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김현창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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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지극한 열망의 기록 

나는 먹는다그리고 존재한다Edo, ergo Sum!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을 괴롭혀 온 최고의 물음, 즉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은 정말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반복되지만, 당연히 충분하고도 실질적인 문제로서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존재를 무시당하거나 존재 자체를 외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 앞에서 초연해지기가 너무도 어려운 까닭일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종교를 낳고 즐비한 철학적 사변을 생산해왔지만 어느 것도 인간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더구나 인간의 존재적 실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면 그것은 생에 대한 허무와 파괴로 이어지곤 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 의 이 작품은 바로 이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회의와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이를 해명하고자 한, 생의 열망을 살해하는 계몽주의적 이성과 영혼 불멸과 같은 육체 소외에 대한 위선적 사변을 공박하기 위한 소설(Novela) 혹은 스설(Nivola)이 되어야만 했이다. 이 작품이 온전히 소설로 명명되지 않고 스설이니 수설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범주로 읽히는 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라 할 것이다.

 

첫째는 형식에 있어 저자인 우나무노가 소설 속 대화에 직접 침입하여 소설 속 인물로서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그 생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이며, 둘째는 철학적 사변의 요소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측면이다. 물론 이 작품은 분명한 서사가 있고, 매우 문학적이라 할 예술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 속에 몰입하는 데 어떠한 지장을 받지도 않을 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서사를 이루는 스토리는 다분히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을 이용하여 그 감정을 교활하게 자신의 또 다른 비천한 사랑의 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기만,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남자가 끝내 자살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압축된 줄거리로 보면 거창하게 존재론을 들먹이는 수사가 한껏 과장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주인공인 남성 아우구스또란 인물의 여성 에우헤니아를 향한 사랑의 관념이 자기 영혼의 실체가 자욱한 안개 속의 불분명성에 휘감겨 존재의 실재성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하던 인간의 영혼을 불러 깨우는,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깨달음의 시작을 가져왔기에 예사스럽지 않은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머물던 존재를 비로소 구체화시켜준 사건으로서 사랑이다. 지나가던 여인의 눈빛이 우연히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내밀하게 율동케 한 것이다.

 

이 상황을 다시 관찰해보면 사랑이 에우헤니아를 유발한 것이라는 표현처럼, 이미 아우구스또라는 인물에게는 우연을 빙자해 구체화하여 산출할 여성 일반에 대한 추상성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순수한 하나의 관념, 허구의 실체가 실재화되어 유령처럼 살던 인간에게 살아있음을 선사한 것이다. 아우구스또는 에우헤니아가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유산으로 남겨진 부동산이 부채로 동결되어 피아노 교사로 그 빚을 탕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깨운 여성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부동산을 매입하여 여자가 안은 부채를 탕감하고 동결된 연금의 수령까지 재개 되도록 한다.

 

여인의 눈빛을 영적인 광명이라 생각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지 묻고 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기조차 한다. 반면 여자는 피아니스트로 불리지만, 이는 혐오스러운 생계로서의 직업일 뿐, 여자에게 음악이란 지겨움이며, 끝나지 않을 영원한 족쇄이다. 또한 여자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간략하게 묘사할 수 있기도 하다. 에우헤니아는 문간의 비좁은 방에서 자기 애인의 사랑의 평정을 자극하고 있었다.”라고. 건달 애인과 음란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문장은 아우구스또의 사랑이란 이미 불모성(不毛性)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마치 굶주린 개의 눈초리 같다고, 눈으로 구걸하는 작자라고 하기까지 한다.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종결한 자신이 안은 빚을 해결한 조치에 대해 자기 육체를 사려는 파렴치함이라고, 결혼을 강제하려는 악의라 주장하며 선의를 거절하고, 그 의도를 매도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에 대한 심리 실험을 통해 여자를 알고자 시도한다. 이때 여자는 자신의 건달 애인으로부터 아우구스또와 결혼하여 부채가 해결된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고 자신과는 계속해서 연인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과 함께 할 하나의 대안임을 제시받는다.

 

느닷없는 어느 날 여자는 아우구스또의 집을 찾아 와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겠다고 결혼 승낙을 은연히 암시하며 유혹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의 제안을 일순간 거절하지만 친구 빅또르와의 대화로부터 결혼을 않는 자는 심리적으로 여성을 체험 할 수가 없으며, 여성 심리학의 유일한 실험은 결혼이며, 실수나 실패에 대한 구제를 용납지 않는 결혼에 대한 이의에 대해 여하한 진리의 실험도 구제는 없다고 후퇴의 길을 열어놓게 되면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에 따라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 진리 실험인 결혼 준비로 한껏 들뜬, 그리고 결혼식 일자가 임박했을 때, 에우헤니아는 아우구스또가 증여해준 재산을 챙겨 건달 애인과 함께 유유히 도주한다. 구제는 없다. 아우구스또에게 남겨진 거대한 수치감, 조롱! 웃음거리가 됐다는 의식에 의해 영혼의 파괴가 시작된다. 조롱당함으로써, 이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의 독백마저 무너뜨릴 만큼 고통을 새긴다. 부정당한 존재는 존재를 방어하기 위해 이 조롱의 흉포한 체험이 라는 존재를 느끼고 만져볼 수 있는 실재적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한 사건이라며 합리화한다.


 

이처럼 이성(理性)은 인간의 감정, 생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의 적임을 드러낸다. 아우구스또의 이 냉소적 이성에서 자기기만의 위선을 읽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을 온통 삼켜버리는 고통은 존재와의 결별, 자살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 빅또르는 고통당하는 너 자신을 삼키라고, 자살을 하나의 방법으로 권유한다. 자살이란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존재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개똥철학의 유명한 공리가 등장한다. “AA에 동일하다, 이 말은 정말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바로 AA라는 사실 때문에 가장 진실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철학의 논리적 이성, 이 사변적 이성은 얼마나 인간의 생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진실은 존재 부재이다? 그러니 자기 살해의 죽음이 순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마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 될 것 같은데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또는 자살을 결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가와 상의를 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살라망까에 사는 저자 우나무노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 우나무노는 소설 속으로 침입하여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인 아우구스또와 대화를 나누는 소설 속 인물이 된다. 아우구스또 자신의 처분권을 가진 창조자인 우나무노와 대화해 봄으로써 불운의 원천인 자기 존재와의 결별을 최종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황당해 보이는 장면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화로 읽게 되는데, 이 지점까지 썼을 때 작가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의 처리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는 더불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음에 착안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대화는 서사이론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어 잘 알려져 있는데, 소설 속 인물인 아우구스또는 저자 우나무노의 환상의 산물로서 허구의 실재로서 존재할 뿐, 즉 한 인간의 기록을 위해서 만들어진 산물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죽이고 살리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또의 반론이 바로 유명한 문장이다. 허구의 실재도 내적 논리가 있으며, 이는 작가도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에 더해 그는 실로 비수같은 지적을 던진다. 더욱 어려운 일은 작가들이 상상한다고 믿는 인물들을 잘 안다고 하는 것만큼 어려운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우나무노는 이 지적에 창조주로서의 불안을 감지하고 아우구스또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아우구스또는 살아야 함을 하소연하지만 작가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 독자들은 아우구스또의 처절한 생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읽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우구스또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집에 도착한다.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에게 허구의 존재,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우구스또가 이 말에 집착하는 까닭은 살아있음을 연장하려는 몸부림의 생각임을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으니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니 죽을 수 없기에 자신은 불멸이다! 이 모든 것, 허구의 실재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은 불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말이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거림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먹고 있다. 먹고 있는데 살지 않은 것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존재한다. Edo, ergo Sum! 나는 먹는다. 그리고 존재한다!’ 육체의 철학이다. 이 비극 앞에서 웃음이 나온다. 웃음은 비극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했던가? 상상력을 자극하여 사물의 현실을 직시토록 유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예를 두고 한 말 같기만 하다. 죽음을 알아차린 육체는 맹렬한 식욕을 보이며 자기를 방어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육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우구스또는 세 가지로 사망한다. 의사는 두뇌와 심장과 위장이 동시에 종합적으로, 온 육체로 사망했다고 최종 진단한다.

 

이 작품은 인간을 추상적 존재로 사유하는 이성주의가 존재를 제거한다고 비판하는 반()이성주의 산물이랄 수 있다. 작가는 생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살과 뼈를 가진 사람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내밀한 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간이란 정신적 영혼의 존재라는 사변을 개 같은 수작, 위선이라고 보았던 듯하다. 존재를 의심케하는 예술의 소임을 다하는 작품이다. 이 의심 속에서 우리 인간은 삶의 의지를 더욱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비대해진 자아로 거들먹거리는 인간들로 얼마나 어지러운가?

 

존재의 소멸로 돌진케 하는 죽음의 사유없는 인간에겐 냉소의 소용돌이 외에는 없을 것이다. 메마른 감성이야말로 바로 존재를 부식시킨다. 오늘의 과학기술 최전선의 전사들은 뇌 스캔이 곧 동일한 자아라고 주장하며 인간 총체성으로서의 육체를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생의 열망을 소진시키고 육체로서의 존재는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이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만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반이성주의적 표방은 오늘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시금 주의 깊게 성찰케 한다. 소설에는 실로 많은 물음들과 대화가 있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과 출생에 대해서, 질투와 증오와 배신과 고통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또한 살과 뼈에 대해서. 이 한 편의 소설 혹은 스설에서 실로 다채로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의 사유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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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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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내 취미는 타인의 사생활이라고 읽는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나름 이해한 결과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위층에 사는 네 아이를 둔 여섯 가족을 이웃에 둔 홀로 사는 여자다. 위층 2302호에 사는 은협의 목소리가 서술자인 2202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된다. 서술자의 시점 선택에서 작가의 깜직하고 발칙한 재치를 읽게 되고, 호흡 짧은 문장들의 경쾌한 질주와 촘촘하게 배치되어있는 암시의 문장들, 그리고 우리네 흔한 일상사를 흥겨운 한바탕 게임으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들에 언제 빠져들었는지 모르게 책장을 거듭 넘기게 되는 소설이다.

 

은협은 네 아이에 치이고 여느 서민들의 살림처럼 경제적 압박에 푹 삶아진 듯한 여인이다. 화자의 목소리를 신뢰한다면 은협은 자신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힌 타인에 대한 불신과 피곤함, 짜증이 온 몸에서 발산되는, 그래서 때론 그 지친 현실로 인해 삶의 방향 감각을 잃고 넋이 나가기 일쑤인 사람이다. 갓난 아이, 유치원생 여자 아이, 연년생인 초등생 남자아이 둘, 왠지 나도 정신이 사납다. 2202호 여자는 이런 은협의 갓난아이를 맡아 돌봐주고, 유치원생 소연의 등원을 돕는가하면, 남자 아이들의 사건에 호출되어 은협 대신에 학교에 출석하여 해결사가 되어주기도 한다.

 

나아가 은협의 내밀한 사생활에 개입하여 은협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도 하며, 심지어 전세 계약 만기로 인해 집을 비워달라는 은협의 집주인에게 대신 협의 전화를 맡기까지 한다. 여자는 자신을 자칭 임시 은협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 당사자인 은협의 목소리가 아니라 서술자인 2203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되고 있다는 것은 은협의 사생활을 비롯한 삶의 전모를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야심찬 복선이라고 생각되는 데, 루브탱 15센티미터 검은색 펌프스 에피소드다. 갓난아이 배냇 이불을 삶다가 태워버려 이불장에서 대신할 것을 찾다가 남편의 외도가 의심되는 물증을 손 에 쥐게 된 사건이다. 좁아터진 전셋집에 여섯 식구가 바글거리는 가정이 휴식처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남편의 취미이자 사생활이 발각되는 해프닝이다.

 

서술자의 화법도 아주 얄궂다.  여섯 식구가 사는 은협에게 같은 규모의 집에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이웃으로서 지니는 호기심은 당연하달 수도 있다. 은협을 잘 알고 있는 여자는 항상 상대가 스스로 답을 지닌 질문을 하도록 함으로써 극히 경제적 답변만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다. 결국 서술자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은협과 그녀의 남편 보일, 아이들의 말과 사건의 묘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일화들을 전달하는 여자의 화법이나 차림새와 처세는 독특하고 튀는 데가 있어 주의 깊은 독자는 재미에 빨려들면서도 언짢고 불편한 느낌의 근원을 찾게 된다. 국민연금 수령노인이라는 별난 연령기준의 사용, 검사의 입을 빌려 발설되는 검경수사권 분리와 검찰정권에 대한 희망의 변, 서울시장 자살에 대한 죽어 마땅한”, “죽는 게 우월 전략과 같은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몰() 윤리적 언사,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의 제도적 틈새를 악용하는 무용화의 생각 등, 정치 시사적 소재들의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이다.

 

물론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어 발설되고 있으니 서사 흐름의 한 요소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이는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이의 부당한 소설 내 개입으로 읽힌다. 나는 내포저자(추정되는 소설 속 저자의 목소리)는 서술자가 어린 유치원생 소연에게 죽음을 설명하며 목을 긋는 몸짓을 하는 장면들처럼 서술자의 본래 성품을 독자가 가늠하게 해주듯 서사의 진전과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혹시 곡해하고 오독하는 것인가?

 

아마 이 소설의 주제어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중의 집단적 착각, 즉 자신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의심하는 대신에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우매함을 지적하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있다. 오직 서술자인 여자 단독의 목소리에 다중적 의미의 표현을 발설케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의심하지 않는 은협의 착각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고 틈틈이 묘사된 시국에 대한 총평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침 전세입자 사기 사건이 나라를 온통 어수선하게 하고 있는 즈음이다. 이 소설의 주요 제재이기도 한데, 자신이 꽤나 약삭빠르고 현명하게 세상을 판단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금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서술자 표현의 방점이 어느 곳에 찍히고 있는 것인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희극적 드라마들이 모여 하나의 비극을 완성하고 있다. 은협은 결혼 생활의 위기에 직면케 한 남편을 향해 이렇게 내뱉는다.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래요.”라며 자신의 결혼은 사기결혼과 같다고 푸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기 친 놈의 잘못이 아니고 걸린 놈이 봉변을 당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도덕적 책임이다.

 

이 도덕적 양심을 팔아먹은 인간에 희생당한 세입자들, 검찰을 비롯한 정치배들에 농락당한 시민들 또한 자기 판단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이 결말로 치달으며 들려주고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 책임의 규명일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나게 재미있다고 소설이 은연히 발설하는 의사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경쾌함 속의 진지함과 속 깊은 말들이 산재한 뛰어난 소설이다. 눈 밝은 독자들,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보이게 될 줄도 모르겠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독자들은 당황과 분노, 자신의 어리석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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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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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여덟 편의 단편으로 편집된 선집이다.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1951년 영화 라쇼몬으로 원작이 서구세계에 알려진 영향과 함께, 그의 이름으로 시상되는 문학상처럼 일본 자국 내에서 소설가로서 명망이야 그들의 이해에 터 잡은 것이고, 작품의 해석에 따르는 평가는 결코 이들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구로사와의 영화는 소설의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다. 단지 아쿠타가와의 단편집 라쇼몬(羅生門)에 수록된 단편 덤불 속()의 영상화이지 단편 라쇼몬의 내용이 아니다. 물론 이 두 단편소설의 주제 의식으로 읽을 수 있는 공통의 요소가 있긴 하지만 다른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비롯해 아쿠타카와의 소설에서 오늘의 일본인들을 지배하는 정신을 읽는다. 이들이 이러한 직관을 얼마나 오랜 동안 자신들의 몸에 체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윤리 의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쩌면 내 독해가 억견(臆見)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덤불 속은 살인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 일곱 명의 서술자가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은 살인 방식이나 사건의 정황을 모두 다르게 진술한다. 이들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인해 어느 진술도 사실로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또한 그네들의 상황 이해방식 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들 비협조적 서술자들로 인해 사건은 미궁의 것, 불확실한 상태로 머물게 되고 만다.

 

[영화 <라쇼몬>의 한 장면]


그런데 이러한 미해결의 이야기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모두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식의 답변이 거짓이라 생각된다. 하나의 사실을 다르게 말함으로써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 즉 진실을 진공 상태에 빠뜨려 오리무중에 휩싸이게 하는 것, 그래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게 하는 태도가 바로 일본인의 윤리의식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인식이나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서 너무도 확연히 드러나는 데, 위안부, 징용공 문제 등 역사적 사실의 부인, 독도 영유권에 대한 사실 흐리기와 같이 이를 동일한 인식 선상에서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처럼 인식의 윤리적 토대에 의해 이 작품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서술자들의 각 이야기 자체로서 당대에 대한 문화사회적, 정치적 비판의 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살인 용의자인 도적 다조마루의 자백에 나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을 쓰지만 당신들은 칼은 쓰지 않고 그저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여차하면 위해주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죠.” 라며 지배 권력의 보이지 않는 위선, 잔인성을 비난하는가하면, 살아남은 여자가 하는 참회의 기록에는 저는 사내에게 걷어차인 것이 아니라 그 눈빛에 얻어맞은 것처럼...기절하고 말았습니다.”와 같이 여성 정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현주소, 남성적 권위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를 우회적으로 비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미시적, 개별적 태도에서는 이렇듯 도덕적 인식이 깨어있음에도 전체적 진실규명에 있어서는 흐리멍덩해지는 이 집단적 윤리의식의 모호성은 아무튼 일본적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식에 이르면 선악의 경계지대를 거닐며 힘의 방향을 가늠하는 기회주의적 성향, 이것이 일본의 정신으로 읽힌다.

 

이것은 표제작인 라쇼몬에서 더욱 극명하게 인식되는데, 거듭되는 재난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자가 어떻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자신의 형편을 인식하며 굶거나 질병으로 죽은 사체들이 버려진 라쇼몬 누각 안으로 하루 밤을 쉬기 위해 찾아들어가며 벌어지는 하나의 상황 이야기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당대 인간들의 윤리적 수준이 드러나고, 그것은 사회공동체에서 이들 일본인들이 보이는 무심성이다. 시체를 그저 남들이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는 행위, 그리고는 그곳은 마치 추악한 장소라도 되는 듯 외면하는 것, 바로 자신들의 행위임을 부정하는 이 모순을 인식치 못하는 것에서 일본인들의 윤리성을 읽는다.

 

남자는 수많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누각을 헤매며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담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그 행위에 내재된 악에 살의를 느끼고 달려들어 칼을 겨눈다. 이때 노파의 자기 행위 정당화 발언이 시선을 끄는데, 가발을 만들어 팔기위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안 그랬음 굶어 죽을 테니 어쩔 수 없어 한 짓이니께 ...내가 하는 일도 나쁘다고는 못하겠구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의 윤리적 태도를 결정짓게 하고, 노파의 옷을 벗기곤 시체 더미위로 노파를 발로 차버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시커먼 동굴처럼 어두운 밤이 펼쳐져 있을 뿐이라는 마지막 문장과 함께 이 이야기는 악의 정처없는 세계로 마무리된다. 악의 윤리적 정당화를 비판하는, 아니 자성하는 목소리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적 이익 앞에서 인간상호 간의 윤리를 지배하는 것은 선악의 판별이란 의미없음이라고 선언하는, 즉 공동의 지대에 들어서면 자취를 감추는 전형적 일본인의 윤리 의식의 무의식적 발로가 아닐까?


[민음북클럽 2023스페셜 에디션 중에서]


이러한 윤리적 연상선에서 마죽이란 단편도 읽을 수 있다.  오위라는 하급 관리의 궁핍과 주변으로부터의 멸시를 쫓으며, 그의 욕망이 실현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낡고 헤져 남루한 차림, 딸기코와 볼품없이 가늘고 작은 몸뚱아리로 아이들에게 조차 놀림감이 되는 사람이다. 마죽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남자에게 동료 사무라이의 초대로 그가 이끄는 장소로 따라가 엄청난 마죽의 대접을 받지만 그는 이내 구토가 올라올 지경으로 그만 물리고 만다.

 

사실 이 소설은 소설 속에 개입된 작가의 목소리, 다시 말해 주인공의 생각에 작가의 의도를 빌어 발설되는 가엽고도 고독한 자신, 하지만 동시에 마죽을 실컷 먹고 싶다는 욕망을 오로지 혼자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도 했던, 행복한 자신을 회상하며 안도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는 주변 세계의 조건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체념의 평온성을 주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삶의 정상성으로 삼는, 세계의 조건에 이의를 달지않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외의 세계에 눈을 감는 일본인의 그것이라 해도 지나친 곡해는 아닐 것이다.

 

흙 한덩이라는 소설은 아들이 죽자 며느리와 함께 사는 스미라는 여인의 삶의 시선이라 할 수 있는데, 억척스레 땅을 일구고 남자들이 하는 힘겨운 노동조차 감내하며 살림을 일으키는 며느리로 인해 집안일을 떠맡게 된 시어머니의 푸념의 변이기도 하다. 며느리로 인해 살림의 형편이 나아지지만 손주의 돌봄과 소소한 집안 살림에 묶여 여전히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억제된 불만이다.

 

며느리인 다미의 느닷없는 죽음의 장면은 묘사됨 없이 단지 죽음의 사실만 기술되고, 그 죽음이 순간적으로 축적된 돈의 여유로운 소비와 자기 행동의 자유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지만 갑자기 자신을 포함한 죽은 며느리와 아들 모두가 한심한 삶을 살아왔음에 대한 회한에 젖어들며 이야기는 맺는다. 오늘에는 좀 오래된 낡은 사고의 진부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굳이 소설의 문장들에 물음하며 해석의 시선을 들이대면 왜 며느리는 개가하지 않고 힘겨운 일에 그렇게 전념했을까? 왜 스미는 갑작스레 모두 한심하게 여겨졌을까?를 찾아내 주제를 규명하는 작업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풍부한 읽기로 안내하지는 못할 것 같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자춘(杜子春)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 해는 지는데 배는 고프고, 이젠 어딜 가도 채워 줄 곳도 없을 텐데라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애꾸눈 노인이 그것 참 안됐구먼하며 황금이 묻힌 곳을 알려주어 엄청난 부귀를 안겨주지만, 매번 3년이면 탕진하고 이와 같은 푸념을 반복하고 다시 노인이 황금 장소를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된 생의 한 시점에서 두자춘은 노인에게 돈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곤 예견된 답변을 거스르는 희한한 말이 나온다. 자신의 사치와 낭비의 반성이 아니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기에 부귀가 소용없다는 것이다.

 

자기 가난의 상황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 부귀에 몰려들어 자신의 사치에 영합했던 인간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떠나 노인에게 선술 수업을 받는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노인은 이 청을 들어주어 아미산 절벽 바위 위에 내려놓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선인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음을 듣는다. 무수한 위협과 사건에 직면하지만 스승의 말에 따라 입을 다물고 그 어떤 말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윽고 이를 괘씸히 여긴 염라대왕은 그의 부모를 면전에 데리고 와 채찍질로 어머니의 살을 찢고 죽음에 내몰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우리는 어떻게 되든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잠자코 있으렴하고 말한다. 아들을 원망할 낌새조차 없이 자식의 마음만을 생각하는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 두자춘은 기어이 어머니하고 부르짖는다. 천륜이라는 유교사관에 의거한 이 효심의 발언을 통해 인간됨을 말하려는 이 동화가 당대 일본인들에게 필요했다는 것에서 그네들 윤리관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이 교훈적인 전설을 버무린 드라마가 인간적 정직함이라는 노인의 말로 마무리하는 데서 더욱 그네들 시대의 윤리적 난맥상이 드러난다. 한편 20세기 초엽의 일본인에게 경제적 의식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며, 때문에 개인의 사치와 방탕으로 인한 곤궁함을 주변 인간의 도덕성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무릇 작품을 읽는 시선 혹은 방식이란 다양할 것이다. 아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들에는 무수한 전문가적 해석들이 존재할 것이고, 이러한 비평들에 의해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추앙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지 21세기 한국인의 독해가 아니다. 20세기 초, 한국은 일본의 침탈에 신음하던 시기이다. 바로 그 동시대의 일본인 정신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들에서 일본의 집단적 사고방식이나 윤리의식을 읽는 것은 정당한 독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단지 이 작품들에서 일본이라는 집단정신에는 모호하고 힘의 논리에 의해 기회주의적으로 결정되는 윤리만 있을 뿐, 진실의 도덕적 정신 없음을 발견한다. 또한 일본인 개인들의 정치적 수동적 태도가 얼마나 오랜 동안 그들의 정신에 주입된 지배 엘리트들의 세뇌였는지도 읽게 된다. 내게 이 작품 선집은 하나의 정신사 엿보기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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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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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변신(metamorphoses)'으로 불리기도 하고, ’황금 당나귀(The golden ass)'로 불리기도 하여 변신 또는 황금 당나귀라고 둘 모두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런 논의야 어쨌든 기원 후 2세기(AD 170년 추정)에 써진 이 책은 감미로운 향기와 오줌 냄새가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관능적 아름다움과 외설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오가는 희한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가 쓴 동명의 책인 변신 이야기의 운문체와 달리, ‘루키우스 아플레이우스(Lucius Apuleius)'의 이 작품은 구어(口語) 서사체라는 점에서 최초의 소설이라는 명예를 안은 것 같다. 서사를 이끄는 화자(話者)는 작가의 소설적 분신이면서 소설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의 전달자이자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아마 이러한 독특한 구조가 훗날 액자소설이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불리는 것들의 전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 화자인 루키우스는 자신이 유명한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와 철학자 섹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가의 귀족임을 은연히 내비치며 나그네들의 기이한 체험의 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한다. 남자들을 열렬하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마녀의 서늘한 이야기다. 마녀의 추적하는 사냥개를 피하기 위해서, 즉 마녀인 여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세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당대 남성들의 표면적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성적 방탕과 통제되지 않는 폭력의 일상성애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루키우스는 사업상 테살리아의 히파타에 도착하여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인사인 밀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대 귀족의 아내로 사는 이모 비라에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루키우스에게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네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게 되었어.”라며, 관능의 즐거움을 예견케 하지만, 음욕 가득한 밀로의 아내 팜필레를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마법이 전()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테살리아를 속속들이 알고 싶은 충동과 갈망에 휩싸인 루키우스는 오히려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득의양양 밀로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팜필레의 육감적 하녀 포티스의 머리칼에 대한 찬미의 언어로 장장 1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리곤  마치 사랑의 사과가 내 위를 오르내리는 것과 같았다.”, 포티스와의 수많은 열정의 밤을 능청스럽게 묘사한다. 미지의 것에 대한 앎의 욕망은 다름 아닌 성적 욕망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표현처럼 루키우스의 호기심은 밀로의 아내 팜필레의 마법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그녀가 간통 상대자에게 가기위해 새로 변신하는 마술을 엿보고 포티스의 도움으로 마법의 약을 들이키지만 예상과 달리 당나귀로 변해버리고 만다. 다시 인간 루키우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장미를 먹어야 하지만 주변에 장미가 없어 마굿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고 이 이야기는 본격적 궤도에 오른다.

 

소설은 당나귀로 변해버린 루키우스의 고난의 여정이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루며 거세와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당대 인간들의 삶의 현실과 인간 본성으로부터 생명의 신성함, 건강한 삶을 길어 올리는 자기 성찰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구성하는 소설 속의 무수한 작은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강도(도둑)들의 탐욕과 잔혹성이며, 타자의 희생 위에서 행해지는 이기적 욕망과 음욕에 대한 것들이다. 특히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그리고 카리테와 틀레폴레무스의 사랑에 대한 두 이야기는 질투와 호기심, 육체의 탐닉과 심신(心身)이 결합된 사랑, 속박과 자유 등 다채로운 해석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미의 여신 베누스를 능가하는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보낸 지나친 경의는 그 영광의 대가로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프쉬케와 쿠피도의 사랑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즉 이 세계의 비의(秘意)를 보려는 인간적 호기심의 욕망이 부르는 파멸과 그를 속죄하는 고난의 과정을 묵묵히 수행하는 프쉬케를 통해 사랑이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면, 틀레폴레무스의 아내인 카리테를 탐하기 위해 트라실루스가 벌이는 간교한 살해와 카리테의 지고한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 속에서 태초 이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욕망의 잔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포르투나 여신에게 미움받는 당나귀 중에서-223


이 당나귀 변신담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조차 어둡지 않고 흥겹기까지 하다. 화자이자 때론 주인공이기도 한 루키우스는 자신의 전문가적 역량을 슬쩍 언급하는데 법률가이자 수다를 떠는 문필가답게 유머와 재치, 저절로 상상되는 묘사된 행위의 순박성, 그리고 결코 진지한 언어로 분위기를 냉각시키지 않는 재주일 것이다. 쓸모없어진 당나귀를 죽이기로 그의 주인들이 합의하거나 미신적 믿음으로 그를 거세하려는 순간이 임박했을 때, 묶인 줄을 끊고 죽으라 내달리는 당나귀 루키우스의 모습은 짐짓 그의 처지에 공감하며 진지해질 수 가 없게 한다. 입을 틀어 막아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이란...

 

자신의 주인이 지나가던 로마병사를 마구 두들겨 패곤 처벌이 두려워 어느 민가에 그와 함께 숨어드는 사건이 있는데, 수색을 피하기 위해 당나귀 루키우스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2층 방에 갇힌다. 집주인은 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로마병사들의 수색을 저지하고 그들이 자신의 집에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당나귀는 호기심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창으로 잠깐 머리를 내민다. 이때 햇빛에 드리워진 당나귀의 그림자를 발견한 병사로 인해 그들은 붙들려 곤혹을 치르게 된다.

 

여기서 당나귀 그림자만 봐도 당나귀인지 안다.”는 지극히 뻔한 말로부터 이에 담긴 경솔함과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조롱을 싣는다. 당나귀가 된 루키우스가 처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들은 사실 모두가 인간의 속성들에 기인한다. 그 경박함, 억제되지 않는 충동들,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소유 욕망, 그리고 성적 갈망이 초래하는 운명의 신이 내리는 벌칙들이다.

 

이 책 저자의 종교적 시선은 소설 속 루키우스의 언어를 통해 고대 로마의 문화적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데,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고 자해하며 가짜 사제 차림으로 구걸하는 무리의 모습이나, 허황되고 꾸며낸 개념으로 단 하나의 신을 주장하는 무리처럼 기독교도에 대한 조롱과 혐오가 눈에 띈다. 또한 아라비아 모든 향수의 언급이나 그리스로마의 여러 신들 뿐 아니라 당나귀 루키우스가 마침내 최고의 신이라 지칭하는 이집트 이시스 여신의 가호로 인해 인간의 몸으로 복귀하는 장면처럼 당대 로마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하는 정신과 물질 문명의 뿌리는 서구중심의 왜곡된 관점과 달리 이집트와 서아시아에 있음을 자연스레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끌어 쓸 수 있는 대중의 우매성에 대한 지적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당나귀 루키우스는 베누스를 비롯해 유노와 미네르바 3인의 여신 중에서 미의 여신을 결정하는 권한이 뻔뻔스런 베누스의 성뇌물에 녹아난 프리키아의 비천한 젊은 목동 파리스에게 주어졌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전쟁에 참전을 종용한 팔라메데스에 앙심을 품은 오디세우스가 거짓 증거들로 팔라메데스를 기소하여 판단력이 마비된 인간들이 죽음의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이러한 어리석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인류의 오점이라 주장하는 장면들이다. 생각하지 않는 대중의 판단이 중요한 사안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의 어려움, 그 곤란함이 여기에 있다. 바보같은 이 난처한 궁색함이란.

 

음란하고 기형적 음욕의 묘사나 쾌락과 방종의 묘사들이 제법 지면을 채우는 작품이다. 또한 유쾌한 해학으로 즐거운 미소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문장들과 은은하게 발산되는 아름다움의 향기가 승화된 시적 이미지로 가득하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풀가동한 심신을 위로하며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맞춤이다. 밝은 기분으로 상쾌한 독서를 하려한다면 정말 제격인 듯싶다. 이 고대인이 왠지 보고싶어진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현학적인 체 하지 않으며 의미를 말하고, 흥미진진하고 떠들썩한 기쁨을 주는 사람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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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 - 0에서 1을 만드는 생각의 탄생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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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신조에 갇히지 마세요.”

(Don't trapped by dogma...other people's thinking.) - 스티브 잡스(Steve Jobs)

 

 

누군가의 체험이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된 글이라는 아포리즘의 정의와 같이 방점은 체험에 찍힌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양태들을 경험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체험에서 우러난, 특히 끊임없는 삶과 일의 도전을 그치지 않으며, 인류의 행위에 무언가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말은 귀중한 깨달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와같은 의미와 함께 삶의 일상 속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GPT’처럼 이미 인공지능과 디지털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경험하는 이들의 언어,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책은 고인이 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로부터 트위터의 잭 도시’, 구글의 전 CEO에릭 슈미트’, 여성의 사회진출과 일-가정의 양립의 모델이기도 한 유튜브의 CEO ‘수전 워츠츠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링크드인의 리드 호프먼’, 이미지 중심의 소셜 네트워크인 핀터레스트의 벤 실버만에 이르는 25인의 실리콘밸리의 설계자이자 혁신가들의 통찰적 응집의 언어들이 우리들과 교감을 위해 그 웅변을 들려주고 있다.

 

이들에게서 반복되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장기적인 시야실패의 긍정적 수용의 다양한 버전의 조언들은 일과 삶의 목표를 위한 분명한 좌표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또한 예견치 못한 사업적 발상의 접근도 발견할 수 있고, 번쩍 하며 어떤 각성의 불빛이 두뇌를 깨어나게 하는 문장에 무릎을 탁하고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링크드인의 CEO 리드 호프먼은 소셜 네트워크는 일곱 가지 죄악중 하나를 활용할 때 가장 잘 운영된다.”,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네트워크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트위터의 잭 도시는 행운이란 (When)'를 인지하는 것이라며, “You have to start. Start now, Start here, and start small. Keep it simple.”라고 바로 지금 여기서 단순히 시작하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유튜브처럼 연령과 학력, 케케묵은 차별의 구분들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아닌 곳이 바로 작금의 ICT 세계이다. 주저하지 말 것을, 열정과 실패를 현명하게 그러안는 용기라면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장기적 안목의 실행이라면 그 자체가 삶의 풍요가 아니겠는가라는 인식 일 것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하나의 점들이 모여 의미있는 선이 되듯, 중요한 것은 열정의 지속임임을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체험 언어로 들려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서 상상 속의 무수한 변수들을 앞세우고 주저 안곤 한다. 세상에서 실패를 보장하는 유일한 전략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임에도 이를 실행하는 우매함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수 있게 된다. 비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실패에 부딪힐망정 결코 그것은 삶의 손해도 실패도 아닐 것이다. 실패의 크기가 함께 커지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아마존의 CEO 제프 조이스의 말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생의 도전과 용기에 관한 체험적 진리뿐 아니라 ICT 기업의 창업과 기술 선도자로서의 각별한 경험의 글들은 창업과 기업의 운영자들이 경청할 현실적 업계의 분위기와 교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글의 창업주 래리 페이지의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경쟁없는 가능함의 발상이나, 만약 무언가 실패하고 있지 않다면, 충분히 혁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며 실패를 곧 성취의 한 실현체로 인식하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의 말을 되새겨봄으로써 어쩌면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GPT의 설계자이자 Open AI 창업자인 샘 알트만은 “AI가 모든 곳에 스며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능의 한계 비용과 에너지의 한계비용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0에 다가갈 것입니다라고 AI의 세계에 우리 인류가 어느새 들어서 있음을, 그리고 그 실현 비용이 필요치 않을 만큼 낮아질 것을 예견하며, 인공지능의 발전이 예상보다 느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식견들과 이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를 선도하는 인물들로부터 일과 성취, 삶의 이해, 직업을 바라보는 신념들과 미래 기술의 현재를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짜투리 글이 산만하게 나열된 그런 흔한 아포리즘 모음집이 아니다. 열정적 체험에서 우러난 응축된 이들 언어들의 울림과 그 지향의 의미들이 삶과 일의 경영, 그리고 ICT비즈니스업계의 고유한 설계와 기획, 그리고 혁신을 향한 도전의 시간으로부터 건져낸 깊은 내면의 언어들로 구성된 하나의 경영전략서이고 인생 지침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이언 체스, 에어비앤비 창업자는 하룻밤 사이에 성공을 거두는 데 1,000일이 걸렸습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남의 성취를 하룻밤이라 말하지만 그는 3년의 시간임을 들려준다. 반복은 결코 기억을 만들지 않으며, 자신의 새로운 경험만이 기억을 만들어내고 삶의 유익성을 창출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실제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위험 속을 항해하는 것임을 깨우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을 뒤집어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려는 태도는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기성의 판을 엎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정성을 들여, 불가능성에 실패를 무릅쓴 용기로 묵묵히, 미친 듯 열정을 다하는 것이 무엇임을 보여 줄 뿐이다. 인간의 지식에는 아직도 많은 공백이 있다(There are still many large white spaces on the map of human knowledge.)”, 어쩌면 이 책은 기회와 바로 지금의 실천의 용기를 교감하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스타트업(startup)을 일궈내려는 창업가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무언가를 믿으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Expectation are a form of first-class truth. 

기대는 가장 중요한 진실의 형태이다."     - 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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