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계에 이름이 같은 시인과 소설가 두 분이 계시다보니 독자들의 혼동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한 분은 2006현대시로 등단한 1975년생의 '시인 정한아' 이고, 또 한 분은 1982년생이신 '소설가 정한아' 이다.

또한 두 분 모두 여성이신데, 이제 혼란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인 정한아 ]

 

시인 정한아 :

 1975년생 울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현대시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 울프 노트가 있다. ‘작란동인이다.

    

 

    

 

 

 

 

 

 

 

 

 

 

 

 

 

 

 

[ 소설가 정한아 ]

 

 

소설가 정한아 :

1982년생,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4회 대산대학문학상, 12회 문학동네작가상, 2016년 김용익소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달의 바다, 리틀 시카고, 친밀한 이방인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봄 물결로 그녀를 온통 치장하고?

누가 경쾌하게 초록빛 숲 사이로 지나가느뇨.

그걸 한층 즐겁게 하려고?

 

누가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가벼운 발걸음 알아채는 길로?

누가 경쾌한 햇빛 속으로 지나가느뇨.

그토록 순결한 용모를 하고?

 

수풀의 길들이

포근하고 금빛 불로 온통 번쩍이니...

(이하 생략)

<실내악> 제 VIII수 中에서

 

 

, 하나 재밌는 얘기로 시작해야겠다. 그의 시집 실내악의 제목이 정해진 에피소드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한 여인에게 실내악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읊어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인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방의 칸막이 뒤에 있던 요기(尿器)에서 소리가 나더란다. 아이쿠! 시집 제목을 실내악이라하자. 라고 했다나?....ㅋㅋ

 

 

 

제임스 조이스피네간의 경야를 읽기에 앞서 일종의 워밍업을 시작했다. 그의 시집인 실내악 (Chamber Music)부터 중편 시()지아코모 조이스, 그리고 '꼼꼼한 비속성의 문체라 불리는 더블린 사람들,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을 낳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거쳐 율리시즈의 몇 장()을 읽는 사전 학습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상호 문체와 주제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독서 행위에서 이렇게 사전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사실 내 딴에는 야심찬 도전인데, 수많은 외래어들의 중첩과 언어유희, 텍스트의 복잡성 등 피네간의 경야를 읽어 내겠다는 소심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영문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전혀 지니지 않은 내겐 올 한 해를 꼬박 넘기는 지리한 독서 행위가 될 것 같다.

 

이렇게 사전적 독서 중,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는데, 1914년 쓰여진 조이스의 자전적 경험이 배어있는 지아코모 조이스(Giacomo Joyce)라는 산문시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대 김종건 교수가 편역한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조이스의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 친근하게 읽어 낼 수 있다는 반가움이랄 수 있다.

 

자신에게 영어과외를 받던 학생에 대한 연정을 그리려 했던 듯 한 작품이다. 영문학사에 있어서도 산문시의 새로운 창조로 문학적 혁신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탈고하고 율리시즈를 쓰기 시작할 무렵인 그의 성숙기 산물이어서 아주 잘 익은 과일을 먹는 느낌을 준다.

 

미지의 여학생을 향한 조이스의 에로틱한 감정의 관찰과 표현이 단연 압권이다. 아래의 시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누구? 짙고 향기 어린 모피에 둘러싸인 창백한 얼굴, 그녀의 동작이 수줍고 신경질 적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까지 미세한 관찰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랑에 빠진 누군가의...., 그러니 외국어가 튀어나오는 목소리는 유식함으로 여겨지고, 작은 깜빡임조차 그의 시선을 장악하곤 떨림으로 어쩔 줄 모르게 한다.

 

맥 빠진 비엔나식 이태리어로 가르랑 거린다: 정말 유식하지! 긴 눈꺼풀이 깜박이며 치뜬다: 따끔한 바늘 끝이 벨벳 홍채 속을 찌르며 전율한다.”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자책하는, 대상의 순결과 무심한 아름다움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

그렇게 그녀는 단테 곁에 순진한 자만심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와 폭력에 결백한 채, 첸치의 딸, 비아트리체는 그녀의 죽음을 향해:”

 

나의 수치가 그 위에 영원히 이글거릴, 불결하고 아름다운, 책장들을 매만졌다. 부드럽고, 차갑고, 순결한 손가락들, 저들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결구: 나를 사랑하라. 나의 우산을 사랑하라.”

-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글들김종건 편역(어문학사, 2012.10) 에서

  

이제 나의 조국의 도덕사이자 나의 사랑하는 불결한 더블린(Dear Dirty Dublin)"15작품의 독서로 생각을 옮겨야겠다. 가끔은 예기치 않은 문학적 수확을 하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8-05-09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를 잘 모르지만 사놓고 미루던 ‘더블린 사람들‘을 어제야 다시 읽었어요. 사람들을 포착한 모양이 보통 아니라고 느꼈어요. 촘촘하고 예리한 풍속화를 보는 듯. 일단 첫인상이 그랬는데요. 제겐 아직 낯설어요.

비의식 2018-05-09 19:44   좋아요 0 | URL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이렇게 말했다네요. 중하위 계층(아마 서민층을 말한 듯 해요) 더블린 사람들의 생활에 가해지는 정치,문화,경제적 힘의 압박으로 인한 고통의 객관적, 심리적 사실의 스케치라고요. 풍속화를 본듯한 인상이란 말씀은 이러한 이유일거예요. 댓글 고맙습니다. YoonSoo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가 클럽의 무대에서 쉰일곱 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두 시간 가까이 주절거린다면 관객인 나는 이내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의 작품에서 영문학 교수인 데블런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고 나서는 재능이란 아무리 색다르더라도 지루하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듯이 그 지리멸렬한 타인의 삶을 듣고 있기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쳐 모두들 안녕히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되었다. 40 여 년 전 1년 남짓 우정을 나누었던 옛 친구에게 자신의 쇼에 와주기를 부탁하던 하나의 문장,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 이 말이 울려대는 어떤 정직하고 여실(如實)한 느낌에 울컥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봐주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자신의 정말의 인생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는 부탁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쾅 하고 심장에 박혀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의 맞춤처럼 네타니아 클럽무대의 쇼에서 펼쳐지는 비극으로서의 삶과 뒤틀린 삶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마치 위기 극복의 수단처럼 발화되는 농담의 향연은 그야말로 농축된 삶의 한 시사처럼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삶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옛 친구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있는 전직 지방판사인 아비샤이 라자르의 모습 - “사실 너 같은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만만한 대상이지. ?” - 과 같이 남의 인격을 범주화 해 버리고 인생을 단 번에 재단해 내는 태도가 지금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코미디언 도브 그린스테인’(도발레 G.)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옛 친구의 부탁에 이러한 대응을 하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아비샤이가 더 이상 개그 쇼가 아닌 그냥 살아있자는 기획에 불과했던 한 인간의 실패한 삶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갈등하는 객석의 반응에 동화되고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 과정은 마치 독자인 나의 소설 속 행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외면하지 않는, 감히 진짜배기 삶을 응시하기 위해.

 

동년배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소년 도발레는 땅에 손을 집고 거꾸로 돌아다닌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물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의 모습에 보내는 비열한 시선들을 자신의 우스꽝스런 행위로 차단하려했던 의도이다. 그럼에도 물구나무로 걷는 행동이 아버지의 채찍에 의해 중단되어야 했던 고통의 이야기를 발설 할 때, 아비샤이의 기억은 내향적 소년이었던 자신에게 활기와 의욕을 꺼내주었던 행복과 웃음으로 커지는 눈을 지닌 도발레로 이어진다. 유쾌함과 미소로 자기 고통을 보여주지 않았던 도발레를.

 

또한 군사훈련을 위해 강제된 캠핑에서 체구가 작은 도발레를 가방에 넣어 던지고 패대기치며 비웃어대고 폭력을 가하는 동년배들의 행위를 외면하고, 하사관에 불려 가방을 메고 홀로 캠프장을 떠나게 되는 도발레에게 끝내 다가가지 않았던 아비샤이는 소녀 리오라에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모든 감정이 자신의 생각을 무디게 한 것뿐이라고 당시의 자신을 합리화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기만인 것은 캠핑이 끝나고 부모를 설득하여 도발레와 같이 하던 수학 과외를 중단하는 행위에 있다. 이 기만의 행위는 친구에 대한 비탄과 참혹한 상실을 털어내기 위한 자기 보호였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처럼 고통이고 외면하고픈 충동을 불러오지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유혹 또한 병행한다. “마음의 아픔, 양심의 고통, 악의 사절들, 미래의 악몽을 꾸고 전전반측하는 광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도 이와 같이 떨리기 시작한다. 객석을 떠나는 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남은 자가 옳은 것인가? 대체 어떤 태도가 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 갈등하게 한다. 코미디 극이니 그냥 웃어넘기면되는 것인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거라는 인생의 이야기”, 그의 고통의 근원을 마지막까지 따라가기 위해 인내심을 쥐어 짜낸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불편한 무엇이 저항하게 한다. 정착촌에 사람들을 내몰고,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군사 훈련을 강제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멸시하며,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회와 자신은 마치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신체와 멀리 팔을 뻗쳐 손끝에 자신의 대변 샘플 통을 쥐고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도발레의 개그가 당신들도 공범이야.’라는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허공에 다시 레프트 훅을 날린다.”

 

캠프를 떠나 장례식에 맞추어 가기위해 군용차에 실려 집으로 향하는 소년 도발레의 회상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었음이 차 유리에 머리를 부딪는 드----! 이며, 드르르르르! 뇌가 휘저어져 모든 생각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는 괴로움으로 들려진다. 그는 도착 할 때까지 나는 인간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토로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을 직면한 소년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보자 물구나무를 서서 도주하는 모습은 소박한 영혼조차 지니기가 불가능했던 삶을 마주보게 한다.

 

소설은 이처럼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지배했던 모욕과 폭력의 비극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유대인의 정신적 외상의 역사, 이스라엘 중부도시 네타니아로 상징되는 범죄와 불의의 공간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녹여내어 그냥 살아있자는 것조차 얼마나 놀라운것이었는지를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집요하게 길어낸다. 어쩌면 이야기의 기록자가 된 아비샤이가 이 장소에서 자신을 빼내기를”, 혹은 자기 기억의 소환을 거부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진실에 가 닿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자기 삶의 이야기인 병든 타마라와의 추억이라는 내면에 침잠하는 아비샤이의 모습은 나의, 우리네의 한계를 보는 것 만 같다.

 

반면에 쇼의 시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발레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어린 시절 그를 기억하는 피츠라는 여성의 눈물과 이야기의 부정과 수긍과 얼굴을 가리며 몰입하는 모습은 타인의 이야기, 더구나 그것이 오직 견딤, 존재의 이유만을 갖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감히 바로 볼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사람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넓혀나가는, 타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한 것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트로폴리스 - 지도로 본 도시의 역사
제러미 블랙 지음, 장상훈 옮김 / 산처럼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굶주린 뇌가 황홀해지는 진귀한 사료들 - 도시와 지도 등 - 과 높은 인문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가히 수준높은 도시역사의 노작(勞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냉소적이지만 유쾌 발랄하고 담담하게 무심히 뱉어내는 진술은 역사적 진실에 가닿는다. 시종일관 킥킥대느라 배가 아프고 눈물이 다 찔끔 날 지경이지만 이 소설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만큼 예외 없이 진지한 사유가 넘쳐흐른다.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라는 부제가 작가의 겸손한 표현에 불과하며, 단 한 페이지의 읽기만으로도 그 농축된 박학(博學)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설은 20세기 인간 정신이 배설해 놓은 사상과 사건과 물질들이 어떻게 다시금 인간 정신에 되먹임 되어 왔는지를 수백 장의 스냅사진이 초스피드로 눈앞을 지나가는 현기증나는 파노라마처럼 들이댄다. 21세기 오늘, 우리들을 만들어 낸, 우리들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현재를 이해케 한다. 그것이 때로는 한 없이 유치한 빈정거림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해박함의 진지함 속에서 화려한 재치의 문장으로 지성을 자극하기에 170쪽에 불과한 작품이 1000여 쪽을 읽어낸 것처럼 녹초를 만든다. 지금도 다문 입에서 김빠지는 풋, 풋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20세기 시작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평부터 시작되는데,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혹은 사실상 산업혁명과 함께였다느니,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라고 말한다며, “몇몇은 자기들이 더 빨리 발달했으므로 원숭이 혈통이 남들보다 덜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1차 대전 전사자의 시체 길이가 15508Km에 이르는 야만성과 물질 자본주의와 인종 구별짓기(우생학)가 바로 20세기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현상의 토대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에 착수한다.

 

그래서 작가와 시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1916년 다다이즘을 발명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미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며, 당대의 문화현상을 소개하고, “사람의 판단력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결과물이며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형이상학은 헛소리라고 선언했던 실증주의 철학을, “이제 여자들은 쥐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선입견에 맞춰주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라며 피임기구의 발명이 여성 해방의 기폭물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더듬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말하고 ‘~왜냐하면이라고 이유를 기술하는 단순한 문장의 구조가 그침 없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이유의 설명이자 작가의 주석이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진수를 이룬다. 여기 이 소설 주제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역사와 기억의 관계에 대한 한 문장 단원을 발췌 인용해 본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기억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기억은 역사적 영역에서 심리적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기억이 마련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기억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의 내면화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어떤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무슨 빚을 갚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holocaust)나 쇼아(shoah)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 엄밀히 말해 인종 학살이 아니라 인종 학살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하며

이 특수성을 표현할 만한 다른 이름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P 144 에서)

 

이것은 역사가 정체성의 시대를 마감하고 인식론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주장하는 일종의 선언적 문장이며,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표현 불가능한 잔혹성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기억이라는 인식의 지평으로 넘어왔을 때 그것이 과연 인간 개체 혹은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의 본성만큼은 우릴 깨어있게 해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비사실성이라는 내재적 성질과 자의적 조작성이야말로 20세기의 정신임을 비틀어 까발리는 다음의 문장은 유치하지만 진실의 민낯에 주춤거리게도 한다.

 

한편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개인의 기억은 어차피 현실과 상응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을 조작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방어기제로

사람들이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P 112 에서)

 

소설은 20세기의 시시콜콜한 과학적, 산업적 발명품과 발견들,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노선과 그 갈등들, 대중 매체와 인터넷 등 소통의 수단이 지닌 문명적 현상들과 문제성의 비판들, 그리고 문학, 심리학, 철학 등 인간 정신의 표현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거대한 인간 극장의 농축된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20세기 인간사에 대한 기념비적 헌사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혹 오늘의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쾌락주의와 무수한 양의 정보로 인한 망각과 어떤 반응이나 저항의지도 촉발시키지 않으며 그 대신 피로와 체념을 불러일으켜 기억의 소멸에 일조한다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호소하는 기념비의 축조를 멈 출 수는 없을 것일 게다. 역사는 살아있는 과거를 시간 속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정당성을 없애버리지만 기념비는 기억에 호소하니 말이다. 웃기지만 그 진지함을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통찰력과 감히 견준다면 과장이 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