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경영 시대가 온다 - 손 안에 펼쳐진 새로운 미래
김종승 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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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앱(App)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커뮤니케이션 변화의 한 복판에 서있음을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릿해져‘경영’이라는 일방향의 언어도 모호한 느낌을 줄 정도이기에, 호들갑스러운 표제가 선동적이고 경망스러워 보이기조차 한다. 다분히 장사꾼의 언어이지만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정보통신 환경의 변화로 인한 세몰이에 뒤엉킬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보니 이를 주된 비즈니스로 하는 사람들의 관심영역을 파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아마도 적절한 생존의 방편이라 할 것이다.

다양한 응용프로그램을 자유로이 설치하여 실행시킬 수 있는 고기능의 휴대폰, 즉 손안의 PC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출현과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이와 극단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일대 변혁을 야기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우리네 삶에 밀착되어 휘감아 돌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경쟁하여야 한다는 압박감은 모두를 속도전에 뛰어들게 하고, 이 조급증은‘실시간’에 이루어지는 그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 대화에 참여치 못하면 마치 도태되는 것처럼 부추긴다.

공감을 함께하는 이들의 편리한 정보와 교감을 기초로 한, 개인 간의 사사로운 소통공간이었던 트위터가 기업과 정치인, 연예인의 마케팅 홍보도구로서의 유용성이 발견되자 팬과 연예인, 유권자와 정치인, 소비자와 판매기업과 같은 약삭빠른 관계의 형성이 조성되고, 이윽고 적극적인 비즈니스 통로가 되었다. 더구나 실시간이라는 막강한 파급효과에 기름을 붓듯이 스마트폰의 출시는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극적으로 바꿔 놓았는데, 이동하면서 교통, 지리, 날씨는 물론, 음식점, 빌딩, 여행예약, 이메일, 불로그, 그리고 음악을 듣고, TV와 영화까지 감상을 하며, 대상에 스마트폰을 향하기만 해도 관련정보가 표시되는 증강현실로 그야말로 이 새로운 모바일 환경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라 하여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곧 무궁무진하지만 누군가 선점하여야 할 신규 비즈니스 시장이자 효율적인 마케팅 도구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러니 경영이란 시선은 그만큼 사활이 걸린 변화된 생태환경의 소스라치는 체감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에따른 경영환경의 구축, 즉 새로운 모바일 환경에 적응하는“실시간의 기업을 만들고 여기에 따르는 업무프로세스의 변화, 상품과 비즈니스 모델의 창출, 시장과 산업 재편을 선도”하는 소위‘앱 경영’은 중차대한 생존의 과제로 대두된다.
그래서 책은 앱이라는 이 새로운 모바일 기반이 어떤 의미, 그 특성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어떤 비즈니스 가치의 창출을 가져오는지를 기술적, 사회공학적 의미를 통해 해석한다. 그리곤 여기서 나아가 소비대중의 심리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내부 시스템의 구축에서 인사, 조직문화, 마케팅에 이르는 일련의 경영체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트위터에서 나눈 일상의 소소한 대화가 얼마나 빠르고 넓게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지는지 그 위력은 뉴스의 중요 소스가 될 정도로 엄청남을 우리들은 목격하고 있다. 사용자들의 대화에는 가공되지 않은 주관적 정보들이 그득하고 속도 또한 매우 빠르며, 이어지는 댓글들로 관심사와 논점이 변화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날것 그대로의 가공되지 않은 사람들의 욕구와 감성과 사회적 관점이 녹아있다. 그리고 그 확산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이것이 소셜 미디어의 특징이다. 정보공유나 공감대 형성과 교류 등의 감성 통로이자 공간으로서 여기서는 무엇이든 빠르게 확산되고 소비된다. 무언가를 알리고자 하는 측에서는 더 할 수 없는 매력적 공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즉 개방적 소비와 공유로 대변되는 소셜 미디어의 특성은 이 통로를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몇 가지 전략적인 시사를 안긴다. 바로 소셜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는 일방적 소통의 지양, 공감과 재미라는 스토리텔링, 집단지성의 활용과 같은 것들이다.

한편 참여, 개방, 공유로 정의되는 새로운 모바일 환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앱(Application)은 그야말로 무한한 비즈니스 기회를 낳고 그만큼 선점과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누가 소셜 트렌드를 만들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지속적인 가치 창조의 접점을 찾아낼 것인가는 이 변화된 가치사슬을 행동에 옮기는 능력에 따를 것이다. 인터넷 10년의 변화보다 더욱 급격하게 진행되는 모바일환경의 진화는 앱 경영이 생소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우리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당혹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이 거침없는 변화에 대응키 위해 앱기반의 시스템 구축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리더십과 조직문화는 왜 수평적 참여와 소통의 체제로 변화하여야 하는지가 자명해 진다.

대중들의 통찰력과 지혜를 끌어들이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이나 카탈리스트 기업의 일례는 변화된 환경에서 기업들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한 앱 시대의 마케팅 기법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주위에서 인식된 자신의 가치를 얻으려”하는 인간의 내적 동기와 같은 심리학적 접근은 비록 얄궂지만 근원적이고 예리한 전술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
앱의 기술적 기반과 그 기술의 지향점, 사회경제적 파급효과와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과 시장, 그리고 이를 위한 경영체제의 구축에 이르는 선도 기업들의 실사례를 통한 현재의 분석과 미래의 예측 등을 조언하는 이 저술은 변화의 변곡점에 서있는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자극한다. 분명 우리들은 앱의 시대라 불릴만한 세상에 성큼 들어서 있다. 정보 등 서비스와 상품의 소비자이자 블로그, 페이스 북 등을 즐겨하는 정보의 생산자이기도 한 우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케 하는 훌륭한 조언의 역할도 하고 있다. 피처폰(feature phone)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여, 스마트폰(smart phone)의 세상으로 뛰어들 것을 주저하지 말라. 삶 그 자체가 지체될지도 모를 세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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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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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과 부딪치다 보면 인생과 자연의 섭리,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덧 깃들기 시작하고, 볼 수 없었던, 보지 않았던, 그리고 이성에 금지당하고 은폐되었던 진실과 조밀하게 연결된 세상의 진면목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을 어찌 보잘 것 없는 조악한 사람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어렴풋하게 인생의 길을 안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젠 사유의 세계와 경험이란 연륜이 깊어진 작가가 이러한 삶의 지혜들을 자신의 목소리와 또한 이를 대변하는 명인들의 일화, 고사, 우화, 금언, 잠언 등 아포리즘(aphorism)으로 엮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허영, 위선, 기만의 본성을 질책하기도 하고,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고통의 실체가 삶의 과정이며 도구임을 깨우치게도 해주며, 어리석음과 과욕이 불러내는 자멸의 이치, 부분의 집착으로 생명을 잃고 사물화하고 기계화되는 자아를 상실한 오늘의 우리들을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감성의 숭고한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현실, 시대에 압도당해서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한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을 자초하는 무지와 안이함을 번뜩 깨닫게 하고, 순간 우쭐함에 젖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개구리의 우화처럼 자만의 실체를 보여주거나,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고 인간 실체의 진실을 향한 전체상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구름이 무한히 자유로운 것은 자신을 무한한 허공에다 버렸기 때문이다.”처럼 자율과 자유란 무엇인지,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한다.”는 나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란 존재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무지와 발전, 그리고 궁극의 멸망이란 역사의 이치를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 없는 현대인의 반복되는 우(愚)를 경고하기도 한다. 바로 이처럼 무질서하게 배열된 듯한 이 아포리즘들이 전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의 사람에 대한 진한 애정이 베어 가지런히 정렬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편 뼈있는 진리들이 저절로 우리에게 체화되는 재미있는 일화들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재치넘치는 구성이나, 각 장마다 수록된 몇 편의 감성 시(詩)는 은유라는 보다 원천적인 마음의 세계로 시선의 지평을 확장케 하는데, 감칠맛 나는 다음과 같은 시는 해맑은 진솔함과 낭만, 그리고 우주와의 멋들어진 교감까지 산다는 것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준다.

「보름달」

얇은 속옷 밖으로 드러나는 네 무릎
어느 중이 훔쳐다가 부처님께 공양했나
달도 참 밝구나     - 본문 P 323 에서

아마 진리란, 지혜란 보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따위에게 고작 생명 없는 물질밖에 더 보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절망 속에 창조와 희망이 있고, 시련 속에 평화가 있듯이 우연 속에 필연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상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삶에 깃든 진실들을 통해 희망과 행복의 날개를 달아준다. 작가와 같이 수록된 이 아포리즘들의 산책을 끝내고 나면 우리 내면의 그릇이 제법 커져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세상살이에는 비록 서툴지 몰라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혜안과, 행동의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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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작가들 - 대화적 관계로 본 문학 이야기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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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즉 모든 것을 독립적이고 부분적인 단절의 그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상호 연결된 구조로서 이해한다면 사실 우리들의 생각이 서로 닮은꼴을 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어느 순간부터 고작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란 한계를 가지고 분석하고 짜깁기하는데 익숙해져 정작 진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 작품을 접하는 우리네에게 저자가 발견케 해주는 서로 다른 작품들의 다채로운 방식의 연결의 드러냄을 통해 알지 못했던,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의미의 발굴과 소개는 가려졌던 진실을 그의 말대로 “조금은 넓고 깊어지게”해준다.

선행자로부터 후행자에게 꽃다발이 전해지는 축적됨의 문학사적 의의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본질을 보다 넓고 깊게 전체적인 형상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는 의미 깊은 시도라 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문학적 영감의 일치라 볼 수밖에 없는 동일성에서부터 선배 문인(文人)에 대한 존경의 뜻을 가득 품은 오마주, 때론 원작을 비비꼬고 조롱하는 다시쓰기, 그리고 동일한 모티프나 서로의 작품에 우정과 사랑, 경외로 소통하는 작품의 형태까지 그 거울의 모습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대화의 질이 어떻든 그 소통의 변주들에서 우리네 심성의 보다 풍부한 전경을 읽게 되는 것은 이 저작의 진짜 힘이라 할 수 있다.

20여 쌍의 거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거울의 상(像)은 사랑이고 존경이며 공감이기도 하지만 저항과 뒤틀림, 적대감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흥미로운 연결을 지닌 작품들을 대함으로서 미쳐 보지 못했던 의미를 비로소 보게 되고 앎의 지평이 넓어진다. 복제된, 독자적 하루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반복의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모티프는 아마 국경과 거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형상일 것이다.‘안정효’와 ‘밀란 쿤데라’의 오묘한 영감의 일치처럼 말이다. 그리고 분명 같은 인물을 소설화하였음에도‘김동인’의 「김연실 전」은 ‘정이현’의 「이십세기 모단걸 - 신 김연실 전」에 와서 심하게 공격당하고 일약 창부에서 세대와 투쟁한 여성전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채만식’의 「치숙」은 존경을 그득 담은‘송경아’의 「치숙」으로 더욱 빛나고,‘최인훈’은‘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를 거의 일반명사화 시키는데 공헌하기조차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내면은 무릇 수많은 방해작용으로 제한된 대상만을 인식하지만 이들 작가들의 누적된 관점을 통해 보다 원형에 가까운 세상의 이해에 근접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거울 작품들이란 존재 자체가 두 세계의 본질이 여전히 바뀐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할 때 어쩜 동일함의 반복은 그리 달가운 현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의 확인은 분명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신석정’의 「작은 짐승」과 ‘안도현’의 「저물 무렵」에서 발하는‘蘭이와 나’ 또는 ‘그 애와 나’처럼 말이다. 우리 문학작품을 새삼 넓게 열리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저작이다. 저자의 기대를 넘는 문학의 영감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문학의 이해를 높여 독자의 지평을 넓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 저작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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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7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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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을 전후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하는 전환의 시기에는 항상 인간을 분열적인 존재로 비치게 하는 그 무엇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모양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독일사상의 한 축을 차지하는 프로이트, 말러, 클림트, 호프만슈탈, 베어호프만 등과 함께‘청년 빈파’의 일원이었던 슈니츨러의 작품들은 그래서 왠지 모를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이 교차한다.
두 편의 소설이 수록된 슈니츨러의 이 작품집은 젊고 자유분방한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카사노바가 아니라 노회하고 영락한 카사노바를 그리고 있는가하면, 제도적 결혼의 내밀한 분열을 도덕적 편견과 숨겨진 욕망의 갈등이라는 꿈의 환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을 겪는 부부의 내면을 쫓고 있다.

카사노바의 귀향(Casanovas Heimfahrt)에 대해서

중노년기에 접어든 카사노바, 한 때의 광채가 서서히 꺼져가는 모험가의 누추한 모습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한 하룻밤 동안에는 현세의 온갖 명예와 저세상의 온갖 지복도” 관심 밖이었던 사람, “열망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열망”을 추구하던 영원한 젊음의 심벌같기만 한 카사노바의 늙고 낙망하여 실존의 위기에 처한 모습은 아주 낯섦, 그것이다. 추방당하여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던 차에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부유한 중산층으로 일어난 추종자의 초대를 받게 되고, 그 저택에 기거하는‘마르콜리나’라는 처녀에 대한 욕망으로 포위된다.

“욕망의 온갖 격정과 청춘의 모든 활력이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그 당시의 카사노바가 아닌가?”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늙음의 법칙이 왜 내게도 적용돼야 하는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인은 교활하고 기만적인 사건을 만들어낸다. 카사노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심드렁한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애인인 청년장교 로렌초의 노름 빛을 대신 청산하여 주기로 하고 캄캄한 밤에 로렌초로 변장하여 침실로 잠입한다는 거래를 성사시킨다. 격렬한 정사를 치루고 성취에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날이 밝기 전에 내뺀다는 계획은 그르치고 만다.
수치심과 경악에 빠진 마르콜리나의 눈길에서 그는 “도둑놈, 난봉꾼, 악당”이란 분노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눈이 하는 말은‘늙은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만큼 그의 정체성, 존재를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처럼“늙음이 젊음을 형용키 어려울 만큼 속죄할 수 없는 능욕”이상임을 의미한다.

이‘에로스적 합일’의 파렴치하고 기만적 연출은 오히려 젊음과 남성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아니라 신화의 파괴, 정체성의 상실, 도덕적, 인간적 몰락이란 자기파멸의 재촉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에 더해 수치심으로 도피하다 마주친 로렌초를 죽이게 함으로써 젊음을 동일시한 카사노바의 신화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고, 이것도 부족했던지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 여관방에 피로해진 몸을 누이는 카사노바를 꿈도 꾸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잠들게 한다. 아마 이처럼 철저하게 신화를 파괴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결국 죽어서야 영속성을 얻는 자연의 순리가 이렇게 엄숙할 줄이야. 늙음, 늙은이가 되는 것에 저항할 길은 없다. 저항할수록 수치심만 깊어질지니...

꿈의 노벨레(Die Traumnovelle)에 대해서

이 작품은 니콜키드만과 톰크루즈가 열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Eyes Wide Shut, 1999)'의 원작이다. 내면의 심리적 묘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보니 영화도 꽤나 몽환적으로 그려졌다는 기억이 든다. 가장무도회, 일탈, 에로티즘,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의 미묘한 교차와 혼동이 불러내는 은폐된 갈망의 모습들이란 언어만으로도 이미 선명함을 거부하는 내밀한 무엇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내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은폐된 현실의 욕망, 남편인 의사‘프리돌린’의 현실 속 욕망의 꿈에서 우린 포장된 거짓 환상이라는 위험한 심리적 위기를 읽게 된다. 꿈속의 에로스적 희구와 심리적 일탈을 고백하는 아내, 이와는 달리 현실에서 이중적 삶을 꿈꾸는 남자의 행로는 부부이지만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것처럼 각자 서로 낯선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소설의 제목에 있는‘노벨레(Novelle)'란, 본디“하나의 갈등구조를 정점까지 고조시키는 드라마적 구조를 갖는 산문이나 운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이중 노벨레 (Doppel-Novelle)”였다고 하는 것은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에로스적 모험을 고조시키는 이중구조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들의 내면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인데, 우린 사회의“금지령과 규정, 성적인 터부와 명예에 관한 불문율”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질서와 균형을 잡아가며 살고 있지만, 열정적 포옹과 애무에서도 예정된 고난에 대한 예감 때문에 몹시 우울한 느낌이라는 아내나, 늦은 밤 돌아와 아내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그 멀고 낯선 감정의 세계와 같이 내면의 세상은 비밀스럽고 위선적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숨겨진 욕망과 잠재된 갈등이 사회적 안정의 욕구와 에로스적 일탈의 심리를 반복하며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종국에는 양자 모두 에로스에 대한 기대의 포기로 위기를 극복하고 제도와 규범, 안정을 선택하지만 내적 결속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일면 외관상의 행복이 찾아온 것 같지만 침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작가의 짓궂음에서 왠지 쉽사리 깨질듯 한 유리병을 상기시킨다. 규범, 제도, 정체성,...이러한 모든 것들, 즉 사회적 장치에 얽매여 놓칠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꿈이나 꾸어야 할까? 아니면 좀 냉소적으로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내면의 흐름이 돋보이는 뛰어난 심리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30~40대의 부부들이 한 번쯤 읽어 볼 만 한 작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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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내겐 무척이나 흥미로운 현상으로 여겨진 것인데, ‘소설가 구보씨’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구보씨가 등장하는 소설, 시 등 문학작품은 물론 구보씨의 소설 속 동선을 정리해 놓은 책이 나올 정도이고, 나아가서는 “좌절한 의식”을 대표하거나 ‘박태원’의 소설 속 시대인 일제강점기의 무력한 대중의 감성이나 시대상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사용되기까지에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의 기원이 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년 발표)」이라는 박태원(1909~1986)의 단편소설은‘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매일이라는 것은 무수히 찍어낸 하루처럼 반복의 반복을 이루며, 무목적성의 하루를 사는 인물이다. 물론 소설의 주제는 다분히 시대의 불온성이나 불의의 사회가 지닌 한계성에 대한 탐험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시대를 달리하며 작가들이‘소설가 구보씨’를 반복하는 이유는 변혁되고 시정되어야 할 우리사회의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문제나, 구보씨로 대변되는 인물상이 오늘에도 동일하다는 착상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빚어졌다고 단언하기에는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박태원의 소설 표제를 반복한 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현대문학에 있어서‘소설가 구보씨’만큼 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를 남긴 작품도 없으리라.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72년 발표)』처럼 제목이 완전히 동일한 오마주 작품에서부터,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나, 시인, 건축가, 사진작가에 이르는‘구보씨’는 그야말로 무수히 변형되어 재현되고 있을 정도이다. 구보씨와 문학작품과의 無言의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네들의 작품으로 끌어댄다. 시대와 상황을 달리하는 이들 작품을 하나하나 접하는 시간은 흥미롭고 지적인 탐험이 될 것만 같다....  

아! 본론을 빠뜨렸다. 내가 이해한 구보씨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 말이다. 좀 현학적으로 말하면 ’동시대인’이라 해야 할까? 시대에 들러붙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 부러진 등뼈의 틈새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어쩜 파편화된 오늘의 사회에 통증을 느끼는 우리들 모두의 표상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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