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신漁神을 찾아서
장웨이 지음, 최창륵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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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배였다. [...] 넓은 바다 위에서 그것은 움직이는 점이자 흔들리는 점이었으며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 그것은 불변의 고정된 지표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 배와 움막, ... 배와 도시의 구별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다. [...] 이 무궁한 우주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선택을 멈추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 바닷가 호루라기중에서

 

지금 나는 명료한 듯 나있는 길을 걷는 일, 지나치게 조급해하며 앎을 추구하는 삶을 피하려는 마음이다. 벌집과도 같이 한 곳으로 집중되도록 얽히고설킨 이 도시의 굴레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맞춤한 듯, 중국 생태주의 문학을 연 장웨이(張煒)의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내 마음의 평안과 모처럼의 진짜 사유의 시간이 되어 주리란 기대에 집어 들었다. 성공이다! 작가의 초,,후기의 굵직한 세 작품의 서로 다른 배경의 자연과 그 속에서 고독한 삶을 일궈나가는 인물들에 매료되었으니 말이다.

 

표제작인 《魚을 찾아서(2015)라는 중편(혹은 장편)은 대자연의 위엄과, 그것과 일체화되어가는 인간의 삶을 동화적(童話的) 분위기로 그려낸 후기의 작품이다. 그리고 푹 빠져 읽은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1987), 비교적 초기작품으로 토속적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세대 전환을 향한 충돌과 극복의 용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단편 원두막의 밤(1983) 세 작품으로 구성된 알찬 작품집이다. 한 작가의 초기 작품과 비교적 최근작으로 편성되어, 첫 대면하는 독자에게 접근의 폭을 넓혀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다만, 해당 작품들의 원 작품명을 밝히지 않아 중국어 원작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쉬움이라 하겠다.

 


1. 중편 혹은 장편 바닷가 호루라기

 

책의 구성이야 어쨌든, 나는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의 힘줄 투성이 늙은이 라오진터우(老筋頭)’에 반했는데, 아마 마을로 표현되는 인간들의 세계와 이들 세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다와 사이에 있는 해안 모래 턱 움막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란 설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자유란 무엇인지, 얼마나 힘겹게 획득되는 것인지를 지펴낸 거대한 은유이자 신화라 해도 될 것 같다.

 

생명의 반 이상을 작은 배와 나눠 가진 늙은이는 가없는 바다에서 이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짙푸른 바다 위에서 자유자재로 떠다닌다. 이 자유로운 유동의 물결위에서 꾸는 꿈 또한 걸작이다. 그의 배에 바퀴가 돋아나 오로지 길만 따라 앞으로 내닫는 차가 된 것이다. 그는 도무지 이 구속을 참을 수 없어 바퀴를 깨부순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문장이 바로 이 꿈에 나타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불변의 고정된 삶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완전한 자유를 위한 멈추지 않는 유동의 선택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참으로 길이란 사람의 사고의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생각이란 곧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 역시 마땅한 거리보다 더 많이 걷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나있는 길 위로만 걸으려 한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늙은이를 찾아오는 또 다른 늙은네와 꼬마친구 시창우(細長物),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여인 쓰팡만이 마을의 큰일을 벗어나 굶주린 배를 움켜주고 늙은이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늙은이의 몽상은 한 편의 무릉도원이고, 이상향이며, 현실과 이상의 경계사이를 오가는 동화로 읽는 이의 마음을 그 자유의 시공 속에서 함께 거닐게 한다.

 

소설에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도 손상이 없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지고한 사랑얘기에 실려, 그에게는 낯설지만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걸어왔던 자유의 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늙은이의 과거 이야기로 꿈결같이 흐르며, 삶의 비의(秘意)가 더욱 짙게 가슴을 파고들게 한다. 재산도 마다하고 해진 옷을 입을지언정 벌집 같은 도시의 족쇄와 굴레가 싫어 사랑하는 여인 샤오홍하이(小紅孩)와 함께 도주하여 찾았던 원시림 가득한 숲 속 움막의 생활,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삶을 다시금 떠나야 했던 아내의 임신과 그녀의 죽음을 묻은 해안가 모래턱의 사연은 이미 충만된 감동을 더한다.

 

소설은 대약진운동에 대한 간접적 묘사로서, 굴껍데기로 간장을 제조하기 위해 마을의 큰 집에 주민을 모아 하나의 망상을 일사불란하게 쫓는 기상천외한 큰일로 형상화하며, 누군가에게 제자리를 지키도록 강요하는 도구인 쇠 호루라기를 목에 건 아이로 상징되는, 질서라는 굴레와 오로지 나있는 길 위로만 다닐 수 있는 마차를 모는 존재의 죽음, 그리고 마침내 이 강요된 질서의 속박을 털고 생의 진실한 욕구를 찾아 움막으로 몰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으로 맺는다.

 

끝내 왔구려, 자네들이 왔으니 이젠 난 떠나야겠네! 난 본디 강의 사람이요,

바다의 사람이네! [...] 작은 배는 뱃머리를 잔뜩 쳐든 채 노도와도 같은

화염 속을 헤치며 먼 항행을 시작했다.

-중편 바닷가 호루라기마지막 문장에서, 340

 

많은 사람들과 이들로 구성된 사회가 남긴 지표들, 이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규정된 세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항해는 그리 쉬운 길이 아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수많은 괴로움과 상처, 외로움을 동반하는 비장한 선택의 길이다. 라오진터우(老筋頭), 샤오홍하이의 남편 좡난(壯男)의 또다시 시작되는 자유를 향한 이 먼 항행의 장면은 감응의 격정적 떨림으로 맴돈다.


2. 장편 《魚을 찾아서

 

아마 이 작품은 동화(童話)로 집필 된 것일 수 있는데, 산 속 외딴 집, 종일 걸어도 사람과 만날 수 없는 그런 산 속 깊은 집,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소년이 살고 있다.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어린 시절, 그의 꿈이었던 어신을 찾아 집을 나서고 스승을 찾아 자신이 찾던 꿈의 의미를, 삶의 진실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산 속에서 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요, 꿈속에서라도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인 곳이다. 때문에 만약에 두 뼘 크기의 물고기를 잡는 일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족장님에게 가져다 드려야 하는 귀한 것이다. 그러니 소년은 물론 그의 부모에게 있어서도 일생의 꿈같은 일이다.


 

제일 먼저 잡은 큰 물고기는 족장님에게 가져다 드려야 한단다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어떻게 반박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魚을 찾아서중에서, 39

 

큰 물고기를 잡는 일은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큰 생업일수록 재주가 따라야 하고, 더구나 소질은 스승에게 배워야 하는 일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이 재주는 각자의 마음 속, 몸과 마음이 일체화되어 터득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버지가 기회를 얻지 못했던 모든 고기잡이꾼들의 스승인 어신을 찾아 소년은 집을 떠난다. 진정한 어신은 종래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에 어신을 찾는 일은 지난한 과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소년은 수많은 산봉우리들과 산골짝을 지나 첩첩산중에서 동그란 눈이 무척 빛나는 마주보기에 겁먹을 정도의 스승을 만난다. 스승은 자신이 어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년은 그가 어신임을 느낀다. 스승의 눈이 말하는, 그 소리없는 말들을 오로지 마음속으로 추측하며, 그 숨겨진 지혜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 너는 왜 물고기를 잡으려 하느냐? 소년은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나는 큰 물고기가 많이 필요해. 많을수록 좋아! 비길 수 없는 유일한 어신이 되고 싶다.” 스승은 말한다. 그리 많은 물고기를 잡을 생각도 없다. 먹고 싶을 때가 되어 한 마리씩 잡으면 되지.”

 

스승은 지닌 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재주를 감추는 법이며, 그래야 삶이 무탈하다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자신은 자맥질을 할 줄 모르는 반쪽 물고기잡이라 말한다. 물이 그리 많지 않은 첩첩산중의 물고기 잡이는 물웅덩이, 작은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는 한수(旱手)라고. 어신은 한수와 수수(水手)의 재주를 모두 지닌 물고기잡이라고 알려준다.

 

재주란 말이다, 그냥 남에게서 얻는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찾아내야 하는 것이란다. 매번 조금씩 찾아내서는 조금씩 내려놓곤 해야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야말로 진정 참재주인 것이지...” -107

 

왜 애써 찾아낸 다음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내려놓아야 한다고 스승은 말한다. 어떤 재주는 남겨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한수인 스승은 아이에게 자신의 재주에 대해, 어신의 아들로 성장하며 겪었던 곡절들을 통해 삶과 배움의 지혜를 전달한다. 수수였던 마을의 경쟁자에 의해 죽은 한수였던 아버지의 사연, 수수어신의 막내딸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애틋하게 흐른다. 원수의 딸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야기, 이젠 수수이자 한수로서의 재주까지 모두 지닌 그녀가 바로 어신임을. 노쇠한 스승의 유언에 따라 소년은 어신인 노파를 찾아 다시금 미지의 길을 걷는다.

 

소년은 마침내 사람은 잘 몰라도 괜찮은 것이 있다는 것, 결코 조급함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 큰 물고기도 큰 기와집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깨우쳐나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가오는 것들은 물론 삶의 겸허한 지혜들이지만, 이보다 더 자연스레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정념들이다. 타인의 마음을 여는 것, 그리고 그 마음과 교감하는 것, 존경과 겸허가 무엇인지, 또한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일 게다. 특히 장웨이의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란 개념을 떨어버리고 이 같은 새로운 정서로 만들어지는 소규모 공동체의 구성이다. 이 작품 《魚을 찾아서, 바닷가 호루라기의 마지막 장면은 새롭게 형성된 일종의 가족 공동체의 탄생이다. 새로이 구성된 그들의 연대는 그야말로 이상적 지대로 구현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생태주의적 유토피아라 부르는 것일 테다. 이 지점만으로도 또 하나의 감상이나 유토피아론()이 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3. 단편 원두막의 밤

 

작가의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기의 부조리를 유쾌하게 비판한 농촌무대의 소설이다. 국가주의적 운동이란 것들의 전체주의적 제도나 질서란 사실 하나의 코미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질서 내에 있는 자들이야 외부의 시선을 지닐 수 없으니 자신들의 행위와 언어가 얼마나 유치하고 저열한지 모를테니 말이다.

 

이 소설에는 옆구리에 부추 칼을 차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여 갈취하며 사는 라오훈훈(老醺醺)’이라는 늙은 건달이 등장한다. 문화대혁명이란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생활을 되새겨 몸소 체험하는 생활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일종의 생활운동이다. 따라서 억고(憶苦)’라는 스스로 고통을 기억하기 위한 실천활동이 있었는데, 라오훈훈(老醺醺)이란 자는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사는 건달이니 재산이랄 것이 없다. 하여 몸 하나 겨우 눕힐 만한 움막같은 것에 새우처럼 누워 잘 도리밖에 없는 인간이다. 당 관리가 현장 시찰을 돌던 중 라오훈훈의 이 모습을 보고는 계급 각오가 매우 높은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는 것이다. 한번 웃고 넘어가자.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대해서 누구도 입을 벙긋하지 못하는데, 이를 비판하면 당 정책을 비난하는 꼴이 되고, 또한 건달 라오훈훈의 보복(폭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당시 밭을 국가가 농민들에게 직접 배분하였는데, 1/3은 농민의 자유농사고, 2/3는 책임경작이라 하여 국가에 지정된 소출을 바쳐야하는 땅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2/3인 책임 경작지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인데, 라오훈훈같은 건달들이나 도적들은 남의 경작지 과실물을 빼앗는 것이 살길이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라오더(老得)라는 농민시인은 이러한 약탈자들을 어두운 것들이라 부르는데, 국가는 이 어두운 것들의 빈곤한 삶을 억고의 실천으로 칭송하고 있으니, 정작 고된 경작일로 땀을 흘리는 농부들에게는 기가 막힌 일이다. 때문에 농부들은 원두막을 짓고 자신들의 경작지를 약탈하려는 인간들의 동향을 감시한다.

 

굵은 땀방울은 땅을 적시고/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맞이하였네./ 밭을 지켜 

야경을 서는 사람들은 용감도 하여라./ 신성한 노동의 성과를 지켜냈다네!...”

- 단편 원두막의 밤중에서

 

배경 설명이 길어졌는데, 사실 이 웃지못할 사연으로 인해 벌어지는 한 일화가 소설이다. 강변의 비옥한 땅에 오이, 부추 등 채소와 포도, 무화과를 경작하는 취유전(曲有振)이라는 농부는 라오훈훈의 뻔뻔함에 치를 떨면서도 그 앞에서는 절절매며, 좋은 것이 좋다라며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늙은이다. 한편 그의 딸 다전쯔(大貞子)라는 젊은 처자는 부당함과 약탈에 당당히 맞선다. 취유전은 딸의 이러한 행동이 라오훈훈과 갈등을 초래할까 노심초사하고, 원두막 야경을 하겠다는 다전쯔를 막아선다. 결국 취유전은 라오훈훈이 경작을 하지않아 폐허가 된 경작지와 취유전 자신의 알찬 과실이 열린 경작지를 공동경작지로 하자며 밀어붙이자, 그만 병이 나고 만다.

 

여전사가 된 다전쯔는 원두막 야경에 나서며, 그녀의 남자 동지들과 함께 라오훈훈의 사주를 받은 도적떼들과 한 판 승부가 펼쳐진다. 성실한 농민의 노동을 찬양하고, 늙은 세대의 불의에 대한 무기력과 순응을 떨쳐내고, 당당히 맞선 새로운 세대로의 사회역량 전환을 칭송하는 일종의 계몽 소설이라 하겠다. 시대감각이 우리와 꽤나 멀리 떨어진 작품이라는 인상이다. 장웨이의 이 초기작은 익살과 풍자를 버무려 은근한 비판의 목소리를 실어내고는 있지만 구수한 토속적 향취로 그의 자연 친화적 지향의 싹이 아주 조금 올라온 소설 같다. 불과 3년 뒤에 발표된 바닷가 호루라기를 쓴 작가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에 내심 놀랄 뿐이다. 아무튼 흥겨운 한편, 몽상의 평온함, 나름 삶의 선택으로서 자유에 대한 세련된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작품집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근래 출판사들의 편집 경향과 달리 촘촘하게 편집, 구성된 이 소설집의 드러나지 않는 내실성에 고마움을 표한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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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선자, 21세기 한국에 다시 출현한 타르튀프의 역겨움에 진저리치며

 

17세기 프랑스의 희극작가인 몰리에르(Moliere)가 발견 포착해 낸 타르튀프(La Tartuffe ou L'imposteur)의 그 야비하고 위선적인 인물이 공간과 시간을 넘어 21세기 한국사회에 격세유전(atavism)되어 출몰할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 상류층의 자제로 성장했던 이 궁정좌파라 할 수 있는 장 바티스트 뽀끄랭(몰리에르의 본명; Jean Baptiste Poquelin, 1622.1.15.~1673.2.27.)’의 당대 귀족들과 부르주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선취한 리얼리즘 문학(희곡)이 자꾸 내 신경을 자극해 댔기에 몇 글자 남겨 놓기로 했다.


어쨌든 인간 세계에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망령으로 인해 고전의 지위를 지니게 된 문학작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귀족 오르공의 집에 식객으로 대접받고 있는 타르튀프란 인간이 있다. 이 인물에 대해 날카롭게 벼려진 판단력을 보이는 인물은 오르공의 딸 마리안느의 몸종인 도린느다. 도린느는 타르튀프를 이렇게 평가한다. 한 때 승승장구하다 그 매력을 상실한 바람둥이가 버림받음의 어두운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위장된 정숙, 청렴, 용기를 팔 수 밖에 없게 된 인간이라고. 사실 탄핵된 여인에게 팽 당했던 인물이 촛불정부에게 보였던 것이 이러한 순진무구로 가장된 권모술수였다. (제대로 된 사유하는 인간의 역을 하녀에게 부여한 몰리에르의 파격을 보라!)

 


오르공의 부인 엘미르의 오빠인 끌레앙뜨는 마치 21세기 한국사회에 등장한 이 괴물을 보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 눈짓과 꾸민 믿음으로 신용과 위엄을 사려고 하는 자, 일부러 신앙(정의)을 내세우는 꾸민 겉치레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온 세상이 뒤따라야 할 참된 신자는 뭐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법석을 떨지 않는다고. 천박하고 저열한 인간 하나를 마치 새로운 정의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미디어들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철없는 대중들과 세상이 떠들썩하게 했나를 떠올려본다. 그 자와 태극기 부대가 법석을 떨어댈 때, 이미 그 가면을 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 가장된 얼굴 이면의 민낯을 볼 생각들을 하지 못했던 것일 게다.

 

사실 이 비열함과 악덕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 자신의 입신과 재화에 대한 탐욕을 위해 온통 꾸며진 행위로 위장한 인간, 이 위선의 기형적 인간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이 자가 설쳐댈 수 있게 된 근간, 이 자가 활개 칠 수 있는 토대가 된 동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로 위선과 진실(정의)을 구별 할 줄 모르는 맹목의 구정물에 깊숙이 빠져들어 사리분별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바로 이런 사기꾼의 비옥한 토양이다. 오르공이란 인물과 이 자의 어머니인 뻬르넬르 부인이란 인물은 사실을 직접 겪은 자들의 증언조차 부인하며, 편협과 왜곡된 자기 인식의 동굴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기실 자기 아내인 엘미르의 육체를 탐하고, 자신을 봉 취급함에도, 이를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모든 이들이 자기가 신뢰하는 괴물을 모함하는 것이라 외면한다. 그리곤 전 재산을 증여하는 계약까지 하여 넘겨주기에 이른다. 마치 오늘 자신들이 선출해 놓은 자에게 모두 털려나가는 꼴이 오르공과 뻬르넬르 모자와 지나치게 닮았다. 집달리가 달려와 오르공 일족에게 집을 비우라는 명령이 잇따르고, 급기야 모반죄로 몰려, 끌려 갈 지경에까지 이른다. 17세기 극()이니 수호신처럼 지상대권(地上大權)이란 것이 발동되어 이 사기꾼의 죄를 인식하여 오르공 일가는 재산을 수호하고, 인신의 안전을 도모하지만, 21세기 오늘의 한국에는 이 같은 기적이 발생할 여지도 없거니와 잃어버린 것들을 일시에 원상회복하는 길도 없다.

 

도금한 금빛에 눈이 멀어, 집단적 맹목에 휘둘리고, 그 가짜 금에게 자발적 복종으로 달려 간 우중의 시선이란 것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오르공, 뻬르넬르. 진실과 외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이 영원한 어리석음들이 여전히 자기 목줄을 쥔 개장수의 손을 핥아대고 있다. 곧 삶이란 것과 이별 할 줄 모르는 이 불구의 무지. 타르튀프에게 기만당하지 않으려면 맹목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오늘은 이 세계 밖에서 내려 올 신성한 구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혐오스러운 두 유형의 인간을 당대 귀족사회로부터 포착해 낸 한 위대한 연극인이자 문학인의 발견이 동양의 한 지역에서 4세기 후에 다시 회자되는 것을 안다면 대체 무어라 할까? 끈질기게 배우려하지 않는 이 외면의 의지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이 희곡은 1664512일 베르사유 궁정 축제일에 3막으로 초연 되었으나, 파렴치한 작품이라 바로 공연이 금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667년 개작하여 재연했으나 또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오늘 우리네가 읽는 희곡은 5막으로 개작되어 1669년 이후 공연된 것이라 하니, 사실 초연되었던 희곡의 그 신랄했을 풍자와 비판이 상상된다. 사이비 정의, 거짓된 공정의 가면이 판치는 악이 횡행하는 사회를 자처한 그 우민의 세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만의 옹알이다. 타르튀프들이 원하는 빛깔로 물들인다고 이 사회가 이것들의 행동을 용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차 거세지고 있다. 타프튀프의 헛된 망상을, 깨어난 오르공들이 처단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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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독서는 소설문학 읽기가 될 것 같다. 한국 문학으로 서윤빈의 날개 절제술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두 권의 소설과 길 위에 찬사를보낸다는 허연 시집 불온한 검은 피, 그리고 해외문학으로 국내 독자들의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감상을 보이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Ⅱ』,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옛 감성이 떠올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푸시킨의 시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에 이은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이렇게 오직 문학에만 잠겨볼 예정이다.

 

 

한 권 예외로 역사서를 사두었는데, 문학만을 읽다 이야기들에 권태가 느껴질 때, 조금씩 펼쳐 읽기 시작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하이켈하임 로마사로마사를 서술한 책 중 그나마 가장 분량이 적은 책이면서, 알차게 저술된 책이어서 선택한 역사서다. 저자인 토론토그리스 로마사 교수였던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이 생전에 출간한 단 2 권의 책 중 하나이다. 고밀도로 응축된 내용들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1,000페이지이니 매일 짬짬이 30페이지씩 읽으면 한 달에 읽어낼 수 있으리라.

 

윤고은의 불타는 작품은 도입부를 읽다가 잠시 접어둔 상태이다. 내처 읽게하는 어떤 의욕이 갑작스레 식었기 때문인데, 아마 다른 책들을 모두 읽고나면 새롭게 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서윤빈의 소설집 날개 절제술은 표제작보다는 단편 리튬에서 내 눈이 밝아졌는데, 주인공의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과학적 논리, 즉 전자제품의 고장 수리에 동원되는 원인추구 접근 방식과 그의 훼손된 인간관계가 대비되어, 또 하나의 현대적 인간상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아무튼 천천히 그리고 세심히 읽어봐야겠다. 허연의 시집은 출판사가 일종의 리바이벌을 노려 재출간한 것 같은데, 작고한 손상기 화백에 대한 몇 몇 시(), 시집을 가득 채우는 비애(悲哀)의 유혹이었다고 해야 할까?

 

다섯 권의 해외문학 중 정작 의욕이 집중된 책은 중국 소설가 장웨이의 漁神을 찾아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이다. 장웨이의 책은 3편의 중편 혹은 경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어신을 찾아서는 순박한 인물들과 자연을 배경으로 동화적 주제를 펼치고 있어 모처럼 긴장을 놓은 채 글 속으로 빠져드는 평온함이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무거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 무엇보다도 이야기 구조와 언어에서 무게를 제거하고 싶었다.(81)”라며, 다가오는 새 천년(21~29세기)의 문학의 특질에 대한 문학론을 여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은 책의 옹색한 외장편집과는 달리, 문학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시선을 전해준다. 아무래도 내 것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몇 차례 반복 읽기의 과정을 통해야 할 것 같다.

 

철지난 낭만적 서정시인 푸시킨의 시집은 가끔씩 건조해진 마음을 달랠 때 읽으려 구입 한 것인데, 내 감성이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욘포세의 소설은 무려 100여 쪽을 읽어나갔으나, 하나의 진전된 문장을 더하기 위해 그 반복되고 반복되는 동일 문장들의 누적을 읽는 것은 정말 지루한 인내를 요구하는 듯하다. 아무튼 이 정도의 인내 끝에 무엇이 있는지 더 나가 봐야할 터. 줄리언 반스의 작품들은 이미 모두 갖고 있는데, 새로운 장정의 유혹에 못 이겨 인간 생애의 절대 주제인 사랑의 기억을 얘기하는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The Only Story)에서 고통과 매혹을 느끼게 될까?

 

11월은 어쨌든 내겐 문학을 읽는 달이 되었다. 아마 잠시만이라도 퇴행의 멍청한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혼란한 마음이 진정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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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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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morals)인 것이다.” -15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지만 역사적 뿌리가 천박한 단어라며, ‘보헤미아인으로 자처했던 농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소설론(小說論)이다. 6부로 구성되었으나 역자(譯者)의 요구에 의해 쿤데라의 이스라엘 문학상 수상연설7부로 추가되어, 밀란 쿤데라가 숙명처럼 여겼던 ‘7’이라는 숫자를 완성해, 이 위대한 소설가에게 경의를 표하려 했던 듯싶다. 성급한 독자는 책의 끝에 수록된 이 응축된 연설문(예루살렘 연설)에서 쿤데라의 소설문학에 대한 일관된 의지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히 그의 소설론이 집약된 명문장이기에 역자의 구색 맞추기 편집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세계와 인간을 정의하는 데 있어 소설의 입지 혹은 지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기에 인용해 본다.

 

한 세계의 정신이란 예술, 특히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린 채로 오로지 사상과 이론 개념들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기차를 발명해냈고, 헤겔은 보편적 역사 정신 자체를 포착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지녔던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21

 

데카르트가 문을 연 근대 이후, 잘난 척하며 마치 과학과 철학이 시대정신을 해석하고 확신했다고 우쭐거렸지만, 근대성이라는 이 진보는 오히려 인간의 시선을 축소하고 멍청함만을 진보시켰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학과 이론이 감지하지 못한 인간 정신을 발견하고 그것의 이유에 대해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범주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소설의 소명에 대한 이 주장은 밀란 쿤데라의 초지일관한 소설의 세계-()’ 역할이고 소임이며 존재 이유이다. 세계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수학적 개발의 대상으로 축소하여 인간의 삶으로부터 구체적 세계를 제거해버려 단편성만을 보게 한 과학의 합리주의적 이성에도 불구하고, 근대는 이것만으로 이해될 수 는 없는 것이며, 소설은 바로 이것이 배제한 인간 삶의 가능성에 눈을 돌려 동굴에 갇힌 인간을 넒은 지평으로 끌어낸 것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시작인 1부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다. 신이 선악과 가치질서를 규정하던 이 세계를 떠나자 돈키호테는 집을 떠나 드넓은 광야로 나섰다. 세계를 과학적 이성으로, 유일한 절대 진리를 선언하던 때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세계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함을 알았으며, 불확실함의 지혜라는 유일한 확실성으로 인간 존재를 망각하기 시작한 근대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시대의 이성이 인간 존재를 망각했을 때, 소설은 모험하는 인간을 통해 근대적 인간이라 선언된 것과는 다른 상이한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소설은 심판관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상대적이며 애매해지고, 흩어진 진실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의 소설은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린 세르반테스, 다시 말해 유럽 소설문학의 적장자임을, 자신이 바로 그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일종의 소설의 역사, 그 계보를 읊는다. 드넓은 지평(인간의 무수한 실존적 가능성)에로의 모험은 발자크에 이르러 경찰, 법률,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제도라는 건축물들의 배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플로베르의 보바리에 이르면, 집 마당의 울타리만큼 좁아지고, 돈키호테의 모험은 감당할 수 없는 권태 속에 꿈과 몽상에 자리를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금 사회라는 역사의 힘에 인간 장악을 넘기면서 그 신통력을 잃었을 때, 돈키호테의 세() 세기에 걸친 여행은 카프카의 측량기사 K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 모험은 고작 서류상의 하자로 관리와 말다툼하는 모험으로 정말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었음을 주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서 발자크를 지나, 카프카로 이어지고, 유럽소설 문학의 정통 계보의 후예로서 밀란 쿤데라, 바로 자신의 소설이 있다는 간접적 선언일 것이다.

 

근대의 이성이란 것이 과학과 합리주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떠들 때, 소설가들은 바로 그 이성이 계승된 인간의 가치들을 하나씩 좀먹어 들어가는 역설적 세계를 발견하고, 규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공인된 가치 체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세계는 하셰크나 카프카가 발견한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네들이 상상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오늘의 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하고만 싸워야했던 평화로운 시기는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하셰크, 카프카, 무질, 브로흐는 영혼을 벗어난 바깥, 외부에서 온 힘과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모험에 나서야 했다고 지적한다.

 

이제 인간은 비인격적이어서 다스릴 수도, 예측 할 수도. 이해할 수 도 없는 외부의 힘에 장악되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것을 느끼고 고통에 방황한다. 그래서 이 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현대사회의 특성은 이처럼 세계 모든 것이 축소되는, 사회적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민족의 역사는 몇 개의 사건으로 축소되며, 그마저도 편향된 해석으로 축소되는, 축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방이 깜깜해지고 존재가 망각된 세계이다. 소설은 이 때문에 세르반테스가 근대 이성으로 인한 존재 망각에서 인간을 건져 올리려 했던 시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된다. 쿤데라는 그래서 말한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切下)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 소설의 작품적 위상 또는 가치를 낮추어 보는시선에 대항한 표현)

 

2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4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은 쿤데라의 소설 작품을 기반으로 한 소설론에 대한 대담이고, 6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 어()은 그의 각 작품상의 키워드(핵심 주제어 및 주인공의 상징적 약호 등)의 사전(辭典)적 기능으로서 일종의 미학적 진술과 작품의 번역 및 출간에 대한 해명과 소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부에서는 소설이란, 자아의 수수께끼에 대한 관심이라며, 나는 무엇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으로서 소설 역사의 시대구분이란 이 물음에 관한 상이한 대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행동과 모험뿐이었으며, 디드로에 이르러 행위와 자아의 간극, 즉 행동으로부터 인간을 포착할 수 없음에 대한 고민으로 내면의 삶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인간 내면적 탐구는 그 극점인 프루스트와 조이스에서 정점을 이루고 불충분한 추구로 막을 내리지만, 자아를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 카프카를 통해 새 지향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소송의 요제프 K, ()의 측량기사 K는 개별적 존재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로 이름, 외모, 버릇이나 행위, 하물며 자유로운 영역에서조차 제한되어 있는 존재로써 현재의 상황만을 빙빙 도는, 자신들의 내면적 삶은 모조리 자신들을 옭아맨 상황에 휩쓸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프루스트의 경탄으로서의 내면적 세계와 달리 카프카의 내면세계에는 이렇다 할 내적 동기도 없으며, 그 동기에 관심조차 발견 할 수 없다.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이기에 남아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찾는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현대적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 밀란 쿤데라 자신이 카프카의 후예, 세르반테스라는 유럽 소설 문학을 잇는 적통자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이 세계에는 역사 기술을 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소설이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소설은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특정한 시기의 사회를 묘사하는 역사적 실제를 말하는 부류의 소설이 아님을 강론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황으로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며,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를 통해 사라져가는 가치훼손의 역사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발생시키는 실존적 상황으로서 역사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된 역사의 상황에 따라 발견되지 못했던 새로운 인간을, 낯설지만 현재하는 인간을 찾아내고 세상에 묻는 것이다.

 

5저 뒤쪽 어디에라고 명명된 논설은 현대사회 속에서의 인간 실존 가능성의 한 발견으로서 카프카를 말하고 있는데, 카프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녔던 통찰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예견적 발견이었기에 오늘의 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매력적인 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은 단 번에 이거 카프카 아니에요? 혹은 카프카적인데. 라고 말하곤 한다.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이 있으며,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인 것으로 그려지며,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합리화하고자 벌이 잘못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측량기사 K를 떠올려보자. 그는 관련된 모든 행정관청들이 시효가 지나 까맣게 잊어버린 명령이 관료적 착오에 의한 사소한 장난으로 보내진 초청장에 의해 성으로 간 것이다. 결국 측량기사 K는 실존 자체가 하나의 착오이고, 착오 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사회활동은 거의 모두 관료화되어 있으며, 제도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로 바뀌어 있다. 이렇게 관료화된 사회의 권력은 점진적으로 그 자체가 절대적이고 신격화되는 경향이다. K처럼 개인은 원인과 동기를 어디서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저질러지지도 않은 죄로 벌 앞에 선 요제프 K처럼,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면밀히 검토해보는 것이나, 마침내 스스로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가 작동하게 하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현대라는 역사의 시간 속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양태이다. 즉 카프카의 세계는 인간과 세계가 맺는 원초적 가능성,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외로움의 저주라 지적한다. 즉 현대의 인간에게 닥친 가능성은 내면적 침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제프 K나 그레고르 잠자 모두 침대라는 내적 공간을 침해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라고 느낄 수 없는, 더구나 이들은 모두 명령과 규율에 복종하여야 하는 존재의 세계 속에 있다. 즉 근원적 존재방식이 하나의 관료화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거대한 일부밖에 보지 못하고, 목적과 전망을 보지 못한다. 복종과 기계와 추상의 세계에서 사는 관료화된 현대적 인간에게 모험이란 고작 관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존재이다. 이 길고 긴 소설론은 결국 인간의 실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적 소명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 속도를 더욱 높이며 과학기술의 진보, 합리주의 이성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모든 정보와 이야기들은 매스미디어의 수중에 장악되어 통합과 획일화로 치닫는다. 이 획일화는 인간의 시선을 극단적으로 협소하게 만들고, 급기야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 같은 내용들만이 맴돌게 된다. 설혹 정치적 상이함을 말할지라도 이러한 표면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감추어진 이면인 시대정신이라는 것의 똑 같은 어휘와 똑 같은 예술과 취향, 똑 같은 형태, 똑같은 문체, 중요한 것과 시시한 것을 가리는 기준마저도 똑 같은 것만이 떠돈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을 말하는 소설조차 이에 휩싸이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한국 소설 문학에도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들로 점점 진실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다.

 

쿤데라의 비판처럼 소설 아닌 소설의 무늬를 뒤집어 쓴 것들이 우리들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시켜, 현재에 매몰된 동일성의 문학을 쳇바퀴 돌 듯 양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미래와 조화를 이루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미래문학, SF문학이나 전위문학이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은 용감하고 어렵고 고무적인 창조 작업이라 주장하겠지만, 시대정신이라는 지배적 권력에 토대를 두고 미래가 자신들을 정당화해주리라는 확신을 은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가지고 논다는 것은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강하다는 이들의 숨겨진 기반 논리는 수구적인 나쁜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요즈음 한국 소설문학에서는 이 엄청난 풍파를 겪는 사회로 인해 돌연히 그 실존적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소설에는 이러한 발견의 성찰이 없어 보인다. 이 세계와 복잡해진 인간의 정신은 풀어야 할 대상, 즉 앎의 열정을 요구하는 대상이다. 현실에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별난 실존 가능성이 현재적으로 펼쳐져 소설이 말을 잊은 것인가?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는데 웃게 만드는 것, 이 재미도 위안도 없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카프카적인 한국의 소설가를 상상해 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작품에 들어가기 전, 혹은 다시 읽어보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론은 어마어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니 왜 소설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은 무엇을 써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거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적어도 삶의 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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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리커버 특별판)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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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여러 다른 시대, 다른 질서를 요구하는 현실에 때론 순응하거나 저항하며, 삶을 견뎌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 변화하는 그 질서와 무관하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처럼 외부에서 적응을 강요하는 사회적 힘의 존재와 무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진장한 내적 긴장과 외적 경계를 요구할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가 기술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개인의 심적 변화와 행위에 대한 고독한 투쟁을 보았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로서의 문학이 역사를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보았다고 해야겠다.

 

거창하게 권력관계의 변화, 전쟁의 발발, 인종말살, 이데올로기 대립과 같은 시대 전환적 사건들이 사회, 국가, 세계에 미친 영향들과 같은 역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질곡(桎梏)을 통과해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의 형상, 두려움, 버려짐, 고통과 인내, 이것들이 응고되어 침전된 생()의 시선으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규명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대를 통과해 온 에메렌츠라는 한 나이 든 여인이 바로 이러한 역사의 실존적 가능성의 발견일 것이다.

 

이야기는 전업 작가인 작중 화자의 집과 그녀의 가족을 20년 넘게 돌봐주었던 에메렌츠의 삶의 기원들과 행적들의 회고이다. 사실 소설의 줄거리는 '(door)'이라는 소설을 시작하는 장()에 이미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인 꿈의 이야기지만 이것이 현실의 작가를 하나의 의식으로 끊임없이 몰아대는 이유는 해소되지 못하는, 아니 해소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했다는 말도, 여기서는 그 사실 관계를 바꿀 수 없다.” 죄의식!

 

어쩌면 이 죄의식이라는 것은 화자인 작가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고 해석하고 싶어진다. 사회와 국가가 외면해온, 질서를 강요해 온 권력들의 무도함이 만들어 낸 희생물에 대한 애도(哀悼), 참회(懺悔), 환기(喚起)일 것이다. 전업작가로 전환하면서 작가는 집안일을 돌보아 줄 사람으로 에메렌츠를 맞는다. 아니다. 에메렌츠가 그들을 돌보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올바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에메렌츠는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사람으로 다가오고, 작가가 에메렌츠의 관계망 속에 자리잡기까지 그녀에겐 여성 작가도 부인도 아니었으며, 필수불가결한 접근만 허용된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집안 일 외에 그녀가 사는 공동주택의 관리인이며, 건물 11곳의 제설작업까지 맡고 있다.

 

그녀의 삶은 가히 초인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자신에게조차 자비없이, 노동으로 꽉 채워진 2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년 넘는 두 사람의 동행에서 작가와 에메렌츠의 심적 대치 국면들이 소설의 전반부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 대치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상대에 대한 평가로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만큼 이 둘의 감정적 교류에는 위선이 없다. 에메렌츠는 작가부부의 삶에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지만, 이는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시간으로부터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화자는 에메렌츠에 대한 의혹과 불신, 몰이해를 한 동안 유지하지만, 남편의 폐종양 수술로 감정적 고통을 겪는 작가에게 베풀어지는 에메렌츠의 투박하고 거친 보살핌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에메렌츠에 대한 세간의 소문들과 억측들을 점진적으로 무력화시키며,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정치인들의 허언, 정치적 처형과 전쟁이 앗아간 남자들의 목숨, 남아있는 여인들의 처절한 고통들, 그리고 겹친 불행의 순간들은 어린 소녀 에메렌츠의 삶마저도 어둡게 내리누른다. 불행과 고통의 존재로 내던져진 여자아이는 유대인 부부의 하녀로 팔려가게 되고, 그녀는 세상의 곡해된 증오의 제물이 된 유대인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념의 헤게모니싸움으로 갈라져 참혹하게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에서 그들이 규정한 질서와 무관하게 도피처를 찾는 상처난 이들 모두를 숨겨주고, 사랑을 베풀지만 그녀에겐 배신과 갈취의 흔적만이 남는다. 한 여인에 대한 압축된 나의 묘사는 조각조각 작가에게 에메렌츠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와 작가가 이웃들, 에메렌츠의 유일한 조카, 그녀의 고향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아들은 자취들의 짜맞춤이다. 이 이야기들, 특히 에메렌츠가 작가에게 직접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는 작가의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보일 때 혹은 선한 의지에 대한 교감이 있을 때만 가르침처럼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이들 이야기의 편린으로부터 한 여인, 한 인간의 현재적 삶이 왜 그러해야 했는가를 우리는 어설프게 구성할 수 있다. 에메렌츠의 집 문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열린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그 문은 항상 굳게 걸어 잠겨있으며, 그 폐쇄적 공간에는 침대도 없으며, 오직 아홉 마리의 고향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누워서 자지 않는다. 그녀는 끊임없는 도움과 노동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철저한 냉담함으로 감싸인 천상의 성녀, 그녀라는 존재의 모든 중요한 부분들을 덮고 있는 에메렌츠의 하얀 머릿수건처럼 걸어 잠겨진 문은 그렇게 한 인간의 내적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숨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연민이자 사랑이고, 보이고 싶지 않은 흉터이며, 고귀한 영혼이며 남루한 현실이다. 그녀는 이것들, 세상의 비뚤어진 시선, 몰이해에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눈이 내리면 새벽처럼 동네의 길에서 빗질하는 에메렌츠가 보이는 듯하다. 작가는 20년 넘게 그런 에메렌츠의 돌봄으로 영예로운 국가 최고의 문화훈장을 수상하게 된다. 그때 에메렌츠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자신의 집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열지 않는 문, 그 집안으로 단 한번 들인 사람은 오직 작가 한 사람 뿐 이었다. 에메렌츠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녀의 실천적 삶이 보여주는 생의 교훈으로부터 작가는 자신의 바보같은 오만함을 조금씩 벗어나고, 두 사람은 소름끼칠 정도의 냉소적 교류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확신했다. 작가는 에메렌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군가 조건 없이, 아낌없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 말고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작가는 에메렌츠의 닫힌 문을 열어 그녀가 방치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에메렌츠는 마비된 몸으로 찾아 온 작가에게 문틈으로 고양이의 사체를 담을 작은 나무상자를 가져다 줄 것을 요청한다. 에메렌츠는 그 누구도 그녀의 집안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내적 세계로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다. 들어가게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작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에메렌츠의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악취는 임박한 죽음처럼 그녀를 살려내야 한다는 딜레마가 된다. 상자를 가져다주는 기회에 그녀를 구해내 병원으로 호송해야 한다고 에메렌츠의 염원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다. 의사와 이웃들에 에메렌츠를 넘겨주고는 임박한 자신의 강연을 위해 그녀와 그녀의 집안을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에메렌츠는 이미 뇌졸중으로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으며, 악취가 진동하는 집 안에는 이웃들이 문틈으로 전해준 음식들에 구더기가 들끓고, 몇 안 되는 세간들은 안간힘을 글어 모으던 그녀의 흔적들로 흐트러진,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져 있다. 에메렌츠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이 그토록 타인들부터 지켜내고 싶었던 완벽성, 철저한 완전성이 파괴되도록, 그 은닉된 것들이 드러나도록 작가는 방치한 것이다.

 

이 소설에는 삶의 이해방식에 대한 지극한 엄밀성과 섬세함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 또는 응축된 감정의 치열함을 통한 사랑의 예찬’, ‘창조적 성취의 이면에 있는 열정적 헌신으로 이루어진 돌봄 노동에 대한 존경의 고백이라는 찬사어린 감상들이 있다. 이들 진심어린 감상처럼 작품의 수면아래 낮게 그러나 도도하게 분명 흐르고 있어, 격렬한 감동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독자에겐 커다란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감상의 글 모두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 작품을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를 쓴 것이라고 읽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실존의 역사적 차원을 검토하는 언어로서, 소위 세계--존재로서의 인간 개인의 변화를 목격하게하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이나 사회, 정치학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사람들의 잊혀진 삶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고 읽는다. 역사로서의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만이 말 할 수 있는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는 이야기라고.

 

즉 작가는 실존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독자로 하여금 누군가를 보게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소설의 축을 이루는 두 인물, 작가와 작가의 가족 살림을 돕는 에메렌츠라는 여성의 20년 넘는 삶의 동행에서 겪는 치열한 심적(心的)대치와 가치의 충돌이라는 격전의 시간에 펼쳐진 마음과 육신의 교감, 그 속에 진술되는 기억과 현재적 일상이라는 증거를 통한 확증에 의해 또 따른 역사의 진술을 하고 있다고.

 

이 엄청난 작가를 어쨌든 지금이라도 읽게 됨으로써 나는 역사를 말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사실 시대의 시간 속에 살아내야 하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실존적 가능성의 면모로부터 역사를 말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인간 시선의 협소화를 강요하는 20세기 문명 속에서 그 축소된 개인주의의 편협성을 돌파하며, 인간의 심적 지평을 확장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할은 작중 화자인 작가가 맡고 있으며, 세계대전을 전후한 그 전환적 사건들을 살아낸 독특한 한 여인(에메렌츠)의 삶의 모습에서 그 실존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말을 하는 것. 그것은 돌봄 노동에 대한 겸허한 존경으로, 좀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처절한 죄의식의 인지로서 말하는 것일 게다. 그 어떤 역사기록보다,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내게 끼친 영향이 큰 책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나만의 소설이다. 들여다보지 말아야 했을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이 세계의 그 악취, 치욕스러움이 죄의식과 함께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스며들게 한 작가에게 존경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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