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의 모순은 시대의 현상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상충하는 속박과 억압의 고통은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인간을 절망하게 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의 편향성과 양극화의 해소 등등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은 이젠 생태계 복원과 보전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출산해내는 병폐까지 더해져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지성들은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사회와 삶의 태생적 문제에 대한 본원적 현상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 사회를 설계하고 전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왔다. 이처럼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장소,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ou + topos)’, 즉 인간의 세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Utopia)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꿈은 실패한 낙원, 암울한 현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상적 사회를 꿈꾸지만 오히려 그 추구는 반(反)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낳기도 하고, 경계와 비판의 사회로서 실로 다양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케케묵은 갈등으로 그 균열이 날로 커져만 가는 듯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실현키 위한 사색의 시간으로서‘대안사회’에 대한 지성사의 뼈대를 성찰하는 것은 아마 유익하고 또 유익할 것이다. 

 

*[참조]반(反)유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나 <1984>는 ’예브게니 자마찐’의 작품<우리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아니면 행복 없는 자유냐”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하는 디스토피아 작품의 최고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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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인형 모중석 스릴러 클럽 23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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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프리 디버’의 야심찬 새로운 시리즈라 할 수 있다. ‘「링컨 라임」시리즈’에 열광하였던 독자들은 아마 신선하고 독특하기조차 한 ‘「캐트린 댄스(Kathryn Dance)」시리즈’의 시작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캐트린 댄스란 인물은 링컨라임 시리즈 중 『The Cold Moon』에서 독자들에게 선보인 적이 있으며, 드디어 이 작품 『잠자는 인형(The Sleeping Doll)』으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내걸게 되었다. 이후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본격적인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도로변 십자가; Roadside Crosses』가 출간되었으며, 링컨라임 시리즈『Burning Wire』에 등장해 활약하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도‘아멜리아 색스’와‘링컨 라임’이 살짝 등장하여 캐트린의 수사 상담에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것을 보면 두 시리즈의 주인공은 각자의 독특한 전문분야에서 협조하는 우호적 관계를 지속할 것 같다.

이 작품이 하나의 시리즈 출발을 알리는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 할 수 있는 것
은 주인공‘캐트린 댄스’의 전문분야가 시사(示唆)하는 참신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동작학>이라는 “상대의 몸짓과 표정을 분석해 그들의 심리상태와 생각을 정확히 간파해 내는”범죄자 심문의 한 장을 열고 있다는 데 있다. 소설은 컴퓨터분야의 떠오르는 부자인‘크로이튼 일가’를 무참히 살인하여 복역 중인‘다니엘 펠’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캐트린이 심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컬트 패밀리의 리더로서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펠과 작은 손동작이나 스트레스의 포착에서도 상대의 심리를 파헤치고 무너뜨릴 수 있는 댄스와의 취조실 대화는 이미 폭발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이에 더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사이코패스와 연쇄살인범, 그리고 컬트 범죄의 백과사전이라 할 정도로 세기적인 살인마들의 사건 프로파일이 등장하여 작중 인물들의 행동예측이나 낯선 전문수사내용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물론 함정과 복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리얼리티를 제고하여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해준다. FBI의 추정으로 200여명을 살인한 사이코패스의 전형인 ‘테드 번디’나, 20세기 최악의 살인자로‘맨슨 패밀리’라는 컬트를 조직하여 거장‘로만 폴란스키’감독의 임신한 아내와 가정부를 살해한‘찰스 맨슨’까지 등장하여 수사 진영과 다니엘 펠의 대립에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니엘 펠의 죄목은 크로이튼 일가족 살인이지만 사건은 이러한 펠의 탈옥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명의 교도관을 순식간에 살해하고 수사관까지 중태에 빠뜨린 채 유유히 사라지면서,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 수석수사요원인‘캐트린 댄스’가 현장에서 바로 수사지휘의 책임을 맡게 된다. 외부 조력자를 통한 탈출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수사하지만 좀처럼 흔적을 찾지 못한다. 여기에 크로이튼 사건 당시 펠이 구성한 컬트의 구성원들을 수소문해 사건의 작은 단서라도 확보하기를 기대한다. 취조과정에서 오고간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미세한 표정의 변화까지도 범죄자의 행동 예측에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고, 사건의 수사는 컬트집단 범죄의 전문가인 FBI 요원‘켈로그’가 가세하면서 속도감을 높이고 활기를 띤다.

사건은 컬트의 특성에 집중되고, 크로이튼 사건당시의 멤버인 리더 펠과 린다, 레베카, 사만다의 관계성을 조명한다. “이슈를 분극화시키고 멤버들을 흑백논리로 몰아 갈등을 유발하며, 리더 자신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끊임없이 시험하여 절대복종과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한다”는 컬트 리더의 보편적 조직운영 행태를 넌지시 흘리고, “리더는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습니다.”라고 펠의 컬트 내 권위에 대해 확인시켜준다. 작가의 세련된 트릭이 여기에도 숨겨져 있었음에 나중에 아~하고 탄식을 할 정도가 된다. 신비스럽기만 한 소설의 제목‘잠자는 인형’은 아빠와 엄마, 형 제들이 살해될 때 침대에서 잠든 어린 소녀로서 죽음을 피하였기에 붙여진‘테레사 크로이튼’의 별명이다. 철저하게 비밀리에 보호되고 있던 이 소녀의 등장과 사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지만 수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제프리 디버’의 존경할 만한 상상력과 기지는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만 같다. 펠과 무관한 살인이 있던 이전의 시간에 대한 기억에서와 같이 사고의 혀를 찌른다.

논리적 우연성이나 모호한 상황인식 등처럼 석연찮은 반전으로 찝찝한 기운을 주는 그런 이류의 반전이 아니다. 기막힐 정도로 정교한 논리와 서사에 내재한 완벽하다는 이상의 표현이 불가능한 극적 대반전에 이르면 그만 제프리 디버를 숭배하고픈 심정이 된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스릴러 작품들이 있지만 이 작품은 그야말로 서스펜스의 품질을 몇 단계 올려놓은 작품이라 칭송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한계를 초월한 작품이다! 후속작인‘도로변 십자가(roadside crosses)'의 조속한 출간을 재촉하고 싶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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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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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 ‘에밀 아자르’를 부여하고 출간한 최초의 작품이다. 더구나 결말 부분이 잘려나간 채 출간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까지 더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의 당시 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해서였다는 그 자신과 세간의 주장을 조금은 전복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나 당대 스크린의 아이콘이었던‘진 세버그’와의 염문과 재혼, 그리고 다시금 이혼이란 결과는 그의 신분상 명예(외교관으로서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에 흠집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한 문단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자르라는 변신은 비우호성을 돌파하기 위한 작가적 수단이 아니었을까하는 억측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작가 주변의 환경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언어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작품 『그로 칼랭』의 주인공‘쿠쟁’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사뭇 다르며, 그 소통의 단절은 내면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 세계는 흘러 나가지 못해 공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사랑의 초과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요새 안에서 엄청나게 축적된 애정의 자산이 쇠퇴하고 손상된다.”즉 감정의 잉여를 해소하지 못하는 대 도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배출구의 차단 말이다.

어쨌든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비단뱀과 자신의 서식지(방 두 개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쿠쟁이라는 사내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은 아무도 마음에 두질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는 “약간은 자기 나름의 내면생활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공연한 소외의 소문을 떨치기 위해 자신에게도 “누군가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비단뱀‘그로 칼랭’의 사진을 꺼내어 내미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세상과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쿠쟁의 다른 언어는 경찰서 서장과의 대화에서 엉뚱한 제안으로 자신의 언어에 공포에 질린 것 같았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아주 쉽게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려 세상 사람들의 독해가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뒤틀린 쿠쟁의 말을 듣다보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 쿡쿡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 코미디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련된 비판, 아니 조롱이라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어떤 위대한 프랑스인은‘어려움을 꾹 참아야 한다.’는 훌륭한 말을 했지요. 만약 우리 아버지들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분명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머릿수와 국민총소득 얘기입니다.”처럼 ‘인구 통계학’적이라는 쿠쟁의 반복되는 비유는 그 근원의 불완전성을 보잘것없게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국 우리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언어, 즉 본질에 대한 제대로의 살펴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 그로칼랭의 탈피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쿠쟁은 경이로워하며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그리곤 “생애의 지극히 낙관적 사건, 재생, 부활절, 욤 키푸르(대속죄일), 희망과 약속 ”이라고 해석하고, 이는 “진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비단뱀이 새로운 삶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경탄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변신, 즉‘에밀 아자르’로의 새로운 탄생, 즉 작가 자신의 재생을 위한 간절한 희구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언어는 마침내‘불가능의 끝’이라는 그로칼랭이 자신(쿠쟁)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것과 같이 도달이 묘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작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결전의 날>이라는 유언의 쪽지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불가능의 끝’을 완성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문장들 하나하나 마다에는“본성에 대한 진정한 승리가 열어주는 지평과 전망”을 일깨우고, 추가된‘생태학적’이라고 불리는 결말부분과 같이 자연보호라는“미래가 기대되는 예외와 도약의 순간”처럼 의미심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주제가 내재되어 있다. 가엾은 흰쥐 블롱딘을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지 못해 고통 받는 쿠쟁에게 “생쥐를 무더기로 주세요.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 中略 ~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 질 겁니다.”에서와 같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역설적 반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주게 하세요.”처럼 본질은 변화된 것이 없음에도 주체만을 바꾸어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은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라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비단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는 쿠쟁이라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소외의 강박이 해학적이고, 또는 변태적으로 , 그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다. “즉각적인 우정을, 자발적인 뜨거운 격정을, 일종의 상호관계 같은 감정”이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면서.
아마 출생 전 의식 상태인‘프롤로고맨’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단뱀이 동물이 아니고 하나의 인식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몇 번의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어쩜, 순수한 상태의‘로맹 가리’를 비로소 읽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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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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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마을이 주사바늘이란 탐욕의 얼굴에 무참하게 스러져 간다. 채혈(採血)을 위한 매개체인 주사바늘이란 물질에 인간 탐욕의 죄를 물을 수도 없으며, 그 목적인‘피’를 황폐해진 텅 빈 마을의 원인이라 할 수도 없다. 비록 주사바늘이 사람들의 살갗을 뚫어 피를 빼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인간들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혈액이 한낱 상품, 사고파는 거래대상으로 변질된 것에 있을 것이다.

물질지상의 자본주의체제가 인간까지 사물화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폐쇄되어 있던 중국 사회에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서구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농촌사회는 분출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득원이 부실한 빈곤한 농촌사회의 현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정부는 매혈(買血)을 통한 소득을 부추긴다. 여기엔 오직 물질에 대한 욕망만이 있을 뿐, 인간 존엄성의 인식과 같은 도덕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과 부패만 성화를 댈 뿐 공공성에 확보되어야 할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약삭빠른 인물들은 채혈소를 차리고 어수룩한 농민들의 피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피를 팔아 받은 돈은 사람들을 물질숭배와 과시적 소비에 휘둘리게 한다. 마을의 초가집은 벽돌집으로 바뀌고, 황톳길은 시멘트 포장로로 변화한다. 채혈소를 운영하여 폭리를 취한 자들과 마치 밑천 없이 벌어들인 것 만 같은 재화에 현혹된 사람들은 매혈을 통해 모방소비와 소비의 한계를 늘려나간다.  

부의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인간들에게 위생이라는 보건 안전망과 같은 인간에 대한 배려는 존재치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유 없는 열병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감기와 같은 미열을 동반한 증세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밝혀진다. 마을은 집단 패닉상태에 빠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매혈을 통해 부를 확보했던 마을 사람들을 공포의 죽음으로 이끈 매혈사업은 더 이상 지속가능 사업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딩씨마을(丁壯)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딩선생(할아버지)’과, 사람들을 꾀어 매혈로 부를 축재한 부도덕한 파렴치한인 그의 큰 아들‘딩후이’를 대립시켜 도덕적 책임을 묻고 있지만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밀어닥친 물질주의에 대한 마을사람들인 일반대중의 탐욕이란 본성역시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한편 흥미롭다하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열병 환자들이 학교로 모여들어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사물화와 부의 차별성이 지니고 있는 악덕에 반(反)하여 공동 갹출과 노동의 형평성 등 공동생활을 위한 평등주의의 묘사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 일종의 회귀를 그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파괴하는 인간성에 있다. 마을의 리더인 딩선생을 축출하고 촌의 주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과 이에 부응하는 마을사람들의 의기투합은 학교의 기물을 개인의 소유로 분배하고, 나아가서는 죽어가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한 관(棺)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고목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행태에서 물질에 숨겨진 소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열병으로 죽은 자들에게 현(縣)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는 관을 빼돌려 판매하는 딩선생의 아들 딩후이라는 인물, 즉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에 대한 반발이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작가는 이 들 양자에게 공히 부도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생태계의 무참한 훼손, 교육현장의 파손이라는 정신의 상실...

그러함에도‘피를 판다’라는 시작에서부터 이 소설은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 무서운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한다. 무상 공급되는 관,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해 주어지는 보상까지 가로채는 파렴치함, 그리고는 에이즈로 죽은 미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혼(陰婚:영혼결혼)을 부의 축재에 이용하는데 이르는 자본주의 물화의 대상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결국 비속(卑屬)살인이라는 비극에까지 이르며, 정의의 심판을 내리기까지 하지만 이미 마을에 인적은 사라지고 폐허만 쓸쓸하게 남아 스스로들을 사라지게 한 탐욕의 자취만 황량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신의 생명으로 썼다고 하는 이 작품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통한의 절망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이어 이 역시 판금(販禁)된 소설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니 작가의 목숨을 건 집필의 처절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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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생산력의 발전을 인간 활동의 이상적 목표로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비생산적 소비’,‘낭비’,‘소모’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이 전복적 사유의 저술은 바타이유의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고를 담고 있어 이후의 그의 저술들 - 『에로티즘』,『에로티즘의 역사』- 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저술을 관통하고 이후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이 된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최고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납득케 하고 있다.

1차 및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우리가 목격하는 역사의 사실들을 저자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파국적 소모의 예로서 파악하고 있다. 예로서 산업혁명으로 인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자원증대와 성장과잉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한 유례없는 인구성장과 같은 압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잉여에너지의 발산, 소모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비생산적 소비의 방식이 있으나 서구사회는 파괴적인 비생산적 소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낭비가 일상적 태도이며 제도화 되어 있었음을 발견케 되는데,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증여교환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신공양과 노예의 대량살상을 동반하는 거대한 희생제의는 생산이나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대량의 순수한 소비로서 비생산적인 소비라는 천박한 소모를 신성한 세계로 돌려놓아 삶의 균형을 축조했으며,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거나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한 상대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한 부의 막대한 파괴나 증여의 방식을 통한 일종의‘부의 순환방식’인 포틀래치는 효과적인 잉여의 소모였다는 점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폐쇄된 지역인 티베트사회의 경우 과잉에너지의 내부 폭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모의 출구가 요구되는데, 불교 라마승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로서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음에도 막대한 소비만 하고 더구나 아이도 갖지 않는 수많은 수도원과 소속 승려집단은 잉여를 흡수하는 탁월한 체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최고의 선으로서 생산의 가치와 악덕으로서의 사치와 낭비라는 소비의 개념을 가져온 종교개혁을 과잉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비를 인류사회에서 거두어간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칼뱅주의를 중세의 순수한 종교적 요구인 비생산적 소비의 세계를 파괴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주의화한 기저로 설명하고 있다. 즉 가처분 노동력의 유용한 사용과는 거리가 먼 교회의 건축이나 교회장식물과 같이 구체적 이익을 벗어난 사치인 잉여의 소비라는 덕목을 말살하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생산적 소비가 반드시 찬란한 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폭발을 이완시키는 의미를 가지며,“베풂과 지체 없는 삶의 취향”이라는 실존의 미덕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자연의 평화로운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우리 인류사회는“과잉생산이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전쟁만이 팽창산업의 유일한 고객”이었음을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파괴력과 결과가 가져올 공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는 그 간극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저술의 마지막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마셜플랜’은 2차 대전 종전 후 냉전의 시대에 유럽의 경제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잉여를 해소하는 막대한 무상공여로서 파국적인 소비를 회피한 비생산적 소비의 슬기로운 모델이 된다.

그칠 줄 모르는 성장지향, 부의 축적에 여념 없는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끓어 넘치는 상품, 즉 잉여의 문제를 이미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고전경제학의 개인의 이익을 전제의 이익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관점은 바타이유의 이 일반경제학에 의해서 극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마셜플랜의 교훈인“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전체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이 우리는 비생산적 소비를 실현하는 사회로의 복귀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부의 상당부분을 비생산적 소비에 바치도록 하는 노동자 운동(작업시간의 단축, 소득의 증가는 여가의 증가로 사치와 낭비를 촉진하며, 아울러 부의 공평한 배분으로 정의를 구현한다)이나, 좌파정책(복지 등)은 혁명과 같은 전복적 혼란에 의하지 않고 경제제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키는 효과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 증여, 기부’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초과 에너지가 부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들 비생산적 소비를 오늘의 사회에서 여하하게 복원하고 촉진하는 가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잉여를 가진 부자의 헛된 사치와 과시는 기부와 공공증여와 같이 내부의 폭발을 터뜨리는 정의로운 수단으로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죽음의 사치, 성의 사치와 같은 방식으로 고찰되는 생명의 심오한 진실로 나아가는 이 소모의 개념은 인류 문명의 변화를 규명하고 그 발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기호가 된다. 바타이유를 읽어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탁월한 저술들에 앞서 『저주의 몫』을 우선 필독하기를 권한다. 이는 그의 사상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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