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디 아더스 The Others 10
사이먼 밴 부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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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외로움, 이별, 추억, ...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하지만 사랑인 것들. 우리들 마음 저 깊숙이, 아니 의식의 저편에 묻어 둔 감정들. 이것들에게 문득 가만히 다가가게 하고, 꺼내게 하는 향기와 꽃과 바다와 눈과 비, 어느 공원과 쇼윈도 속의 마네킹이기도 하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마주함의 찰나(刹那)가 영겁(永劫)의 시간이 되는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절로 가슴속에 환한 미소가 퍼져나가는 그런 시간들. 이 소설집은 내가 구사할 수 있는 형용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리는 이야기들이다. 그 아름다움, 슬플만큼 아름답다는 말이 어법에 맞는지 모르겠다. 내 몸과 마음이 이야기의 흐름에 젖어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고 한다면...

 

눈 감고 내 마음에 끝없이 들려주고픈 19편의 장단(掌短)편 소설들이 발산하는 맑디맑은 아름다움이 눈을 떠버리면 속절없이 날아버릴 것만 같아 책을 덮고 가슴에 올려둔 채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했다. 첫 번째 수록 작품인「작은 새」의 여백의 여운 같은 이야기의 사물들과 행동들 - 카프로니의 시집, 아르헨티나 지도, 와인병의 동전들, 침대 밑 운동화 - 에 내재된 감사와 존중의 사랑, 그 고아함에 다시금 첫 페이지의 문장으로 돌아갔었으니 말이다.

 

결여, 결핍, 상실, 그리고 이별과 죽음. 이 명사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들에 잠재된 삶에서의 무수한 감정들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가만히 내게 되묻게 된다. 내가 지금 잃고 있는 것, 그 결여가 바로 이것일 수도 있음을. 아내와 지키지 못한 소박한 여행의 약속이, “그 구두 정말 멋져요” 라고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던 연인의 진심이, 기차 매표원이 그리다 구겨버렸던 유리창 너머의 이름 모를 여인이, 구두 수선공이 되고픈 어느 소년의 사과 한 개가, 결코 이해받지 못할 여인들의 질투가, 자식을, 아내를 잃은 남자의 고통이, 어느 가난한 남자에게 몰래 전해진 케이크가, 귀가 들리지 않던 아내의 죽음이, 이 모든 것들에서 나는 사람은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존재일 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상실을 매개로 결합된 사람들임을 깨닫는 순간, 수술대 위에 누운 아내의 결핍을 이해하게 되고, 두고 온 구두를 간직하고 있는 옛 연인의 아픔과 비로소 소통할 수 있으며, 쇼윈도 마네킹이 아니라 구겨진 스케치 속의 여자와 차갑게 얼어붙은 눈 내리는 달 빛 속에서 꼬옥 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임자 없이 무성하게 자란 사과나무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 심었을 거라는 소년의 순박한 대답에서 비루하기만 했던 구두수선공의 삶이 풍부해지고, 질투와 시기로 거북해하던 아내가 제 옆자리의 쿠션을 톡톡치며 남편을 바라보는 그 시선만으로도 사랑은 말없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추운 겨울 누군가 몰래 내준 케이크가 “손을 뻗는 대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로 살짝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모습에서 더없는 최고의 선물이 되고, 청각장애 아내의 그 결여의 사랑에서 나치 장교인 아버지를 떠난 유태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공허함, 상실의 추억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소소한 사건들이 모인 박물관 같다.”는 소설 속 한 문장에서, 과거의 편린들, 추억이 발설하는 왠지 아득한 슬픔같은 아름다움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갑자기 추억에 닻을 내린 채 조금은 뒤쳐져 있고 싶어진다. 그것들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별과 상실의 이면에 있었던 감정들을, 사랑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랑을 진정 알지 못했음을 혼자 웅얼댄다.

 

그리고 내 의식의 오솔길을 따라 내면에 은닉되었던 자아와 마주하려는 시도를 해 볼 용기를 내 본다. 누구나 비밀일 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 꼭꼭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마음에서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린 그것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진정함이란 이런 것일 게다. ‘비로소 드러나는 사랑’, 정말 삶의 의미 같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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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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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은 생산최적화 사회구조 창조 도구이다!

  - 규율사회의 온순한 신체이기를 거부하는우편 배달원 ‘치나스키’를 중심으로

 

질서, 규범, 법과 제도 등 무수한 이름의 규제 장치들에 익숙해 진 우리들의 몸은 이것들에 순응한다. 이 사회적 장치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설의 첫 장은 미합중국 우정사업본부‘복무윤리강령’이 장식하고 있다. 우체국 직원의 행동 규범 수칙이다. 우체국 직원을 위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우정사업본부라는 조직을 위한 것이고, 이 조직은 상층부의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사회의 규제 장치들이란 개인인 약자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 소설을 이렇게 규범 등 사회 규제 장치의 기능이라는 획일적 주제로 몰아감으로써 소설이 발산하는 더 많은 언어들을 사장시키는 편협이 있겠지만, ‘미셸 푸코’에 앞서 이미 ‘찰스 부코스키’가 문학작품으로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억압하는 이들 기능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용될 수 있지 않을까? 부코스키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신체에 새겨진 규범의 감시와 처벌 기능을 거부하는 ‘헨리 치나스키’라는 중년남자, 그의 속물적 여과정치 없이 내뱉는 말, 얽매이거나 애걸하지 않는 행동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바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응한 몸과 정신, 혹여 보잘것없는 내 것들을 잃게 될까 쩨쩨하고 비루해진 나의 억눌려진 정신이 그로인해 해소되기에.

 

치나스키는 우편 배달원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수년 후에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 되지만, 그의 노동력을 무참히 착취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정규직원이 결근하면 일종의 땡빵용으로 새벽부터 기다리다 집배 순로를 배정받는 ‘보결 배달원’으로 우체국에 입사한다. 게다가 현장 주임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시정을 상부에 요구했다가 오히려 일자리의 위협과 더욱 혹독한 처사에 내물리는 등 시련을 겪은 끝에 정규직 집배원이 되지만,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성실한 선배 배달원이 오랜 그의 인고의 삶을 허물어뜨리는 누명으로 고통스러워함에도 우체국과 동료들은 외면하기만 한다. 조직이 그 구성원을 지켜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그 하찮은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그래서 치나스키는 어렵사리 오른 정규직 우편 배달원을 사직(辭職)한다.

 

우편 배달원은‘사람을 죽이는 노동’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그 육체적, 정신적 혹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구나 보결 배달원이란 위치는 생계의 위협이라는 불안함을 내재하고 있기에 비굴함을 요구한다. 설혹 감당할 수 없는 배달물량을 배정받더라도, 폭우가 쏟아져 통행이 가능치 않더라도, 근무시간이 아무리 연장되더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곧 불이익이 되어 일자리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정규직 자리를 과감하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치나스키이다. 인간성이 배제된, 오직 노동자라는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조직을 인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에.

 

몇몇 비평은 이러한 치나스키를‘반(反)노동’의 상징적 인물정도로 묘사한다. 이건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여 이익을 향유하기만 하는 자들, 결코 노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을까? 치나스키가 경마에 빠져 몇 푼의 배당액으로 술과 무노동을 향유하기는 하지만, 그는 항상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요구에도 그 요구의 달성을 위해 시도하고, 또한 완수하는 미덕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획일적으로 설정된 표준작업량의 일회적 측정으로 불이익의 감수를 종용하고, 끊임없이 연장되는 작업시간으로 사람을 단지 노동하는 기계로 인식하며, 어떠한 노동의 부당성에 대한 이의도 허용치 않으려는 무참한 조직에 저항 할 뿐이다. 이것을 반노동이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소설은 비정규직의 고통, 노동의 비인간화라는 노동현실을 통해 규범이라는 감시와 처벌의 장치가 인간을 어떻게 길들여 한낱 생산성을 위해 도구화하는지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생활의 달인 어쩌구하는 어느 TV프로를 우연히 본적이 있다. 엄청난 높이로 쌓인 박스더미를 순식간에 옮기는 묘기를 하는 창고 노동자를 비추면서 달인이라 추켜세우는 것이었고, 컨베이어벨트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제품에서 불량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별해내거나, 연말연시에 폭주하는 우편물을 분류하는 우체국 직원의 쉴 새 없는 손놀림을 포착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뻔뻔함이었다. 그들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오랜 노동의 강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이라는 산출물량에 초점을 맞춘 자본가의 탐욕에 기승하는 것이리라. 광고주를 기쁘게 하려는 방송사의 취향이야 이해하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을 단지 기예(技藝)로 취급하여 눈요깃감으로 둔갑시키는 한국의 주류의식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 기예로 보이는 그네들의 숙련된 동작에 가해졌던 감시와 처벌의 규정이 얼마나 오랜 시간 가해졌던 것인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소설 『우체국』에서 사회적 규제 장치인 온갖 규범들이 감시와 처벌이라는 기능을 통해 사람을 어떻게 길들이고, 현대 자본주의의 효과적인 이익 도구로 사용하는지를 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인 문제의식과 달리 치나스키라는 남자의 여성관은 여성을 남자의 성적 대상 이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여성 편력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는 점은 허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소설 속에 그의 사실 혼 관계의 첫 번째 아내에서부터 두 번째의 어린 아내, 그의 딸을 나아주는 세 번째 동거 여인을 비롯한 주변의 여자들은 오직 섹스라는 성적 파트너로 등장할 뿐이다. 그녀들과 그의 이상이 진지하게 논의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인내라는 어떠한 수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를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거나 순응하지 않으려는 인간으로서 치나스키를 창조해내려는 작가의 결벽(潔癖)한 의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사회장치 역시 인간을 속박하는 자유의 흠결중 하나라고 말이다.

 

결국 치나스키는 11년여에 걸친 우편물 분류 사무원이라는 육체노동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발견, 즉 주체를 찾았다는 것이다. 현대의‘규율사회’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꾸었다는 푸코의 말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질서에 예속되어 다양성이 배제되고 차이가 제거되어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멋진 저항인 것이다. 오늘의 노동이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 것이라는 소설 속 치나스키의 외침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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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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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新宿)하면 도쿄도 신청사 등 고층빌딩군의 업무지구 보다는 유흥가를 떠올릴 만큼 밤의 거리로서 낯익은 지명이고, 특히 가부키초는 각양각색의 유흥업소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소설은 바로 이렇게 조금은 어둡고, 향락적인 지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곳에서 삶을 일궈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순진하다 못해 어수룩하기 조차한 인물들의 소박한 일상은 대비되어 더욱 맑고 밝은 이야기가 되어 다가온다.

 

특히 제목처럼 비열한 권력자와 약자의 교전(交戰)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피곤을 몰고 오는 외면하고픈 주제에도 불구하고, 거짓이나 위선, 기만적 행위를 하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정직한 사람들, 야비하고 저열한 사회에서도 용기와 자존감을 잃지 않는 사람들, 작은 기쁨과 은혜에 고마워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 약자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하고픈 일을 위해 정말의 노력을 다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작은 너울만큼의 소탈하고 수수한 전개로 편안하게 조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 작품 최고의 미덕일 것이다.

 

일할 터전이 없는 섬과 쇠락한 소도시인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 그리고 형제와 가족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중년의 남자, 비굴하지 않기 위해 혹은 억울함을 강요한 세상에 대항하기 위해 자기 삶에 전념하는 여자가 있다. 이들의 그 순수한 삶의 기억과 모습을 투영하는 에피소드들이 신주쿠의 유흥주점 ‘란(蘭)’의 바텐더인 스물여덟 살 청년‘준페이’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자동차 뺑소니 사건이 발생하고, 정작 가해 운전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수하면서 이를 목격한 두 청년의 어설픈 공갈의 시도를 시작으로 실제 가해자인 유명 첼리스트와 여성 매니저, 가해자를 대신해서 구속된 남자와 그 가족들의 사연, 그리고 야쿠자의 개입까지 웃음과 슬픔,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한편, 대중적 인기를 지닌 첼리스트 동생을 위해 구속을 자처한 형의 사랑, 섬에서 상경한 젊은 부부와 그네들의 아기, 이들의 자립 기반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년 마담의 사랑, 아흔이 넘은 고령의 할머니가 그녀의 자손들을 위해 기도하는 무조건의 사랑, 할머니를 돌보는 자원봉사 도우미와 이웃들의 관심어린 사랑, 고향의 진정한 일꾼이 되기 위해 젊음을 태우는 청년의 사랑, 그리고 풋풋한 미술대 여대생의 사랑, 비록 야쿠자이지만 젊음의 열정과 정직함의 응원을 위해 보내는 의리의 사랑이 소설의 저변을 꽉 채우고 흐르기에 용렬하고 비겁하며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들의 추악한 위협과 위해(危害)를 뚫고 소설은 따뜻한 감동으로 충만해진다.

 

이처럼 약자이고 경시되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소설은 그들을 옥죄고, 핍박하며, 겁박하는 자들이 지니지 못한, 아니 깨닫지 못하는 덕목을 일깨운다. 자기 의심의 미덕이다. 자신들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시비(是非)의 인식이다. 악행을 하는 자들이 반복해서 악덕을 저지르는 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력이 마비되어 있거나,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의심하고 도덕이라는 보편성을 끊임없이 자문함으로써만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음을.

 

아마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비록 더러운 인간들의 허위와 야비함에 신경이 경직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훈훈하고 유쾌함의 기운에 휩싸이는 것은 이들 약자의 정의(正義)가 악덕과의 승부에서 정정당당하고 멋지게 이겨내는 바텐더와 노회한 정치인과의 선거대결 장면일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이 승리를 향한 이야기의 전개에 모두 결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중의원(국회의원) 후보자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 저마다의 자기 들여다보기를 통해 완성해가는 삶의 희망을 향한 다채로운 감동의 모습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의 소수자들이 쟁취하는 해피엔딩이 위축된 정신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선악(善惡)의 규명에 몰입하던‘요시다 슈이치’가 시비(是非)라는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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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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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표제인‘비행운’은 국제공항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오십대 여성의 신산한 삶의 궤적을 좇는 「하루의 축」이라는 작품에 “안도의 긴 한 숨 자국”이라 표현되고 있다. 그저 가까스로 스스로를 달래는 곧 사라질 흔적이라고. 그것은 여유로워 보이기조차 하지만 떠오르기 위해 중력을 다한 것의 힘겨움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존재했었던가 할 만큼 이내 소멸해 버린다. 우리네 삶이란 것이 결국 이런 순간적인 자취일 것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존재했었던 사람들의 자국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삶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소설집의 맨 앞에 수록된「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같이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깨닫는 미영이란 인물의 자기모멸에 수치스러워하던 어느 날의 기억은 동시대인들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인 소설집 전체의 작품들을 아우르는 목소리로 여겨진다. “내가 살아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는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 자기 연민에 훌쩍이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오늘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그 몽매함을.

 

1.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란 정말 얇다

 

이 시선이 첫 번째 향한 곳은 주류와 상승의 경계에 선 아슬아슬한 사람들, 그리고 오래전 여기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미약한 구조(救助)의 중얼거림이다. 「벌레들」,「물 속 골리앗」이라는 두 작품이 그러한데, 전자는 재개발을 위해 쓰레기더미로 방치된 구역과 경계지대에 선 빌라가 호흡하는 빈곤의 냄새와 악취를 통해 바깥세상의 경계라는 것이 안쪽에 있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을 일깨운다. 경계너머에서 길게 줄 이은 벌레들의 행렬, 쓰레기 더미 위에서의 급작스런 산고로 ‘살려주세요!’ 라는 외침이 공허한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실체일 것이다. 경계 밖도 바로 나의 삶인 것을.

 

후자는 아예 경계에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표현대로 “오래전 수도에서 밀려난 이들의 둥지”인 외곽지역의 낡은 아파트가 배경이다. 아파트가 한창 신분 상승의 이미지를 지니던 시대, 너도 나도 그 안에 속하길 바라는 부추겨진 위선에 희생되어 사그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 전기도 수도도 끊긴 재개발의 폭력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자(母子), 크레인 위에서 임금지불을 요구하다 추락사한 아버지, 이들을 에워싼 거친 물살, 부서진 문짝에 몸을 싣고 생존을 향해 떠내려가는 소년, 그런 그가 의탁할 수 있는 것이 수면위에 비죽이 몸을 드러낸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은 실로 패러독스하다. “거대한 수중 무덤같은 세계”, 전국토가 공사 중인 세상을 향해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중얼거리는 소년의 말은 “누군가 올거야”라는 손길인 것은 아직은 희망을 걸 무엇인가가 이 사회에 있다는 기대일 것이다. 이제 그만, 상생을 말하는 권력이 진정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2. 나르시시즘, 그리고 물화(物化)

 

「큐티클」이란 소설은 “기분도 구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계속 구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하루를 좇는다. “안도 할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라는 자조의 말처럼 타인의 시선, 그리고 세뇌된 소비적 과시의 쾌락에 젖어든 사람들은 구매의 매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루카치’의 지적처럼 대상물을 물화하는 해석습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물질적 소비로 인한 관계의 영향력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손톱에 사로잡혀 네일아트 숍에 손을 맡긴 여자가 “배꼽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무시하고, 선망하는 것처럼, 일단 뭔가 알게 되자 그 앎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경쟁력이야”라고 온통 자기관리를 말하는 상품화된 시대의 초라함을 깨닫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가의 손톱 손질을 하고 찾아간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그녀의 손을 보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의 손에 신경 쓰고 있는 건 그 자신 뿐 인 것이다. 과시와 타인의 시선이란 것도 결국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다. “상점 앞 스테인레스 기둥에 내 모습을 비춰봤다. ”라는 여자의 행위처럼 말이다. 여행용 캐리어의 요란한 바퀴소리, 변색되고 시든 부케를 안고, 하얀 원피스에 호객용 경품 클러치백을 멘 채 9센티미터 힐을 신고 언덕을 뒤뚱거리며 내려가는 지친 여자의 뒷모습이 바로 물화된 현대인, 우리들의 초상 아니겠는가?

 

3. 외로움과 소외,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들

 

한국사회 계층화의 고착은 가속되고 있는 듯하다. 이 거대한 양극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고독하고 고립되어 가고 있으며, 갈피를 잡지 못해 서성인다. 스무 살이 되면 세상의 진입(進入)로에서 엄청난 장벽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 「서른」은 십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된 여자의 변화란 고작 여섯 번째 자취방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이 미래가 삭제된 말이 시린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한다.

 

여기에 더해 소설「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택시기사가 반복하는 중국어 회화문장인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은 반향을 기대치 않는 말 같아 코끝이 찡하고 울려댄다. 그리곤 작품의 말미에서“리 쩌리 위안마 (여기서 멉니까?)”는 고달픔과 절실함이 묻어나 그 방황의 안타까움에 한 동안 먹먹함의 여운으로 눈을 내리감게 된다.

 

물질의 과잉과 타인의 시선에 매몰된 우리들과 우리의 세계는 지나치게 분별하려 든다. 극한적인 경쟁, 그 대열에서 낙오된 이들은 경계 바깥으로 밀려나 이내 시선에서 지워지고 외면되어 버린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 고립과 소외를 자처한다. 다시금 분열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도 없는 구원의 목소리로 불안해하고 방황한다. 추석 전야에 구멍 난 인력을 대신하여 공항 청소를 자처하는 중년 여성 기옥의 긴 한숨을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십년이 지나도 겨우 내가 된다는 좌절한 세대를 만들어내는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읽기를 마치면서 어느덧 나는 경계가 지워지고 허물어진 사회, 배제된 이 없는 모두 함께하는 세상을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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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가야노 도시히토 지음, 임지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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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력(暴力)이란 단어에서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느낌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떤 대상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또는 “무기로 상대를 억누르는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자기 이외의 존재를 억누르고 제압하려는 무력적 수단이나 힘을 마주했을 때의 불쾌한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폭력’그 자체를‘나쁘다’ 거나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단지 도덕적 당위성에 매몰되어 실제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폭력의 성분이 선(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은 굉장한 도발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 나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는 이를 설명하는 배경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현상 - 정당방위와 같은 자기 생명의 구제를 위한 불가피한 폭력의 행사 등 - 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악을 처벌하기 위한 폭력이 없다면 드라마 사극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라 하면서 이것은 폭력을 동경하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 존재란 본디 폭력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인간은 폭력을 떠나서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 존재의 존립기반으로서의‘폭력’, 인간이 지닌 것에 어찌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라는 도덕적 함의를 지닌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인간 중심의 오만한 반문일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도덕적 가치를 지닌 언어로 분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얘기이리라.

 

정언 명령의 충돌, 도덕의 상대성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도덕에 무언가 이유를 부여한다면 특정 조건이나 가정에서만 그 도덕을 지키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의 모순관계를 통해 도덕이란 상대적인 것임을 역설(力說)한다.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요구는 이미‘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정언명령에 이유, 즉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되어 답이 불필요한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죽인 사람은 사형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또 다른 정언명령인 사형제도는 분명히 전자의 정언명령에 배치된다. 결국 장소와 때에 따라 도덕이란 것은 이처럼 변하는 지극히 상대성을 지닌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전자(前者)의 정언명령은 보편성을 지니지만, 후자의 사형제도 조차 보편성을 지닌 것일까? 사형제도는 인정되기도, 부인되기도 하는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예시는 불완전하게 보인다. 더구나 칸트라는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 그리고 도덕의 상대성이라는 두 토대 위에 폭력이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달성한다. 폭력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기반이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폭력을 도덕성에 입각해 이해하려는 입장은 폭력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폭력은 도덕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살인자에 대한 사형, 전쟁에서의 적군 살해, 정당방위(자력구제)로서의 살인 등등,‘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주장이 무수한 경우의 변수에 따라 허물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렇게 도덕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도덕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도덕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도덕이란 것이 본래 이현령비현령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비판의 싹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인지 “도덕적인 기준에서 폭력을 고찰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폭력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가치로서의‘도덕’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국가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다

 

이러한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가장 커다란 주체, 나아가 폭력의 합법적 원천으로서의 국가의 정의에 이른다.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도 저자는 루소보다는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논리의 원천으로 삼는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한 즉‘획득에 의한 커먼웰스(commonwealth)’가 국가설립의 본질적 실질을 설명하는데 가깝다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식시키는 압도적인 폭력으로서의 힘에 복종하고 그 보호를 받기로 하는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일본 막부의 군사력 독점을 근대국가 설립의 사례로 사용하고 있음; 다분히 일본 근대국가 성립의 시기를 앞당기려는 의도로 추정됨)

 

이렇게 해서 설립된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되고,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관점이다. 또한 아주 중요한 시사가 있는데,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작인‘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새로운 전쟁』에서 언급한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로 인한 전쟁 규모의 대형화,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가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다는 것과 일치하는 서술이다. 무기와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군사력 독점이 가능해진 시기와 근대국가 형성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에 대핸 주목이다. 즉 폭력 독점 과정이 곧 국가의 설립이라는 것이며, 이로써 국가란 인간사회에서‘폭력의 권리의 원천’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더욱 밀고나가 국가의 세금 징수는 바로 합법적인 폭력의 다른 표현이라는데 이른다. 강력한 합법적 폭력을 가진 국가는 복종과 보호의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이것이 바로 세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야쿠자와 같은 폭력 조직들이 보호비조로 상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돈과 세금과는 그 성격이 같은 것이지만 다만 ‘합법성’이라는 법에 의해 유일하게 승인된 주체인가 아닌가의 구별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법’을 통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국가의 폭력만이 합법성을 띠게 되고 그 법에 의해 제한되고 견제되지만, 역사 속에서 이 법이 국가 권력의 부패로 인해 자의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려 실질적인 견제가 되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다시금 도덕이라는 잣대가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존립기반 자체가 폭력인 이‘국가’라는 조직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목소리가 공감을 획득한다. 따라서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성적 요구로 들리게 된다. 과연 국가는 해체 가능한 것인가?

 

폭력은 인간과 국가의 본성이자 존립기반이다

 

책은‘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이 역시 홉스의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의 사고에 기초한다. 국가라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 사라지면, 자연상태에 빠진 개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는 곧 공포와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지역, 이해관계 속에서 강력한 폭력조직은 다시 설립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해체가 다른 국가의 설립으로 대체될 뿐, 결코 실질적인 해체는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면 개인들의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된다. 그중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폭력을 국가에 위임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폭력 없는 상태가 인간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국가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이처럼 이 불쾌하고 불편한 폭력이 인간과 국가의 존립기반 자체임을 인정한다면 우리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것이 혹시라도 보편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상과 보호의 조화라는 평형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끊임없이 보완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이미 폭력이라는 본성에 서있으면서 도덕적 당위만으로 폭력의 배제를 주장해봐야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폭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며, 이로써 인간 개인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비웃지 않고, 개탄하지 않으며, 저주하지 않고, 단지 이해하는 일에 몰두하겠다. ~ 中略 ~ 비록 아무리 불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필연적인 존재이고, 일정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통해 그것들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관점과 같은 것일 게다. 폭력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도덕적으로 부인한다고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록 가혹한 현실이지만 그 본성을 수긍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일 게다. 그래야 폭력이 힘의 논리 이외에 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제어될 가능성이 열리고, 푸코의 말처럼“권력이 보편적인 것에 반하는 경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보다 성숙된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관점을 심화시킬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사실 틈틈이 지적하였듯이 사례의 왜곡과 논리적 부당성이 곳곳에 자리잡고, 더구나 그것에 이론적 토대를 쌓아올려 주장의 당위에 이르는 불완전성, 또한 도덕성 배제의 이유가 충분한 동의를 얻기에는 미흡하지만 국가의 설립에 이르는 역사적 배경지식과 통찰이나, 국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실체적 탐색은 점점 은밀하게 행사되는 오늘의 국가폭력의 형태를 이해하고 견제하는 데 귀중하고 충분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특히 폭력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입장 표명에 만족을” 느끼는 데 불과한 도덕주의로 인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개인적으로 내 도덕적 관점과 국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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