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남자는 늙지 않는다 - 근엄한 남자보다 가슴 뛰는 남자가 오래 살 수밖에 없는 젊음의 비밀
와다 히데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할아버지가 향수를 뿌리면 전두엽이 젊어진다?   



  조두진의 소설 중에 <마라토너의 흡연>이라는 단편이 있다. 다소 역설적인 이 제목은 사실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소설 속 주인공은 ‘마라토너가 흡연을 해서 되겠는가‘라는 세인의 우려와는 반대로 흡연을 하기 위해 마라톤을 뛰는 사내다. ’그렇게까지 하면서까지 담배를 피워야겠냐‘ 비아냥거릴지 모르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지극한 담배에 대한 사랑과 단명短命으로 인한 가계부양의 책임간의 적당한 타협안인 듯 해 ’그것참 대단하다‘고 나는 탄복했다.

  그 무엇이든 ’금지당하는 욕망‘은 자체가 괴로움이다. 새해를 맞아 당당히 금연을 선언했지만 흡연의 욕구를 참지 못해 몰래 숨겨피우며 스트레스를 자처한 남성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거짓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흡연의 해악‘ 못잖게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생각든다. 정 담배가 피우고 싶다면 ’마라토너‘가 되어보는 건 어떨지...

  흡연 뿐 아니라 한 살씩 나이가 더해질 때마다 줄이거나 금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연장자가 될수록 책임과 의무는 늘어나는 반면 개인적 욕망추구는 해서는 안될 ‘짓’이 되어 버린다. 가정이나 조직의 구성원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 먹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항변한다. “나이먹는 것도 죄냐?”고.

  책 <철없는 남자는 늙지 않는다>의 저자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마라톤을 해서라도 담배를 피우겠다면, 그렇게 하세요. 욕망을 참지 마세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래야 안 늙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철이 든다’는 것은 ‘얌전해진다는 것’이요, ‘얌전해짐‘은 곧 ’늙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장년층을 전문으로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이에 대해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늙었다‘는 표현은 의학적 소견으로는 ’전두엽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목은 人は「感情」から老化する - 사람은 감정으로부터 노화된다 



 

  전두엽前頭葉은 과연 무엇일까? 전두엽은 대뇌의 앞부분에 위치한 뇌의 일부로 사고, 의욕, 감정, 성격, 이성 등을 담당하는데, 나이를 먹으면 이러한 기능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기분이 나쁘면 화를 내고 싸우는 등의 감정표현을 하는 것은 뇌의 변연계에서 담당한다. 전두엽은 그보다 좀 더 섬세한 감정이나 감정에 바탕을 둔 수준 높은 판단을 담당하는 이른바 감정의 사령탑이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고 감동하거나 거기에서 촉발된 감정적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전두엽의 활동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두엽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여 젊게 유지한다면 노인이 아닌 ‘젊은 오빠’로 오래동안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전두엽의 노화는 빠르면 40-50대부터 시작되는데, 전두엽이 노화하여 기능이 떨어지면 자발성이나 의욕이 쇠약해진다. 다시 말해 노화 예방에 흥미를 보이지 않거나 외모에 관심을 두지 않아 늙어지는 대로 방치하고 있다면 전두엽의 노화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젊은 노인’과 ‘진짜 노인’의 차이는 ‘의욕’의 차이에서 시작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며 이렇게 말했다. 

“감정이 노화하면 ‘귀찮아’, ‘이제 이런 일은 하기 싫다.’ 같은 말이 입버릇처럼 튀어나온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도 자주 하게 된다.

“더 이상 똑똑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 나이에 무슨...이 정도면 충분해.”

이런 식으로 스스로 노화를 인정하고 기회를 포기해 버린다. 삶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중략)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해서든 ‘귀찮아’, ‘힘든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아.’ 따위의 말만 내뱉는다면 이제 당신은 정말로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잊지 말라. ‘욕망’을 유지하는 것도 감정의 노화와 싸우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본문 42쪽)

  저자의 말대로라면 ‘젊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체’는 ‘의욕’이 되고, 이 ‘의욕’이 전두엽을 활성화시켜 더 이상 늙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다. 저자는 체력뿐만 아니라 두뇌의 기능과 감정 역시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쇠약해진다고 경고했다. 자극이 없는 생활을 계속하면 감정은 녹이슬어버리는데, 뇌과학적으로는 전두엽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자연히 축소되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감정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쇠약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감정을 자극하는 생활’을 유지해야 좀 더 젊게 살 수 있다.   


 한편 전두엽을 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때 국내에 큰 히트를 쳤고, 지금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닌텐도 DS라는 게임기에는 <뇌를 단련하는 성인용 DS 트레이닝>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있다.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인기리에 팔린 바 있는데, 이와 비슷한 두뇌 능력 개발 소프트웨어 등은 뇌의 혈류량을 증가시켜 전두엽의 활성화하는 일정한 효과는 기대할 수 있지만, 단지 워밍업이고, 자동차 엔진을 켜 놓았을 뿐 차가 그대로 멈추어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이렇게 전두엽을 자극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감정의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전두엽을 젊게 하려면 활동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며 “무슨 일이든 의욕이 없는 사람과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슨 일이든 우선 행동으로 옮겨 보아야 다음에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기 쉽고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TV에서 음악회를 듣는 것보다 직접 음악회를 찾아가 듣는 것이 좋고, 역사프로그램을 시청하기 보다는 역사적인 명소를 직접 찾아가는 것이 좋다. 낮선 문명과 문화를 직접 행동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두엽을 활성화시키기에는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먹고 살기도 바쁜 요즘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행동으로 얻는 자극을 위해서는 시간적,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부유한 사람들이 유리할 수 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이 인상이 편안해 보이고, 좀 더 젊어보이는 이유 역시 자신을 꾸미고, 새로운 것을 자주 경험할 기회를 얻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만 젊어지란 법은 없으니,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도 젊어질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일상에서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하고 그동안 주저했던 일을 해보면 전두엽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 자주 가던 음식점을 마다하고 새로운 곳에서 외식을 하거나, 이발소을 떠나 미용을 찾고, 때로는 나이트 클럽이나 카바레 등을 찾아가 술을 마시는 방법도 좋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범죄가 아닌 한 무엇이든 도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뇌가 젊어지는 방법은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책을 살펴보건대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이 나이에 무슨...’ 혹은 ‘나잇값을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제 스스로 고려장을 치루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늙어감을 거부하고 운동하고, 화장하고,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보기엔 어색하고 불편할망정 전두엽에 자극을 주어 최소한 뇌는 노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날에 와서 유교가 폐해를 끼친다면 ‘늙으면 점잖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다. 

  오늘날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노화는 빨라지고, 의학의 발달로 노화의 진행은 더뎌지는 사회다. 나이 육십을 갓 넘겼다고 잔치를 벌이는 옛날은 더 이상 없다. 세상은 변했는데, 노인에 대한 사고는 여전해서 40-60의 장노년층이 천대를 받는 세상이 오늘날인 듯 싶다. 황진이의 시조처럼 산을 넘어가는 초승달을 나뭇가지에 걸어둘 수도 없는 것이 노화이거늘, 이것을 감지했다고 당황하거나 좌절해서야 되겠는가? 잘 알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노화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더디가게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해결책 역시 자기계발의 그것과 답이 매한가지다. 실천과 꾸준한 노력, 그것 뿐이다. 치매와 기억력, 노화에 걱정하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뇌과학적 지식을 쉽게 풀어냈다.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도 여러분이 갖는 궁금증 정도는 해소시킬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로드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본문 p.64)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이 없어졌다. 아니 세상이라는 단어조차 사라진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마지막 단어인 '남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가슴 속에 살아있는 불꽃을 안고...


  암울한 소설. 너무나 어둡고 암울해서 습기가 눅진거리는 지난 여름의 계절감마저 잊게 했던 소설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초반에 '이건 아니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려놓았다. '좋은 것도 다 못보고 죽는 세상, 싫은 건 억지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는 소신으로 살아온 내게 '우울한 기분'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왜 였을까? 지리한 장마비가 처량하게 들렸던 탓일까?

며칠 후 늦은 밤 나는 또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밤이 하얗게 된 후에야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차라리 죽음이 나을 법한 곳에 어린 자식을 홀로 두고 죽어간 아비가 불쌍해서, 내가 그곳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란 안심에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날이, 그런 상황이 내게도 닥친다면 난 어떻게 할까? 좋은 사람이 될까, 나쁜 사람이 될까? 내게도 불꽃이 남아 있을까, 그럼 난 어디로 갈까? 내 옆에는 과연 누가 있을까?  

소설의 리뷰 - http://blog.daum.net/tobfreeman/7162723
 

  무수한 여운과 자문을 던져준 소설, 로드The Road는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개봉을 기다렸다. 개봉한 첫 날, 그 어두운 세계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다시 <더 로드the Road>를 만났다.
 










 

좀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화 된 소설'은 애써 찾아 읽는 편이다. 그 말은 곧 글 속에 '충분한 영상미'를 가지고 있고, 통속적이지만 무시하지 못할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작인 소설과 각색된 영화 사이에서 그 차이점을 찾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형만한 아우없다'는 말처럼 원작을 따라가는 영화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래서 영화를 볼 요량으로 소설을 우선 읽지만(영화를 본 후에는 절대로 소설은 읽지 않는다), 잘된 작품을 만나면 영화를 보기가 두려워진다. 원작을 얼마나 잘 소화해 낼지 감독이 의심스럽고, 배우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부러 영화를 보러 갔다가 '원작에 누가 된 영화'를 본다면 그 실망감은 분노로까지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참고로 지난 해 봤던 연을 쫓는 아이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작품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 <더 로드> 역시 원작이 보여준 영상을 그대로 소화한 보기드문 영화였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개성파 배우 비고 모텐슨의 풍부한 감정연기는 특별할 것 없는 대사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감정표현은 울음, 눈물이었다. 그리운 아내가 그리워도 울고, 깊은 밤을 편히 보낼까 하는 두려움에도 눈물이 흘렀다. 우연히 찾은 지하대피소에 그득한 음식들을 대한 그 때도 어김없이 눈물이었다. 아버지의 희노애락을 대신했던 눈물을 비고 모텐슨은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비슷한 상황을 연출했던 윌 스미스의 <나는 전설이다>가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시종일관 '동일시'하게 하는 묵시록적인 영화였다. 암울한 배경, 두려움이 벗어나지 않는 배우들의 표정에 한기를 느껴 앞섬을 추켜올리게 했다. 그렇다, 동일시同一視. 영화 속에 내가 들어 있었다. 내가 그라면, 저 세상아닌 세상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난 그냥 죽어버릴 것 같아."라는 그녀의 명쾌한 대답에 모두 벗어버리고 떠나간 아내(샤를리스 테론)이 떠올랐다.
 

"그건 아니지. 개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목숨이 있는 한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뭐 할껀데? 아무런 희망도 목표도 없는데 뭐할려고? 오빠도 그냥 남쪽으로 내려가?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데, 왜냐면 답할 말이 없다.

그냥 살고 싶단 말 밖에는...
 



"난 오랫동안 불을 보지 못했소. 그뿐이오. 나는 짐승처럼 살고 있소.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알고 싶지 않을 거요. 저 아이를 봤을 때 난 내가 죽은 줄 알았소.

천사인 줄 아셨나요?

뭔지는 몰랐소. 그냥 다시는 아이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저 아이가 신이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제 그런 건 다 넘어섰소. 오래 있었거든.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가 없소. 당신도 알게 될 거요. 혼자인 게 낫소. 그래서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오. 마지막 신과 함께 길을 떠돈다는 건 끔찍한 일일 테니까. 그래서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거요. 모두가 사라지면 좀 나아지겠지."

 

  아이가 존재할 수 없는 세상, 희망이 담긴 불꽃이 없는 세상이다.

병이 들어 죽어가는 아비는 평소대로라면 남겨진 자식의 미래가 두려워 함께 가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거라, 얘야." 바로 살아있음이, 아이의 생명이 '가슴 속에 불타는 불꽃'인 것이다. 신도 포기한 듯한 버려진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은 실존이다. 살아있기에 살아야만 한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 '좋은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이 생生에 남겨진 숙제인 것이다.

 

  무서울 만큼 놀라운 영화, 원작에 견줄만한 영화였다.

코맥 메카시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그가 그리는 세상을 볼 기회다.

비고 모텐슨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그만의 완벽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투 썸즈 업Two Thumbs Up !" 최고의 영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밍웨이의 글쓰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이혜경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작가作家가 아니라 구도자求道者였다

  “....때때로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는데 잘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서 작은 오렌지 껍질을 쥐어 짜 불길 언저리에 떨어뜨리며 푸른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 항상 글을 써왔으니 지금도 쓰게 될 거야. 그냥 진실한 문장 하나를 써내려가기만 하면 돼.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이면 돼.’    그러면 마침내 진실한 문장을 하나 쓰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글을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내가 알고 있거나 누군에게 들었거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진실한 문장 하나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장황한 글을 쓰거나, 뭔가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 복잡한 무늬와 장식들을 잘라내고 처음에 썼던 단순하고 진실한 평서문 하나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본문 24-25 쪽

  이 깨우침의 주인공은 하드보일드hard-boiled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다. 하드보일드란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으로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뜻이 변해 ‘비정 ·냉혹’이란 의미로 쓰인 문학용어다.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글솜씨를 말한다. 군더더기 없이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손대면 파삭파삭 부서질 것 같은 문장, 헤밍웨이의 글맛이 그렇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김훈의 글맛’을 생각하게 한다. 

  헤밍웨이는 좀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일생을 바쳐 글다듬기를 하다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열한 글싸움을 했던 그였던지라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를 배우고 닮고자 하는 추종자들이 선생을 삼기에는 영 서운한 행실이 아닐 수 없다. 반갑게도 그는 지인들에게 쓴 편지와 다른 글들 그리고 소설 속에 ‘다빈치 코드’를 숨기듯 조금씩 흘린 모양이다. 그것들을 줍고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니 래리 W. 필립스란 양반이 참 고맙다. <헤밍웨이의 글쓰기>(스마트 비즈니스)를 읽었다.



 

   글쓰기는 수작酬酌이다. 제가 생각한 바를 남에게 알리고 공감을 유도하는 하나의 수사修辭요, 농짓거리다. 말言로 다중多衆에게 농짓거리를 거는 것이 연설이라면, 글쓰기는 미래에 있을 대중大衆에까지 말을 거는 셈이니 글을 쓰는 작가는 연설을 일삼는 정치꾼들보다 더한 수작쟁이들이다(연설이란 것도 결국 글을 보고 읽는 것이 아니던가?).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려면 먼저 눈에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읽고 있는 불특정다수의 독자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그림과 영상을 보이도록 하려면 글을 쓰는 이가 먼저 보고 적확하게 글로 그려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 문장마다 한 장의 그림이 보이게 해야 한다.    

  세밀한 묘사와 설명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독서는 ‘숨’, 즉 호흡과 깊은 관계가 있어 길이가 길면 숨이 가빠져 쉬이 지친다. 문장이 긴 듯 짧고, 짧은 듯 길어져서 울렁이는 파도를 따라 배를 타듯 운율이 있어야 한다. 묘사와 설명이 길면 구차해지고 함부로 상상할 수 없어 지루해진다. ‘글은 짧되, 마음껏 상상하게 만들기‘ 이것이 글을 쓰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바이고, 영원한 숙제다. 평생을 학생으로서 이 숙제에 바친 인물이 헤밍웨이다. 넘기는 한 장, 한 장이 소중했던 이유는 그만이 가진 나름의 원칙과 요령이 책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내 글을 모두 짧게 자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모두 없앤 다음, 묘사가 아니라 문장을 만들려고 한 후부터 글쓰기가 아주 멋진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소설처럼 긴 글을 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문단을 완성하기 위해 내내 작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본문 33 쪽)

  헤밍웨이에게 글쓰기는 투쟁이었다. ‘세 시간 동안 쉼표를 찍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내일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는 어느 작가의 고백처럼 헤밍웨이의 글쓰기 역시 단어 하나 쉼표와 마침표 하나에 각고刻苦 고민의 총합이었다. 그 끝에 탄생한 것이 단출하고 팍팍한 문장들이었고, 그 속에는 팍팍한 세상과 더 팍팍한 우리의 인생이 들어 있었다. 난 과연 문장이란 걸 그려내면서 얼마나 고민했던가 돌아보게 한다. 읽은 책을 말하는 나의 얄팍한 글쓰기가 없던 세계를 만들어내는 ‘글의 창조자’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일테지만...

  글맛은 장맛이다.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천재의 글은 멋지고 대단할지 모르지만, 어딘가 경박하다. 깊고 그윽한 장맛 같은 글맛은 표면에 허옇게 곰팡이가 피듯 펼친 흔적으로 심하게 구겨지고, 노출에 색이 바랜 종이에 들어있어야 한다. 쓰고, 지우고, 고치고, 또 지우고...더 이상을 더하고 뺄 단어가 없을 때 글맛은 생겨난다. 헤밍웨이의 원고가 보고싶어지는 대목이다.

  “그는 세잔이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세잔은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온갖 기교를 구사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진실한 것을 만들어냈다.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는 최고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건 사이비종교같은 절대적 숭배가 아니었다. 닉은 전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세잔이 그림 속에서 표현했더 것처럼 글 속에 그 전원을 담고 싶었다...(중략)... 성스러운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심각하고 진지했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 할 수 있다. 두 눈을 뜨고 제대로 살아왔다면 말이다.” (본문 40 쪽)

  그가 쓴 <닉 애덤스 이야기> 속의 글을 보면 그에게 글쓰기는 사실寫實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지 않은 글은 글이 아니다‘고 헤밍웨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짐작컨대 그가 보낸 하루는 관찰일테다. 헤밍웨이의 다리는 삼각대요, 눈은 광학렌즈,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필름인 셈이다. 그 인생을 상상해 보니 몇 초 안되어 팍팍해진다. 날 때려죽인다 해도 그 짓(?)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팍팍한 인생이란 게 작가의 인생이 아니던가? 작가들에게 경배를... 

  글쓰는 데 사전이 필요하다면 글을 써서는 안된다는 헤밍웨이. 비유법을 혐오하고, 거짓된 글을 기피했으며, 돈벌이를 위해 현실에 타협하고 정치적 성향을 띤 글을 쓰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했던 그에게 글쓰기는 구도자求道者의 수행이었다. 적어도 책 속에서 만난 그는 지겨운 밥벌이를 운운하며 과시하지 않았고, 자신의 글을 넘치는 재주를 주체할 수 없어 휘갈기는 천재의 농짓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 그도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의 글에 찬사를 보낼 때가 있으니 <노인과 바다>를 만든 때였다.

  “이건 제 평생을 바쳐 쓴 글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져 있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고 있지요. 지금으로서는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 본문 35 쪽

  작가라는 업業을 알게 하고, 글이 되는 작업作業을 알게 한 책이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를 알고 싶게 한 책이었다. 그가 즐기던 칵테일 모히토Mojito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분, 책을 덮고 난 기분이 딱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의 진정한 자유는 스트라이크 삼진아웃으로부터! 

 

  낄낄깔깔.. 내 웃음소리에 ‘누가 왔수?’ 동생 녀석이 문을 열었다. 내가 모를 손님이 올 리가 없다. 동생은 금방이라도 피가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 잡고 다른 손으론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포개어진 다리 사이엔 예의 책이 펼쳐 있었고... “만화책도 아닌데...” 심드렁한 녀석에게 ‘이거 한 번 읽어봐라’ 책표지를 보여줬다. “그거, 지금에야 읽는 거에요?” 더 심드렁해져서는 문을 닫았다.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읽은 것 같은 소설, 권하지 않는 책은 절대로 스스로 읽지 않는 동생 녀석도 4 년 전 군대에서 두 번이나 읽은 소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차라리 밥은 굶어도 책은 안 굶는다 생각하는 내가 이 소설을 모를 리가 없다. 신문에서 서평도 본 적이 있고, 이외수의 젊은 시절을 방불케하는 히피와 힙합을 섞은 듯한 스타일의 저자 역시 사진으로 여러 번 봤었다. 만년 조연의 이범수가 첫 주연을 맡았던 ‘슈퍼스타 감사용’의 모티브도 이 소설이란 것도 알고, ‘처녀작 같지 않은 수준급 소설, 하지만 파격이다’는 아헤들의 말은 두 번 더 들으면 백 번이다. 그래도 애써 읽지 않은 건 처음 소설이 나왔을 때는 ‘소설을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어숩잖은 짓들에 심취해 있었고,

  작은 이유는 ‘장명부’ 때문이었다. 소설 속의 ‘나’만큼 나 역시 대한민국 프로창단의 원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소년구락부少年俱樂部’를 할 정도로 였으니까. 서울토박이라서가 아니라 OB맥주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권유(게다가 물주가 아니던가)에 의해 단 돈 오천 원으로 OB에 몸을 맡겨 회원이란 이름으로 모자와 점퍼를 주워입고 주말이면 학교 운동장, 삼청공원, 장충공원을 전전하며 시합을 뛰었었다, 나도. 

  아, 장명부.

장명부도 싫고 삼미슈퍼스타즈도 싫었다. 삼미슈퍼스타즈는 어숩지 않은 로고그림으로 나의 우상 첫 우상인 ‘슈퍼맨’을 욕먹였고, 투수 장명부는 조금 덜 무섭게 생겼다 뿐이지 봉준호의 ‘괴물’ 못지 않은 타자 잡아먹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난 장명부가 프로야구의 마운드를 점령한 83년을 끝으로 내 사랑, 야구를 버렸다. 그러니 듣도 보도 못한 박민규가 쓴 젠장 맞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란게 어떻게든 맞닥뜨리는 거라면, 그 운명은 어떤 책 때문이었다. 출간된 지 정확히 오 개월 늦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어 박민규와 그의 글맛을 알았고, 단골독자가 될 요량으로 전작前作을 뒤지던 중 원수같은 ‘삼미‘를 제목으로한 소설을 다시 만났다. 그 옛날의 트라우마로 잠시 망설였지만, 기어이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긴 건 여기에서도 죽은 왕녀.. 속의 ‘요한’이 여기에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조성훈을 찾아냈다. 요한과 조성훈. 이들은 ‘똑똑한 꼴통’이다. 주인공은 아니면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핵심적인 꼴통, 머리에 든 것, 말빨, 그리고 시선이 닮았다. 박민규와도 닮았다(외모는 제발 닮지 말기를). 그리고 요한을 만났을 때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박민규는 기발한 기억력과 기막힌 탐구심을 갖췄다(노트북에 글을 칠 때 원고 말고 대 여섯의 창을 켜고 검색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그보다 기발하고 기막힌 기억력과 탐구심이 없는 나를 매료시킨다. ‘정말 그 시절 그랬던가?’ 더듬게 되고, ‘그랬구나’ 싶어 탄복을 한다. 운 좋게도 박민규는 비슷한 또래여서 그가 ‘아~’하고 말하면 ‘어~’할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척~ 하면 삼천리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니 쉬이 읽히지 않을 리 없고, 재미없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세상의 시각에선 삼미슈퍼스타즈는 시쳇말로 ‘루저’다.

허용치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버림받은 사람들. 하지만 조성훈이 보기엔 그건 안反삼미슈퍼스타즈의 판단의 오류일 뿐이다. 진정한 슈퍼맨인 그들은 소위 위너들이 만든 기준에 애써 들지 않으려 한 것 뿐이다.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할 뿐 일본에서 홈리스(노숙자)로 지내면서 사회가 부여한 의무로부터의 자유, 책임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한 그에게 삼미슈퍼스타즈는 진정 ‘사람답게 사는 방식’으로 보였다. 회사형 인간으로 살다 구조조정을 당하고 아내에게까지 버림받은 ‘나’는 그들의 판단대로 스스로를 루저형 삼미슈퍼스타즈로 여겼다가 조성훈의 교화로 다시 깨어난다. 사회로 버림을 받음으로써 그가 얻은 것은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을 나게 하는 자신의 시간을 얻었다.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5 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본문 264-265 쪽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노이즈 심한 흑백 영상으로 영화를 보여주듯 내 삶의 기억을 건들 때마다 고구마 뿌리처럼 줄줄 딸려나와 그에 취해 책을 덮기가 일쑤다. 박민규의 소설은 만화만큼이나 웃기고, 재미있다. 하지만 저 깊숙한 곳엔 페이소스가 진하게 뭍어있다. 그의 맛깔난 글 속엔 뼈가 들어있고, 칼이 숨어 있다. 케케묵은 옛날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이야기하고, 야구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시선은 세상과 사람을 향하고 있다.

당장의 해결책은 없는 문제제기일지 모르지만 그 속엔 국회에서는 절대로 발의되지 못하는 삶 속 저 깊숙한 우리의 고민과 고통들이 짙게 배어져 있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제기만으로 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용케도 맞아들어 가는 듯 보인다. 이 소설을 통해 장명부의 대기록을 보면서 그를 다시 알게 되고, 슈퍼맨을 욕보인 삼미슈퍼스타즈를 용서(?)하고, 급기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꺼이 나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기를 바라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

조성훈이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신경이 쓰였다.

“뭘?”

“회사 잘린 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약간의 분노와 패배감, 불안간은 것들이 재구성된 지구의 표면 위로 떠올라왔다.

“처음 널 봤을 때...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본문 235 쪽

  이 글은 새해벽두 ‘정리해고’를 앞둔 수 천의 샐러리맨들에게 던지는 박민규의 격려로 들렸다. 컴퍼니라는 기계 속의 톱니바퀴는 다른 것과 맞물렸기에 안정적이었다. 컴퍼니를 위해 ‘나’라는 톱니바퀴를 들어냈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오래 맞물려 돌았다면 곧 마모되어 정말 쓸모가 없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혼자가 된 바퀴는 더 이상 컴퍼니를 위해 1분 마다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제 혼자 마음껏 구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1분에 열 바퀴, 백 바퀴도 돌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마지막으로 세상 끝까지 깨춤을 추며 구를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스트라이크였냐, 볼이었냐?’ 하는 과거를 놓고 심판에게 항변하고, 컴퍼니를 원망할 것이 아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메두사의 저주로 돌이 되어버린다. 단 둘만 남을망정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며 캐치볼을 하며 오늘을 보내는 두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오늘 ‘지금’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는 듯 했다.

  지난 해 박민규를 만난 건 개인적인 행운이요, 기쁨이었다. 늦었지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읽은 것 역시 장명부의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고자 한 노력이 얻은 소득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축구라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야구다. 박현욱이 ‘젠장 맞게도 어쩔수 없는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박민규는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얻고 싶은 남자의 자유’를 이야기했다. 축구와 야구가 일상의 기쁨이라면, 두 명의 소설짓는 남자들은 삶의 위안이 된다. 난 이제부터 박민규의 가장 늙은 팬클럽 회원이 되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조용하지만 열렬한 책 이야기
장영희.정호승.성석제 외 지음, 전미숙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토종 책벌레들의 29 가지 책예찬론 !

  어른스러워질수록 호불호好不好는 줄어든다. 대신 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굳어진다(이 말은 극단적으로 변한다는 말도 되겠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스물 아홉 사람이 한 가지 물건에 대해 자신의 사랑을 예찬했다. 물건은 바로 ‘책’이다. 극단적인 그들의 책 사랑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으로 표현되어 또 다시 책을 이뤘다. 책벌레들의 책사랑, <책, 세상을 탐하다>를 읽었다. 

“책은 내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다.” 

-프란츠 카프카



 

   오랜만에 만나는 전유성의 글(책에 관하여 중구난방 스스로 묻고 답하기)은 반가운 친구를 본 듯 반갑다. 그는 안심심하려고 책을 읽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항상 변화를 추구해서 베스트셀러 중 9번, 10번 째 책만 구입한다. 개그를 하듯 얼렁뚱땅 쉽게 받아넘기는 대꾸이었지만 그에게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걸작이다.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처음 책에서 무엇을 얻은 건 중학교 2학년 때 작은고모가 읽던 일본 소설<빙점>이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초등학교 여자애가 집에 갈 차비를 잃어버렸는데, 주위 친구들이 차비 잃어버린 걸 걱정해주니까 정작 본인은 ”내가 잃어버린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기쁠까?“라고 말하던 대목!

  그래 세상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세상 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다. 소설 제목이 ‘빙점’인지 아닌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아기가 한 말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본문 30 쪽

  책을 읽을수록 귀가 얇아진다. 나중엔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귀 얇은 공자님이 된다. 고집을 피우기 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되고, 내 입장이 중요한 만큼 네 입장도 중요한 줄도 알게 된다. 주관을 객관화시키기, 전유성이 책으로부터 얻는 소중한 소득이다. 한편 재담꾼 ‘성석제’는 소싯적 책도둑이었음을 책에다 고백했다. 그에 대한 변辯은 의뭉스럽기까지하다.

  “재능 있는 책 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게 아니라 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다른 것이 아닌 책을 훔침으로써 문명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지식과 감성의 이종교배로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다. 훔친 책은 가슴을 뛰게 하는 긴장이 부작용처럼 곁들여지고 잘 읽히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나보다 수준 높은 책 도둑의 서고에서 동굴 속의 알라바바처럼 넋이 나가 서 있던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정선된 보물을 다시 훔침으로써 우리 책 도둑들은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본문 46 쪽

  무슨 책을 얼마나 훔쳤는지 궁금하다. 그 책들이 덕분에 의뭉스러운 지금의 성석제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하지만 추억꺼리일망정 할 짓은 못된다. 가뜩이나 위축된 출판시장에 낭만을 빙자한 책도둑마저 횡횡한다면 책 짓고 파는 이들 시름은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요즘 책 훔치다 붙잡히면 대체 벌(형량)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들의 책예찬에 겸손은 보이지 않는다. 허생전의 허생처럼 딱 10 년 동안 책만 읽고 살라한다면 ‘옳다구나’할 사람들이다. 듣도 보도 못한 ‘책벌레’로 불려도 ‘허허’ 웃고 말 사람들이다. 시인 조병준은 아예 ‘책벌레라서 행복해요!’ 하며 어느 여배우를 흉내낼 지경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책벌레로 인생을 살게 된 건 저주다. 끝없는 배고프모다 지독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끝없는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양식으로, 비록 곧 사라질망정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또 어디 있는가. 끝없는 포만감과 끝없는 배고픔이 꽉 부둥켜안고 추는 왈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문 149쪽

  이 책은 내게는 위로다. 촌각을 다투며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이 세상에 묵묵히 한 곳에 자리를 지키고 종이에 새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책 읽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위로한다. 많은 문인과 출판인, 평론가, 음악가, 심지어 개그맨 전유성까지...이 책을 집어든 나를 격려한다. 몇 장마다 숨겨진 붉은 칠된 글자들은 내가 갖던 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러게, 내말이...’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말들 고개가 함께 주억거렸다.

  가장 인상적인 글귀는 시인 이문재의 ‘척추로 읽읍시다’였다. 일주일 날을 잡아 십 수권의 책을 들고 호텔방에 쳐박히는 소설가 김훈, 매주 일요일 아침 마다 정좌를 하고 책을 읽는 황종연 교수, 일 년 중 한달을 ‘안식월’을 두는 빌 게이츠까지 아예 작정하고 자리를 틀고 책을 읽는 이들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자세 만큼은 척추를 곧추세운 정좌의 독서라는 것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지가 책 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입니다.” 본문 85 쪽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쫓다 보니 마지막 장이다. 아껴서 읽느라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읽어서 즐겁고 만나서 기쁜 책, 이 책을 두고 하고 싶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