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최고의 날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박채연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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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소설은 달콤하고 관능적 음악이 흐르고 열대의 찬란한 색감들로 조화롭게 꾸며진 최고의 요리들, 자신들의 지성과 탄력 있는 육체를 과시하려는 선남선녀들이 즐비한 화려한 잔치를 연상시킨다. 감각의 풍요로운 향연, 드라마틱한 전개와 즐비한 지성의 요리들, 이 모두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육체와 정신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고의 쾌락에 흠뻑 빠지게 된다. 요리와 섹스, 그리고 잘 갈린 은빛 칼날이 은밀하게 반짝이는 그의 전작(식인종의 요리책)이 발가벗겼던 인간의 욕망이 여기서 또 다시 빛을 발한다. 이번에는 신화와 문학, 오페라, 회화를 아우르는 예술 작품 속에 표현된‘열정적 사랑’에 깃든 본질의 탐색이다.

작품의 무대 역시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도시‘마르텔 플라타’이다. 왠지 이 도시에 있으면 절로 사랑에 빠지고 오감이 깨어나 생명력이 충만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감각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절정과 감미로운 노곤함에 눈꺼풀을 스르르 감는 여인, 그녀의 기억을 여기에 멈추게 했던 사랑의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다.

문학을 전공하는 서른 살의 대학 강사, ‘파울리나’는 박사 학위를 위해 <사랑과 연인들의 책>이라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걸작인 게 소설 속에 총 9개장으로 이 논문이 에세이처럼 소개되고 있는 것인데, 주제의식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제법 경이로운 이론까지 완비하고, 스토리와 상호 교섭하여 암시와 복선을 주고받으며 소설의 품격을 진부한 로맨스와 복수극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적 작품으로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사랑과 배신, 증오와 복수의 실체, 열정과 그 소멸, 이에 반응하는 연인들의 참담함, 그리고 그 열정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스 비극 『아이네이스』를 시작으로 『오셀로』,『트리스탄과 이졸데』,『페르 귄트』, 『피아노 치는 여자』등 오페라와 소설문학 속 비련의 연인들의 사랑의 자취를 거닐며, ‘옥타비오 파스’의 사랑의 비평과 ‘피카소’의 자화상이랄 수도 있는 인간의 육신을 한 수소 ‘ 미노타우로마키(La Minotauromachie)’가 뿜어내는 남성의 굶주린 욕망의 파멸성에 대한 해석까지 더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색깔을 조명한다.

새로 부임한 동료 교수‘호나스’라는 남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인데, “사랑은 육화된 열정”인 것 같다는 파울리나의 열정적 사랑에 대한 고백처럼, 쾌락을 줄 수 있는 서로의 몸을 느낄 수 없는 사랑이란 강박관념 같은 고통, 좌절과 공허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체험적 논의들이 예술 작품들 여기저기를 누비며 사랑과 육체의 불가분성은 물론 연인의 육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의 속성, 그리고 사랑이 배신과 분노로 변질되고 증오와 죽음으로 연결되는 여정에 도사린 육체의 한계성을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로서 파헤쳐 댄다.

여자의 사랑, 더구나 육화된 열정, 즉 육체를 잃어버린 사랑이란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여자를 배신하는 것은 아마 죽음을 예약하는 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 비극작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바로 배신한 사랑에 대처하는 여성의 화신이다. ‘입센’의 소설 『페르귄트』가 파울리나가 선택하게 될 사랑을 알려준다면, 『메데이아』는 사랑의 배신이 가져올 귀결이다. 열정은 그 열정의 사그라짐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공포다, 믿음을 흔들어대는 의심이 피어나는 순간 우린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곤 다가오는 상실의 고통,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란 육화된 열정처럼 간절한 쾌락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미노타우로스의 야수적 성애가 있다면 메데이아의 복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할 것만 같다. 가히 매혹적인 사랑의 고고학적 탐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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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시장 - 부자나라들과 투자집단의 은밀한 세계 장악을 폭로한 충격 보고서
에릭 J. 와이너 지음, 김정수 옮김, 곽수종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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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의 경제패권이 약화 되는 이유를 세계 자본시장의 동향을 통해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세계 경제 세력의 변화를 야기하는 거대자본의 은밀한 실체를‘그림자 시장(shadow market)'이라 지칭하면서 이들 그림자 시장의 주체인 나라들의 투자 행동에 경계와 적대적 시선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군사적 전면전 같은 수많은 인명을 담보로 하는 유혈 전쟁이 비용때문에서도 선택 수단이 되지 못함에 따라 막강한 외교적, 정치적 힘의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거대 금융자본의 국가주의라는 불안한 행보 때문이랄 수 있다.

사실 20세기 세계 경제와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하던 미국으로선 새로운 자본 부국의 등장이 위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라면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국, 페르시아만에 모여 있는 제2의 채권국인 중동국가들의 금융자본이 한없이 침울한 그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에게만 이들 자본이 위협인 것은 아니다. 저임금으로 생산한 제품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중국이나 공짜 재화인 석유로 막대한 자본을 쌓은 중동국가들의 금융자본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금융자본주의를 세계에 전도한 장본인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제국이다. 시장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개발도상국, 후진국들의 자원과 산업을 유린하고 다니던 것이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그것이 이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신흥 자본 부국들의 손아귀로 옮겨가고 있고 실제 그들의 자본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랄 수 있다.
2조 달러가 넘는 미화와 미 정부 채권을 가지고 있는 중국은 미국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면 서슴없이 달러를 투매하여 미국 경제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영국은 자국의 침체한 산업과 경제를 위해 오일머니로 자본시장을 호령하는 리비아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수 백 명의 인명을 살상한 테러리스트를 석방하고 막대한 투자를 유치한다.

문제는 이 자본이란 것에 도덕성이란 것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 바로 서구자본주의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자본에는 연민도 감상주의도 없다. 오직 이익추구, 탐욕이 선이라고 주장해왔다. 물론 20세기 세계 경제의 패권자인 미국은 나름 상식적인 경제 리더십을 행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림자 시장의 자본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어떠한‘경제 지도국’도, 강력한 국제적 금융기구도 없는 무법천지의 야만적 시장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되었다. 그저 자기네들의 이익만 실현하면 되는 것이지 투자국의 경제야 무관한 것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수익을 실현 할 수 있는 대상이면 된다. 이러한 생리는 저자가 그림자 국가라고 지목한 중국이나, 페르시아만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산유국만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금융자본 역시 이러한 잔혹한 비도덕적 먹튀전략으로 부정하게 부를 착취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처럼 책은 미국과 유럽의 침몰,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신흥 부국, 중동의 오일머니로 세계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중동국가들로 경제 권력이 이동하는 양상에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서구에서 동양으로의 권력 재편에 대한 우려와 자국으로서 미국의 경제적 대응 전략을 위한 지피지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에 모두 공감할 이유는 없지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우리의 입장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중차대한 교훈들과 사례들, 현실 경제의 냉정한 이해들이 있다.

그 중 첫째는 자본 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이 엄청난 외화자본을 축적한 경제 대국으로서 그들의 금융 자본이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본의 행동은 신뢰 할 수 있는 도덕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자국 내 외국 투자자본이나 기업에 대해 일관된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다. 일례로 공산당 독재정부가 자신들의 국부 전체를 움직이고 있어 이들의 금융자본은 곧 정치라는 점이다. 순수한 비즈니스가 언제 정치적 의도에 의해 희생될지 알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이들은 국가안보라는 명분으로 자국에 투자한 기업들을 수없이 구금하고, 압박하는 등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략을 빈번히 행사한다. 게다가 거침없는 산업 스파이, 컴퓨터 해킹 등 상식을 뒤엎는 횡포를 자행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중국이 세계의 최대 자본부국이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들이 경제 리더십을 갖는 것은 역시 경계하여야 일이라 하겠다. 세계의 그 어떤 자본보다 중국의 자본은 정치적 담보가 될 수 있음이다.

둘째는 북해의 최대 산유국인 노르웨이의 국부펀드 운영 정책에 대한 제도적 성격이다. 저자는 이들의 오일펀드가 도덕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폄하하고 있지만, 막대한 석유수입의 직접 유입을 제어하여 영국과 네덜란드가 석유 수익으로 인해 자초한 경제침체의 전철을 차단하고 현금 흐름을 규제함으로써 산업 관리와 자원보존 등 공공성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기금의 실적보고나 세심한 감시제도의 확립 등으로 건전성과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거대 금융 자본 보유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금융 자본이 인류의 인권과 환경보호, 평화를 위한 권력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끝으로 침몰하는 유럽의 거함들, 프랑스와 독일의 국부펀드 전략과 국가투자의 규제 정책에 대한 사례를 들 수 있는데, 해외 투자를 통해 부를 쌓는 국부펀드의 개념을 역전시켜 국내 기업발전 촉진 투자라는 보호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나, 유럽연합 이외 국가가 자국의 기업의 25%이상 지분 매입을 하는 투자의 경우 국가가 심사하고 거부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그림자 자본의 무차별적 침투를 제한하기 위한 정책들은 외면 할 수 없는 관심을 촉발한다. 시장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국경제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며 오히려 자유시장 파괴의 선봉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정책의 향방을 주시하는 것도 우리에겐 특별한 교훈이 될 것이다.

어쨌든 세계의 자본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옮겨오고 있으며, 지난날 세계경제의 지배 국가들인 G7은 한국, 브라질, 터키, 인도네시아, 중국 등 신흥부국이 포함된 G20에 경제 권력을 넘겨야 했고, 2040년에는 E7(중국, 인도, 터키, 브라질, 인도네시아. 멕시코, 러시아)이 G7의 GDP를 20%이상 초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각국은 거대 국부펀드라는 금융자본을 조성하여 세계 금융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투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자본이 외교이고 정치력인 세계이다. 더구나 어떤 나라가 자신이 거래하는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림자 시장이 지배하는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상호 확증이 파괴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음침한 자본이란 깡패가 언제 우리 경제의 뒷덜미를 잡아챌지 모른다. 각국의 경제 위상의 변화는 물론 자본의 흐름과 자본의 행동전략, 나아가 이들 자본의 주체인 그림자 국가들에 대한 정책들을 접하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이 책은 우리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요구케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경제 리더십, 새로운 금융 자본의 패러다임을 위한 창의적 연구가 필요 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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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1-10-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 주권을 거의 상실했다고 해도 무방하니까요.. 자본 깡패의 역습에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어렵습니다.

비의식 2011-10-20 19:45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의 오일펀드라 불리는 국부펀드나, 프랑스 정부가 운용하는 특별기금은 국부펀드의 유용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정부 역시 이러한 국부펀드를 가동해야 할 겁니다. 아부다비나 두바이의 국부펀드는 실로 세계경제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정치적 실리를 얻는데 결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거든요.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신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노선은 수정되어야 할겁니다. 그런의미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의 보호주의 경제정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죠. 시장자유주의로부터 실익을 진정 얻기를 원한다면 속까지 시장자유주의자여서는 안된다는거겠죠....
 
일본의 사소설 살림지식총서 232
안영희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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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고백하는’ 양식의 소설인 사소설(私小說)은 내겐 기이하고 혐오스런 느낌을 주었다고 해야겠다. 자기의 실제경험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소위 리얼리티를 진정한 문학이라고 하는 소신인데, 이게 거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2011년 수상작이 사소설인 『고역열차』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1920년대의 서구 자연주의 문학이 왜곡되어 이해된 일본문학의 특수한 형태가 왜 21세기 일본의 현대문학 시장에서 다시금 부상하게 되었는가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부랴부랴 사소설의 탄생 배경과 사소설의 요소와 특성, 일본인의 의식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로 나가게 했다. 소설의 화자는 곧 작가인 소설, 경험 사실을 소설적 형태로 서술한 것, 그렇다보니 작가의 경험을 한 치도 넘어서지 못하기에 갈등구조나 해결방식, 절정과 대단원에 이르는 소설의 양식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해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체험하여야 하다보니 사소설 작가들의 인생이란 밑바닥 삶과 소외되고 저열한 생활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처럼 개인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사생활을 들려주는 얘기가 독자에게 대체 어떤 의미를 주기에 문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일까? 사실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은 발붙이기 어려운 장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고작 험난하고 비참하며 비루한 일상을 읽어야 할 동기유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들과 그들의 사회는 온통 빠져들고 칭송한다. 이것은 일본인 고유의 정서와 인식과 사소설이 지니는 속성과의 강한 유대관계를 의미한다. 근대 서구 자연주의문학이 일본에 유입되면서 사소설이라는 변태적 리얼리즘 문학으로 정착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일견 퇴행적인 문학양식이 여전히 그 생명이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지지받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사소설의 탄생

사소설이란 장르의 개막은 일본의 자연주의 시작과 궤적을 같이하는 모양이다. 사실의 충실한 재현과 노골적인 묘사를 원칙으로 하는 자연주의가 천황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인 1900년대의 일본사회에서 “구시대의 비판이 사회와의 대결”이라는 방식으로 나가지 못하고, “신변으로 시야를 좁힌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안착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결국 일본의 자연주의는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표출, 즉 사생활을 중시하는 고백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나라한 자기고백, 소설의 묘사는 어떠한 것도 진실이어야만 한다는 신념은 당대 일본문학계의 주류가 되기에 이른 모양인데, 이의 대표적 작품이자 사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1907년에 발표된‘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의 『이불(蒲團)』이다. 도키오라는 중년 작가가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여 제자를 향한 비밀스런 애욕을 그린 작품으로 결코 충족할 수 없는 남자의 욕망이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실제 현실의 그대로의 재현으로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단지 사생활을 소재로 작가 자신의 내면을 그린 이야기다.

여기서 일본 사소설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철저하게 사회와 격리된 사적 생활의 기술에 머문다는 점이다. 다야마 가타이의 변형된 자연주의에 매료되어 사소설의 양식을 확정시킨 작가 중 한명인 ‘이와노 호메이’의 『오부작』은 사회성을 배제한 채 온전히 자전으로서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드려내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사생활을 모델로 소설을 쓴 이유는 “생활과 예술 그리고 사상이 합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생활이 그대로 예술이 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하니, 망상도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한다.

사소설 작가와 일본인의 의식구조

1.

이처럼 자기 사생활을 소설이란 구조에 담아내려다보니 감동을 주어야 하는 자기 폭로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소재의 고갈이 극명하게 다가오는 것인데, 그렇다보니 밑바닥 삶과 자극적 사건을 몸소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사소설 작가들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생활을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설혹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적 균형이 수시로 파괴되는 것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현실의 무참한 폭로라는 비애를 감수하면서 사소설을 쓰는 작가이기 위해서는 이 폭로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침몰하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올해 아쿠타가와상 수상자인 ‘니시무라 겐타’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중졸의 학력에 날품팔이의 무력한 노동자이며, 성범죄자의 아들이다. “그들은 출발시점부터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생활 실격자’”였으며, 픽션과 같은 외출복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 빈번하게 번역판이 출간되는 사소설 『인간 실격』의 작가‘다자이 오사무’는 유산계급의 자식이었으니, 이 자는 거꾸로 사소설의 소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파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처럼 반복되는 자살과 사창가 여인과의 도피 등, 자기 예술의 승화를 위해 극단의 생활을 추구했으며, 궁극에는 이 기이한 예술의 모순을 마감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해결하는 길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들은 왜 써야 했을까? 소외되고 고립된 그들로서는 누구 내 말 좀 들어줘요.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고, 뭔가를 쓰는 것은 피난처이자 자기 위안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쓴다는 것은 타인과 직접 대면하고 말하기 어려워하는 일본인 고유의 습성 탓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낀다는 것이며,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일종의 어리광, 나르시시즘이라는 일본인 전형의 인격구조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고백행위라는 작가의 자기희생 행위를 칭찬하는 일본인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식구조도 한 몫 한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불행한 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으로 인한 소재고갈을 뛰어 넘기 위해 끊임없이 불행한 생활이라는 자기 연출에 내몰리게 한다. 자신의 사적 생활 영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소설의 한계는 문학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2.

어쨌거나 이 자폐증적 요소를 지닌 사소설은 일본의 문화코드와 분명 연관되어 있다. 일본의 대중 영상물을 보면 공통된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독‘엿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TV, 신문, 잡지에서 루머나 유명인의 사생활을 화제로 많이 다루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자신인 ‘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타인인 내가 그것을 살짝 엿봄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교사하는 심정이 잠재해 있으며, 사소설은 바로 이러한 공공연한 엿보기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러한 일본 문화의 영향에 노출됨에 따라 무분별한 관음증이 각종 미디어를 휩쓸고 있다. 어쩜 이러한 현상이 일본문학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소설의 ‘사실성’이라는 소설 속에 그려진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일본인에게 사실에 충실한 작가라는 신뢰를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와 동일한 인물인 소설 속 주인공에 친밀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 ‘자기 동일화’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특히 사실을 숭상하고 허구를 배척하는 일본사회의 특수성은 사소설의 자전적이고 현실의 생활기반 중심의 이야기가 본능적으로 수용되는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소설은 사회에서 도피하여 사적 공간에 머묾으로써 정치사회적 무관심에 놓이고 자기 내면에만 골몰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인간을 양산한다. 결국 사소설이 개인사를 얘기함으로써 반사회적 의식을 시사하더라도 예술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 현실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 전도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글쓰기인 이상 자기 파멸적, 멸망의 문학이란 오명을 피하기도 쉽지 않다.

고백문학, 일기문학, 수기문학으로서 작가가 화자인 사소설은 작가의 시선이 주인공과 객관적 거리를 가지지 못함으로써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문학이다. 반성이 없으니 변화가 없고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일본 현대문학의 거장‘미시마 유키오’의 지적처럼 “자유로운 인격의 발전” 혹은 “자신이 책임지는 자율적 개인의 인격형성”이라는 가치와 갈등을 일으킨다.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기이한 소설,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한 문학인 사소설이 일본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경은 일본인들의 정신구조와 관련하여 이처럼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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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열차 - 14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니시무라 겐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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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이 그들의 삶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욕망들을 추구하며 내외적인 적대적 요소들과 무수한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용기와 좌절, 그리고 희망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린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찾기도 하고, 마음의 정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소설의 양식과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자기 삶에 대해 이렇다 할 의욕도, 희망도 없어 보이고, 삶의 균형을 깨는 요인들이라 이해하기에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들에 증오하는 태도의 인물로부터 고착화된 의기소침과 좌절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열패감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쓸쓸하고 우울하다는 분위기 이상의 무엇에 도달하기가 여의치 않다.

마치‘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간 실격』의 주인공이 부활한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작가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상의 이야기를 수기처럼 써내려간 사소설(私小說)의 리얼리티가 극적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에서 인간과 세상의 보편적인 무엇을 발견하거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교감하는데 낯설다는 것이다. 또한 대단원을 향한 휘몰아치는 갈등과 그 해결이라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지만 사소설로서는 작가 인생의 대전환이나 혹은 죽음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박탈당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은근히 시선을 붙잡는 마력이 있다.

1.
마흔이 넘은 작가가 자신의 청년기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성범죄자인 아버지, 가족에 보내는 사회의 시선, 그것은 수치심과 굴욕감에 포획되게 하고 보통사람들의 사회, 그 평범함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다.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치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란 것은 막노동 이외에는 존재치 않는다. 항만에서 냉동 창고 하역작업의 막 일꾼으로 생활을 견뎌가지만‘간타’란 이 인물은 이조차 시큰둥하다. 하루 노동하곤 끼니를 구할 돈이 없어지면 다시 노동에 나선다. 그에게 목표란 것, 삶의 균형이란 것의 의식이 없다. 그러니 깨지고 말고 할 평형 상태란 것이 없다. 먹고 마시고 싸는 원초적 본능의 충족만이 전부다.

세상에 대한 낙심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 기초하는 좌절은 이렇게 희망의 기대를 지워버린다. 이러한 간타의 일상이 하역작업에서 동갑내기의 전문대학생을 만나면서 변화하는데, 타인과의 친근한 대화에 굶주렸던 그로서는 그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성실한 일용직 노동자의 대열에 서는 것이다. 이것은 술과 매음굴을 찾을 수 있는 금전에 대한 약간의 여유를 덤으로 주고, 창고 내에서 일하는 자의 점심 특혜와 지게차 운전기능을 습득할 기회가 된다. 그러나 희망을 제거한 인간에게 이를 실천할 용기나 열정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에게 주어질 것은 다시금 단순 하역 노동자로의 복귀다.

한편 전문대생의 여자 친구인 대학생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그에게는 지적 허영이라는 역겨움으로만 인식되고, 열등감을 일깨운다. 이것은 그와 그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구별 짓기로 이해되고 분노를 터뜨리는 구실이 된다. 이 사건은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보통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다가 가는데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열아홉 살 중졸 학력의 청년이 성범죄자의 아들이란 무게를 떨쳐내고 세상으로 나오는 것, 그가 삶의 욕망을 찾으려고 단단한 세상 경계의 벽을 깨기까지에는 평범한 우리들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역의 시간이 필요 했을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벌이 일용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그의 작업복 뒷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사소설 작가 ‘후지사와 세이조’의 작품 복사물이 어느 순간 깨어났기에‘고역 열차’라는 신산한 삶의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2. 
소설 『고역 열차』는 이처럼 열아홉 살 하역노동자로서의 삶의 기억인 「고역 열차」라는 미완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듯이 마흔이 넘은 사소설 작가로서의 삶인「나락에 떨어져 소매에 눈물 적실 때」라는 제목으로 비로소 욕망에 갈등하는 보통사람의 세상에 들어선 자를 얘기한다. 문학계의 파벌이나 인정이 개입하지 않은 그야말로 공정한 심사로 정평이 난 문학상으로서‘가와바타(川端)상’을 상정하고, 자신의 작품이 최종 후보작에 오르자 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동종업자들의 자의적 평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수상의 영광에 대한 기대를 떨쳐내지 못하는 헛된 집착의 비참함에 사로잡힌 자신에 대한 혐오, 자기부정과 합리화의 갈등을 보여준다.

달관한 척하면서 체념을 강요하지만 영예에 대한 희망, 그 명성을 얻지 못하면 일생 후회할 것만 같은 안타까움에 시달리는 것인데, “무작정 대접 받고 싶었다.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설령 일회성의 무의미한 소통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하룻밤만은 속 일 수 있을 만한 인기를 얻고 싶었다.”는 고백은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준다. 소설가로서 인생을 마치고 싶어 하는 사소설 작가의 염원, 지니지 못했던 삶의 균형을 향한 작은 욕망이 현실의 아쿠타가와(芥川)상으로 전해졌으니 그가 비로소 세상에서 갖게 된 희망, 꿈의 실현으로 괜스레 덩달아 긍정으로서의 삶을 느끼게 된 것처럼 고무되는 것이다. 욕망 없는 세계에서 그를 건져준 사소설의 세계, 은근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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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
이창용 외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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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을 말하는 책이 혹시라도 정작 이야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낭패일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문자 그대로‘이야기’의 위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득하고 있지 못했다면, 그래서 책에 몰입케 하는 데 실패했다면 아마 소감을 남기려는 의지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외려 이『이야기의 힘』이 전해주려는 우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말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이야기란 사람에게 대체 무엇이며, 모든 인간으로부터 공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조건, 나아가 그런 이야기들이란 어떤 형식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스토리텔링의 상업주의적, 소위 마케팅 테크닉을 전달하는 비즈니스 계발서 따위는 아니다. 물론 이야기의 힘을 응용하여 명성이나 성공적인 부를 쌓은 브랜드, 상품, 서비스의 사례를 볼 수 있으니 ‘이야기’의 총합적 개론서쯤이라 해야 할까?

이야기란 무엇인가? 왜 우리들은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일까? 이야기가 인간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억을 잡아두고, 대화의 거리와 말의 벽을 넘어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변화시켜주며, 추상적 설명보다 구체적 이야기가 훨씬 이해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인간에게 전하려는 것, 삶을 풀어가는 것,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인간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고 매료되는 이야기, 훌륭한 스토리는 어떤 조건과 양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일 때 비로소 이야기 고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는 욕망이 주도한다.”는 시나리오 닥터인‘로버트 맥기’의 말은 한 문장으로 정련된 이야기에 대한 최고의 정의로 와 닿는다. 인류가 수천년간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은 바로 인간은 균형을 잃었을 때 그것을 되돌리고자 분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깨어진 균형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지, 즉 욕망의 성취를 향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이 그 깨진 균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부정적 내면이 되었든 외부의 그 무엇이 되었든 적대적 환경과 맞서 싸우며 삶의 본질을 깨닫고 용기를 얻으며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변화하며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야기의 인물이 추구하는 목표, 그 욕망의 대상은 독자, 관객, 청중들 각자가 “자기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원하는 바로 그것의 은유인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재료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바라는 욕망과 그 반대세력 사이의 간극이다. 우린 이 간극, 세상이 내어주지 않는 욕망 성취를 방해하는 힘과의 분투에 매혹되며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방향을 찾고, 알려주지 않은 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야기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도 있으며,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고,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도 불러일으킨다. 우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공유하며 함께 참여하고 변화를 가지려 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것인데, 이처럼 인간 삶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그 수많은 형태의 삶의 이야기들을 훌륭하게 쓰거나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만들기’라는 소설, 시나리오, 그 밖의 스토리에 대한 단계별 작법이다.
한편의 단막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하여 유명 영화, 방송 드라마의 사례를 곁들여 가며, 삶의 균형이 무너진 주인공이 그 균형을 회복하고자 여려 적대적인 것들과 맞서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 나가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의 성격 설정에서부터 시간과 배경의 설정, 삶의 적대자와 장애물 등 대립구조 만드는 법, 그리고 최고조에 이른 갈등, 즉 “갈등의 힘이 뚜렷할수록 그것을 풀어내는 스토리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는 글쓰기의 준공리를 지켜내는 방식, 갈등해소와 복선의 활용, 화자의 철학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핵심으로서의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절로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된 듯한 자신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야기에는 무의식적 욕망, 금기된 것들의 욕망, 하지 못한 것들, 혹은 할 수 있는 것들”과 같은 우리의 근원에 대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한한 욕망과 관련되어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대를 형성시켜준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부족한 것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인 것들, 사랑? 미성숙? 부정적 태도? 등등 그것을 채워주는 이야기들은 지금도 무수히 만들어져 우리들 삶을 끊임없이 자극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을 더 가치 있고 선하며 도덕적 상승감에 연결시켜주는 한 우린 이야기의 힘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추동력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접했던 소설,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일종의 분석적 이해력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또한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치기어린 자신감도 얻게 되며, 오늘날의 각종 소통수단들과 대화 도구를 통해 효과적 의사 전달에 대한 감각도 깨우치게 된다면 지나친 이해일까? 결국 삶의 원형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이 책은 본격적 이야기의 시대인 오늘에 신선하고 적절한 이야기 문화의 안내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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