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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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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무엇이 없었고 제아무리 구실을 찾으려 해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차단되어 평온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고 있지 않다.”라고 자유로운 정신의 실천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는 발가벗은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고독한 읽기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자체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읽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문학적 학식 일반”이 바로 넓은 의미의‘문학’이요, 그 문학이 세상을 변혁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분명 책이 세상의 형식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12세기 르네상스나, ‘대혁명’이라 지칭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이 바로 문학, 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쓰는 것, 문득 펼쳐본 미미한 책 한 줄이,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문학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오늘의 소설이나 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의 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이란 텍스트 일반, 성서, 법률서, 협의의 문학, 철학을 포함하는 총체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사고와 습속, 문명적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의 예가 교황혁명 또는 중세해석자 혁명이요, 종교개혁이요 대혁명이다. 이 혁명이 지금 우리들이 체감하는 문명의 전환이자 초석이 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폭력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형식, 문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만들어낸 이들 혁명이 문학혁명이 우선이고 폭력은 보충적이거나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혁명을 완성하는 것, 즉 이전의 사회적 인식과 질서를 새로운 인식과 질서로 바꾸는 힘에 있어서 과연 폭력이 항상 후발적이고 보완적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사실(史實)의 나열에 불구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비로소 실현시킨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의 폭력행사 없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와는 달리 이 역시 선행한 법률과 철학, 소설 등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과연 누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저자의 자유정신은 모순에 들어간다. 세계에 대한 전문가, 지식인들의 이론을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비참한 팔루스(Phallus)적 향락”이라고 비판하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향락이 없는 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잘 난체 하는 것, 내가 깨우친 것, 내가 발견 한 것을 쓰는 것이 비록 동의 받지 못하거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한 들 그것들은 나쁜 지(知)요, 내 문학만이 좋은 지(知)라고 하는 것은 독선이 되고 만다.

 

다만, 문학과 혁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만큼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루터의 소위 종교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어를 근대 독일어로 정착시키고 확산시킨 성서의 해석, 다시 말해 성스러운 법을 속된 법으로 이관시키기 위한 무수한 번역작업과 세속화 작업이라는 대대적인 출판행위를 포착한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세상을 지배하던 성(聖)의 속(俗)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텍스트의 확산이 이루어낸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가진 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역시 많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루터만큼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폭력을 가진 자가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텍스트의 선행과 폭력의 후행은 단언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치게 나아간 것 아닐까? 문학이, 책이 혁명의 저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의 다른 형식이 바로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미흡하다.

 

중세 해석자 혁명(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문학이라는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를 갱신하고 체계를 이루어 근대국가의 원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복됨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고 주입되는 것의 기반이 문학이라고 만 말하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 아닐까? 폭력은 인간에게 그보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의례가 아닌가? 아무튼 텍스트가 인류의 문명을 뒤바꾼 대혁명의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의 초석이 되고, 세상의 문제와 결별하고 변혁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설픈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는“철학이 끝났다!”, “문학이 끝났다!”라고 하는 단언의 목소리는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마냥 낭만적인 것일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즉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병든 세상에 종말론적 시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오늘의 세상은 병들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질병적 세상바라보기에 대해 지극히 혐오감을 가진 낭만적 미래관을 가진 저자의 또 하나의 편협한 독단론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다. 이웃 나라의 젊은 철학자의 독선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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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인문학 읽기

 

인문학을 왜 읽는가? 그리고 읽어야 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떤 책이 진정한 인문학이냐 란 얘기와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강신주가 말했듯이 “사회와 인간 삶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고”, “사회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기위한 지적바탕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건 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쏟아지는 책들에서 이러한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책을 선별 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점차 선정이 신중해진다. 이번 달은 고심한 끝에 세 권의 책을 찾았다. 한 권의 직접적인 전망과 두 권의 간접적인 바탕이다.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에 각인된 문화적 인식을 해부하여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 자신의 결함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직접적 전망이고, 간접적인 지적 바탕을 제공하는 그 하나는 21세기 오늘의 인간과 시대적 배경의 원천이 된,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사고에 대한 대 전환을 선언했던‘니체’의 사상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무심히 읽는 토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의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넓은 의미로서의 문학(텍스트)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고, 곧 혁명이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이, 나보코프의 문학비평이, 사회학자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대한 고찰은 오늘, 지금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보다 성숙한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줄 것이다.

 

1.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 정수복 著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대개가 일제강점기 이후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일본이 이식한 서구의 근대문명을 시작으로 미국의 해양문화를 통해 근대화를 숙성시키는 과정 속에서 훈육되고 세상을 체험하며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은 현세적 물질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등등이란 모습을 하고 한국인들의 몸 속 깊이 각인되어 한국인만의 문화적 관점, 틀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것이 긍정적이기 만한 것이 아니어서 도처에서 심각한 결함의 신음소리를 들리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내재된 부정적 효과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보는 세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이 사회가 지닌 치명적 문제들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그러진 한국인과 그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극복 방법과 대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2. 니체 극장 ; 고명섭 著

 

니체의 평전이다. 초인을 선언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알리고, 초인이 된 그 인간들이 이제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다. 이 니체라는 사람의 사상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의 책을 읽어보았는가? 그의 난해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읽어야 하는가?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그가 말함으로써 탄생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를 아는 것은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인문학적 배경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니체의 심층심리부터 그의 제반 저술들과 사상적 토대를 세심하게 해설한 이 책은 실로 고마운 저술이라 할 것이다.

 

 

 

3.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著

 

책을 읽는 행위,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행위이다. 즉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 책이요, 특히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톨스토이, 고골, 고리키, 토스토옙스키, 체홉 등 러시아 문학처럼 우리에게 많이 읽힌 문학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 감성에 여하튼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는 이들 작가와 작품을 통해 문학의 정신을 알리려 하고 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때론 예술성을 강조하기도하며 문학답지 못한 것들에 신랄한 멸시의 비판을 하면서.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세계의 모든 독자에게 자유로서의 문학을 해설하고 있다. 문학을 읽고 느끼고 탐닉하는 방법을 거장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삶의 바탕을 이해하는 인문학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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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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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의 온갖 좌절과 번민과 욕망이 얽혀 만들어내는 부글거리는 삶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다종다양의 군상들이 뿜어내는 개성, 경험이 다르고 학습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그래서 그들 의 관계에서 빚어지지만 내면에 은폐된 몰이해와 무지, 질시와 혐오, 피해의식은 인생을 피폐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보게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의 표제처럼 왜곡된 시선으로 가려졌던 사람에 대한 이해는 진실의 빛에 의해 수치스럽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 못남과 몰지각의 정체를.

 

소설은 살인자와 경찰이라는 쫓기고 쫓는 양자가 벌이는 흔한 단선적 이야기에 너절한 복선이나 반전이란 살을 붙여댄 여느 스릴러와는 다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즉 사회 혹은 조직 속의 사람들 각자가 내면화한 의지나 욕망들의 갈등과 충돌, 위선과 위악의 실체를 투영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내면화된 자아(自我)를 만들어낸 사회적 현실로 인해 배태된 현대인의 분열적 정신을 투사(投射)하고 있다. 바로 오늘의 우리네 모습들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이 이야기의 구조에 기막히게 녹아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발산하는 회화적 재미도 압도적이며, 쾌락살인, 모방범, 손가락 수집가와 같은 소설의 주요 재료로 엮어내는 살인행각이나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빚어지는 감각적이고 때론 지적 흥분조차 자극하는 조성의 힘 역시 발군이다. 가히 매혹적인 소설 두 작품을 읽은 것 같은 흐뭇함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지능화하고 정보화하는 범죄 수법, 범인의 심리와 기만적이고 엽기적인 행동, 이를 쫓아가지 못하는 공권력의 한계와 수사 방식, 형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니는 관계적 한계 등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는 이 소설을 빛내는 또 하나의 요소라 할 것이다.

 

늦은 밤 동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의 제복경관은 수색 중 온 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이 여성 피살사건으로 경시청 본청수사과, 관할 서, 기동대 형사들을 연합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형사들은 범인 체포를 위한 조별 수사에 착수한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조직의 위계나 부서가 다른 구성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이질감, 위화감, 질투와 경원(敬遠)이 자리 잡아 반목과 갈등이 꿈틀거린다. 연합된 수사본부는 철저한 성과주의자, 인간관계 중시자, 균형주의자, 출세주의자, 보신주의 또는 패배주의자 등등 천태만상의 양상을 보이는 인간 군상의 격전지이다.

 

기동대의 중년 경위인 ‘와타비키’는 범인검거에 남다른 실적을 보이는 상급기관인 본청 수사과의‘사이조’라는 젊은 경위의 부문간 영역에는 아랑곳없는 수사 열정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일을 위해서는 주변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이조의 무심한 행동은 열등감을 조장하고 그 무심한 듯한 엘리트적 권위는 거부감만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사이조’는 자신의 부서에서조차 ‘명탐정 ’이란 조롱 반, 진심 반의 별칭을 갖기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기자로부터 향응을 받고 수사 정보를 흘리는 수사관, 실적을 위해 정보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경사, 상위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경관 등 저마다 자기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꿈틀대는 인간 개체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

 

이어서 두 번째 젊은 여성의 살해소식이 전해지고 첫 번째 피살자와 동일하게 손가락 절단이라는 동일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란 의미이다. 살인자는 자신의 행위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기 위해 인터넷 음성 사이트에 다음번 살인 일자를 게시하기에 이르고, 경찰은 일정에 맞춰 경찰의 대대적인 동원을 준비하지만 다시금 살인자에게 농락당하고 만다.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는 경찰과는 달리 살인자는 자기 현시를 위해 스스로 명명한다. 손가락 수집가!

 

살인 사건의 진행과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수사관들 개개인의 내면과 삶의 면모는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 소설의 유다른 감각이다. 아내를 사고로 잃고 장애자가 된 어린 아들과 노모에 의존해야 하는 와타비키의 출세에 대한 비굴한 욕망이, 애정이라곤 사라진 아내를 피해 젊은 여성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이조의 도피처로서의 일에 대한 열의가 소외되고 피폐해진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읽게 한다. ‘정의’수호자라는 경찰이란 기호와는 달리 개인으로서의 이들은 그렇게 선과 정의의 표상인 것은 아니다. 추하고 비열하고 냉담한 인물이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본질적인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추함과 순수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란 서로 공존하지 않는 대척의 것인가? 선한 사람은 악함이 없고, 추한 이는 순수성이란 없는 것이며, 정의에는 불의가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인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람을 이같이 구분할 수 없는 것일 게다. 사건의 실마리는 바로 이것에 있다. 소설에서 살인자는 자신을 악의 정당한 처단자라 자부하고 있다. 악을 제거하는 자이니 정의가 아닌가? 급기야 명탐정 사이조의 불륜행각이 공개되고 타의에 의해 경찰신분을 떠나게 되면서 이 본질적 질문은 더욱 성숙한다. 젊은 여성들의 죽음과 악의 처단이 무슨 상관인 것인지, 사이조를 불명예 하차시킨 비열한 내부고발자는 누구인가? 또한 사이조의 인간관계에 대한 무관심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인간 삶의 저 밑에 있는 진실의 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비추어주지 않겠는가? 정말 사람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를. 이 모두를 전복시키는 대반전까지 가세하면서 소설은 삶의 진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완전미를 갖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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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2
김도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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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식의 하소연이랄까? 그렇게 된 까닭이 세상의 무분별한 의욕들이 되었든, 인간의 내재적 한계이든, 혹은 그네들이 뿜어대는 광기의 혼란이든 여하튼 어쩌지 못하겠다는 얘기인데, 그래서 어떻다는 것일까? 그저 동류(同類)로서의 공감이면 족하다는 것일까? 아님 이 원인들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것인가? 그래서 어렴풋이 알아냈기로 인간이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또 어쩌겠는가? 그냥 얘기를 즐기고 너나 나나 같지 아니한가? 라고 푸념을 나누자는 말인가?

 

소설은 이러한 시니컬한 의문들을 연잇게 한다. ‘아흔아홉’이란 헤아리기에는 많은 것 같고, 무언가 여운이 남는 수가 발휘하는 영감이 이 소설로 유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숫자에 감추어진 결점을 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일 것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 되어 허무하고 공허하고 알 수 없는 것이 되니 말이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구불구불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지 않아도 돼서 아흔아홉 고개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곳이 소설의 배경이다. 하기 좋은 말로 설렁설렁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가며 강원도 산세와 풍광을 보는 것이 어찌 고달프기만 한 것이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차량으로 오르내려도 그 답답함과 짜증을 이겨내는데 족히 시간이상이 걸리는데 즐거운 고개이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소달구지나 봇짐을 지고 걷는 옛사람들에게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새로 뚫린 터널과 산 중턱과 중턱을 잇는 수직의 교각이 죽 늘어서 이젠 직선의 도로를 그냥 내달릴 수 있다. 그래서 동과 서를 분리하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고개가 그렇게 어떤 분절을 상징하는 기호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한다. 소설은 바로 이 새로운 길과 옛 길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 앉아 시간의 다름, 인식의 다름, 관념의 다름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념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란 것이 이것인가, 저것인가와 같이 선명하다면 무슨 근심이 있고 불안이 있겠는가? 서로 다른 시간, 그 속도의 감각이 여전히 우리들 몸에 새겨진 태고의 시간과 갈등하고 충돌한다. 우린 그래서 방황한다.

 

대관령 옛길과 새 길이 바라보이는 자락에서 서울을 오가는 대학 강사인 남자가 있다. 어느 날 늦은 귀가에 아내의 부재를 발견한다. 그녀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다. 이런 남자에게 Y라는 애인이 있다. 아내 눈을 피해 만나는 여자. 새 길은 남자의 바람기에 일조하는 길이다. 휙 달려갔다, 휙 달려오는 길. 사라진 아내는 남자의 외도 길이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니 새 길은 삶의 안정을 방해하는 파괴의 기호인 셈이다. 대관령 끝자락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그 정적인 시간의 세계가 속도의 시대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실종된 아내를 찾아다니지만 적극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내를 기다린다. 그리고 Y의 몸을 생각한다. 정과 동, 빠름과 느림, 직선과 곡선의 혼화(混和)속에서 무엇이 삶의 답인지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부재한 집에서 홀로이, 때론 친구들과 어울려 술병을 쌓아간다. 이 기다림의 의식이 흐르고 일 년여가 지난 날 문득 아내가 집에 들어선다. 아무 말 없이 여자의 부재로 쌓인 묶은 얼룩들을, 마치 남자의 부정의 흔적을 찾아내 제거해버리려는 듯 꼼꼼히 씻어 내린다. 그리고 Y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화 속 멀리에서 들려온다.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린 여자의 흐느낌이.

 

오랜 침묵 끝에 집에 돌아온 아내와 남자의 대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했느냐,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느냐이다. 여자는 시인하고, 남자는 부인한다. 어렵다. 여자가 기대하는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남자는?

여자는 남자의 애인 Y에게 세 사람이 함께하는 소풍을 제안하고, Y는 흔쾌히 수락하고 이들 셋은 산행을 한다. 두 여자는 자매처럼 손을 잡고 남자를 앞서 거닐고, 남자는 짐 가득한 배낭을 메고 뒤를 따른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이 사실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이걸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세 사람의 대화는 소설을, 아흔아홉 구불구불 인생길을 압축한다.

 

“근데 왜 하필 아흔아홉 굽이야?”

“백 굽이라고 하면 허탈하잖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 것 같아요.” Y가 거들었다.

“아흔 아홉은 허파에 바람 든 사내들을 부르는 고갯길.” 아내의 한탄조였다.

“고갯길을 바라보며 그 사내를 떠나보내는 여자의 한숨 숫자.” Y의 답가였다.

“밤늦게 그 사내가 회한에 젖어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그가 목소리를 깔았다.

“에이!” 아내와 Y가 동시에 조소를 보냈다.

“야유를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는 흰 선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는 몇 번째 굽이를 돌고 있는 거지?” - P 169 중에서

 

채워져서 미리 기를 꺾지 않아 기어오르도록 하지만, 이 유혹이 한숨과 회한의 길인 것이 인생이란 선문답(禪問答)일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중얼거림이 눈길을 끈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이 그런 것이란 걸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소심한 항변일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게다가 지금 어디쯤 인생굽이를 돌고 있는 줄. 결국 이 시니컬한 푸념 자체가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니, 소설의 시작을 떫게 읽어나가던 시선이 슬그머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조탁(彫琢)되지 않은 일상의 언어들이 삶의 모습들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체에도 더욱 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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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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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가의 어떤 작품이든 지지해주고픈 심정이 든다. 늦깎이가 주는 선입견을 일거에 차버리는 공력(功力)을 쌓아온 지난한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고, 도덕적 혐오의 행위가 대체 어떻게 따뜻한 온기와 사랑을 지닐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 낯선 이해와 발견에 도덕적 이성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매혹되는 것은 가히 작가의 역량이라 말할 밖에 도리가 없다.

 

한편 무엇을 훔쳐보는 관음증적 욕구에 내재된 비틀린 부정(不正)에도 불구하고 이 욕망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무엇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남의 일기를 보거나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 것은 알지 못할 쾌락을 준다. 아마 그것은 당초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거짓이 개입할 까닭이 없어,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까우리라는,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실의 장에서 살인과 같은 뒤틀린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과 일시에 깨져버리는 안녕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치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실의에 잠긴 청년에게 아버지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곧 이어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숨지는 가슴 아픈 사건이 연잇는다. 수술을 거부한 채 묵묵히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뵈러간 어느 날, 청년은 낯익은 가방과 자른 머리카락 뭉치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어린 시절 입원치료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낯설기만 했던 엄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어 발견된 노란 봉투 속 4권의 일기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아이의 음울하고 표정 없는 살의와 살인이 여과 없이 기록된 일기, 아니 애써 소설이라 부르고 싶을 살인록(殺人錄)을 마주한다.

 

일기는 죽음이란 평온의 매혹을 떨치지 못하는 애초에 심리적 안정 기제를 지니지 않은 아이의 살인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는 자신에게 결여된 이 정신의 안정 기제를‘유리고코로’라 명명한다. 유년 시절 마음의 위로와 친구가 되어준 인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이는 죽음의 안락과 평온에서 유리고코로를 느끼게 되고, 살인을 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고요가 결핍된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일기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청년은 일기 속 아이의 실체에 멈출 수 없는 무엇, 자신과의 희미한 관련을 지각한다. 이 인물은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아님 어린 시절 바뀌었다고 생각한 또 다른 어머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소설 습작에 불과한 것인가?

 

소설은 이처럼 이 흐릿하고 음침한 고백에도 모순되게 살인자에 연민을 보내게 되는 당혹의 이야기인 일기를 통해 기록자의 살인 행적과 그 사유들, 혹독한 삶의 시련과 사랑을 알게 된 이후의 절절한 자기성찰, 죽음을 통한 재생의 애절함이 쉬이 외면할 수 없는 동정과 공감의 유혹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과거의 기록인 일기와 병행하여 현실의 청년과 아버지, 형제, 사라진 연인, 재정적 압박을 겪으며 교외에 운영하는 청년의 애견 카페와 종업원을 중심으로 기록을 보충하고 가족의 사랑과 유대를 견고하게 드러낸다.

 

네 권의 일기가 읽혀지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몇 차례의 전환적 사건들 - 어린 시절의 살인행위의 간접적 희생자와의 우연한 조우, 온전히 진실한 배려의 만남과 결혼, 사랑을 알게 되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이 요구되는 불안한 현실 등 - 과, 이에 못지않은 청년의 현실적 삶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살의와 미지의 살인까지 더해져 소설은 사건들로 풍부해지고 그 이면의 진실을 쫓는데 더욱 안달을 부추긴다. 사라진 연인과의 재결합은 이루어질까? 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청년의 어머니는 그의 기억처럼 바뀐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와 같은 구조적 매혹과 더불어 손상된 정신에 희생된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와 인간에 대한 온기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정말 무엇인지, 사랑이 왜 고귀한 것인지, 가족의 유대란 살아가는 데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내용적 매력까지 치밀하고 안정된 조화를 보여준다. 꽤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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