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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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 얼굴 없는 남자가 화자인 에게 약속했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인 프롤로그가 소설 속 실체로 등장하는 데에는 무려 일천 쪽 가까이 읽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로 인식 될 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은 폭력적이며 압도적이다.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초상화 전문화가인 일인칭 화자(話者)의 아홉 달 남짓한 기억의 술회(述懷)이지만, 그 경험의 세계가 너무 격렬해서 발을 디딘 현실을 잠시 벗어난 느낌조차 갖게 된다. 또한 소설의 표제이자 핵심 소재인 노()화가의 숨겨졌던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뫼르케가 쓴 프라하로 떠나는 모차르트라는 노벨레에서 정신없이 돈 조반니의 피날레인 저녁 성찬부분을 읊어대는 모차르트의 망아(忘我)적 장면과 겹쳐지면서 차갑게 파고드는 어떤 파멸과 죽음의 공포로 전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죽음에 주목하게 되는데, 심장판막 증세를 지닌 누이동생의 죽음을 안은 ’,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에 저항하다 처형된 연인과 난징 대학살에 참전했다 귀국 후 자살한 남동생을 지닌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그리고 엄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가 동시에 직면해야 했으리라는 세계에 대한 분노, 무력감, 그리움 등의 어렴풋한 공감을 갖게 된다. 삶의 시간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세계, 발설할 수 없는, 은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어둠이 비밀처럼 이야기 속에 내려앉아 있다.

 

아내로부터의 이혼 통보를 받은 의 무력(無力)과 무념(無念)의 여정, 방랑을 끝내고 거처가 된 오랜 친구인 미대(美大) 동창생의 아버지인 유명화가의 교외 산 속 외딴 저택, 생업이었던 상업적 초상화 그리기를 멈추려 하는 에게 제안된 고액을 대가로 한 의문의 인물로부터의 초상화 의뢰, 그리고 새벽이면 들려오는 방울 소리, 우연히 발견된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의 정사(情事) 장면과 함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방울 소리의 근원지를 파헤치고, 발견 된 방울과 삼 미터 깊이의 구덩이는 내겐 은폐된 음험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산도(産道)로 여겨졌는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에 일치되지 않아 거부하고 억압한 어두운 무엇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 이르는 곳, 혹은 그곳에서 나오는 곳으로서 이것은 구덩이를 개방한 이후 에게 발현하는 기사단장의 형상을 한 이데아로 인해 더욱 구체적 심상(心想)이 되었다.

 

결국 구덩이는 의 정사와 함께 이데아의 통찰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의 에로스를 말한 플라톤의 동굴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의 섹스는 인식의 확장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이기도 하며, 어두운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은폐된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으로 가는 출입구, 그래서 마주하기를 피했던 두려움의 그것들과 마주하고 삶의 균형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붙들렸다고 해야겠다.

 

이러한 맥락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 남짓한 화자(話者)의 방랑 여정 중 미야기현 해안 작은 마을에서의 일화가 꽤나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한 연인과의 격렬한 정사, 그리고 화자에게 깊이 각인되어 훗날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초상화의 인물인 가죽점퍼 차림의 남자는 다름 아닌 의 투사(投射)였으리라는 점이다. ‘아마다 도모히코, ‘의 그림은 그네들의 숨겨진 실체이다. 그네들에게 삶의 평온은 이것들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바닥에서 칼에 찔리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는 은유적 인물인 얼굴 긴 남자의 굴(어둠)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의 행동은 삶의 복원을 향한, 멈췄던 삶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하는 비로소의 용기이다. 때문에 아내 유즈와의 재회와 딸을 얻는 엔딩, 그리고 마침내 소실되는 두 개의 그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다. 나는 괜스레 화자 에게 시기(猜忌)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처절한 자기 내면의 응시를 지닐 수 있었던 그이기에,

 

이 소설의 묘미를 이처럼 몇 문장에 모두 설파해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작게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메타포로서의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들과의 매치, 정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천박하지 않은 이야기의 곳곳에 펼쳐지는 정사의 장면들, 자기희생이라는 이데아의 행위 속에 깃든 의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이어진 안슐루스와 193712월에 저질러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감춰진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사색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가히 생명력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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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거대한 서사를 단숨에 읽어나갈수 있는 것은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참맛이 아니었을까? 안개에 덮여있는 듯한 환상과 경계의 혼돈, 그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사랑의 간절한 울림이 떠나지 않으며, 신비와 스릴과 무수한 복선들의 얼킴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여운을 가져다 준 작품이랍니다.

 

1Q84년, 아오마메, 덴고, 공기번데기, 리틀피플...시간이 지나도 소설 속 단상들이 여전히 제 기억에 간직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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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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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결정화된 고독들...

 

시간의 풍파를 많이 쐰다는 것, ‘의 존재를 구성케 하는 사람들을 잃는다는 것, 내가 말한다는 것, 그리고 무지와 탐욕과 비겁함으로 무장된 패거리들과 공존한다는 것, 터무니없는 범주화와 규정화로 반지성이 압도하는 기만의 세계에 산다는 것 등등.....,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의 시간 속에 있다. 어떤 것은 내가 살아낸 것이어서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것들에서 나는 무지하다. 그래서 이 무지의 자기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결코 타자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전작(前作)비행운에 수록된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는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깨닫는 인물이 등장한다. “내가 살아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는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 존재함에 대한 이 겸허함이 곧 자기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고 해야겠다. 이것은 풍경의 쓸모에서 화자인 시간강사 이정우가 말하는 유리 볼 속의 하얀 눈과 구 바깥의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時差)’, 그것이 아닐까?

 

작품집 수록 첫 작품인 입동에는 이십사 년 만에 마련한 집 단장에 소박한 열성을 보이는 여자와 그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부유(浮遊)하다 비로소 정착 한 곳, 그곳에서 부부는 아이를 여윈다. 상실의 처절함으로 자기 삶을 잃어버리고 공허감에 온통 뒤틀린 내면의 음울함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보내는 뭇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 역시 시차일 것이다. 아이의 죽음에 보험금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듯한 어린이집 원장, 마침내 삶의 시간을 회복하려는 듯이 부부는 보험금을 대출금 상환에 쓰려 하지만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 몸이 떨리기만 한다. 끝없이 자문케 하는 이 고통스러운 의식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수록작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또한 시차, 어렴풋한 자기이해, ‘라는 물음에 비로소 답하게 되는 명지를 발견하게 된다. 물에 빠진 중학생을 구하고 자신은 나오지 못한 남편인 도경으로 침잠한 내면, 어두운 공동에서 나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시간이 내 안에 통째로 들어온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감각해야 한다는 것도.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돋아날 수 있다는데 놀랐다.” -P 238

시간이 멈춘, 삶이 멈추는 고통이리라. 그것은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도는 것이며, 스마트 폰 음성인식 프로그램에 진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이렇게 읽힌다.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상상 안에 계산돼있는 프로그램이상 일 수 없다는 것으로.

 

그리고 소설에는 또 하나의 시차가 있다. 죽은 학생의 누이가 보낸 편지, 동생은 살았으나 세상을 등진 선생의 아내인 명지의 아픔을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순수한 그것, 이것을 통해 명지는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중략)....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라는 자기이해에 도달하는 것 같다. 비로소 멈추었던 삶이 다시 움직인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라고.

 

또 다른 수록작, 풍경의 쓸모에서 시간강사 이정우가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후,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라고 자기이해를 말하는 순간이다.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이것은 사진을 찍기 위해 풍경을 배경으로 여기에 서 정우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가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것이었다는 자각, 즉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의 이야기와 교호하면서 과거가 될 만한 자세였다고 말하는 시차 바로 그것일 것이다. “영원한 무지!” , “더블 폴트!” 타자 읽기에 연속적으로 실패하는 것. 삶의 지혜란 것이 진정 있다면 겸허한 자기 이해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버려진 늙은 개와 할머니의 손에 자라는 아이의 용서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노찬성과 에반, 혼혈아를 키우는 요양병원 영양사인 여자의 믿음과 의혹의 이야기인 가리는 손또한 시차의 다른 의미일 것이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

 

무지에 대한 이해만큼 진실한 것이 있을까? 비로소 타자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고 사랑이 스며든다. 반면, 동남아계 남편과 이별한 후 혼혈아인 재이를 키우는 여자는 무리에서 부정당한 느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을 지닐 아이의 배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아이들의 무리가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에게 폭력을 가할 때 재이가 먼발치에서 목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동영상에 찍힌 자기 아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을 가리는 손이라는 의혹도 깃든다. 죽은 사람에게 절 할 때 외람되지 않게 가리는 그 밥 먹는 손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사악함을 가리는 손, 겸허와 예를 갖추는 손,..... ‘틀딱이라고 노인세대를 범주화하여 경멸하는 터무니없이 파렴치한 언어를 가진 도덕이, 가져 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라고 그저 치부할 수만 있는 것인가? 이 사회적 자기의 몰이해, 이 기만의 언어가 우리들 자신을 오염시키고 인간성을 저만큼 후퇴케 한다.

 

상실, 공허감, 멈추어버린 시간, 왜곡되어버리기만 한 삶의 뒤틀림과 그리고 고독이라는 삶의 개별성이 발산하는 무기력의 쓸쓸함이 침묵의 미래속 소수언어박물관에서 하얗게 결정화 된 고독...”으로 자기 삶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던 화자의 마지막 화자의 고통처럼 내게 스며든다. 이 소설집은 그렇게 내 무지에 더욱 겸허할 것을, 감히 연민이란 말을 함부로 뱉어내지 말 것을, 고요하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진실하게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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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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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그늘과 빛 - 치열한 사랑의 성찰

 

넌 믿었지, 소피의 사랑이, 러시아어가,

내 삶과 내 죽음에 대한 조사(弔詞)가 널 해방시켜 줄거라고...”

-P 413 에서

 

이 작품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설>이 아니전기적 이야기라고 번역자는 썼다. 작품을 흥미롭게 읽어내는 데 있어 이 정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우선 설명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분명한 소설이다. 화자인 가 작가 자신일 뿐이다. 즉 사소설(私小說)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험 사실을 소설적 형태로 서술한 것, 따라서 작가의 경험을 한 치도 넘어설 수 없기에 갈등구조나 해결방식에 이르는 소설의 양식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내느냐에 문학적 성패가 달렸다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체험에서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수많은 허구적 사건들을 취하여야 함을 엠마뉘엘 카레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도입된 것이 르포르타주, 53년간 러시아 코텔니치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있었던 헝가리인 전쟁포로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여정과 관련된 기록들이고, 작품 속에 또 하나의 단편소설인 연인 소피에게 보내는 회심의 사랑이벤트를 둘러싼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작가의 시선이 화자와 객관적 거리를 가지지 못해서 발생할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문학이라는 오명을 벗어난다.

 

한편 사실을 쓰는 사소설이기에 르 몽드에 게재한 포르노 편지형식을 띤 단편소설의 내용 역시 실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화자의 말을 빌면 수행적(遂行的)’이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경험된 것이 아니라면 경험되도록 해서라도 실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구성요소를 통해 비로소 이것이 소설이 되도록 하며, 문학적 예술성을 확보하게 된다. 단순한 전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코텔니치로 달리는 열차의 침대칸에서 꾸는 화자의 에로틱한 꿈처럼 상상과 현실의 경계 위를 지나는 기교, 7부에 이르는 작가적 구성능력까지 더해 문학적 향취 높은 소설임을 선언하고 있다.

 

자신의 내부세계에 갇혀 지내는데 지쳐있던 화자는 이제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반세기에 걸쳐 고독하게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되뇌었을 내적 독백의 언어를 웅얼거리는 전쟁포로 헝가리인이 수감 아니, 은둔해 있다시피 했던 러시아의 변방도시 코텔니치는 화자의 속을 갉아먹는 알 수 없는 정체이자, 고통의 뿌리인 외조부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는 이 르포르타주의 취재를 하면서 코텔니치가 자신의 그늘을 걷어내는 장소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한 화자의 노력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화자는 사랑하는 연인 소피를 위해 그야말로 사랑의 고백이자 선물로는 기발하기 그지없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단편소설을 계획된 일자에 게재될 수 있도록 르몽드에 발표한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수행적이어서 소설의 게재일자와 소설 속 열차와 시간은 등장인물과 현실의 조응을 예상케 하는 것이다.

 

이 두 내러티브는 지금까지 화자가 빠져있던 광기와 상실과 거짓말의 이야기들을 끝내고, 마침내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그늘에서 빛의 세계로 전환하는 기도(企圖)이다. 자신이 확신했던 사랑은 연인의 배신으로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에로틱하기 그지없었던 달콤한 밀어로 가득 채워진 단편은 연인에게 결코 펼쳐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사랑의 좌절에 번민하는 남자의 자기 성찰의 언어들은 이 소설의 스토리를 빛내는 압권이기도 하다. 한편 열린 성격, 다시 말해 편집할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코텔니치를 주제로 한 영화의 촬영 또한 그의 안에서 반복되던 과거의 깊고 깊은 우울을 떨쳐내는 데 결코 성공적인 여정이 되지 못한다. 그럼 이 화자의 기도들은 모두 실패한 것일까?

 

비록 현실의 원칙에 부딪혀 박살난 쾌락의 원칙이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해진 무언가인 금지된 외조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무참한 폭로라는 비애를 드러내어 더 이상 자신이 침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해방이기에 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것은 사소설 고유의 지위이기도 한데, 금지된 말,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통해 책으로 마침내 써낸 행위 그 자체가 성공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에도 쓸모가 있었죠. 난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았거든요. 난 이 책을 썼거든요.”(P414 에서)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한 이 기이한 소설의 외줄 타기는 그런대로 목적지로 넘어갔다. 그러나 자기현실의 희생을 수반하는 이러한 글쓰기가 파멸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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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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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

 

이 발칙한 말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추상하고 추론하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태아, “나는....있다.” 라는 자기 존재를 알리는 소설의 가공할 첫 문장부터 호기심으로 지적 흥분을 고조시키지 않는가? 소설은 이처럼 처음부터 마지막 한 문장에 이를 때까지 미학적 유희(遊戱)의 세계를 유영케 하며, 결코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마치 영원한 전희(前戱)만 있는 쾌락의 정원 같기만 하다. ‘매큐언의 섹시한 이야기 솜씨가 그야말로 유감없이 발휘된 예술적 모방의 극치라 해도 거리낄 것 없을 것이다.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고통을 겪다니,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머니 트루디의 지속적인 염분 섭취로 고통스러워하는 태아의 철학적 항변이다. 그러곤 역경은 우리에게 의식을 강요했고,....그렇게 경험된 감각들은 자아창조의 시작점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양수 속에 들어있는 나는 어머니의 행동으로 반영되는 존재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언어, , 색깔, 모양,,,,을 듣고 추상하고 사색하며, 게다가 탯줄을 목에 걸어 자살을 감행하는 행동까지 한다. 물론 어머니 배의 예기치 못한 눌림에 의해 좌절되기는 하지만.

 

또한 이렇듯 가끔은 예기치 않은 파동으로 벽에서 귀가 떨어져 듣지 못하기도 하지만 는 음모의 속닥거림을 엿듣게 된다. 진실하지 못한 트루디,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 동생인 클로드를 욕망한다. 클로드와 공모하여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트루디. 삼촌과 어머니의 계획을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지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선 태아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기억이지....(중략)...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태아의 아버지, 존 케언크로스가 아내에게 찾아와 재결합의 호소를 하지만, 어머니와 삼촌은 부동액 에틸렌글리콜을 그가 좋아하는 스무디에 믹스해 독살의 실행을 마무리하기 위한 계획으로 머리가 바쁠 뿐이다.

 

그리곤, 트루디, ‘의 어머니는 더러운 돼지우리로 내려가 멍청한 연인과 오물 속에서 뒹굴며 똥과 황홀경 속에 누워 집을 훔칠 계획을 세워서 착한 남자에게 끔찍한 고통과 굴욕적인 죽음을 안겼다.” 'To be or Not to be', 존재와 비존재를 망설이던 그 모든 전환과 수정, 오해, 통찰의 실수, 자기소멸의 시도, 수동적인 슬픔 끝에결정을 내린다. “이제 그만, ....” 삶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소설의 내러티브는 바로 이 결정을 위한 과정의 기록물이다. 삶이란 것이 살아낼 가치, 의미가 있는 것인지, 결국 검지의 길게 자란 손톱으로 양막(羊膜)을 찢고 세상으로, 거친 물질계의 장벽을 헤치고 삶의 세계, 존재의 세계로 나간다. 의식을 가질 한 번의 확실한 기회를 갖기 위해서. 그 결과의 세계, 내러티브의 마지막은 혼돈이다. 비록 혼돈이 이 세계의 정의이지만 가 동경하던 의식의 세계는 매혹적인 것이기에.

 

이언 매큐언이 쓴 햄릿21세기 판본은 이렇듯 'To be'에 방점을 둔 다른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transference)’를 떠올리게 하는 내러티브와 플롯은 텍스트는 기존의 내용을 대체하기보다는 새롭게 추가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실의 위상이란 곧 완결 없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예증한다고 했던 프로이트를 상기하게 된다. 내러티브들의 다양한 종결과 열린 상태, 이것이야말로 정신과정의 역동성 아니겠는가?

 

모두에서 기술했듯이 소설이 온통 전희(前戱)처럼 느껴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피터 브룩스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에서 섹슈얼리티(sexuality)에는 앎을 향한 충동, 모든 종류의 지식적 행위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인 호기심이 포함되어있다.” 라고 썼다. 이보다 섹시한 소설이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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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넛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예전 작품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시 비청출어람인가 봅니다. 햄릿도 다시
읽어 보려고 빌렸네요.

비의식 2017-06-20 13:44   좋아요 0 | URL
전 자궁속 존재의 ‘결정‘에 대한 궁금증으로 내내 고조되어 있었거든요. 작품 전체의 구조적 측면에서 발단-전개 따위는 모두 없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애무만 잔뜩 있는, 그런데 탁월한 기술로 말이죠, 일종의 페티시즘이라 할까요? 결정적인 것이 없어서 맥 빠질수도 있고, 또는 이것자체가 좋은 것일수도 있어서, 독자들마다 다소 상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