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동시대 문학사 1동시대 문학사 3, 사랑에 각기 수록된 이광호 평론가의 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 강계숙 평론가의 한국 여성시의 시작(始作/詩作)을 돌아보다, 심진경 평론가의 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 강동호 평론가의 종언 이후의 사랑,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을 바탕으로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의 문제의식에 터 잡은 일종의 글모음이자, 소소한 잡설이다.


과거가 잔존하는 현재라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이 현시대에 혼융되어 실재함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체감하는 시절이다. 국민대중을 기초(基礎)로 한 민주주의와 자율적 윤리의 성숙에 대한 요구가 강한 지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권위주의와 같은 과거의 퇴행적 유령들이 상존하며 세상을 갈등과 혐오, 혼돈의 시대로 몰고가는 것처럼 결코 동시대는 동시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의 이러한 시간적 얽힘은 지난 것들에 대한 내 관심을 자극해오던 차에 동시대의 문학사라는 기획 하에 폭력, 사랑, , 젠더라는 한국의 근대 문학사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네 개의 주제어로 출간된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바로 오늘에 활발히 논의되거나 논의되어야 할 하나의 문학사라는 거대한 역사의 범주로 포섭할 수도 없는, 아니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한 우리 근대 문학의 주제계(主題系)들 각기의 기원을 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들의 각 담론 혹은 계보(系譜)들을 읽다가 예기치 못한 우리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작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 글은 이로인해 촉발된 개인의 욕망에 따라 발췌한 글 모음의 보관용 기록이다. 잊혀진 그 문제적 작가와 작품, 그리고 커다란 시차를 두고 계보를 잇는 작품들은 그러한 기록에서의 부수적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의 작가 김명순과 그녀의 작품 세계는 앞서 열거한 <사랑과 와 젠더> 세 주제계열의 주제 글들 모두에서 설명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시사하는 내용은 매우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감정은 곧 이어 한국문학에 대한 나의 많은 몰이해와 오독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고, 부지런히 몇 권의 책을 부랴부랴 구입하도록 이끌었다. 그것을 어떤 범주의 언어로 특정한다면 한동안 여성 독자들에게 베스트셀러였던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이미 분석 제시한 문학적 열기와 충돌이 적절한 출구를 얻지 못해 내면의 심층에 갇혀있어 제 숨을 틀어막는 병인으로서의 정신분열에 내몰린 미친 여자이고, 여성이 여성을 서로 감시, 단속하게 하는 신화적 지층을 탐사한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Women Madness)이기도 하다.

 

동시대 문학사 1나는 쓸 수 있는가-‘일인칭하기의 역사적 몽타주라는 글에서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근대 초기 여성 작가에게 의 글쓰기를 밀고 나가는 것은 모성 이데올로기와 인습적인 가족제도에 얽혀있는 식민지 젠더 시스템과의 투쟁을 의미했으며, 여성이 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이다.”라고 쓰고 있다.

 

1920년대 식민지조선은 중혼(축첩)과 남성불륜이라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는 사회였으며, 여성의 지식과 교양은 불행을 가져오는 화근이며, 기껏해야 남성사회를 보완하는 범위 내의 지식습득만 허용되는 세계였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론 신여성이라는 식민지 남성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과 결핍을 투사하는 허구적 대상으로서의 환상을 씌워놓곤 막상 그 여성들이 새로운 풍속과 여성의 주체적 정립을 향한 해방의 목소리를 낼 때에는 여지없이 온갖 비아냥과 조롱으로 무참한 폭언과 비열한 가해를 가하여 문학의 장은 물론 사회적 낙인을 찍어 내치는 시절이기도 했다. 신여성=근대적 지식인 여성=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을 남성 자신들이 유용성에 따라 활용하는 비열한 언어였다.

 

이때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1917년 잡지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김명순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출간되던 1925년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의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詩集생명의 과실을 출간한다. 이미 활발한 문학 작업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문단 남성 작가들 또한 김명순에게 신여성이라는 더러운 기호로 자신들의 욕망을 투여하며 열광했지만, 그녀가 근대적 자아인 개인 주체로서의 여성 자기의 목소리를 내자 남성 문인들은 연애 스캔들을 내세워 그녀의 글쓰기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명순이 유학시절 일본군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이응준이라는 소위로 임관한 조선인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매일신문의 기사는 곧바로 김명순을 문란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끝없이 채색하고 소비하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문란한 여성이라는 등식으로 변질되는 괴이한 윤리적 잣대가 작동했다. 특히 남성중심의 문단은 정말 파렴치했는데, 김기진, 방정환, 김동인 등이 린치에 가까운 공격으로 악질적 가해를 해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보드래 평론가의 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동시대 문학사 3, 사랑』「방황의 권리, 고통의 미학)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추악한 소설을 써서 2차 가해질까지 해댄 것인데, 이 친일 매국노는 한국문학사의 더러움을 장식하는 감초인 듯하다. 김명순은 이러한 적대적 불화에 고군분투하며 격렬한 언어적 발설과 분출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기를 희구했지만 문단과 사회의 극단적이고 처절한 단절과 처벌은 그녀에게 그 어떤 극복의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앗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완전한 절망감에 부딪쳤을 때 그 어떤 존재건 미치거나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울분과 수치심과 복수심을 발산함으로써 세계에 호소하며 그런 스스로의 정념을 객관화하기 위해 여러 다양한 삼인칭 장치를 활용하여 분투하지만 결국 분열로 진행되고 만다. 그녀의 내 가슴에라는 시를 읽다보면 조각조각 찢어진 붉은 꽃잎들같이도”, “나는 무수한 검붉은 아이들에게 묻노라.”, “분노에 매맞아 부서진 거울 조각들아,”, “피 맞아 피에 젖은 아이들아,” 와 같이 시문장의 전체가 찢어지고, 조각나고, 아이들이라는 분열의 언어로 쓰여져 있음을 읽게 된다.

 

동시대 문학사 1여성 자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타자 되기의 미학라는 글에서 심진경 평론가는 김명순의 분투가 가장 짙게 남아있는 작품으로 1924년 신문에 28회 연재되었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1924)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김명순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스스로를 새롭게 재정의하기 위해 절박한 시도를 한다. 심진경은 이를 자기변명이 아니라 여성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해독하고 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분투는 실패하고, 거처도 없이 떠돌다 일본의 뇌(정신)병원에서 죽고 만다. 여기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여성이 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들의 억압을 드러내고, ‘의 다른 잠재성을 상상하는 문제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 빠르기도 하여라.)

 

이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미친년들, 미쳤다고 낙인찍힌 여성들은 고정된 성역할 규범을 벗어났기에 들어야 했던 사회적 징계의 언어였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적 욕망과 주체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의 비열함에서 비롯된 여성의 광기라는 언어가 역설적으로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시도하는 언어의 의미로 비로소 와 닿은 것이다. 성폭행당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를 가해한 당대 문단 남성들의 위선과 비열함이란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다. 김명순에게 가해진 일방적 단절과 폭력과는 차이가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고 재구성하려는 고백적 자기 서사인 1934년에 게재된 나혜석의 이혼 고백장-청구(靑邱)씨에게는 곧바로 뻔뻔한 불륜녀라는 비난과 더불어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로 낙인찍어 내버려졌다. 나혜석도 알츠하이머로 떠돌다 행려병자로 객사하고 만다. 여성이 자기 주체의 정립을 위한 목소리를 내면 곧바로 처단되던 그 비루한 실제는 이렇게 미친년, 여성의 광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어쨌거나 김명순과 나혜석은 소위 신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여성 지식인 엘리트였다. 그런 그녀들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처절하게 내쳐지고 미친년이 되고, 이름 없이 사라졌다. 당대 여성 인구의 대다수는 이렇게 근대화를 체화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위 구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권력이 들어서서야 통속교육이라 해서 자신들의 통치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소양 교육을 시행하였을 뿐 아니라, 1920년대의 식민지조선의 문단이라 해도 자유자재로 한글을 구사하는 인물이 드물었다는 증거들은 구여성들에게 자기 각성, 여성의 새로운 자율적 자기 주체의 정립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물음이 발생한다.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서로 싫어하고, 서로 경쟁하며, 다른 여성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즉, 성공하거나 권력을 지닌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보호해주거나 그로인해 고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 서로간의 차이로 인해 작동하는 심리적 두려움이라는 여성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간극의 문제다. 1938년 여성 소설가 백신애는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광인으로 내쳐진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광인 수기를 발표한다.

 

서구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가 2005년에 발표한 권력을 지닌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 놓여있는 강의 문제가 백신애의 신여성과 구여성의 물음 속에서 이미 개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신애의 소설 작품들에는 균열적이고 병리적 상황에 빠지는 인물이 즐비하게 등장한다. 백신애는 김명순이나 나혜석이 문단이나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받고 처형되는지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취한 방법은 이중 언어 전략이다. 따르는 듯 하지만 이면으로는 저항을 감추는 듯 발설함으로써 기존의 규범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의 광기는 살아내기 위한 불가피한 생의 필살기였던 셈이다.

 

- 이눔 하누님아, 에이 비러먹을 개새끼 가튼 하느님아, (...) 아이 무서워, 아니올시다. 거짓말이올시다.(...) 부대부대 벼락은 치지말고 잘 살두록 해주시소.“ -백신애, 광인수기에서

 

광인 수기속 미친 여자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된 여성이 자신의 내적 분열, 분노, 저항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다. 한국문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불복종 여성, 특히 미친년의 문학사적 전통은 근 60년간 끊어졌다 2007년 한강의 채식주의자영혜로 다시 출현했다.” 물론 여성의 광기를 소설의 제재로 직접 삼은 소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남성중심의 젠더화된 여성에 대한 관습화되고 스캔들화된 허구에 저항하는 무수한 여성 서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광기에 강하게 견인된 김영순-백신애의 계보는 김명순-백신애-한강이라는 연결선으로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무슨 문학적 계보를 의도적으로 만들고자하는 따위의 도식이 아니다. 소설 속 미친년들이 다만 그렇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스스로를 나무라고 상상하는 정신병자로 변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녀가 본래 미친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했던 여자가 아버지에게 맞아죽은 개, 그 개를 강제로 먹어야했던 기억으로 비롯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사후적 채식주의의 선택이 가부장제적 폭언과 폭력의 계기로 이어지고, 급기야 거식과 침묵을 거쳐 나무-되기라는 불가능한 변신 욕망으로 나가는 과정이 연작단편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아버지-남편이라는 가부장질서에서 심지어는 식물적 육체가 된 처제 영혜의 육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아 또다른 형태의 여성적 역할로 대상화하는 예술로 가장한 형부의 성폭력이 더해진다. 극단으로 치닫는 영혜의 광기는 타자화된 여성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정말 조소가 터져나오는 것은 이 소설의 형부의 예술적 위선 위에 펼쳐지는 패륜적 근친상간이라 부를 수 있는 영혜에 대한 성폭행 장면을 뚝 떼어내 영혜를 패륜적 여성이라 부르며, 부도덕한 소설이라고 욕설을 뱉어내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한 웅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문해력 무능을 만방에 알리는 무지의 어리석음은 물론, 필리스 체슬러가 지적한 페미니스트 여성들 사이의 불신과 몰이해가 바로 지금에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지배질서에의 순응과 거부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오정희의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히스테리적 주체들의 전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라캉이 아마 이렇게 말했는가보다. 주체는 스스로의 결여를 전면에 내세워 타자의 권위, 규범, 사랑의 대상을 자극하고 그 타자가 내세우는 이름과 설명을 끊임없이 시험한다.”며 히스테리 주체란 타자의 욕망을 캐묻고 흔드는 운동 속에서 자기 인식을 이 구조의 두 자리를 왕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여성 주체가 오히려 오늘날 여성이 위치한 자리에 대한 가장 진솔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에 이른 페미니스트의 시점에서 보면 퇴행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엘리트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감염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이러한 현실 사회 속 여성들이다. 오정희는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히스테리적 주체로 상정하면서 가부장제적 질서라는 보편성 안에 스스로를 묶어두면서 그 안에서 내부의 예외로 존재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전략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완료된 능사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소설들 전반에 모호하고 불투명한 라는 존재의 출몰이다.

 

문학평론가 우찬제와 대담에서 오정희는 이를 설명하려 애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이거나 엄중한 금기에 짓눌린 자아 또는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불러온 곡두이거나 어쩌면 근원적 그리움일지도 모르며 내 의식에 투영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오정희, 우찬제의 대담록 오정희 깊이 읽기,2007라고. 에로스적 충동이 넘쳐흐르는 오늘에 이러한 전략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적충동을 부추기고 섹시미를 범람케 하는 문화의 장과 달리 공적 장에 이르러서는 이를 묵살하거나 손가락질하는 가히 변태적인 시대임을 목도할 수 있다. 기성의 남성중심의 지배질서는 물론 20세기 전반과 많이 다르지만, 21세기 오늘에서도 지배질서의 윤리와 여성 욕망의 배치는 그리 순조롭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여성 욕망과 변화하지만 여전히 강고히 잔존하는 질서의 압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나는 남성이다. 하지만 젠더화에 토대를 둔 성차별 의식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광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여성 작가들의 계보 문학의 자취를 따라가다 한국문학의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내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심진경 평론가가 더 이상 순수 여성은 없다!”는 선언에 공감한다. 남성이건 권력을 쥔 여성이건 소외된 여성이건 우리들 모두는 자기 안에 타자를 품은 양가적이고 미결정적인 자기 동일성이나 보편성으로서의 단일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다.” 결코 그 누구건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철저하게 세계와 이격되고 고립된 산 속 깊은 곳 자연인일 것이다.

 

당연히 여성의 정체성이란 것도 단일 내부만으로 이루진 것일 수 없다. 타인과의 지속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상대화하고 자기 확신을 무력하게 만들며, 당연함을 잠식케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순수 여성이라는 말의 정체성도 이미 습득되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결국 여성이라는 말 자체도 이미 오염되어 있기에 순수 여성이란 말은 가당치도 않게 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하여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른 무수한 정체성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평론가 오혜진은 퀴어 친밀성과 낭만적 사랑에 대한 소문들(동시대 문학사 3, 사랑이라는 글에서 여성의 현대적 섹스는 생물학적 번식이라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쾌락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자아를 연출하게 하는 동기부여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함께의 여성 주인공이 애인은 셋 정도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 는 말의 변주처럼 들린다. 낭만적 사랑이 쾌락으로 대체된.

 

그러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가인 필리스 체슬러는 차이와 고유성의 희생은 생물학적인 재생산과 문화적 무능이라는 여성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과 단단히 묶여있다.”고 현실의 삶에 놓여있는 여성의 본원적 고뇌에 대해 질문한다. 오혜진이나 은희경 식 전략은 필리스의 지적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절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진단은 빈곤하거나 조잡하기 짝이 없다. 내 부족한 시선과 이해는 지금 지나 온 한국문학들, 특히 여성 문학들을 다시금 읽어보도록 종용하고 있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노랑무늬영원의 여성 서사들, 오정희의 소설 컬렉션들, 최윤과 배수아와 신경숙, 김명순과 백신애와 강신재, 그리고 박경리, 최승자와 김혜순의 화법 자체의 형질변화를 촉구하는 시선들을 조금은 더 깊숙이 읽어보아야 할 듯싶다. 이들 동시대 문학이 아닌 비동시성의 문학들이 우리 앞에 놓인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품고 있거나 어떤 영감이 되어주기도 한다. 다가오는 봄이 되면 이들 한국문학사에 저마다의 좌표를 남긴 여성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탐닉하는 시간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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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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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과 습속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만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근대 욕망구조의 담론'중에서


옛 기억의 한 장면,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찻집에 마주앉아 있다. 여자는 뽀글거리는 파마 머리를 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던 남자는 웨이브를 살짝 하면 더 예쁠 것 같아 라고 그녀에게 주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남자를 향한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지만 내심으로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마주하다 이별의 걸음을 하고 헤어진다. 이 이별의 장면은 칙칙하고 우울한 자못 짙은 슬픔을 내포한 장면이지만 시간의 경과 속에서 재해석하게 되는 이미 타자가 된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슬며시 미소와 함께 애틋한 마음이 피어난다. 왜 그 마음을 받지 못했을까. 조금은 본질과 거리가 있지만 과거인 기억은 이해의 눈을 재배치하게 하고 새로운 관점, 즉 자신에 대한 애석함과 자책하는 마음, 그것들과 비로소 해결되지 못했던 마음의 응어리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요아힘 마이어호프의 소설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어린 시절 과거의 기억들을 풀어놓아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 생기를 찾아 스스로 움직이며 환하게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재해석으로 삶의 의미를 재생성하는 글쓰기, 즉 자신과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들에 대한 애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허구는 곧 기억이다라는 의미에서 자전적 소설(허구)이며, 허구를 진실로 찾아 낸 이야기이기에 허구로서의 이 소설은 더없이 맑고 진솔한 목소리의 울림을 갖는다.

 

소년 요아힘은 북부 독일의 소도시 슐레스비히의 헤스터베레크로 불리는 천 오백 명의 어린 환자를 수용한 수 채의 건물들과 영지를 지닌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에서 원장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의 따뜻함과 열정을 그리워하는 오지랖 넓은 어머니, 그리고 손위 두 형과 함께 성장했다. 질병의 분류에 따라 구분되는 병동에는 그 병세의 고저에 따라 상은 고질병, 중은 중간 증세, 하는 미약한 증세를 의미하는 A-, G-, D-다락과 같이 불린다. 소년은 이런 표기 방식으로 말하는 원장인 아버지의 말에 익숙하게 되고, 글자에 높낮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냄새가 고약하고 맛없는 치즈(Käse;캐제)라면 K를 높게 써야하는 식이다. 요아힘이 학교에서 최초의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사건이 터진다.

 

이 문장은 배가 고픈 체 하는 나쁜 고양이다.’ 를 쓴 것이다.


선생님이 칠판에 나와 고양이가 배고프다(Die katze hat hunger)”를 써보라고 시킨다. 당연히 아이들의 폭소가 터져 나온다. 그에게 중요한 건 글자 자체로 나타나는 명료함과 아름다움이고, “문자는 곧 정체성과 본질,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요아힘은 일 학년을 불과 사 개월만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조금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절망에 빠져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소년. 그의 두 형 중 작은 형은 빈정거린다. 일 학년에 벌써 유급이라니! 넌 앞으로 크게 될 놈이야!”

 

이 기억의 장면, 주변의 몰이해는 그 자체로 당시 어린 요아힘이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야기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그런데 그 장면의 기록들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어린소년이 성장한 어른이 되어서까지 풀려나지 못하게 했던 분노장애, 전반성 불안장애를 만들어 낸 발단의 사건을 바라보면 그 실제의 이야기들은 환한 웃음을 띠게 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이해에 다가서게 된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마주함이다. 분노를 도발하고 만들어냈던 사람들과 상황들의 기억들, 그를 일생 화해하지 못하게 했던 그 불화하는 사건들의 조각들에 새롭게 숨을 불어넣자 그것들은 저절로 날아올라 새로운 의미로 환하게 미소와 기쁨과 애틋한 다정함의 의미로 다가온다.

 

교실에 도착하자 소년은 외친다.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내가아아 죽으으은 사라라람을 발견했다아아아!” 선생님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과 함께 제정신이니? 난데없이 이렇게 늦게 와서는 뭐? 너 미쳤어?

 

요아힘이 학교에 처음으로 홀로 등교하던 일 학년 어느 날 죽은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선생님에게 야단과 함께 추궁받게 되고, 이에 따라 기억의 조작, 즉 화려한 장식과 살을 붙여 급우들과 가족들에게 관심을 이끌고 싶어 했던 일련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절로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듯 진실을 향해 스스로 발전해 나간다. 소년의 마음, 사실에 대한 이해가 타자에게 수용되지 못함으로써 거짓의 낙인이 되어 자기 믿음에 대한 불안을 촉발시킴으로써 분노를 만들어냈던 사건들, 아주 사사롭고 세세한 기억의 편린들이 기술되고, 그 수많은 미소짓게 만드는 기억의 표면적 문장들 속에 내재된 그날들에 화자의 내면에 깃들어있던 짙은 애도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 간절한 흐느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갈 수 있는 동력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음을 요아힘 그는 이제 안다.

 

바람기로 어머니를 내내 고통에 몰아넣었던 아버지, 하지만 어린 자신을 진찰대에 눕히곤 사랑이 맘껏 담긴 진료를 하여주고, 항시 제국의 군주처럼 계획을 지시하거나 집에서는 자신의 안락의자에 책읽기에만 열중하던 그 말없는 이가 숯가마를 만드는 어린 자식을 위해 진흙구덩이에서 어설픈 작업을 해주던 아버지를 그려낸다.

 

그런가하면 아버지와 다툼 속에서 미친 듯 바닥을 뒹굴고 신문지를 발기발기 찢어대며 흩날리던, 요아힘에 낯선 어머니의 얼굴이 두려움을 던져주고, 타인의 내면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선의의 오지랖으로 일을 그르치게 하여 분노를 야기케 했던 어머니, 북부 독일의 추위에 넌덜머리를 내며 이탈리아의 온기와 예술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전신에 퍼진 암의 고통을 겪던 말년의 아버지 곁에서 헌신으로 간병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다시금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그네들과 화해하고 보내지 못했던 애도의 세계를 써내려가기도 한다.

 


막내인 동생 요아힘의 분노를 도발하곤 했던 큰형과 작은형,  특유의 비열한 어조로 비꼬듯 나직이 말하는 큰형의 음성, 샅샅이 꿰뚫어 볼 것처럼 오만하면서도 즐기는 듯한 엑스레이 시선의 작은형은 그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분노발작의 막다른 길에 도달케 하는 데 선수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요아힘이 미국 와이오밍 주 라라미에서 교환학생으로 떠나있을 때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요아힘은 당시의 감정에 대해서 나는 그냥 슬퍼하기를 거부했다고 쓴다. 그리곤 자신에게도 형들처럼 순수하고 깊은 연민을 느낄 수 있었으면, 공감 능력을 갖고 있었으면 하고 느낀다.

 

또 다른 기억의 편린에서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절망에 빠지는데, 키스하고 몸을 만질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몰랐기에, 일에 집중 할 나름의 방법을 고안했다. 입술을 다물고 다섯 번 키스하고, 혀를 열 번 돌리고 (...) 결국 세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여자 친구가 그를 홱 밀치며 너 지금 세고 있지, 아냐?, 미친 거 아냐? 계속 세고 있잖아! 세상에, 무슨 이런 사이코가 다 있어?”, 아마 성인이 된 요아힘은 이 문장을 씀으로써 이러한 강박증을 몰아냈을 것이다. 자기와의 화해를 위한 통렬한 글쓰기의 예가 될 것 같다.

 

요아힘은 난데없이 일이 터진 날들을 수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나는 분노의 화신이었다!“. 그렇지만 요아힘은 진술하듯 그는 정신병원에 운명처럼 갇혀있던 수많은 환자들, 자기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절망의 절규와 환희의 외침으로 울부짖던 그들을 그리워하며, 죽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온몸으로 문장 아래에서 흐느끼며 표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그를 억압하던 기억의 꾸러미를 하나하나 풀어놓음으로써 한 세계의 상실을 애도한다, 이 애도는 그저 슬픔의 떠나보냄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허구는 곧 기억이라고 말한바와 같이 기억을 허구의 이야기로 새롭게 형상화하고 꾸며 기념하는, 그럼으로써 그가 그리워하는 죽은 이들을 모두 생생하게 살려냄으로써 자신이 지금껏 인정했던 것 이상의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분투이다.

 

삶이란 피할 수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를 붙들어 옥죄는 짓누름이 있다. 내면에 켜켜이 누적된 과거란 고착되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것, 이야기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과거임을 요아힘은 자신의 허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음으로써 그것들이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바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여 과거로부터 풀려나 열린 미래의 길에 새로움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격렬했던 분노와 길고 긴 포옹과 그들의 기쁨과 하나가 되어 그가 부러워했던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사랑의 애틋함과 그리움을 자기 삶의 정체로 복원한다.

 

그의 높낮이가 다른 문장처럼 이 소설은 작가의 정체성과 본질, 성격이 스스럼없이 투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을 읽는 그 어떤 이들도 요아힘과 같이 정화된 느낌을 지니게 될 것 같다. 고고학 도구처럼 그것이 파묻혀 있던 지난날의 세세한 부분을 긁어내 저 깊은 기억 속의 진실을 끄집어낸요아힘의 가파른 감정의 협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웃음과 함께 맺혔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일종의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마음의 순화를 필요로 하는,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 동지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드물게 맑고 깨끗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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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리  "허구는 곧 기억이다" -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글쓰기


지나간 시간의 진실이란 바로 여기, 현재의 글쓰기라는 자기 현전을 매개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죽은 이들은 모두 날아오른다의 요아힘의 애도는 죽은 이들을 위한 떠나보냄의 상징적 의식(儀式)을 넘어, 살아있는 자가 스스로 진실을 구성하고 정렬해 나가려는 자기 정당화의 형식이자 의지일 것이다.


때문에 그의 허구로서의 기억 쓰기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의 자리를 생성하고 확정해 나가는 과정이고, 과거의 추억을 끊임없이 호출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증명하는 애도의 쓰기가 된다. 이것은 죽은 과거가 살아있는 현재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작별하지 않는다)”한강의 소설 쓰기의 희망,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한 치열한 복원 행위 같은 것일 게다. 그래야만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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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 2026 신년특별호
사상계 편집위원회 지음 / 사상계(잡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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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5월 김지하 시인의 풍자시 오적(五賊)사상계(思想界)가 게재하자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북한의 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망상적인 가능성을 적용 확대하여 시의 표현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창작자와 발행인의 일신을 구속하고 당대의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던 종합지 사상계(思想界)는 강제 폐간 시켰다. 그 던적스러웠던 시절의 사정은 건너뛰기로 하고, 55년 만인 2025년 복간되어 1년의 실험 출간을 거쳐 20261월부터 격월간의 지성인 반려 문명전환종합지로 변화된 시대정신에 맞춰 출간됨을 함께 축하하는 마음이다.

 

시대의 사정이 1960~70년대와 달라졌다고 하지만, 내겐 이 사회의 지성과 양심의 현주소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思想界의 시대비판적 정신의 기조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기본적 토대가 흔들린다면 새로운 기치인 문명전환이든 지성인들의 반려로든 대중의 지성들은 외면할 것이다. 물론 시대정신과 함께하여야 하지만 그것에 부응한다는 명분으로 양심의 목소리를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호의 원로 대담의 참여자인 강대인선생의 思想界에 거는 기대와 조언 중에 불특정 다수를 위한 잡지가 되면 좋겠습니다.”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대립하는 시민 집단의 연결을 제안하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움을 느꼈다.

 

지난 정권 아래서 권력에 충성하며 언론의 기능을 걷어찼던 신문, 잡지, 기타 방송 미디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중립적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이란 이 세상에 존재치 않다는 듯, 옳음과 정당함을 거짓과 부정과 동일한 비중으로 다룸으로써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균형을 유지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매체들의 이러한 양비론적 회색지대에 갇히면 옳음과 정당함이라는 진실은 상대화되어 부패와 불의에 대한 비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비판의 시선이 어느 한쪽, 즉 옳음의 자리에 서는 것이 잘못이라면 대체 지성의 양심이란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또한 불특정 다수라는 표현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요즘 대중문화 속에 발견되는 저급함으로써의 통속성을 지적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엘리트적 위계의식의 반동성이라며 뭇매를 가한다. 하지만 어떠한 매체건 고유하고 특정한 대상 층이 있다. 모두를 위한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일용의 소비물이기 십상이다.

 

종합(綜合)’은 단순히 여러 가지를 한데 모으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종합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을 지성과 양심의 판단을 거쳐 통합하여 새로운 단계를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새로운 관념이나 개념을 구성, 창발하기 위해 종합하는 것이지, 그저 여러 가지를 나열하여 산만한 집합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합이라는 단어 앞에 문명전환이라는 목적개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분명 이에 부합하는 지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특정한 홍길동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특정 다수와 한쪽으로 쏠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은 매우 우려스러운 말로 여겨진다. 이쯤에서 꼰대의 노파심은 접어두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 주목하여 읽은 것은 ‘K-문화특집지면이다. 2026년 현재의 한국문화는 주변부 문화에서 세계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과정중인 것 같다. 이에따라 접두사 ‘K’가 의미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문학과 영화, 음악을 비롯 음식에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분야별 전문연구자들의 담론은 시의 적절한 반성과 새로운 목표 설정의 뜻있는 지표가 되어줄 것 같다.

 

특히 K로 표기되는 기표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의 변화를 분석한 계간 K-Writer의 설재원 발행인의 그 기의의 통제와 가치 축적에 대한 사유의 제안은 많은 관련자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지적으로 여겨진다. 또한 독일 힐데스하임철학과 박술 교수의 한국문학의 세계 내 보편성 획득의 사정을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빼앗겼던 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찾은 자로서 주류문화의 세련된 언어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피지배자와 폭력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있는 매우 특수한 담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적은 국내 비평가들로부터 들을 수 없었던 외부적 시선이어서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 한강이나 김혜순이 서구 주류의 시선에 수용되는 저간의 사정을 읽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아마 이번 호의 가장 인상적인 담론은 미중 기술패권전쟁과 격변의 세계질서의 중국과 미국의 대표적 전문가로부터 두 국가의 기술 전선의 현황과 전선의 이동과 AI의 현 국면을 전해들을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되어 준 듯하다. 중국과 미국의 기술전략 사이에서 한국의 위기는 무엇이고 기회는 무엇일지에 대한 제언들은 우리의 미래전략에 대한 귀중한 조언으로 읽힌다. 과연 이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새로운 광역질서의 주체적 창조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선도자가 될 것인지, 이 거대한 질서의 변화를 조망하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한편 쿠팡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시론(時論)은 왜 이런 기형적 기업이 탄생했으며 사회적 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지를 우리사회가 방치한 구조적 공백에서 발견하고 있다. 시민대중을 비롯한 정부와 각종 사회기구, 기업들 모두가 더불어 풀어야 할 과제이다. 바쁨의 덧에 갇힌 과로사회, 살림의 외주화와 돌봄 공백, 지역소멸이라는 불편한 장기적 과제가 놓여있다. 이 괴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상은 이제 우리 모두의 몫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K-방산에 관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에서부터 김장하 선생과의 인터부(inter) 또는 taboo의 희귀한 대담글은 반가움이었다. 기타 문예란의 글이나 여러 종교에 터 잡은 글들이 과연 지성의 반려인지는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글의 내용적 깊이나 사유의 미흡이 드러나는 몇몇 글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思想界가 자리 잡아 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성과 통속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211호는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내용과 구성으로 더욱 성숙된 지성인의 잡지로 거듭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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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 동방순례 헤르만 헤세 작품선 2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이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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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언제나 집으로 가는 것이지.”

- 노발리스, 푸른꽃2실현중에서

 

동방 순례;Die morgenlandfahrt1932,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들어서기 1년 전에 발표된 글이다. 이 시점에 주목하고 읽었는데, 독일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이 극한에 이르렀던 시기이기에, 이미 유명세를 얻은 작가로서 담론세계에서 침묵만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본국 독일로부터 벗어나 스위스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한편으론 외부 세계에 보여지듯 융의 심리학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의 신비주의 세계를 통한 은유의 공간에 침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공개적으로 천명했듯 개인주의자임을, 그 정당성을 내세웠기에 내면세계는 그의 독보적인 문학세계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의 시선에서 그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문학의 자랑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격하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지언정 결코 표면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독서 시장에서도 데미안은 마치 성서처럼 읽힌다, 무수한 번역본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새로운 표지와 번역으로 출간이 그치질 않는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그의 작품들의 한결같은 인물구도이다. 불완전한 인격에서 완전한 인격으로의 이행을 삶의 여정으로 보여주며 초월적 인격형성을 제안한다. 이 작품이라고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H.H와 레오는 이름만 달리하는 거의 동일한 인격들이다. 따라서 작품 발표 시기에 따라 그 유사 동일 구조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는 이야기의 외피 아래로 숨어든다.

 

드러난 이야기는 숨어든 진짜 본심을 은폐하는 미학적 테크닉이다. 헤세는 이 미학적인 글쓰기의 달인이다. 어떤 문학작품이 독자에게 휘감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지만, 노벨상 수상을 하게 되자 한국 독서시장에서 급작스레 읽히기 시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이러한 미학적 글쓰기의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크러스너호르커이는 헤세처럼 의도를 숨기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책의 제목이 동방순례라고 하여 어떤 지역이나 방향으로서 동방(東邦)이 아니다. 이것은 원제목 모르겐란트파르트(morgenlandfahrt)광명()의 땅으로 해독하여야 하듯, 어떤 나라,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며,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관념적 이상(理想)의 지대이다.

 

즉 소설은 바이올리니스트인 H.H 라는 예술가가 일종의 정신 공동체로서 순례자들의 단체인 결맹(Bund;結盟)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결맹의 일원들과 함께 빛의 땅을 향한 순례의 기록이다. 이 순례의 구성원들에는 레오라는 하인이 있는데, 이 인물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을 흡족하게 하고, 그 누구보다 고매한 영적인 인물이다. 데미안의 다른 화신이다. H.H는 이 순례 길의 여정을 실제로 꿈을 꾸면서 느끼는 행복과 같은, 내면과 외면을 유희하듯 시공간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소중한 과정으로 믿으며 긍정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사달이 나고 마는데, 믿음을 상실하고 회의에 빠지는 죽음에 이르는 영혼의 병을 뜻하는 모르비오 인페리오레(Morbio Inferiore)’협곡에 이르러 하인 레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맹의 일원들은 순례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존재가 사라지자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의심으로 의견이 갈기갈기 나뉘어 갈등하고 분열된다. 광명의 땅, 이상의 꿈을 함께 향했던 결맹원들은 여기서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H.H가 결맹의 비밀은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준수하며 온전히 개인적인 행로에 관한 기록만을 하는 과정에 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중대한 은폐가 있는데, 독자는 H.H가 쓴 기록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갑자기 H.H가 레오의 사라짐 이후 기록을 더 밀고나가지 못했던 이유를 나중에 듣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H.H가 결맹의 최고법정인 거대한 문서고(文書庫)에 보존된 당시 결맹원들의 주장이 담긴 각각의 기록에서 모르비오 인페리오레에서 해체되게 된 원인들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읽으면서 드러난 사실들에 입각한 실상이다. 이에 대해 H.H는 자신만의 해석을 말하는데, 모두가 서로 상반되고 서로 다른 것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 우리의 역사학적 노력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술을 계속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진실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당대 독일사회가 휩싸인 시국 혼돈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인데,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니 조용히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진실에서 자신을 멀리 이격시켜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양식은 그의 산문 고집이라는 글의 정치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삶의 최고의 미덕이라는 주장과 맞닿아있다.

 

개인주의의 끝판 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왜 옳고 그름이 없겠는가.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완성이 곧 미래의 길이라고 독일인들을 향해 설파하면서, 현실은 외면하는 개인주의, 이러한 독일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나치의 발흥에 일조한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본국의 지식인들, 특히 작가그룹의 일원들은 스위스에서 주절거리는 헤세의 안일한 개인주의적 내면성장의 담론이 불쾌했음은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당시 스위스에 어렵게 도피하여 빈궁한 삶을 지탱하던 로베르트 무질이 근거리에 있는 헤세가 아니라 미국에 도피해있는 토마스 만에게 5달러를 도와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썼겠는가. 동료의 삶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독일인의 삶을 위해 무의식 세계의 탐닉을 통해 신비주의적 행복의 낙원을 말하는, 인격의 궁극적 합일성을 향한 관념적 이상론은 정말 괴이쩍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대단원으로 옮겨가보면 더욱 가관이다. 협곡에서 사라져버렸던 하인 레오는 결맹의 최고법정 심판관으로 결맹의 최고권위자로 출현하여 결맹을 이탈하여 순례를 중단시킨 H.H의 중대한 잘못에 대해 유죄임을 지적하면서도 인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행위로 웃어넘긴다. H.H는 법정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벼움을 느낀다. 그러자 최고심판관 레오는 이 가벼움을 경고하며, 양심의 법정으로 자신의 죄를 이끌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이 논법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 같다. 모든 보고와 반증과 꾸며댄 이야기들 배후에서 얼마나 비웃으며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가! 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 .이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정보를 알게 된다 할지라도 대체 무엇이 남을 것이란 말인가?”라며, 다시금 다른 이들이 쓴 문서는 진실이 아니며, 자신의 체험 사실만이 신뢰할 수 있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체험 사실이라는 주관적 기억, 그 변조되기 일쑤인 불안정한 기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진실하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거울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비뚤어지고 달라지고 일그러져 버렸던가!”, 물론 기록 또한 기록자들의 작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에는 일말의 진실들이 잠재하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진위를 밝혀내는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진실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추구한다. 문명의 기록자인 작가가 이것들을 거짓이라 폄하하면서 자기의 글만은 진실이라 주장한다면 그런 독단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문서고에 자신의 기록이 보관된 함에 이르러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어떤 서류도 없다, 오직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조각상 하나만 있다. 정말 매우 유치하게도 서로 등이 붙어있는 두 개의 상()이 하나가 된 조각상이다. 헤세의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장면이다.

 

촛불을 켜자 한 쪽 상의 모든 정수가 다른 쪽 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오로지 하나의 상, 레오만이 남는다. 데미안이 싱클레어 내면의 또다른 인격이듯 레오는 H.H의 또다른 인격이다. 즉 완전함에 이른 초월적인 궁극의 합일체인 레오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멋진 말을 남긴다. (레오)는 번창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H.H)는 소멸해야만 했다.” 새로운 존재자로 태어나기 위해 자기 소멸의 희생이라는 용기를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째 나치의 정치 강령(綱領)과 닮지 않았나


마치 소멸과 생성이라는 우주자연 궁극의 법을 각성한 듯하지만, 나치가 타자의 철저한 배제를 얼마나 잔혹하게 자행했는가. 그 참담한 소멸이 진정 새로운 생성을 창출했는가? 인간 인격의 완전성이라는 구원을 향한 이 낭만적 신비주의자의 기록은 읽을수록 흉물스럽다. 조금 더 쓰게 되면 거친 말이 연장될 것 같아 예서 그친다. 헤세의 글들은 세밀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는 무관심으로 외면함으로써 나치에 부역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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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通俗)이라는 어휘는 20세기 식민지 사회로 이행되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그 사용례가 드문 말이었다. 굳이 그 용례를 살펴보자면 사대부 양반계층이 하위계층의 문화를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해 아()와 속()으로 분별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듯하다. 강용훈 교수는 통속에 대한 개념사 연구서인 통속의 계보학에서 “1906년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에서 '통속'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식민지 지배권력이 속의 세계로 통치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일제의 식민통치권력이 식민지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복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어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인 최초의 한글사전인 조선어 사전193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데, 거기에서 통속모든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의미라고 기술되어 있는 모양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거나 통속이라는 어휘의 본격적 사용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부터라는, 다시 말해 식민통치권력이 피지배민의 소위 계몽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려다보니 장황한 시작이 되었다.

 

오늘날 한글사전에는 1938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저급, 저속한이란 의미가 추가되어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 대화 속에서 , 그거 너무 통속적인데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금 저급하다고 얕잡는 어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통속을 말하고자 한 계기가 저급함을 느낀 소설 때문이다. 누군가가 쓴 창작품, 더군다나 해외에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에 나는 그야말로 통속적이라는 평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비하하려는 의도이기 보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그 진부함을, 기대 이하의 것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 소설은 20세기 일제 식민치하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들을 매우 정형화된, 아니 유형화(類型化)된 이라고 해야 할 인물들이 꼭 그만큼 유형화된 행태를 하는 인물전개나, 시대적 통찰의 세부를 표현하지 못하고 이미 드러난 외피의 변죽만을 우려먹는, 한마디로 저급하다고 느낀 것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은 기생이 인력거를 끄는 가난한 고학생을 도와 성공시키고, 거지 대장이었던 인물이 사랑에 눈멀어 일제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는, 또 다른 한편은 친일로 부를 축적한 부자의 딸과 결혼을 위해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연인을 배반하는, 1920~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신문에 연재되던 심훈, 염상섭, 김말봉 등의 통속소설, 그리고 오늘날의 막장 TV드라마와 빼닮지 않았나? 21세기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한국인만을 위해 쓴 소설은 물론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계몽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매몰되어 있음에 대한 불쾌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상식,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런 것으로 계몽한다는 생각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는 그 불순한 저의라니.

 


오늘에는 이 어휘, 통속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그리고는 대중이라는 말이 그 개념의 상당부분을 대체 수용하여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통속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대중소설이라는 범주로 뭉뚱그려 싸잡아 넣고, 소설문학이라는 문화의 한 범주를 평등화시켜버린 것만 같다. , 여기서 대중문학과 통속문학, 또는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2000년대 한창이었던 철지난 문학논쟁을 재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중문학이라 불리는 오늘의 소설작품들을 세분하여 문학을 서열화하는 위계질서를 부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통속이라는 사용례가 드물어진 어휘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현실적 과제가 있음을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통속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갈아탄 것도 대략 50년 쯤 된 것 같다. 한국사회에 TV가 널리 보급되던 1970년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통속은 슬그머니 대중문화, 대중문학, 대중 예술로 불리기 시작했을 테다. 20세기 내내 계도(啓導)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던 수많은 사람의 집단이었던 '통속'으로 멸시되던 존재들이 문화주체인 대중(大衆)’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니 말이다. 통속이 사회적, 매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의 앎의 수준도 갑자기 뛰어오른 것일까? 매체가 쏟아내는 잡다한 정보의 영향으로 어느 만큼의 도약이 있었을 것이지만, 대중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동일한 앎의 질적 도약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쨌거나 대중이라는 이 의뭉스런 어휘에는 온갖 잡다한 의미들을 상층부 지배계층과 다른 일반의 사람들이 지닌 속성 모두를 싸잡아 넣은 두루뭉술한 어휘가 되어 그 용례의 폭이 무한하게 넓어졌다. 즉 평준화되고, 평등화된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집합을 지칭하는 효율적 어휘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무언가 저급함을 말하려하면 대중을 비하하여만 하게 된다. 곧 대중이 저급한 것이 된다. 통속이 지닌 저급, 천속한 의미가 구별짓기의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이라는 날선 비판을 지우기 위해 대중이라고 퉁치면서 비하의 목소리는 이면으로 은닉되었다. ‘대중은 문화의 주체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때 그것은 단지 소비대상이거나 투표의 수량이라는 계산적 필요성에 근거한 가장된 권력주체로서의 기만적인 가면의 언어일 뿐이다.

 

그렇다면 통속소설이라고, 통속문화라고 분별하는 것이 오히려 진솔한 표현이 아닌가. 음흉하게 대중소설이라고 그 문학적 품질의 분별을 감춘 채 독자 일반인 대중 감식안의 천박성을 말하는 것은 더욱 기만적이다. 20세기를 관류하면서 통속이라는 어휘의 개념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러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통하는이라는 뭇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긍정적 시선과 저속 또는 저급한의 의미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교육(계몽), 윤리, 상식, 도덕의 의미와 연결하여 사용하며 그 긍정적 용례로 해석하려는 의지와 천속(賤俗)한 것 일반이라는 부정적 용례 사이에서 끊임없이 요동쳐 왔다는 사실이다.

 

통속에 대한 이러한 개념변천의 관점을 나는 거부한다. 마치 용례의 긍정과 부정의 부단한 충돌처럼 보이는 시대적 담론들은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처한 상황 또는 입지에 따라 통속의 잣대를 돌리는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문연재 소설을 쓰면서 통속소설 작가로 비하되어 불리던 김말봉은 통속의 가치 폄하에 다음과 같이 강력한 반론을 편다.

 

대중문학이라면 통속과 통하는 것으로 믿고, 통속이기에 멸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힌 족속이 있다. (...) 저속이 대중의 취미라고 속단하는 작가배가 있다면 이것은 대중을 모욕하는 뜻이 된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수많은 민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랄(morals)’ 아래서 대중이 진정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정신문화를 지향해준다면 대중문학의 사명은 수행된다 해도 좋다.” - 출처: 경향신문1958.3.5.기사 대중문화에서

 

김말봉은 이렇게 통속을 저속과 구별하며 슬며시 통속을 대중과 또한 구별해버린다. 이 글에는 통속을 저속이라 말한다면 대중의 취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 건전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윤리의식과 정신문화 지향을 앞세워 재미가 대중문학의 사명이라는 것이라는 문제적 정의가 보인다.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 통속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중을 욕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대중 뒤에 숨어든 통속, 대중의 의미는 이렇듯 흉측스러운 전략이 있다. 자기 저급성을 은폐, 대중에 영합하여 사욕을 충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중성이라는 것의 민낯이다. 또한 윤리의식과 정신문화를 앞세워 재미를 판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김말봉의 주장에는 별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체 어떤 윤리이고 정신이냐는 것이다.

 


김말봉은 오늘날 TV의 막장드라마의 효시이다.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내용과 기성의 질서에의 순응이라는 규율과 상식에 봉사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매우 그럴듯한 말의 수사(修辭)로 부패한 양심을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통속은 대중과 분리하여 그 선명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화를 대하는 소비대중(독자, 관객, 청중)의 안목을 대우하는 것이 된다. 통속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대중을 저속하다고 폄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통속의 딱지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문화생산자 당사자가 고급과 저급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입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비평가들이 나서야 할 때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부정적 배제의 논쟁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시대에 따른 담론의 주체적 성질의 표현들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본질은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통속이 지니는 의미를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다른 대척의 뜻으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편의주의적 해석이 있어 보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식의 의미는 현상을 사실 그 자체로 믿어버리는 긍정의 의식, 즉 현실 질서에 그대로 순응하며 어떤 이의도 지니지 않는 이라는 의미와 저급 저속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적 시선에서는 충돌이지만 어휘가 내재하고 있는 함의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는 것이다. 통속은 그저 저속한 것이지, 여기에 그 어떤 시대적 담론을 끼얹어봐야 자기 이해에 터 잡은 말장난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 통속이다. 규율 순응을 반복하는 것, 자신이 모르거나 다른 것을 배제하려는 폭력성의 다른 표현이다. 대다수 식민지민에게 자신들의 통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을 위해 통속강의, 통속교육을 시키면서 통속은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언어다. 이를 뒤집어 바라보면 식민지 한국인들을 싸잡아 무지와 몽매에 안주하고 있는 저속함이라는 멸시의 의미와 더불어, 이를 적정한 앎의 궤도에 올려놓고자 하는, 즉 자신들의 통치 질서에 길들이겠다는 의도된 의미가 있다.

 

통속성은 이처럼 오만한 태도와 전체주의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 통속성을 답습하는 것과 통속성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란범 재판에서 윤은 최후변론에서 계엄명령은 계몽(啓蒙)령이라고 비굴한 항변을 반복했다. 누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계몽하겠다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교만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상반기 식민지민들의 문자 해독능력과 새롭게 쏟아져 들어오는 문물에 대한 앎이 일천했던 시대와 21세기 K-Culture로 상징되고 대중지성 또는 집합지성이라 불리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계몽, 통속성을 향한 행보는 그 무엇이든 퇴행적인 것이다.

 

개념사 연구자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개념 자체가 정치,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개념의 잣대를 통해 인지된다.” 개념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제 통속은 저급으로 분명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에서 분명 몰아내야 할 선명한 것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또 한명의 개념사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어휘들의 의미변화 양상은 역사적이고 사회적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 이제 통속은 한국사회의 변화적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은폐되었지만 일상의 이해에서의 용례에 주목해 우리 문학의 수용자들인 대중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라도 통속은 저급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어느 평론가가 대중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불신을 보이면서 대중의 문학적 취향을 통속으로 싸잡아 단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대중이 곧 통속이라고 여긴 것인데, 이러한 대중의 용례에서 보이듯 통속은 분별되어 지적되어야만 한다. 통속이 계속해서 대중 속에 암약하게 방치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날뛰는 저 통속적인 것들처럼 대중을 전락시킨다. 일종의 낙인찍기라는 극약의 처방으로서 대중과 통속의 분리, 나아가 통속의 부활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통속을 주장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차별의지도 아니며, 문화민주주의를 역행하려는 반민주적 반동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비난 속에 내포된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폐를 모르는 체 하려는 대중 뒤에 숨은 불순한 의지들을 봉쇄하기 위함이다. 계몽령이라는 반시대적 수작이 가능한 것도 대중이라는 언어 뒤에 숨어있는 통속이 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동질화 형성하겠다는 이 전체주의적 욕망의 싹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문화 선진국으로의 진정한 돋움을 위해서라도 통속성은 지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정적 감상주의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문화, 통속적 취향에 입맛을 맞춘 문화는 자기 파멸적이다. 대중의 지성을 갉아먹는 암세포다. 하나의 소설이 장황한 설레발을 치도록 만들었다. 이 잡설을 쓰면서 우리의 20세기 상반기 근대문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통속과 순수, 정통문학과 대중, 통속문학의 논의를 뜨겁게 달구었던 김기진, 안회남, 이태준 등을 읽어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언어가 시대와 상호반응 변천하는 개념사도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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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강용훈 교수의 통속의 계보학이 부분적 바탕지식이 되었으며,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Beasts of a little land)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서 비롯되었으며김말봉 소설들에 대한 회의적 읽기로의 전환을 계기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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