을 했다.

 1989년 3월, 모 생보사 인사부 대리로 근무하던 중 결혼 1주일을 앞두고 당한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영구장애를 입었다. 그 뒤 온갖 후유장애와 합병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던 차에 1995년 5월, 7년간을 곁에서 수발해주시던 모친의 급작스러운 별세로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극심한 공황 상태를 극복하고자 입에다 마우스 스틱을 물고 컴퓨터 자판을 한 자 한 자씩 쳐가며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과 2000년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1년 첫 시집 <빈집 지키기>와 2006년 두 번째 시집 <혼자있는 시간>을 출간했으며 현재는 충북 청주에 거주하며 '우리시 '동인으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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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5 15:35   좋아요 0 | URL
굼벵이 같지만 굼벵이 아닌
새로 태어나는 나날
천천히 누리며
이렇게 마음속에
고운 시를 품을 수 있구나 싶어요

또 여름비가 오는군요

appletreeje 2013-06-25 17:02   좋아요 0 | URL
진주조개의 눈물인 진주,같은
시인의 시들입니다..

지금 이곳도 여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2013-06-25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6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3-06-26 20:46   좋아요 0 | URL
최근에야 hnine님 서재를 통해 '배롱나무'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읽고있는 소금에서도 배롱나무가 나와서 반가웠는데, 나무늘보님 시에도 배롱나무가 나와서 더 반가웠어요.

어쩜 자주 접했던 이름일지 모르는데, 모르고 있을때는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알고 나니 반가운것을 보니 꽃이나 나무나 이름을 많이 알아두어야할것 같아요. ^^

appletreeje 2013-06-26 21:20   좋아요 0 | URL
배롱나무,는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하고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여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