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우리 차 - 계절별로 즐기는 우리 꽃차와 약차
이연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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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맛, 우리의 신체를 다스려 온 전통의 음료를 까맣게 모르고 산다는 것이 불현듯 꽤나 모순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차(茶)라 하면 왠지 고풍스럽고 다례(茶禮)니 다도(茶道)니 하여 까다롭게 느껴져 불편한 심사에 가까이 하지 못한 연유도 있다하겠다. 

책에서 차(茶)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산선생이 『아언각비』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강차, 상지차, 송절차, 오과차 등 차가 아닌 탕을 마시면서 관습적으로 차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차라 해야 옳다.”와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 27년에 이르러 “차를 마시는 것과 탕제와 약은 하나다.”라고 “가벼이 마시는 음료를 아우르는 표현에 차(茶)를 사용”함으로써 오늘에는 잎차뿐 아니라, 열매, 뿌리, 꽃을 사용하는 모든 음료를 차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고유의 차 잎으로 우려낸 차를 모르고 차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해서 책에는 차나무에서 차 잎을 채엽하고 그리고 덖고 발효하는 정도와 찌는 과정의 유무 등의 과정에 따라 구분되는 녹차에서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의 특성과 산지(産地), 향, 맛, 성분, 효능, 우려내는 법을 소개하여 그 성능 및 취향에 따른 관심을 갖도록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이중 우리나라는 녹차가 주로 생산, 제다(製茶)되는 모양인데, 그중 곡우(穀雨; 양력 4월20일)전후하여 채엽되는 어린 새싹을 최상품으로 친다고 한다. 이후 채엽 시기에 따라 세작, 입하차등으로 나뉘어 불리는데, 역시 잎사귀 뒷면에 흰털이 보송보송 달린 일명 첫물차를 따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차나무 잎차를 즐겨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명약도 한 가지만을 오래 취하면 해가 따른다”고 하듯이 차도 바뀌는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는 재료를 이용하여 자연과 생체 리듬의 조화는 물론 계절 특유의 맛과 기능을 즐기는 것은 또 하나의 멋스런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각 계절 특유의 꽃과 과실을 통해 계절에 어울리는 색감과 효능을 간직한 60여 종의 차에 대해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 방법은 물론 각기의 의학적 성능 등 실용적 지식과 함께 친절하고 유용한 길을 안내를 해주고 있다.

생꽃 그대로 우려내도 좋다는 봄이면 제일먼저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개나리꽃, 그리고 신비한 향기와 은은한 차색이 일품인 꽃 잎 아홉 장짜리 토종 목련의 꽃 잎차, 생강향이 나서 이름인 생강나무꽃차, 그리고 진달래, 복사꽃, 민들레 꽃차가 봄철 차들을 수놓는다. 그래도 잎차인 제철의 차나무 녹차인 햇차를 빼 놓을 수는 없다. 값이 다소 비싸지만 가장 먼저 딴 어린 차 잎으로 만든 우전차는 효능과 맛에서 최고라니 말이다.

한편 성큼 다가온 여름에는 갈증이나 속 열을 시켜주고 탈나기 쉬운 내장을 다스려주는 차들이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 장미꽃, 아까시아꽃차부터 식후에 마시면 위의 자극으로 소화를 촉진시켜주는 박하차, 설사, 해열에 특효인 청매실차,  레몬보다 비타민C가 스무 배나 많으며, 더위로 오른 혈압을 내려주고 갈증 날 때 속 열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카페인 성분 또한 없어 위에 부담도 주지 않는 감잎차는 진정 여름철 차로서는 제격인 듯싶다.
그리고 칡꽃, 맨드라미, 국화꽃이 피어나는 가을에는 이들 꽃차와 포도차, 내장 통증을 다스려주는 우엉차, 송이차가, 겨울에는 중풍, 고혈압 예방에 좋은 송화차, 동백꽃차와 꽃차의 백미라 하는 입안  가득 퍼지는 청향이 그만인 매화차가 우릴 기다린다.

꽃차에는 투명한 유리 다기가, 잎차에는 우리 전통장인의 얼이 담긴 도자기 다기로 조합을 맞추어 차를 우려내면 차 마시는 즐거움에 품격과 멋이 더해져 분위기와 차 맛이 한층 우아해질 것 같다. 소개되는 모든 차마다 어울리는 다기세트와 우리는 방법이 화려한 화보와 어울려 그 시각적 즐거움도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하겠다. 게다가 물맛이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정성이라고 하는 차 맛이 살아나게 하기위해 물이 끓으면 뚜껑을 열어 한 김 날려 보내는 세심한 방법들까지 더해서 이 책은 우리의 건강은 물론 세련된 미감을 살려주는데 더 할 수 없는 산 정보를 준다. 가정에 한 권씩 비치해두고 계절별로 차를 끓여낼 때마다 참조하면 아주 유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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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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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왠지 내 마음은 신산한 느낌을 비켜가지 못하는 것 같다. 제아무리 세속적 화려함을 구사하거나 생과 사의 초월적 경계에 이른 달관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자기’의 저 심연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현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시간적 희생은 물론 숱한 장애를 극복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코 강요되는 것이 아닐지언정 온갖 사회적 속박을 무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명료한 일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휘말려 끌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삶의 황혼이 다가서 착잡한 심정에 놓이곤 당황해 하는 것이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한 표현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 되었든, 정체성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래서인지 자기가 요구하는 행복의 근원이랄 수 있는 사랑과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그것이 동성애적이건 이성애적이건, 자기 재능의 실현이건, 연대에 대한 의무이건, 행위의 자기 주도적 결정은 만족이란 걸, 미소와 평온을 준다. 연극 극단의 홍보 팀장이자 극작가인 스물여덟 살 미혼 여성인‘유안’을 중심으로 여배우인 엄마, 이혼녀인 한 여성과 정신적 동반자로서 동거생활을 하는 언니, 가족을 등지고 떠나버린 아빠,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에 갈등하는 남자친구, 그리고 뼛속까지 연극인인 중년의 실장, 평생 고독한 삶을 살다간 할머니까지, 이들의 자기실현과 현실사이의 번뇌,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 순환하는 삶의 변주곡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변주곡들에 실린 사랑의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들은 의외로 낯설다. 아니 그 사실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음식을 먹거나 자기만(모텔)을 줄기차게 하는 유안의 사랑, 엄마와 엄마의 친구, 할머니의 동성애적 정체성과 같은 또 다른 사랑, 언니의 동반자인 이혼녀와 그녀의 딸이 조성해내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과 사랑의 방식, 아내와 두 딸을 떠나 제2의 인생을 꾸려가는 아빠의 사랑은 이들 각각에 여하한 이론적 분석을 떠나 이것이 우리네들 사랑의 실제임을 보게 된다. 때문인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새로워진 삶의 방식을 확인케 된다.

한편 가난한 극단의 실장으로서, 연극의 지원자로서, 보조자로서, 자기 인생을 함몰시킨 중년의 남자가 돌연 지방 극단의 배우로서 자기 삶을‘바야흐로’새로이 시작하는 모습은 비로소 세상과의 타협이 아닌 자신의 재능에 대한 사랑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자칫 실패, 파멸 할 수 있는 인생 행복의 구원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게 한다. 여기에 극단의 주체가 되어 세상과 부딪히며 자기를 구축해나가는 여정이나, 쇠퇴해가는 아버지사업의 지원자로서 가족이라는 연대의 의식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을 통해 변할 수 없는 삶의 역사성, 건강성에 대한 믿음을 다지게도 된다.

사랑 그리고 삶을 선택하는 방식이 이젠 꽤나 주체적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의 금기와 구속이 더 이상 자기의 목소리를 제약하지 못하는, 어쩌면 거대한 20세기 식 담론이란 것이 사회의 작동 원리로서의 힘을 상실하는 그야말로 다원화되고 개인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선명했던 이미지, 사랑과 삶의 원인이었던 추동력이 시간이 지나 퇴색되고 변색되어 흐릿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의 사랑과 삶의 방식은 과거의 그것과 다른 모양이다.
일상적 피로에 억압되어 내면 깊숙이 가두어졌던 것들이 현대 여성의 도회적 감수성으로 진솔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갖는다. 사건이나 서사적 변화무쌍함과 같은 화려함, 거대한 사회적 선정성이 없음에도 세련된 정갈함으로 고상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내‘자기(individuation)’를 위해 이제라도 용기를 실현화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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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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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심리학에서 타인간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인간의‘방관자 효과’를 설명 할 때면 대표적 사건사례로 예시되는 것이 ‘제노비스 신드롬’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27살 여성이 이웃들에 도와달라는 구원의 외침을 하는 32분간 살인이 진행되는 장면을 지켜본 “38명의 이웃 어느 누구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38 Watched Murder -- And Did Nothing) ”라고 타인의 고통, 죽음을 방관한 인간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듯한 신문의 헤드라인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심리학적 한 현상을 표현하는 고유명사가 되었을 정도로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근본적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은 이 유명한 심리학적 과제를 던진 사건의 증언들과 정황, 이후 판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도시 생활에 내재하는 개인의 소외와 공동체 의식의 결여를 되짚어 보게 한다.

1964년 3월 13일 뉴욕의 퀸즈 구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토대로 재구성된 일종의 팩션인 이 소설은 익히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당시 목격자인 이웃들의 증언, 아니 변명들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극한다. 왜 자기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웃 처녀의 잔인한 피살상황에 수수방관을 하였는지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자기 인생을 가꾸어나가던 이태리계 미국인인‘캐서린 수잔 제노비스’가 자기 집이 있는 주택가에서 그것도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상황에서 38명의 이웃(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이 마치 텔레비전 화면 보듯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태도를 대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실증자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소설적 구성의 측면을 무시하고 사실의 나열만으로 구성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인간의 ‘다원적 무지’라든가 ‘책임 분산 효과’와 같은 너무도 유명한 심리학적 사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인문학적 관심에 묻히는 것은 이 작품이 각오한 한계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학문적 흥미와 관음증적 원시욕구를 건드리는 소재여서 흥미를 호락호락 양보할 수는 없다 하겠다.
살인당시의 장면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는가 하면, 살인자의 신원과 성향, 재판과정부터 목격자인 이웃들의 핑계이자 자기 방어를 위한 (도덕적)책임의 회피적 증언 등이 맛스럽게 배열되어 주제에 대한 의문과 다양한 인간 본성에 대한 사고의 재미를 더해준다.

나 같으면 그녀를 위해 뛰어나갔을까? 아 역시 자기중심적인‘나쁜 사마리아인’처럼, 퀸즈의 방관한 주민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자문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방관과 무관심을 만드는 심리적 동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도시란 곳은 이처럼 황폐한 곳일까? 하는 의문도 떠올리게 된다.
“목격자가 많으면 아무도 안 도와준다? ” 여기에는 모호한 상황에 맞서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할 때 우리 인간들은 타인의 인도와 도움에 의지한다는 ‘다원적 무지’의 심리가 깃들어 있으며, 결국 구경꾼들 모두 서로 타인에게 인도를 구할 경우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즉 아무도 행동하지 않고, 그러고 나서는 자기 위안적 판단으로 스스로의 심리를 보호하며, 적절한 핑계로 회피하는 것이 바로 본성인 것이다. 이웃인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면 역시 동일한 이러한 범주 내에서 변명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랑싸움인지 알았어요, 남녀간의 희롱이라고 판단했어요, 나서면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어요, 사람들이 많다보니 다른 누군가가 신고할 줄 알았아요,... 등등 과 같이 책임분산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소설은 살인자와 그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있는데,  죄의식 없는 살인행위와 사이코패스로서의 성향이 일상과 부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습은 더욱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방관자의 심리에 묻혀 가려진 범죄자의 죄악, 죽음과 시체를 탐하는 살인괴물의 악마성도 하나의 축을 형성하여 실화적 사건을 더욱 입체감 있게 재구축한다. 냉담했던 목격자들, 악을 행하는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악행을 보고도 저지하지 않는 우리들, 우리의 사회가 더럭 두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비극적 사건, 인간 심리의 치부를 드러낸 이 사건은 타인의 고통과 위험에 대한 우리의 행동양식 교정(矯正)이란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유명한 심리학적 연구 모델로 회자되던 소재에 다각적인 관점이 입혀진 인문학적 성향을 지닌 독특한 소설이라 하겠다. 아마도 작품에 등장하는 뉴욕타임지의 편집장 "로젠탈(A.M. Rosenthal)"이 쓴“38명의 목격자들(Thirty-Eight Witness)"이란 저술의 소설 판(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와 지적욕망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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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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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의 소박한 해프닝으로서 1주일간의 탈주라는 소재에 산업사회가 야기하는 우울한 정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보험조사원,‘조지 볼링’은 주급 7파운드를 버는 하류 중산층, 즉 시대를 대표하는 계층, 일반인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런데 작품은 오웰의 잘 알려진 작품들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84』나 『동물농장』처럼 주제의 무게가 주는 진지함과는 사뭇 다르다 할 만큼 경쾌하고 밝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그 가벼운 흐름 속에 진중한 문제의식들이 아우성치는 기막힌 작품이다. 더구나 위의 후자인 두 작품을 구성하는 사고의 원천이랄 수 있는 문장들을 발견하게 되거나, 직간접적 영향을 준‘H.G.웰스’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을 흘끔거리게도 하는 것은 부가적 요소치고는 그 가치가 지고(至高)하다.

오웰의 노골적이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구사되는 재치 넘치는 문장 또한 지루하기 십상인 1인칭 서술의 구조적 한계를 슬쩍 넘어버리게 해준다. 은근히 재미있어지는 것은 갑자기 굴러들어 온 17파운드의 돈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자 결심한 중년 가장의 용처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어 유년시절의 무한한 자유, “시간이 무한정 자기에게 펼쳐져 있으며 무얼 하든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충만한 그 활력의 시공간으로 안내되어 펼쳐지는 추억담이라 할 수 있다. 사내아이들만의 독특한 시심(詩心)이라 주장하는 악동으로서의 다양한 일화, 특히 낚시에 얽힌 무용담으로 시작된 추억들은 작은 종자가게를 꾸리는 아버지, 가사(家事)를 우주적 소명으로 아는 어머니와 함께 정말 유쾌한 세계로 한동안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곤, “한적한 연못가 버드나무 아래 온종일 앉아”있는 것과 같은 안정감과 지속성으로서의 삶, 배가 따뜻해지는 평온함 같은 시공간으로 숙성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현실의 삶, 생활의 냉엄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보통 사람들의 전형인 자신에 대한 자각과 대비되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아이와 항상 돈에 쪼달려 활력이 다 빠져버린 아내, 그리고 허리가 휘청거리는 주택 할부금의 부담을 안은 집, 그래서 마치 무언가 잃을 것이 있는  냥 착각하며, 보수주의자가 되어 남의 밑이나 핥아주는 사람으로 숨 막힐 틈도 없이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삶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활동적인 삶은 열 여섯 때 끝났다.”라는 이 중년의 보험조사원 조지 볼링이 선언하는 말에는 현대적 삶의 방식이 요구하는 피로가 그대로 묻어있다.

이렇듯 화자의 내레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1세기전의 영국사회를 걷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를 걷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든다. “해내라! 성취하라!”라는 온통 앞을 위해 달리라는 종용이 난무하고, 물질과 문화적 과시를 위한 소비를 위해 여유로움과 주변의 경이로움을 모두 놓친 채 뛰어가는 조지 볼링이 묘사하는 시대상이 그대로 한 치의 이탈도 없이 판박이 같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조차 동일하다. “양식은 있지만 정신은 멎어버린”사람들, “위협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과연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빼앗긴 것들을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의 공리주의적 계산기는 어떻게 산출해 낼까? 를 생각게 한다.

한편 길가에서 발견한 “본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발간 잉걸 불”에서 “살아있다는 무엇보다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묘하게도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불현듯”느끼는 장면은 이 소박하고 세상을 의심할 줄 알게 된 하류 중산층 가장에게 20여년을 잊고 지내던 자신의 유,소년기를 품어주었던 고향 마을에 대한 향수, 잃어버린 그 무엇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이어지게 한다.

자신만을 위해 쓰리라 다짐했던 17파운드를 지니고 아내와 직장을 속이고 1주일의 일탈을 감행한다. 현대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그 인위와 부정적 흐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기회주의적 유선형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그러나 평화와 정적을 기대하고 찾아간 고향마을‘로어빈필드’는 산업단지로 바뀌어 있고, 동심의 활력과 예전의 평화로운 안정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만을 확인한다. 남몰래 한적하게 1주일을 지내러 간 곳은 더 이상 삶의 지속성이나 평정심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이미 세상은 온통 오염되어 있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간이 없는데.”하는 탄식은 이 불온한 세상에 대한 침통한 낙망이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조지 볼링의 금단의 영역을 향한 탈주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 바로 현실의 공간, 삶의 일상성, 그 너절한 다툼의 시공으로 회귀한다.

100년 전의 영국사회, 그 시공을 초월하여 오웰이 전하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황무지 같은 삶의 표현들은 오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2차 대전의 발발이 있기 전에 써진 이 작품이 예견하는 전쟁의 공포와 그 후에 다시금 반복될 인간사회의 어리석음의 반복, 문명적 위기에 대한 전망은 그야말로 그의 선견적 통찰력을 확인케 하여준다. 또한 이야기로서의 친근함은 나와 우리들의 그것처럼 가까이 느껴져서 지금은 서울의 도심 한복판인 곳에 있던 미나리 깡에서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한 동안 잠기기도 하는 포근한 그 무엇으로 모처럼의 안정감에 빠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걸작은 역시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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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 문학의 기본개념 8 문학의 기본 개념 8
이강엽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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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신화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도록 지배질서가 용납하지 않는다. 집요한 보수적 확장, 새로움은 배척되고, 질서에 대한 개혁은 단지 도발적 파괴로만 인지되어 거부되고 말살된다. 그리곤 대중 연예의 싸구려 감상으로 몰아넣고 진짜의 인간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박탈되고 있다. 신화학자,‘켐벨’이 말했듯이 깨어있는 의식과 매혹적 신비와의 호해나 도덕적 질서의 강화, 개인이 중심을 잡고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신화의 기능이 들어설 곳이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젠‘개천에서 용났다’와 같은 신화는 들리지 않는다. 신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 생성될 토양 자체를 차단하고 거부하는 사회는 커다란 불행과 재앙을 불러낼 것이다. 어쩌면 우주의 질서는 이 순간에도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체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 이야기이자 환상 같은‘신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일까? “신화는 모름지기 가장 비현실적인 표면을 통해 가장 현실적인 이면을 드러내며, 갖가지 환상으로 어우러진 감각적 외피 속에 본질적인 사유를 감춰두고 있는 법”이라고 ‘프라이’는 말했다. 또한 “그 내용의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는 참된 얘기이며 이야기의 구연 내지는 전승 방식에 있어서 특정 의례를 동반한 제의적 이야기이고, 효용적인 측면에서 신의 믿음은 물론 신의 힘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이야기”라고 하였다.

신화는 창조와 파괴, 그리고 파괴를 통한 창조의 순환이며, “생성-탄생-죽음의 보편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질서에 대한 겸허한 경외이다. 더구나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불가능에의 도전과 그 여정에서의 고난과 실패를 통해 유한자로서 인간이 갖는 한계를 되돌아보고 마침내 세상의 중심에 서며, 그것을 타인과 이웃, 세상에 확산시키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사회는 신화가 발붙일 곳이 없다. 봉쇄되고 차단되며 왜곡되고 처단되는 차별화와 구별짓기가 터 잡고 순리에 역행하는 퇴행의 길을 고수하는 환경이니 말이다. 이에 더해 설혹 성공의 중심에 설지라도 그 수확이 확산되지 않는 배타적 이기심만이 찬양받는 곳에서 신화를 기대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 신화가 풍성하게 회자되는 곳, 인간의 감정이 좌절되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대해 꿈을 꿀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신화를 이해하고 말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이 책은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신화란 무엇인지, 신화는 어떻게 읽고 해석하여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구성과 내용은 어떤 것인지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사회가 사라져버린 신화적 공간을 재생하고 삶의 본질에 근접하는 힘을 조성하는 길을 안내한다.
신화를 크게 “창조신화, 시조신화, 영웅신화”로 삼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창조신화는 홍수신화와 같은 재생신화와 함께 무언가가 처음 혹은 새로이 만들어지는 질서의 부여와 집단의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묘사되어 존재(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새로움을 위해 기꺼이 낡은 것이 자리를 내어주고, 악이 무성해지면 깨끗이 쓸어내는 물에 의해 청산되고 선을 다시여는 그런 것이다.

한편 영웅신화는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극기하고 마침내 인간에게 금지된 공간에 성공적으로 진입함으로써 세상을 차지하거나 목적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 성취와 깨달음 뒤에 영웅은 머무르거나 출발지로 회귀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데, 귀환을 거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그 성취를 세상에 확산하는가가 바로 핵심이 된다. 이 책에는 이러한 신화들이 세계의 각 지역,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부터 인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 아프리카, 북유럽, 그리스신화에 이르는 신화들로부터 삶과 자연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진실, 진리의 틀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화 중에 3분의2는 신(神)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길가메시’처럼 불완전한 인간과 전능한 초월적 힘인 신의 능력이 결합되어 절묘한 양면성, 즉 영웅적인 강력한 추동력 이면에 불안과 번민하는 약점을 지닌 인간의 한계성을 노출하여 내적 성숙과 불균형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들은 대개 지상과 천상, 지하세계 등 층위가 다른 세계를 차례로 겪어나가면서 세상의 중심, 삶과 죽음의 그 비의를 터득하는 데 이르게 된다. 헤라클레스가 겪는 12개의 고난이나 미궁 속 미노타우스를 물리치는 테세우스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대표한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물리치거나 극복하여야 하는 대상은 바로 우주와 대자연의 본질인 중심을 방어하는 괴물, 혹은 대상물을 이겨냄으로써 그 중심, 인간에게 금지된 공간, 각성, 깨우침, 달관에의 진입을 상징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신화를 보는 시각에 대한 이론들로서 기독교가 타 신앙들의 신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신화를 일개 우의(寓意)로 해독하는 에우헤메리즘(euhemerism)을 전파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여 카인과 아벨의 대립을 농경과 유목사회의 갈등, 인물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이해하여 신화의 보편성을 해치는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하는가하면, 갱신과 재생을 연관시키는 제의적(祭儀的)접근, 레비스트로스와 같이 신화의 내재적 구조를 파헤치는 구조적 접근등을 다채로운 세계의 신화들을 통해 신화가 지닌 논리적 모델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밖에 프로이트나 융 처럼 심리적 접근을 통해 신화 속 상징물을 통해 개인과 집단적 무의식을 해석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발굴해내기도 한다.

신화를 해독하는 이와 같은 방법들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사회나, 여타 문화적 산물인 책, 연극, 영화, 미술작품, 사회적 담론을 읽는 데 있어서 대단히 유용한 방향성을 제공한다. 일례로 신화에는 유독‘처녀 잉태’라는 초자연적 탄생이 많이 기술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기존 문화의 가치인 아버지라는 법인 전통적 관습이나 터부를 깨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부를 깨는 사람은 공포와 견제의 대상이 되고 혹독한 모험과 시련이 앞에 놓인다. 결국 이를 이겨냄으로써 터부를 파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편 “자아(自我)의 신화”를 얘기하는 코엘료의 『연금술사』처럼, 양치기 산티아고의 보물을 찾는 여정이 종국에는 맨 처음의 출발지로 돌아오듯이 자신이 선 곳,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신화적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것이나,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감옥이란 시련,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음, 이상세계에 대한 추진, 타협과 깨달음, 마침내 미궁(감옥)에서의 탈출은 영웅의 재현으로 현대적 신화의 이상적인 예로 등장하기도 한다.

메마르고 황폐화된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우린 이러한 신화를 잊고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힘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로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터부인 그릇된 제도와 장치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보수적 지배 권력들의 방해를 넘어서야 한다.
비록 그날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사는 시지포스의 운명 못지않은 부조리한 삶이지만 우린 분투해야만 하는 당연한 삶의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신화를 꿈꾸는 세상, 그리고 신화가 마구 양산되는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아닐까? 무릇 작가를 꿈꾸는 이들, 사회를 비평하고 해석하는 이들, 삶의 본원을 탐색하여 세상의 당위를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하려는 이들,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의미 있는 상상력과 깨우침을 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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