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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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대보다 극성을 부리는 단어, 매일 같이‘행복’을 말하는 책들이 제목을 달리하며 출간되어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누리는 시대에 냉랭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쫓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보편적인 어떤 개념의 합의가 있을 것이다.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쁨? 성취감? 순간적 쾌락? 아니면, 내면적 평온상태와 긴장된 정신에서의 해방인가?

 

만일 이 모두가 옳다면 우린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들은 행복해 할 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 우리들에게 습관화된 인지적 오류,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고 만족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명백히 잘못된 논리적 거짓으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이 그것이다. 만족감은 더 많이 성취하고 있지만 욕망 그 자체는 시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행태가 이것을 입증한다. 끊임없이 만족하려는 이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행복 중독증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가히 탐욕스러움 그 자체가 아닌가? 제아무리 가지고 성취해도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고리 말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행복’을 집요하게 추구하려는 이 사회의 언어가 혐오스럽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욕망 자체가 추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없다면,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역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소멸이고 죽음이자 무(無)의 상태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저자의 지적처럼 잘못된 논리적 연결에 의해 만족과 행복을 등식화함으로써 욕망의 제동장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습관처럼 익숙해진 우리는 아무리 충족해도 항상 빈약함에 허우적거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푸념한다. 결국 지나친 것, 과잉의 추구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행복 중독증으로 몰아대는 것이다. 물질의 과잉, 자유의 과잉, 쾌락의 과잉, 권력의 과잉, 정치의 과잉, 투명함의 과잉...모두 넘치는 과도함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의 욕망이 우리들을 습관화시킨 근인은 무엇일까? 직관과 작용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착각, 이를테면 과시적 욕구에 기인하는 허위와 겉치레, 편견과 같은 것들이기도 하며, “뭔가 좋은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거야”와 같은 게걸스런 원시적 욕망 같은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적 평등성의 이상, 합리성, 명료성, 객관성, 명백한 실용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분석적이고 분리적인 이성관의 구상성,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성의 제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의 해체와 상대주의적 관념이 몰고 온 몰개념화가 빚어낸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을 더한다.

 

이와같은 과잉 추구에 대한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설명은“자기중심적, 질투, 시기, 자기도취, 타인과의 공감결여, 속임수 등으로 자기를 확장하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오늘의 사회,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이라고‘베블런’이 쓴『유한 계급론』의 압축적인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분, 계층 상승의 무형적 가치, 즉 위신재(prestige goods)를 생산하려는 멈추지 못하는 중산층의 과시적 행동의 모순적 쳇바퀴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네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수영장, 많은 방과 드넓은 거실을 자랑하는 교외의 맥 맨션처럼 미적 얼굴을 상실한 추한 건물들과 도시의 확장을 부추겨 자연을 침해하는 부자들의 행동처럼 더 많이, 더 큰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이미 필요의 범주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를 발견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행복의 경고(The danger of happiness)』라는 이 책의 차별점은 이처럼 부영양화 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반성적 제안의 경계를 넘어서 현대적 욕망들이 구현된 양태들에서 욕망의 속성들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마침내 범지구적 생태계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물질주의가 자의식의 취약함이나 타인의 존경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며 전형적인 자기애의 특성이라는 진술이 새로운 해석은 아니지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방어로서 물질의 소유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의 과잉욕망에 대한 행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처럼, 근대성, 모더니티의 특성을 통한 도시확장, 거대 주택과 같은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의 해석은 ‘낙원 증후군’같은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 연결의 오류로 욕망과 도덕성의 균형 예측에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모더니티의 특성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념들이 공공의 영역을 해치고 개인의 영역화됨으로 인한 폐해와 선택의 자유와 같이 자유의 과잉이 마침내 현대인들 자신을 희생시키고 말 것이라는 예언들의 현실화를 목격하면서 현저성이라는 그릇된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게도 된다. 특히, 가장 욕망의 현시(顯示)성을 잘 보여주는 옷과 집을 가면이라는 거짓과 연결의 양면적 통찰을 통해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적 파괴에 이르는 현상들을 비범하게 포착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자기연민과 이기주의로 치닫는 페미니즘의 자기모순이 탐욕스런 쇼핑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입과 질의 유사성을 통한 섹스와 먹는 행위의 흥미로운 해석으로 자기절제를 집어치워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 여성을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무절제한 욕망에 길든 우리들의 모습과 그 욕망에 내재한 혐오스러운 양태들, 그리고 이로 인한 자기 파괴의 결과를 이해하게 되지만 우린 항상 공공의 영역, 혹은 집단적 이익보다는 개인, 나를 위한 욕망에 더 끌리고, 이산화탄소배출과 같은 온난화가 나와는 직접 관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마치 “아무리 많이 소비하더라도 늘 더 많은 것이 통 안에 있으리라 믿는”것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 경쟁, 그것은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격리시킨다.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그 잘못된 쳇바퀴를 멈출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제 만족과 쾌락과 행복의 잘못된 등식을 이탈하여 삶의 의미를 진정 풍부하게 하는 관계성, 유대감, 공동체와의 연대에 관심을 돌려야 할 터이다. 저자가 그리는 꿈의 도시, 꿈의 공동체를 그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우린 우리의 과잉 욕망을 통제하고 규제 할 수 없는 것일까?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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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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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통독 전후시대의 옛 동독인들의 사랑이 왜 처연하고 비릿한 회상이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비애를 가득 머금은 것이어야 했는지, 더구나 그토록 집요하게 대상을 향해 자신을 결박시켜야 하는지, 마치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려고”한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해준 소설이 있다. 닿지 않는 그 아득한 사랑의 간절함에 깊게 드리워진 정말의 번민을 해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 탓이었을까? ‘카차 랑게 뮐러’의 『차마, 그 사랑을』과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자연스레 읽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지만, 이 기억의 성분과 기록의 목적은‘그’와 ‘나’처럼 다르다. 뮐러가 쓴‘조야’는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 속 노트를 읽고서 비로소 그에게 써내려가는 애틋한 연민의 송사(送辭)임에 비해, 마론이 쓴 ‘나’는 끝없이 막으려 했던 억압된 기억의 해방, 생을 지탱시켜왔던 사랑의 기다림이란 구속에서의 영원한 자유를 향한 자기구원의 회고이다. 그럼에도‘조야’와 ‘나’라는 두 동독 여인들이 하는 사랑은 매우 닮아있다. 장벽 서쪽에 있던 남자들, 그녀들의 연인과 일체화되기 위해 신앙적 몸부림에 가까운 집요한 사랑, 즉 온 마음과 육체에 남자들을 깊이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베를린 장벽, 이 경계의 동쪽 진영, 동독에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네들의 시대를 “기이한 시대”, “갱단 지배의 시대”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속에 붙잡은 사랑을 놓칠 수 없고, 그 사랑과 일체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이 이미 숙명처럼 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는 대척에 놓여있는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짐에 대한 역설, 빼앗긴 인간 본성에 대한 집착, 감성의 저 뒤편으로 망각했던 가치인 사랑의 절실함을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젊음, 사랑, 자유... 모든 것을 앗아간 기이한 시대에서 해방된 여자에게 사랑은“지금 놓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두려움”의 강박이었으리라.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그저 자발적으로 선택한 다른 감금상태와 맞바꾸고자 했을 때만 좋은 것 같았다.”는 그녀의 자유에 대한 패러독스는 사랑이란 “항상 죽음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란 말에 닿을 만큼 절실하고 유일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여자의 사랑은 치열함이고 가히 투쟁적이다. 처절한 갈등의 고통이 연속되는 그녀들의 사랑에서 황폐함과 폭력이 지배하던 파시즘의 세상, 그 기이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이는“모든 것을 내게서 빼앗아갔다. 나는 정말로 기이한 시대에 살았다.”는 ‘나’의 말처럼 다가온 사랑을 움켜쥘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실함과 어떤 최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당신은 뒤늦은 내 청춘의 사랑이야.”라고 남자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 움츠리고 있던 젊음의 거침없음에 맡기는 것,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가소로워할 정도로 알만큼 나이가 든 중년 여자 ‘나’는 사랑의 열망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어찌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사랑했지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즈음에 있는 것 같다. 정작 해방되었지만 다시금 사랑이라는 자기구속에 빠져버렸던 여자가 이제 구십 살인지 백 살인지도 스스로 구별할 수 없는 나이에 그 사랑에 진정한 자유, 해방을 비로소 부여하는 작업 말이다.

 

기억을 막으려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친 순간이 되어 그녀는 연인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는 것이다. 차마 사랑을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었던, 더 이상 사랑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멈추어있던 사랑, 그 초월의 시간을 비로소 흐르게 하는 것이다. 두 동독 여자의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는 작업일 것이다. 아니 그녀들이 기억하려 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시 꾸며내려 한 것이었을 게다. 그리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인생의 이해를 확인 하는 것, 사랑했던 자신과 남자의 삶과 죽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내게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내게서 활기와 의욕의 힘을 사라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도시의 문명과 규칙들이 점점 거추장스럽고 두려워짐에 따라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사랑만이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연”이며,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질서 전체는 그저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이 비록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일지언정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기이한 시대, 베를린 동쪽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과 갑자기 그들과 함께 살게 된 서쪽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몰이해, 그래서 우리의 자연성에 대한 모든 고백은 믿음의 문제임에 불과함을 함께 생각게 하는 이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는 파시즘의 과도함과 기이함에 대한 혐오와 조롱과 함께 인생의 가치와 이유를 반추케 하고, 불치의 병이 될지언정 바이러스처럼 침입해 올 사랑앓이를 하게 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정말 사랑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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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11-27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에 이 책 읽으면서 계속 멍했던 기억이 새삼 나네요. 모니카 마론이 누구야 하면서 말이죠. 필리야님, 간만에 제가 아는 책이 리뷰로 올라왔네요. 반가워서 덥썩요. ㅎㅎ 카차 랑게 밀러의 책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비의식 2012-11-27 14:14   좋아요 0 | URL
이제 저에게 "지금 너 사랑하고 있니? "하고 묻게될 것 같아요...//고맙습니다. 댈러웨이님~~
 

부패의 도덕의식과 물화(物化)의 관계에 대해서

작성: 필리아(비의식)

 

나는 올 한해의 한국사회에 더없는‘물화(物化)’의 심화라는 비판적 모티브를 더하고 싶어진다. 단지 국가의 진정한 리더를 선택하는 것에서조차 오직 정치공학적인 물질적 놀음과 마케팅적인 이벤트로 뒤덮는 혐오스러움이 미디어를 도배질해 정작 이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점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독서시장을 뜨겁게 달구다가 이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처럼 이 사회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 잊혀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다시금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올해의 책으로 올려놓는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의의 실천적 사고라고 공정성, 불편부당성에 대한 도덕철학을 우리에게 생각게 했던 그가 공정성이라는 도덕규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도덕의식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을 때 정말이지‘루카치’가 부활한 것처럼 꽤나 반가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바로 “특정 대상물의 관행과 가치평가를 변질시키는‘부패’라는 도덕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시장만능의 경제적 논리가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을 지배함에 따라 지금까지 도덕과 이의 사회 규범적 실천으로서의 법으로 존중받고 보호되던 영역들이 비도덕과 비법률적 영역으로, 즉 시장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100년 전‘루카치’가 주장한 “상품교환의 강제 아래서는 주체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는 주체의 주변 세계에 대한 관계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는 말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은, 인간들은 계산적이기만한 교환과정에의 참여로 모든 대상물을 물화하는 해석습관에 사로잡히게 됨을 지적한 말이다. 결국 루카치 이후 사라져가던‘물화‘라는 비판적 언어에 숨을 불어넣은‘악셀 호네트’와 함께‘마이클 샌델’을 경청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샌델의 책은 “돈이 잠식하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태도와 규범에 담긴 도덕적 중요성의 인식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그 논의의 근원적 사고는 “시장이 인간 삶의 고유한 비시장적 규범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를 어떻게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곧 물화에 대한 현대적 환기이기도 하다. 상품 교환의 행위 영역에서 강제되는 모든 대상에 대한 물질적, 즉 교환, 거래 대상으로 측정하는 태도는 <<인정이론>>에서 호네트가 썼듯이 인간의 실존적 사실인‘인정의 태도’, 즉 자신의 기원에 대한 감을 상실한 인간들의 기억상실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 이것은 온통 물화로 치달아 자신의 실존적 이해를 망각하고, 스스로 도덕적 영역을 비도덕화시켜 자신들의 건강성마저 훼손하는 한국인들과 한국사회의 현실을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절창이다. 내겐 그 어느 아름다운 시보다 샌델의 의식이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먼저 우리들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어떤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이 작업을 하지 않고 법과 제도와 정치적 수장과 같은 형식을 바꾼다고 무엇인들 변화하겠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올해의 책에 머물지 않고 인류사회가 물화를 끝내는 날까지 읽혀야 될 책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을 것이다.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다름아닌 물화에 자리를 내준 우리들의 본모습인 '인정의 망각', 자기 기원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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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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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봉의 이 소설이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1937년은 물론 193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대체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들이 통속적 연애소설에 열광해야 했던가하는 이유와 이러한 소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대는 일제가 군국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이며, 더구나 작품이 발표되던 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식민지민은 무조건의 희생이 강요되고 삶은 더없이 피폐해졌으며, 민족말살정책이 고강도의 폭력을 동원하여 자행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애정소설이라니? 하는 의문이 들법하다. 그러나 일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알레고리라고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또한 식민지하에 이루어진 근대화가 낳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습의 파괴에 대한 대결과 갈등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으로의 성숙으로 파악한다면 한국문학의 일대 진전이라고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조금은 너그러운 이해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신문의 상업화에 따른 전형적 대중통속 소설인 『찔레꽃』이 애욕과 순수사랑이 뒤얽힌 말초적 감성의 자극에 머물지 않고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윤리의 갈등, 자본에 예속되어가는 인간 삶의 자문(自問), 자작농의 소작농으로의 전락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 등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과 같은‘인생파 작가’들이 파고들던 물질적 소유양식과 정신적 삶의 주관성이 인간의 가치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의 조망이 이 작품에서도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이미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물화(物化)를 근대화의 모순으로 이해하고 고민하고 있었음을 포착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젊은이들의 애정관계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시대의 현상들을 사건화하면서 식민주의적 근대성이 뿜어내는 모순과 문제들을 발설하고 있다. 중심인물인 스물두 살‘정순’이 가계의 곤궁함을 책임지는 가장의 부담을 안고 은행장인 신흥귀족의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면서 겪는 사랑의 애환에 얽힌 지극히 속된, 진정 통속(通俗)적인 전개를 하고 있다. 돈의 권세를 신봉하는 은행장 조만호의 탐욕스러운 육욕에 대비되어 만성적 심장병으로 누워 남편의 바람기에 히스테리를 보이는 안주인은 남성중심적인 당대의 왜곡된 성문화를 대변하고, 이들의 부에 힘입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는 아들 경구와 딸 경애는 삶의 곤궁함, 자본에 예속된 삶을 직시하는 정순과 또 다른 대척에 놓여있다.

 

정순과 혼인을 언약한 대학생 민수는 이러한 대립 구조에 사회구조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성격을 지니고 애정 전선에 변수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 유지로서 광대한 농토를 소유했던 그의 집안이 연이은 집안의 우환으로 가세가 기우는데, 구시대의 인습으로서 장례 등 제례의 허식과 허례로 인한 과잉의 체면치레를 하나의 원인으로 천명하고 있다. 결국 민수네 농토가 은행의 경매로 인해 기반을 잃고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농경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구조적 전환을 하는 시대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건은 민수와 은행장 조만호와의 악연을 빚어낸다. 경매 기일의 연기를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민수의 연인인 정순의 사랑이 어긋나는 것도 바로 이 사회구조적 변화기에 처해있던 소시민들의 저항할 수 없는 근대화의 폭력성의 한 단면일 것이다.

 

자신의 딸보다 네 살이나 어린 가정교사 정순의 뽀얀 목덜미와 여체의 탐닉을 그리는 조만호의 심욕은 추함 그자체이다. 또한 그의 육욕을 채우는 대상으로서 기생 옥란의 물질적 욕망이나, 조만호의 병약한 아내의 죽음이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조만호를 갈취하는 침모(針母)의 기만성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가 이미 식민지민들의 정신을 얼마나 깊숙이 갉아대고 있는지를 묘파(描破)해내고 있다.

즉 자본주의 물결과 같이 이식되기 시작한 식민사회의 근대화는 물질적 욕망의 끊임없는 부추김과 새로운 물질적 노예와 자본 계급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말봉의 연애소설이야말로 당시 해체되던 경향주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의 전환기라는 시대적 성향이 그대로 스며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야기의 줄기인 사각, 오각, 육각으로 얼기설기 얽힌 남녀의 연애로부터 자유연애와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파괴적 담론, 구세대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는 가부장적 결혼관과의 충돌로부터 옅은 여성주의의 싹을 볼 수 있지만, 신식 여성이라는 조만호의 딸 경애나, 침모, 옥란 등의 발설에서 남성의 권위에 대한 종속적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정신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원봉사운동을 하려는 조만호의 아들 경구를 통해 계몽적 확신으로 분열된 주체를 봉합하려는 당대 지식인들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대변하기도 하는 등 소설은 당대의 거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을 녹여내고 있다. 다만 70여년이란 시간적 간극은 한국 현대소설의 초기에 보이는 미숙한 문장들과 구성들로 독자의 상상력을 침범하여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하는데, 작가의 주장이나 경향을 직접 소설 속에 발설하는 것이 한 예라고 하겠다. 어쨌든 다시금 출간되어 현대 독자들에게 1930년대 근대화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문학의 한 분류를 통해 당대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위안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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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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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밤이란 꽤나 낯선 언어가 된지 오래된 것 같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적막과 소요의 묘한 대조, 시원(始原)으로의 회귀나 안온한 고요의 감동과는 동떨어진 삶의 세계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혹은 엄마의 자궁 속 그 태곳적 기억에서 벗어나 그 적요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자연의 순환은 다시금 밤의 시공을 생각게 한다.

 

밤에 관한 이런 나의 단상과는 달리 소설에는 도시의 밤거리와 어둠의 방을 찾아 헤매는 아직은 소녀를 벗어나지 못한 스물두 살 여자가 있다. 할머니와 재가(再嫁)를 한 엄마의 집을 오가며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엄마의 돌연한 죽음, 할머니의 별세는 어린 여자에게 세상과의 이른 만남을 불가피하게 했다. 화장품 하청 공장의 공원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계부의 요청으로 ‘아침 부동산’이라는 부동산사무소의 운영을 맡게 된다.

 

스물두 살의 여자와 부동산이 어긋난 삶의 모습 같기만 하지만, 그녀에게 의뢰된 집과 방들이란 이미지에 다가서면 그것은 곧 어둠이요, 평온이며, 위안의 장소로서 그리움, 회귀의 공간처럼 보여 더없이 적절한 만남으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그녀가 불쑥 찾아들어 잠드는 허술한 단층의 빈집이나,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은 어둠과 밤의 공간이며, 엄마의 자궁처럼 그녀의 성장을 위한 장소가 된다.

 

‘집 임자는 따로 있는 거다’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찾는 이 없던 빈 단층집을 계약하던 쌍둥이 노인 자매와 그녀들이 꾸며놓은‘나이트 룸’은 어둠의 평화로움으로 방황하는 영혼들의 심연을 위로하는 장소가 되고, 스물두 살 부동산 아가씨는 암흑의 응시에서 자신의 내면을 어루만진다.

한편 밤을 떠돌밖에 없는 가난한 고학생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그런 앳된 남자를 기웃거리기위해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여자의 연정, 알지 못하는 그리움, 동류에 대한 애틋함은 한 뼘만큼의 성장처럼 다가온다. 늦은 밤 남자와 찾은 반지하 방에서의 짧은 합일과 이별, 나이트 룸의 폐쇄는 그녀를 싸고 있던 껍질의 깨어짐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그녀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는 인스턴트 음식들과 불어나 뚱뚱해 진 몸이 다시금 가냘픈 몸으로 돌아가는 날, 두터운 겨울외투와 초라한 미니 부츠를 벗어던지는 날, 엄마를 닮은 여인으로서의 자신을 믿게 되는 날, 자신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깊이 잠들 수 있는 집을 느끼는 날을 이 도시가 허락할까?

한낱‘검은 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던 자신에게 색을 입히고, 빛을 찾아주기 위해 상실과 상처, 자기연민에서 탈주하려는 그녀의 방황어린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자의 마음은 이 살벌하고 무관심하며 소란스러운 도시가 과연 품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작은 보살핌, 구원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옅은 희망의 가능성을 바라게도 된다. 스물둘의 여자아이가 지닌 상실의 애도를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미숙한 채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래서 이제야 밤을, 어둠의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 것일지도. 그렇담 나는 어떻게 밤을 통과해야 할까?...이 성장과 애도와 치유의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위로가 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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