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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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의 신체와 정신들이 끊임없이 상처받는 지금의 이 세계, 그 가해자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가해자인 그것의 본성과 기원을 찾고, 또한 가해자가 이용하는 우리들의 약점과 그 결과적 현상을 사회학자들, 철학자들, 시인 등 예술가들의 역작들과 비평을 통해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다.
가해자란 화폐자본주의이며, 산업자본주의이고 소비자본주의 이다. 즉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포획한 자본주의 체제와 그 포획된 영역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되어 허덕이고 상처받는 우리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궁극에는 어떻게 이 지독한 체제를 극복하고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장이라 하겠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본주의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여 세계를 점령하고 새로운 종교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그것은 소위 모더니티(modernity), 근대화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이해된 것의 내면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20세기 초 서구 근대화, 산업사회로 우리보다 앞서 접어든 일본을 통해 식민지 수탈체제에 실려 경성에 들어왔으며, 서구의 경우에는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가 모더니티, 즉 자본주의의 출발지라고 보고 있다. 당시의 사회현상들과 사람들의 모습 등 시대상을 묘사하고 그 현상에 내재한 가치들을 성찰하는 과정은 감칠맛 나는 문예비평이며, 일종의 문서고(文書庫)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낸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규명하는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석학들의 명 저술들의 해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20세기 모던보이를 자처했던‘이상’의 소설 『날개』와 사회학자‘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현상들에 대한 저술들을 통해 화폐(돈)가 사람들의 가치관, 물질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추적한다.

일례로 이상의 소설 속 인물인‘나’는 돈의 교환가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인물이다.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해서 돈을 버는 아내가 매일 주는 약간의 돈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옆에서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그는 그간 아내가 주었던 돈, 5원을 아내에게 건넨다. 돈을 받은 아내는 그런 나를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 들어오게 한다. 이로서 나는 돈의 교환가치, 그것이 자유, 의도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당대의 이상으로부터 자본주의, 돈의 가치가 인간, 바로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면화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이와 병행하여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란 것이 오직 돈을 가질 때에만 확립된다는 짐멜의 이론을 통해 사랑, 신뢰, 우정과 같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들이 돈에 포획되는 현상들을 폭로하고, 화폐 물신성의 기원과 모더니티의 속성인 항상 강박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 침착하는지를 갈파한다. 나아가 모더니티의 한 현상인 도시화, 현란한 차이의 공간인 도시적 삶의 양식이 사람들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또한 수동적 자유의 상태로 전락시키는지를 탐색한다.

 

이렇듯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간의 내적 양태의 변화, 도시화와 같은 공간적 변모, 산업자본의 생리를 다양한 관점들에서 탐사해 나간다. 시선을 자본주의, 모더니티의 발원지인 파리로 돌리면 우리의 ‘이상(李箱)’에 대입되는 인물로서‘보들레르’를 얘기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시작을 19세기 파리에서 찾았던 사상가‘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향하게 한다. 사창가와 도박,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이 현란하게 진열되는 아케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해대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돈의 위력은 견고해 진다. 여기서 보들레르라는 모더니티의 신경증을 앓던 인물의 욕구와 욕망의 구분을 통해 돈이 자본주의의 숨겨진 종교로서 탄생하는 그 비극성을 보여주고, 인간으로부터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폭력성을 목격하게 한다.

한편 자본주의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서 감관(感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패션과 떨어질 수 없는 유행이란 단어나, 신상품, 그리고 이를 사고파는 매개 수단인 돈, 그리고 과시의 욕망과 이로부터의 출현하는 계층의 구별, 등등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산업자본이 잉여자본을 만들기 위해 주도한다. 역시 새로운 상품이란 것도 기존의 것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보다 거대한 잉여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자본가들이 발견한 자본주의논리이다. 인간의 치명적 약점인 허영심을 재빠르게 이해한 산업자본가들의 전략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사회학자가‘부르디외’이다. 그의 명저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와『구별짓기』는 경제적 자본이 넉넉히 있다는 걸 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행위, 즉 상류층이 자신들을 타 계층과 구별 짓고자하는 의지로서 문화적 자본 등으로 대표되는 폭력적 현상이다. 이들 산업자본가들과 상류층이 하는 구별짓기의 작동원리를 보면 그것은 단지 돈의 축재를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하류층, 중류층에게는 도달하고자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실은 껍데기이고 부질없는 것임에도 소비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소비의 논리는 모든 인간들을 이 대열에 서게 한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와 닮아있다. 자본주의가 곧 기독교를 대체하는 인류의 유일종교가 되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소비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폐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의 파괴성을 통찰한 석학들이 있다. ‘좀바르트’와 ‘보드리야르’가 그들인데,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교활한 전략들을 간파했는가하면,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관념적 가치, 예로서 세탁기를 행복과 에로틱함, 새로움, 위세와 같은 가치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는 소비의 논리를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저술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은폐된 속성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지적 성찰들의 예시와 분석, 해설을 기반으로 그 도사린 문제점을 보다 쉽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냄으로써 우리 세대는 아닐지언정 우리들의 후손들이 더는 상처받고 사는 고통의 세상이 아닌 자기존중과 평온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환(화폐)을 통해서가 아니라‘바타이유’가 말하는 유쾌한 비생산적소비, 보드리야르의 고유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영원히 수단으로 간주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목적이자 수단일수 있는 세상을 말이다. 돈을 가진 자의 자유에 불과한, 다시 말해 소비의 자유만이 허락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한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협소하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벗어나야 한다. 관념적 쾌감, 그것도 순간적인 관념상의 쾌락에 불과한 돈에 종속된 이 체제는 인간들을 불행하게 한다. 오늘의 과시적 소비주의, 광신적인 물신주의에 대한 대중을 향한 저자 강신주의 세심한 배려가 책 전체에 배어있는, 그래서 엄청난 수고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게 깃든 역작이다.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책 속에 인용되고 있는 저작들을 이미 읽고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오늘의 종교적 질서가 된 거대한 자본주의체제를 그들을 통해 집약화 된 하나의 잘 정리된 질서로 새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동료와 친지들 모두와 이 책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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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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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짐스러울 정도의 삶, “이겨낼 수 없다는 오래된 좌절이” 어떠한 의지조차 없애버린 그런 삶, 대체 이런 삶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김이설이 그려낸 여자, ‘서윤영’이란 인물의 감당해야하는 그리고 감당할 밖에 없는 비루함에 삶의 오욕(汚辱)이 몽땅 씌워져있다.

매년 낙방하는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무능한 남편, 핏덩이 아이, 단칸 옥탑방의 하찮은 생활일지라도 먹고 살기위해서는 벌어야 한다. 어렵사리 구한 도시외곽의 물비린내 나는 닭백숙집의 종업원으로 도시와 그 경계를 아침저녁으로 넘나든다. 마치 환각의 공간 같은 저 세계와 현실의 이 세계를 오가는, 아마 저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윤영은 유령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그것이 환영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온종일 닭백숙 집에서 나르고 닦고 씻고 손님 접대를 하여 버는 한 달 월급은 백 여만원, 그나마 이십 퍼센트는 보증료라고 퇴직할 때 준다며 떼어버리고 준다. 생존을 위한 비용에도 모자란다.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한적한 교외의 닭백숙 집을 찾는 손님들은 음식 맛만으로 찾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식당의 별채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교환들, 식당 여종업원 월급의 몇 곱절이 되는 수입원이 되어주는 그 기이한 육체와 자본의 교환체계 , 주인의 은근한 매춘의 권유는 곧 윤영의 생존수단을 위한 질서 속으로 들어온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인이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외곽의 닭백숙 집을 찾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여가라고 포장해서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불법 매춘행위를 눈감아주고 향응을 받으려는 부패한 사람들, 인간의 육체를 교환가치라는 명목에 집어넣은 자들...그런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환영이기만 한 걸까?

핏덩이 아이를 돌보고 아내 윤영의 밤늦은 식사를 차리는 무기력한 남편, 고시원에 홀로 앉아 공부해도 낙방하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은 없다. 차이고 밟히는 능욕의 댓가로 부양하는 남편과 아이, 그리고 집을 파산시키고 마침내 윤영의 생활까지 침몰시킨 동생들과 엄마의 몰염치한 손 벌리기는 윤영의 의지를 극한으로 내 몰기만 한다. 이 외면하고픈 우리네 삶의 한 조각 현실에 한숨과 울화와 분노가 절로 치밀어 오르지만 어디 발산해 댈 곳이 없는 사면초가의 심정에 몰린다. 정말 “그 따위 나날들”로 점철된 이 세계에 공존하는 현실, 윤영의 삶이 너무 아득해서, 그리고 이 생생한 날것들의 너절하고 염치없고 추함에 나는 쩔쩔맨다.

단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오는, 생활비를 주는 남편, 더 이상 아내를 능욕의 현장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남편이 필요 할 뿐인 그녀가 잠자는 남편의 머리를 발로 툭툭 내차는 광경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윤영이 바라는 작은 소망, “아이 하나를 씻기지도 못하는 좁은 화장실이 조금만 컸으면 좋겠다는 거,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이다. 그런 그녀가 이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말한다. 욕심이어도 괜찮은 것임에도 희망이라고 말하는 그녀 때문에 다시금 울컥한다. 극한에서 극한으로만 치닫는 윤영의 환경, 대체 이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이렇게 지독할까?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최악이란 최상급은 항상 그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란 본디 그랬던 것인 것처럼 그녀는 버티고 또 버틴다. “버티다 보면 버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는 듯이.

김이설이 시종 뚫어지게 보는 이 세상의 단면들, 참고 또 참다보면 그 통증이 무뎌져서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게 되는 삶의 그 지독한 낯짝이 너무도 시리고 아프다. 그러나 그건 이 역설적인 ‘환영’이란 제목처럼 환영이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김이설의 소설, 그 내용들을 냉큼 집어다가 어디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버릴 수 있다면, 아니 그래서 우리의 삶들에서 이러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수만 있다면 하는 어설픈 욕심을 가져본다. 작가만큼은 아니겠지만 읽는 내내 너무도 괴롭고 아팠다. 가슴 한 구석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다...김이설 파이팅! 서윤영 파이팅! 이 땅의 여인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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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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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눈의 복수 신화나 지고한 사랑이야기 같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졌던 전체주의 체제와 추한 권력에 모여든 파리 떼들에 대한 비판이 직설적 은유로 쓰여‘카다레’ 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악과 몽매주의, 폭력과 공포로 시민의 심리를 옥죄고 영혼을 부숴대던 그런 시절을 겪었던 우리의 그 때와 동일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깊은 공감과 동질감을 갖게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애절한 사랑의 테마를 기저로 하고 있고, 더구나 그리스 비극중 하나인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대유(代喩)되어 인간사회가 저지르는 던적스런 역사의 반복에서 역설적이게도 체제와 지역, 시간성을 넘어서는 보편으로서의 인간성을 읽게도 된다.

소재 또한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천박성까지 빼 닮아서 거의 모든 문장을 우리식으로 몇 글자만 수정하고 가필하면 한국소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친근하다. 화자인‘나’란 인물은 방송국 직원으로 독재정권의 악마성, 폭력성에 수치와 혐오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골수 당원이나 서게 되는 국가의 최대 행사인 노동절 행사장에 예상치 못한 초대장이 날라든다. 이 뜻하지 않은 초대장은 권력의 상층부에 가까이 갔다는 상징적 의미이지만 그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승승장구 권력의 핵심인물이 된 연인‘수잔나’의 아버지는 화자와 딸의 교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권력 경쟁을 위해 서슬 시퍼런 감시를 놓지 않는 눈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사랑은 중단되어야 한다. 화자는 여기서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를 권력의 희생제물로서 동일시하며, ‘희생’이란 제의(祭儀)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모색한다.

희생을 요구한 권력의 진심, 그 진의를 탐사하는 관념의 여정이 독재자와 그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파렴치한 이들만이 입장 할 수 있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물리적 행보와 병행하여 진행된다. 행사에 초대를 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대중들과의 도로에서의 구별, 그리고 본 행사장에 가기까지 거치는 몇 차례의 검색지역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의 면면은 가히 볼만한 인간시장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검문이 철저할수록 초대장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듯이 그 차별을 즐기는 군상들, 그리고 그 권력의 상징적 공간에 새로이 진입한 인물들을 발견할 때 “저 인간은 대체 뭘 해준 대가로 초대장을 받았을까?”, “누굴 감옥에 쳐 넣었소?”라는 자기 모순적 의혹을 드러내는 표정처럼 징그러운 벌레 같은 인간들의 역겨움이 묘사된다. 동료를, 이웃을, 상사와 부하를 고발하고 음모가 난무하는 불신의 세상에서 신분상승은 타인을 짓밟고 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제로섬게임, 극한적 경쟁에서는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자다. 여기에 수단의 도덕성, 수치심, 죄의식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란 없어진다. 승리하면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권력과 부의 모양새와 똑 같다.

형편없는 자들의 이야기, 천박한 인간의 완벽한 예, 저 아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헛되이 날려드는 이 세계의 악마적 메커니즘이 신랄한 우화와 함께 등장한다. 인간의 살코기를 주어야 날아오르는 독수리, 그 독수리의 등에 올라 비상하지만 준비한 타인의 몸이 소진되고 나면 도달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잘라내야 한다. 이윽고 아래 쪽 세계에서 위쪽 세계로 독수리가 솟아올랐을 때 “독수리가 죽은 사람의 뼈를 싣고 올라왔어요!”라는 말만이 허공을 맴돈다.

도덕적 가치들의 훼손, 불건전한 도취감, 성취감이 오늘의 인간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한 번 더러워진 인간은 그 다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쉽게 더럽히게 된다. 이 패악스럽고 추악한 탐욕의 메커니즘이 보편화된 비천한 쾌락을 온통 세상에 내재화시켜 이를 분별해내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많은 나라들이 신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신적 피폐화와 인간 삶의 중요한 진실들을 파괴하는 이 정신적 몰락의 현실과 결별하려고 함에도 우리 사회는 자기성찰과 반성은커녕 더욱 더 집착하고 매달리는 꼴이다. “세계는 지금 몽매주의와 결별하고 있어요. 그런데 끝까지 그걸 옹호하고 있잖아요.”라는 화자가 기득 권력에게 외치는 분노의 울부짖음은 마치 우리를 향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제물은 권력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이 오래된 희생제의의 고전적 본보기인 권력자 아가멤논이 행한 딸의 처형은 자신의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즉 모든 병사들의 죽음을 요구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주기 위한 잔혹한 욕심이었을 것이다. 이를 대의를 위한 영웅의 탁월한 전략이라고 칭송하는 빌어먹을 인간들이 있겠지만 그 만큼 우리 인간들은 더욱 교활해지고 세련되고 잔인해졌다는 의미일 게다. 사랑하는 연인을 희생 제물로 뺏긴 화자가 이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모든 삶의 원천인‘거기’부터 재교육해야 한다는 조롱어린 외침에서 사랑을 잃은 자 그대로의 분노가 느껴진다. 전체주의 권력의 독선과 그것이 조성해내는 암울하고 황폐해진 인간성의 고발을 통해 우리들이 잃어버린 고귀한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회복하고자하는 숭고한 의지의 산물로서 이 소설은 그 몫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권력의 본질이 메타포 천재의 손길로 설득력 있게 그려진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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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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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 미로’시리즈로서는 국내에 먼저 소개되었지만 외전인 『물의 잠, 재의 꿈』을 포함하면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본능이나 직관에 충실한 여성 탐정이라는 캐릭터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앞 선 작품들에서 보았던 선악 관념이 더욱 흔들리고 보다 감성적 인물로 변한 미로를 접하게 됨으로써 도덕적 가치의 당혹스러운 도전에 직면하는 것은 또 다른 전율과 긴장이란 매혹을 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미로가 도움을 요청하면 딸을 위해 기꺼이 능력을 보여주던 아버지‘무라노 젠조’에 대한 애증은 그녀의 출생 비화로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젠조에게 ‘의붓아버지’라는 시각을 부각하여 입힘으로써 개입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괴리감을 증폭시킨다. 이 감정을 증오와 불신으로 확장시키는 데에는 연인이자 적대감을 동시에 지녔던 한 남자의 자살소식을 아버지가 은폐했다는 인식이 기초하고 있다.

이처럼 미로는 자기 연민과 감성에 지배당한 여성으로서 증오와 삶의 체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그녀의 내면은 지옥의 어둠 같이 뒤틀린 잔인한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의 감정, 특히 애정의 균열을 만들어낸 당사자로서 아버지 젠조를 지목함으로써 심장병을 앓고 있는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폭력적 분노, 광기에 휩싸인 미로의 거침없는 감정의 질주는 악마적 탐욕스러움으로 선(善)의 편이었던 그녀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켜버린다. 이제 무라노 미로는 탐정이라는 추격자의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자로서 도망자의 위치에 선 것이다.

맹인(盲人) 안마사인 아버지 내연의 처가 외치는 비난과 위협의 외침을 뒤로하고, 더구나 돈까지 훔쳐들고 도피하는 미로의 모습은 경악 바로 그것이다. 이제 좇는 자와 달아나는 자들의 이유를 통해 그들을 이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근원, 인간의 원시적 본능으로서의 추악한 욕망들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낸다. 오랜 우정을 쌓았던 이웃이었던 동성애자, 죽은 아버지의 내연녀, 아버지의 동료였던 야쿠자, 이들 저마다의 과잉의 자기연민, 그 본색인 탐욕의 역겨움이 죽음의 사자가 되어 미로를 추적한다. 그러나 추해보이기만 하는 이들 사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 혹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고뇌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설혹 더러운 자기내면과 역사의 은폐나 물질적 욕망을 덧씌우는 자기기만일지언정, 그래서 이들의 미로 추적은 당위성을 갖추게 되는 것일 게다.

이에 대비되어 미로의 한국으로의 도주와 도피생활을 함께하며 신뢰를 쌓아가는‘서진호’라는 인물을 통해 타자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랑, 즉 삶의 진정한 가치,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은 어쩌면 물질적 자본주의와 소비사회로 황폐해진 일본사회가 잃어버린 휴머니즘을 외국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상징적 이유로 파악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에게 이 작품이 특색 있게 다가오게 하는 소재, 즉 무대의 상당부분이 한국이라는 것이며, 더구나 1980년 5월 광주항쟁이라는 군부의 탐욕스런 권력욕이 만들어낸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소재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오늘의 인간과 인간세상의 비열하고 추악한 본성을 입증하고 강화하는데 한 몫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시종 온갖 욕망으로 탁해진 절망적 세상을 그려내려는 데 더 없이 적절하다는 작가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오직 에고와 나르시시즘에 빠져드는 현대인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신뢰란 미덕이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을 구원할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게 한다. 증오의 씨앗이 에일리언처럼 몸속에서 자라고 그 아이를 자기 생존의 교환물로까지 비참하게 내몰듯이 비록 지옥의 세계 같은 절망의 현대를 말하지만 마침내 그 순박한 아이의 미소에 생명에 대한 신뢰를 보내는 미로의 다짐은 결코 작은 희망의 한 가닥을 놓지 않는 어둠의 미세한 균열을 보는 것 같은 낭만적 기대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인 그녀의 유일한 신뢰인 서진호를 기다리기 위해 찾은 나하(那霸)의 밤거리는 왠지 모를 불안으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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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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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를 휩쓴 전염병, 페스트가 조성한 폐쇄와 억압의 환경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 인간이어서 나타내는 행동과 정신세계를 쫒는다. ‘페스트’는 하나의 커다란 우의(寓意)이며, 추상(抽象)이다. 악이요, 폭압이며, 자유의 박탈이고, 무심함이며, 폐쇄이자, 공포이다. 그래서 카뮈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상황에 기초하였지만 이것은 그대로 인간이 있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고, 또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기에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경계를 넘어서고 확장된다.

페스트의 질병적 징후와 확산의 가능성이 나타났을 때, 권위를 가진 인간이나 조직은 물론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올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초기 반응일 것이다. 오늘의 인간으로서 말한다면, 석유 피크(Peak)와 같은 화석연료의 고갈,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는 고사하고, 물질적 소비에 대한 광신적 편리성과 욕망의 경쟁지대로 몰아넣는 소비자본주의의 예견되는 결말에 무심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리외’는 바로 이러한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현상들로부터 지방정부인 현청의 공식적 조치를 요구하지만 의사결정권을 가진 고위집단은 시민의 집단적 사망을 야기하는 병세를 페스트로 연결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공포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것인데,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려 한들, 더구나 그네들의 이익과 무관한 페스트가 인간의 판단력을 기다려줄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걷잡을 수 없는 사망자의 증가, 뒤늦게 중앙정부에 지침을 요청했을 때 그 답변은 도시의 폐쇄조치이다. 인구 20만의 소도시‘오랑’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자신들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개인의 안위에 직접적 관계, 즉 당사자가 되어서야만 가능하다. 정말 어리석지 않은가? 이후에 보이는 인간들의 행동은 어떤 양태를 보이게 될까?

대개 자신만은 그 공포의 죽음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피해 보려는 몸짓을 한다. 미신과 그 은밀한 처방들, 도시의 탈주를 위한 몸부림, 그리고 신을 찾는다. 주술이 무엇을 해결하겠는가, 신을 섬기지 않는 인간들의 죄악을 벌하려는 신의 노여움이라고 말하며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요구한다. 영혼이 설사 있다한들 영혼이 범한 죄악이란 것을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기탁한들 의지가 없는 전염병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더구나 영혼이 정화된들 병 걸린 육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페스트의 공포에 온 도시가 질려있을 때 페스트가 신의 징벌이라고 말하는 신부와 그 앞에서 악의 오염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어린 육체가 페스트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은 신의 분노의 본성을 의심하게 한다. 이 처절한 모순을 인식한 신부의 행동은 마침내 페스트에 전염된 채 죽어가는 육신으로서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 채 자신의 믿음으로 순응하며 또한 항거하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話者는‘리외’의 목소리를 빌어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인류의 구제라니, 너무 과장된 말씀입니다. 나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나의 관심사는 인간의 건강입니다.”

페스트가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 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되어 있는 사건으로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인간사회의 선악의 구체성, 미덕의 생생한 실체가 조명된다. 특히 카뮈는 비록 실존주의자임을 부정하지만 관념주의의 공허함을 비판하며 페스트에 대항하는 인간의‘성실성’이나‘건강’이라는 덕의 실체 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죽음의 공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곳에서 사람들의 생명, 삶을 지켜내기 위해 묵묵히 자신들의 신념을 수행하는 행동의 실천자들,  의사‘리외’, 보건봉사대 ‘타루’, 하급관리 ‘그랑’그리고 도시의 폐쇄가 만들어낸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수긍하지 못해 탈출 의지를 접지 않지만 결국에는 봉사대로 잔류하는 기자 ‘랑베르’등을 통해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며, 관념의 추상성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함을 역설하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모든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 때, 사랑이란 한낱 추상적 의미이상이 되지 못한다. 자기를 주체하기도 버거운 상황, 곧 자기 존재의 보존이란 명백한 가치는 평상시에는 노출되지 않는 은폐된 진실이다. 끊임없는 죽음과 격리의 행렬, 죽음이란 평등한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지만 사람들은 더욱 에고(Ego)에 몰입한다. 그러나 타루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정신과 평화를 향한 소망이나 도시폐쇄의 해제를 맞이한 후 이별의 해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이 항상 바라고, 가끔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리외로부터 사람간의 유대와 애정이라는 찬미해야 할 인간의 덕목을 말하게 하는 것은 카뮈식 요청일 것이다. 『이방인』의 부질없음에도 반항하는 부조리한 숙명을 살아가는 ‘뫼르소’의 깨달음, 관계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아랍인을 살해한 젊은이의 얘기, 재판을 받는 청년의 모습처럼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임을 알리는 장치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카뮈의 인간상에 대한 소망이고 의지랄 수 있는 “언제나 침묵 속에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리외의 어머니에 대한 연대의식이 그것일 것이다.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숭고함이 절로 읽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밑줄 그며 읽게 하는 소설이다.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흔들어 깨운”카뮈의 정신에 새삼 겸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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