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6호 : 권위 인문 잡지 한편 6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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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크기는 인정의 총량과도 같다. 그렇게 축적된 인정을 사유화 할 때 권력이 발생한다." - 정경담, 권위에서 탈출 하는 길, 107

 

'권위(authority)'의 정당성에 균열이 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의 오랜 역사 내내 인정되고 존중되던 정당하다고 인정되던 권위를 지탱하던 많은 기준들이 더 이상 그 효력을 잃었거나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아버지가 지니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는 이젠 격렬한 거부감과 혐오의 언어가 되었으며, 양반이라는 케케묵은 상전노릇은 천박함과 고루함를 일컫는 명사가 된지 오래다.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고위 관직에 붙어 다니던 권위는 지탄과 경멸의 언어와 다르지 않으며, 전문가에 인정되던 지적 권위도 온라인에 깔린 정보의 평등화에 따라 '너나 나나'와 같은 지식 폄하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보이고 드러난 권위의 상실 또는 해체 이외에도 굳이 관찰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작동되고 있는 무수한 권위에 대한 물음이 지속되고 있다.

 

펴낸이 김세영에 의하면 권위란 "설득되어 따르는 이의 인정과 자발적 복종을 야기하는 강제없이 작동되게 하는 힘(8)"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 생활 속에는 지위에 따른 부당하거나 불편한 행위의 요구에 '아니오'라고 저항하기가 만만치 않은 순간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권위를 "낡아빠진 질서의 자기 보존(13)" 욕망이라고 새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되면 매일 매시간이 기존 권위의 부정을 향한 몸부림이 되고 만다. 어제는 오늘에서 낡음이다. 어제의 질서와 제도는 오늘 부인되어 새로운 것이 그것을 차지하고 그러자마자 다시금 부정되는 혼란이 계속 된다. 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가치의 상실과 정립 불능에 시달리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현실의 모습이다. 인문잡지 한편6호는 '권위' 를 주제로 10 개의 시선을 담고 있다. 이 감상의 글은 저항감을 야기한 몇 꼭지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비판은 길고 공감은 적은 글이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제목의 조선조 예송(禮訟)사건을 빗댄 전() 서울특별시장 고() 박원순의 장례식장 일화에서 건져 올린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언어를 "정파적 권력 그 자체"로서 부정되어야 할 권위주의 산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권력의 정치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망각된다.(37)"며 여전히 한국 정치사회는 예송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전 대표가 "예의를 지키라"라고 쏘아댄 말은 고인의 성추행에 대한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그 무례함에 던진 충고의 변이다.

 

이것은 인간 개인에 대한 예의범절을 지칭한 것이지 서울시장 장례식 범주에 대해 한 말이 아니다. 이 왜곡된 비판의 시선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낙인이 찍혀있다. '성추행 범'이라는 낙인 말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부정적 속성으로 이끄는 '낙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사회구성원들의 "(1)눈길을 끌어서 그것을 지닌(낙인) 사람의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고 관계의 불평등성을 만들어내는 이 편견을 비판하였다. 이해찬 전 대표의 말은 권위주의의 소산도 아니요, 인민에 대한 무례함도 아니다. 낙인찍은 인간에 대해서는 그 인격을 무시해도 된다는 여성주의자의 독단이야말로 시대 언어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권위의 발산은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결혼 여성의 돌봄 노동에 씌워진 남성 권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로 돌보는 법을 알아가기'돌봄 일지 만들어가기'의 살벌한 가사 부담의 평등성에 대한 논의, 결혼 부부에 대한 "출산 지원책은 불안감만 증폭시킨다(56)"는 변에 이르기까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주장은 즐비하다. 결국 주장의 논지는 "일부 사람들만이 작은 예외를 구현하며 만족하라는 메시지(57)"에 대한 거절의 변이다.

 

돌보는 사람에 대한 특별정책(출산율 장려책)이 기혼자에게만 취해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혼자를 위한 형평성에 맞는 지원책을 마련하라는 '완전평등주의'의 요구이다. 그런데 출산 장려책은 사회적 약자나 국가미래를 위한 부양 정책 등의 형평성을 향한 시책의 하나이다. 예로서 저소득층에 지급하는 기초생활비를 모든 사람에게 지급해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분배정책을 왜곡하는 나쁜 제도가 된다. 하루 8시간 정신노동이 피곤하니 비혼 여성에게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외면적으론 평등 같지만 차별의 다른 논리이다. 세상을 같이 사는 동료로서 인민을 생각하자는 논자의 변이 궤변이 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이 아닌가?

 

하나만 더해야 겠다. 중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라는 글은 중국의 김치,한복 등 문화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을 '르샹티망'이라고 단정하는 주장이다. "근원적 열등감을 원한으로 바꾼 '노예의 심리'"이며, "국력신장으로 비대해진 자아의 공격성"(120)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부활하여 인민 다중의 무의식에 중국에 대한 권위가 각인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과연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중국에 대한 권위란 것을 갖기나 하고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은 중국을 문화적 후진국으로 인식된 앎 이외에 알고자 하는 의식조차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인을 겨냥할 때부터 잘 못된 것같다. 마치 객관적 시점을 지닌 국외자의 위치에 서려할 때부터 글은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Q의 정신승리는 오늘 중국인의 화법에서 무진장 발견 할 수 있다. 한국인의 반론이 친미로 비칠까봐 조심해야한다는 주장처럼 사대적인 발상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의 태도가 친미적 성향이 짙어져 한국이 곧 미국의 대리인이라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굳이 타자의 불안한 양가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간병 없이는 치료도 없다.(...)질병 진단은 고통의 반향을 향해 기울어질 줄 아는 기예(art)를 요구한다." - 73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권위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말하는 인류학자 서보경 교수의 살리는 일의 권위는 뉴노멀을 말해야 하는 오늘에 중대하고 긴요한 논지를 전해주고 있다. "타자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상태(64)"가 바로 돌봄의 형태임을 알려준다. 우리의 몸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몸은 대상을 향해 기운다. 간병 노동자의 하루를 관찰하며 "무릎을 굽히고, 등을 구부리며, 팔을 뻗고, 몸과 마음을, 눈과 귀를 기울이는(70)" 돌봄의 철학을 헤아린다. 방치, 학대, 폭력은 이 기울임의 관계성이 결여 되는 순간에 오는 것임을 격하게 공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었다. 의료를 돌봄과 관계없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의료 발전인 양 여기는 의료 상품화, 즉 물신화 과정만을 중시한다. 결국 간병의 영역은 별개의 하위영역으로 설정하여 지속적인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함에도 헐값의 하찮은 일이 되는 직업에 씌워진 가공의 권위를 이제 대전환시켜야 하는 시대에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 볼 일이다. 그래 "치열한 상징투쟁과 전복"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끝으로 지위와 연구능력이 부조화한 오늘의 한국 대학의 권위주의를 해부, 비평하는 김미덕 교수의 대학 조직과 연구의 원칙은 편집자가 정의한 권위의 정의를 재정의하게 돕는다. 사실 정당하다거나 인정되었다는 말에 이에 동의하는 타자의 선행이 있다. 그런데 대학이란 좁은 틀은 이들 타자가 하는 권위 부여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다. 처세술 등 기회주의적 태도와 학연, , 관계망이 만들어내는 한국 대학의 현실은 소위 "탁월한 연구"가 나오지 않는 가장 중대한 이유이다.

 

서구 지식의 어쭙잖은 소개로 권위를 지니고 지식인입네 행세하는 형국에서 무슨 창의성과 탁월성이 출현 할 수 있겠는가? 고작 대중적 지식의 재생산으로 추종세력을 거느리는 천박성이 휩쓸고, 속칭 우라까이에서부터 제자의 연구를 도둑질하는 현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허위적 권세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우리 사회의 형국을 대변한다. 권위에서 탈출하는 길을 사유하는 영상 비평가 정경담의 글이나 수평적 권위, 즉 안정과 존중의 가치에 방점을 둔 권위를 말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진새의 글은 새로운 권위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일종의 방향등 역할을 해준다. 기존의 질서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찾는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이 작은 인문잡지가 그 어두운 강을 건너는 희미한 점멸등이 되어 줄 터이다.

 

 

(1): 출처: 김현경 , 모욕의 의미122, 사람, 장소, 환대, 2015. 3,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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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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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 老子,도덕경,七十三章

 

 

나는 이 소설을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었다. 설혹 그것이 꿈의 기억이고 중음신(中陰身)의 유령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언정. 역사 속 인물이 꿈꾸었던 세상, 그것을 좌절시켜 온 파렴치한들의 세상이 여기 있다.

 

반민중(反民衆)집단의 뿌리 깊은 탐욕과 몰염치, 기만성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축으로 작동하며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방해되는 그 어떤 상황의 전개에도 발악적인 혼돈으로 맞서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대한 4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바로 기득권의 항구화에 저항하는 민중을 살해하는 권력에 의해 벌어진 참담함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서 세월호의 어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권력이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의 분노를 향해 드러낸 특권과 무책임과 무례와 오만이 범벅된 잔혹함의 역사이다.

 

동학혁명으로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봉건제의 모든 악폐를 척결하고 무고한 농민에게 평등한 인간의 삶을 주려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을 기다리던 옥사의 어느 날이며, 양반과 지주, 친일 부역자들에의해 핍박받던 민중의 절망과 분노가 만들어 낸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권력에 의한 처형의 몇일이며, 특권과 우월의식에 잠겨있는 검찰 집단의 개혁에 앙심을 품은 정치 검사들과 수구 기득권 정치집단 및 조선, SBS등 언론기득권이 결탁해 망신주기와 조롱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내몬 몇일이며, 가난한 시민이 아이 하나 낳기 힘든 사회조건에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한 아이가 무고하게 수장된 아련하고 아득하기만한 기록이다.

 




역사적 상황이 한 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2021년 오늘에도 친일 부역자의 떨거지들이 정치권력이 된 정치 검찰 집단을 옹호하며 정치공작 운운하고, 여전히 그악스럽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반민족, 반민주를 위해 민족지사들을 암살하고 오직 권력과 부의 축재에 혈안이 되었던 모리배의 후손이 패거리를 이루고 민중의 원()을 호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사람답게 살기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사람들을, 그걸 보아버렸는데 어찌 본 적없는 것처럼 굴 수 있단 말인가."  -267

 

이제 불온한 반민중 기득권 집단의 패악질을 분간할 줄 알게 된 민중은 쥐죽은 듯 있을 수만은 없다. 동학혁명에 참여 했다고, 의병에 동조했다고 노륙당하던 전봉준이 살던 시대가 아니며, 반민족 행위자를 두둔하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친일 독재세력이 민중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승만의 탐욕스런 권력욕이 외치던 빨갱이 타령은 바로 지금에도 수구정당의 무리들로부터 여전히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동학 농민군의 접주들을 효수하여 저자거리에 내걸던 그 악의를 전봉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도 전국방방곡곡에 내걸려 민중의 정신이 일깨워지기를 갈구했다. "작은 복을 지어 마침내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나(150)"라며 옥중(獄中) 청년 '김해원'에게 권력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변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 짜내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던 일제하의 지주와 친일 부역자 등 반민족적 모리배의 작태가 잉태한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이 땅의 아픔이다.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 검찰은 적의를 품은 채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여느 잡범 취급하며 수구 언론을 이용하여 심문 기록을 흘리며 모욕적 언론플레이를 하고, CCTV를 통한 중수부장의 치밀한 통제 하에 민중을 농락했다. 이 천박하고 사욕에 가득한 집단의 공작 정치 버릇은 2021년 지금까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 평검사와의 회의 후 "천박한 교양과 특권의식, 무례함과 오만으로 그득한 그들은 기득권 포기 생각이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니 작금의 현실에서 이 언급의 긴급성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중음신이 되어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전직 대통령의 그 날의 정경을 말하는 해원의 시선을 좇다보면 그 쓸쓸함의 기록들이 분노가 되어 되살아나기도 한다. 간악함과 탐욕과 파렴치와 기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 이런 세상에 부모의 사랑으로 키워진 소녀가 이유도 모른 채 검푸른 물결에 내동댕이쳐진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민중, 시민의 생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개,돼지 정도로 아는 수구집단의 망령됨이 끝없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순박하고 어리석기만한 우리네에게 부정의에 생을 달리하여야만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온기를 옹색하게나마 쬐는 시간이 된다. 이 좌절된 꿈들, 실패, 그리고 또 실패. 그러나 혁명이란 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촛불혁명의 민의는 지금도 아주 작지만 전진하고 있을 게다. 반동의 힘을 물리치는 오랜 시간의 중단 없는 투쟁을 계속하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된 소설적 기억을 현실의 역사로 읽는 누를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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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1
송건호 외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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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대략 40년이 되었음에도 오늘 새롭게 읽혀야 하는 충분한 당위성이 있는 저작이다. 더구나 70여 년 전 이 땅의 사회,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친일 부역자들과 지주세력, 모리배 등으로 이루어진 수구 세력이 대를 이어가며 오늘 한국의 정치사회의 기득권집단으로 여전히 그 천박한 탐욕의 위세를 부리고 있는 까닭이다.

 

이 책은 내부적 독립의 쟁취가 아닌 외부 세력에 의해 피동적으로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 1945815일을 전후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형상을 조사, 분석, 비판 성찰하는 정치사회사라 하겠다. 6권으로 구성된 대 저작이 되긴 하였지만 '미군정과 민족분단, 친일 반민족 세력의 실상과 해방 직후의 경제구조'를 논하고 있는 1권은 해전사(解前史)의 뿌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타율적 해방을 맞이하자 몽양 여운형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차단하고 신속하게 건국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려했던 선견과 좌우를 통합한 중도적 포용성을 지닌 건국준비위원회(건국동맹)란 것이 있었으나 사분오열되어 저마다의 잇속을 계산하는데 열중하는 소극적 오합지졸들로 불과 20여일 만에 해체되고 만다. 나름 몽양은 국내에 기반을 둔 토착 민족세력으로서 일제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한 퇴거에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해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지주등 자본 세력을 대표하는 송진우를 비롯한 후일 한국민주당 계파의 극렬한 반대로 건국준비 조직으로서 기능을 훼손당하고 만다.

 

책은 목하 좌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망라된 필진으로 해방전후의 정치사회상을 분야별로 담당하여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 기술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다. 때론 보수적 시선으로 또 때론 진보적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 공히 신탁을 찬성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이르는 권력을 향한 욕심에서 이승만의 탐욕스러움에 대한 증거와 기록들에 대한 논평은 그리 차이가 없다.

 

 

"이승만은 해외 망명생활을 하였다고는 하나 독립 운동은 커녕...(중략)...상해 임정에서도 축출될 정도로 항일 운동 전선에서는 대중의 인기가 없었던 사람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자기 허구를 누구보다고 잘 아는지라...(중략)...광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348쪽에서

 

항일 민족투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외교 전문가도 아닌 단지 영어를 할 줄 아는 권력의 욕망에 불타는 천박한 인물에 불과했던 인물이 미군정에 달라붙어 친일 부역자들과 대지주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근본 없는 집단들의 얼굴이 되어 초대 대통령에 이르는 그 협잡과 공작 정치의 행태는 모욕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군정의 제 1 포고문은 '일본인과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처벌과 일본인의 안전에 도전하는 조선인에 대한 강력 처벌'을 담고 있었다. 이에따라 친일 일제 부역자들이 그대로 중앙 행정과 치안을 맡게 되는 황당한 정국이 전개되고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이나 소작제 폐지, 토지개혁은 미군정이 종료되고 새로운 남한 단독정부의 출범시기 까지 미뤄진다.

 

 




장장 3년 남짓에 이르는 신탁과 찬탁의 싸움, 친일 부역자및 지주 자본가로 이루어진 모리배 집단이 기득권을 다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으며, 국회의 출범 후 입법된 '반민족행위자 특별법'의 시행은 이러한 반민족 행위자로 이루어진 이승만과 한민당에 의해 파괴되고, 급기야 특별위원들은 빨갱이로 몰려 암살되거나 처형, 수감되는 반동적 상황에 매몰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 김구가 이승만등 극우집단에 의해 피살(암살)되는 것은 오늘에 이어지는 수구집단의 물불가리지 않는 탐욕의 정체를 읽게 된다. 책은 이러한 일련의 파렴치 상황을 세세히 그 과정에 은닉된 정치적 의미와 함께 풀어 놓고 있다.

 

아마 친일, 부역자들의 무수한 이름이 열거된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 를 보면 종교, 문예, 하물며 각종 부인회에 이르기까지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황군감사, 징병찬양을 비롯하여 항공기 제작비용의 헌납부터 식량 수탈에 이르는 적극적 친일 행위자들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당혹스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동족을 못살게 굴었는지, 민족 정기의 말살에 전력을 다했는지 그 엄청난 단체들과 명단에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책에 기술된 인물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토지개혁 또한 유무상몰수, 무상분배와 그 대상과 한계를 두고 반민족행위자로 구성된 이승만을 비롯한 한민당은 토지개혁 실시입법을 신중론이라는 미명하에 차일미일 미루며 사전 방매행위로 개혁입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의미한 형식적 법률로 만들고 만다. 미군정이 가장 먼저 손을 대고 싶어 했던 분야가 바로 이 토지개혁이었다. "미 국무성과 군정 당사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이 나라의 소작료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높(468)"았다는 것이다. 당대 지주의 예속농이 되어야만 했던 소작농이 얼마나 가혹한 생산조건에 놓여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농경중심 사회에서 벌어진 이러한 기득권 존속을 향한 양태는 산업사회인 오늘날이라고 달라진 것이 아니다. 기득권을 항구화하기 위한 그악스런 탐욕은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복잡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수구 정당의 대권 후보자라는 인물은 당선되면 공공사업분야의 민영화를 달성하겠다고 시민을 바보 천치 취급하고 있다. 건강보험, 전력, 대중교통을 민영화 할 경우 거대 자본집단의 뱃속을 채우게 되는 것은 지극히 뻔 한 일이다. 공공서비스의 질은 곤두박질 칠 것이고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에 전가될 것이다. 이들은 경영효율성을 근거로 얘기한다. 공공의 이익은 효율성에 앞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보다 큰 정의이다. 토지개혁을 미루던 당대의 반민족적 수구정당은 "토지개혁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정부 수립 후에 실시하는 것이 정당하다(470)."3년을 미루다가 마침내 입법에 당면하자 이를 실시하고자하는 세력은 공산주의자인 빨갱이들의 악의라고 반대하기까지 한다.

 

이 색깔 뒤집어씌우기는 2009년 용산재개발 철거민 살해를 진두지휘하던 경찰청장출신의 수구정당 국회의원이 시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간첩이 도와 당선된 빨갱이라고 의정발언을 버젓이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의 인명에 무감각한 폭력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러한 양식의 뿌리는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과 한민당에서 시작된 이들 반민주 반민족 행위자 집단이 고스란히 오늘의 수구정당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 책을 오늘 다시금 읽게 되는 이유는 친일, 부역세력이나 기회주의자에게 재기할 기회를 준 민족적 정치 행위의 실패가 얼마나 끈질기게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퇴행시키는지 그 근원을 파악토록 돕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제기하는 정신과 논리와 문제의식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역사정치 인식에서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민 정신의 도약을 위해 이 책의 유의미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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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시민들은 공정 혹은 정의를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곤 한다. 기득권자가 제도적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할 때 대중들은 그것에 작동한 "특권, 특혜, 자의성, 예외성"등을 비난하고 바로잡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납득하기 불편한 공정성, 정의의 담론이 수구 언론을 비롯하여 지배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들이 이 언어를 자신들의 이익침해에 대한 분노의 언어로 여론을 장악, 호도하고 있다. 정치 검사였던 자가 '공정과 상식' 을 표방하며 어리석은 대중을 우롱하고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은가?

 

때문에 이제는 공정이니 정의니 형평성이니 하는 말들이 불온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언어가 등장하면 외면하고 싶은, 불쾌한 기분이 앞선다. 일종의 피로 증후군이다. 쓸데없는 언어 낭비로 밖에 비치지 않은 것이다. 즉 시민들이 이해하고 요구하는 정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 정의의 개념들이 하나의 언어 형식 속에 들어앉아 있어 공정이 마치 텅 빈 요란하기만한 수레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공정을 외치는 소리가 동네 개가 짖는 소리처럼 들리기에 이르렀다.

 

신진욱 교수는 공정 담론이란 단일 담론이 아니라 복합 담론이며, 혁명과 복고(revolution & restoration)의 모순적 공존이라 주장하면서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의 일환이라 보고 있다. 아래 도표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공정성'을 포함하는 기사 건수의 추이를 분석한 자료이다. 조중동은 이명박, 박근혜를 잇는 보수정권 하에서는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달리 공정성에 대한 언급이 극히 낮게 언급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급격하게 공정성에 대한 기사가 급증하기 시작해서 2019~2020년에는 그야말로 폭증했다.

 

 

 출처: 창작과 비평통권 193,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쓴다, 51쪽 도표 부분 발췌

 

이 시기에 갑자기 한국사회에 불공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권력을 누리며 불공정을 구축해온 검찰과 보수 언론(54)" 능력주의에 기초한 비례적 정의를 정의의 보편적 담론화하려는 헤게모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외시하는 것은 "좋은 삶과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57)"를 기득권 지배계층을 위한 이익의 차원에서만 도모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들의 정의는 "지배계급에 의해 간과되고 억압되는 평등적 정의(59)", "공존, 공생, 공유의 윤리를 사회에 확산하는 정의"가 아니라 격차의 확보를 통한 차별화,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 등 기득권의 항구적 유지를 위한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이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공공의대 설립계획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킨 의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파업의 정당성을 내걸며 했던 말이 "공정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55)" 문재인 정권이라며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정의(Justic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공정성이라는 보편성의 담론을 최상류 계층인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며 정의의 담론을 훼손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화한 복고가 시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람시(A. Gramsci)는 혁명과 복고중 어느 것이 압도하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을 규정한다(50)"고 한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매년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 취약 계층 위에 군림하는 불의의 질서가 더욱 심화 고착화되고 있다. 기업의 거대화와 자본집적의 규모는 커지지만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시민적 삶의 미래는 점점 불안성을 키워나가고 있기만 하다.

 

신진욱 교수는 '혁명/복고의 모순적 총체성'을 껴안고 더 큰 정의를 위해 다시 공정성을 쓰는 역사의 변증법을 말하고 있지만 불의한 것, 좋은 삶, 좋은 사회를 향한 이상에 다가가려는 정의의 세상을 추악한 이기심으로 오염시키는 불쾌한 공정성 담론이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 이것은 시민 역량의 제고만이 가능하다. 시민이 앎의 의지를 회피하는 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적 기득권 집단은 시민을 지속하여 농락할 것이다. 그것의 미래는 예속이며 노예화이다. 정의(공정성)의 담론이 더 이상 불쾌한 담론으로 감히 헤게모니 투쟁에 나설 수 없는 사회를 위해 앎의 열정이 모든 시민에게 지펴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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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역사 - 비너스, 미와 사랑 그리고 욕망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베터니 휴즈 지음, 성소희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Venus & Aphrodite : History of a Goddess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밤으로부터 태어났다." -13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상징되는 여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멸하는 문화적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대 신화에서 시작된 태고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삶 속에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책은 6천년 전 동기시대(석기에서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와 로마, 중세 유럽, 근대서구사회에 이르는 여신에 부여된 이미지와 그 온갖 욕망 투사의 역사를 종단한다.

 

어쩌면 여신의 탄생은 위 인용문장처럼 인류의 출현과 그 시기가 같을 지도 모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의해 잘려져 바다에 던져진 우라니아의 성기에서 출현하였다는 신화부터 수많은 버전으로 지중해 전역으로 전해진 이 여신의 탄생 신화는 바빌로니아 전쟁의 여신으로서 모두를 정복한 절대적 힘을 지닌 '이난다', 아카드 지역의 '이슈타르(Ishtar)', 페니키아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리며 성과 흉포한 전쟁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고 한다. B.C.4,000~B.C3,000년에 이르는 당대의 유골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흔적들은 격렬한 전쟁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격정과 욕망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성과 폭력의 상징으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18쪽 전체 촬영

 

결국 전쟁 중심의 남성공동체가 주역이 되는 사회로 이전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혼재하는 신의 모습에서 남성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고 여성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오늘날 키프러스로 불리는 사이프러스 섬은 다산과 강렬한 성적 특징을 지녔던 지역의 자연신과 동쪽에서 전해져 온 전쟁의 여신과 만남으로서 초기 아프로디테가 형태를 지니게 된다. 청동기 시대의 열기를 내뿜는 연금술은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작용하여 열렬하고 과격하며 잔혹하지만 요동치는 세상의 가장 신성한 "사회적 야망의 총체"였다는 것이다. 당대 인간들의 마음 속 열정의 원리이자 욕망 충족의 후원적 존재로서 인간 욕망이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동방의 여신, 자연신이 믹스되어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항구였던 사이프러스에 이름 그대로 아프로디테가 탄생한다. '성애와 전쟁 + 다산과 인간관계'를 주관하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나체의 균형잡힌 몸으로 관능미를 뽐내는 그런 신이 아니다. 아프로디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적 믿음으로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 사항으로서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 당대 인간들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 이 여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쉽게 변하는 문화적 요소다," - 209

 

절대적 믿음이라는 것이 신성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로디테가 이탈리아로 넘어가자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고 성적 메타포로 가득한 매춘의 여신이 된다. 폼페이 도처에 비너스의 프레스코화가 넘쳐난다.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모두의 아프로디테가 되어 매춘과 성교의 수호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입법가 솔론이 지은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신전은 시민들의 성적 충동을 관할하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옷을 차려입던 아프로디테-비너스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신은 무언의 절대적 힘의 상징이 아니라 매력적 신체로, 극단적 열망과 욕망의 변명 구실이 되었다. 로마는 절대적 힘의 신성을 탐욕과 야망의 원동력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란 시대의 "인간행동과 윤리적, 문화적 딜레마를 반영하는 거울(110)"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가 지배하던 중세란 여신이 지상에 머무는 거처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거대한 예배당을 올려 여신의 기억을 억누르는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이다.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회화 작품들이 훼손되던 시기이다.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겨넣고, 조각에서 젖꼭지는 도려내지고 깨어지고 불태워졌다. 아프로디시아스의 화려한 아프로디테 신전은 장엄한 미카엘 성당이 되었다. 불결한 악마의 성소가 신성하다는 유일신의 교회가 되었다. 과연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이러한 천박한 교조적 신앙에 의해 사라졌을까?

 

수천 년간 인간에게 자극과 위안을 주던 여성을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고 있음을, 인간의 본능적 요소를 종교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외피를 두르고 아프로디테는 재탄생한다. 마리아에게는 항시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비둘기)가 등장하여 아프로디테와 마리아가 서로 같다는 사실을 도처에 맹백히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비너스는 "고대의 관념을 자극하고 전파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아름다움(169)"으로 재탄생한다. 15세기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후대에 영감을 준 작품은 없으리라. 조개 껍데기와 도금양 잔가지로 엮은 허리띠, 붉은 망토와 장미 등 작품 속 소재는 물론 그 아름다움과 사랑의 메타포는 오늘에도 여전히 모방과 패러디와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다.

 

이제 흥행보증수표가 된 아프로디테-비너스는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고 완벽한 여성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성의 모델이 되었다. 성적 자극의 구실, 완벽한 신체, 몽상적 성애의 굴절된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18~19세기 화가들은 매춘부와 정부들을 대상으로 에로틱한 비너스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9세기 근대 제국주의의 야만성은 아프리카 여성을 충격적이고 부도덕하게 묘사하는데 비너스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인종과 성차별의 거친 천박성과 탐욕스런 쾌락만이 남았다.

 

 

 

출처: 195쪽 부분 촬영

 

압제와 억압의 상징이 된 비너스. 현대 문명은 여신을 거세하는 데 열중하며, 파괴의 열망만 남았다. 그저 "인류가 투사할 수 있는 매력적 몸매의 소유자(202)"라는 "자기 충족과 자기 도취를 돕는 도구(207)"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진 힘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오늘에도 여전히 불멸하고 있다. '레이디가가'"조개껍데기 비키니"라고 노래하는 2013년 곡 비키니 에서, 바다와 풍요의 황금빛 여신으로 변신한 '비욘세'의 모습에 살아있는 여신으로 현현한다. 군사력과 전쟁의 광포한 절대자에서부터 오늘의 자기 도취의 도구적 대상에 이르기까지 고고학과 신화, 문학과 예술 작품을 넘나들며 여신의 역사를 되집으며 시대에 따른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이 문화사적 기록은 우리와 우리 사회가 지금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여신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열정과 충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 올리게 하는 역작(力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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