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사회학적 비평이기에는 논의의 범주가 지극히 협소하다. 산업자본주의의 유의어로서의 모더니티를 총합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예술사적 범주에 국한하면, 특히 모더니티가 지닌 한계 - 근대적 시간관, 물신주의 및 소비주의, 인간의 소외 등 - 를 극복하기 위한 사조들의 또 다른 한계성을 갈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특수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 프랑스 자국 및 서구중심주의의 기술이며, 일부 문학이나 건축, 음악분야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미술사에 편중되어있어 보편성으로 확대하여 이해하기에는 그 결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티에 이르면 극단적으로 프랑스적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어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혼란스러움을 조장하여 그 의미를 애써 초기 모더니즘이나 전위주의에 휘감기게 하여 퇴행적 의지로까지 읽힌다.

저자의 시선을 대변하는 서문을 보면‘현대적 전통’이라는‘현대’와‘전통’이 결합한 괴이한 이 언어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어법을 통해 모더니티라는 새로움의 시작이 곧 과거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이 현대라는 언어가 지닌 과거와의 단절을 통찰하고, 그래서 그 단절 자체가 전통을 구성해버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관점은 19세기 보들레르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모더니티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자각과 변화를 도모했는지를 관찰하는데 핵심적 의미로 작동하고 있다 하겠다.

보들레르와 마네가 활동하는 19세기는 새로운 시간관의 인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속도가 만들어낸 미래성과 미결성, 파편성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맥락의 파악은 진부하기조차 한 분석이지만, 1800년대 중반의 예술이 모더니스트틀이 모던에 대해 어떤 비판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한 비교적 심층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 예로써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식사」나 「올랭피아」가 역사성을 관심 밖으로 한 것이나 그림의 의미를 그림 자체 안에서만, 즉 표면에 머물도록 의도하였음을 통해 전통적 아카데미즘의 조롱과 시간성을 무시간대로 몰아넣은 일종의 반항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름 의미를 지니는 독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전위주의(아방가르드),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비평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동어 반복적으로 거듭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들의 현실에 대한 반발로서 탈현실화를 외치며 나선 전위주의자들의 공허한 초월, 침묵, 비개인화, 나아가 산업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예술과 시장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해독하지만 이 역시‘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인식의 갈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새로움이란 시간관에 대한 갈등, 내면의 시간과 외면의 시간을 타협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추상화의 대두로 이어지고, 다분히 실험적이고 지금에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브루통과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조건적인 현실세계에 대한 위반의 가치에서 이상한 것에 대한 숭배라는 미학적 모순, 그리고 그 대표주자인 마그리트가 빠진 상투성과 소비사회의 상표처럼 전락하는 운명에서 그 한계를 폭로하기도 한다.

한편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이전된 세계대전 전후시기에 시장의 전폭적 지원 하에 태어난 잭슨 폴록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이미지의 거부, 즉석 실행의 창조행위, 배경과 형상의 구분을 없애는 기획과 바로 그러함으로서 대형 캔버스에 서서 물감을 흘려대는 육체성에서 외부적 관습의 배제라는 의도를 발견한다. 이러한 현상은 엘리트 예술과 대중예술의 일대 교란, 상호 위치 바꿈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팝아트의 형식을 낳는다. 이것은 예술성의 파괴를 통해 제도와 시장으로 환원되어버린 예술을 부정하겠다고 나선 라우선버그와 같은 팝아티스트가 소비사회에 의존하는 경향이 되고 마는 역설로 이어지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비판적 예술사조의 발생을 탐사하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는 산업자본과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그 내재적 한계를 들추어내는 사례로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난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훌륭한 통찰력을 발견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획기적이거나 단절적인 대전환의 방법론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더니티가 발생시킨 인간의 파편화와 소외, 물신지상주의가 가져온 폭력적 폐해를 최소한 점진적으로나마 축소시키고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틈새나 지향점을 발견해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는다는 것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저자는 소비사회의 물신화에 포섭된 단절의 전통에 실망한 예술, 즉 모던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포스트모던이란 용어가 모더니티와 단절인지, 연속인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혼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모던과 결별하겠다는 의미라면 이처럼 모순이 어디있는가고 묻는다. 즉 단절이라는 현대(모던)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구별하려는 것처럼 역설이 어디 있겠느냐는 의미이다. 이 혁신의 논리, 이미 새로움을 표상하는 의미이기에 모던의 반복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버릴 수 없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만 하다. 포스트모던을 지향한 건축물들은 절충주의로 나타났고, 단절의 단절을 통합한다는 우스꽝스런 말처럼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없는 모순이 드러남을 알아차리게 된다.  

 

단절을 의미하는 모던을 단절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극치 아니냐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퇴행, 복고를 의미한다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하버마스, 리요타르, , 잔니 바티모등을 인용하면서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립된 이론들을 소개하지만, 저자는 보들레르로 회귀한다. 그리고 현대적 환상의 특징이 사상과 예술 사이의 시차라고 말하면서 이 연속적인 사조들의 궁지(窮地)를 인식하는 역사적 의식과 진보의 교리의 존재를 인정할 도리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패러독스를 외친다. 결국 모더니티의 초기, 19세기 보들레르가 “자유와 숙명이라는 두 개의 모순된 개념이 결국 동일하다는” 신념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것인지?  하나의 담론으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결론이 지극히 취약하고 산만하다는 단점은 못내 아쉽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의 역사로서 예술 사조들의 다양한 변주의 모습을 파악한 예술비평론으로서는 참고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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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사랑은 영원의 상징이다.
시간의 모든 의미를 쓸어버리고
시작의 모든 기억과
끝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파괴한다.         - 마담 스탈

경주하듯 달려야만 하는 일상은 내가 속한 이 사회가 잃어버릴 것을 강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게 한다. 타인을 향해 진지한 마음, 관심을 보낸다는 것은 어느덧 사치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고, 감성 속에서조차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무심하고 냉담한 얼굴을 하고, 경계하며, 대기의 작은 동요에도 화를 내는 성마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누군가를 위해, 모든 생명과 대자연에 사랑 가득한 그윽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태초의 숭고한 감성들을 기억내기 어려운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을 얘기하면 이상한 표정을 짓게 된다. 낯설고 기이한 얼굴...,다름 아닌 내 얼굴인지도...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진 동화 같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정말 뜻밖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저 뒤편으로 사라져 잊고 있던 것, 진정 소중한 것인 사랑하는 법, 삶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이 수용된 고아원, 세상에 대한 기대가 없는 아이들만큼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미셸’의 의지이자 사랑인 소녀‘에리’, 그러나 에리는 어둠의 심연, 코마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이 상황은 소년 미셸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두려움이 된다.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는 방기의 상태, 그녀의 생명, 심장의 박동은 꺼져 들어가고 있다.

실의에 잠긴 소년에게 다가온 구원의 빛은 열흘 내에 사랑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별을 가져올 것을 주문한다. 내가 상실한 믿음과 순수성으로는 착수조차 할 수 없는 일일게다. 커다란 잿빛 외투에 작은 몸이 감추어진 소년,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의 옷에서 별을 오려내고,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알프스의 소도시‘슬롱스빌’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이 행위로 흉흉해지기만 한다. 가위를 든 소년, 사랑의 별을 제한된 기간 내에 모으기 위해서는, 언제 멈출지 모르고 약해지기만 하는 에리의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라도 각기 다른 사랑의 별을 모아야 한다. 아홉 개 씩이나 다른 사랑이 있다니, 난 그 사랑의 유형을 상상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 오래 지속되는 사랑,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우정, 동물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책과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이들 사랑을 온화하게 발산하는 사람들을 오늘의 우리세계에서, 내가 사는 도시에서 구별하고 찾아낼 수 있을까?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생텍쥐베리’의 말은 자기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백마 탄 왕자, 아름다운 공주는 우리 내면에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린 환영을 만들어내고 터무니없는 물질에 정신을 희생시키곤 불행해한다. 맹인과 추녀의 낭만적 사랑에서 허영과 표피에 현혹을 부추기는 몽매한 우리 사회의 온갖 소음들이 더없이 수치스러워진다. 사랑의 별을 오리기 위해 찾아가는 사랑의 형태들에서 이 처럼 사랑의 고귀한 가치들과 숭고함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불속에 나무를 집어넣는 것”,  그래서 불길을 살리기 위해서 장작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남자는 그저 사랑이 변했다고 말하는 편의성과 단순성의 오늘의 우리들이 망각한 것을 깨우치게 한다. 하나의 편지지 안에도 시간, 공간, 땅, 비, 구름, 태양, 만물, 우리의 모든 정신,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인식, 피보다 강하게 연결되는 우정이란 관계 등의 일화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깊은 감동을 뿜어낸다.

그러나 모두 모아진 아홉 개의 별, 이것들로 만들어진 심장, 이것만으로 멈추어가는 에리의 생명을 되살릴 수 있을까? 우리의 너무 인색한 사랑한다는 행동과 표현, “사랑해, 에리”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그 간절함의 순간 심장이 멈추어졌던 소녀는 새로운 삶의 생기를 되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별 사냥꾼이 된 소년, 미셸이 보여주는, 그리고 그가 실행하는 사랑의 여정 모두가 그렇게 안온하고 아름다운 기운에 휩싸이게 할 수가 없다. 기적 같은 일화에는 늘 사랑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나와 우리들 모두가 이 사랑의 어느 한 쪽만이라도 회복하고 품으려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어떤 심오한 사회이론과 사상적 세뇌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아홉 개의 사랑 이야기, 이 사랑 이야기를 전했던 걸출한 명인들의 경구와 싯구, 명언들이 또 하나의 장으로 수록되어 사랑 복음서를 더욱 완성도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잃어버렸던 내 한 쪽의 기억들, 감성들이 되 살아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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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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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의 신체와 정신들이 끊임없이 상처받는 지금의 이 세계, 그 가해자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가해자인 그것의 본성과 기원을 찾고, 또한 가해자가 이용하는 우리들의 약점과 그 결과적 현상을 사회학자들, 철학자들, 시인 등 예술가들의 역작들과 비평을 통해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다.
가해자란 화폐자본주의이며, 산업자본주의이고 소비자본주의 이다. 즉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포획한 자본주의 체제와 그 포획된 영역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되어 허덕이고 상처받는 우리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궁극에는 어떻게 이 지독한 체제를 극복하고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장이라 하겠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본주의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여 세계를 점령하고 새로운 종교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그것은 소위 모더니티(modernity), 근대화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이해된 것의 내면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20세기 초 서구 근대화, 산업사회로 우리보다 앞서 접어든 일본을 통해 식민지 수탈체제에 실려 경성에 들어왔으며, 서구의 경우에는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가 모더니티, 즉 자본주의의 출발지라고 보고 있다. 당시의 사회현상들과 사람들의 모습 등 시대상을 묘사하고 그 현상에 내재한 가치들을 성찰하는 과정은 감칠맛 나는 문예비평이며, 일종의 문서고(文書庫)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낸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규명하는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석학들의 명 저술들의 해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20세기 모던보이를 자처했던‘이상’의 소설 『날개』와 사회학자‘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현상들에 대한 저술들을 통해 화폐(돈)가 사람들의 가치관, 물질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추적한다.

일례로 이상의 소설 속 인물인‘나’는 돈의 교환가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인물이다.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해서 돈을 버는 아내가 매일 주는 약간의 돈은 그런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어느 날 문득 아내의 옆에서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 그는 그간 아내가 주었던 돈, 5원을 아내에게 건넨다. 돈을 받은 아내는 그런 나를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 들어오게 한다. 이로서 나는 돈의 교환가치, 그것이 자유, 의도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당대의 이상으로부터 자본주의, 돈의 가치가 인간, 바로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면화하는 과정을 목격한다. 이와 병행하여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란 것이 오직 돈을 가질 때에만 확립된다는 짐멜의 이론을 통해 사랑, 신뢰, 우정과 같은 인간의 소중한 가치들이 돈에 포획되는 현상들을 폭로하고, 화폐 물신성의 기원과 모더니티의 속성인 항상 강박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에 침착하는지를 갈파한다. 나아가 모더니티의 한 현상인 도시화, 현란한 차이의 공간인 도시적 삶의 양식이 사람들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또한 수동적 자유의 상태로 전락시키는지를 탐색한다.

 

이렇듯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간의 내적 양태의 변화, 도시화와 같은 공간적 변모, 산업자본의 생리를 다양한 관점들에서 탐사해 나간다. 시선을 자본주의, 모더니티의 발원지인 파리로 돌리면 우리의 ‘이상(李箱)’에 대입되는 인물로서‘보들레르’를 얘기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시작을 19세기 파리에서 찾았던 사상가‘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향하게 한다. 사창가와 도박,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이 현란하게 진열되는 아케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해대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돈의 위력은 견고해 진다. 여기서 보들레르라는 모더니티의 신경증을 앓던 인물의 욕구와 욕망의 구분을 통해 돈이 자본주의의 숨겨진 종교로서 탄생하는 그 비극성을 보여주고, 인간으로부터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폭력성을 목격하게 한다.

한편 자본주의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서 감관(感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패션과 떨어질 수 없는 유행이란 단어나, 신상품, 그리고 이를 사고파는 매개 수단인 돈, 그리고 과시의 욕망과 이로부터의 출현하는 계층의 구별, 등등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산업자본이 잉여자본을 만들기 위해 주도한다. 역시 새로운 상품이란 것도 기존의 것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보다 거대한 잉여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자본가들이 발견한 자본주의논리이다. 인간의 치명적 약점인 허영심을 재빠르게 이해한 산업자본가들의 전략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사회학자가‘부르디외’이다. 그의 명저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와『구별짓기』는 경제적 자본이 넉넉히 있다는 걸 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행위, 즉 상류층이 자신들을 타 계층과 구별 짓고자하는 의지로서 문화적 자본 등으로 대표되는 폭력적 현상이다. 이들 산업자본가들과 상류층이 하는 구별짓기의 작동원리를 보면 그것은 단지 돈의 축재를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하류층, 중류층에게는 도달하고자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실은 껍데기이고 부질없는 것임에도 소비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소비의 논리는 모든 인간들을 이 대열에 서게 한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와 닮아있다. 자본주의가 곧 기독교를 대체하는 인류의 유일종교가 되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소비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폐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의 파괴성을 통찰한 석학들이 있다. ‘좀바르트’와 ‘보드리야르’가 그들인데,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교활한 전략들을 간파했는가하면,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관념적 가치, 예로서 세탁기를 행복과 에로틱함, 새로움, 위세와 같은 가치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는 소비의 논리를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저술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은폐된 속성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지적 성찰들의 예시와 분석, 해설을 기반으로 그 도사린 문제점을 보다 쉽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냄으로써 우리 세대는 아닐지언정 우리들의 후손들이 더는 상처받고 사는 고통의 세상이 아닌 자기존중과 평온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들은 더 이상 교환(화폐)을 통해서가 아니라‘바타이유’가 말하는 유쾌한 비생산적소비, 보드리야르의 고유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영원히 수단으로 간주하게 하는 삶이 아니라 목적이자 수단일수 있는 세상을 말이다. 돈을 가진 자의 자유에 불과한, 다시 말해 소비의 자유만이 허락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한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협소하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벗어나야 한다. 관념적 쾌감, 그것도 순간적인 관념상의 쾌락에 불과한 돈에 종속된 이 체제는 인간들을 불행하게 한다. 오늘의 과시적 소비주의, 광신적인 물신주의에 대한 대중을 향한 저자 강신주의 세심한 배려가 책 전체에 배어있는, 그래서 엄청난 수고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게 깃든 역작이다.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책 속에 인용되고 있는 저작들을 이미 읽고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오늘의 종교적 질서가 된 거대한 자본주의체제를 그들을 통해 집약화 된 하나의 잘 정리된 질서로 새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동료와 친지들 모두와 이 책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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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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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짐스러울 정도의 삶, “이겨낼 수 없다는 오래된 좌절이” 어떠한 의지조차 없애버린 그런 삶, 대체 이런 삶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김이설이 그려낸 여자, ‘서윤영’이란 인물의 감당해야하는 그리고 감당할 밖에 없는 비루함에 삶의 오욕(汚辱)이 몽땅 씌워져있다.

매년 낙방하는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무능한 남편, 핏덩이 아이, 단칸 옥탑방의 하찮은 생활일지라도 먹고 살기위해서는 벌어야 한다. 어렵사리 구한 도시외곽의 물비린내 나는 닭백숙집의 종업원으로 도시와 그 경계를 아침저녁으로 넘나든다. 마치 환각의 공간 같은 저 세계와 현실의 이 세계를 오가는, 아마 저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윤영은 유령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그것이 환영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온종일 닭백숙 집에서 나르고 닦고 씻고 손님 접대를 하여 버는 한 달 월급은 백 여만원, 그나마 이십 퍼센트는 보증료라고 퇴직할 때 준다며 떼어버리고 준다. 생존을 위한 비용에도 모자란다.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한적한 교외의 닭백숙 집을 찾는 손님들은 음식 맛만으로 찾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식당의 별채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교환들, 식당 여종업원 월급의 몇 곱절이 되는 수입원이 되어주는 그 기이한 육체와 자본의 교환체계 , 주인의 은근한 매춘의 권유는 곧 윤영의 생존수단을 위한 질서 속으로 들어온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인이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외곽의 닭백숙 집을 찾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여가라고 포장해서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불법 매춘행위를 눈감아주고 향응을 받으려는 부패한 사람들, 인간의 육체를 교환가치라는 명목에 집어넣은 자들...그런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환영이기만 한 걸까?

핏덩이 아이를 돌보고 아내 윤영의 밤늦은 식사를 차리는 무기력한 남편, 고시원에 홀로 앉아 공부해도 낙방하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은 없다. 차이고 밟히는 능욕의 댓가로 부양하는 남편과 아이, 그리고 집을 파산시키고 마침내 윤영의 생활까지 침몰시킨 동생들과 엄마의 몰염치한 손 벌리기는 윤영의 의지를 극한으로 내 몰기만 한다. 이 외면하고픈 우리네 삶의 한 조각 현실에 한숨과 울화와 분노가 절로 치밀어 오르지만 어디 발산해 댈 곳이 없는 사면초가의 심정에 몰린다. 정말 “그 따위 나날들”로 점철된 이 세계에 공존하는 현실, 윤영의 삶이 너무 아득해서, 그리고 이 생생한 날것들의 너절하고 염치없고 추함에 나는 쩔쩔맨다.

단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오는, 생활비를 주는 남편, 더 이상 아내를 능욕의 현장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남편이 필요 할 뿐인 그녀가 잠자는 남편의 머리를 발로 툭툭 내차는 광경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윤영이 바라는 작은 소망, “아이 하나를 씻기지도 못하는 좁은 화장실이 조금만 컸으면 좋겠다는 거,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이다. 그런 그녀가 이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말한다. 욕심이어도 괜찮은 것임에도 희망이라고 말하는 그녀 때문에 다시금 울컥한다. 극한에서 극한으로만 치닫는 윤영의 환경, 대체 이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이렇게 지독할까?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최악이란 최상급은 항상 그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란 본디 그랬던 것인 것처럼 그녀는 버티고 또 버틴다. “버티다 보면 버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는 듯이.

김이설이 시종 뚫어지게 보는 이 세상의 단면들, 참고 또 참다보면 그 통증이 무뎌져서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게 되는 삶의 그 지독한 낯짝이 너무도 시리고 아프다. 그러나 그건 이 역설적인 ‘환영’이란 제목처럼 환영이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김이설의 소설, 그 내용들을 냉큼 집어다가 어디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버릴 수 있다면, 아니 그래서 우리의 삶들에서 이러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수만 있다면 하는 어설픈 욕심을 가져본다. 작가만큼은 아니겠지만 읽는 내내 너무도 괴롭고 아팠다. 가슴 한 구석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다...김이설 파이팅! 서윤영 파이팅! 이 땅의 여인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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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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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눈의 복수 신화나 지고한 사랑이야기 같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졌던 전체주의 체제와 추한 권력에 모여든 파리 떼들에 대한 비판이 직설적 은유로 쓰여‘카다레’ 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악과 몽매주의, 폭력과 공포로 시민의 심리를 옥죄고 영혼을 부숴대던 그런 시절을 겪었던 우리의 그 때와 동일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깊은 공감과 동질감을 갖게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애절한 사랑의 테마를 기저로 하고 있고, 더구나 그리스 비극중 하나인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대유(代喩)되어 인간사회가 저지르는 던적스런 역사의 반복에서 역설적이게도 체제와 지역, 시간성을 넘어서는 보편으로서의 인간성을 읽게도 된다.

소재 또한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천박성까지 빼 닮아서 거의 모든 문장을 우리식으로 몇 글자만 수정하고 가필하면 한국소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친근하다. 화자인‘나’란 인물은 방송국 직원으로 독재정권의 악마성, 폭력성에 수치와 혐오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골수 당원이나 서게 되는 국가의 최대 행사인 노동절 행사장에 예상치 못한 초대장이 날라든다. 이 뜻하지 않은 초대장은 권력의 상층부에 가까이 갔다는 상징적 의미이지만 그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승승장구 권력의 핵심인물이 된 연인‘수잔나’의 아버지는 화자와 딸의 교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권력 경쟁을 위해 서슬 시퍼런 감시를 놓지 않는 눈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사랑은 중단되어야 한다. 화자는 여기서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를 권력의 희생제물로서 동일시하며, ‘희생’이란 제의(祭儀)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모색한다.

희생을 요구한 권력의 진심, 그 진의를 탐사하는 관념의 여정이 독재자와 그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파렴치한 이들만이 입장 할 수 있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물리적 행보와 병행하여 진행된다. 행사에 초대를 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대중들과의 도로에서의 구별, 그리고 본 행사장에 가기까지 거치는 몇 차례의 검색지역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의 면면은 가히 볼만한 인간시장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검문이 철저할수록 초대장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듯이 그 차별을 즐기는 군상들, 그리고 그 권력의 상징적 공간에 새로이 진입한 인물들을 발견할 때 “저 인간은 대체 뭘 해준 대가로 초대장을 받았을까?”, “누굴 감옥에 쳐 넣었소?”라는 자기 모순적 의혹을 드러내는 표정처럼 징그러운 벌레 같은 인간들의 역겨움이 묘사된다. 동료를, 이웃을, 상사와 부하를 고발하고 음모가 난무하는 불신의 세상에서 신분상승은 타인을 짓밟고 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제로섬게임, 극한적 경쟁에서는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자다. 여기에 수단의 도덕성, 수치심, 죄의식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란 없어진다. 승리하면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권력과 부의 모양새와 똑 같다.

형편없는 자들의 이야기, 천박한 인간의 완벽한 예, 저 아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헛되이 날려드는 이 세계의 악마적 메커니즘이 신랄한 우화와 함께 등장한다. 인간의 살코기를 주어야 날아오르는 독수리, 그 독수리의 등에 올라 비상하지만 준비한 타인의 몸이 소진되고 나면 도달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잘라내야 한다. 이윽고 아래 쪽 세계에서 위쪽 세계로 독수리가 솟아올랐을 때 “독수리가 죽은 사람의 뼈를 싣고 올라왔어요!”라는 말만이 허공을 맴돈다.

도덕적 가치들의 훼손, 불건전한 도취감, 성취감이 오늘의 인간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한 번 더러워진 인간은 그 다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쉽게 더럽히게 된다. 이 패악스럽고 추악한 탐욕의 메커니즘이 보편화된 비천한 쾌락을 온통 세상에 내재화시켜 이를 분별해내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많은 나라들이 신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신적 피폐화와 인간 삶의 중요한 진실들을 파괴하는 이 정신적 몰락의 현실과 결별하려고 함에도 우리 사회는 자기성찰과 반성은커녕 더욱 더 집착하고 매달리는 꼴이다. “세계는 지금 몽매주의와 결별하고 있어요. 그런데 끝까지 그걸 옹호하고 있잖아요.”라는 화자가 기득 권력에게 외치는 분노의 울부짖음은 마치 우리를 향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제물은 권력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이 오래된 희생제의의 고전적 본보기인 권력자 아가멤논이 행한 딸의 처형은 자신의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즉 모든 병사들의 죽음을 요구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주기 위한 잔혹한 욕심이었을 것이다. 이를 대의를 위한 영웅의 탁월한 전략이라고 칭송하는 빌어먹을 인간들이 있겠지만 그 만큼 우리 인간들은 더욱 교활해지고 세련되고 잔인해졌다는 의미일 게다. 사랑하는 연인을 희생 제물로 뺏긴 화자가 이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모든 삶의 원천인‘거기’부터 재교육해야 한다는 조롱어린 외침에서 사랑을 잃은 자 그대로의 분노가 느껴진다. 전체주의 권력의 독선과 그것이 조성해내는 암울하고 황폐해진 인간성의 고발을 통해 우리들이 잃어버린 고귀한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회복하고자하는 숭고한 의지의 산물로서 이 소설은 그 몫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권력의 본질이 메타포 천재의 손길로 설득력 있게 그려진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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