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 광狂, 폭暴 -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들의 기행
천란 엮음, 정영선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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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秦나라 영호해부터 明나라 희종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서 기행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20인의 왕과 황제들의 면모를 시시콜콜 엮은 책이라 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국가의 지존인 이들인 만큼 그네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과 일상, 또는 성향과 기질에 국가의 존폐를 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다만, 수록된 20명의 제왕들의 기괴한 면면과 관련하여 만들어 진 성어(成語)를 비롯하여 시(詩)와 사(詞), 회화는 물론 상업문물 등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다채로운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은 무성하여 일종의 문화사로서 이해하기에는 그 정보의 양이 풍성하다 할 수 있다.

일례로 수(隨)나라의 멸망을‘양제’의 호색(好色)과‘겉치레 공정’과 같은 개인적인 사치성향과 성적 탐닉과 결부시키고 있지만 이는 역사를 극단적으로 편협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 원정의 실패나 대운하 건설과 같은 국가재정 및 백성의 피폐를 야기한 결정적인 사건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집중된 일인지하의 통치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료와 제도, 국제질서 등 대내외 정치경제환경을 배제하고서는 역사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폭넓은 역사인식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엮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신뢰하기에는 부족하다.

성적 욕망과 폭력성 및 광기는 그 기원의 동일성을 말하는 서구문화처럼 동양에서도 그 기질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보면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굳이 회피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개되고 있는 제왕들의 기벽을 보면 대개는 이 세 가지는 거의 일체화되어 따라다닌다. 5세기 남송(南宋)의 폐제 유자업의 경우, 누이, 고모와 근친상간를 벌이는 광적이기조차 한 방탕, 음란함은 물론이고 사람 죽이는 것이 일종의 유희(遊戱)였다고 하니 삼위일체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특히 남송이란 나라의 경우를 보면 제위에 오른 유씨들이 모두 병적이고 괴팍한 난폭성으로 모두 신하들이나 자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유전적 기질의 연구에 대한 어떤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느껴진다.

색(色)은 본성이고 인간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문화적 영감을 탄생시킨 것을 우린 부인 할 수 없다. 폭력과 공포라는 色의 한 특징에서 그 본질을 탐색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움, 관능성, 미적 예술성이란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다. 6세기 진(陳)나라 후주 진숙보에게서 볼 수 있는데, 비록 정치적으로는 무능함을 떨쳐낼 수 없지만 그가 총애하였던 귀비(貴妃) 장려화에 대한 극찬, 그래서 「옥수후정화」라는 詩까지 전해져 오니, 그 나라 백성이야 안타깝지만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色의 그 절묘한 본성을 풍성하게 음미하도록 해주지도 않는가? 이러한 예술가 기질이 뛰어난 황제로는 12세기 송(宋)나라 휘종을 또한 들 수 있는데, 음악과 회화, 서화집의 편찬 등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당대에는 예술이란 경망스러움과 천박함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의 예술과 색의 지나침은 역시 국가의 쇠망으로 이어졌다하니 애석하다.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권력의 한 복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편 당(唐)나라 희종, 일명 환관들이 추대한 황제라는 의미에서‘문생천자’로 불린 이현을 통해 내관이 통치하는 나라에 불과했던 이웃에게 우리의 삼국이 지리멸렬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역사로 다가온다. 황제의 정치참여를 배제하기 위해 어린 황제의 등극을 도모했던 당의 권력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그들의 황제였다는 것인데, 결국 이들은 색(色)에 둘러싸여, 쾌락과 유유자적만을 위해 존재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제의(祭儀)의 희생양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五大十國(5대10국)의 분열이 시작되었다니 사실 황제의 색광폭(色狂暴)이 국가의 멸망이나 분열을 초래했다기보다는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환관정치의 비뚤어진 권력의 탐욕이 야기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어째든 BC 1세기의 한(漢)나라 성제의 육욕에 대한 탐닉역시 국가 멸망의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온유향(溫柔鄕: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 또는 미인의 처소, 미인의 부드러운 살결을 이르는 말)’, 그가 사랑했던 합덕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니 이승의 복은 모두 누리고 간사람 아닐까? 중국 제왕들의 내밀한 기록을 통해 엿보는 역사의 일면은 그자체로 재미있는 소재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하나쯤 은밀한 야설을 제법 멋스럽게 전달하기에 그만인 이야기들로 넘쳐나서 즐겁기도 할뿐더러, 틈틈이 인용되는 시와 사(詩詞)들의 풍미와 의외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들을 만날 수 있어 기대치 못한 지적 수확을 거둘수도 있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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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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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을 쫓는 측면에서 얘기하자면‘격차 사회’를 조성하고, 사회의 저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에 시달리는 오늘의 인간들, 사회의 보잘 것 없음을 어느 고급주택가에서 벌어지는 가족들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계층의 차별화와 그 고착화를 위해 달려가는 사회를 격차사회라 부르는 모양이다. 여건이 되지 못하는데도 지니고 싶고,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글부글 끓어대는 속물적 갈망은 한국사회의 우리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묘미는 디테일, 즉 등장인물들마다의 심리와 행동,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가족 개체들만의 내면, 서로 다른 계층의 의식과 행위의 적나라한 포착에 있다고 하여야 할까.

‘히바리가오카’는 명문 사립학교들에 인접한 언덕길 위의 고급주택가의 이름이다. 또한 넓은 땅에 고급스럽게 지어진 양옥들이 들어선 이 주택가는 일종의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 기호이다. 이 지역에 진입하기만 하면 “나는 이런 곳에 사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믿게 되고 절로 걸 맞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라는 사다리에 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곳의 자투리땅을 매입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생의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옹색한 면적의 땅을 구입하고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싸구려 주택을 지어 이사한 그 가족에게는 과연 행복의 웃음이 피어날까?
기대와는 달리 이 볼품없는 가족은 불란(不亂)이 그칠 날이 없다. 계집아이의 사립중학교 입학 실패는 콤플렉스가 되어 가족 갈등의 근원이 된다. 엄마에게 ‘당신’이니, ‘그쪽’이니, 아빠에게는 “아저씨는 빠지시지”라고 망발을 거침없이 내뱉는 아이의 폭력적 모습은 읽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가 치미는데, 아마 내 옆에 있었다면 싸대기를 올려 부쳐도 한참을 그랬을 것이다. 정말 인내가 필요할 만큼 못된 계집아이가 있다. 

사건은 이 점잖은 고급주택가의 정적을 깨는 계집아이 ‘아야카’의 천박한 소란과는 달리 이 보잘것없는 가족과 마주보는 고급저택에 사는 엘리트 의사와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자식들, 현숙한 아내로 구성된 가정에서 들려온 단 한차례의 고성에서 시작된다. 한없이 고상한 부인 같았던 의사의 아내가 남편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 것인데, 직접 신고하고 살인 당사자임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상류 계층의 상징인 동네의 명성을 둘러싸고, 게다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입방아는 물론이고, 사건 당사자의 자식들, 친척들에게 까지 죄의식을 뒤집어씌우는 악의적이고 치졸한 군중들의 언어폭력, 또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못난 계집아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모습은 더 없이 오늘의 추악한 인간들의 면모를 뚜렷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주택가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의 탈을 쓴 부잣집 사모님”의 주제넘은 오지랖에서, 그 대단함의 위세란 것이 무지하고, 하찮으며 천박한 속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가하면, 허영과 허위의식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온통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무리들의 구차한 의식이 다시금 까발려 진다. 자신들이 기를 쓰고 축조한 욕망이란 탑이 한 없이 부실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발밑부터 허물어져 내릴 그 조악한 세상의 실체를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상류와 하류로 구분하고 욕망조차 차별 짓는 세상 둘 다  한 번에 굽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관람차의 설치를 기대하는 사내아이, ‘신지’의 격차 없는 세상의 공존에 대한 희구는 왠지 더욱 간절한 진정함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변덕스럽고 모순적이며 양면적인 심리들을 공감 할 수 있는 언어화하여 들려주는 작가의 역량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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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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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매장」이란 단편에는, 지도로만 이루어진 한 권의 책, “잡지이자, 여행기이자 소설이며(....)일기이자 사진이며 백과사전이 될 그러한 책, 그것은 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이상해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이 머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주인공‘나’와 ‘y'의 기획이 있는데,  ‘김사과’의 작품들에 대한 한 문장의 정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위가 상하는 무심한 살인과 흐르는 피, 그리고 도시와 세상을 향한, 인간인 자신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퍼붓는 증오와 분노는 낯선 괴이함이다. 다만 우린 이토록 이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겨운 공포 아닌 공포, 고통 아닌 고통과 함께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소설은 이러한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이며, 그 실체를 깨닫는 순간, 바로 그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에 내닫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타율성에 길들지 않으면, 사회가 요구하는 얽매임에 종속되지 않으면 결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구속적 삶의 존재가 감수해야하는 고통을 벗어나는 것, 즉 완전한 해방이란 것, 그것을 알아버리면 동공이 부채살처럼 확대되고 떡 벌이진 입과 같은 형상을 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그 공포.

다리미로 민 것 같은 얼굴, 실리콘이 박힌 얼굴, “분홍색 푸들”처럼 하고선 뒤뚱거리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 사실은 별 감흥조차 없지만, 잔잔한 멀미와 비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다.
물질의 풍요, 기계적 편의성, 신체를 한낱 부품정도로 이해하는 인간들에게서 진정“무지는 행복의 충분조건”임을 확신케 한다. “심지어 자신이 행복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괴물들은 “무지가 모든 오류의 충분조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말이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여기서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고 싶은 충동이 왜 안 일겠는가? 소설 속 인물들의 정신 분열적인 심리와 행동들, 그 가학적이고 충동적인 폭력과 살인은 그 자체로서도 진실이지만, 반대 방향, 즉 오늘의 인간무리들이 보이는 작태 또한 정신병자이기는 매한가지 일 것이다.

차바퀴에 손이 깔려 엎어진 노파의 구원을 무시하고 지갑 속 돈을 훔쳐내곤 살해하여 상자에 구겨 넣고는 “이미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늙어빠진 할머니”이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하는 항변이나 그래서 그건 거의 살인도 아닌 것이고, 거의 살인이니까 정말 살인은 아닌 거라는 주장은 세상에 대한 그 증오의 강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데, 좁은 골목길의 버려진듯한 국밥집 여주인을 칼을 휘둘러 살해하는 순간 발기한 자신을 깨닫는 소름끼치는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가 난 자신의 감정에만 귀 기울이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오늘의, 한국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래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로 해 왔”으며,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 것이 ‘나’이니 내가 가책을 느낄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역설의 역설만큼 수록된 8편의 소설은 잔인하게 이 사회를 후려치고 있다. 아니 천연덕스러운 냉혹함으로, 그러나 명료한 사회분석적 통찰을 안고 말이다.

뉴욕의 어느 한 구석을 닮아가려는 그 머저리 같은 지향성의 도시, 서울, 그리고 그 속의 인간들, 과연 그 끝은 어디인지 알고는 있기나 한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는 것인지...그녀의 진단처럼 우리가 빠져나갈 그 어떤 구멍도 없다는 절망감은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역겨운 장치들을 거부하는 발작적 증상, 바로 정신분열의 상태로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그녀의 前作 장편『풀이 눕는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세상의 추레함과 비루함, 그리고 삶의 흉물스러움 대한 도발의 생생한 모습들을 이 작품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내겐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하겠다. 김사과에 자꾸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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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추구와 발견
파트리크 쥐스킨트.헬무트 디틀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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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 영화감독‘헬무트 디틀’은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한 때, 계시의 한 장면처럼, 아니“연극의 한 장면처럼”, “분명하게 어떤 형상을 이룬 후 내 앞에 떡 버티고”섰던 꿈의 해석으로서 이 시나리오를‘파트릭 쥐스킨트’와 함께 만들었다고 제작의 변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흐릿하여 알 수 없었겠지만 사랑과 죽음과 구원에 대한 암시였을 것이다. 작품은 이 두 사람이 공동 집필한 시나리오로서 사랑하는 아내‘에우리디케’를 위해 지하세계로 뛰어든‘오르페우스’의 신화가 모티브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죽음을 뛰어넘거나 죽음까지도 굴복시키는 그런 사랑, “일생일대의 위대한 사랑”같은 거를 말하면 대개 정신 나간 사람 취급받기가 십상일 게다. 어떤 세상인데 사랑 때문에 죽고, 또 저승을 따라가? 더구나 현실세계에서 그런 사랑은 결코 존재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단지 환상이라고 말이다. 자신의 음악성에 낙심한 여성과 뛰어난 작곡가의 소위 첫 눈에 반한 사랑, 그런 것일 게다. ‘비너스(슈테른헨)’와 ‘미미’의 격정적이고 영원을 약속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미미는 자신의 모든 예술적 이성을 쏟아 부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명곡들로 비너스를 최고의 가수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미미의 독백처럼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은 꼭 7년간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2천 5백번의 밤과 낮, 5백번의 밤은 행복했고, 2천 번의 낮에는 자꾸 문제가 생겼다.”

이별 후에 제기하는 절망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그들의 노래처럼 미미는 비너스를 잊지 못하고, 결국은 친구‘테오’와‘헬레나’의 그리스 별장에서 자살하고 만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죽음은 구원의 빛을 던져주고, 비로소 미미에 대한 사랑의 간절함으로 비너스 또한 연인을 쫓아 하데스의 입구인 우물에 몸을 던진다. 지옥의 강 스틱스의 뱃사공 카론과 문지기인 케르베로스조차 매혹시겼던 오르페우스의 릴라의 선율처럼, 비너스의 애절한 노래는 지옥의 신들을 감동시키고 연인들에게 이승으로의 구원을 허락하지만 신화처럼 하찮은 사소함으로 미미는 다시금 지하의 세계로 멀어진다.

 

세월이 지나, 지하세계의 신으로부터 세 시간이란 이승에서의 삶을 허락받은 미미가 오페라극장에서 열연하는 늙은 비너스를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광장에서 두 사람이 조우하여 과거의 연인들을 그리는 장면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 숙연한 이미지가 되어 마음에 둥둥 떠다닌다. 어쩌면 그렇게 이별함으로써 이 연인들의 사랑은 가장 위대해질 수 있었는지도...마법에 걸린 것 같고, 시적이며, 낭만적이고, 불가능한 그런 사랑이 되는 것인지도...사랑의 감미로움, 애틋함이 오르페우스의 아리아 선율을 타고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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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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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정신사는‘푸앙카레’와 ‘힐베르트’의 집합론으로 시작된 직관과 증명의 엄밀성의 갈등인‘칸토어 논쟁’이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또는 ‘괴델’의 확실성의 존부(存否)와 같이 이성과 감성의 대결, 추상과 구체의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인간 뇌의 두 반구라는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이언 맥길크리스트’의 두뇌와 인간세상의 조응관계에 대한 통찰이 상기된다.

진리에 이르는 증명 가능한 명확한 길,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신화, 수학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공리와 같은 항진명제 조차 증명가능 할 것이라는 완전성에 대한 추구, 완전히 논리적으로 엄밀하고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신념은 과연 도달 할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20세기 초 인류 지성사(知性史)의 중심인물들이 집착했던 소위‘수학적 토대’에 대한 사상적 모험이자, 철학적이며 감성적 갈등의 문화사이다.

특히‘버트런드 러셀’이 『수학 원리』를 통해 그 근원적 해결을 찾으려 했던, 즉 “모든 수학적 진실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시도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고 마는데, 가장 단순, 명료, 정확하다는 수학조차 이러할 진대, 인간의 이성이 마치 세상 모든 것의 해법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사실 존재의 무지(無知)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만화형식의 소설로 구성된 『로지 코믹스: 러셀의 수학원리』라는 이 저술은 그리 호락호락한 저술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비유와 예시적 장면들 하나하나에 이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재미와 몰입으로 인류의 본성과 문화라는 가장 유서 깊은 정신사를 즐겁게 탐구하는 터전을 만들어 준다.

엄격한 조모(祖母)하에서의 성장과정과 러셀가의 정신병이라는 유산, 실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 즉 ‘이성’의 존재를 깨우치게 해준 유클리드기하학에서부터, 생각을 기하학처럼 명확하게 하는 방법으로서‘라이프니츠’의 ‘추론 계산법’, 그리고 “논리학의 목표는 계산이 아니다. 실재를 닮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라는 ‘프레게 교수’의 <개념 표기법>이나,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에의 도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항진명제(tautology, 恒眞命題)를 생산하는 기계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완전성을 향한 도전의 여정이 소개된다. 과연 “1+1=2”이라는 이 당연해 보이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낼 수 있을까? 인간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합리적 이성을 뒷받침하는‘논리’란 것은 무엇일까? 그 실체를 보면 고작 “아는 것들을 결합해서 모르는 것에 도달하는 기술”일 뿐이다. 결국 인간 개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한계를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인 실재는“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과 닿는다. 또한 ‘괴델’의 그 유명한‘불완전성의 정리’인,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 할 것!”이라는 산술의 이 필연적 불완전성과 이에 토대를 둔 모든 체계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증명은 수학의 토대에 대한 확고한 존재를 여지없이 허물어 내린다.

단순 명료, 개념화, 자기 확신과 자기인식 과잉이라는 이성의 집착, 다시 말해서 논리라는 추상적이고 범주화하며 일관성과 체계화하려는 자기 폐쇄적 독단성의 경향은 논리학의 거장들이 한결같이 정신병에 시달린 이유를 설명하게 한다. 추상과 구체를 알지 못하는, 현재라는 실재를 조각들로 맞추어 알아내려는 시도에는 이미 한계와 메울 수 없는 틈을 만든다. 대 사상가들의 실재와 같은 모델을 찾겠다는 이 무모한 모험, 토대를 찾겠다는 여정은 작자들의 말처럼 ‘미완성의 오디세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생래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의 누적이 생명성과 포용성, 변화하는 현재성을 담아 낼 길은 없는 것이다.

“확실성의 모범인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하물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합리성과 이성의 추구가 그릇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건 최종 도착점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인 것처럼 그 과정에서 우린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들과 의외의 과실을 획득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에서 복수의 윤리와 고대의 신들이 여신 아테나의 민주적 투표라는 합리성으로 비합리적인 전쟁과 인종에 대한 증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살인의 종식을 맺는 장면은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는 인간사에 의미 있는 것임에 분명한 것이다.

이 저술은 러셀의 수학의 토대를 찾기 위한 필생의 도전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들의 사상과의 관계성을 흥미롭고 지적으로 그려낸 멋진 철학만화소설이다. 아마 이 한 권의 만화책을 읽게 되면 절로 가장 심오한 철학적 사색의 원천, 논리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적 과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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