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지음, 이종영 옮김 / 리시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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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라는 두 편의 평설로 묶여있습니다. 초월적 신비로서 은총을 말하는 '시몬 베유'의 종교적 이상주의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조를 규정하는 체계를 오로지 힘의 관계로만, 힘이 전부인 양 간주하기 시작한 지금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환기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두 평설은 힘이 야기하는 인간 삶에서의 본질적 모순을 각성하게 돕고 있는 탁월한 주장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1. 마르크스 유물론의 곡해

 

우선 초월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푸르동에 경도되어있던 시몬 베유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론인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19세기 물리학을 이해하는 세몬 베유의 관점은 마르크스가 "부동의 사물을 다루듯 사람을 연구(70)"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원자의 심리적 등가물'로 이해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리학적 과학주의에 토대를 둔 과학적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베유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결정론적 원자론을 비판하고 비결정론적 원자론으로서 '마주침의 유물론'은 굴종하지 않는 유물론이라는 것을.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이같은 "천박한 과학주의를 덧씌웠다(70)"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자 '강신주'가 그의 역작인 철학 VS 실천에서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한 엥겔스의 왜곡을 비난했듯 시몬 베유 또한 "지적으로 열등했던 엥겔스가 불모의 것으로 만들었음(70)"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베유는 이 유물론자 마르크스는 인간을, ()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물질로 바라 볼 수밖에 없음으로서 맹목적 인 힘, 필연성에 종속시켜, 존재 자체가 선의 추구인 인간 삶과 본질적 모순을 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처럼 힘의 관계를 인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순간 악마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인간주의''자연주의'라고 불렀습니다.(강신주 , 철학 VS 실천』 「정치철학 3453쪽 참조)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신비주의자인 푸르동이나 시몬 베유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압체제인 '(권력)'을 대상화하여 저항하는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였습니다.

 

시몬 베유는 이것을 전도하여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누구보다 힘의 속성을 깊이 읽고 있었으며, 곡해된 낡아빠진 유물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감각-운동' 을 반복을 하는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각을 통해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존재로서 말이죠. 또한 '들뢰즈'차이와 반복에서 얘기하듯 다른 것,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으로서의 유기체, 다양한 기호들을 발산하는 인간을 말한 것입니다. 힘의 굴레, 그 적대적 한계성을 비판하려한 시몬 베유의 의지가 비뚤어진 자기애로 흘러간 듯싶습니다. 다만 '힘의 굴레'를 역설하기 위한 베유의 열정적 의도를 알기에는 충분한 비평이라 하고 싶습니다.

 




2. 놀라운 공평함의 미학 일리아드(Iliade)에 대하여 ; 힘과 영혼 관계의 대서사시

 

이제 힘을 주제로 한 서사시로서 그리스 정신의 최고라 찬미한 시몬 베유의 첫 번째 평설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보아야겠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이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또는 일리아스(Iliade)를 전쟁 영웅의 찬가로, 그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예찬으로 이해했던 저의 편협한 독서의 이해를 벗어나 폭력, 근원으로서의 힘에 내재한 자기 굴레의 한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글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힘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와 베유가 한 자리에서 대담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게도 되는 양단의 상념을 갖게되는 비평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힘에 도취해 분별을 망각한 저 정신적 유아상태의 인물과 그 주변의 기회주의적 정치배들의 행태를 보면서 호메로스가 통찰한 '힘의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다음과 같은 힘의 효과를 꿰뚫는 시선입니다. "힘과 접촉하면, 힘의 불가피한 효과 아래 놓이고, 접촉하는 모든 것의 입을 막거나 귀를 멀게 해버리는 효과(47)"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속성은 지금 대선 정국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영혼들을 점령하고, 충동에 불과한 눈먼 힘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벌이는 흡사 전쟁과 같은 폭력적 언어의 무참한 난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요.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가 시종 힘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8)"이죠. 힘은 문자그대로 사람을 사물로 만듭니다. 아킬레우스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전차 끝에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신을 우리는 떠 올릴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끊임없이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하며 힘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지요. 거기에는 영웅도, 영광도, 그 어떤 불멸성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하나의 물질만이 쓰라리게 남지요. 힘이란 그런 것이랍니다.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엔 아무도 없습니다."

- 9

 

힘은 그 자체로 파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소유했거나 그렇다고 믿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꼭 그만큼 힘에 도취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정 영원한 힘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힘 앞에 무릎을 꿇게되죠.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도, 하물며 한 때 트로이아의 적장자였던 헥토르도 왕 프리아모스도 모두 힘 앞에 고개를 떨굽니다. 무적의 오만한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에게 여인을 빼앗기며 모욕과 무력한 고통을 주는 능욕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뒤에 아가멤논 역시 헥토르에게 치욕의 두려움으로 몸을 떱니다. 서사시의 전개 내내 이같은 힘의 교대적 이동이 시소처럼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힘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불균형한 힘들의 균형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걸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변을 돌아보는 역량을 가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호메로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엄밀성, 미덕의 배움'이라는 네메시스(응보의 여신)적 징벌이 등장합니다.즉 힘의 남용에 대한 처단이라는 균형의 명상들이죠. 결국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승자나 패자가 아닙니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지요, 토로이아를 멸망시킨 아가멤논의 아카이오족의 기쁨 역시 찰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힘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라는 위세는 약자에 대한 방약한 무관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무관심은 전염성이 강해 위세의 정치집단은 힘이라는 과잉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곤 합니다. 힘의 절제된 사용은 인간적 속성을 넘어서려는 미덕을 지녀야만 벗어날 수 있는 거랍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전사입니다. 그는 살려는 열망을 스스로 지워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앞의 적군에 관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코 자신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하니 다른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깃들 여지가 없습니다. 호메로스의 모든 전사들이 이런 역량이 없어요.

 

그래서 일리아드(Iliade)에는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국 호메로스는 전쟁의 최종적 비밀은 눈먼 힘과 그 앞의 수동적 물질화한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충동일 뿐이라 드러냅니다. 힘과 사물화의 단조로운 그림뿐이죠. 이 서시시의 분위기는 내내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파괴된 것에 대한 아픔, 전투에 희생되는 자들의 고통을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감추지 않고 드러냅니다. , 폭력이 소멸시키고 파괴한 것들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절절한 체감을 요구합니다. 승자와 패자도 모두 똑같은 자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아마 이 서사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토로이아도 그리스의 누구도 힘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도 이 힘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죠. 그렇다고 호메로스는 이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힘에의 종속, 물질에의 종속이라는 필멸의 이러한 속성에서 인간의 영혼이 갖춰야 할 미덕이 무엇인가?라고. 차가운 잔혹함 속에서 드러나는 이 힘은 사용하는 자나 이로인해 고통받는 자 모두 재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적 처참성에 이 같은 감수성으로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타자에 대한 동정심,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를 통해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힘의 제국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61)"고 말이죠. 오늘 우리는 과연 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적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몬 베유의 이 마지막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영혼에게 숙고할 이유를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는 영혼을 복원해 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사회에 만연한 이 힘의 위세가 보이는 오만과 무도함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힘, 권력의 교체만을 부르짖는 힘의 소유만을 탐하려는 인간과 그 무리들이 태생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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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단상은 창작과 비평2021 겨울호(통권 194)에 게재된 식인 자본주의 부상이라는 제하의 낸시 프레이저와 마르띤 모스께라의 대담 내용에 대한 소회임을 밝혀둡니다.

 


정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칼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과성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토대-상부구조(base-superstructure)'에서 경제적 토대에 비경제적 배경 조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시스템을 주장한다. 자본주의란 경제적 토대만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 하위 시스템과 그 가능성의 필수적 배경조건인 "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공공재화 등등(369)"과의 관계성을 사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A. 자본주의 토대 개념의 확장 필요

 

이 필수적 배경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식적 경제 바깥에서 새로운 세대를 낳고, 돌보고, 사회화하고, 교육하는 일과 같이 경제적 토대에 편입되지 못한 이 비경제적 조건은 의심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이것이 부재하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코로나19'비인간 자연'이라는 비경제적 조건이 전체 경제 시스템을 얼마나 수축시켰는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회의를 얼마나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같이 배재하였던 생태적 기능 장애가 자본주의 경제와의 인과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연 같은 비경제적 영역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야말로 본디 자본주의적 특성아닌가?라고. 따라서 이러한 하위 시스템은 자본주의 토대에서 배제하여도 언제든 마음대로 사용,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이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370)"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비경제적 조건들을 의지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적 재생산의 시간성은 자본주의 토대아래 있지 않은 것(371)"처럼 이들의 능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자본은 개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하고 자본의 가치를 스스로 확장하도록 동기화되어 있어 '자본 의지'를 관철한다. 그리고 자본 배경 조건을 이 의지에 의해 변경시키고 말테지만 역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적 토대에서 소외된 개별 인간과 비인간 자연이 자본 의지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B. 자본주의 위기를 이해하는 방식

 

지구 온난화, 생태위기는 이미 오랜 기간 조짐을 드러내왔을뿐아니라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는 실상임에도 자본주의는 그 토대인 비경제적 필수 조건을 외면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 감각되는 것에만 미봉책으로 나서곤 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총체적 위기로 감지하지 않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토대확장 이론은 바로 이 지점을 시정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돌봄 노동의 실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 노동시간과 에너지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임금을 잡아먹는 것을 우리들이 목격하게 하였다. 부유계층(의사들의 정부의 의료 공공정책에 대한 반항)에 제압당해 시민을 향한 중대 정책이 좌절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기도 했다. 거버넌스 위기다!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을 가하게 될 것(373)"이다. 위기는 '발전적 위기''획기적 위기'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발전적 위기란 특정한 축적 체계나 단계에 국한하여 현안 위기에 대한 문제 해결이라는 땜질식 처방의 이해이며, 획기적 위기란 모든 단계와 총체적 현실 자체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어 시스템이 위기의 경향을 품고 있다는 관점이다.

 

전 지구로 확산된 미국 발 금융대란이 발생하자 파생금융 상품에 대한 무분별성이라는 특정 문제만이 원인이라 보고 잠정적 문제 해결을 끝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작금의 행태이다. 결코 근본적 모순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축적과 이윤추구를 향한 강박적 욕망이라는 무분별한 자본 의지만이 작동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파국적 위기를 겁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견되는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의 요청이며, 획기적 위기 인식으로의 전환 요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가치법칙을 폐지하고, 착취와 탈취를 종식시키며, 민주적 계획과 시장간 의 관계를 재발명할 수 있다. 한편 서로 적대하는 독재자들, 전 지구적 권위 체제하의 막대한 사회적 퇴행을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들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위기 지속의 가능 속에서 살아 갈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노동권, 녹색 환경 운동가들, 돌봄과 젠더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권위주의적 기득권에 맞서는 이들이 연대해야 한다. 모두 자본주의 필수 배경인 토대이다. 다양한 이해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규합하는 정치적 과제를 위해 모여야 한다. 전체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포퓰리즘은 이미 보수 우파가 선점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성격은 전혀 같지 않은 상태로서.

 

C.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누가 가졌는가?

 

포퓰리즘은 대중 선동적이라는 의미를 씌우는 이들이 누구인가? 우파가 선점한 포퓰리즘과 구분되는 좌파 포퓰리즘은 절대 필요하다. 우파는 인간 집단을 삼분하여 대중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 피 빨아먹는 엘리트, 기생하는 하층 집단.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선량한 사람들로 나누어 적들을 특징적이고 실체적 용어로 정체성 정치를 벌인다. 예를들어 실업급여 수급자를 비난하기 위해 '게으른 실업자', 퀴어 집단을 분열시키기 위해 '동성애 음모집단'으로 부르는 식이다. 낙인을 찍어 경계에서 배제하는 악의적 포퓰리즘 정치이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방대한 다수인 인민 대중과 이들로부터 막대한 부를 빼앗아 축적하는 소수의 과두 기득권 집단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취한다. 즉 시스템 내의 역할이라는 기능적 정의를 통해 사회적 진실에 접근하는 포퓰리즘이다. "누가 누구의 목을 밟고 있는지 사회적 위계 지도가 분명해 질 것(378)"이다. 우파의 정체성주의 포퓰리즘은 집단과 계층을 분열시켜 자기 기득권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좌파가 우파의 포퓰리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투쟁과정에서 시스템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조작되고 사용되고 있으며, 그 영향이 어떻게 파급되어 대중적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교육시킬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계급투쟁을 확장하여 '경계투쟁'을 주장했다. 투쟁이 그저 잉여가치의 분배방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네 삶의 문법을 결정하는 가'의 물음이었다. "자연, 공공재, 규제 역량, 정치적이라 간주하는 법 형식을 둘러싼 투쟁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 핵심을 둘러싼 투쟁(383)"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서 자본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일례로써 법인세 감면 법안의 입법 제의가 있었다고 하자.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누가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하고. "이 질문이 정치적 의제에서 은밀히 제거되고 몰래 자본과 축적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맡겨(384)"진다면 악당에게 총칼을 쥐어주는 것 아닌가? 경계투쟁이란 사회적 문법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헤게모니 선점의 싸움인 것이다. 연대해야 한다. 삶의 문법을 만드는 이들은 방대한 대중이어야 한다. 자기 집단을 분열시키는 세력을 지지해서는 진정 악당들을 꺾을 수 없다. 논쟁적인 이 담론은 오늘 우리 대중들에게 포스트 자본주의, 민주적 생태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체제를 사유케 하는 귀중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참조: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

 

미국 뉴스쿨 정치철학 교수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자본주의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생존조건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전망 하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재앙에 명명한 개념이다.   국역본은 <좌파의 길>로 번역되어 2023. 2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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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럽 선언 -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콜린 크라우치 지음, 박상준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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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시민권은 체제의 자비로움이 베푼 것이 아니다. 인간적 삶, 사회가 필요로 하기에 성취된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 소득(시민 소득)은 시민권의 정당한 자격이지 복지 동냥이 아닌 것이다." - 106~107쪽 발췌 인용

 

바로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기본소득의 지급 여부와 관련하여 논쟁적 갈등이 첨예하다. 수구집단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기본소득을 자신들이 베풀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의 지적처럼 '복지 동냥'이라 이해하는 이러한 착오적 망상에는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훼손의 저의가 스며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선언하려는 '사회적 유럽'으로의 복귀를 막고 있는 이기심과 혐오에 터 잡은 탐욕의 민낯이다.

 

'사회적 유럽'이란 "급진적 재발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복지국가 전략 강화(16)"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걸 시장(市場)의 논리로, 즉 시장이 인간사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사리사욕에 집착하고 분배 요구를 외면하며 불평등 증가를 기업가 정신의 보상이라고 까지 하는 반동적 수구성으로 퇴화하는 세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다.

 

A. 코로나 팬데믹이 알려준 교훈들 - 인간사회의 상호의존성

 

COVID-19가 지구촌을 휩쓸며 우리에게 인상 깊은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줬다. 이 재앙적 전염병이 창궐하자 "경시받고 심지어 혐오와 경멸을 당하던 간병인, 쓰레기 수거인, 보안 요원, 배달 기사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15)"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질서의 부도덕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또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본, 브라질 등이 방역에 실패한 주요 국가였으며, 시장이 모든 걸 지배케 한 결과로 방호 장구, 인공호흡기, 기타 의료 제재에 대한 대량 수요 조달의 실패는 물론 진단과 병상 연계의 혼란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곤 강력한 국경,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 등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협력과 공유를 위한 요청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백신 투입이 이루어지고 집단 면역 형성의 시기가 가까워오자 다시금 재분배 정의, 노동및 인권에 대한 제고, 지구 온난화 등 환경 대처 조치 등을 언제였더냐는 식으로 내던져 버리고 수익성(성장) 논리를 앞세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감면 정책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다. "소비자, 노동자, 일반 대중의 이익을 자신들 주주를 위한 이윤 우선의 정언명령에 종속시켜야 한다(24)"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을 구체화할 선택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들 중 하나에 서 있다." - 서문 중에서

 

COVID-19가 인간 사회의 상호의존이라는 가치를 각성케 하였음에도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인간 협력 영역의 확장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구성원 간(계층 간)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며 반()평등주의와 계급()주의와 인종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보수주의와 반평등주의의 냉소적 동맹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인간 행동의 매우 강력한 동기인 이기심과 혐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 옹호함으로써 대중을 효과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다. 오늘 우리 일반 대중들은 선택의 갈림 길에 있다. 선린 의식과 상호의존성의 가치, 불평등 해소의 절박감인지, 아니면 사회적 배제의 강화, 시장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경쟁과 탈규제가 초래하는 극단적 양극화의 세계인지를.

 

"Better together, Hope not hate (함께하면 더 좋고, 혐오가 아닌 희망으로)"

 

B. '사회적'이라는 의미 - 복지 국가 전략을 위해서

 

이 책의 표제인 유럽을 수식하고 있는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복지 국가 전략'으로서의 의미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1993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조약 사회적 장(Social Chapter)에서 "사회적 유럽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20171117EU의 대표기관인 유럽위원회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유럽 사회권 기둥(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으로 "기회 균등, 노동 시장 평등 접근, 공정 노동 조건, 사회 보장 등" 사회적 기본원칙을 선언 했으며, EU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는 다시금 포용과 협력의 사회적 유럽 건설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책의 표제인 '사회적 유럽'이란 표현은 이미 유럽연합 회원국(EU)들에게는 그네들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합의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오늘 거듭 선언하는 이유는 이들 앞선 조약과 선언을 거부하고 포퓰리즘에 의한 퇴행적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인간적 삶이 들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기심과 혐오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의 도덕적 합의가 부정되는 세계는 인간 삶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 선언의 실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들은 어느 정책 집단에 투표를 해야 하나? 무엇이 진정 국민 대중의 삶을 위한 선택이어야 할까?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방해하는, 즉 경제 권력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되는 것과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도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의 제거를 통해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 될 수 있으리라 역설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인종, 계급주의로서의 차별과 배제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인간적 삶을 파괴하는 두 망령(유령)으로 지목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세계화의 개혁, 금융 자본의 규제, 물질적 불평등 감소를 위한 노동자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요구와 조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과 같이 한국 사회 역시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된 친()시장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현상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기에 오늘 한국의 시민 대중에게 이들 실천 과제의 설명은 중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C. 멈출 수 없는 시장 확대와 세계화 추구, 그리고 공공성의 내재화를 위해

 

크라우치는 세계화를 중단하고 국경을 걸어 잠그자거나 시장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시장 억제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 범위의 적극적 확대라는 세계화를 추구하며,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미 드러났듯이 시장 자체만으로 인간 삶, 사회 안전망에 뚤려 있는 수많은 틈을 메꾸지 못하기에 공공 정책으로서 기반시설(운송망-물리적인 것, 직업 훈련-인간적인 것)과 효율적 규제의 리드가 필요하며, 적극적 정책 개발을 통해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상충하는듯 보이는 시장 규제와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통한 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이를 위한 실천 방안으로써 "기술적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논의 과제로 격상되어 제안"되는 '표준 설정'은 시장 범위의 효율적 규제와 시장 우위확보를 동시에 아우르는 돋보이는 안목이라 하겠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 표준으로 시장 우위 선점을 경쟁한다.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국제 표준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기의 규범이 시장 규칙이 됨으로서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 설정'은 여기에 내부 품질 표준, 노동 환경 품질 표준을 추가하여 더 강력한 표준 설정 제도를 국제 규범화하자는 것이다. 표준 설정 자체에 인간 삶의 안정성과 환경 보호 규제가 내재되어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에 억제와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다. 이러한 권위를 지닌 표준 설정은 기업이 규제에 취약하지 않게 되며, 표준 달성을 위한 가격 상승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등 상품, 서비스 생산의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를 이끌기도 한다. 해양 환경 규제에 따라 디젤 추진 선박에서 LNG추진 선박으로 선박건조 주문이 이동함에 따라 기술을 선점한 한국조선업체가 시장 지배자가 된 것이나. 내연기관에서 전기 배터리로 이전하는 자동차 설계, 제조부문의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이의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표준 설정은 규제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산업투자를 억제 할 수 있으며, 산업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즉 확장된 상품, 서비스 표준 설정은 부정적 제재가 아니라 시장이 결여하고 있던 공공성을 내재시켜 차원 높은 시장 제도가 될 수 있다.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125

 

COVID 팬데믹은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능력주의라는 허구적 발상에 뿌리박고 도덕적 외피를 입은 가치는 불평등의 정상화라는 기이한 현상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2 기계시대로의 급속한 진행은 플랫폼 노동과 같은 합법적 노동착취의 토대가 되고, 노동자들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내몰릴 뿐이다. 그마저도 많은 일자리의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 취약 상태에 노출된 불안정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을 때 사회는 이들에게 더욱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가 마땅히 취할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 집단은 실업수당 지급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그 규모를 줄이려고 친기업적인 황색신문들을 동원한 프로파간다로 왜곡, 보편적 복지의 취지에 역행하려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노동 현장은 월 단위 계약에서 최장 1년 계약을 통해 쉬운 고용과 해고라는 노동수급의 유연성만이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5년 내 3회 이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 수급을 제한한다는 발상은 1년에도 수차례 일자리에서 퇴출당하여야 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악행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약삭빠르고 게을러빠진 인간들이란 굴레를 씌우는 자본축적의 탐욕에 눈 먼 자들의 편협성은 폭력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기심과 배제와 혐오의 세계가 아니라 포용과 협력, 모든 인간이 좋은 삶을 함께하는 세계를 위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시민 대중의 몫이다. 지배 기득권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적 시선, 수많은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을 때, '사회적' 가치가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다. 시장도, 세계화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바로 그 길을 밟아나가게 해주는 안내자이자 조언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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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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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책은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에 능숙한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를 반추하며 오늘날 소통의 흐름을 차단하여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교착상태에 빠뜨리는 사고의 양극화를그 필연적 독단성을 반성케 하고진실 파악 불능의 능력을 회복시키려 하는 노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흥미로운 논제들로 빼곡하여 읽는 즐거움도 만끽하게 하지만 지성과 어리석음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양상을 지켜보는 지적 성취도 만만치 않은 지성사적 만찬이라 해도 지나친 수사가 아닐 것이다.

"멍청이들은 (...) 지혜를 가졌다고 믿지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약점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지식은 그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이로움을 주는 망각의 영역으로 물러나야 한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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