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시민들은 공정 혹은 정의를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곤 한다. 기득권자가 제도적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할 때 대중들은 그것에 작동한 "특권, 특혜, 자의성, 예외성"등을 비난하고 바로잡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납득하기 불편한 공정성, 정의의 담론이 수구 언론을 비롯하여 지배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들이 이 언어를 자신들의 이익침해에 대한 분노의 언어로 여론을 장악, 호도하고 있다. 정치 검사였던 자가 '공정과 상식' 을 표방하며 어리석은 대중을 우롱하고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은가?

 

때문에 이제는 공정이니 정의니 형평성이니 하는 말들이 불온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언어가 등장하면 외면하고 싶은, 불쾌한 기분이 앞선다. 일종의 피로 증후군이다. 쓸데없는 언어 낭비로 밖에 비치지 않은 것이다. 즉 시민들이 이해하고 요구하는 정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 정의의 개념들이 하나의 언어 형식 속에 들어앉아 있어 공정이 마치 텅 빈 요란하기만한 수레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공정을 외치는 소리가 동네 개가 짖는 소리처럼 들리기에 이르렀다.

 

신진욱 교수는 공정 담론이란 단일 담론이 아니라 복합 담론이며, 혁명과 복고(revolution & restoration)의 모순적 공존이라 주장하면서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의 일환이라 보고 있다. 아래 도표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공정성'을 포함하는 기사 건수의 추이를 분석한 자료이다. 조중동은 이명박, 박근혜를 잇는 보수정권 하에서는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달리 공정성에 대한 언급이 극히 낮게 언급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급격하게 공정성에 대한 기사가 급증하기 시작해서 2019~2020년에는 그야말로 폭증했다.

 

 

 출처: 창작과 비평통권 193,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쓴다, 51쪽 도표 부분 발췌

 

이 시기에 갑자기 한국사회에 불공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권력을 누리며 불공정을 구축해온 검찰과 보수 언론(54)" 능력주의에 기초한 비례적 정의를 정의의 보편적 담론화하려는 헤게모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외시하는 것은 "좋은 삶과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57)"를 기득권 지배계층을 위한 이익의 차원에서만 도모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들의 정의는 "지배계급에 의해 간과되고 억압되는 평등적 정의(59)", "공존, 공생, 공유의 윤리를 사회에 확산하는 정의"가 아니라 격차의 확보를 통한 차별화,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 등 기득권의 항구적 유지를 위한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이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공공의대 설립계획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킨 의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파업의 정당성을 내걸며 했던 말이 "공정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55)" 문재인 정권이라며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정의(Justic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공정성이라는 보편성의 담론을 최상류 계층인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며 정의의 담론을 훼손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화한 복고가 시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람시(A. Gramsci)는 혁명과 복고중 어느 것이 압도하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을 규정한다(50)"고 한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매년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 취약 계층 위에 군림하는 불의의 질서가 더욱 심화 고착화되고 있다. 기업의 거대화와 자본집적의 규모는 커지지만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시민적 삶의 미래는 점점 불안성을 키워나가고 있기만 하다.

 

신진욱 교수는 '혁명/복고의 모순적 총체성'을 껴안고 더 큰 정의를 위해 다시 공정성을 쓰는 역사의 변증법을 말하고 있지만 불의한 것, 좋은 삶, 좋은 사회를 향한 이상에 다가가려는 정의의 세상을 추악한 이기심으로 오염시키는 불쾌한 공정성 담론이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 이것은 시민 역량의 제고만이 가능하다. 시민이 앎의 의지를 회피하는 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적 기득권 집단은 시민을 지속하여 농락할 것이다. 그것의 미래는 예속이며 노예화이다. 정의(공정성)의 담론이 더 이상 불쾌한 담론으로 감히 헤게모니 투쟁에 나설 수 없는 사회를 위해 앎의 열정이 모든 시민에게 지펴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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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역사 - 비너스, 미와 사랑 그리고 욕망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베터니 휴즈 지음, 성소희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Venus & Aphrodite : History of a Goddess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밤으로부터 태어났다." -13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상징되는 여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멸하는 문화적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대 신화에서 시작된 태고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삶 속에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책은 6천년 전 동기시대(석기에서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와 로마, 중세 유럽, 근대서구사회에 이르는 여신에 부여된 이미지와 그 온갖 욕망 투사의 역사를 종단한다.

 

어쩌면 여신의 탄생은 위 인용문장처럼 인류의 출현과 그 시기가 같을 지도 모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의해 잘려져 바다에 던져진 우라니아의 성기에서 출현하였다는 신화부터 수많은 버전으로 지중해 전역으로 전해진 이 여신의 탄생 신화는 바빌로니아 전쟁의 여신으로서 모두를 정복한 절대적 힘을 지닌 '이난다', 아카드 지역의 '이슈타르(Ishtar)', 페니키아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리며 성과 흉포한 전쟁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고 한다. B.C.4,000~B.C3,000년에 이르는 당대의 유골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흔적들은 격렬한 전쟁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격정과 욕망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성과 폭력의 상징으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18쪽 전체 촬영

 

결국 전쟁 중심의 남성공동체가 주역이 되는 사회로 이전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혼재하는 신의 모습에서 남성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고 여성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오늘날 키프러스로 불리는 사이프러스 섬은 다산과 강렬한 성적 특징을 지녔던 지역의 자연신과 동쪽에서 전해져 온 전쟁의 여신과 만남으로서 초기 아프로디테가 형태를 지니게 된다. 청동기 시대의 열기를 내뿜는 연금술은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작용하여 열렬하고 과격하며 잔혹하지만 요동치는 세상의 가장 신성한 "사회적 야망의 총체"였다는 것이다. 당대 인간들의 마음 속 열정의 원리이자 욕망 충족의 후원적 존재로서 인간 욕망이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동방의 여신, 자연신이 믹스되어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항구였던 사이프러스에 이름 그대로 아프로디테가 탄생한다. '성애와 전쟁 + 다산과 인간관계'를 주관하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나체의 균형잡힌 몸으로 관능미를 뽐내는 그런 신이 아니다. 아프로디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적 믿음으로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 사항으로서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 당대 인간들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 이 여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쉽게 변하는 문화적 요소다," - 209

 

절대적 믿음이라는 것이 신성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로디테가 이탈리아로 넘어가자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고 성적 메타포로 가득한 매춘의 여신이 된다. 폼페이 도처에 비너스의 프레스코화가 넘쳐난다.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모두의 아프로디테가 되어 매춘과 성교의 수호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입법가 솔론이 지은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신전은 시민들의 성적 충동을 관할하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옷을 차려입던 아프로디테-비너스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신은 무언의 절대적 힘의 상징이 아니라 매력적 신체로, 극단적 열망과 욕망의 변명 구실이 되었다. 로마는 절대적 힘의 신성을 탐욕과 야망의 원동력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란 시대의 "인간행동과 윤리적, 문화적 딜레마를 반영하는 거울(110)"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가 지배하던 중세란 여신이 지상에 머무는 거처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거대한 예배당을 올려 여신의 기억을 억누르는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이다.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회화 작품들이 훼손되던 시기이다.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겨넣고, 조각에서 젖꼭지는 도려내지고 깨어지고 불태워졌다. 아프로디시아스의 화려한 아프로디테 신전은 장엄한 미카엘 성당이 되었다. 불결한 악마의 성소가 신성하다는 유일신의 교회가 되었다. 과연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이러한 천박한 교조적 신앙에 의해 사라졌을까?

 

수천 년간 인간에게 자극과 위안을 주던 여성을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고 있음을, 인간의 본능적 요소를 종교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외피를 두르고 아프로디테는 재탄생한다. 마리아에게는 항시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비둘기)가 등장하여 아프로디테와 마리아가 서로 같다는 사실을 도처에 맹백히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비너스는 "고대의 관념을 자극하고 전파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아름다움(169)"으로 재탄생한다. 15세기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후대에 영감을 준 작품은 없으리라. 조개 껍데기와 도금양 잔가지로 엮은 허리띠, 붉은 망토와 장미 등 작품 속 소재는 물론 그 아름다움과 사랑의 메타포는 오늘에도 여전히 모방과 패러디와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다.

 

이제 흥행보증수표가 된 아프로디테-비너스는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고 완벽한 여성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성의 모델이 되었다. 성적 자극의 구실, 완벽한 신체, 몽상적 성애의 굴절된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18~19세기 화가들은 매춘부와 정부들을 대상으로 에로틱한 비너스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9세기 근대 제국주의의 야만성은 아프리카 여성을 충격적이고 부도덕하게 묘사하는데 비너스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인종과 성차별의 거친 천박성과 탐욕스런 쾌락만이 남았다.

 

 

 

출처: 195쪽 부분 촬영

 

압제와 억압의 상징이 된 비너스. 현대 문명은 여신을 거세하는 데 열중하며, 파괴의 열망만 남았다. 그저 "인류가 투사할 수 있는 매력적 몸매의 소유자(202)"라는 "자기 충족과 자기 도취를 돕는 도구(207)"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진 힘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오늘에도 여전히 불멸하고 있다. '레이디가가'"조개껍데기 비키니"라고 노래하는 2013년 곡 비키니 에서, 바다와 풍요의 황금빛 여신으로 변신한 '비욘세'의 모습에 살아있는 여신으로 현현한다. 군사력과 전쟁의 광포한 절대자에서부터 오늘의 자기 도취의 도구적 대상에 이르기까지 고고학과 신화, 문학과 예술 작품을 넘나들며 여신의 역사를 되집으며 시대에 따른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이 문화사적 기록은 우리와 우리 사회가 지금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여신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열정과 충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 올리게 하는 역작(力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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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 단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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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글과 첫 인연은 2008년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에서 시작된다. 아마 작은 나비 스터커가 붙어있는 작가의 사인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인 독자에게조차 보내려했던 성심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이 나비는 소설 속 주인공인 무용가 최승희의 비유임을 안다.) 이 기억은 얼마 전 출간된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그 시선의 파동입자가 내 마음 속에 들어앉음으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찾아 든 책이 세 번째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 에세이집 김선우의 사물들이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7.24. 초판본 저자 사인

 


총 스무 꼭지의 에세이에서 열두 번째 걸레라는 제목을 한 에세이의 시작부분에 '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문장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사물의 속내는 그것에 말거는 내 무의식의 속내(120)"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건넬 말을 맞아줄만한 사물을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진 언어들이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의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 어쩌면 "끝내 헤어질 수 없어 끊임없이 천구(天球)를 유영해가는 바람의 윤회(43)"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의 우연한 만남, 시인의 글을 빌면 '근사한 사건'이다. 곧 이 책은 근사한 만남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문양(,천문의 즐거움에서)"들이라 할 수 있다.

 

촛불, 마음이 가난한 자의 노래라는 글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촛불을 응시하는 고양이 봄비와 함께 책상에서 한밤을 세우는 시인이 있는 하나의 회화를 본다. 촛불을 응시하는 봄비의 눈 속에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는 그런 시인의 눈을 나는 응시한다. 시인의 시집 녹턴에 수록된 시 花飛,그날이 오면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무상함이 가르쳐주는 사랑, 그새 망각했던 생의 의지를 되살려내려 시도해본다. 시인은 촛불의 무욕과 무소유의 혼()을 말한다. 자신을 태워 어둠을 껴안는 스스로 영롱해지는 빛, 그 정결한 혼에 대해서.

 

젊었던 그 어느 날,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입을 틀어막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 있다. 못이 숫하게 박혀있는 옥탑방에 살던 시인이 하나씩 그 용도를 상상해 나가며 삶의 상처들을 "황홀한 통증의 뿌리(65)", 그 깊어진 상처로부터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게 한다. 부엌 구석 수도꼭지 위의 못의 용도를 생각하다 조그마한 사각 거울을 놓는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양치를 하며 거울을 바라보는 젊은 날의 시인이 치솔을 입에 문 채 울고 웃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네는 이렇듯 오랜동안 여기저기 박힌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소라의 존재 방식은 심플하다. 그저 자기 몸 하나로 달랑 자기 거처를 삼은 이의 눈부신 가난을 들여다본다." -92, 소라껍데기, 몽유의 문에서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댄 시인의 무구한 얼굴을 본다. "무소유의 개념조차 무색해지게 하는" 몸이면서 집이었던 소라 껍데기에서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을 집어내는 시인의 감각에 동화된다.

 

이 책의 글들을 사랑하게 된다. 고정관념의 위선을 드러내고 저속하고 음험한 것을 정직하게 구도하는 사물로 회복시키는 세심한 감각을 사랑한다. 더러움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정결함을 품은 '걸레' "양지를 품은 음지의 사물(121)"이라 말할 줄 아는 시인의 명민함을 사랑한다. "엄마 꽃이 비쳤어."라며 말 할 수 있도록 시인에게 연대와 보호와 축복의 느낌을 준 시인의 엄마와 가족들의 긍정과 사랑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시인 백석의 '눈알만한 잔()'의 탐미적 감각을 "치열하고 눈물겨운 생의 뒤안길이면서 최전방(150)"이라 말 하는 시인의 미학을 사랑한다.

 




그런데 시인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하나의 글이 있다. 부채, 집 속에 든 날개에서 "다채로우며 풍부한 감성의 맛"이라며 부채의 바람을 예찬한다. 도시 속 서늘한 냉방의 욕구를 "악순환의 폐쇄성",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힐난한다. "더위에 대한 냉방의 요구는 견딜만한 수준의 것이 아닌가."라고. 도심의 뜨거운 공기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불편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열기로 작용한다.

 

닭장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꼼짝없이 24시간을 머물러야하는 경비노동자에게 에어컨은 생사의 장비이다. 텍배기사와 건설노동자의 체험온도는 관측기온보다 평균 20도가 높다고 한다. 열스트레스가 정치적 과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부채를 부치며 한가로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편협하게 정의할 수만은 없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숨 쉬는 곳이 다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차별의 언어가 된다. 시인의 숨이 여기에도 다가가기를.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 설레기도 하며,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으로 감응의 깊은 심연으로 매 글마다 끌려 내려가곤 했다. 그래 당연시하는 사회, 평균화되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그 폭력성이 넘어설 수 없는 저 너머에 가닿는 징검다리를 놓는 시인의 마음, 그 가득한 사랑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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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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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첫 문장부터 거부할 수 없는 지옥의 문틈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부채질 한다. 아이의 말갛고 충실한 목소리에 실려 시작되는 묘사는 혐오스러워 어두운 저 심연에 수장되어있을 상상을 자극하며 도리질 치게 만든다.

 

엄마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 필요한 도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식도, 뼈를 토막내는 칼이다. 손도끼처럼 생겼고 손도끼만큼 무겁다. (...) 두 번째로 '뼈 칼'이 있어야 한다. 뼈에 붙은 살을 바르는 길고 날카로운 칼이다. (...) 손질이 끝난 고기는 찜기 두 개에 나누어서 삶는다. (...) 다 삶은 살코기는 민서기에 간다. (...) 뼈는 믹서로 간다.”

- 9~10

 

상대의 의향에 배반하지 않는 대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신체 반응까지 살피며 신중하고 순종적 답변을 해내려는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노력, 이러한 아이의 태도로부터 한 치의 결함이라도 있는지 광휘의 눈을 번떡이는 여자의 표변하는 감정을 따라가느라 소설 초입부터 쭈볏 선 머리털과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녹초가 될 정도이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여자,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의 우주(115)", 완전치 못하게 하는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행복이라 믿는 여자가 있다.  아니.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앎에 대해 무시와 부인, 부정의 방법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자기기만과 무시, 눈감기라는 존재 인식의 부인과 결여의 다른 표현이지 않을까? 무지에 터 잡은 자기애세계는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여야 한다는 믿음,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여자의 행복을 위해 소용되는 도구이며 수단에 불과하다.


여자, 신유나의 전 남편인 지유의 아빠가 사라졌다. 소설의 발단이다. 사라진 남자 준영의 여동생 민영, 재혼한 남편 은호, 관계가 단절되다시피 한 언니 신재인을 통해 한 여자의 모습이 조명된다.  집안의 경제적 상황으로 두 딸 중 어린 신유나는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은퇴한 조류 학자인 할아버지, 교사였던 할머니가 사는 외딴 시골마을로 보내진다. 자신이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반감, 할머니의 강압적 훈육이 남긴 성장기의 자기 보호에 대한 집착은 불행의 원인으로 인식된 언니 재인에 대한 증오와 배제의 감정으로 키워지고, 부모 사랑의 유일한 절대 소유자가 되기를 갈구한다. 언니의 오랜 남자 친구였던 준영을 가로 채 결혼함으로써 자매의 직접적 소통의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어떤 완전성, "'행복'이라는 신화를 이루는 불가침의 왕국(235)" 건설이다. 자기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다. 재혼한 남편의 어린 아들 역시 여자에게는 제거해야 할 불행의 한 요인에 불과하다. 아버지도, 연인도, 남편도, 자식도, 그 어느 것도 여자를 위해 존재하기를 멈추면 그녀에게 그것은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여자에게 만물은 오직 자신의 필요를 위한 일시적 수단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연락도 하고 지내지 않던 언니에게 불쑥 아이를 맡기고 사라졌다가는 뒷일까지 내맡겨 버리고, 어느 순간에 나타나 적반하장의 난장을 치고 사라지는, "이 아이는 인간의 외피를 가진 후피 동물인가 싶었다.(177)"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이다.

 

"유나에게 한 번 '제 것'은 영원한 '제 것'이었다. '제 것'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차라리 없애버릴지언정. " -430


소설의 초입에서부터 옥죄던 긴장감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신음 소리같은 되강 오리의 짖음과 안개 낀 반달 늪의 음침한 전경이 어우러져 마치 "지옥의 세계로 통하는 들창을 열어버린 기분(285)"에 휘말려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준영의 소재를 다그치던 재인이 유나로부터 듣게되는 말은 이미 소설의 무수한 암시들에 의해 알고 있음에도 "눈을 가리고 있던 무의식의 막이 한 손에 찢겨나갔다. '설마'라는 저항의 벽이 한 방에 무너졌다.(366)"는 급류처럼 쏟아져 내리는 갇혀있던 상상력 바로 그것의 끔찍함이다. 아마 작가가 펼치는 이 압도적 서사로부터 풀려나는 길은 에필로그 519쪽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이 되어야 가능해진다.

 

작가의 말처럼 자존감만 높은 텅 빈 자아만을 가진 나르시시스트들이 넘쳐나는 세계이다.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시, 그리고 존재 의미에 대한 인식의 결여인 무지. 오늘 우리네 사회를 무지와 무시의 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무지에 무지할 때 악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는 것 같다이들 주변의 사람들과 세계가 얼마나 황폐화되는지, 소설 속 여자와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르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미덕이지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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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시선 461
김선우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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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은 시인이구나. 한 점 티끌에서 바스락 소리내는 새싹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금잔화 심던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아니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지닌 기운에서조차 따스함,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을 품고 있다.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 작은 신이 되는 날에서

 

그런데 우주먼지인 ''들을 인정치 못하는 무수한 아무개들은 마치 특별한 존재나 되는양 거드름을 피운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존재는 끝없이 아무를 쫓는다. 영속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환영을 실재라 믿는 우매함이란..., 시인은 그래서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곁을 내줄 수 없는 곁에 관하여

비교가 천형인 네트에서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노력에 관하여

-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3 ;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에서

 

사랑을 아는 시인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티끌인걸 알게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긴다고, 그리고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은 그 알아챔의 근사한 사건을 축복한다. 이 티끌들에게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은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천문의 즐거움에서)"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던 원자의 무한히 작은 편의에 의한 마주침의 유발, 즉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란 구절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는 시야에서 증발되어비리고 말것이라는 지적이리라. 대체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오늘은 없는 날'을 꿈꾸는지 모르겠다. "말많고 현란한 매체들,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오늘은 없는 날에서)"이라고 부른다.


 



150년전 1871년은 프랑스 내전이 있었던 해이다. 60일간의 시민들의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졌던 짧은 파리코뮌의 시대가 있었다. "일체의 억압과 지배가 종결된 자유로운 공동체 (철학 VS 실천, 강신주 , 31, 오월의 봄 )"였다. 시인은 시(), 지구 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에서 "만약 그럴 수 있다면"이라며 포문을 열고,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라고 회의적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자본교에 장악당한지 불과 이백년 만에 멸망의 시간을 카운트 중"인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 깊은 사람,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의 실천에 기댈 수 밖에.

 

아주 신랄한 시도 있다. 민주주 의 꽃이 선거? 정말 그런가? 투표 후 인증 숏을 찍는 것이 교양이라면 시인은 사절한다. 이것이 민주시민의 교양이라면 거부한다. 차악과 최악의 사이를 되풀이하는 결국 최악의 놀이, 정당 만들어 국고 보조금 챙겨가는 꽃패놀이, 시인은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 꽃에게 투표할 거라고. 그럼에도 시인은 서로 얼싸안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될 수 있다고.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에서

 

나의 로도스는 여기도 거기도 아니고 '저기'있다고 말한다. 삶이 우리를 춤추게 하는 곳, 그런 곳을 향한 실천, 사랑의 울림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의 맹렬한 사랑이 세상을 뒤덮는 그런 날이 언젠가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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