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오월의 너는 마음과 씨름을 하는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목이 간지러운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옷의 주머니를 꺼내보는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한낮에도 꿈을 헤매는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다시 눈부터 움직이는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넘어졌다가 꽃잎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다
오월의 너는 아침 공부를 마치고 새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P.78)
바람의 언덕
그런 언덕이라면
좋겠습니다
구부러진 길
끝에서도 내다보이는
발보다
눈이 먼저 닿는
중간중간 능소화 얽힌 담벼락 이어져
지나는 사람마다 여름을 약속하는
젖어도 울지 않는
바람도 길을 내어
사람의 뒷말 같은 것이 남지 않는
막 걸음을 배운 어린아이도
허공만을 쥐고 혼자 오를 수 있는
누군가는 밤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아침으로 기억해서
새벽부터 소란해지는 (P.40)
아껴 보는 풍경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지만 좀처럼 구경을 가는 법이 없다
지난 봄에는 구례 지나 하동 가자는 말을 흘려보냈고 또 얼
마 전에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들판을 둘러보자는 나의 제
안을 세상 쓸데없는 일이라 깎아내렸다 어머니의 꽃구경 무
용 논리는 이렇다 앞산에 산벚나무와 이팝나무 보이고 집
앞에 살구나무 있고 텃밭 가장자리마다 수선화 작약 해당
화 백일홍 그리고 가을이면 길가의 국화도 순리대로 피는데
왜 굳이 꽃을 보러 가느냐는 것이다 만원 한장을 몇 곱절로
여기며 살아온 어머니는 이제 시선까지 절약하는 법을 알게
된 듯하다 세상 아까운 것들마다 아낀다는 것이다 (P.44)
소일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두어장씩
넘겨가며 읽었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직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호숫가 마을에
막 도착한 대목에서
책을 덮습니다
귀퉁이를 잇새처럼
좁게 접어둡니다
바람이 크게 일고
별이 오르는 밤이면
우리가 거닐던 숲길도
깊은 속을 내보일 것입니다 (P.24)
/ 박준 詩集, <마중도 배웅도 없이>에서
어쨌든 오월, 바람이 부는.
해마다 다시 오는, 그리운 사람 같은 오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