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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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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하게 신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 길에는 이제 없다.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남았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세계도 가져갔다.”지구의 종말이 훑고 지나갔고 죽음의 재와 잿빛 눈, 짙게 깔린 어둠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겨울의 대지위에 떨고 있는 두 짐승이 여기 생존의 길을 걷고 있을 따름이다.

남자와 아이는 삶의 숨결이 멎은, 그리고 오직 생존의 본능만 남은 사람들을 피해, 양식을 찾아, 남쪽이란 존재치 않는 이상향의 행로를 걷는다.

‘앨런 와이즈먼’의『인간 없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질문인“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놀라운 존재인‘아이’가 다시 푸른 대지에서 뛰놀 수 없게 된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뒤에 남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처럼만 보인다.

작품은 끝없는 생존의 걸음과 마지막 인간이 뱉어내는 회의와 불완전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사색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 아름다움, 선(善)과 악(惡)에 대한 배반적인 사유와 신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탐험을 지속한다.

남자와 아이,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의 목록은 없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만이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꿈 일지도.

“때가 오면? 때가 오면 시간이 없을 거야. 지금이 그때야. 신을 저주하며 죽는 거야.”그럼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유일한 희망은 무(無)야. 난 온 마음으로 그걸 바라.”“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 省略 ~”에서 ‘없음’,‘부존재’이외에 무엇을 선택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인간을 먹어야 하는 생존한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비와 인간들을 피해 걷는다. ‘나쁜 사람들’을 피해서, 그러나 도움을 주어야 할,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주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하고 반문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中略 ~ 아무도 여기 있고 싶어 하지 않고 또 아무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소.”그러나 우린 종말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다. 결코 “수의에 덮인 지구, 황량한 지구”가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앨런와이즈먼의 ‘푸른 대지위에 뛰노는 아이’처럼 인류의 빛, 그리고 신(神)의 현현으로 비유되고 있다. 마치 창세기의 한 구절이 묘사된 듯이 “소년 주위가 온통 빛이었다. ~ 中略 ~ 주위를 둘러봐라.~ 中略 ~ 지구의 오랜 연대기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를 오늘 여기서 기린다. 네가 어떤 형식을 이야기했건 네가 옳았다.”그리고 남자의 죽음 뒤에 찾아온 사람과 그의 가족, 아비의 유언처럼,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삶에게로 건네진다고."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이기적 보호와 사랑에서 우린 남자의 독백처럼 “아마 아름다움이나 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 신이 존재 할까? 마침내 우리가 지구에서 종적을 감추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마침내 “어쩌면 세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무(無)의 낭만적 논리성을 강변한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애달픈 연민일 수 도 있고, 종말을 치닫는 인간의 악과 오만에 대한 경종일 수도 있다. 음울한 두 사람의 행로에서 고귀함, 아름다움, 희망의 울림이 배제되지 않고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다. 노 작가에게서 우린 다소의 위로를 받는다. “슬픔과 재속의 탄생.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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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러를 빌린 백만장자
마크 피셔 지음, 지소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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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 할 수 없게 한다. 보다 자유로운 삶, 바로 생활과 긴장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자연과 어울려 삶의 궁극을 사유하고, 남아있는 운명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말이다.

인생이 앞으로 얼마가지 않아 끝난다고 할지라도 같은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일을 나는 하고 있는 것인가? “남은 인생이 목전에 다다른 후에야”우린 겨우 깨닫게 된다고 저자는 우릴 일깨운다.“나는 날마다 모든 일에 좋아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와 같은 집중성의 강조나, 잠재의식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에 대해“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라.”식의 자기암시를 통한 각인을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확신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작은 저술은 부자가 되어 자유를 만끽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부자되는 법을 위한 저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저술의 중심 우화는 단순히 부자가 되는 방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결정적 요인들을 지적하고 그들을 이겨내기 위한 친절한 멘토로서의 인생지침을 알려주고 있다.

역시 이 저술의 많은 조언들 또한 진부 할 수 있는 클리셰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자기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나, 열정에 더한 확고한 신념, 외부환경과 같은 조건의 불비 탓만 하는 비겁한 내면의 회피의식, “인간에게 가장 큰 장애는 자신의 정신적 한계이다.”와 같은 거울에 비친 자신, 즉 자신의 태도에 대한 새로운 신념의 확립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자기한계를 새로이 설정하고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다만, 이 저술이 이렇듯 취약한 자기불신과 내면의 비겁함을 자신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별성을 읽을 수 있다.

자, “신념은 말로 표현하고 반복해서 크게 외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말은 인간의 내면과 주변의 환경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기”때문이라고, 그리고 “잠재의식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하라. 자기암시로 각인시켜라.” 그러면, 미심쩍은 생각은 극복된다는 논리다. 한번 실천해본다고 손해 날 것은 없다. 당분간은 이 저술에서 부자인 ‘고든’씨가 권하는 방법을 따라해 볼 작정이다. 앞으로 6년 후에는 나 역시 주인공처럼 백만장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과연 무의식, 잠재의식을 통제 할 수 있는 것일까? 와 같은 과학적 회의는 접어두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을 상정하고 나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백지에 50억원을 써 넣으려한다. 이 정도면 이 저술은 성공적인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한 발걸음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진정 인생의 자유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작은 책자를 추천한다.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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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존 업다이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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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출간되자,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인종과 계층에 대한 인류의 고질적이고 케케묵은 병적 편견을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에 담아낸 걸작중 걸작이다.업다이크의 작품을 펼치면 그의 겸허한 작가의 말을 접하게 되는데 이 작품 또한 예외 없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저작들과 작가들에 대한 존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죠제프 베디에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eult)』에서 분위기와 기본골격을 가져왔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트리스탕’과 이사벨’로 그 차용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다만, 죠제프가 쓴 켈트족으로부터 구전되어온 사랑의 전설인 트리스탕과 이즈(Iseut)나 로미오와 줄리엣식 낭만적 비극류와는 주제의식을 비롯해 전편(全篇)을 통해 흐르는 인간본성으로서의 성애(性愛)에 대한 그 격렬함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랑의 형식을 보게 된다.

 

윤기 흐르는 검정색피부의 부랑아인 흑인소년 트리스탕과 고위외교관의 외동딸인 금발의 백인 소녀 이사벨이란 흑백의 대비되는 인종의 설정에서부터 백인남성과 흑인여성이라는 유럽과 백인중심사회의 일반적 권위에 의한 남녀관계를 뒤엎는 성적임무의 부여와 같이 그 관능성의 자극 수위를 극단적으로 치달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또한, 주인공의 사회계층적 계급의 부여 역시 흑인 창녀의 아비를 모르는 거리의 최하층자로서 흑인을,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공식으로서 백인을 표현한 것은 다분히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상정하고 있다할 수 있다.

백색의 피부에 부여되는 권력의 사회적 무언의 합의와 같은 오랜 왜곡된 의식이 섹스에 있어 남성의 욕구를 존중하려는 여성의 열등적 행위로 가장되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이사벨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잠재적 권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도피행각에서 호텔 벨 보이와의 3인의 변태적 성행위는 트리스탕의 흑인으로서의 약자이자 권위의 수용자로서의 불가피함을 암시한다.

 

성애의 묘사에 있어서 그 디테일을 통해 인간 본성에 감추어진 은밀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허위와 가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육체와 정신의 일원성이란 본능의 현재화(顯在化)를 보여준다. 리우데자네이로의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는 해안에서 시작되어 상파울로의 산업 현장으로, 다시금 브라질리아, 그리고 고이아스, 브라질의 서쪽, 마투그로수 정글지대로 이어지는 사랑의 도피에서 보여주는 이 연인의 사랑은 음울할 정도로 깊어 외면키 어려운 야릇한 우울함에 빠지게 한다.

고이아스 금광촌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아내를 안을 겨를 없이 지쳐 잠드는 트리스탕,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이사벨, 사방 1.5M를 파내려가는 자신만의 금광 안에서 솟구치는 자신의 얌을 흔들어대는 트리스탕에서, 발견된 금덩어리, 그리고 살인으로 인해 다시금 정글로의 탈출로 이어지는 사건의 전환에서 다시금 흑인으로서의 피해의식과 보호자로서의 사회 기능적 보편성에 문제를 던진다.

 

작품의 기저에 뿌리내리고 있는 인종적 편견의 불식이라는 주제와 병행하여 남녀의 사랑과 섹스의 상호 불가분성에 대한 일관된 주장이 인간 본연성(本然性)의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다. 트리스탕의 창녀와의 섹스에서, 이사벨의 뭇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삼촌과 그의 가정부였던 두 번째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보여주는 그 모호한 이중성과 트리스탕과 이사벨에서의 불가분성이 사랑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리고 작가가 도입한 환상적 주술의 설정은 연인의 피부색을 바꿔 놓고 그 흑백의 교묘한 관계를 추적해간다. 그럼에도 육체적, 특히 외형적 변화와는 달리 영혼의 본질적 변화로까지 이행하지는 않는다. 독특한 사랑의 방식과 인종과 계층에 대한 전복적인 이 시선은 결국 우리들의 일그러진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리라. 백인 트리스탕의 주검에 오열하는 흑색의 진주 이사벨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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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1 -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
한승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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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으로, 그리고 탁옹(籜翁)이기도 한, 여유당(與猶堂) 정약용선생을 인간의 본질, 우주의 근원이라는 원초적 질문에 대한 풀이의 한 가운데 설정하였다. 작가는 19세기 초 조선사회에 일대 정신사(精神史)의 교란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의 여정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1801년 신유사옥이후 다산의 유배생활을 소설적 배경으로 하여,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작된 정적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소설 문학의 많은 작품들이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한 팩션이란 형식을 취하고 있듯이, 이 작품이 역사라는 시간성을 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 인물에 대한 존경과 풍부한 현학적 성찰을 통해 인간의 극단적인 비극성과 숭고한 존엄성의 결합을 위해 시대적 사건은 지극히 허구적으로 인용되는 정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우주와 인간에 던지는 최초의 질문에 대한 갈등과 깨달음과 같은 사색적 견지에서 작품을 대하기에는 다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그의 행동양식, 사고방식, 신념과 같은 인물성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책1권의 서언격인‘다산비결’의 신비성을 시작으로 『서암강학기』,『도산사숙록』, 『흠흠신서』, 『목민심서』, 『방례초본』(『경세유표』,『다산비결』), 『아언각비』에 이르는 다산의 저술들이 그의 세상에 대한 시선, 즉 “진정한 깨달음은 어짊(仁)이고, 그 어짊은 세상을 환하게 꽃피워 장식하는 사업이다.”와 같이 주제에 녹아 흐른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이 만물생성에 대한 최초 기원요소로 주자학의 5행론(물,불,나무,흙,쇠)과 천주학의 4행론(물,불,흙,공기)의 대립으로부터, 영혼과 같은 본질의 사유를 끌어내거나, 혜장스님이나 초의선사와의 담론을 통해 “하늘의 별은 그냥 별이 아니고 내 눈이 그 별을 만든다 하네,~ 中略 ~ 인식의 차원을 넘어 내 눈의 창조와 개혁을 말 하네”와 같이 인간들이 감각하는 세계는 과연 진실인가? 표면적 무질서와 다양함의 심층 속에 있는 질서와 통일, 지속성의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적 사유체계를 아우르고, 한편은 “아, 덧없다, 꿈이다....그것은 하나의 허방이었다.”로  이 작품의 초입부와 같이 가시적 인간세계에서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비극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작가는 “고통이 없으면 세상도 없다. 고통을 비틀어 꼬면 빛이 된다. 그 빛은 깃털 찬란한 새가되어 짙푸른 하늘 한복판으로 날아간다.”고 몇 번씩이나 이 구절을 되뇐다.

또한, 우주율동론으로서의 『주역(周易)』의 등장은 “영기의 율과 음기의 여가 어우러진 소리(律呂)로써 천지를 화합”한다거나, 다산이 곡산군수로의 부임을 앞두고 자아를 진정시키는“향기로운 꽃그늘은 물로써 이기고, 물은 달빛으로 이기고, 달은 해로써 이기고, 해는 밤으로써 이기고, 기나긴 밤은 잠으로써 이긴다.”와 같이 자연의 섭리를 해설하는 수단으로 전편을 장식하고 있다.

작품 속에는 인상적인 싯구들이 꽤나 등장하는데 전편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시경』의 “어여쁜 저 아가씨와 노래 부르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말을 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함께 얘기하고 깊어라”는 세상사의 논의에 절대적 요소로 정말 멋지게, 심오하게, 적절하게 가슴깊이 새겨지기도 하며, ‘연두색 머리처네와 쪽색의 치맛자락’이 은근한 관능과 인간 본성의 자질로서“비몸살 달몸살”과 같은 예스러움으로 소설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또한, “거문고가 말없이 윤시유의 춤을 즐기고, 기름접시 불이 자지러질듯이 허리를 꼬면서 깔깔거렸다.”는 이 영상적인 문장은 가히 작가의 통찰과 상상력의 위대함을 느끼게 함에 충분하다.

전라도 강진 땅 유배지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면서 다산이 읊는 아래의 詩(청산도)에서와 같이, 작가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정제된 어조로 다산에 대한 근엄한 존경에 행여 누가 될까 한 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고 올 곧게 걷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청산은 어찌하여 청산인가,

  두물머리 말재의 넋이

  고향의 그리움을 읊어낸 시

  열매로 마디마디에 열려 있어서 청산이지...

         (後略)

다산의 영검하고 웅대한 산에서 혜장스님처럼 길을 잃고 조난당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지난한 노력을 이 작품이란 결실로 내 놓았다. “천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를 노예처럼 부려야”함을 손수 실천 하신 듯하다. 작가가 다산을 존경하듯이 우리 문단의 큰 산인 한승원 선생의 이 위대한 작품에 경의(敬意)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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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스티븐 버트먼 지음, 김석희 옮김 / 루비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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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가지의 고고학적 소재로 엮여있다. 그러나 고고학이란 성찰적 지식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인류문화사나 고대서양사에서 즐겨 소개되고 있는 낯익은 소재들이지만 저자의 감성적인 시선과 문학과 예술의 교감을 형성하는 글맛은 나름 새롭고 흥미롭다 할 수 있다.

모든 학문의 동기가 그렇듯이 고고학 역시 인류의 기원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켜켜이 쌓여있는 지층을 파헤치고, 도시의 빌딩숲 아래 잠자는, 그리고 심해의 모래 속에서 건져 올린 수 천 년 전의 물질에서 우린 인류의 모습을 재확인한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물질 속에 어떻게 새겨 넣었을까? 그 상징과 추구하는 바는? 그리고 그들의 의식수준은? 전설, 신화는 혹 역사적 사실은 아니었을까?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하는 오늘의 이라크 남부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인 당시 번영했던 수메르의 홍수설화에서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하라파, 그리고 모헨조다로의 출토된 석상에서 사제(주술사)와 군주를 겸한 모습을 발견하고, 순간 사라진 문명의 원인을 사색해보기도 한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일리아드』와『오디세이』를 중심으로 1871년 터키해안인 ‘히사를리크’에서의 트로이 유적 발굴에 얽힌 설명등이 문학적 감수성과 학문적 성과를 적절히 버무려 고고학적 이해로 안내하기도 한다. 또한 미노타우르스 전설의 실제를 찾아 지중해 유적의 발굴이야기를 들려주며 라비린토스(미궁)에 얽힌 이야기와 ‘이카로스’의 죽음을 재미있게 풀어주기도 한다.

인간의 시간적 감각뿐 아니라 자연의 성상으로도 인간이 조작해낸 물질을 수 천 년 간 남겨놓기에는 긴 세월이다. 더구나 중세 기독교도들의 우상 파괴명분하에 자행된 그리스 예술품의 마구잡이식 파괴는 오늘날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고의적인 파괴를 피하고 우리에게 고고학적 발굴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난폭한 행동(화산폭발, 지각변동, 침식, 퇴적 등등)이라는 아이러니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방자함을 돌아보게 한다.

기원전 1450년경의 지중해 연안의 대규모 지각변동, 서기 79년 8월의 베수비오화산 폭발, 덴마크의 이탄층 과 같이 파괴적이었던 자연이 오늘의 우리에게 더 멋진 일상의 고대를 현실로 안내한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자에게 남겨진 유물은 개선문이나 성벽 같은 강자의 오만한 기념물뿐이지만, 폼페이에서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다양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이탈리아의 첫 번째 문명인 오늘날 토스카나 지방인 에트루리아의‘자연과 감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묘사된 고분벽화에서, 햄릿의 무대인 덴마크 항구도시 엘시노어(헬싱괴르) 이탄의 늪지대에서 발견된 서기 1~5세기 시신의 원형보존에서 인신공회의 관습을, 그리고 잉글랜드 서턴후, 캐멀럿의 전설, 이스터섬의 수수께끼, 마야와 아즈텍 유적, 진시황제의 도용무덤 등 흥미로운 고고학적 경이로움을 이 저술은 풍부하게 설명해 내고 있다.

그리고, 퇴적된 옛 쓰레기를 순서대로 꺼내는 층서적(層序的)발굴이란 고고학 이론의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소개에서부터, 오늘의 현대화된 도심의 길거리 밑에 감추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2천년의 도시 런던 뿐 아니라, 우리의 심장인 서울도심의 밑까지 그 고고학적 호기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 저술의 처음과 마무리는 지극히 동질의 사색적인 구절로 장식되고 있다. “파괴가 있으면 창조도 존재하고, 소멸하는 삶이 있으면 새로 태어나는 삶도 존재한다는 사실, 때로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땅위에 흩뿌리지만 봄이 오면 숲속에서는 다시 싹이 트고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돋아난다. 인간세상도 마찬가지여서, 한편에서는 태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떠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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