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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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 중 인간의 숙명성에 대한 심원한 다음의 문장은 스러져가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빼앗긴 것, 바로 그것일 것이다. “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충분히 가득 차오른다.”

아마 이것의 패러독스한 해석이 깊게 내려앉은 고립무원의 둔덕, 생존의 희망, 그 가능성마저 상실시키는 음울한 이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젊음의 일탈, 그 해방적 쾌락의 공간이 호기심과 탐험으로 각색된 여정의 불안으로 이동하고, 그 불안이 두려움이 되며, 마침내 온통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공포로 전율하게 된다. 구원의 희망이라는 기대치가 마음에서 그 존재를 잃어버리는 순간, 절망은 인간을 내습한다. 알지 못하던 죽음의 그늘, 그 실체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희망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진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공포, 그 유혹이다.

 

작열하는 태양, 열대의 바다, 젊은 육체들의 갈망 그득한 웃음소리와 술,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긴 독일, 그리스, 미국의 청춘남녀들이 멕시코 휴양지의 낮과 밤을 채운다.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 이렇게 두 쌍의 미국인 청춘들은 심해 가이드로 우연히 만난 독일청년 마티아스의 떠나버린 동생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고고학현장 발굴 인원인 한 여성을 찾아 떠난 동생을 찾기위해 동행의 제안을 하고 이들과 주점에서 만난 그리스 청년 파블로 등 6명은 이렇다 할 준비도 의지도 없이 가벼운 휴가여행의 기분을 지니고 낯선 장소로 출발한다.

 

이들을 목적지로 안내하던 고물트럭은 정글 앞에서 멈추고, 현지인 운전사는 이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아무도 없다라는 의미인 듯, 알 수 없는 언어로 강하게 만류하지만 6명의 젊은 이방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발길을 향한다. 정글과 개간지를 통과하면서 마야인들의 작은 부락을 만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한 명의 건장한 마야의 남성으로부터 떠나라는 의미의 이해 할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의 메시지를 받고 발굴지로 추정되는 경로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언어의 불통이 지니는 오해와 왜곡, 그리고 불신, 서로 소통이 되었더라면...

이 소설의 얄궂음은 이 다른 언어로 인한 소통의 차단, 불능성, 무력성을 반복한다. 그리스인과 미국인의 의사불통, 마야인과 이들의 소통불능, 문화의 기원인 언어의 차이, 문명적 오만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야기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낭패, 그 무능력의 어두운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들 일행은 마야인들의 미심쩍은 감시 속에서 발굴지로 보이는 폐허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황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마야인은 그들에게 둔덕으로 오르지 말 것을 표현하지만 둔덕의 경계에 무성하게 자란 초록의 넝쿨에 발이 감긴 에이미를 보자 많은 숫자로 늘어난 마야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총과 화살을 겨누고 이들에게 경계가 된 넝쿨식물의 안 지대인 둔덕을 오를 것을 강요한다. 그러다 넝쿨식물 사이로 드러난 사람의 뼈와 소지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해골이 된 사체는 바로 마티아스의 동생 헨리히임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에 흡입된 듯이 살이 사라지고 하얀 뼈들만 드러낸 이해 할 수 없는 모습, 당황과 참담함, 살해의 위협에 내몰린 이들은 둔덕을 오르고 발굴단의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텐트를 발견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 없을 때, 자신들의 합리적 이성에 반하는 현상을 마주 할 때, 이해 할 수 없는 위협이 자신들을 에워쌀 때, 인간은 무력감과 가공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들이 들어선 황량한 폐허, 정글의 무더위와 함께 줄곧 괴롭히던 파리와 모기떼마저 사라진 지대, 낯선 초록의 넝쿨 식물이외에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환경임을 일행 모두가 인지했을 때, 이미 이들은 폐허의 둔덕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곤 발굴단원으로 보이는 해골의 잔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을 살해한 주체가 바로 선홍색 꽃을 맺은 넝쿨식물임을 납득하기에 이른다.

 

인간의 욕망을 꿰뚫는 넝쿨에 기만당하고, 그리스인의 척추부상, 에릭의 다리 중상, 보잘 것 없는 식수와 식량은 일행의 생존적 열망을 떨어뜨린다. 토사물을 흡입키 위해 달려드는 넝쿨의 재빠른 움직임, 기생을 위해 에릭의 상처를 뚫고 신체 속으로 들어간 넝쿨, 하반신의 마비로 죽음의 문턱에 선 그리스인의 하체를 먹어대는 무성한 넝쿨의 집요한 공격, 이를 피해 폐허를 벗어나려 하지만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선 마야인들의 화살과 총신들은 오직 그들이 떠나올 때 남긴 메시지를 확인할 그리스인의 친구들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구원의 기대만을 남긴다.

 

생존의 희망은 오직 외부로부터의 구조밖에 남은 것이 없음을 인정할 때, 그러나 그 구원조차 가능성이 퇴색하게 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목마름과 배고픔, 잠에 빠질 때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달려드는 음험한 식물의 공격, 자신의 앞에 죽음만이 놓여 있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리고 바로 옆의 연인과 동료들이 넝쿨식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만 할 때, 우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그 잘난 이성은 아무런 기지도 발휘하지 못한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몰래 물을 들이켜고, 한정된 열악한 식량을 삼켜버리는 이기심, 타인의 약점을 힐난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며 감정의 싸움에 몰두한다. “굳이 넝쿨이 죽일 필요 없지. 너희들 스스로 자초하고 말거야.”라는 자조의 말처럼 희망이 떠나버린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심,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기다리고 희망하고 견디는 것 뿐”이라며, 삶의 가능성, 생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견뎌냄, 인내의 지혜를 다짐하지만 희망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을 삶의 시험에 돌입하게 한다. 결국 저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됨을 수긍하고, 보기를 바라지만 어둠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는 맹인이 되어 계속해서 전진한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소설은 이같이 결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난 그곳에 또 한패의 젊은 그리스인들이 둔덕을 넘어 동료의 이름, 파블로를 외치고 있으니.

 

빈틈없이 독자의 뇌리를 채우는 가득한 공포, 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는 이 기묘한 매혹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희망이 상실된 지대, 그곳에 좌초된 인간들의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탄식을 절로 나오게 하는 인간의 본성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그 소스라치게 하는 악마적 전율을 조작해대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일까? 초자연적 스릴러! 진정한 압도적 호러 걸작이라 왜 아니라 하겠는가?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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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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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보다 깊은 표현할 길 없는 아득한 공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끝 간 데 없이 마음을 죄어온다. 터질 듯한 공포의 괴성을 같이 질러댈 것만 같은 악마적 전율을 몰고오는 치밀한 문장의 마법,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독자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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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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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우연, 그리고 신비의 그늘을 드리운 5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경이롭다 할 정도의 반전이 돋보이는 연작소설이다. 용의자, 범인 추정의 인물적 트릭이 아니라 우연이 필연으로, 신비가 논리와 과학적 이성으로 전환됨으로써 사건의 본질적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그야말로 반전의 지존을 마주하게 된다고 할까?

한낱 망상에 불과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적 사건이 무의식속에 새겨진 과거 시간의 은밀한 실체라는 진실을 드러내고, 우연의 동시성은 필연이라는 계획된 행위의 은폐인가 하면, 논리적 육감이라는 인간의 신비로운 직관의 세계는 태곳적부터 인간 생체에 축적된 감관적 지식, 바로 과학적 이성에 가닿는 인간 정신에 대한 빼어난 관찰이 그것이다.

 

첫 번째 수록된「꿈에서 본 소녀」는 열 살 어린 시절의 꿈에 나타났던 ‘모리사키 레이미’라는 소녀를 현실에서 발견하고 그녀의 잠든 방에 방문했다 엽총의 사격을 받고 도망치던 청년의 단순 치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 칠년 전 당시에 출생치도 않았던 꿈속에서 본 소녀를 연인으로 확신함으로써 발생한 터무니없어 보이는 사건, 기이한, 설명할 수 없어 신비롭게 보이기만 하는 이 ‘꿈’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면 현실 속의 많은 실체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C.G.융이 설파한 무의식의 심연을 탐험하는 문학 판(版)이라 할까? 어린 시절 동네 단짝 친구였던 신코짱이라는 소녀의 죽음과 그녀의 인형에 얽힌 추억, 잠재의식 속에서 소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던,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조종당하던 존재의 진실들에 연결된 망각된 사실들이 드러남으로써 단순한 에피소드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전혀 다른 성질의 복잡한 사건으로 변화된다.

 

「영(靈)을 보다」라는 두 번째 작품 역시 이처럼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전복되고 있는데, 여기에 유령의 환영을 보는 순간 또 다른 장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우연’적 동시성에서 은폐된 필연성을 발견하는 이성의 시선이 더해진다. 충동적 살인에서 자살 위장의 실패와 계획살인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주의 사건담당’이라는 살짝 유치한 별명을 지닌‘구사나기’형사와 대학동창인 물리학 교수 ‘유가와’의 협력수사라는 인적조합으로 구색을 더한다. 즉 신비와 우연이라는 의혹의 이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학적 지성에 대한 찬사라 할까? 그러나 인간 지성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비와 우연의 영역은 정말 없는 걸까?

 

작가는 호기롭게 물리학 교수‘유가와’의 과학적 지성을 통해 불가해한 신비와, 우연의 지대란 없다는 듯이 사건의 본질을 규명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다섯 번째 작품인「예지몽」의 여운을 남기는 문장은 인간의 이해가 따르지 않는 영역의 존재를 암시한다. “엄마, 또 이상한 꿈을 꿨어”, “ 그 아주머니가 아래로 떨어져”, “남자랑 같이 어두운 계곡 같은 데로 떨어져”..... 독자들에게 한 번 해결해 보라는 과제일까? 아니면 불가해의 영역에 대한 의혹의 시선인가?

 

세 번째 작품은 인간의 감관으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폴터가이스트(Poltergeist)’ 현상을 제재로 하고 있다. 시끄러운 영(靈)이라고 불리는 으스스한 기운과 저절로 사물이나 구조물이 덜덜 떨어대는 현상은 실로 온 몸의 솜털조차 곤두서게 할 것이다. 건강용품 서비스 엔지니어인 남편의 실종, 남편이 갇혀있으리라 추정되는 주택과 이질적인 주택점유자들과 이상 행동, 그리곤 저녁 8시만 되면 사시나무 떨 듯 진동하는 주택에서의 기이한 소음은 여자의 논리적 육감을 이끈다. 어쩌면 육감이란 고대로부터 인간의 몸에 층층이 쌓여온 오묘한 감관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학적 이성보다 열등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이「떠드는 영혼」은 이러한 인간 정신세계의 탐색 못지않게 흥미로운 은유가 덧대어 지는데, 부도체인 유리막대가 열을 머금자 전도체가 되고, 마침내 그 열로 인해 녹아버려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탐욕으로 인해 자신조차 파멸하고 마는 인간 심리의 도덕적 통찰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존속을 좌우하는 ‘돈’, 이것이 주체이고 인간이 객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살해하고, 살해당하며, 스스로 생을 끊기도 한다.

 

돈의 노예가 된 인간, 이러한 관점에서 네 번째 수록작인 「그녀의 알리바이」는 「떠드는 영혼」의 또 다른 판본이라고도 할 것이다. 빈사상태에 빠진 가업을 존속시키기 위해 벌어지는, 즉 돈을 위한 죽음의 이야기다. 다만 용의자의 지위를 피하기 위한 자기변호의 입증수단인 ‘알리바이’라는 보편적 이해가 전도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발상의 전복이 소설을 이끈다. 수사의 시선을 오히려 용의자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보편적 이성은 이에 무능함을 노출 시킨다.

 

『예지몽』은 이렇듯 꿈을 신비주의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현상에 토대를 둔 인간 욕망의 실현수단이자 의지의 발현이라는 과학으로서의 심리적 표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우리들이 의식의 표면으로만 이해 할 수 없었던 신비와 우연의 허상을 해체하여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이성의 무능지대를 종횡누비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색하고 진실 접근의 통로를 안내하는 것이다. 정교한 트릭과 아울러 주도면밀한 사건과 의식 흐름의 구성, 의문의 여지없는 명쾌한 추리까지, 가히 완벽한 또 하나의 미스터리 걸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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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3 (무선) - 제1부 한의 모닥불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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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부작 10권으로 쓰인 소설 『태백산맥』의 1부인 권1에서 권3에 대한 소회이다. 1부는 1948년 여수순천사건(여순봉기)을 중심으로 남한단독의 정부수립이 있기까지의 미 군정(美 軍政)치하에서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생존권 마저 빼앗기고 피폐해진 농민의 실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정신의 진보에 역행하는, 자유, 평등, 민주 등 시대적, 인간적 자각의 순리를 차단하려는 소수의 반민중(反民衆)에 의한 혐오와 수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 이 소설은 진정 한국의 현대사라 논평하기도 하였다. 문학작품을 역사서로 칭하는 것은 외람된 평가이기도 하지만 가진 자, 지배자의 시점(視點)이 아닌 절대 다수의 민중이라는 실질적 사회적 토대를 굳게 딛고 서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야말로 최적의 시대 현실 성찰 도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욕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그 추오의 원천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 체화되고 반영된 자기 자각과 반성의 기반을 위한 시작이며, 거꾸로 혹은 퇴행적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기 위한 의식의 연대를 위한 수행(修行)이라 할 것이다. 소설의 소감을 이렇게 역사에 대한 인식들로 쏟아놓게 되는 것은 이야기에 그만큼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지극히 자연스레 독자의 정신세계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매혹적 문장들과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걸쭉한 남도 사투리에 스민 가난한 소작농들이 뱉어내는 분노와 한의(恨)의 넋두리와 해방 이후 더욱 극렬하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주계층과 친일반민족자들의 악질적 폭력 행태에서 절로 역사흐름의 역행과 사회적 기대가 배반되는 참담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서울 토박이인 내게 소설의 현장인 전남 벌교가 그리 가까이 느껴질 수가 없다. 사람다운 삶을 기대하고 그의 도래를 위해 죽음 앞에 당당히 마주 섰던 사람들의 숨결이 되살아나 지금 내 곁에 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 때문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견뎌내던 아내와 자식들, 부모들, 연인들, 동료등 친지들의 진정함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남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산야를 달리는 청년이 있다. 비밀노동당원 신분인‘정하섭’이 투쟁자금의 조달 거점마련을 위한 행보이다. 한편 벌교와 보성지역의 군당위원장인 ‘염상진’은 벌교를 접수하고 읍장, 금융위원장, 악질지주 등 민중을 착취하던 주구들을 처단하지만 미군의 대대적 지원을 받은 군경의 반격에 쫓겨 지리산 기슭으로 내몰린다. 벌교를 수복한 지주 등 군경세력은 다시금 잔인한 보복 살인을 감행한다. 빨갱이들의 소멸, 그 뿌리까지 없애버리겠다는 강박적 폭력성은 부녀자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지주이지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소작인의 삶을 보듬던 김사용과 그의 차남인‘김범모’는 염상진의 후의에 의해 그들의 처단행위를 피한다. 일정(日政)하에서 염상진과 좌익운동을 함께하던 김범모는 학병으로 끌려갔다 해방으로 귀향한 후 미국과 소련등 제국주의 탐욕을 가린 사상에 불과한 이념(사회주의, 자본주의)의 허위성을 깨닫고 해방된 민중들의 민족적 삶을 위한 화합을 우선적 신념으로 삼게 된다. 이와는 달리 학창시절 염상진, 김범모와 함께 뜻을 같이하던 동료‘손승호’는 인간적 삶의 회복이라는 인본주의적 관념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 투쟁을 비판한다. 조국의 독립과 핍박받는 가난한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을 함께 꿈꾸던 동료들은 이렇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인본주의로 삼분된다.

 

자기 방어를 필요로하는 악질 지주계급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집권을 노리는 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이들의 처단과 농지개혁을 통한 민중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는 좌익, 이러한 이념적 갈등보다는 민족적 화합을 우선 이루자는 신념과 무엇보다 인간성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상의 혼재는 당대의 사람들을 지배하던 인식의 커다란 범주이다. 해방은 당연히 민중을 위한 세상의 열림일 것이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해방이되자 일신의 안위를 위해 비굴하게 피신했던 일인(日人)의 주구들은 미군정에 의해 다시금 일제의 지위를 계승하게되고 민중은 참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소련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적대적 칼을 휘두를 적임자로 일제의 주구들을 선택한다. 권력의 야욕과 더욱 배부르기 위해 지주계급과 권력지향적 세력인 이승만은 미군정에 아부하고 편승하여 일제 식민지하에서보다 더욱 극렬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인구의 80퍼센트에 이르는 농민, 특히 착취만 당하던 이들의 80퍼센트인 소작농에게 이것은 역사적 배반이요, 삶과 정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토지개혁을 미루고 오히려 친일 지주계급과 밀착한 3년 남짓의 미군정 기간이 한국사 이래 최대의 민중학살 시대로 일컬어지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지주계급의 반동적 탐욕이 얼마나 격렬하고 악랄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반면에 38선 이북은 소련에 의한 공산세력이 정착하고, 대대적인 농지개혁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일거에 처단해 버린다. 그리고 이북의 악질 지주들, 일제주구들은 이남으로 피신해 온다. 이후 이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구성해 소작농들을 비롯한 좌익세력을 가장 잔혹하게 학살하는 주도세력이 되어 우익의 절대적 비호를 받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계급 배경을 지닌다. 민족적 반성이 거부되고 차단된 것으로 부족해서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속하는 역사적 모순에 빠진 한국사회의 부정과 불의의 실체인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 인물로 벌교의 대지주이자 가장 파렴치한 일제주구였던‘최익승’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려지고 있다. 지방의 소소한 행정은 물론 국정에 이르기까지 사적 이익의 실현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인간, 자신의 이익에 거스르는 인간은 권력을 이용하여 빨갱이로 몰아 파멸시키는 인간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데, 일제의 순사보조였다가 미군정에 의해 벌교읍 경찰서장이 된‘남인태’라는 기회주의적 인간이나, 최씨, 윤씨등 9할의 소작료를 물리던 악덕지주 계급들, 개인적 사리사욕을 위해 살인했던 일개 범법자가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좌익색출의 전선대가 되는 청년단장으로 행세하는‘염상구’와 같은 파렴치한들이다. 당시 우익이라는 소수의 반민중 세력이란 이러한 천박성과 비루함, 교활함의 덩어리였다고 해도 결코 과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현대사의 환기라는 진중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재미를 잃지 않게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들에 부여된 뚜렷한 개성, 출중한 인간적 묘사이며, 남도 사투리에 실린 남정네와 아낙네의 투박한 듯 감칠맛 나는 해학의 언어와 남녀상열(男女相悅) 등 사실적 표현들일 것이다. 동학혁명에서 시작된 소작쟁의라는 민중적 한(恨), 생존권 박탈에 몰린 민중적 기대를 배신하고 극소수의 반민중이 또다시 다수의 민중을 노예화하려는 데 대한 모순과 불합리가 내재한 태생적 갈등의 소치가 바로 10.1인민항쟁이요, 2.7구국투쟁이며, 제주 4.3사건이자, 여수순천 사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악질적 기득권을 놓치않으려는 지주계급, 그리고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식민지배자인 미군정에 의해 민중의 삶, 민족의 역사는 퇴보하고, 불의와 수치의 역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가 만들어내고 이승만이 본격화시킨‘빨갱이’이라는 터무니없는 민중 배반의 언어가 어떻게 이 사회를 잠식하게 되었는가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수구세력이 반대자를 매장시키기위해 사용하는 이 언어, 이 보이지 않는 사상을 구금하려는 악의적 언어가 설치는 것은 거듭 회오(悔悟)로 가득하게 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역사의 오류, 실패, 봉건적 지주계급을 철파(撤罷)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적 무능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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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작은글씨) -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지음, 강주헌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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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프랑스사회는 몽테뉴, 파스칼 등 걸출한 모럴리스트(moralist)들을 배출했다. 특히 인간 심성에 대한 시니컬하기 그지없는 탐구자인‘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를 제외하고 도덕주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미묘한 심층을 꿰뚫는 504개의 잠언과 대화, 거짓, 취향, 사랑과 삶 등에 대한 성찰로 구성된『잠언과 성찰』이란 이 책의 신랄함을 음미하다보면 더더욱 불완전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민낯을 보게 된다.

 

인간의 심성이란 이렇게 얄궂은 것을, 위선, 거짓, 허영, 자존심과 오만의 가면으로 덧 씌워진 실제를 까발린다.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 전, 속 표지를 장식하는 “우리의 미덕은 대개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는 한 구(句)의 잠언이 이 후에 열거될 인간성 탐사의 결과들이 어떠한 것들일지 선명한 예견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저 어두운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알 수 없는 마음과 정신, 그것들의 형태가 어떻게 표현되고 행동되는지를 관찰한 그의 시선이 느껴지고, 그 해학과 풍자의 문장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우선 인간의 자기 반영적 심성의 진실을 얘기한 몇 개의 구절들을 보면 이렇다.

“우리는 남의 불행을 보고 참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우리에게 결점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고 그렇게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만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오만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본성의 그 천박함, 유치찬란함, 불완전함에 대한 이 모지락스러울 정도의 독언(毒言)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 않은 것은 무의식에서나마 나란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독특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의 문장이 그저 공감의 끄덕임, 혹은 동의의 자조(自嘲)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관찰과 반성에서 자기 발전의 토대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각성에 있을 것이다. “욕심은 못하는 말이 없고 못하는 역할이 없다. 심지어 욕심이 없는 사람의 역할까지 해낸다.”는 이 잠언이 경계하는 욕심의 무한성, 그 절제의 당위성에 대한 경고라든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억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투덜대지만 판단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는다.”는 정작 자기 인식에 대한 이기적 오류에 대한 심리적 작동의 지적은 미소짓는 가운데 엄중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시원시원하게, 또는 자조적이기까지한 이 해학적 성찰을 읽다보면 관통하는 몇 개의 심리적 관념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허영심, 자존심, 그리고 욕심(이기심)이라는 정서와 감정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고 왜 기뻐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오만에 왜 불쾌해 하겠는가?

호기심이라는 감정의 정체를 보자.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가게 만드는 사욕에서 비롯되는 호기심과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교만에서 오는 호기심, 이것들 역시 허영과 자존심, 이기심의 결정체 아니던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재물을 경멸하는 사람은 많지만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라는 이 잠언을 과연 부정하기 수월한가?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흘리는 것은 자신을 한탄하며 우는 것, 그 소중한 사람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던 호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라는 슬픔 속에 감추어져 있는 위선의 정체역시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선한 행위에 조차서도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이럴진대 그렇지 못한 우리들의 많은 행위의 은닉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구차스러움이 될 것이다.

 

한 두 구절의 짧은 이같은 촌철살인(寸鐵殺人) 의 잠언과 달리 각각의 주제마다 수 폐이지에 걸쳐 기술한 성찰편의 사색들은 또 다른 관심을 지펴낸다. 요즘 한창 불통(不通)의 정치를 하는 지배권력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이나 TV 정치토론에서 접하게 되는 대화의 미성숙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대화가 즐겁지 못한 이유”에 대한 성찰에서 모두가“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대화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허식이라는 지적이나, 흉내, 즉 눈에 보이는 남의 것을 따라하는 행위에 내재한 불확실과 불충분성의 한계를 통한 외관 중시로 인한 자기 상실의 폐해에 대한 기술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시사성을 지니고 시대의 윤리방향을 제시해준다.

 

또한 <사랑과 바다에 대하여>와 <사랑과 삶에 대하여>라는 두 편의 사랑에 대한 성찰은 격정과 행복, 고통과 무력감의 양면성의 빼어난 비유의 해석을 비롯해서 매일 조금씩 우리의 젊음과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시간에 대한 통찰을 통한 본질적 유사성의 탐사는 사랑과 인생에 대한 단순하면서 긴 이해의 여운을 던져주기도 한다. 가히 시대를 넘어선 인간 심성의 진면목을 키득거리며 읽게 하는 독특한 도덕책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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