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희뿌연 안개 속, 먹 빛 땅거미가 드리운 수리봉 활공장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승민의 질주, 그리고 비상, 활공하며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는 수명의 모습에서 진정 온전한 자유,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존재들을 바라보게 된다. 꽉 틀어 막혔던 그 무언가가 팍하고 터져버리는 듯한 해소를 느낀다.

비열함과 혹독한 공간의 묘사에서 조차 아름다움과 쫓아가야 할 아련한 낙관이 있다. 신선한 소재, 정교한 플롯의 구성, 탄탄한 문장과 해학이 넘치는 언어들,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막힌 표현들이 어우러진 근래 보기 드문 걸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희망병원, 정신병원의 이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희망병원에서 일어나는 유린은 희망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폐쇄적이고 사악한 공간이 탈출을 부추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희망을 찾아 비상케하고 있으니 옳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작은 이름하나에서조차 작가의 치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주인공‘이수명’, 시력장애인‘류승민’, 25살 동갑내기인 이들의 대비되는 행동양식은 소설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정신병원의 은어들 또한 작품의 리얼리티를 제고하고, 등장인물들의 별명은 캐릭터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대변한다.

정신병원이란 폐쇄공간은 사회에 어떻게 인식되는 공간일까?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둔갑시키는 공간?,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서의 공간?, 악인들을 위한 선인들의 실험 공간?....
이러한 공간들의 이미지를 확립시켜주는 환자들의 사연, 병원 의료진의 조악한 구성 면모, 간호사, 보조원, 작업자들이라 불리는 이들 저마다의 직업적 태도는 치유의 공간으로서의‘병원’이란 곳과는 너무도 멀다. 폭력과 격리, 약물치료, 전기충격에 이르는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즉흥적 처방행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땅거미가 깔리는 어둑한 날이면 병동의 주민들은 “뭐든 저질러 버리거나 숨거나”를 택일해야 한다. 먹 빛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삶의 태생적 공포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미쳐버리거나 조용히 숨어버린다. 또한 “병동은 각자의 영화가 동시 상영되는 극장이었다.”처럼 그들의 심리와 세계가 수다스럽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로 더욱 명료하게 전달된다.

거침없는 행동으로 곤혹을 겪는 승민을 바라보는 소극적 행위자로서의 수명의 시선은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연민이자 동경이다. “삶에 잠복한‘상실의 날’에 대한 두려움”, “버린 육신 안에 꿈의 지대를 만들어 놓고 그 곳으로 피신해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이는 바로 그들이자 자신이다. 몸이 묶여 병원에 끌려 들어가던 날, 수명은 “다시 세상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는 박탈감, 철문 안에는 적어도 바깥세상보다 안전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란 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인생으로부터 자신이 쫓겨난 날을 명확하게 진단하는 수명이지만 자신의 억누르고 있는 기억에 저항할 용기는 여전히 없다. 좌충우돌 모든 장애물과 부딪치는 승민의 바깥세상을 향한 날개짓에서 수명은 회피할 수 없는 자유의 창구를 본다.

한편, 해프닝으로 끝나는 보트장 탈출 장면의 묘사는 가히 언어표현의 압권이다. 광란의 질주를 해대는 보트에서 수명은 “목젖에서 휘파람 부는 소리가 올라왔다. 척추가 위아래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다.”고 한다. 그리곤 30노트, 35노트, 40노트...“신경절을 타고 심장을 향해 번지는 뜨거운 압통, 자작나무 숲에서 느꼈던 그 통증이었다. 수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흉 벽에 쩍쩍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탄성이 절로 기어 나온다. 정말 내 가슴이 쩍 쩍 갈라질 정도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아마도 이 감정의 다른 표출 아니었을까?
“비가 내리듯 별똥별이 떨어지고 갖가지 별들이 궁륭(穹窿)을 이루는 바다. 별들의 바다. 아름다웠어. 숨이 막힐 만큼,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 신기하게도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해 지더라.”

죽음에 초연 해질 때, 그 잔잔한 삶의 평온 말이다. 그래서 수명의 조명탄 불빛을 향해 수리봉을 내 달리는 승민의 질주와 “상승기류를 타고 거침없이 비상하는”그 모습은 완벽한 자유,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날고 있는 동안 온전히 나야. (중략)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정신보건심판위원회’, 이 이야기는 수명의 자유를 향한 진술이다. “제게도 자유를 향한 활공장이 필요했습니다.”그리고 몸 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가 뽑히곤, 식어가는 가슴 밑에선 새들이 파닥거림을 느끼는 수명의 그 길고 긴 잠복된 두려움의 해방에서 세상과의 화해를 비로소 보게 된다.

작품의 모든 곳에 감동이 있고, 재미가 있으며, 진지함이 배어있고, 질펀한 입담과 전문성을 잃지 않은 묘사, 정교한 소설적 장치들이 녹아있다. 그야말로 매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침몰시키는 숫한 운명에 맞서는 우리들에게 정말의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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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 세계 경제를 비추는 거울
도시마 이쓰오 지음, 김정환 옮김, 강호원 해제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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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의 시세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어떤 요인들이 금값을 춤추게 하는지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금이 국가경제와 금융시장과 대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무관심을 빙자한 몰지각의 다름 아니었음이니, 이 저술이 금시장과 경제현상에 대해서 내게 전해 준 지식은 그야말로 광명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다.

금 가격 형성의 배경에서 금시장을 움직이는 세계의 선수들, 국가들, 그리고 향후의 금시장에 변화를 가져올 변수들과 전망은 작금의 경제상황과 치솟는 금값의 이유, 중국이 자신들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의 비중을 낮추겠다는 속셈, 미국 달러화의 약세와 원유가와 금값의 관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2008년 거세게 몰아닥친 미국發 서브프라임 위기의 원흉은 과소저축, 과잉소비라는 미국 경제의 적자체질이라고 단언한다. 선물거래로 인한 고객의 리스크를 떠안아 주는 대신 대가를 받는 옵션상품의 남발, 그리고 신용이 취약한 대상에 대한 명의 대여료격인 스왑(swap)과 이의 리스크 전가를 위한 보증기관과 또 다른 전가의 연쇄, 주택담보대출채권 같은 증권화로 인한 비약적인 유동성의 증가 등 속 빈 강정들이 만들어 낸 도미노식 파산은 바로 3조 달러가 넘는 미국의 부채를 대변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로 인한 신용경색, 즉 미국 경제에 대한 불신은 달러의 약세를 초래하고, 이 불안한 화폐를 대체할 수단, 즉, 리스크를 헤지(hedge)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금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그 희소가치로 2000년간 인류의 화폐교환수단으로서‘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산’의 역할을 수행한 금에 대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세계의 기축 통화인 달러화의 신뢰하락은 물론 미국 금융시장과 거의 직접 연동하는 유럽의 금융이 무사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또한 2008년 원유가의 급등은 인플레이션의 우려와 함께 이를 헤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 수요가 급증했단다. 최근 금값이 왜 이렇게 오른 거지?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된다.

금의 연간 세계 총생산량은 2500톤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구나 채굴여건은 심해나 수천 미터 지하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처럼 악화되어만 가고, 채굴비용 역시 증가하여 채산성 악화로 그 생산량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처럼 금은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서 공급량을 같이 늘릴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즉, 공급 가격 탄력성이 낮다. 가격이 상승해도 물량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금 가격의 폭등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기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요인들을 야기하는 주체는 어디일까? 유럽중앙은행들은 외환보유액의 50~60퍼센트 가까운 공적 보유금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이들이 1990년 이후 시장에 매각을 위해 쏟아낸 금으로 금값은 하락을 면치 못했고, 급기야 워싱턴협정으로 총 매각량을 규제하여 진정시켜왔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부다비투자청’에 시장전체가 저격당해 패닉상태에 빠진다.”다 할 정도의 오일머니의 위력 또한 엄청난 모양이다.

이에 더해 세계금생산량의 4분의1인 연간 600톤을 소비하는 인도, 2009년 2분기 현재 2조 200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자신들의 과잉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로화와 더불어 금을 외환 포트폴리오의 한 포지션으로 가져가려는 정책이나, 연간 장신구 수요만 300톤에 이르는 수요는 이제 상품시장에서 중국이 가격결정 요인의 핵심적 지위로 부상하고 있다 해도 잘못된 판단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금 가격과 거시경제의 움직임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예화와 설명이 금시장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없었던 문외한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월하고 세심하게 안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화본위제, 금지금본위제 등 금본위제의 개념에서부터 선물거래, 옵션, 스왑 , 인덱스 등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을 곁들인 자연스런 경제개념과의 연계, 금 가격 하락 시나리오와 같은 가격판단에 대한 조언은 물론 부동산과 금과의 보유자산으로서의 가치 비교까지 개인의 투자접근에 대한 가이드까지 금(Gold)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아마 이 저술의 핵심이자 우리경제에 있어서 가장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인 오늘의 국면에서 세계 각국의 행동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세계 경제 구도는 2008년을 정점으로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할 수 있다. 저자는 보호주의 확대와 거시경제의 축소균형, 지역별 블록화가 가속화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또한 달러와 유로의 가치를 받쳐줄 닻(anchor)으로서, 기축통화의 후견인으로서 금의 부상도 중대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결국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로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불신용으로 비롯된 달러화의 추락은 각국이 공유 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척도를 암중모색하게 하고 있으며, 기축통화로서 위치를 확보하려는 중국의 행보는 동일 경제권에 있는 한국경제로서는 도외시 할 수 없는 동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의 “미국은 금을 매각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금은‘궁극의 통화(ultimate currency)’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같이, 금은 각국 통화의 가치와 신용을 담보하는 근본적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기조 하에 불과 400톤에 불과했던 중국인민은행의 공적 보유금을 1000톤 이상으로 늘렸으며, 지금에도 꾸준히 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국제경제 속에서 자국 통화의 가치를 담보하려는 야심을 엿보게 한다. 그럼 한국은행 금 보관 창고는 어떨까? 텅 비어있단다. 외환보유액 세계 6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14.3톤이란다. 저마다 자국의 공적금보유량을 늘리고, 국부(國富)라 할 수 있는 금의 수출이나 유출을 억제하는데 비해 우리의 노력은 전혀 없는 것 같다. 1998년 IMF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으로 서민들이 탈탈 털어 거두어 낸 금의 양이 무려 250톤이라고 한다. 이것을 런던금시장에 내다 팔아 빚을 갚았으니, 새삼 비감함이 몰려온다.

“금융시장이 세계 동시 주가하락이나, 주가, 채권, 환율의 동시 하락사태에 빠지면‘분산이 효과가 없는’상황이 빈발한다.”미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시피 한 한국경제로서는 더더욱 국가경제의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써, 원화의 신뢰구축 차원에서도, 공적보유금의 점진적 증대를 도모하여야 할 것 같다. 이 저술에는‘상하이 금 거래소 창설’, 금EFT상장을 위한 행정적 ,법적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우리 경제관료, 금융관계자는 물론 국민 대중 모두에게 유익한 경제지식은 물론 보다 확장된 시각에서 세계경제와 우리 경제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한 나라의 공적 자금 운용은 단순히 연간 수익을 추구할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안전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유사시의 자산'도 장기적으로 보유해야 한다.” 곱씹어 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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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 과학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 100가지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독일의 과학사가인‘에른스트 피셔’의 인류에게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과학적 발견과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는 일종의 과학시론(時論)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디벨트>라는 독일 신문에 연재된 글들이라는 점에서 대중을 향한 글쓰기이고, 따라서 다분히 계몽적이고 과학에 대한 친화력을 염두에 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3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잘못된 상식에 대한 정정, 문화적, 종교적 일상에 침투해 있는 과학이론의 비판, 그리고 교양으로서 인지하여야 할 과학의 의미를 다룸으로서 20세기 이후 자칫‘불안을 조장’하는 과학, 악마의 학문으로 소외되는 과학을 지양(止揚)하고, 진정한 인류를 위한 진보로서의 과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저술의 논조는 빛의 본성에 대한‘궁극적 무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듯이 다분히 회의적이고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양자역학을 기조로 하는 물리학 기반의‘불확정성’의 관념에 철저한 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첫 장인“상식과는 다른 과학을 포착한다.”는 제목처럼 이 저술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리 또는 옳다고 알고 있는 것들이 무수히 전복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페니실린을 발견했다는‘플레밍’은 실제 어떠한 것도 발견한 적이 없었다는 진실이나, 아인슈타인의 학업성적이 열등했다는 엉터리 소문도 그의 탁월한 성적표를 오독한 사람과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자기위로 의식이 결합한 거짓이었다는 가벼운 전복에서부터 빛과 색깔의 관계에서 붉은 색과 파란색에 갖는 선입견이 실제의 온도를 반대로 인식하는 오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즉 과학이 인간을 모욕했다는 몰지각에 대한 반론, 분광학으로 인한 우주 물질의 규명, 혁신은 기존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명제의 거짓까지 역사적, 사상적 사유의 전복에까지 이른다.

한편, “현실 속의 과학 비판”이라는 둘째 장은, 그의 균형적, 중도적으로 보이는 시각이 오히려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라 할 수 있는데, “지식이 증가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더 잘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미래학의 엉터리 지식을 힐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니얼 데닛’이 ‘가망 없는 관념’이라 표현한 ‘신(God)'의 묘사와 영혼은“뉴런들의 집단”일 뿐이라 한 인터뷰 글을 인용하면서, “오히려 가망 없는 관념은 바로 그 생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창조론자인 ‘데니스 노블’의 반론에 기대어, “갇힌 유전자”라 조롱하는가 하면,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을 엉뚱하게도 “가설의 신”이란 자신의 논리로 둔갑시켜 이 가설의 신이 유의미한 말인가. 하고 힐난한다.
그리곤 “종교와 과학은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벌이는 두 활동으로서 서로 의지해야 한다.”고 모호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미래학이란 실체는 사실 사라졌으나, 무슨 무슨 전문가라는 표현으로 이름만을 바꾼 채 행세하는 소위 전문가 300명에게 던진 “인터넷의 미래와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예견해달라고 한 주문”의 설문 결과가 “원숭이들도 할 수 있을 만한 순전한 추측”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조소 섞인 비난에서부터, “멍청한 전문가들이 우리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장 많이 얻는다. 고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은 미래를 망친다.”는 혹평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이에 더해 미국의 생명윤리학자라는 ‘조너선 모레노’의 검증되지 않은 약물로 인간의 각성 실험을 자행하는 행위에서 “윤리학자와 군인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더 폭력적인 사람은 윤리학자”라고 오늘의 과학 현주소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칸트 안에 머물러 있다면 칸트를 알 수 없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나 주위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지적하면서, 또한 “이해되었다고 여겨지는 사안에 대하여 적어도 한 번 그 반대를 생각하라.”하는, 과학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조언은 이 저술의 중요한 저작 의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표현을 서구인의 시각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의 시각에서 표현한다면, 다시 말해서 반대로 표현한다면 어떤 표현이 될까? “콜럼버스를 처음 발견한 아메리카인은 불길한 발견을 했다.” 이처럼 어떤 사안을 그 반대로 보았을 경우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오늘의 과학은 진보적이긴 하지만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반성을 담고 있다. 근대과학을 출발시킨 서구의 이상은 본원적으로 통일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해왔다고 자성하면서, 법칙의 개념에 경도된 과학의 지향점을, 열린 대화, 확정 된 것이 없다는 동양의 사상과의 접목으로 웅변한다. 여기서 교양에 대한 그의 강론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관점을 제공한다.“사람이 교양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교양 있는 놈이 사람이냐 아니냐죠. 어떤 교양이 인간성을 동반할까? 어떤 교양이 도덕을 담보할까?”하는 질문은 분명 오늘의 과학,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유의미한 질문이 된다. “교양이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과 결합될 때, 교양은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사기를 치는 과학연구자들, 그리고 의사(疑似)과학, 오류를 반복하는 매스미디어, 등등 과학을 배반하는 가짜 과학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이다. 과학적 지혜가 아닌, ‘상식’의 바탕에 놓인 어리석음과 일상에서 만족스럽게 작동하는 믿음에 들어 맞추려는 오류와 무지를 벗어나야 한다. 또한 연구의 질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용기 있게 이야기하는 과학 비평가가 일천한 우리의 과학현장은 더 없이 과학과 소원하다. 이러한 현실이‘황우석’류의 기만적인 현상을 낳게 한다. 과학과 대중을 가깝게 하는,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그래서 이 저술은 그 질적 비판과 관심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의 삶을 개선하자는 전제를 가졌던 인간 중심의 과학에 대한 충분하고도 진지한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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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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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서른여섯 살 청년(?)이 미국 남부 뉴멕시코 사막지대에서 친환경적 녹색 삶을 일구어 나가는 좌충우돌 진솔한 생태 적응기이다.  짐짓 체하지 않는 이 젊은이의 미숙함과 실수, 그야말로 삶의 진정함이 배어있는 상처투성이의 체험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생태 모험담은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친근함이 있다.

이론과 목소리 높여 외치는 그 어떤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 탄소 저감과 온난화에 대한 위기의 언어보다 더욱 깊은 공감과 참여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우리네 같은 도시 촌놈이 접하게 될 그 자연과의 친화를 위한 일상이 동네 친구와의 허물없이 전달해주는 영웅담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년간의 기자 생활을 같이 해온 무고장의 내구력 강한 그의 애마, 일본산 SUV 스바루를 떠나보내는 에피소드에서 시작되는, 그의 독립적인 녹색 삶을 살아가기 위한 착수부터 사뭇 진지하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 헤친다.
디지털 시대를 누리며 생활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녹색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당찬 의욕이 어느덧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우리네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진 꿈을 다시금 끄집어내게 한다.

우유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의 미래 조달원으로서 구입한 한 쌍의 염소를 자신의 새로운 집, ‘펑키 뷰트 목장’으로 데리고 오는 그 우여곡절과 병든 나탈리(암 염소)의 긴급 치료과정은 그의 탄소 줄이기 첫 작업이 순탄치 않은 고난의 서막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이 짜증스러울 만한 일련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서서히 녹색의 환경에 일체화 되어가는 기쁨을 보는 것은 저자 ‘덕 파인’의 글재주 일 터이다.
수천 KM를 날아온 수입 과일과 곡물, 축산품등이 사용한 엄청난 탄소덩어리를 실제의 삶에서 줄이고, 궁극에는 하나하나 친환경의 녹색산물로 대체해 나가는 일화들에서 겪게 되는 숫한 어려움과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연속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웃 생태주의자 ‘허비’에게서 발견한 “낙관주의와 훌륭한 유머감각”을 그에게서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터이다.

화석연료를 뿜어내는 자동차 대신에 폐식용유로 굴러가는 디젤트럭의 구입과 개조, 그리고 식용유를 구하러 다니는 모습에서 천진스런 순결함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보탠다. 그리곤 수탉 한 마리와 여덟 마리의 암탉을 치고, 매일 수확하는 달걀들, 몰래 습격하는 코요테의 습격으로 비명에 가는 그의 영양원인 닭들에 대한 비가(悲歌)^^, 지하에서 끌어올린 식수 탱크가 넘쳐흘러 만들어진 물웅덩이로 인한 사막의 방울뱀 공포, 골프공만한 우박이 망쳐 논 농장, 그리고 잡초와의 시름, 야생 동물들과 서식지와 생존에 걸친 싸움, 그리고 화해를 밑거름으로 자연화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내내 정겹기만 하다.

어느덧 자동차를 탈 일이 없어지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이른 ‘덕 파인’과 그의 사랑스런 연인 ‘미셸’, 그리고 그들의 곁을 뛰어다니는 견공 세이디, 이젠 가족을 늘렸을 염소 나탈리에게서 젖을 짜내는 평화로운 전경이 눈에 그려진다. “자애로운 사기꾼 대자연”을 마주하면서 일궈나가는 녹색의 삶을 위한 걸음마다 농부가 된 ‘덕 파인’의 징징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염소의 매애애 소리, 닭들의 회치는 소리, 그리고 코에 꽃가루를 묻힌 채로 집에 들어오는 반려자 미셸의 달빛 향기가 느껴진다.

녹색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말 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느낌이다, 또한 훨씬 참여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피카소 작품을 사는 <월튼네 가족>”같은 위선적인 자연의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연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부터 ‘7 세대 이후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하고 묻는다.  친환경적 삶을 영유하는 일을 다음 세대가 반드시 숙고하고 이해하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펑키 뷰트 목장에서의 작은 목소리가 진중한 진실의 언어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온다.
신나서 들려주는 흥겨움 넘치는 자연에서의 먹고사는 모험담이 시정(詩情)이 뚝뚝 묻어나는 글로 우리들을 자연의 매력에 흠뻑 도취하게 만든다. 지속 가능한 녹색 삶의 정취가 기분 좋게 기술되어 있는 빼어난 녹색환경 걸작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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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내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욕망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세계와 심리적 외상으로 이중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빚어내는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아닐까. 탐욕과 악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인공도시, ‘뉴아일랜드’, 그리고 퇴락과 소외의 지역이 된 침니랜드라는 대조되는 세계, 트라우마의 탁월한 메타포,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조화를 이루어 지성의 환기와 감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크라임 스릴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두 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좁은 해협이지만, 상시적으로 뿌옇게 드리운 안개 또한 서로를 분리하는 장치가 된다. 욕망과 이면의 추함, 그 사악함을 가려주는 천혜의 은폐물(隱蔽物)로서 완벽한 상징성을 확보한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두 얼굴을 지녔어요. 어둠속에서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지만 안개가 사라지면 해협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보이죠. ~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일까요?”이처럼 선(善)과 악(惡)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주인공 ‘매코이’의 상태와 상치(相値)되어 정신적 분열을 앓고 있는 현대사회 모습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마주하기 두려운 고통의 기억에 시달리는 매코이를 보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에 이른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이 나의 몸을 누비면, 극한의 고통이 정신을 짓누르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아마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통증이라면 정신 줄을 내 놓고 기절해 버릴 것이다. 기절도 할 수 없는 지속되는 아픔일 경우에는? 그럼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이라고 내 인격을 분리할 수 있다면 분리해 버릴 것이다.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며, 이러한 순간 인간이 필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전략이 될 것이다.

과거의 아픔과 자기와의 관계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사람, 그래서 아픔이 주체와 연결되지 못한 채 주체가 될 만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 우린 악인이라 할 수 있을까? 안개 속에 가려진 두 얼굴, 아니 그 분열 된 초상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연쇄살인을 정당화하고, 살인범을 변론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현대인들 모두를 몰아 댈 생각도 없다. 그러나 고통을 가한 주체에서 우리들과 우리들 사회의 책임을 배제할 수 있을까? 유별나게 특별한 놈이 저지른 정신질환적 범죄일 뿐이라고.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곤혹스런 주제의식에 사로잡힐 만큼 느슨하지 않다. 시간적, 공간적 변화가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심리분석관 ‘라일라’의 배치는 감성적 배려와 사건 전개의 세밀함 등에 관계하면서 보다 집중적인 게임으로 유도한다. 또한 작품 초입부터 퍼즐이 게재된 신문과 같은 암시, 매코이의 고양이‘애들레이드’,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을 넌지시 던져 복선여부를 혼동하게하거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진행은 어느덧 나를, 뇌의 부신피질에서 마구 분비되는 에피네프린으로 교감신경이 극도로 흥분되어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선수처럼 헐떡이게 할 정도이다.

작품의 배경인 두 세계와 이중 정체성에 시달리는 개인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궁극으로 지향되어야 할 타자에 대한 연민, 신뢰, 사랑의 지고한 덕목이란 주제를 유연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르적 요소를 통한 재미의 배가로 한국문학에서 장르와 주류의 경계에선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갈채를 보내고 싶다. 『바람의 화원』에 이은‘이정명’의 또 하나의 역작(力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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