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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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매년 한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 줄어드는 숫자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소소한 변화를 읽게 된다. 107명의 졸업생 동창이 마침내 0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소년‘사토루’는 중학교의 등교를 거부하고, 학교 담임선생의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울타리를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로 자신의 생활범위를 정하고 단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유폐(幽閉)된 삶의 경계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다.

 

일어나면 새벽 운동과 단지 내 복지관의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라데의 고수‘오야마 마스다쓰(한국명 최배달)’를 닮기 위해 운동에 매진하며, 그리곤 아파트 단지의 동창생들 집을 꼼꼼히 순찰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해마다 동창생들은 몇 명씩 이사를 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줄어든다. 결국 그의 친구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소년, 아파트 단지라는 좁은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닫아 건 소년의 삶에 펼쳐지는 단조로운 듯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베란다를 같이하는 이웃집에 사는 동창생,‘마쓰시마’는 소년이 소녀를, 여성을 알아가고, 삶의 기술들을 알아 가는데 더없이 좋은 이성 친구가 되어준다. 사토루의 무모한 듯, 혹은 무례 한 듯한 호기심과 질문에도 흔쾌히 솔직한 답변을 들려주는 소녀이다. 베란다 칸막이 사이로 종을 매단 줄을 연결하여 잡아당기면 얼굴을 내밀어 사토루를 맞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마쓰시마의 조숙해 보이는 모습을 곧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눈에 선하다.

중학교 졸업장이 쥐어지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에 일자리를 가까스로 얻어낸 사토루와 사부(師父)로 부르기로 한 케이크 숍 사장과의 일화들이 친근하게 펼쳐지고, 파티시에가 되는 고단한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사토루가 왜 아파트 단지 밖의 세계와 자신을 차단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TV인터뷰 요청을 받고 출연의 결정을 고민하는 과정에 이르러서 회고담으로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더욱 동력을 얻은 것처럼 20대 청년에 들어선 남자의 이야기가 되어 세상과의 불가피한 접촉을 요구하는 내면의 갈등들이 조명되기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에 보육교사 발령을 받은 초등학교 동창생인‘사키’와의 연인으로서의 발전과 결혼에 대한 언약, 노쇠한 케이크 숍 사장으로부터 사업 후계의 약속 등 폐쇄된 공간에서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믿음을 갖게 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은 이러한 안주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사토루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연인이지만 사키는 결국 그를 떠난다. 결혼과 아이의 출산 등 예상되는 삶의 현실 앞에서 사토루의 은둔은 실질적인 장벽이 되는 것이다. 또한 케이크 숍의 사부도 기억력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사업을 물려준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지고, 삶의 조언자였던 이웃집 마쓰시마도 자기의 인생을 향해 아파트를 떠난다. 아파트는 노후화하고,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연이은 화재와 부랑자들의 터전으로 쇠락해 간다. 케이크 숍도 마침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형편으로 폐업하게 되고, 유치원 아르바이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고 만다.

 

화재를 피한 빈 집들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들어서고 일본인과 결혼한 엄마를 따라 브라질에서 온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마주하게 되는 단지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할 당위는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상처받은 어린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준 어머니의 죽음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야 하는 결정적 사건이자, 변화의 정점이 된다. 이처럼 소설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신을 가둔 소년의 이야기이며, 동료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소외와 폭력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면을 걸어 잠그고 고통스러워하며, 인간과의 관계를 주저하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사랑, 이별, 성숙, 그리고 죽음이란 삶의 시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동창생들을 세상의 무엇인가로부터, 그 잔인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아파트를 순찰하는 소년의 영상은 깊은 인상이 되어 그의 말 할 수 없는 가슴에 안은 고통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아파트 단지에 남은 유일한 동창생 명단에서 지우며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내 어깨까지도 같이 활짝 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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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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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그것은 노랗고 거대한 색일 것이고, 그 도시는‘서울=불법=섹스클럽’이란 도식을 성립시키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개체이지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 주인공‘제니’의 얘기이다. 그래서 ‘( )’,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인 것이고, 이야기는“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의 긴 목록”이 된다.

 

매음굴에 짐작이 되어 팔려가고 그곳에는 필리핀, 러시아, 한국의 여자들, 그리고 국적불명(조선족)의 나, 제니가 있다. 환각제에 취해 매춘에 끌려 다니고, 고위공무원이 포함된 유한자들의 난교파티에도 포장되어 이 괴물들의 쾌락의 먹이가 되기도 된다. 쾌락과 돈이 서로 환원되는 이유이다. 섹스파티의 파트너였던 고위직 공무원이란 남자는 제니를 계속하여 찾고 그의 가정부로‘임차’되기에 이른다. 사람이 임차된다는 말은 이미 프로, 즉 자본주의 시장에선 일상화 된 표현이다. 인간이 상품, 즉 사물로서 거래되는 것에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개성 없음, 무감각, 무관심의 자인(自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감정 없는 시선은 아무런 열기를 지니지 않고 이 도시의 모습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악다구니를 부리며 목청 높여 발악하는 그 어떤 냉소적 진술들보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통렬함이 있다. 이 고위관료 자식들의 국적 또한 걸작인데,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조차 지니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 한국어가 오히려 서툴고, 미국산 주스, 미국산 토스트, 미국산 베이컨, 미국산 포크, 미국산 접시, 미국식으로 다리를 떨고, 미국산 소설을 읽으며, 영어를 투덜대며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어대는 이들의 천박한 장면은 경멸과 역겨움이 되어 한 폭의 우스꽝스런 춘화 같기만 하다. 푸른 눈의 영국청년이 가정교사로 들락거리고 제니는 이 청년‘리’를 따라나선다. 동류의 인간을 알아보는 본능, 자신의 나라를 도망치듯 벗어나 아시아 나라들을 흘러 다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한국에 머물게 된 또 다른‘( )’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 ‘페스카마 15호’. 자본 시장에서 비켜난 인간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제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두 사람이 포개지듯 눕기에도 옹색한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원 건물, 그리고 여지없이 들어선 교회, 매일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아래 행복해진다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와는 정반대로 이곳 사람들의 삶은 매일 더욱 비참해져만 가는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것은 왜일까? 목사에게 제니와 리, 이 두 이방인이 활용도 높은 수단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몇 푼의 돈 봉투를 쥐어주고 부자 신도들 앞에 세워 그들의 험난했던 과거를 얘기하게 하곤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간증토록 하는 대목에선 실소가 터진다. <주님이 허락하신 성공>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목사. 웃겨!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들, 모두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 보이는 서울의 교회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바로 그 서울 같기만 하다!

 

노동절 행사에는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이론을 떠들고, 부자동네의 미관을 해치는 낡은 페스카마 15호는 늦은 밤, 벽을 무너뜨리며 밀어닥치는 굴삭기와 함께 폐허가 되고, 재개발사업 용역업자들의 방망이 습격으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끌려 다닌다. “지속 가능한 파괴”를 선이라고 하는 도시, 뉴욕도, 도쿄도, 런던도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최전선이 된 도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 그래서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는 제니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약, 섹스, 폭력, 교회, 시장 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한다. 그 욕망의 전율을 쫓느라 미쳐버린 인간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가 보일 턱이 없으며, 하물며 제니와 리 같은 이주 노동자의 존재는 거북하고 불편한 낯선 무엇 이상일 수가 없을 게다. 사회학자인‘이진경’이 그의 책(『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지적한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불온한 것들에 가 닿는다. 거북해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작업, 잔혹하게 착취하다가 제거하고 추방해버리며 그 존재를 부인하려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을 까발리는 것이다.

 

꿈과 환각, 현실의 지대를 오가는 주인공 제니의 역겹기조차 한 얘기가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기에 급급해서는 우리들, 길을 잘 못 들어선 지배질서의 오인을 찾아 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이처럼 공생과 공존, 그 잃어버린 화합의 감각을 살려내는 지독한 처방이라 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전작 장편 『풀이 눕는다』의 ‘나’와 ‘풀’이 삶과 이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면, 이 작품의 제니와 리 커플은 그 제기된 문제들에 도사린 감추어진 치부, 사실들에 존재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여하는 존재론적 명명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사과는 항상 다음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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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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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에너지의 고갈,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지구 생태계의 파괴,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대표하는 유전공학 기술의 남용이 만들어 낸 반인(半人), 이렇듯 암울해진 미래의 인간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회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부자들의 세계와 빈자들의 세계는 차단되어 폐허가 된 쓰레기 더미에서 재생품을 수집하기 위해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들을 착취하고 폭력과 살인, 배신과 기만만이 숨 쉬는 무법 공간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아무런 안전도구도, 생명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없는, 생존의 욕구만 팽배한 현장, 거대한 폐선(廢船)을 해체하여 수입이 될 수 있는 구리, 철, 폐유(廢油) 등을 수집하기 위해 불빛조차 없는 암흑의 폐선 바닥과 좁은 덕트 속에서 쉴 새 없이 목숨을 건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상상의 미래도, 과장된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바로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어린 소년소녀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끔찍한 선박해체 작업의 현장은 즐비하기에 소설 속 소년과 소녀를 보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되는 세계이고, 중노동일지언정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이 거친 일마저도 얻기 위해 비굴함과 폭력에 시달려야 하고, 노동력을 상실하면 장기를 비롯한 신체를 팔아야 하고 이마저도 없어지면 죽음만이 기다리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감독자가 되고 쓰레기 수거권리를 가지는 자가 되어 노동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쥐기 위해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가치 있는 물건을 찾는 것은 이상이자 꿈이 된다. 선박 해체작업의 경량(輕量)팀 일원인 소년‘네일러’는 우연히 팀의 조장인 연상의 소녀인‘피마’와 해안 근처의 섬을 탐색하던 중 폭풍우에 전복된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쾌속선을 발견하고,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엄청난 귀중품들과 유일한 생존자인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네일러와 피마에게 있어 이것은 중노동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의미한다. 소녀는 그들의 세계에 돌려주고 보상을 받을 수도, 아니면 신체라는 물질로서 팔수도 있는 대상이며, 그녀를 장식하고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등 귀금속만으로도 하나의 작업권리를 살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내 생존의 수단으로서 한 인간 생명의 사생결단권을 갖게 되었을 경우 내 이익과 타자의 생명을 교환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신들의 신체를 착취하고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위해 자신에게 온 행운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조차 여의치 않게 되는데, 폭력과 살인, 타자의 생명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갖지 않는 잔혹한 인물, 바로 네일러의 아버지가 이끄는 일군의 무리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게 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살인, 끔찍한 이 세계에도 사랑과 보호와 연민의 유대는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은 부자들, 스웽크(swank)인 소녀와 탈출을 감행한다.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세계, 즉 부자들의 세계 또한 그치지 않는 탐욕으로 얼룩진 세계임을 드러낸다. 불법과 야만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녀의 생명을 노리는 세력들로 인해 네일러의 꿈과 희망, 소녀의 귀환이라는 여정에는 끊임없이 위험이 놓이고 용기와 도전을 요구한다.


성취를 향한 길은 결코 평탄치 않다. 때론 예기치 않은 존재로부터의 도움이 있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를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절대 절명의 선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과감한 도전의 용기이며, 폭풍우 몰아치는 거칠고 거대한 파도의 비탈과 협곡을 곤두박질치는 사투를 건 승부의 세계이기도 하다. 소녀 니타와 소년 네일러는 그들 서로에게 ‘러키 걸’, ‘러키 보이’라는 행운으로 불리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행운(lucky)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위해서는 이처럼 힘겨운 풍랑과 마주하는 태도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진부하고 낭만적인 교훈이라고, 선박해체작업에 내몰린 어린 소년소녀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찾아야 할 꿈조차 꿀 수 없고, 도전해야할 희망조차 없다면, 우린 무엇을 말 할 수 있겠는가?


“교만과 죽음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우리 세계가 보이는 행태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오만하고 자기 과신에 젖어있다. 물질은 정신을 압도하고, 과학은 자연의 본성을 통치하려한다. 아마 우린 죽음, 자신들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난자에 개, 호랑이, 하이에나의 유전자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혼합생명체인 반인, 가난한 자들의 노동착취와 신체를 거래대상으로 하는 파텔, 로스앤칼슨 등 거대기업들의 부도덕성, 해수면 아래로 잠겨버린 한때 영화로 불리던 도시의 음울함 등은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들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세대들, 지금의 어린 소녀 소년들에게 지향해야 할 인간의 진정한 가치,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생명의 이야기가 된다. 생명, 인간의 존엄성, 그 고귀한 가치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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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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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 소설은 제법 도전적이다. 타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서툴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따라 올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에 등장하는‘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의 일화를 통해 “세상에는 사회와 인민 이외의 무언가의 가치가 존재함”을 말하려 했듯이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 보지 않고 외면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 즉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존재하는 것들을 진정 보려면 말이다.

 

금지된 그림을 인민에게 드러내는 기획, 삶의 방랑자이자 시간의 방랑자인 주인공‘경희’처럼“문제 아닌 모든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고요히 번뜩이는 적막한 별들처럼 생각할 수”있도록 해서, 우리와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을 목격하는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간의 질적 한계에 다다르면” 이미 모든 것들, 산, 강, 도시...들은 더 이상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도시‘우르’에서부터 최후의 도시일 수 있는 베를린, 서울...에서 ‘존재의 중첩’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존재란 어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 혹은 그 소산임의 증거들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도시’라는 현대 사회가 발산하는 의미들, 그것에 포획되어 방황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정이 된다. 도시의 속성, 도시의 자연이 된 익숙한 문화표지들에 대한 단상, 직업과 화폐와 정주(定住)의 주소와 같은 도시의 요소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방랑적 삶의 이야기들이 기억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색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인 우르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도시사이의 그 엄청난 양태적 유사에서 시공의 엷음, 존재적 예시를 보게 한다.

그런데, 방랑자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방이나 집을 회원들끼리 공유하는‘카라코룸’에 가입하면 전 세계에 동시적인 잠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처럼 들려주는 얘기에서 13세기 대제국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몰려든‘세계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옛 영화(榮華)와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 “어메리카나이즈드 코리아”와 같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문명적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사대주의는 카라코룸을 파괴한 러시아와 몽고인들의 어리석음에 가닿고, 이것은 환경주의 게릴라가 자신들의 생활이고 그들 자체여야 했던 사람들의 일화를 빌어 “추상적인 믿음을 위해서 피부색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를 우회한다.

설혹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기계화된 프롤레타리아 종족으로 전락했음을 인지했을지라도 우리가 “정체불명의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실존하지 않는 직업,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직업의 경희라는 여성의 도시 여행에서 마주하는 독일어 선생,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인도인 반치, 익명의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들, 그리고 경희의 실체는 왠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어서 정말 “수많은 뼈와 돌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저 깊숙한 시원의 어느 진실들을 비로소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삶, 죽음, 그 순환의 위대함, 시간을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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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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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성에 대한 멋진 한방이라고 할까? 페렉이 천착하는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의 허위, 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욕망의 진실을 거대한 탐조등 불빛 아래 훤하게 비추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전시회의 흥행역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알량한 미디어 문화단신의 밋밋한 작품소개 정도로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필요한 것은 황금! 전시회 돈줄의 영향력, 부자들, 예술계, 그리고 무지한 대중의 욕망을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획! 점잖게, 아주 지적으로, 미술 작품에 대한 순수한 해설과 비평의 표피를 쓰고.

 

전시회 후원자이자 미술 애호가인 거대 양조업자 ‘헤르만 라프케’의 초상화를 그린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란 작품이 소개 된다. 그 작은 방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에는 유럽과 미국의 모든 유파와 장르를 아우르는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그림 속 작품들의 하나에는 바로 이 초상화가 다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다시 재현되고 있는, ‘복제’ 속에 제2복제, 제3복제...가 거울 같은 방식으로 모사되어 있는 독특한 회화라고 한 미술 비평가가 썼다.

 

이 미술작품 해설이 주목을 끈 것은 대부호인 라프케가 유럽을 오가며 수집한 일명‘라프케 컬렉션’에 포함된 걸작들이 모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재현된 그림을 비교하느라 몰려드는 인파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밀려드는 인파로 언론의 집중조명은 물론이고, 마침 헤르만 라프케가 사망하면서 라프케 컬렉션 작품들의 향방이 물질적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욕망들의 소유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복제’란 어휘는‘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예술성의 상실, 상업화의 폐해를 떠올리게 하면서 소위 ‘복제와 재현’의 경계에 대한 진부한 미학적 비평들을 마치 지성의 전유물인양 읊어대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복제의 복제를 반사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볼거리로 제공하도록 운명 지어진 ‘창조자’라는 존재에 대한 조소와 냉소, 향수와 환멸이 서린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계에 몰린, 좌절한“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너무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허위의 지성들, 예술의 모호함, 아니 예술계의 허구성을 생각게 한다. 그리곤 지루하게 반복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회화들에 시시콜콜한 작품 해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실 소설의 거의 절반의 분량에 이르는 이 수작(酬酌)이란 것이 페렉의 다분히 의도적인, 본질을 얼마나 호도할 수 있는지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윽고 진행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경매에 따라, 대상 작품들의 설명을 위한 미술평론가 ‘레스터 노박’의 “하인리히 퀴르츠‘에 대한 평가는 진실의 암시와 사물이 된 미술작품의 실제 폭로라는 이중의 멋진 작업을 소화한다.

 

퀴르츠의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돈벌이를 위해 복제를 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예술가의 자유’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무관”하며,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유산을 화가에게 강요하는 역사비평적 관점도 없어 보인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차이들은 특정한 통합과정 혹은 소유과정을 지시한다.”는 말을 통해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읽어내는 것이고, 급기야는 “타자를 향한 투사나 프로메테우스적 ‘도둑질’을 가리킨다.”면서 이미 사기와 기만이 게재되어 있음을 해독해 낸다.

 

오늘의 사회에서 진정한 미술 작품이란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에서 거래되는 호사가들의 과시와 욕망의 종물일까? 예술이 규정할 수 있는 한계, 순수한 정신적 체계의 논리적 종결과 마침내 조우하게 되면 사실 침묵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닐까? 페렉이 너절하게 깔아놓은 작품 해설을 넋 놓고 따라가다 순간 쾅하고 반전을 당하게 되는데, 슬며시 미소가 도는 것은 정말 제대로다! 라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라는 이 작품의 정의야말로 최고의 극찬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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