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처럼 비웃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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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함, 아마 인간의 지성으로 헤아려지지 않는 무엇에 붙여진 표현일 것이다.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나 꺼림직 한 것, 무언가 은폐하고 싶은 것에 접근치 못하게 하려는 제약, 금지의 다른 표상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마을이나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러한 기담은 사실 이러한 것들이 응집된 이야기이기에 당대의 시대상이나 은닉된 진실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 으스스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기담의 요소들이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게 한다. 그래서 이 터부의 실체를 들여다보려면 그 부정하거나 속된 것으로 들어갈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미쓰다 신조’는 바로 이러한 괴이에 명철한 이성의 메스를 갖다 댐으로써 호러물의 공허한 공포를 현실이란 추리의 세계로 끌어낸다. 초월적 또는 환상적 세계를 현실, 속세의 감추어진 욕망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금기란 바로 이처럼 음흉함을 이면에 감추는 가해자의 그럴듯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소설의 시작 부는 ‘고키 노부요시’라는 자의 괴이한 체험기이다. 고향마을 하도의 전통의식으로서 성년의 통과의례인 성인참배를 위해 신산(神山)인 삼산(三山)을 홀로 종주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 행로에서 고키는 산녀(山女), 산마(山魔)에 쫒기는 환영과 괴이한 울음소리 등 환청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어 흉산(凶山)인 부름산에 들어가게 되고 산속에 어울리지 않게 서있는 집과 사람들을 만난다. 산 넘어 가스미가(家)의 20여 년 전 집을 떠났다는 ‘다쓰이치’일가를 만난 것인데, 아침에 일어나자 홀연히 이들 가족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기이함과 산마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고키가 ‘도조 겐조’라는 기담수집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에게 체험의 기록을 보내 그 실상의 규명을 의뢰한 것인데, 여기서부터 향토색 짙었던 괴담은 과학적 이성의 추리, 경찰의 수사라는 현실의 세계와 융합하기 시작한다.
이 기담이 현실로 진입하는 사건의 발단은 다쓰이치 일가가 사라졌다는 부름산의 주인인 가지토리가(家)의 당주인‘리키하라’의 도움을 받아 산 속 밀폐된 집에서 얼굴이 불타는 시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안에서만 잠기는 대문의 집 안에서 살해자는 자취가 없고 막 살해된 듯한 사람의 얼굴을 숨기려 한듯 얼굴을 알 아 볼 수 없게 불을 지른 것이다. 소위 밀실트릭이란 열린 공간의 상식을 차단하려는 은폐 술책이다. 당연히 이 밀실책략에 무언의 진실이 숨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흉산인 부름산이 오래전 금광이 있었다는 전언이나, 다쓰이치나 그 형제인 다쓰조의 금광에 얽힌 끔찍한 소문이 실려 금기란 바로 금, 재물에 대한 탐욕의 은폐가 오랜 세월 축적된 현상임을 암시한다. 살해된 자의 신분이 다쓰이치, 다쓰지, 다쓰조 삼형제의 집안인 가스미가를 지키는 다쓰지임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본격화한다. 죽은 다쓰지는 구마도를 수호하는 신령인 여섯 지장의 첫 번째인 백색지장의 표식을 한 형상이다. 연쇄 살인을 예고하는 것인데, 곧 이어 두 번째인 흑색지장을 모신 기도당에서 다쓰지의 아들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이제 살인 사건은 가미스가 가족 간의 금광에 대한 물밑 다툼으로 추정되지만 기담가 겐조를 돕던 가지토리가의 당주 리키하라가 살해됨으로써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어느 향토마을의 흉산에 얽힌 민담의 이면에 인간의 추악한 사욕이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스미가 세 형제의 사라짐과 죽음의 추정, 여인네의 치정, 재물다툼, 그리고 기괴한 산마의 전설과 얽혀 교묘한 속임수이거나 함정으로 작동하며 정교하고 치밀한 추리의 지적 세계로 일궈내는 작가의 구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참신하다. 이윽고 가스미가의 성인 모두가 살해되는데 이르고 현지에 차려진 수사팀은 범인을 찾아내는데 한계에 몰린다. 외지인이라고는 기담가 겐조와 수도를 하는 순례자, 단 두 명뿐인 작은 마을의 연쇄살인범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은 혹시 모를 다쓰이치 일가나 오래전 죽었거나 실종되었다는 다쓰조로 인해 수사팀을 흉산의 수색으로 이끈다.

현지 수사팀을 지휘하는 경부의 신뢰 속에 범인의 실체로 다가가는 겐조의 논리와 추리력은 감탄을 연신 터뜨리게 한다. 범인으로서 완벽한 배경논리가 정립되었는가하면 여지없이 반론, 반대증거로 허물어진다. 반전, 대반전, 그리고 허를 찔리는 역전에 작품의 묘미는 한없이 고조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생, 삶을 지탱케 하는 가치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정체성이 손상된다면 엄청난 화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 산마가 어디 있겠는가! 타인을 단지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멸문(滅門)의 끔찍한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트릭의 정수를 보았다는 느낌이다. 깔끔하고 알찬, 진정 명쾌하고 세련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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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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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나의 무의식을 지배당한다면? 내 생각과 행동을 나보다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내게 위협을 가해온다면 그에게 항거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날아든 편지, 1000 이하의 숫자를 떠올려보라는 황당한 요구, 그리곤 무심히, 어떠한 연고도 없는 숫자 ‘658’, 단지 그 순간 마음속에 그린 숫자가 동봉된 다른 봉투에 똑같이 적혀있다면 아연실색할 것이다.

게다가 숫자가 야기하는 전율과 공포를 훌쩍 뛰어넘어 의도적으로 남긴 무수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 봉착하면 그야말로 초월적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타인의 생각과 심리를 꿰뚫어보는 존재, 담배꽁초, 부츠, 깨진 술병 등 범행도구까지 즐비한 증거가 수사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눈 위의 발자국처럼 황당하기까지 하다면 신비와 영적 현상이라 치부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작품은 독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한다. 지적 도발이다! 그래서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흩뿌려지는 단서들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중심에 다가가려는 시도에 몰입하게 한다. 또한 삶의 아픔과 사랑, 자기 바라보기,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조화 등 인생의 고귀한 어떤 것들과 같이 문학적 향취까지 더해지면서 한 단계 진화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스릴러 문학의 정수를 보는 충만한 기쁨까지 느끼게 한다.

사건은 은퇴한 뉴욕경찰의 1급수사관, ‘거니’에게 25년 만에 찾아온 대학동창의 도움의 요청으로 시작된다. 야릇한 편지와 숫자, 그리고 죽음의 복수를 암시하는 8행시, 숫자 658, 19 등 협박자는 동창생‘맬러리’의 생각을 읽고 있다. 그러나 협박자의 서신이나 전화로부터 구체적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하던 중에 동창생은 살해된 채 발견된다. 경찰에 대한 증오와 조롱이 담긴 쪽지가 발견되고 남겨진 증거들에서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현직 경찰이 아닌 은퇴자인 전직 형사인 거니가 이 사건에 참여할 의무란 없다. 뉴욕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은퇴생활을 시작한 그가 자기만의 세계, 직업적 도피처로 달아나려는 것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건 담당 지방검사의 수사참여 요청에 동의하고 다시금 살인사건에 몰입한다.

여기서 작품은 두 갈래 길을 걷는다. 은퇴형사 거니의 삶에 드리운 고통, 그의 트라우마를 구성하는 고뇌의 원천, 그로부터 야기되는 아내‘메들린’과 아들, 가족과의 소원함으로부터 야기되는 자기 삶의 성찰과 삶의 진실성에 대한 추적이 배경이 되어 흐르며, 한 편은 살인의 단서와 동기, 살인자의 행적을 쫓는다. 침착함,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실행, 의식(儀式)적 행위, 천재적 완전성 등 범인은 사건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 단지 경찰을 향해 내뱉는 짙은 혐오와 분노가 어렴풋이 가리키는 방향을 추적한다. 동일한 협박과 이에 반응한 사람들의 연쇄적인 죽음, 이 잇단 피살에 은닉된 공통성을 찾아야 하며,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의 사소한 대화에 깃들지도 모를 단서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한다.

교활하고 가히 천재적인 연쇄 살인범, 상황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하는 이 사이코패스의 추적은 수사팀의 회의장면을 통해서 또 하나의 멋진 드라마를 보여 준다. 권위와 지위에 아부하고 부하에겐 한 없이 편협한 무능한 리더인 수사반장, 노련미 넘치는 정치지향의 지방검사, 예리함과 통찰력 넘치는 젊은 형사들, 범죄 심리학자를 통한 사건전개의 예측 등, 조직과 영역에 놓인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관찰하게 하는가 하면 사건의 단서와 복선까지 혼재케 하여 지속적인 긴장감과 흥미를 놓지 못하게 한다.

살인, 복수의 의식을 완성하려는 연쇄살인범과 그의 실체를 밝혀내려는 형사 거니의 교우는 불가피하다. 회피하고 외면하려 하는 어두운 심연에 묻어둔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거니의 살인범의 추적은 곧 자기성찰과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의 이해로 다가서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범인과의 극적인 조우는 사건의 종결이라는 의미와 함께 가족에 대한 작고 소박한 소통과 관심과 같은 우리가 잃어버린 귀중한 미덕들에 대한 각성으로 모아진다. 열린 수사, 다층적 추리, 숫자와 밀실의 트릭 등, 다채로운 기법들과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가야만 하는 단서들의 조합과 전개까지 더해져, 모처럼 경계를 벗어나는 의식의 창발을 하게하는 작품이다. 아마 훗날 이 작품부터 21세기 새로운 형태의 스릴러문학이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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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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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근원적인 공포와 집착의 대상”인 삶의 소멸로서의 죽음이란 부조리는 그 알 수 없는 세계, 무지로 인한 호기심으로 기이한 행동과 생각을 만들어 낸다. 또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경계, 대체 언제 인간은 완전히 죽은 것인가에 대한 정의조차 애매하기 그지없어, 시대의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철학적 문화적 사고에 따라, 나아가 발전된 기술의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있으니 인간의 상상력으로 정의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1768년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은“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죽음에 대한 거친 정의를 남겼다가, 2007년 판에서는 “모든 생물이 종국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라고 조금은 신중한 정의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역시 모호하기 짝이 없긴 마찬가지다.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란 이 말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현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심박과 호흡의 완전 중단? 인공호흡법과 생명유지기술로 인해 이 정의도 “반사행동과 인지, 고통이나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완전히 결여된 상태”라는 새로운 사망의 척도에 갈아치워졌다. 그럼 이를 통제하는 뇌간의 손상이나 괴멸로 진단되면 죽은 것인가? 여전히 PVS(식물인간)진단을 이끌어 낼만한 임상 실험 방법이 없는 오늘의 의료계나 뇌사판정의 오류를 보더라도 이 역시 죽음에 대한 완전한 판단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1세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대의학 이전의 세상에서 이 죽음에 대한 진단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구별의 신뢰성을 저하시킨다. 그래서였던지 죽었다고 판단하여 매장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끔찍한 사례가 빈번했던 모양이다. 단단하게 못질된 관속에서 몸부림쳤던 흔적들,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완전한 부패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사체대기소가 만들어지고, 절명의 판단을 위한 엽기적인 진단법이 시도되거나, 깨어나면 흔들어댈 종을 연결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의 관들과 묘지들이 제작, 설치되었다니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우습기조차 하다.

그러나 이 희극 같은 사망의 진단과 매장의 모습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의 두려움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매장된 사체의 도난이나 훼손과 같은 산 자들의 탐욕까지 더해지면 망자와 가족들로서는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죽음이란 이 알 수 없는 공포에 대한 호기심은 역설적이게도 산 자들의 더없이 훌륭한 생존 수단이자 삶의 수호자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필요와 욕망실현의 대상이라는 모순성을 아울러 갖는다. 의대 해부학 재료로 사체가 밀매되고, 조형예술작품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부위별로 약재로 판매되는가하면, 영적 효험이나 미신적 상징물로 보존되고 거래되기도 한다. 죽음의 훼손과 경외라는 이율배반적인 이러한 인식과 행동에는 기막힌 공리주의적, 과학적 합리주의 윤리관이 스며있다. 게다가 교활한 인간의 탐욕까지도. 이처럼 인간이‘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실로 얄궂다.

이러한 탐욕에는 권력의 과시와 명예의 보존과 같은 비물질적 욕망은 물론 삶의 연장과 부의 축적과 같은 물질적 갈망까지 삶의 전 영역에 이른다. 죽음조차 산 자의 이기심에 활용되는 것인데, 망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육신을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대지에서 나온 이 대지로 돌아간다.’는 말은 오늘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고대사회부터 이미 인간은 이 말이 공허한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남아메리카, 중국사회의 시체 방부기술은 죽어서도 부패하지 않고 영원하겠다는 믿음의 미라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유지를 수단으로 레닌의 사체를 방부처리하여 전시함으로써 소비에트 시민의 체제불만의 시선을 돌리려 한 것이나, 마오쩌둥, 김일성의 방부처리 보존은 이러한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대의 미라는 파헤쳐져 각종 질병에 효험이 있다는 약재로 둔갑하여 갈리고 빻아져 호사가들의 위장 속으로 들어갔으니 영원을 기대했던 미라들은 죽어서도 그리 편한 여정은 못하고 있으니, 영혼을 연장시켜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앞선다. 여기에 자신의 유골이나 사체의 재를 이용하여 다이몬드로 가공하여 보존하거나 회화의 재료로 그림에 남아있도록 하는 행위들이 산업화되어 죽음을 상품화하는 시대에 이르렀으니 가히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더 이상 고전적인 인식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내용인즉 추모(追慕)라는 그럴듯한 진지함이 있어 보이지만, 영원성에 대한 집착이외에 무엇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죽음이란 부조리에 대한 공포는 오만한 과학을 등에 업고 “불가피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외쳐대기까지 한다. “얼마간의 자금과 적절한 장치, 질소 용액만 있으면 피해갈 수 있다?” 영생주의자들은 냉동보존을 하고 냉동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상태의 보존기술을 말하는가하면, 뇌만 보존시키는 신경보존술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초월하는‘포스트 휴먼’이란 기계와 인간이 복합되고 조합된 인간을 통한 영생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결국 죽음에 대한 삶의 단절을 회피하기 위한 탐욕스런 집착이 인간을 질기게 잡아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존재자로 체감하는 현재성을 상실한 인간이 과연 인간일까? 현재성의 미학을 상실한 괴물이 아닐까? “삶의 연장이란 곧 고통의 연장이자 죽음의 배가를 의미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삶이란 죽음으로 인해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존엄사(안락사)와 사망진단에 대한 의학적, 윤리적 재성찰을 통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강조, 인류사회의 매장문화와 장례의식이 지니는 영적의미는 물론 은폐된 속세 욕망들의 실체들, 미라 제작술과 방부처리 및 표본화 기술에 내재한 풍부한 역사적, 종교적 의미와 사례들,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서의 연옥을 말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후세계를 이용한 사기술책, 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죽음의 재발견 등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죽음에 깃든 인간의 역사를 이 책은 경쾌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매양 일상에서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죽음을 잊어서도 안 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겸허하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죽음의 역사를 훑어보는 여정으로부터 조금은 넓고 포용력 있는 시선을 갖게 해주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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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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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질 무렵, 가을의 낙엽이 쓸쓸히 구르는 평온한 호숫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가슴에 아릿하고 시린 무엇이 날아들어 애잔함이 휘감아 도는 듯하다.
삶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수한 성취를 향한 여정도, 사랑도, 욕망도...,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정염(情炎)도..., 이러한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알 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인생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림이, 이야기가 흐른다. 세상을 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고 그 아내의 이야기이도 하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라빌디외’에 인생의 진실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발다비우’란 인물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삶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빌디외에 견사(絹絲)산업을 일으키려는 발다비우의 권유에 따라 정숙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 ‘엘렌’의 지고한 사랑을 받는‘에르베 종쿠르’는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소재의 원천을 만드는 근동지역의 수입에 의존하던 누에알에 전염병이 돌면서 돌파구를 찾던 중,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던 일본으로부터 밀수입을 결의하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간의 삶처럼 지극히 단순한 반복이자 순환이다. 그러나 이렇듯 일정한 반복 속에 동일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우연이 인연과 필연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들이 담긴다. 프랑스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는 여정은 동유럽을 경유하고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를 지나 중국 국경지대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대장정이다. 서구로부터 개방 압력이 거세어지던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누에알의 유출을 차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라 케이’라는 일본인의 도움으로 누에알을 입수하게 되면서, 그의 곁에 있던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에 매혹된다. 그리곤 동일한 경로를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대장정, 밀무역의 여정이 거듭되면서 에르베 종쿠르는 동양의 소녀,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소녀의 감촉과 미소에 빠져든다. 일본의 내전(內戰)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장정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욕망이란 열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폭풍 같은 그리움의 열병은 지나가기 전에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 정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엘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침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장정에 오르는 에르베 종쿠르를 향한 엘렌의 간절함에 묻어난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요”

         

그 어떤 장황한 말보다 이 한 마디에 남편에게 휘몰아치는 한줄기 바람 같은 욕망을 뛰어넘는 삶의 관용과 사랑의 진정함이 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깊고 곧게 흐르는 여인의 아련한 사랑의 갈망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에르베 종쿠르의 온 정신과 육체를 감아 도는 세상의 끝에 있는 소녀의 편지인 듯 한 일본어로 씌어진 7장의 서신에는 여인 엘렌의 절절한 욕망과 사랑의 그리움이 넘실댄다.

「당신은 갑자기 어느 곳에선가 제 입술의 온기를 느끼게 될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제 입술이 당신의 어디에 닿게 될 지 알 수 없도록. 눈을 뜨지 마세요. 이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곧 제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 ....中略 ... 사모하는 주인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은 광풍처럼 몰아치던 그 어느 순간들의 아린 사랑의 추억들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한 남자의 삶을 온전히 보듬어 주었던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희구하던 사랑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그러함 일 것이다.

「그는 바람 부는 날이면 종종 공원을 가로질러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호수의 물결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무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것은 한줄기 바람에 불과해도 마치 수천 줄기의 바람이 거울 같은 호수 표면을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장관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어디서 불어오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

호수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무늬, 그것은 한줄기 바람으로 시작되지만 인생에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에 우리의 삶은 비록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것일 것이다. 비단의 부드러운 관능적 이미지와 아련한 사랑의 열망이 세상을 스쳐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담겨 가을의 정취 물씬 나는 낭만적 향기로 물들인다. 어느 가을날 인적 없는 호숫가를 거닐며 무심한 듯 수면을 바라보는 나를 떠 올리게 된다. 내 사랑들을,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인생을...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낭만 시(詩)같은 이 소설이 그리는 인생의 이야기에 젖어들어 한동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심정에 머문다. 『Silk(비단)』란 제목으로‘키이라 나이틀리’, ‘마이클 피트’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모양이다. 영상에 담긴 이 비릿한 사랑과 욕망과 삶의 이야기도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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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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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특하게도 두 개의 서체로 기술되어 있다. 굵은 서체로 써진‘너’에 대한 이야기와 보통체로 써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연한 서사는 제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어떤 연결점도 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인간들만 보인다. 단지 폐쇄된 공간에 어떤 인간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막연한 유사성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될 뿐.

누군가가 쫓기고 그 집요한 추적 끝에 생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까지는 성실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까닭도, 또 왜 동물실험을 하듯 사람을 매어놓고 길들이는 작업처럼 보이는지도 암흑을 더듬듯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구성과 추리기법은 꽤나 낯섦에도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리샤르 라파르그’와 호젓한 그의 저택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브’가 있는 2층 방에서는 불빛과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평온하다기보다는 어둠과 석연찮은 기운이 덮여있으며, 역겨운 고통마저 느껴진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는‘비비안’의 병문안, 이를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하는 리샤르, 광기에 젖어있는 비비안을 병문안 한 이후에는 여지없이 이브를 잔혹한 변태매춘에 내몰고 그 학대받는 장면을 옆방에서 응시하며 리샤르는 쾌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 행동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아차리고 연민을 보내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시선은 은행털이 중 경관을 살해하고 도주하는‘알렉스’라는 이십대 청년을 쫓는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공개수배를 피해 은둔하고 있는 자.
여기에 굵은 글씨로 써진 소름끼치고 음습한 너에 대한 이야기가 환각처럼 더해진다. 발가벗겨진 채 쇠사슬에 매여 있는 남자. 한 점 빛없는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에 의해 2년에 걸친 정신의 개조와 신체적 순응의 집요한 작업으로 길들여진다.
거미줄을 처 놓고 자신은 어딘가에 숨어 엿보며 먹이가 걸려들면 서서히 말아 보관하고 조금씩 먹어치우는 독거미처럼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넣고 사슬에 묶인 먹이를 찾아온다. 이 사악하고 잔인한 괴물을 청년은 '미갈(Mygale: 독거미)'이라 부른다.

동일 시점의 두 시선, 그리고 시점이 역행하는 또 다른 시선, 이렇게 세 시선의 이야기가 점점 급박하게 어떤 실마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이 알 수 없었던 병적이고 기괴한 사실을 야기했던 사건의 실체에 이르면‘복수’, 아비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한이 있으며, 정신과 육체를 개조당한 청년의 공포와 당혹감, 삶의 좌절에 대한 증오어린‘복수’, 이렇게 두 종류의 복수가 놓여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좌절과 고통, 그것은 범인을 향한 냉혹한 과정으로 이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으로 철저하게 진행되는 복수의 절차들, 미갈, 괴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게서 그가 도달하기 위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게 된다.

복수를 위해 메스를 들이대고,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앗아가려 하는 순간, 그 인간 또한 자신을 상실하여야 한다. 이미 괴물이 자신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결국 복수란 고통의 해결이 아니고 새로운 고통의 획득이 되어버린다. 촘촘히 얽힌 거미줄처럼 무수한 암시와 복선들이 직조되어 역겨움과 혐오,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감성을 압박해 온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흥분과 강박감이 책장 넘김을 재촉한다. 상식을 뒤 엎어버리는 기이할 정도의 독창성, 그리고 수용하기 버거울 정도의 잔혹과 사악함과 세련미 넘치는 우아함까지 아울러 갖춰 기묘한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흔해빠진 영미식 복수 추리극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환상적 미묘함이 있다. 소설 읽고 행복했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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