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프랑스 작가‘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한 작품 『그로 칼랭(Gros-Calin)』을 접하자, 우연히도‘니콜라 파르그’의 작품에서 지적 아름다움의 비유로 인용된‘진 세버그(Jean Seberg)'를 발견하게 되었고, 한동안 미루어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다. 1962년 결혼한 로맹가리와 진세버그의 관계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로맹가리의 작품에서 진세버그의 영향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하는 것들...

             

1914년5월8일 러시아에서 출생한 로맹가리와 1938년11월13일 미국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무려 24년의 연령 차이를 둔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두 사람의 명성만큼이나 적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인지는 정황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진세버그의 데뷔작인 <성 잔다르크>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세실’역으로 출연하면서, 당시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로맹가리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던 두 사람으로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이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60년 6월 진세버그는 첫 번째 남편인‘프랑스와 모레이유’와 서둘러 이혼한다. 그러나 가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그의 외교적 업적을 가능케 했던 아내‘레슬리’와의 이혼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슬픔이여 안녕>이 상영된 1958년 이후부터 서로를 동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0년 프랑스‘장 뤽 고다르’감독의 발탁으로 일약 세계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그녀의 출세작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1960년) 이미 프랑스의 유명작가이자 고위 외교관이었던 로맹 가리의 어떤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호감과 영향의 행사는 두 사람을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1961년 봄부터 이 두 사람은 동거에 돌입하고, 레슬리와의 이혼이 매듭지어지는 1962년10월16일 결혼식을 올린다.

진 세버그의 영화촬영이 있는 날이면 로맹가리가 항시 동행하여 격려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고 증언하는 것이나 1963년 이들의 아들인 디에고의 출생이 있었던 사실로 보면 두 사람은 성격이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일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부신 외모와 밤톨을 깍아놓은 듯한 단단하고 새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극히 내성적이고 자신을 꾸미는데 인색하며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진세버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고통 받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이 민감한 프랑스 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닐 수 없게 하였던 모양이다. 나긋하고 순종적이며 헌신적인 여인, 그래서인지 괴팍하기만 했던 가리의 성격이 다 변할 정도였다니 진세버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의 영화 촬영장에 따라다녔다는 것은 그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촬영 장소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몇 개월 간의 체류에서 외교관 시절 딱 한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페루의 해변으로 이어진 것이다는 작가의 설명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들 부부에게는 그리 훌륭한 것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맹 가리는 이 작품으로 영화를 제작 감독하게 되는데, 아내인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면서 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환상적이고 적나라한 촬영을 요구하여 극한의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정신적 상처를 주기에 이르는데, 아마 이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고 미국에서 X등급 판정이 내려질 정도였으니 아내로서 진세버그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진 세버그의 타인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사회활동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조명하는 것도 이후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체를 추측케 하는 유용한 성찰이 된다.‘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해 인권운동을 하고, 흑인자경단‘블랙펜더(Black Panther)'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등 민권운동가로 활약하는데, 이는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결국 당시 FBI국장‘존 에드거 후버’의 지휘 하에 매스컴을 동원한 입체공작을 통해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970년 그녀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진세버그가 불법시위를 주동하고 마약에 빠져있으며, 흑인과격단체 중 한명과 추잡한 섹스를 하여 임신까지 하고 있다고 악질적이고 근거 없는 추문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잔인한 공격을 지속한다. 남편과의 정신적 갈등에 더해 정치적 음모로 한 여인을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광적인 공작으로 진 세버그는 가리와의 사이에 잉태한 두 번째 자녀인 딸‘니나’를 조산하게 되고, 니나는 이틀 만에 사망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사악한 정치권력의 폭력은 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리고, 급기야는 1979년 9월 8일 그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추측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것이다에서 FBI의 살해다라고 분분하지만 이 역시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도 남을 이야기다.

 

이에 분노한 로맹가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사회에 분노하며, 한 고귀한 생명에 대해 가해진 FBI의 끔찍한 공작이‘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기에 이른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던 진 세버그의 요청으로 이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대략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로맹가리가 죽기 8개월 전에 작성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텍스트가 몰고 온 세상에의 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라는 고백이다.
자살하면서 가리가 남긴 <결전의 날>이라고 쓴 한 쪽의 유언 또한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 할 것이다 ; La Nuit sera calm』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자신의 자살은 이혼한 아내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으니 부질없는 추측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며, 상심한 마음이나 신경쇠약의 문제는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만 자살이란 죽음이 자신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대단한 작가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대한 작가와 은막의 대스타의 결합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기치 않은 탐색을 다하여 보았다. 대작가인‘F.스콧 피츠제럴드’와 혹독한 정신병으로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렀던 그의 아내‘젤다 세이어’가 오버랩 된다. 닮은꼴의 커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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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6-2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딱 궁금했던 스토리를 이렇게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진 할로우와 혼동하기도 했어요. 둘 다 은막의 스타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서도 공통의 교감을 보여주어서 신기합니다. 로맹 가리의 유서도 참 흥미롭네요. 아내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지적하는 대목도^^;; 잘 읽고 갑니다.

비의식 2010-06-25 21:24   좋아요 0 | URL
로맹가리는 자기문학에 일종의 신성을 부여하려했던것 같습니다. 여기에 모두 기술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의 프랑스총영사까지 지냈던 사람이 장관 비서까지 하면서 자기작품의 PR에 열을 올리기도 했구요, 사실 에밀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하는 행위의 숨겨진 의도에는 추락한 자신의 이미지를 회피하기위한 방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세버그는 그야말로 천사였지요. 엄청난 지원자였던 첫번째 아내 레슬리를 떠나게 할 정도의 여자라면 아마 그 이상의 헌신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아무튼 이 두사람의 관계는 알수록 흥미로운 요소가 많습니다...

반딧불이 2010-06-27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비의식 2010-06-27 17: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맹가리의 작품을 읽을실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별헤는밤 2010-06-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읽었었는데,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네요.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

비의식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그로 칼랭>이 당시 출간될때 배제되었던 부분까지 수록되어 결정판으로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고 있답니다...

비연 2010-06-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팬으로서, 잘 정리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내와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불행하게 마무리되어 슬픈.

비의식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진 세버그의 죽음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로맹가리가 과연 자신의 문학을 완성한다는 이유로 자살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구요...

레와 2010-07-0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자기 앞의 생]을 읽었어요.
이 작가에 대해 더욱 궁금해지는데, 남은 작품중에 어떤 책을 먼저 읽는게 좋을까요? ^^

실례가 안된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

비의식 2012-06-26 07:20   좋아요 0 | URL
읽으신 <자기앞의 생>은 <그로칼랭>,<가면의 생>,<솔로몬 왕의 고뇌>와 같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이구요, 그 밖의 작품들은 '로맹 가리'로 발표된 작품입니다.
특히 이들 작품은 '아자르 語'로 불릴만큼 선명하게 문체와 서술방식이 다르기때문에 이들을 우선 읽으신 후, 여타 작품을 읽게되시면 보다 폭넓은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제 私見이니만큼 절대성은 없사오니 레와님의 독서 취향에 따르시는 것이 오히려 답이 아닐까 합니다.)
 
난 네 뒤에 있었어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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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유일한 소설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감정의 미세한 흐름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화자에게서 삶의 민낯 그대로를 보게 된다. 사랑하고 질투에 분노하며, 비참한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또 다른 성적욕망에 행복과 불안으로 갈등하는 남자가 있다. 사실 소설의 테마만 놓고 보면‘사랑과 이별’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밖에 없지만 일상의 사건에서 부딪는 순간순간들의 감정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자기 행복을 꿈꾸는 인간들 본연의 욕구에 대한 숨김없는 발설,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에 대해 수없이 반복되는 이해와 갈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오해와 균형을 상실한 관계의 비대칭성이 가져오는 고통 등이 내면의 서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의 맛으로 진부함을 완전히 참신함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화자(話者)인 30대 남자가 쏟아내는 처연해 보일정도의 세세한 내면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하는지, 자신에 대한 엄숙한 비판인가하면 어느덧 아내‘알렉상드린’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결함을 우회하고 있고, 필요이상으로 아내에게 무력감을 보이며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남자인가 하면 스물일곱 남자로 변하여 자유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자신감 넘치는 남성을 희구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오르내림으로 멀미가 날 정도이다.

“잠자리를 할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불쑥 내뱉은 고백으로 전깃줄에 상처가 나도록 얼굴을 맞고는 비열한 위협으로 죄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한 자신이기에 아내의 감당해야하는 고통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다는 남자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 자기의 비굴할 정도의 희생은‘마조히즘의 극치’였다고 말하는 남자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을 자기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일방적 감정을 강요하는 아내, 항상 화를 내는 폭력적 아내에 대한 잠재의식 속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화자는 한 달 반 동안 쉬지도 않고 신뢰를 손상한 대가를 치르지만 필요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아내에 대한 적의로 고통을 받는다.

한편 소설의 중요한 두 사건인 아내가 태연히 저지르는 성적 일탈과 화자의 이탈리아 로만체에서의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발생한‘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로부터 파생하는 심리적 파동의 섬세한 묘사는 바로 이 작품의 탁월함 그 자체로서, 아마 이러함이 소설을 풍요롭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 성적탐닉에 빠져버린 아내의 수첩을 우연히 읽고 반응하는 화자의 절망적인 감정의 흐름은 그야말로 문장의 진수이다.

“나아닌 다른 몸을 향한 사랑의 말을 읽고 또 읽었어. ~ 나는 그 글을 읽는 바로 그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줄 알았지. ~ 중략 ~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아무 차에나 뛰어들 수도 있다는...”
“그녀는 나 없이 정욕의 역사, 일시적인 열정의 역사를 체험한 거야. ~ 그 자식의 완벽한 육체와 무심함에 홀딱 반했지.”

이렇듯 배신의 고통으로 몸을 떨면서도 아내의 성적 욕망은 부부의 사랑, 가정의 존속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더구나 아내와 헤어지자고 한 비열한 남자로서 당연히 감수하여야 할 문제로 말이다. 그럼에도“그놈의 호텔방에서 섹스 할 때 쏟아냈을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화자에게서 제도와 윤리,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 대한 끊임없이 소모적인 충돌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운명적 만남이 남자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사랑, 성적욕망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된다.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아내기도 했던‘진 세버그(Jean Seberg)'처럼 윤곽이 또렷하며,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나오는 금발의 라틴계 마돈나”라고 묘사되는 여자, 알리스로부터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랑의 희열, 행복과 삶의 자유에 대한 이해이다. 작품의 표제인‘난 네 뒤에 있었어(Ero dietro di te)’는 바로 이들 만남의 표상이기도 하다.

“꿈결과도 같은 구원의 이 늦여름 햇살, 내 마음을 달래주고,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이 햇살, 이 자유의 빛, 정지된 시간, 제 빛을 되찾은 색채, 완벽하리만치 온화한 대기, 매혹적으로 전개되는 일들...”

같은 순간에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미지의 여자를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 행복을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바로 알리스가 그런 여자라고. 행복은 그런 여자. '랭보‘의 「감각」이라는 詩의“여자와 함께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바로 그런 감정. 소설 속 길게 나열되는 사랑의 산문시 같은 문장들에서 만사를 잠시 잊고 문득 언젠가 느꼈던 것만 같은 늦여름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그리워지고 좋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에 순응하며 희생하는 남편, 배려하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중독증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여자와 이러한 기만적인 감정으로 심적 고통과 삶의 균형을 잃어가는 남자의 내면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에서 그려진다. 결국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같은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자에 대한 로망은 남자에게 자신을 생각할 권리, 삶의 본질적 자유를 환기시켜준다. 남편의 감정을 지배하려는 아내의 굴레를 벗어나 프랑스에서 연인이 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남자, 그리곤 5일간의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그의 시선에 비친 제야의 불꽃에서 왠지 심각하고 복잡한 인생이란 벗어던질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아득함이 느껴진다. “경쾌함에 대한 작은 환상”이라고 치부하면서, 더구나 “각자가 지닌 비밀의 정원 속에 감추어진 멋진 추억”정도로 묻어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여자와 평생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 작품은 이렇듯 사랑했으며,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네들 모두에게 항상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햇살이 적당하고 만사가 순조롭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인데, 바로 그 햇살의 기억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무능한 남자의 고백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고 시린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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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2 - 천문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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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인문편이 강호고수의 걸출한‘구라빨’이었다면 2권인 천문편은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풍수와 사주, 관상이 어울려 사람답게 사는 법, 자연과 화친하는 법등 우주의 섭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까. 해서 산과 강, 자연이 있고, 천지의 질서인 태양과 달을 말하며, 유약한 인간이 섬기는 신의 세계인 종교가 있고, 우주 질서 속의 미물인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보약 세 첩 먹는 것보다 등산이 좋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등산 예찬을 하면서, 40~50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대 종주코스를 완등(完登)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 고단백 에너지 코스로 바위의 화기(火氣)와 계곡물의 수기(水氣)가 이상적으로 버무려져 있는 백담사에서 봉정암 올라가는 길이 최고라고 적절한 중용의 길을 안내한다. 산을 오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통즉등산 通則登山, 궁즉입산 窮則入山”이라고 즐거워서, 또는 삶의 궁지에 몰려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든 묶었던 노폐물이 걸러지는 상쾌함과 다 올랐을 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이면 삶이 평화로워지는 것처럼 입산이건 등산이건 한 번 날 잡아 떠나야 할 터이다.

양기가 뭉친 명당이라는 지리산 남쪽의 악양(岳陽), 봉우리들이 뾰죽하여 화기가 넘친다는 화체산인 화왕산과 200칸 규모의 고택인 아석헌(我石軒), 속세의 먼지가 없는 절경인 관동팔경과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교장, 논산 노성리 윤증고택 등 풍수에 얽힌 재담과 이들에서 맛보는 별미인 무장공자(無腸公子)와 탕중왕(湯中王)이라면서 얼마나 맛있었으면 먹을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민어탕에 이르면 역시 저자의 입담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자연 모두에서 절절한 사연들을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궁극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통하는 거대한 줄기를 발견케 된다. 선탠이 있으면 문탠(moontan)도 있어 매월 보름에 달의 기운을 받으면 오장육부에서 달 월(月)자 들어가는 장(腸)과 부(腑)가 튼튼해지고 감성에너지가 회복되어 화병이나 우울증을 다스리는데 좋다는 해설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방편의 고수다운 인생지침이기도 하다. 문득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지는데,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미세한 조짐에 대한 감지를 말하는 구절에서“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 中略 ~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하는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詩구절과 겹쳐,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이 그 누군가일 것 만 같아 조심스러운 긴장이 돌기도 한다.

한편 저자는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도덕을 야기하고 인물이나 정치사회의 일면을 은근슬쩍 비판하는 세련됨도 선사한다. 명당자리에 묻히면 후손들이 잘 될 거라고 명당을 찾지만, 풍수에도 윤리가 있단다. 도덕적 자격에 미달하는 자에게는 발복(拔福)하지 않는단다. 그러하니 적악자(積惡者)가 제아무리 명당에 묻히더라도 복하고는 인연이 없다니 살아서 공덕을 부지런히 들 쌓아야 할 터이다. 특히 이 저작에서 풍수법 하나를 배웠다면 화기와 수기에 대한 것으로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소실된 숭례문이 정면에 화기가 넘쳐나는 관악산 때문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채워줌)용도로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금싸라기 땅이고 도로확보 때문에 메워버려 표지판만 남아있다니, 만일 이 연못이 있었다면 역사적 유적이 그렇게 맥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과론이긴 하나 풍수론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돌산(돌산-관악산-서울大)은 불이고, 기가 세단다. 그리고 돌 속에 잠재한 광물질로 인해 뇌세포의 활성화를 도와 암석위에 사는 것은 정신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게 좋다니 어디 돌산위에 지은 집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지반이 온통 돌인 평창동, 구기동이 고급주택가로 뒤바뀐 것을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팔자니 관상이니 궁합이 맞느니 그렇지 않느니 하는 것에 사실 아예 관심이 없는 내게는 이 저술 중 예언, 사주, 관상을 말하는 운명의 장은 내키지 않는다. 다만 전, 현직 대통령의 관상을 동물의 유형에 빗대어한 운명 풀이처럼 심심풀이 장도 흥미롭거니와 나이 쉰이 넘으면 얼굴에 격(格)이 천격과 귀격으로 정해진다는 성찰은 나름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탐안(貪顔), 진안(嗔顔), 치안(痴顔)은 아닌지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고, 지안(知顔), 호안(好顔), 낙안(樂顔)이면 잘 산 얼굴 아니겠는가하며 또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즐거움이 어려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의 수려한 산천과 고택 사찰은 물론 천문의 신비를 주역으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삶의 이치가 저자의 넉넉한 품성만큼 여유롭고 풍요롭게 수록되어 있는 역술 기행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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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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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귀신(鬼神)하면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피를 흘리며 소름끼치는 흐느낌을 하고 나타나는 처녀 귀신의 공포를 떠올린다. 이렇게 고정화된 이미지와 귀신 이야기는 서늘한 두려움과 공포로 무더위를 날려버리겠다는 납량(納凉)물과 같은 단지 흥미의 산물이기만 한 것일까? 이들 귀신 이야기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의 본질적인 내면은 무엇일까? 왜 귀신하면 우리는 여자 귀신을 떠 올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회적인 무슨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은 한국의 귀신에 대한 조선후기 대표적 야담집인 『동야휘집』,『기총문화』,『청구야담』을 비롯하여, 고소설에 나타난 귀신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사회적 기호로서 표상된 이야기의 본성과 정신을 해독하고 있다.
“생사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이란 이원적 구분을 조롱”하는 존재이자, “생기를 먹고 사는 사신(死神)의 기호”로서“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 낸 가학적 증거물”이라고 귀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는데, 아마 죽었음에도 억울하고 분한 원한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넘보며, 하나같이 귀신을 보면 그만 죽어버리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 현실적 규범과 질서에는 균열이 생기고 세계는 혼란에 빠지는데 현실이라는 삶에 죽음이라는 귀신의 충돌은 이미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는 대 혼란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소복을 하고 흐느끼는 여성이 한 밤중에 나타난다면 소스라치는 놀라움, 그 충격은 물론 아마 심장이 멎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귀신이야기에는 유독 처녀귀신이 주로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한문으로 써진 야담의 독자, 즉 이야기의 향유층이 사대부 남자였다는 점과, 당대 여성은 살아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가당한 일이 아니었으니, 오직 죽어서만 소위 ‘말하는 입’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던 여자들이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性)의 구분, 즉 성의 차별적인 요인을 발견 할 수 있다. 야담과 고소설 등에 등장하는 귀신 중 한결같이 억울하게 죽은 원귀(寃鬼)나 자살귀(自殺鬼)는 여자귀신이며 통계적으로 여자귀신 대비 10%에 불과하게 간혹 등장하는 남자귀신의 경우 가족을 수호하고 미래를 알려주는 조상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귀신 이야기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건 향유층인 사대부 남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보편성을 덧입힌 방편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을 들 수 있는데, 나타난 처녀귀신은 자신의 원한을 직접 복수하지 않고 꼭 남성인 관리들에게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야기를 잘 못 살피고 있는 것으로서, 귀신의 호소는 원한을 복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게 된 사회적 여건을 말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여 훼손되고 추락한 자신과 가문의 자존심을 복구하는 데 있었기에 불가피한 것이라는 측면을 알게 되면 당연한 맥락임을 이해케 된다. 다시말해 귀신이야기는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교정을 요청하는 전복의 서사”이며, “현실의 복구를 강렬히 희구하는 환원의 서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귀신들이 털어놓는 사연은 타의에 의해 억눌린 감정과 출구를 봉쇄당한 말들로써, 억울함과 분노, 슬픔과 절망으로 버무려진 순도를 상실한 묵은 감정이라는 억울함이 뒤섞인 불편한 정서로서, 그 실체는 바로‘한(恨)’이라는 것이며, 이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절한 수단과 과정으로서 사대부 남성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납득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와 관련하여 원혼이 되는 여인네들의 자살에 대해서 물음을 갖게 되는데, 그녀들의 자살을 과연 개인적인 책임으로만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고찰하는 기막힌 이야기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충(忠),효(孝),열(烈) 삼강(三綱)의 덕목을 동시에 완수하고 희생된 여종의 이야기로서 자신을 탐한 양반을 죽이려는 동료 노비들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양반에게 미리 이를 고하여 죽음을 면케 하면서, 이들 노비들을 처벌할 때 대신 자신의 아비만은 살려달라고 청한 후 자살한 여종의 이야기이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사대부 양반남성에게 충하고 노비인 아비에게는 효하며, 지아비에게는 열하였다는 것으로 이에는 여자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외적 명분에만 관심을 보내는 문화적 맥락을 살 필 수 있는 것으로서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의 다름 아니었음을 발견케 된다.

한편 여인네들의 간절한 소청을 물리쳐 그 수치심과 좌절로 자살한 여인네들이 원혼이 되어, 자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남성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에서, 상처받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즉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자의 출세나 성공은 좌절되어야 한다는‘시대적 합의’가 깃들어 있으며, 이는 곧 귀신이야기라는 공포의 기호가 문화적 건강성의 자리로 탈바꿈하여 사회적 건강성의 지표로서 작동하였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귀신이야기는 저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현실의 이야기이며, 귀신담의 공포는 엄밀히 말해 귀신의 복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죄책감, 자기처벌의 형식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 발설하여 불합리한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는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무방비의 복색인 소복을 한 쳐녀귀신의 패션코드로부터 한국사의 트라우마인 장화홍련, 금오신화의 여자귀신들과 같은 흥미롭고 기발한 이야기와 인문학적 독해는 물론, 다채로운 귀신담들의 소개와 이에 대한 사회사적 성찰, 게다가 “귀신의 말하기는 문화적 위험지수에 대한 안전장치이자 일종의 경고음이다.”라는 문화인류학적 통찰까지 우리 전통문화의 한 기호에서 화려한 정치도덕적 소통 도구를 발견케 하는 한국문화 해석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제 귀신은 개인 정체성의 형상화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환기하는 장치로서 해독되는 하나의 문화적 기호임을 명료하게 환기시켜준다. 어쨌거나 30여 편의 귀신 이야기로 짜여있는 이 저술이 귀신이야기를 사회적 책임과 죄의식이 만들어 낸 공통의 문화적 사유임을 설파하고 있지만, 바로 이 예리한 해석을 수반하고 읽게 되는 귀신담은 재미에 그 상상력이 더해져 대단히 매혹적인 저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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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닷되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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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을 되돌아보니, 아물아물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이네. ~ 그 슬프면서도 설레던 시의 편린들을.” - 본문 P10 中에서

뉘엿뉘엿 황혼이 검붉게 물드는 인생의 시간은, 작가가 노래하듯 성장의 진통을 겪던 어린 시절의 그 아릿하고 시린 기억들이 아름답고, 슬프고, 또한 설렘이 교차하는 안타까움인가보다.‘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파우스트’를 자신에게 비유하였듯이 젊은 날의 기억인 이 소설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악마인“시꺼먼 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을 만큼 그 꽃 같은 시절로의 회귀는 간절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에세이처럼 펼쳐지던『해산 가는 길』이라는 작품의 연작으로서 『보리 닷 되』는 인생길의 선택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성년 이행기의 자전적(自傳的)소설이다. 작가의 문단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목선」이 탄생하기까지의 젊은 날의 치기와 오기에서부터 실패와 성공에의 갈등,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 만 같던 좌절의 운명을 교정하는 집념의 시간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른다. 가부장제의 전통, 병영국가의 획일적 군사문화, 겉보리 닷 되로 상징되는 가난한 삶의 끈적거림에 대항하고, 애틋한 사랑과 세속적 성공이 소설가 시인이 되고자하는 청년의 삶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친다.

빗나가기만 하는 형의 그릇됨을 방기하여 장자세습의 전통에 저항하는 둘째의 심리가 비밀스럽게 고백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학교 악대원이 되어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교련시간을 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거예요.”라는 소박한 꿈은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는 괴리된 실패의 삶으로 이해되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도, 연인에게서도, 형제로부터도 외면되는 것이었으니, 집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쟁기질하고 김을 뜯어야 하는 문학청년의 번민은 자신의 현실이 과연‘성공을 준비하는 것인지, 실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시름을 깊어만 가게만 한다.

한편 소설에서 주인공‘승원’은 오금의 고질적 피부질환으로 수시로 긁어대는데, 바로 이“오금의 환부”는 긁어대어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아 걸음에 불편을 주는 고통이지만, 마구 긁어대면 가려움과 아픔을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환장할 것 같은 쾌감이기도 하듯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역설이자 인생의“모순된 슬픈 거래”로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 오금의 가려움증이 낫게 될 때, 비로소 성장의 통증은 치유된다.

“소설가의 말로는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하여 가출하고는 머슴살이의 반복되는 노동에서 언덕위로 돌을 나르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지만, 바로 이 영원할 것만 같은 동어반복의 고통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자신일 뿐이라는 깨달음, 그리고“오직 혼자만의 지혜와 판단과 힘으로 이를 갈면서 올바른 물길을 찾아 배를 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바닷가 거룻배 위의 교훈처럼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임을 어느 순간 우린 터득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고지 팔십팔 매의 단편소설「목선」이 게재된 신문을 아버지 영정 밑에 걸면서, “아버지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라는 주인공의 울음석인 자부심의 목소리가 짠하게 울려온다. “실패를 준비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이 진짜 소설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우린 누구나 다 이렇듯 자기만의 부대낌과 통증을 앓으면서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제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 해산 토굴마당에서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적 뿌리가 된 꽃 같은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이 소설에서 진정“파릇파릇 새싹들”이 움트는 것을 확인케 된다. “시쓰기와 소설쓰기에 확실히 미쳐버린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맡기겠다는 계약을 한 작가처럼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면 난 무엇을 약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아지던 유향, “곡신(谷神)의 향기”라 했던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그 철없던 어린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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