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들, 행인들 을유세계문학전집 7
보토 슈트라우스 지음, 정항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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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엘리네크와 함께 20세기 독일 문학예술의 삼두마차로 불리던 보토 슈트라우스(1944~)사랑, 고향, 문학, 회상이라는 네 가지 주제의 연작 형식의 에세이다. 202482세의 노령에도 신작을 발표할 만큼 창작활동이 활발한 인물이다. 작가의 성향은 그의 글 속 한단원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낙오자들이나 폭도들 또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아직도 정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경찰이 친히 나서서 냉정함이라는 사람의 전략을 근거로 두들겨 패서 정상적 기준 속에 처넣어야 되지 않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어, 저절로 그렇게 될 텐데. 삶이란 그런 것이다.” - 차량의 강물, 105쪽에서

 

이 문장은 굳이 해석하지 않겠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라는 에세이에서 완성된 모든 글은 작가가 자신도 예견치 못한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누구도 예외없이 쓴 글에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쓰고 있다. 자신만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들인 이 에세이에는 딸기가 수북이 담긴 쟁반 위에서 가장 좋은 딸기만을 주워 담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식의 체리피킹(cherry-picking)의 얄궂음을 보게 된다. 그는 예술비평 담론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영락한 자기중심적인 소박함이 아주 진부한 말들로 견해를 주도하고 있다. (...) 예술 작품을 비판적인 사용 가치에 따라서만 면밀하게 검토하고, 주관적인 관련성이나 천박한 사회비판주의의 검사대 위에서 평가하는 악습은 예술이 가진 자유로운 상징적 기본 질서를 어느 정도 침해한다.” - , 117쪽에서

 

비평 담론은 싸잡혀 천박한 비판주의요, 영락한 자기중심적 소박함이며, 진부한 말들이고, 자유로운 상징질서를 침해하는 악습이 된다. 타인의 비판은 주관성에 매몰된 진부함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주관성만은 독자적 예술의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궤변을 천연덕스럽게 미문으로 포장하는 인격은 괴기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시인 옥타비오파스의 진정한 작가는 맨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의심한다. 문학은 누군가가 내가 말할 때, 내 안에서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한다. 아무튼 자기성찰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면서 자성을 옹호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일지 당혹스러움 속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막대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읽기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아주 작은 영감의 불씨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상의 기대심리 속에서.

 


1. 첫사랑, 첫키스, 도달 불가능한 강도의 경제학(economy intensive)’

- 감각의 제국,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그 파국의 형상을 중심으로

 

물론 긍정의 읽기를 한 순간이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가장 분량이 많은 에세이 커플들들이 제일 앞에 수록되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 책을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등 뒤에 유토피아를 만든다. 이 보잘 것 없는 파트너 관계의 근원도 행복과 노래로 넘쳐나던 아득한 옛날에 있다. 그러나 시작은 이제 꽁꽁 얼어붙은 경직된 순간으로 바뀌어 (...) 꽁꽁 얼려 냉동된, 그래서 별로 영양이 풍부하지 않은 여행용 식량과 같은 바로 그 최초의 시기가.“ - 커플들, 9쪽에서

 

이 회상의 작가는 이후 그의 모든 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말한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권태와 혼란 속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무미건조해진 사랑의 냉기를 그려낸다. 이어지는 글들에서 현대의 육체적 관계만 갖는 사이의 남녀로 이동한다. 마치 최초의 저 지나가버린 인생 1라운드의 열정, 사람을 흥분시키는 저 보존된 사랑의 흔적, 그 쾌락을 찾아 헤매는 애정 없는 사랑의 관계들로 귀결된 오늘을 비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새로운 기회들과 교류하고, 새로운 외적 자극들로 신속히 주거지를 바꾸는 오늘의 파트너들에게서 작가는 소망하는 것과 주어진 것이 항상 단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는 이러한 교류에는 약속된 결합은 생겨날 수 없을 것이라고, 오늘의 세태에서 숙고해 보아야할 현대 성애에 은폐된 의미를 묻는다.

 

순수한 성애가 사랑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광기라는 이미지 속뿐이다.”

- 커플들, 60쪽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치나 규칙 또는 문화전체, 즉 형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사랑의 기술, 섹스의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도 사회적 제약이라는 밀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때문에 이러한 현실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광기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을 하는 보토 슈트라우스에게 놀랐는데, 지배질서의 어떤 영역에서 탈주하는 자들은 미쳐야 가능한 것임을 알기에 그의 이해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등장인물 창녀 사다가 자신이 살해한 애인의 왼쪽 허벅지에 새겨놓은 우리 두 사람 영원히라는 글귀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첫 만남의 황홀을 영원히 박제하려는, 1라운드의 무한한 육체의 시간의 소멸에 대한 반항의 행위로 해석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본적 딜레마를 다룬 기초적 교훈이라고 말이다.

 

결국 보토 슈트라우스는 최초의 황홀이라는 지나가버린 쾌락, 되찾고 싶은 쾌락을 통해 회상의 감미로움, 회상의 미학(예술)을 말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넘어 욕망의 운동, 그 본질인 현대 자본주의 속성을 드러내고 말게 된다. 그가 수호하고자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영원한 성장, 영원한 혁신, 영원한 소비를 요구하는 욕망의 형식을 말이다. 첫 키스, 첫 사랑, 첫 혁명, 첫 승리, 첫 성적 황홀 등 이 예상치 못한 강렬한 경험은 두 번 다시 동일한 강도로 경험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점점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행위, 더 철저한 독점을 추구하고, 한 번 경험한 그 절대적 강도를 반복하려는 욕망은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른다. 그래서 보토는 욕망의 끝인 도달 불가능한 회상 재현의 욕망의 끝인 파괴를 읽어내지 못한다.

 

2. 시간의 물결과 진리의 관계, 비판담론과 지양(止揚)에 대해서

 

현대 사회는 욕망의 결핍으로 괴로워하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쾌락 가능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끝없이 동원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 운동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보토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감각의 제국의 두 연인의 광기는 잃어버린 최초의 황홀을 현재화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결코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 자기증식 운동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욕망의 형식이다. ‘>상품>더 많은 돈이라는 자본의 회로는 욕망>만족>더 큰 욕망이라는 욕망의 회로와 닮아있다. 여기서 감각의 제국의 비극성이 드러난다. 극단적 에로티즘과 극단적 자본주의는 둘 다 한계를 초과하려는 운동이다. 그 초과의 논리가 육체를 파괴하는 순간을 그린 현대성에 대한 우화가 바로 오시마 나기사가 의도한 영상일 것이다. 보토는 예술은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미학적 기호, 유희에서 느끼는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례로서 오기사의 영화를 설명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 사회 비판을 중심 의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는 분명 잘못 이용한 것일 게다.

 

大島渚(오시마 나기사)감독感覺帝國에서


그는 이 최초의 욕망의 강도에 대한 그리움, 회상을 말하면서 시간이라는 속도, 점증하는 가속화에 모든 존재는 전면적인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면서 이 법칙을 벗어나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좌파의 세미나를 통해 발간된 무수한 책들이 몇 년 전 겪은 운명과 똑같이 서점의 계산대 한 모퉁이의 전문서적코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증오의 말을 쏟아 놓는다. 그러면서 가장 철저한 진리조차도 잠시 머무는 하나의 물결에 지나지 않을 운명을 맞이하기에, 그 비판적 발언에 대중은 싫증을 느끼게 되고, 사회운동 역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최소의 시도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싫증은 우리 인간 문화의 절대적 지배자이기에 파국을 말하는 비판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에나 정말의 파국이 찾아 올 것이라고 비판담론을 폄훼한다.

 

그런데 파국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국을 예견하는 목소리가 파국을 막는 것이고, 그 파국의 목소리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파국이 발생하는 것이니, 파국을 말하는 비판담론은 헛된 것이 아니다. 비판을 고작 싫증, 염증, 피곤함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자기 직시 회피, 비판을 거부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가속화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빛바랜 누추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고 여전히 진실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과 미래의 삶에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만날 때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라는 지양(止揚)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보수성을 비난한 적이 없다. 그저 이러한 지양 없이 몽매와 편협으로 과거를 붙들고 신봉하는 것을 보수라고 우길 때 그것을 나는 비판하는 것이다.

 

3. 문학의 몽롱함, 회상의 미학이라는 이면(裏面)

 

보토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에 천착한 낭만적 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19세기 독일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를 설명하면서 그의 회화들에 대한 도피적 몸짓과 복고적 도취’라는 비평을 비판한다. 포이어바흐는 초기 산업사회의 비참한 시대에 등을 돌리고 인문주의 이상을 쫒은 진정한 창작 예술가라고 말이다. 비방하려면 예술분야 내의 진보주의가 지금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녀야만 할 것이라고 비평담론이 현재라는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현재성에 얽매인, 곧 시간의 풍파로 사라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이러한 비난은 정의롭지 못한 악의에 불과한데, 현재라는 동시대의 안목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그 어떤 담론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가히 절대적 상대주의의 궤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은 매우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담론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매도하는 글쓰기는 비열하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안셀름 포이어바흐가 현실 도피로서 그리스 로마제국의 예술을 소환한 것은 다분히 곧이어 다가올 훗날의 독일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폭넓게 세계지성들에 의해 비판받는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 19세기 말 독일 지성인들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 열광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아리안 족의 순혈성(純血性)을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타자 배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출산하는 정치문화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훗날 나치가 남긴 참혹한 인류 역사인 까닭이다. 보토는 나치에 대한 그리움, 파시즘의 복귀에 대한 회상에 젖어 비판 담론들을 천박한 비판주의라고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 나치의 폭력인가? 파국을 외치는 비평가들인가?

 

보토는 이런 얘기까지 쏟아낸다. 제기발랄하면 할수록 그 속에는 깊은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톡 쏘는 이성은 멍청하다.” 물론 재담들에는 무모와 편협, 우둔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제기발랄의 이성이 모두 멍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 곰브로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 무모하고 편협하며 우둔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깨어있고 섬세하며 정신이 예리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자기 논리 옹호의 문장을 인용하며 몽롱함은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론 모호성, 흐릿한 몽롱함은 문학의 전반적 기술의 하나인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몽롱함이 제기발랄의 톡 쏘는 이성의 멍청함과 대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토는 플로베르, 샤르트르까지 발췌하여 몽롱함을 그들의 무감각증, 기면증, 격정적 태만함과 비교하면서 마치 무슨 문학의 절대가치나 되는 양 자신의 회상의 미학을 포장한다. 보토의 회상, 명석한 기억이 아닌 몽롱하고 흐릿한 불분명한 기억으로서의 그리움, 자신이 자라난 옛 집이 있던 시절, 과거로의 회귀를 예찬한다.

 

현재의 열정을 비난하는 이 작가는 몽롱함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야기꾼에게 있어서는 지각의 필수 불가결한 수단인 동시에 아주 가까운 주변의 매우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실회피와 과거 복귀에의 열망을 더없이 정당화한다.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히치콕의 를 대비하며, 브레히트를 멍청한 이성으로, 또한 억견(臆見)으로 매도하며, 히치콕을 신화의 일부로서 이 땅의 순수이미지의 개가(凱歌)라고 말할 때 정신 비판 지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극한에 이르러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보토의 신화에 대한 환상과 집착, 즉 과거의 흐릿한 전설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은 그의 독일민족 순혈주의, 나치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의 광휘로 덮어 쓰려는 기만성으로 비친다. 황혼/여명; Dämmer이라는 글의 한 문장은 캐리어를 안고 자신의 차 앞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아이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성적 향응을 받는 이야기 끝에 먹물을 온통 뒤집어 쓴 몽롱함에 의탁한 아래와 같은 기만적 언어의 향연을 펼친다.

 

인간의 성애와 그 문화는 신화의 저장고였다. 이 잠적해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사는 고요한 신들의 세계, 피곤한 상태에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친 욕망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를 들어 올려 우리에게 선사한다.” - 황혼/여명, 135쪽에서


음란함이 지배하는 인간 왕국을 신화화하는 글장이의 솜씨는 얼마나 교묘하게 세련되었는가. 이 글장이 극작가는 현재의 비판을 이렇게 신화라는 과거의 영예 속으로 침수시켜 그 더러운 죄악을 회상, 몽롱함이라는 신비의 심연 속으로 수장해 버린다. 여기에는 역사라는 것도 없고, 만일 이 글장이가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흐리멍텅해서 사실 또는 진실일 수 없는 모호함이 되어버려 부정될 것이다. 사실 이 40년이 지난 케케묵은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내 불찰이지만, 그 어떤 책이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면교사로서, 아니 생각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유럽의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주류 예술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옐리네크의 반대 자리에 있는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로 인해 잊고 있던 오시마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다시금 복기하는 시간이 되었음은 작은 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발칙하기까지 한 인간 관찰자의 흉물스러운 시선이 느껴지는 불쾌한 관능이라고 해야 할까? “회상 자체는 다정하며, 정신적 승화의 선물인 것이다.”라며 고향집 란 강변 천 년 된 떡갈나무 옆에 있는 제국 직속 도시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며 회상에 잠긴 장면의 묘사는 얼마나 끔찍했는지. 급류에 휘말려 뒤집어진 보트로 인해 물속에 빠진 소녀를 비젠트 강변 둥근 바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이 사태를 거만하게 관람하던 남자(작가로 짐작되는)가 소녀를 건져 올리며 잠시 동안 중단된 소녀의 삶, 그녀의 어린 얼굴에 남겨 놓은 달콤한 공포를 즐기는 모습에서 파시스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아무튼 내 지평의 영역에 없던 글을 이렇게 예기치 않게 읽게도 된다. 몽롱함, 회상, 사랑의 광기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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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2026 5.6 -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 사상계 통권 212호, 재창간 7호
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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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은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라는 ()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 그릇된[],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과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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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심금을 울리는 글입니다. 적극 동감합니다!

비의식 2026-06-02 12:22   좋아요 1 | URL
우리 사회의 도처를 갉아먹는 좀벌레들을 어떻게든 청산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차트랑님 동감의 댓글 고맙습니다.
 

분석 비판하려는 관념에 장악된 그늘진 정신의 무게에 짓눌린 나를 느낄 때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작가의 소설들은 제 아무리 힘겨운 삶에 직면한 인물일지라도 그 무게를 오히려 가벼운 무엇으로 인식하게 할 만큼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좋은 정조(情調)의 발랄한 생기로 전환시킨다. 그 작품들의 통통 튀는 밝은 기운을 내 마음에 잔뜩 흡수하고 싶은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분석하는 마음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문장들과 이야기가 발산하는 젊음의 생동감, 그 미완의 풍부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유쾌함과 명랑함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이 작품집은 작가의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재구성된 단편선집이다. 선집의 표제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첫 문장은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로 시작된다. 수진은 연인 성재와 이별했지만 짐짝처럼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 그 남는 사랑을 팔기로 한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친구 영인이 수진에겐 필요없는 사랑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고, 수진은 냉큼 받아들인다. 감정전이센터를 찾아 기증자 수진은 수령자 영인에게 전이할 감정을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이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인의 남편 민후의 말처럼 무슨 장기 이식 하듯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되겠는가.

 

사랑이 끝난 자리, 사랑을 잃은 자리에 남거나 비어버린 곳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그래서 약이 되고 마음의 굳은살이 되는 시간의 신비에 의존한다. 사랑이란 이미 누군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펴 이 진실을 음미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는 그때 가서화자의 이름도 수진인데, 아쿠아리움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엉덩이가 근지러워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유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수진의 이 직업을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녀의 연인 정우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니다.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중요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그저 놀기를 좋아하는 수진으로부터 정우가 떠난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지만, 머릿속은 꽃밭이라는 정우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물적인 새끼.” 어찌 욕까지 악의 없이 무해하게 들리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내게 미소와 활력이 필요할 때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펼쳐 읽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아니 이유리 작가의 소설들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책장 보이는 곳에 꽂아 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설의 대표작이 이 작품 그때는 그때 가서이다.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해파리 보는 것이라는 수진은 투명한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고 목적도 욕심도 없이 그저 흘러 다닐 뿐이기에 흩날리는 꽃처럼 꿈결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 자유로운 생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개장시간인 여덟 시까지 그녀가 터득한 숙련된 노하우로 손발이 맞는 파트너 예순다섯 살 김선자씨와 잽싸고 날렵한 청소일은 결코 대강대강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자신의 일처리에 어떤 긍지마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정우에겐 그따위 것은 누구나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싼 돈 주고 대학까지 나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수진은 말한다.

 

수진아, 제발 어른답게 생각하고 살아. 쟤들은 해파리고 넌 사람이잖아. 쟤들은 집도 있고 때 되면 누가 밥을 주지만 넌 아니잖아.” 정우와 다투거나 싸우고 난 다음 날, 청소를 일찌감치 마치고 해파리 수조 앞에 있으면 뒤이어 일을 마친 김선자씨는 휴대폰에서 맞춤의 음악을 틀어놓고 목청껏 노래를 시작한다.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에서부터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에 이르는 그 절묘한 생의 풍악이 드리웠던 그림자를 거두어간다. 꿍짜라작작 쿵짜라작작 쿵작쿵작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해파리 수조 앞에서의 이 이상하지만 결코 유해하지 않은 무해한 이상함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둘의 이 이상한 순간이 내겐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뭐 있나. 다 그런 거지.

 

민음 북클럽 에디션, 소설집비눗방울 퐁』속 세 편의 선집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 것인가. 미래를 위해 하기 싫은 것을 끈질기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자유로운 비둘기와 해파리처럼 살아가야 하나. 수진은 김선자씨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서”, “돈은 많이 모으셨어요?”라고 말해버린다. 그때 .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몰라서라며, 수족관 앞에서 자신이 노래 부르는 이유를 설명한다. 꼭 지구를 앞에 놓고 부르는 것 같아요. 동그랗고 새파랗고, 그 안에 뭔가 살아있는 것들이 오글오글 돌아다니는 게 그렇지 않아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뭐 그렇게 살면 되지.

 

수진은 정우가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과 해방 된 삶에 대한 생각을 오가지만, 김선자씨의 말 속 뭔가 살아있는 것들의 오글거림’,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열심인 삶, 바로 그것을 즐기는 삶,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는가.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된다. 많은 수진들을 응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그런 것 따위가 무어있겠는가. 생활비 조달에도 빠듯한 월급날 단 한 번 배달앱을 켜 맛있는 것을 먹는 호사(?)는 부려도 괜찮다. 무책임한 소리라 나무라는 목소리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삶이라는 길에 정답이라거나 보편이나 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족한 것을. 바로 그 살아있음의 감정이 죽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에 삶이 삶 같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파란 수조 불 빛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둥근 해파리의 모습을 닮은 이 땅의 수진이들을 위한 유쾌 발랄한 생의 축가 같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읽게 만드는 이유리표 소설이다. 그래서 이 각양의 형태를 지닌 생의 슬픔이 한껏 기분좋게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달리는 무릎에서

 

달리는 무릎의 문장이다. 새벽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話者)가 늦은 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하얀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것이다. 요즘 내가 부쩍 좋아하는 묘사들이 귀여움인 것은 순수에 대한 향수인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도 귀여움이 발산하는 명랑함이 작품 전체의 정조(情調)를 에워싸고 있다. 아홉 바늘을 꿰맨 무릎에 반 깁스를 한 채 자고 났을 때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시스템의 결정으로 공동체에 덜 기여한다고 선택되어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존재의 이 낯선 목소리는 너 같은 사람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중력을 벗어날 추진력을 모아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그 어느 날의 우주 시스템의 생각이란 것에 대해 비난하는 화자의 분개에 마침내 무릎 속 외계 존재 자신도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함을, 그래서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성취를 이루면 돌아와 알려주리라 약속한다. 인간 사회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를 나는 자격증이든 시험이든 그놈의 적성이라는 것을 찾아서바쁜 일과를 보내야 하기에 하루 두 시간의 달리기만을 통해 운동에너지의 흡수를 돕기로 한다. 이윽고 나의 무릎 속 외계 존재가 중력을 벗어날 운동에너지를 거의 모았을 때 그 마지막 흡수를 위한 도움의 달리기를 한다. 좀 더 빨리!”

 

그때였다. 무릎에서 푸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갔어요?”, 대답 없는 우주 존재와의 이별, 손차양을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스템이 옳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있다면 채 싸우기도 전에 져버릴 것을 오랫동안 걱정했지만그 외계 존재의 결심에 초를 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비참해질까봐 말하지 않았음을 떠올리는 화자의 고달픔이 경쾌한 언어로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외계의 존재라는 이 환각, 혹은 환상의 존재는 화자인 의 반영, 나의 소망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고된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홀로 뛰던 천변의 달리기는 어느덧 외롭지 않은 두 존재의 달리기로 공동의 목표를 위한 행위가 된다. 그리곤 이 이별이 비록 기약없는 이별이긴 하지만 언젠가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이겨 돌아올 기대를 가진 응원과 기대를 품은 이별이기에 슬픔의 그늘과 달리 밝게 빛난다. 처박힘에서 일어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에너지를 얻는 그 마지막 혼신의 질주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유리표 소설들의 이 밝은 에너지인 명랑함, 환한 빛을 비추는 이 발랄함의 정조가 세대를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웃음과 더불어 생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준다. 세 편 모두 이별이 있지만 그것은 상처로 머물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고, 사랑의 핑크빛 숨결처럼 더없이 포근한 생의 위로와 기쁨이 되어 우리들 방황하던 정신을 토닥인다. 이유리 전작주의(全作主義)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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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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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두 사림(士林)간의 성리학 논쟁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논변(論辯), 줄여서 사칠논변(四七論辯)’ 또는 두 사람의 호를 따서 퇴고(退高)논변이라 일컫는, 본체(혹은 실재)()’와 현상인 ()’의 근본이 하나인가 둘인가를 두고 나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서신집이다.

 

고봉 기대승은 이조 정랑, 승정원 좌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인 46(1572)에 병사했다, 퇴계 이황 또한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사림의 거두로 70세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의 나이 차이는 26,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차이이며, 고봉이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던 1558년 명종 13년에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오늘날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니 그 지위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처럼 연령과 그 지위가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퇴계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의 13년에 이르는 편지 일백여 통이 이 책이다. 이들 편지 글은 안부와 정사(政事)에서의 고충에 대한 서로의 위로와 조언, 정치적 처신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바로 사칠논변(四七論辯)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논구(論究)의 글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논쟁(論爭)’이 보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싸움으로 인해, 두 대척하는 의견이 서로 상대의 주장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말싸움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더구나 조선조 붕당(朋黨)의 폐해를 아는 우리들은 이 논쟁을 정치적 세력간의 싸움을 대리한 표면적 학문 싸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때문에 성리학이라는 조선조 독자적 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연구의 기틀이었음을 간과하기도 한다. 모두 그 논변의 내용과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일 것이다. 나 또한 퇴계가 동인(東人)의 시조로 불리게 됨으로써, 특히 이 사단칠정 논변에서 비롯된 훗날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극한의 대립이 조선 후기 동인과 서인의 참혹한 정치적 파당으로 이어진 것에 대한 무모한 책임을 덮어씌우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사실 이 서신집을 읽기 전에 두 사람간의 연령과 지위의 차이로 인해 유교 질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이미 기울어진 논쟁이 아닐까하는, 즉 한쪽의 고압적 자세와 겸허 또는 굴종의 자세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방적 논의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기우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사단칠정을 이와 기로 나눈 변론(四端七情分理氣辯)에 대한 퇴계에게 보내는 반론의 글에 무릇 학자라면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대찬 고봉의 지적 질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저 물렁물렁한 논쟁이 아니구나! 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봉이 퇴계를 한낱 논쟁의 상대로만 여긴 것은 아닌데, 깍듯한 예의와 겸양의 언어, 선학(先學)을 대하는 낮은 배움의 자세와 진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공경(恭敬)이상의 덕목을 보여준다. 학문 연구자로서 고봉의 글은 날카롭고 준엄하지만,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는 더없이 겸손과 존경의 자세로 일관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적 벗, 인간적 이해를 축적해 온 신뢰가 두터워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신뢰의 면목이 드러나는 글들이 있는데, 그대처럼 저와 지극히 각별한 사이에 있는 이조차 제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너그럽게 헤아리지 못하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관직을 받들지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연구를 하고자하는 퇴계의 소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정에 붙들어두려는 고봉에게 서운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고봉을 칭하는 표현도 급제 후에 관직을 받기 전의 고봉에게는 기선달로, 그 후로 최초의 관직을 받자 기정자로, 이후 정3품 관직에 오르자 영공(令公)으로, 잠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에는 고봉의 자()인 명언으로 부르며, 관직의 오름에 따른 칭호와 친근함이 더해진 자로 부를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그런데 또 한 번 고봉이 선의의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라며, 퇴계 자신을 추켜세워 임금께 아뢴 고봉을 강하게 힐난한다. 앞으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는 일도 다 그만두어 주면 편하겠다는 절교의 편지를 보낸다. (물론 이 단교의 표현은 친근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화의 표현일 것) 이런 상황에서 임금에게 그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기 어려운 것 아니겠냐며, 고봉의 섣부른 행동을 나무란다. 두 사람이 얼마나 밀착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위와 같은 해인 선조 원년, 1568년에는 퇴계가 고봉에게 영공께 아룁니다, 병환이 어떤지, 근자에 소식이 막혀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우스개 이야기도 전하고, 부채, 서책과 약, 꿩고기 등을 보내 마음 속 정성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퇴계는 고봉의 정치적, 학문적 후견인이자 스승이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벗이자 정치적 동지이며 자신의 부친 묘비 갈문을 부탁할 정도의 신망을 지닌 아들같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논변은 당대 고관대작들은 물론 유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서신이었기에 이들의 편지는 여느 선비들의 것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 것이었던 것 같다. 붕당정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할 즈음해서 정국의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상황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퇴계가 고봉에게 서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은 당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살엄음판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세대와 지위를 뛰어넘는 두 사람의 학문적, 인간적 우정의 깊이를 통한 삶의 고귀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그 품격을 완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단칠정논변으로 얘기를 이어가면, 그 발단은 이러하다. 사단은 이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 있다고 주장한 퇴계의 글이 온당치 못하다는 고봉의 논박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과 정()에 대한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데, 무릇 아직 발현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성()이라 하고, 이미 발현 된 것을 정()이라 하는데, 성은 언제나 선하고, 정은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봉은 성과 정이 다른 까닭에는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과 감정인 칠정(七情: (), (), (), (). (), (), ())이라는 구별이 있을 뿐, 칠정의 바깥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퇴계는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이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를 겸하므로 선악이 있다고고 고쳐 쓰지만, 이 역시 사단과 칠정의 연원이 다르다는 분리의 전제를 하고 있기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논박한다. 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라고 구분을 하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고봉은 사단은 칠정과 다르지 않은 연원을 지닌 것으로 단지 발현되기 전의 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기는 그 연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퇴계는 이와 기는 다른 연원을 가진 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세세한 철학적 논구들, 이에따라 부속되는 철학적 논변들이 이들이 5년에 걸쳐 주고받는 논변들의 내용이다. 그 철학적 함의들을 논구하는 것은 책에 맡기기로 하고, 두 사람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상대의 논변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그네들 학문의 자세에서 오늘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들을 상기하게 된다. 스승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후학은 학문적 겸허를 잃지 않으면서 선학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가운데, 그 날카로움은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배움에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다. 최근에 그대가 찾아낸 서너 조항을 김이정이 전해주었습니다. (...) 비로소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옛 견해는 남김없이 다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주의를 기울여 라며 자신의 그릇된 이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철회하는 퇴계의 학문적 자세는 숭고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편 고봉 역시 기운을 드러내고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꺾어버린다는 자신의 고질병과 공부의 소홀함에 대한 경계를 다짐하거나, 선생님께서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까지 자세히 답해주시니, 제 평생 이보다 큰 은혜는 없었습니다.”라며 거듭하여 자신의 소견을 깨우쳐 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나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고봉의 사유에 귀 기울이는 편이어서 고봉 중심의 독해를 하였는데, 퇴계의 후학에 대한 성심의 인물됨을 발견한 것은 하나의 큰 수확이기도 하다.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후일 동인(남+북인)의 갈라치기, 그 분리의 원천이 되기에 붕당정치의 파멸성 이전에 고봉의 이기일원론의 사변은 오늘 다시 재고되고 심층 연구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퇴고(退,)논변은 조선 중기까지의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간의 논구라는, 다시 말해 같은 왕권수호 세력의 일원이었기에 반목이 심하게 충돌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이 파기되고 객체지향의 존재론이라는 일원론적 모색으로 전환되는 오늘에 고봉의 일원론적 접근은 다시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사유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조선조 성리학 두 거두의 인간적 우애와 학문적 교감의 성숙된 면모를 읽어 볼 기회가 되었음은 내겐 예기치 못한 감응의 시간이 되었다. 인간 존재자를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자체에 선악의 구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형체라는 보이는 것의 간섭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실체에 대해 구별하려는 인간의 습관인 것 아니겠는가. 고봉 사후 82년이 지난 1654년 효종이 고봉을 기리기 위해 월봉 서원을 내렸는가 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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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5-21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도서네요. 조만간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6-05-21 09:53   좋아요 0 | URL
퇴계의 후학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대학자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한편 강직함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고봉이지만 퇴계선생에게만은 깍듯한 품성에서도 선학에 대한 깊은 공경심이 묻어나고 있어요.
또한 두 사람의 사단칠정 논박을 비롯한 궁궐 예에 대한 글들은 그들 사변의 깊이와 폭넓은 독서와 지적 역량을 엿보게 됩니다.
호시우행님 댓글 고맙습니다. 당시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리적 거리와 인편에 의한 서신 왕래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그리움과 학문적 우애가 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지요.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라 하겠지요.

차트랑 2026-06-0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편지는 이퇴계 처럼, 논리는 기고봉처럼!!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글은 비의식님 처럼~!!

비의식 2026-06-02 12:32   좋아요 1 | URL
퇴계와 고봉에 대한 말씀에 공감합니다. 격려의 말씀은 황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세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8
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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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윤리의식 갱신을 위해,  우리’ 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

 

 


그들이 내게 들려 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

숨이 멎는 날까지 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116

 

“‘우리세희, 함께 기억하기 위하여라는 조해진 작가의 말에 담긴 지향(指向)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깊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우리라고 말하여야 하고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타인이 껴안아야만 했던 고통의 내밀함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몸에 새겨지듯 치밀어 들어오는 관계성에 대한 배움과 적극적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일 게다.

 

한글 이름 세희는 화자인 미술평론가 남연주의 엄마,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의 무국적자를 가리킨다. 일본명 미나가와 히로코, 어머니 아버지를 오마니, 아바이로 부르며,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졸업 후 취업한 일본 회사에 협력 업체로 드나들던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 거주하게 된 연주의 엄마다.

 

“1940년대 후반 제주를 혼란에 빠뜨린 제노사이드를 다룬 신작을 발표하는 제이비 류라는 설치미술작가의 작품전과 작가 인터뷰기획을 취재하기 위해 도착한 영국 런던에서의 사흘에 걸쳐 마주하게 된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현실과 기억의 기록이다. 도착한 첫날 런던의 밤 거리에서 두 백인 남성이 연주를 향해 니하오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칭챙총 칭챙총...”, 아시아인을 향한 이 명백한 조롱, 차가운 돌덩어리 같은 모멸의 감정이 스스로를 향한 분노로 치밀어든다. 그녀의 기억은 쪽바리, 매국노라며 저들끼리 웃어대며 슬픈 공포심을 안겨주었던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로 향한다.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되어 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엄마 세희는 자이니치로 분류되어 사실상의 무국적자이었으니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에도 한국의 이웃들은 끝없이 악의적 뒷담화로 조롱하고 멸시했음을. 아무 잘못이 없어도 내력이 죄가 되고 죄로 수렴되는한국에서의 삶, 엄마 세희를 향한 이 시선들은 국가의 무능과 잘못을 어느 순간인가부터 피해자인 개인을 향해 마치 개인의 허물인 듯 바라보도록 한 권력의 오랜 세뇌였을 것이다.

 

엄마 세희의 아바이, 연주의 외할아버지 박태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간부로 북한을 저버리고 일본에 귀화하는 자이니치들을 경멸하는 사람으로 딸 세희를 검정색 치마와 흰색 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하는 민족학교를 고집했다. 일본 사회에서 이 뚜렷한 복식이 그네들에게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켰을지 상상하는 데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다. 무관심으로 가장된 경멸, 어린 소녀에게 그 시선과 무례에 대한 반항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움과 서글픔이 섞인 혼탁한 외로움은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무게가 되었을 것이다.

 

여섯 살 위 스물두 살의 오빠는 고집스런 아바이에게 세희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자고, 자신이 졸업하면 북송사업에 지원하겠으니 세희에겐 그 무엇도 강요하지 말자는 설득으로 고등학교부터는 일반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나가와 히로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만 자이니치는 그저 조센진일 뿐, 교실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무조건 오세희가 제일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는 차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 그 기억이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겪게 되는 자신의 모멸과 겹쳐 흐른다.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자주 찾던 북촌에서의 남녀 두 어른과의 만남, 서정우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기쿠치 사치에 센세는 엄마 세희와 어느 곳에서도 이방인이어야 하는 서로의 삶을 위무하는 그런 관계 맺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나 자이니치에게는 공무원도 기업 취업의 문도 봉쇄되어 빠칭코 매장의 매니저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던 선생님과 엄마 세희의 만남의 사연, 자이니치를 위한 시위에선 늘 맨 앞에서 구호를 외쳤던 전사나 다름없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떠올린다. 이처럼 연주는 엄마의 영혼을 구성하는 입자가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암 투병 중 마지막 말처럼 연주에게 남긴 말, 우리 오마니와 아바이, 그리고 오빠를.... 잊지 말아줄래?” “잊지 않아...” 아바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송선을 타고 이북으로 간 오빠의 죽음에 대한 부모에 대한 원망, 자신을 위한 오빠의 희생이라는 죄책감과 더불어 결혼 이후 자기 부모와 단절한 삶을 살았던 엄마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오사카 이쿠노구 골목에 있는 첫 외갓집 방문에서의 다감한 외조부모의 따뜻한 정감을 떠올린다.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치매로 요양원에 살고 있는 외할머니의 방문에서 연주 자신을 발견하고 세희야, 라고 부르는 외할머니, 오세희를 연기하는 연주가 그 연기가 어렵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이미 연주가 오세희를 자신의 몸에 완벽하게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이후 왜 일본에 있던 한반도의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국적 없는 이들의 필요서류 작성 불가, 받지 못한 노임으로 무일푼으로 당장 살아가기조차 곤궁한 이들의 처지, 설혹 밀항으로 고향을 찾아 떠났지만 일경(日警)을 승계한 한국 경찰의 무조건의 사상범 취급과 갖은 고문 끝에 길거리에 내버려져 다시 남루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이어진다. 제이비 류, 한국의 성씨인 류가 드러나는 인물과의 인터뷰는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 속 할아버지 류성철의 이야기로, 해방 후 돌아간 고향 제주를 지배하던 광기어린 살의, 이승만 독재정권이 도민 모두를 심판과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던 시대를 들려준다.

 

사랑하던 연인이 해안가 절벽에 무참하게 뭉개져 매달린 시신으로 발견된 사연, 그녀의 시신을 몰래 매장했다는 사유만으로 숨어 지내야 했으며, 그를 숨겨준 사촌이 살해되고, 돌아간 집에는 이미 끌려가 처형된 부모의 소식만이 고통스럽게 나뒹군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 어떤 다름도 수용할 수 없이 극단적인 전체주의의 독단성을 띰으로써 살아갈 수 없는 지대였음의 한 조각의 기억이다. 일본계 영국인 제이비 류의 가계는 그렇게 우리와 무관한 듯 보이던 사람에게서 우리들이 지워버리고 방치한 역사 속의 관계를 드러낸다.

 

엄마 세희가 단절했던 외조부모를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엄마는 연주에게 말한다. 외삼촌의 죽음에 부모의 오판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 차원의 문제였다고.”, 내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딸 연주에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르는 상태로 자라게 함으로써 그분들의 사랑을 받을 기회까지 빼앗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멘네(ごめんね, 미안하다)라고. 낯선 일본 땅, 그치지 않는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이 묶인 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국가 공동체와 역사가 떠안아야 할 책임의 문제임을 증언한다.

 

연주, 그녀를 부르는 선생님, 센세, 외할머니의 욘짱은 그렇게 "알지 못하던 이국의 그들이 자신의 뿌리이자 가족이었음을, 아니, 바로 그녀 자신이었음을" 몸에 그려 넣는다. 한 덩어리 배신감만을 안기던 조국은 그들을 내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끌어안으려 하지 않았음을, 이 작품은 우리 공동체가 너무 쉽사리 타자로 치부하는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바로 임을, 그래서 그들의 기억이 바로 우리 몸의 기억임을 되살려내고자 하는 것일 게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공감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조차 가능치 않게 하는 그런 불온한 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이 어찌 개인이 떠안아야 할 시선이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겠는가.

 

그 이야기들이 내 몸 안에 새겨져 있으며,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연주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들의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자이니치(在日) 뒤에 동포, 교포를 붙이는 건 민족개념으로 제한된 배제의 표현이고, 이어 한국인을 붙여 쓰면 고국 분단 이전의 북한 출신을 제외하는 표현이기에 자이니치(在日)’로 규정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올바른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무심한 시선과 행동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배제를 담고 있는가, 결코 우리들의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 흔적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역사적 고통의 재현은 제아무리 완전을 지향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체에 대한 우리네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제주 4.3의 가공할 잔악한 폭력, 자이니치가 겪는 이중의 차별에 놓인 또 다른 폭력의 시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모두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들은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하나의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우리들 윤리의식을 갱신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감히 우리라고 말 할 수 있기 위해, 아니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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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17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으로도 그 처절한 서러움과 서글픔이 묻어나는 것 같네요. 소설이지만 결코 소설이 아닌 아픈 현실이네요.

비의식 2026-05-17 14:50   좋아요 0 | URL
네, 잉크냄새님. 오늘 우리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을 이렇게 환기하는 이유는 그 기억이 바로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기억임을 새롭게 하려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 그리고 여전히 재일민들은 참 악랄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왔어요. 국가폭력을 미화하려는 것들이 지금도 발호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기억을 망실하는 바로 우리들 공동체의 책임일 겁니다. 저는 작가 조해진이 천착하는 이러한 역사기억의 꾸준한 환기는 결코 중단될 수 없는 것임에 동의하고 있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실존 모델이 있는 까닭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