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해외 작가들의 선(先)인세가 지나치게 높이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국내 독자들을 형성하는 작가의 작품의 경우에는 출판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를 잘아는 작가는 이러한 니전투구를 관망하다가 최고의 인세를 지불하겠다는 곳에 팔아넘기는 식이다.

 

이 결과는 달랑 한편의 단편 소설을 포장하여 국내 작가들의 장편소설이나 소설집(대개 7~10편의 단편 수록)의 가격을 넘어서는  높은 정가를 붙일 수 밖에 없는 현실로 이어지고,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떠넘기는 행태를 보인다.

이번에 비채에서 출간하는 하루키의 신간은 이러한 현상의 가장 나쁜 귀결이 아닌가 의심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러한 사정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출판사들의 자정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자본 시장의 논리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정도의 지나침이란 것이 있다.  제아무리 풀륭한 작품이라도 독자들은 작가와 출판사를 외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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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미지는 도서출판 어문학사의 블로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임]

 

언제부터인가 작은 꿈을 꾼다.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야가 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공간에 대해서. 세 집, 네 집, 혹은 열 집까지 함께 열린 마음을 나누며, 의지하는 그런 친밀한 공간을. ‘아르카디아와 같은 커다란 자연주의 이상향, 그런 공동체가 아닌, 취미생활이나 공동의 대지나 공간을 함께하는 그런 작고 소박한 둥지를.

 

웹사이트를 둘러보다가 마침 '코하우징(CO-Housing)'으로 불리는 주거 대안에 대한 설명이 눈에 띤다.

; 통상적인 주택에 비하여 보다 많은 공간과 서비스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생활하는 주거단지로써, 공유공간을 사용하고 공동식사, 작업, 취미활동과 같은 공동 활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가족이 거주하는 주택(단독, 연립 형 등)단지를 일컫는단다.

    

[본 이미지는 도서출판 어문학사의 블로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임]

 

그러고보니 내 소박한 꿈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문학사에서 출간된 코하우징 공동체라는 책도 있고, 캐나다, 스웨덴 등지의 사례도 꽤나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다.

집과 집사이의 도로위에 유리 천장을 덮어 공동의 공간을 창출하고, 마당도 함께 가구며, 책도 읽고 담소를 나누는 여유로운 공간의 사진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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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탄생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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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호감을 갖게 된 소설이다. 아주 딴딴한 지면 같은 견고함, 그리고 어쭙잖은 희망을 남기는 부류의 관습적 형식의 틀을 벗어버린, 있는 세계 그대로의 날 것. 그래서 은폐된 우리네의 자기 기만성에 대한 예리한 심연을 드러내 보이는 통쾌함이랄까? 스냅 사진에 포착된 찰나들의 연속?, 혹은 잠재되어있던 무의식이 폭발하여 의식의 언어로 던져지는 순간의 그야말로 외설적이며 추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짧게 이어지는 그런 느낌.

 

우리는 세상의 욕망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혐오와 증오도 모방한다. 어쩌면 이것은 같은 것의 이면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내면화시키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자기만의 독자적인 주체가 있는 것처럼 말하며 행동한다. 이것의 부정성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자기기만일 것이다. 자기기만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로 축조된 세상은 강고하다.

 

작품집의 첫 수록작인 당신은 말한다는 세상의 소음을 자신의 불안으로 내면화시킨 여자의 편협한 시선의 끊임없는 자기 되먹임을 통한 믿음의 강화가 진행되는 영상을 보게 된다. 여자의 행위를 지켜보는 당신이란 시선을 말하는 화자(話者)의 진술은 기만적 진실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선족 베이비시터, 그 다름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라는 부정의 이미지가 공존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해 가는지, 또한 자신까지도.

 

이것은 네 개의 이름에서 변주되어 반복되는데 탈북자인 림미정(美停)이란 여성에 대해 동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북한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혐오의 낯선 무엇이었을 뿐, 여전히 오늘 우리들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혼란에 적대감을 지우지 못하는 미성숙의 상태에서 한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이 네 개인 것은 그녀의 탈북과 정착 과정에서 추가 된 고통의 현상들이다. 푸셰, 이일구(219), 임미정.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타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섣부른 호기심, 관음증이 아니라 진짜배기로 안다는 것. “개 사육장 냄새를 알아요? 그 냄새를 안다는 건 사람이 찢기고 부서지면서 나는 냄새를 알고 있다는 얘기예요.” 역시 우리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아마 이 다름의 구분, 범주화의 폭력성만큼 같아지기의 욕망과 차별의 극히 모순적인 기만성이 깃든 것도 없을 것이다. 브라질리언 왁싱, 신체의 자연성을 조절, 통제, 개선하는 곳, 위계와 위선을 관리하며, 쾌락까지 제고시키는 곳, 즉 자기관리를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왁싱숖이 무대인 단편이다. 아마 이 작품의 백미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위해 다이아몬드 형으로 다리를 벌리고 누운 여자가 주절거리는닭 이야기와 이를 듣고 있어야만 했던 왁싱 디자이너 정나나의 이어지는 행위와 입 밖으로 뱉어지는 언어의 짜릿함일 것이다. 누군가 내려다 볼 존재가 필요한 인간들의 그 외설스러운 욕망의 세계가 누추하고 천박한 당혹의 알몸과 욕지거리의 기막힌 궁합을 보여 준다. “명치와 같은 것이 있어서 이따금씩 툭, 하고 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더러운 기분이 널리 알려지기를.

 

공원 벤치가 들려주는 이야기인 네 개의 이름처럼, 사막의 뼈는 섹스돌이 화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앎을 얻는 과정은 구체적인 경험을 넘어서 관념적으로 있는 어떤 실존하는 존재라는 이해에서 이것들은 보다 인간적인 무엇으로 여겨진다. 편견도 선입관도 배제된 원형의 사유,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무런 차별도 구별도 없다. 아비는 세상의 상식에 편입될 수 없는 정신지체적인 아들을 컨테이너에 가두고 지속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곤 섹스돌(Sex Doll)을 던져준다. 인형이 포장된 상자 속 사용설명서와는 달리 아들은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이 간절한 외침은 다르게 이해된다. 이 대상이 그렇게 불려지는 것은 아비에게 용납될 수 없는 무엇이다. 소통될 수 없는 서로 다른 관념의 세계는 고통이다. 진정 우리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에어백에 처박혀 심호흡과 함께 요가동작을 하는 여자에게 떠오르는 교차되는 기억의 통증을 얘기하는점심의 연애는 헤어진 연하의 청년 케이의 절망과 자신의 좌절된 자기위로의 고통, 그 원형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까지 이른다. 여자가 도달한 곳은 마침내 어디 일까? 삶이란 것이 어찌 모든 것이 충족된, 완전무결의 그것일 수 있겠는가? 요가와 케이의 눈과 몸을 회상하는 여자를 채우고 있는 것의 결핍은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는? 무엇이 우리들을 불안케하고 불만족스럽게 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이 소설은 자꾸 내게 질문을 퍼붓게 한다.

 

나는 소녀의 자궁 안에 있다.”자신이 느낀 최초의 감정은 싱거움이었다고 발칙한 주절거림을 하는 태아가 관찰하는 모태인 소녀의 이야기인 소녀 의 난은 오늘 우리들이 앓고 있는 신경증, 분열된 정신적 징후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어떤 자극이란 분명 외부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자극을 수용하여 내면화하는 것은 자기이다. 소녀는 고통이 된 세계의 소음, 삶을 견뎌내기 위해 외부에서 그 긍정성을 찾는다. 윤이라는 유부남과의 만남이 고통을 유예시켜주지만 그의 홀연한 떠남은 동년배인 그의 딸 치아를 발견하게 하고 그녀를 통해 다시금 삶의 지속적 에너지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 또한 빗나간 진단임을 우리는 안다. 아니 추상하고 추론하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태아는 이를 알고 있다. 소녀는 를 긁어낸다. 이제 나는 소녀의 자궁 밖에 있다그리고 비로소 나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그림자가 되어 소녀를 따라간다.

 

이 장면은 은폐시키고 억누른 무의식,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인 자기를 둘러보라는 권고처럼 들린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만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자기에 대한 이해는 오류와 왜곡과 무지를 바로잡고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일 게다. 신경증 환자처럼 분열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은 언제나 타자만을 비방한다. 이 소설집은 꽤나 날카롭다. 예리하게 선 날이 우리 자신을 해부해보라고 권유한다. 그래 이 소설집은 오늘 우리네 인간성의 해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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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기행 - 옛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읽기
심경호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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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副題)가 눈을 사로잡았다. <옛 사람이 스스로58편의 묘비명 읽기>이다.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며 살아 온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고 애도하는 만시(輓詩,挽詩)이다. , 이것은 죽음에 대한 사색이자 곧 삶에 대한 사색이며, 자기 안의 숭고함을 되찾는행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자기 자신을 비로소 음미할 시간을 갖는 것, 그들은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들을 적어 나갔을까? 그리고 내 묘표 혹은 묘지(墓誌)에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를 생각게 된다.

 

첫 장을 여는 자찬묘지(自撰墓誌)는 고려 말 보문각 대학사를 지낸 김훤(金晅)의 것이다. 그는 복숭아와 배가 문에 가득하다(문생들이 많은 것의 자부를 은유함)”, ‘이만하면 괜찮다!’라고 했다. 과연 이처럼 내 한 평생을 만족스러움으로 술회해 낼 수 있을까? 내겐 무수한 시행착오와 근심, 모욕, 어리석음, 부박함이 먼저 떠오른다. 어찌보면 반백년을 넘어선 내 삶의 자취란 오욕(汚辱)의 세월인 것만 같기도 하다. 그래서 책 속 인물들의 내면(內面)세계를 기행하려는 욕구는 더욱 밀도 있게 다가서게 한다. 삶에 대한 자기 고백을 얼마나 진솔하게 써 낼수 있는 것인지.

 

수록된 대개의 인물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이조. 예조, 호조, 병조 등 각조 판서, 참판, 대제학, 대사헌 등 소위 최고의 사대부 계층들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몇 안 되는 범인(凡人)의 자명(自銘)이나 자지(自誌)는 더욱 시선을 끈다.

 

재주 없는 데다 덕 또한 없으니 사람일뿐.

살아서는 벼슬 없고 죽어서는 이름 없으니 혼일뿐.

근심과 즐거움 다하고 모욕과 칭송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흙일뿐.”

 

1512년 중종 대의 사람인 이홍준의 자명이다. 육신은 생전의 근심과 즐거움을 다 잊고 모욕과 칭송도 다 없어져 흙으로 돌아갈 따름이라는 이 허허로운 문장에서 달관의 늠름함이 느껴진다. “하루라도 아직 죽지 않았다면 그 하루만큼 아직 근심과 책임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人生蓋棺論定, 一日未死, 卽一日憂責未已)”라는 명나라 유대하의 말처럼 죽음으로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체득한 육신의 언어일 것이다.

    

 

읽어나가다 멈칫 유사한 자기 조롱의 문장들이 거의 모든 이의 자명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규모를 시험 받았지만 본시 넓지 않았다.”

결정해야 할 기로에서 우물쭈물하기만 했을 뿐....”

성격이 본디 졸렬하고....자기 몸에서 터득할 수가 없었으니...”

어려서부터 익혔어도 백발이 되도록 엉터리이다.(童而習之, 白紛如也)”

이러한 자기 폄하의 서술을 이상적인 인물에 맞추어 스스로 꾸짖거나 조롱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박함 앞에서 하는 언어이기에 외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삶에의 열망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정조 대 노론계 학자로서 이조판서 등을 제수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던 박필주의 성격이 본디 졸렬하고....자기 몸에서 터득할 수가 없었으니, 실제 얻은 것이 있다고 해도 결국 휩쓸려서 잃어버리고 말았다....지금 거의 70세가 박두했거늘, 여전히 오도카니 한낱 용렬한 사람일뿐이다....얼굴이 뜨거워 진다.” 라는 자지(自誌)근대 이전(조선조)의 개인은 욕망하는 개인의 진리를 탐색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미흡성이라는 진단을 전복시킨다. 수치를 깨닫는 것, 결여와 결핍을 깨닫는 것은 진정 삶의 열렬한 애정이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진경산수화로 잘 알려진 강세황의 기록 중 아내 유씨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문장은 대제학의 자식으로 태어나 현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처절한 회오(悔悟)와 사랑의 감정이 짙은 감동의 여운을 남겨준다.

공인(아내 유씨)이 가난했던 것은 내가 살림을 모른 잘못이고, 공인이 곤란하게 지낸 것은 내가 과거를 하지 못한 잘못이며, 공인이 병을 앓은 것은 내가 치료하는 방법을 모른 잘못이다......나는 무슨 마음으로 얼굴을 쳐들고 이 세상에서 사람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자의식의 드러냄을 회피하거나, 자아의 대립을 직접 반추하지 않았던 당대의 사대부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진솔 담박한 정신과 마주하는 기쁨을 준다.

 

58편의 자찬비명을 통한 선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기록물인 이 책은 이와 같은 숭엄한 자기 성찰의 변()뿐만 아니라, 대개의 인물들이 조선 조 역사의 주체적 역할을 수행한 이들이기에 사적(史的) 사실의 주변을 거닐 수 있는 안목을 넓혀주기도 한다. 남한산성에 갇혀 논박을 거듭하던 김상용을 비롯하여, 성리학의 거두인 이황, 실학자인 유한준, 정약용, 서유구에 이르는 인물들이 스스로 써내려간 비명을 보는 것은 지적 횡재이면서 또한 우리네의 삶을 둘러보는 데 의미 있는 지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 자찬묘비(自撰墓碑)

자기의 죽음을 예상하며 지은 글로써 혼령이 다닌다고 여기는 무덤 동남쪽의 묘도(墓道)에 세우는 것을 묘비, 묘표, 묘갈이라 하며, 무덤구덩이인 광중(壙中)에 묻는 것을 묘지(墓誌)라 한다. 묘비, 묘표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비명(墓碑銘), 묘지에 운문이 첨가되면 묘지명(墓誌銘)이라 하고, 그러한 기록들을 통틀어 편의상 자찬묘비(自撰墓碑)라고 부른다. -본문 P 11中 발췌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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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2
필리프 코마르 지음, 안정미 옮김 / 시공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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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개의 이미지 도판과 함께 편집된 이 독특하고 작은 소책자에 시선을 못 박게 된 것은 문자 그대로 인체(人體)’, 사람의 몸이란 것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여겼던 것에 대한 엄청난 무지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21세기 오늘의 담론들을 바라보면 시대성이란 것에 적응하기 위한 사람들의 자기 신체에 대한 변형의 욕구들, 젊음의 유지와 수명연장, 나아가 불멸에 까지, 신체성에 대한 포기에 이르는 마치 무능하거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한낱 물질적 대상화된 인식의 불편함 때문이랄 수 있겠다.

 

필리프 코마르의 이 저작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의 오랜 문명사를 통해 인간이 자신들의 신체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또한 그러한 인식들이 어떻게 인간의 시선을,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 것인지에 대한 줄기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우주관이기도 하며, 미적 관념이며, 심리적 변천의 지성(知性)()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고대의 동굴벽화나 발굴된 조각상들에서처럼 인체는 상징, 즉 종교적 대상의 비유적 의미에서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수리철학 발흥과 함께 종교적 의미를 벗어나 대칭과 비례, 균형을 중시하는 공간개념 속에 인체를 반영하며, ()적 대상으로 변화한다. 그리곤 이러한 이상적인 인체란 현실과는 괴리된, 본질적으로 평범함을 넘어선 속성임을 자각하며,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위해 인체 비례체계를 고안하고, 자연계 전체의 균형과 인체의 조화를 반영하는 사유로 진행된다.

   

 

이 시선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우주의 중심에 선 인간상에서,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대변되는 우주의 실제적 거리라는 과학기술 앞에 왜소화된 인간으로, 유형화된 인간의 분류로, 급기야는 해부와 해체를 통해 변형의 유희라는 단계를 거쳐 꿈에 그리던 인간의 모습에 이르는 인체의 역사를 종단해 낸다.

이 여정은 이상적인 인체에 대한 욕망에서 모욕당한 인체, 해부와 해체를 통한 내부의 탐색이 야기한 인체의 시각적 이미지의 반향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지나 마침내 오늘의 베일을 벗은 인체의 적나라하고 물신화된 외형에 도달한다.

 

특히 인간의 신체성에 대한 측면에서, “신처럼 작동될 수 있는 인체를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1633년의 르네 데카르트의 선언과, 1741, 자동인형 발명가인 자크 드 보캉송이라는 인물의 리옹 아카데미에서의 발언은 흥미를 이끈다. “자동인형을 이용하여, 동물성 기능에 관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건강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다. 1818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되기 200년 전에 이미 인체 창조의 욕망을 발견하는 것은 비단 21세기의 독특한 인식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자기의 몸인 인체에 대한 베일을 벗겨냈다는 자신에 찬 오늘의 인류는 이제 자신의 그것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하며, 마침내 생산물화하고 있다. 인간 고유의 정체성의 변질, 다시 말해서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이해를 허물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러있다. 인간이 다른 인체를 기획할 수 있다는 전망에 경악하고, 내 직관적인 도덕적 감수성은 당혹스러워 한다.

인체를 자르고 꿰매며, 급기야 이를 벗어나려는 자연의 기술화는 분명 윤리적 자기이해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돌파해낸 만들어진 기술적 존재, 자신의 삶의 저자가 아닌 존재에게 그 어떤 도덕성과 규범적 책임성이 요구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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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0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몸은 과거나 지금이나 남성이 만든 미의 기준에 의해 변형되고 통제됩니다. 미래에 ‘호모 데우스’가 등장하는 시대가 와도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식 2018-04-06 17:56   좋아요 0 | URL
어떤 현상이나 사상에 대해서 여성주의적 비판도 요구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두를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인체‘는 젠더의 구분을 떠나 왜곡되거나 남용되어왔습니다. 테일러의 동작연구와 같은 남성 근력을 최유효한 노동력 착취의 대상으로 보아왔으며, 모욕의 대상으로서 공히 이용되기도 했어요. 유발하라리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은 <향연>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즈의 태초의 인간인 남녀의 구분이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요? 다만, 여성이 그간의 문명사에서 ‘차이‘를 지닌 존재로서 남성의 시선에 장악되었었다는 cyrus님의 지적은 분명 옳은 이해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시대가 수행하는 미투처럼 문명의 그 취약점이 시정되도록 다함께 노력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