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찬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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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실례되는 표현일 수 있겠지만 이스마일 카다레(), 즉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된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하고 싶다. 오랜 관습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오는 신화적 이야기가 발산하는 어떤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 그리고 급작스럽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유발하는, 이를테면 무구한 표정 뒤에 해살을 떨어대는 악마적 심사가 결합하여 묘한 양가적 감정을 자극하며 독자의 정신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환기시키고 주목하게 하여 그 진실을 사유케 하는 데 최적화된 결합인 것 같다. 그래서 주제가 뿜어대는 진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고의적인 오독을 하려한다. 번역된 제목에서와 같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만찬(Le diner)’에서 비롯된 역사적 기록과 경험 및 증언과 같은 기억이 서로 충돌하여 빚어내는, 우리네의 표현으로 하자면 과거사()에 대한 복잡다단한 기억 전쟁의 작품으로.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가 알바니아는 20세기 내내 주변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의해 복속과 해방, 분열과 연합이 반복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사와 유사한 민족적 고통을 안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이탈리아에 병합되어 억압된 삶으로 숨을 죽이던 알바니아 남부도시 지로카스라 시()에 해방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독일 기갑여단이 진입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된다.

 

보수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진영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들에게 독일군의 진입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자중지란의 상태에 빠져든다. 기갑여단의 척후병이 시에 진입할 때 누군가 독일군을 저격하고, 성난 전차의 포신이 일제히 도시를 향했을 때 창 밖에 흰색의 항복기가 펄럭인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 이들이 한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둠이 내리고 의문이 더 집요해지는 시간이 왔다. 누가 그 흰 천을 펼쳤을까?

독일 척후병에게 총을 쏜 사람은 누굴까? - P 28 에서

 

이어서 으레 인간이 하는 행동을 서술한다. “후자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 밝혀져 어떤 이들의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흰 천을 올린 사람의 정체는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그리고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순백의 항복 신호를 올린 게 사람인지, 유령인지... 9월의 바람이었으니 찾지 못할 

것이다....(中略)...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정해진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 P 28 에서

 

9월의 바람이란다. 조물주의 실행이니 다수가 짊어져야 할 비굴함, 가책은 증발해 버리고 망각의 나락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유머의 문장은 조롱이라는 악마의 모습으로 인간의 저열성에 비수를 꽂는다. 이제 이야기의 축이 되는 역사, 소위 과거사의 기억을 위한 다분히 상징적이며 현실적 사건의 중심인물인 저명한 외과의사 대()구라메토와 그의 환영 같기만 한 소()구라메토가 이 역사적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마주하여야만 했던 일화로 옮겨간다.

 

정치인들이 고작 진영 싸움에 매몰되던 시간, 무작위로 잡아들인 인질들이 시청광장에 세워지고, 독일군 기갑여단장 프리츠 폰 슈바베대령은 뮌헨에서의 대학 동창이자 형제보다 나은 친구였던 대구라메토를 불러 알바니아의 손님맞이 법()베사(신의)’를 들먹이며 저격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또한 동태(同態)복수법인피는 피로 갚는다.’라는 관습법 카눈으로 위협한다. 구라메토는 베사에 의해 친구인 슈바베에게 만찬을 제의하고, 죽음의 기다림이 드리운 불결한 광장의 기운과 달리 이윽고 대()구라메토 박사의 집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지며 샴페인을 곁들인 만찬이 벌어진다.

 

슈바베는 구라메토에게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이름을 추궁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별명뿐임이라 반론한다. 그러나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집에 귀가하게 되고, 이 역사적 만찬은 치욕의 만찬부활의 만찬이라는 양극단의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잊혀지는 듯, 알바니아는 또 다른 정세의 변화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독일의 후퇴와 러시아의 우위는 자동으로 세력의 상황이 역전된다. 새로운 체제, 새로운 시대, 재건, ... 소설은 이 시기를 제로(Zero)밑의 시간, ()의 시간이라 부른다. 동요가 항구적으로 쉼 없이 따라다니고 집회가 끝없이 이어지는, 만세와 타도가 번갈아 외쳐지며 살아야 할 것만큼이나 죽어야 할 것이 있다고, 피의 회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

 

검은 샤니샤 동굴이여

너를 보니 이성이 달아나는 구나“     - P 148 에서

 

가장 깊고 무시무시한, 악명 높은 고문으로 전설이 된, 그러나 오랜 시간 폐쇄되어 있던 감옥이 구라메토의 심문을 위해, 그 동굴의 문이 열린다.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망에 불타는 젊은 판사 아리안 치우는 구라메토의 그 누구도 넘겨볼 수 없는 권위, 그 경외감에 대한 시기심으로 그의 심문에 뛰어든다. 심문 담당자로 선임되는 날, 그는 행복감이 달뜬 도취감과 뒤섞였고, 도취감은 묘하게도 공격성과 뒤섞였다.”고 복수의 갈증을 피력한다. 비겁함, 배신의 의사가 아니라 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행한 일이라고 백기를 치부하던 대다수의 방관자는 이 지점에서도 그 방관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안전과 영달에 연연할 뿐.

 

이제 공식 문서기록과 사건의 직접 경험인기억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공산당 지도자 청산계획이라는 전 지구 차원의 암살 계획 음모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만찬에서 슈바베와 나눈 대화의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을 종용 당한다. 고문과 협박, 회유가 반복되는 참혹한 시간이 흐른다. 사실 첩자에 의해 은밀히 작성된 보관 기록은 물론 이 심문 내용에서 유죄를 확정지을 증거란 것은 없다. 심문의 지원을 위해 독일에서 파견된 판사가 젊은 심문관에게 내뱉는 이 재판의 성격에 대한 의지표명이 어쩌면 진실에 가 닿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 한가운데, 그 무()속에 우리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그들의 수수께끼도 그들의 진실도 우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 P 197에서

 

이 회색지대에 대한 발설은 역사와 허구,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역사 규명의 곤란에 대한 어떤 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일례로 역사의 기록물이라는 것이 거짓을 어떻게 진실로 둔갑시키는가는 난징 대학살의 살육자인 일본군에 중국 어린아이와 미소를 짓고 놀고 있는 병사의 사진 기록물을 통해 선의자이며 외려 피해자라는 터무니없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왜곡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해자, 방관자가 희생자로 둔갑하여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부조리의 역사를, 그리고 기억에는 모호함을 덧씌워 그 사실능력을 지워버린다. 강제 동원된 종군위안부를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에는 선택과 배제라는 기록의 태생적 부정직함이 자리하고 있다. 산자가 죽은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려는 기억이라는 그 진실을 어둠의 지대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무엇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리곤 망각이라는 비열한 나락으로.

 

여기에는 이와 같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의 논쟁 외에 또 다른 물음을 제기케 한다. 심문을 담당하는 세력과 심문을 받는 자 중에서 누가 옳으냐는 것이다. 구라메토가 국가를 배반했나? 모든 인간들이 집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방관하던 그 시간에 그는 시청광장의 인질이 살육되는 것을 막지 않았나? 독일에 친구를 가진 것과 나치의 협력은 동일 한 것인가? 독일군에 저격을 하고 숨어든 것만이 애국인 것인가? 무수한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심문관 아리안 치우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한 행동으로 국가에 봉사한다고 믿는 거요.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고. 모두가 옳을 수는 없소. ...그러니 누가 옳은지 밝혀봅시다.....”, 권력과 영예의 굶주림이 야기하는 이 광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인간의 역사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맹랑한 요인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구라메토는 이 야심찬 젊은이의 욕망에 실려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버려진다. 훗날 그의 시신을 회수 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무위가 되어버리는, 당시의 과정을 복기할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기억 속에만 존재 할 뿐이다. 기록이라는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있었던 것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기억은 역사의 증명으로 소용이 없는 것인가? 소설은 이 사실에 대해 아마도 죽은 사람이 그 세계의 법과 신호를 가져왔던 것이라고, 그 때문에 온갖 혼란과 오해가 생겨난 것이라고”, 사자(死者)의 초대로 빚어진 그들 신화의 한 이야기를 빌려 영원한 회색지대에 묻어버린다. 그러나 흐릿한 어둠의 지대로 진실을 묻어버리자는 이 말이 내겐 역사적 무능에 빠진 이들을 향한 조롱과 추궁의 말처럼 들린다. 작가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인간 심연의 무엇을 건드려 수긍과 공감의 의지로 내몰아 두려움과 경계, 폭소와 환희를 번갈아가며 인간 본성의 본질, 역사의 모호한 지대에 은폐된 진실의 이면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솜씨는 과연 독보적임에 손을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역사의 사실에 대해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시선을 들이미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그 복잡다단한 기억전쟁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또 하나의 문학적 정수라 한다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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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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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Esse)에는 아홉 개의 챕터, 82편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작은 나무와 숲이라는 수필이다. 아마 일군의 나무들에 에워싸인 채 나 홀로 우뚝 서있는 숲속 빈터의 나무를 말하기 위해, 어쩌면 자신의 삶을 이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숲을 견디지 못한다.” 고 쓴다.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고이스트였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두 개의 챕터, 몸과 재산 1, 몸과 재산 2계절과 성자들 1과 함께 이 에세이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챕터에 해당한다. 그 어느 챕터보다 입담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미셸 투르니에가식을 싹 갈아엎어 버린 노인의 육화된 지식의 산물, 오랜 세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축적한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난 글들로 짜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무릎에서 머리털, 격세유전으로 이어지는 몸과 재산 1챕터의 글들은 물 흐르듯 유연한 문장 속에서 실물로서의 몸의 부분을 신화와 예술과 종교와 철학적 담론으로 이끌며 소박한 단상을 풀어놓는 솜씨는 아주 그만이다.

 

무릎은 신체의 구동축으로서 노력과 탄력과 충동이 발원하는 핵심 관절 부위다.”

- P 63

 


그래서 무릎은 인간을 복속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제니플렉시옹(genuflexion)’, 예배와 복종의 표시로서 무릎 꿇기에서부터, 가장 빈번히 장식적으로 상처받는 기관으로서의 피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글의 마지막은 경박스러움으로 맺는다. 해마다 제기되는 디자이너들의 핵심적 문제: 여자들의 옷을 무릎위로 끌어 올릴 것인가 무릎 아래로 끌어 내릴 것인가”, 능글맞은 노인네의 해학이라니...,

 

소금과 설탕은 무미건조한 물질의 속성이고 조미료는 우유성(偶有性)’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우유성들, 즉 희귀하고 값이 비싸지만 무용한 부()로 

이루어져 . 문명은 필요성이고 문화는 사치다.” - P 96

 


무용하지만 그 장식적이고 쾌락적 즐거움에 바쳐지는 것이 또한 인생이 아닐는지...

어쨌든 이 발칙하며 전복적인 '미셸 투르니에 ' 의 단상을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따라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이런 자극을 느끼게 된다. 이 세계를 나는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가, 그저 익숙한 습관화된 보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말로 애를 써 본 적이 있는 것인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래서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았던 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다른 세계와 시선 또한 있음을.

 

이를테면 이런 질문부터 가능할 것 같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리면 밤이 되는 것인가?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물은 항상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내려 나가는 것인가?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해보면, 진지한 일이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쪽의 전유물인가? (아이슬란드의 1월과 6월에는 자정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북반구와 남반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내린다, 적도에 있는 가봉은 남북반구에 걸쳐있다. 북반구에 있는 개수대는 시계방향으로 남반구에 있는 화장실의 변기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흐른다/외려 종속 또는 소수자, 약자, 피지배자의 전유물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의 복식을 보라!)

 

또는 이런 종류의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L' Amant)15살 주인공 소녀가 뒤라스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15년 일찍 나타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빛을 지고 다니는 자'라는 천사 루시퍼(Lucifer)가 왜 '암흑의 왕자', 사탄이 되었는지, 동일한 햇볕아래 피부를 노출했는데 누구는 우아한 그을림이고 누구는 시커멓게 탔다고 하는 것인지? (소설 연인(L' Amant)에 대한 기존 주류의 해석이 무너져 내린다.)


 

"이 동화(백설공주의 반면 거울)가 예시해 주는 악성전이는 가장 거룩한 책들과 가장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행스럽게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런 곳에서. 내게는 그 어떤 찌푸린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 P 310 에서


자신의 관념세계 중 하나인 '악성변이(惡性變異, inversion maligne)', 즉 선악의 극단적인 양면적 변화의 잠재태를 얘기하는 투르니에의 세상보기 시선이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때론 동화와 신화 속 인물을 빌리고, 걸출한 문호들의 소설과 시를 차용하며 멋지게 오래된 우리네 관습적 관점을 전복시키며 그 밑바닥과 뒷면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결코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빛나는 찬미의 긍정으로. 이러하니 그의 문장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세계의 공고한 몽매함을 돌파하려는 자의 시선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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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본을 읽자 북클럽 자본 시리즈 1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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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제 1권을 철학자 고병권이 함께 읽어 나가며 쓴 12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의 제 1권이다. "걸어 들어가는 건지 끌려들어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독서라 말했듯이 "주체 변형의 위험과 매력이 공존하는" 독서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끌림의 저술이라 하겠다자본 1권 1장을 펼치면 알게 되는 지리한 개념의 설명에 압도되어 이내 본론에 들어가는 것을 저어했던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 친절하고도 깊은 해석과 해설이 진정 반가운 비처럼 느껴질 터이다이 책은 그런 책이다.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 가치 증식과 축적 목적의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역사적개념적 정의에서부터자본의 부제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작으로 추출의 결과가 아니라 원리자체를 겨냥한 마르크스의 앎의 의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비판 대상으로서의 당파성을 그 한계 너머까지 파고드는 인류사적 걸작을 오늘 우리네 사회의 위상에 맞춰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중요한 길목이 있다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학문)의 전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이 학문을 통해 나타내려는 욕망과 의지는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과정이 곧 비판이다.

 

피와 불의 문자로 기록된 연대기라 표현된 자본주의 논리가 자리 잡는 역사의 여정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대체 어떤 시야를 지닌 렌즈인가 하는 그 시야적 도구의 의지를 밝혀낸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통해 하나의 개념이 내재하고 있는 욕망을 밝혀내는 설명은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온다아마 정치경제학(어쩌면 오늘 우리네 주류 경제학이라 해도 무방할 듯)이 계급의 사적 이익을 위한 제한된 시야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잡기위해 쓴 하데스의 투구(Knee)에 대한 해석적 문단은 오늘 읽기의 하이라이트라 해야겠다.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투구를 눈과 귀 밑까지 눌러쓰고 있다

                                                                             - 마르크스

 

【출처: 본문 P 65 사진촬영】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계급적 이익을 위한 가장 맹렬하고 저열하며 추악한 감정에 기반한 학문역사적 조건과 함께 출현하였듯이 그 해체와 함께 사라질 학문으로서...

 


"어떤 렌즈어떤 조명어떤 시각어떤 틀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조차 볼 수 없다."  - P 117

 


정치경제학에 투여된 욕망즉 보지 않으려존재 자체를 부인하기위해 그네들이 지녔던 앎의 의지의 밑바닥까지 밀고 내려가는 비판으로서의 자본에 이어바로 그 의지가 품고 있는 특별한 조명특정한 퍼스펙티브(Perspective)로 보고 있음을 알아채는 눈을 독자도 지닐 수 있게 안내한다가치 축적을부의 독점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의 구축을 위한 의지그것이 사회 전체가 추종할 가치가 되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특수한 행동양식으로 정착하는 그 역설적 구성원리를 쫓는다.

 

알튀세르가 말한 가시성 장()의 구조가 낳는 필연적 효과로서의 비가시성의 문제” 가 바로 이것이리라손에 쥐고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인지적 편협성이것이 야기하는 혼란과 두려움나아가 폭력성은 오늘 우리네가 매양 현실에서 듣고보고 있는 그것일 것이다전제와 원인에 똬리를 틀고 숨어있는 존재를 보느냐외면하느냐아니면 볼 수 있느냐보지 못하느냐의 문제로서...


결국 당파적이라 하는 표현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혹여 나만의 렌즈를 통해 보는 세계가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또한 옮음의 두 주장을 세우는 논리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작동하는 의 성격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잉여가치량은 가치증식과 축적으로서의 자본의 운명과 관련한 핵심적 부분이다노동시간최저임금.... 등의 결정에 작동하는 것이 과연 논리인가누가 힘이 더 샌가에 달려있지 않은가인간 삶의 세계란 논리가 멈추는 곳경험의 지평이 막다른 곳에 이른 곳에서 시작된다고 누군가 말했던가바로 실천의 장에 펼쳐지는 지독한 투쟁혹은 새로운 세계를 보는자기 경험의 세계 너머의 지평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가 시작해야 할 일 아닐까책은 이처럼 논리가 실패하는 장소힘이 재판관으로 행세하는 그 모순된 지점까지 치닫는 비판의 정수를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독자로서의 자본의 읽기에 대한 당파성을 요구하는 저자의 안내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내부에서체제 구성원리에서 그 해체의 원리를 찾는 앎의 의지다르게 보려는 의지로서의 당파성을.

 


"무구한 독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가 죄를 범한 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라“    -알튀세르

 


알튀세르의 이 강렬한 당파성의 권유가 자본을 읽는아니 저자와 함께하는 다시 읽는 자본이 가리키는 그 실천의 장등가교환을 했음에도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운 그 누군가를 볼 수 있는 그러한 독서의 길을 안내한다격월간으로 출간되는 이 시리즈가 이미 7권까지 출간되었다늦은 출발이지만 8권이 출간되는 날 따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용위반자의에 의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판단하는 잣대가 바뀌는 것전제가 된 구조자체의 변형과 관련한 비판으로서, 세계를 다르게 보는 귀중한 렌즈를 얻었다는 어떤 충만함을 느끼면서 2권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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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들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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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흰 개는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무모한 싸움을 멈춘 것이었다.

투견장에 자유는 오지 않았다. " - P 182 중에서

 

 

소설은 도시 욕망의 다른 표현, 타인의 실종, 죽음을 댓가로 주어지는 것, 그것 '이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름없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대가로 빚을 가리고 이득을 보는" 도시,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휘황하게 빛나는" 도시, 자신의 자유를 담보로 처절하게, 또한 폐쇄된 나선형 계단을 끝없이 오르려는 갈망으로 가혹한 경쟁에 매몰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한 단어, 한 문장 모두가 이 도시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처절하고도 묵직한 본질적 의미를 담아 잠든 감각의 심연을 헤집는다. 투견장과 하나 시(), 이 유비적 공간에서 각기 사육되는 흰 개와 한 남자, 그리고 투견을 기르는 소년의 아버지와 소년을 세뇌하는 사채업자로 형상화되는 참담하고도 혹독한 삶의 이야기는 펼쳐드는 순간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녹슨 뜬장에 갇혀 포만과 굶주림이 반복되는 사육 속에서 투견장에 끌려 다니며 수없는 싸움에서 돌아오는 흰 개, 그리고 아버지의 빚 담보로 양도되어 사채업자에 의해 사람을 갖다버리는 청부업자로 훈련되고 손에 피를 묻히며 표적들의 숫자가 영()이 되면 자유를 얻으리라 죽을힘을 다하는 남자가 있다. 그 둘은 모두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악랄함과 적의, 무심과 냉담함으로 키워졌다. 모두 물고 뜯어 찢어발길 대상일뿐, 그래야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세계에 내몰린 존재들이다. 그리곤 소용이 다하면 개장수에게 사료 값으로 건네지듯 그렇게 사라지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다.

 

이 두 존재를 오가며 서술되는 이야기는 어느 날 자신의 몸뚱이를 조심스럽게 쓸어보는 소년의 손등에 이마를 가져다 대던 흰 개와 그의 가슴팍에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던 소년의 "가슴 한 켠에 싸르르"하게 흐르던 슬픔 그것이 그대로 전염되어 시린 마음을 움켜쥐게 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거꾸러뜨려야 할 먹잇감이며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도구, 한낱 작대기, 숫자로 수렴되는 사회라고 세뇌된 사람인 우리들은 "어둠 속에 치솟아 빛나는 고층 빌딩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식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곤 자기보다 높이 오른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언젠가 올 그 경쟁의 속박에서 풀려날 자유, 그 무한의 해방이라는 환상을 향해 영원히 나선의 계단에 갇혀 맴도는 것을 그칠 줄 모른다.

 

또한 화학공장 폭발로 오염된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소설 속 B구역이라는, 허물어진 육신을 한 식인귀들만 득실대는 죽음의 땅으로 낙인을 찍어, 자신들의 세계로 부터 분리하고 배척해서 지워버린 지대처럼 이 도시는 자신의 비열과 누추함을 가린다.

 

사람 갖다 버리기 딱 좋은 공간이다. 치매노인을 버리러 찾아든 사내에게 그곳은 죽어야 끝나는 투견장이며, 다름 아닌 지옥으로 다가오지만 장애 여인을 버렸던 그곳, 숫자 '0'을 향한 자신의 몸부림은 헛된 망상, 철저한 소비 도구이며 풀려 날 수 없는 노예였음을 자각하는 전환적 사건의 장소이기도 하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졌기에 오히려 새로운 삶의 땅,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된다.

 

누군가의 피를 빨아대며 세력을 키우는 도시, 다 빨린 대상은 배제된 지대에 버려 지워버리고 망각하는 도시, 제거될 대상을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 대신 새로운 먹잇감을 매달아 놓는 것이 유일한 도시, 그 도시는 늘 돈을 갚지 못해 벼랑에 선 사람들을 양산한다. 그들을 딛고 선 것아 바로 우리들의 도시가 아닌가? B구역에 버려진 여자가 말한다. 이곳에 버려줘서 고맙다고, "이런 지옥에 버리고 가는데 고맙다니요?" , "내겐 그곳이 더욱 지옥이었어요."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늙고 교활해진, 이 도시의 생태계에 능숙해진 내 마음만큼 무력감, 그리고 회의가 찾아든다.

 

"공들여 쳐놓은 거미줄, 그 가운데 앉아 기다리지만 잡게 되는 것이 정작 자기 자신이 아닌지"하는 물음처럼, 스스로 멈출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자유가 오리라는 소설 속 투견, 가만히 바람을 맞던 '흰 개' 의 모습처럼, 죽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삶을 지탱하던 남자가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것처럼 우린 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인지....

 

"한 사람이 죽음을 향해 내달려가며 느끼고 있을 두려움과 고독함"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연민과 사랑이 내 마음의 중심이 되기를 끊임없이 응시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또한 이 도시가 버린 시체들과 종()이 함께 매달려 회피와 두려움의 경계로 가려진 지대에 있는 외면한 사람들을 찾아보라고 스스로에게 채근하라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네 그칠 줄 모르는 싸움을 멈출 이유로 해석하고픈 내게 아래의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갇혀있던 뜬장에서 나온 흰 개의 모습, 그 자유에 대한 이해, 손길과 유대의 이해가 아니었을까? 작가 박영의 문장은 내게 항시 관능적 이해를 선사해준다. 잊을 수 없는 그 깊은 감각의 정서를.

 

 

마당에 피어있는 풀꽃 냄새를 맡고, 햇볕을 쬐었다.

그러다가 가만히 앉아 바람을 맞았다.

눈을 감고 있는 흰 개의 이마털이 흩어지고 있었다." - P 6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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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바치는 심장 문득 시리즈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박미영 옮김 / 스피리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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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 가운데 많은 것이 전율에 기반하고 있으며,...(中略)... 나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 에드거 앨런 포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서문 에서

 

 

포의 소설 대부분은 그의 설명처럼 독자들을 전율에 몸서리치게 한다. 소름끼치는 것과 혐오스러운 것이 한데 뭉쳐져 으스스함과 음침함의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1840년 단편소설 25편을 묶어 출간된 그의 선집 제목,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Tales of the Grotesque and Arabesque)’에서와 같이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음산하고 환상적이며 기이한 무엇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이질적 세계로 우리들을 유인한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이러한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일러바치는 심장에 수록된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이나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처럼 풍자적인 작품이 있는가하면, 그에게 추리문학의 창시자라는 명성을 안겨준 명민한 탐정뒤팽이 등장하는도둑맞은 편지와 같이 더 이상 그로테스크하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다.

 

그럼에도 포 소설의 독특한 매력은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던 세계가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당혹감과 그 생경함이 자아내는 통제 불능의 세계에 있으며, 여기에 더해 은닉된 인간과 인생의 모순, 광기, 부조리, 불합리, 어리석음의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아마 수록작 중 붉은 죽음의 가면은 이러한 감상에 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에 치명적 역병이 돌자 궁정의 신하와 숙녀를 동반하여 세상과 동떨어진 격리된 수도원의 성채로 피신하여 성의 안팎을 봉쇄해버린 후 그들만의 향락을 즐긴다. 밖에서는 역병이 격렬하게 창궐하지만 그들은 화려한 가면무도회를 꾸미기에 분주하고 일곱 개의 방으로 구성된 연회의 무대를 준비한다. 아마 이 새로운 세계의 장식을 묘사하는 문단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의 전형일 것이다.

 

확실히 기괴하게 할 것,온통 눈부셨고 반짝이고 짜릿했으며 환영 같았고, <에르나니>이후로 많이 본 광경이었다. 맞지 않는 날개며 장신구를 단 아라비아풍(아라베스크) 인물들도 있었고, 미치광이 같은 현란한 취향도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괴한 이들로 넘쳐났다. 끔찍한 모습도, 혐오감을 불러올 만한 모습도 적지 않았다.” - P 52 에서

 

이 기이한 시공은 마치 붉은 가면을 쓴 죽음이라는 음산한 존재를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듯하지 않은가? 이 세계 같지 않은 혐오와 소름과 몽상적 상상이 뒤엉켜 녹아든 광경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는 전조, 바로 그로테스크가 지향하는 미학적 가치일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같던 이들의 세계에 붉은 죽음의 가면은 찾아들고, “파티를 즐기던 이들은 피로 물든 벽에 둘러싸인 채....절망 속에 죽어갔다. ....어둠과 부패 그리고 붉은 죽음이 모든 것을 무한히 점령했다.”

 

현실 세계의 파괴와 새로운 세계에의 환상을 꿈꾸는 이러한 지향과 달리, 괴기스럽고 음산하며 잔혹한 공포의 분위기로써 그로테스라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검은 고양이는 도플갱어가 섬뜩한 동물의 영역에까지 확장된 죽음의 예술로 우리를 이끈다. 달리 설명 할 수 없는 최후의 파멸처럼 한 인간의 섬세한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인간 심리의 원시적 본능, 인간 특성의 분리 불가능한 충동의 세계, 그 어둠으로 깊숙이 따라가다 광기의 나락에 몰린 주인공의 아내 살해 과정과 시체 매장, 그리고 발견에 이르는 세세한 장면은 그 잔혹함으로 인해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범죄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충격으로 뇌가 얼얼해지는 현기증, 공포 소설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이들과는 또다른 느낌의 공포로서 생매장이라는 모티프가 발견되는어셔가의 몰락아몬틸라의 술통은 지하공간의 음침함과 으스스함, 상상력을 초월하는 악몽처럼 울려 퍼지는 비명, 악마주의의 낯섦으로, 인간 내면의 저 깊숙한 어둠의 심연으로 끌어댄다. 이러한 모티프의 동일성 측면에서 일러바치는 심장옅은 푸른색 막이 뒤덮인 눈의 노인, 검은 고양이플루토의 눈은 뒤틀린 자아를 읽어 들이는 타자에 대한 반감, 이를 차단시킴으로써 흉물스러움을 유지하려는 인간에 내재된 또 다른 광기의 한 면을 까발리기도 한다.

 

한편 이들 작품과는 달리 일주일에 일요일 세 번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치료법 두 단편은 우스꽝스런 인간들의 행태를 풍자하는 웃음의 세계로 안내하지만 이 웃음은 결코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풍자는 악마의 사자이며, 그래서 풍자의 웃음은 악마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미쳐버린 세상만큼 우스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키지 않는 웃음, 아득한 심연의 웃음, 불합리를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일이야말로 또 다른 그로테스크 아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포는 시종일관 충격적이고 납득 불가능한 기이한 것, 그 불가사의함에 맞서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이해 불가능의 세계에 맞서 싸우려는 포가 그로테스크를 벗어난, 즉 인간의 이해력이 맞설 힘을 잃는 세계, 그 불가사의한 것에 예리한 감각을 가진 인간을 등장시킴으로써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고 선언한 작품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도둑맞은 편지는 경험에만 의존하는 경찰의 추리 한계, 불가능의 세계에 열린 틈새를 찾아내 풀어낼 수 있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바꾸어 버린다. 아마 이를 위해 탐정을 등장시킨 최초의 추리문학 작품인 모양이다. 오늘의 추리문학에 등장하는 수사관이나 과학수사대의 그것에 견준다면 유치함을 면할 수 없겠지만 바로 현대의 미스터리 문학작품들의 전범(典範)으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고려하여 읽는다면 그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포의 작품들은 믿어 의심치 않던 세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전율들로 빼곡하다. 일상적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기이함, 광기와의 대면, 위협적 생명력을 발산하는 구덩이와 추에 등장하는 진자 운동을 하며 내려오는 서슬 퍼런 칼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비명등과 같이 현상의 무수한 왜곡들로 즐비하다. 삶에 대한 공포, 개인적 특성이라는 개념이 파괴되고 관계의 약속, 질서가 허물어지는 생경한 세계를 마주하며 몸서리치는 것이다. 포는 이를 통해 이 세계의 바깥, 어둠속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읽기 위해서 그가 창조한 독특한 예술의 세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어느덧 사슬에 매달린 채 끔찍하고 시커멓게타버린 여덟 구의 시체덩어리가 발산하는 악취가 진동하는 불타는 복수극으로 진저리 치며 어둠의 시간 어느 순간을 벗어난 자신을 발견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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