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공포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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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역사, ‘저주의 몫’이 된 섹스의 뿌리 찾기이다. 욕망과 공포가 분리되고 또한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기 시작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제국으로 변모하는 바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되는 성의 정치화와 권력화, 그리고 금기라는 규범화가 낳은 문명사적 고찰을 통해 성의 기원에 대한 풍성한 해석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성의 정치화에 고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의 또 다른 판본이 될 수 있으며, ‘조르주 바타이유’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에로티즘의 이해, 즉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섹스와 비견되는 언어학적 논증을 통한 공포와 섹스의 동일 기원에 대한 해석은 오늘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파스칼 키냐르’의 이 저술은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관점 및 작품들(특히,『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나 『은밀한 생』등)을 이해하는 기본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할 정도로 총 16개장(章)에 걸친 신화적, 미학적인 성의 문화사적 성찰은 가히 독보적이고도 귀중한 문헌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물론, ‘아플레이우스’의 『변신』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한 접하기 힘든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무수한 작가들의 서사시와 회화들의 해석은 매료될 수밖에 없는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매혹(fascinatio), 파스키누스(fascinus)와 직면한 죽음

로마의 제국화, 즉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에 따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예속적 관리가 되는 것은 문화적 대변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 문화에 있어서도 그대로 실현되고 접목된다.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으로 혼인한 여성, 과부의 매력 발산이나 하다못해 강간조차도 피해자인 이들 여성을 처벌하는 까다롭고 엄격한 시민남성 중심의 비상호적 성규범으로 변화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식은 분리되어 육체는 평가절하되고, 특히 매혹에 대한 여성의 좌절은 욕망과 공포를 분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민들의 음담패설과 통음난무는 자유분방이라 할 정도로 로마에 넘쳐났는데 이는“남성성의 약화를 방지하려는 의례”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외설스런 언어, 남근의 지배라는 권력은“능동적 힘, 태내의 번식력, 다른 국가들에 대한 승리의 힘”을 상징했고 로마인들의 이러한 영웅주의는 훌륭한 죽음이라는 강박관념으로 표출되어, 원형경기장의 잔악한 죽음 앞에 선 노예들, 화가들의 벽화에 그려진‘직면한 죽음’처럼, 죽음의 순간에 매료되어 환호하고 그것을 만끽하는 것으로 형상화 되었다. 이를보면 오늘의 우리사회와 쌍둥이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성은 수치스러운 몰가치로 저 심연 뒤로 규범으로 금지하고 감추어 놓고서는 다양한 기호들로 외설과 음란에 도취케하는 현대정치권력의 양면성과 빼 닮은 것이다. 성과 사랑, 욕망과 죽음, 영혼과 육신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분리하면서 모든 죄악과 위선을 뒤집어쓰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사회의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편 로마의 왕들은 베누스와 마르스의 아들인 에로스의 추종자가 되어 스스로 베누스의 아들임을 자처하여 성적능력을 곧 권력과 동일시하는 남근지배, 즉 인간 존재로서 비로소 가능성을 획득하는 존재 이전의 이미지, ‘섹스’, 즉 파스키누스(fascinus: 勃起한 남성)에 대한 매혹에 천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 질린 얼굴 - 인간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쾌락 - 이 suavitas(감미로움)였음은 그 기원의 동일성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강직(剛直)에서 매혹(fascionatio)이 출현하는데,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은 프랑스어 대경실색(meduser), “피해야 할 것에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고 공포 자체를 숭배하게 하며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 자신보다 공포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래서 시선은 마주보지 못하고 언제나 곁눈질이며, 매혹은 언어의 사각지대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로마의 문화적 지표들인 폼페이의 벽화, 서사시에 표현된 직면한 죽음의 광경이나 원형경기장에서 사투(死鬪)의 형태로 연출된 희생이라는 우스꽝스런 죽음, 파스키누스의 풍자적 의례 등은 처벌을 초월한 복수, 위반에 대한 집단적 복수에 참여하는 승리의 시퀀스(sequence)라 할 것이다.

‘신비의 빌라’, 그리고 메두사(medusa)...

키냐르의 모든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신비의 빌라’는 존재가 있게하는 시원(始原)의 장소이기도 하며, 도시에 환멸이 난 시민들의‘은둔’의 장소이자, 은밀한 쾌락의 공간인 ‘매혹의 침실’,‘매혹의 빌라’이기도 하다. 아마 이 신비의 빌라에는 “천으로 덮여 키 안에 들어 있는 파스키누스를 향해 일제히 집중되어”있는 공포어린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 벽화가 있는 모양인데, 이는 매혹을 마주하는, 또는 죽음에 직면한 놀라움, 바로 아연실색케 하는 매혹의 더없는 조합인 것이다.

사실 자연의 풍광이 그지없이 좋은 교외의 빌라라는 곳이라도 매일의 지리멸렬한 반복이다 보면 그것이 무슨 즐거움이겠는가. 아마 삶의 권태라는 태생적인 인간의 질환이 머리를 쳐들어 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흥분의 소멸, 위축되고 수축되는 순간, 그것은 분출되는 것의 고갈, 슬픔이라 할 것이다. 결국 남성은 동물적 쾌락 속에서 침몰한다. 그 침몰은 곧 나른한 권태이다. 지루함이다. 상징적 세계의 수축, 삶의 권태, 쓰라린 감정, 로마는 바로 이 불응기를 축소하기 위한 권태와의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무감각해진 오늘의 인간들을 자극하기 위한 리얼리티 쇼같은 광적인 쾌락주의처럼.

신비의 빌라에 있는 돌처럼 단단한 파스키누스를 바라보는 놀라운 표정은 정신을 몽롱하게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에로틱한 시선이다. 바로 머리에 50마리의 뱀이 우글거리고 입을 활짝 벌린 여자의 얼굴을 한 메두사(medu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면 모두 돌처럼 굳어 죽어버린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와 라르고스 왕의 딸인‘다나에’사이에 출생한 아들, ‘페르세우스’가 폭력적이고 성적이고 마법을 걸어오는, 놀라움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시선의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오기 위해서는 결코 마주볼 수 없는 것이다. 마주보는 것은 곧 죽음이다. 마주보는 시선이 행사 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두려움,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기이며 이 정면의 파괴적 시선에 대응하는 것이 곁눈질이다. 겁을 내며 수줍게 바라보는 여자의 비스듬한 시선은 바로 페르세우스의 계략이다. 반들반들 거울처럼 닦은 페르세우스의 청동방패에 반사되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의 공포의 경직은 쾌락의 극치인 것이다. 이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반영(反映)에 잡아먹힌” 나르키소스의‘자기 살해적 시선’,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나르키소스 신화의 3가지 판본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책 본문 참조)

“쾌락은 육체를 우월한 자아로 느끼게 하고 영혼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린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은 오직 쾌락뿐이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삶은 통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출을 은폐하고 성과 매혹을 금기시하는 사회는 파괴 불가능한 욕망을 알지 못하고 그 수축의 권태와 쾌락, 죽음을 제거하기 위해 기술적 광란에 집착한다. 권태에 집착하는 사회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우린 역사에서 본다.“자신이 생겨난 섹스와 자신이 썩는 죽음의 부패 사이에 놓인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수와 더불어 권태와 증오”가 잇따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을, 인간인 것을 왜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는가. “삶은 죽음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빛”이란 것을, 그 매혹의 빛, 설혹 돌처럼 굳어진들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아찔함의 순간적 경련과 경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서있는 조각상의 아름다움처럼...

섹스와 공포, 성과 권력, 쾌락과 죽음이 매혹이라는 동일한 기원에서 태어났음을 어원학적으로 그리고, 고대 문헌과 회화를 배경으로 본질을 가려왔던 어둠을 과감하게 걷어내고 선구적인 윤리를 제시 해내는 이 저술은, 에로티즘의 본질을 파헤쳐 우리들이 지닌 왜곡된 선입견을 교정하고 새로운 문명사를 여는 에로티즘 정보의 광산이자 절대 걸작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는 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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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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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의 여과되지 않은 감정, 날것의 삶 그대로임으로서 자연스레 우러나는 해학, 아마 이것이 쑤퉁(蘇童)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너저분하게 포장하고 수식하지 않은 질박(質樸)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왠지 짙은 처연(悽然)함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세 개의 큰 굴뚝은 성북지대(城北地帶)의 상징이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이미 암울한 도시 서민의 애환, 피폐한 환경 등 소외되고 버림받은 그 무엇들, 애달픈 사연들을 떠올리게 한다. 문화혁명이라는 과도한 중공업정책,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강조되던 1970년대의 소도시 끝자락, 툭하면‘무산계급 전제정치’를 노동자들의 무슨 권위라도 되는듯이 떠벌리는, 그러나 이념과, 권력투쟁과는 무관한, 또한 희생자일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투영되고 있다.

화학공장이 뿜어내는 분진과 쏟아내는 오염물질로 회색빛깔을 한 마을과 썩은 강물이 흘러 악취가 나는 도시, 참죽나무 없는 참죽나무길과 길에 피어나는 꽃들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저 피고 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중첩되어 다가온다. 운치와 정감있는 마을길들의 이름과는 달리 그 역설의 해학을 피해갈 수 없게 하는데, 참죽나무길에 대해 실로 경악할 만한 내용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明⋅淸시대 죄수를 수감하던 북대옥(北大獄)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성, 쉬더, 쩔룩이, 홍치 라는 네 명의 불량소년과 그들이 팽개친, 아니 그들을 포용할 수 없었던 “줄곧 살인, 방화의 상징으로 유명”한 동펑중학교가 더해지면서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괴리되고 반항하는 삶들을 목격하게 된다.

몇 푼의 돈에 딸을 팔아넘긴 뱀 장수, 이유도 모르고 낯선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여인‘텅펑’, 이들의 아들‘다성’, 여기서 분명 비애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전거를 멈추지 못해 트럭에 돌진해 비명횡사하는 다성의 아버지‘리슈예’의 하루는 오히려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죽음을 미소짓게 하는, 그러나 그 미소 뒤에 소시민의 애환이 몽땅 담겨있음에 바로 심각한 얼굴의 모드로 돌아오게 하는 절묘한 재주가 있다.
한편 과부, 홀아비, 오쟁이 진 무능한 남자, 고작해야 공장노동자들과 이들의 무력함에 저항하는 방치된 아이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어떤 소명의식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회, 절망만이 팽팽하게 흐르는 황폐한 시간만이 썩은 물이 흐르는 해자와 같이 휘감아 돈다.

절제와 공존, 배려와 사랑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하나씩 사회에서 사라져간다. 순간의 욕망으로 이웃집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인민재판에서 해충처럼 처단되는 열여덟 살‘홍치’, 강간의 수치와 주위의 폭력적 시선과 언어에 마침내 강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어린 소녀‘메이치’, 폭력의 패자가 되겠다는‘다성’의 어이없는 죽음, 아비와 아들이 함께 탐하는 유부녀인 탕녀‘진란’, 건달패들의 추행에 저항하다 살해당한 쩔룩이의 누나, 온통 채 피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축축한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이 여느 막장 드라마 이상으로 음울하게 그려지고 있다.
인민의 삶과는 이격된 권력자들의 이념투쟁과 정책들은 등장하는 호적 담당 경찰관이나 유리병 세척공장 당 간부의“무산계급 전제정치가 그깟 화냥년 하나 다스리지 못하겠어요?”하며 호기를 부리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화혁명기의 좌절된 사람들의 허탈과 분노를 읽게 된다.

이 작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저녁에 피어 아침에 지는‘야반화(夜飯花: 일명 분꽃)’라는 꽃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키우는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아는 것이 꽃”이며,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야 어느 샌가 참죽나무길에 빠른 속도로 퍼져 피어나는‘태양화’를 이해하게 된다. 어두운 밤에서 밝은 낮의 꽃이 피어나는 곳이 되는 것을.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부모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중국의 1970년대는 50살 중년이 된 오늘의 그들에게 안타깝고 눈물겨운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성북지대’, 무지막지함만이 그득해서 어딘가로 벗어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곳,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곳에서 아이들의 삶의 뿌리 내리기가 처연한 아름다움의 문장으로 그려진 성장소설의 걸작 중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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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시대의 경제학 - 늙어 가는 세계의 거시 경제를 전망하다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5
조지 매그너스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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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무상급식에 대한 보수정당의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을 보면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이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사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정치지배 권력은 단기적 이익실현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부의 축적을 위한 정책을 위해서는 복지정책과 같은 장기적 사회안전망의 구축은 장애가 되는 것이고, 해서 기를 쓰고 복지정책을 축소하려한다. 또한 선거와 같은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들인 이들은 단기적이고 가시적 성과에만 열을 올려 10년, 20년, 30년 후의 한국사회가 부딪치게 될 문제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부자 감세정책을 밀어붙이고 복지예산 역시 권력의 홍보 전략화하면서 가시적인 곳의 집행만 이루어져 정작 빈곤계층이나 노인 등 취약계층을 위한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예산의 효율적이고 균형적 배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더구나 베이비붐세대가 본격적으로 고령화되는 시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가장 급격한 노인인구 증가국의 하나이며 , 출산율 또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와 같은 살기 힘든 국가들과 같은 세계 최저 출산율 국가로서 세계평균의 50%를 밑도는 그야말로 앞뒤가 꽉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고령화 사회를 지탱할 생산가능인구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노인 인구의 생존을 보장할 국가의 재정적 준비도 전혀 없이 오직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해야만 한다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구구조의 변화, 즉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의 급격한 진입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당면 과제와 이로인한 영향들을 제시하고,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가를 고찰하고 있다. 적시되고 있는 구미 선진국 사회들의 고령화와 인구 구조 변화는 물론 개발도상국, 빈곤국들의 현상을 비교 분석하면서 발생가능하고 우려되는 고령화관련 비용의 증가로 인한 재정 압박을 비롯한 국가별로 직면하게 될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또한 회피할 수 없는‘세계화’라는 자원의 무차별적 이동을 여하하게 국제사회가 균형을 유지하며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를 이민과 자본의 유출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는 65억 명이고 2050년에는 92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의 중위 연령은 28세이나 2050년에는 38세로 높아진다. 출산율도 인구 대체율인 2.1명 이하로 떨어짐으로써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든다. 6억7000만 명인 65세 이상 고령 인구도 2050년에는 20억 명으로 4배 가까이 폭증한다. 이는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생산가능인구가 1/4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인구 구조변화를 표현하는 이러한 지표가 지구촌 전체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만, 한국 사회는 이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구미 선진국들의 경우 한국보다 고령화비율이 낮으며, 그 속도 또한 급진적이지 않으며, 출산율도 한국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게다가 사회보장제도가 한국의 열악한 수준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할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고령화 속도 및 고령 인구의 급증은 일본에 이어 세계최고의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 1,2위를 다툴 정도로 낮으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대다수는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을 정도로 사회보장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불감증과 정치권력의 무책임성이 결합하여 곧 도래할 2020년의 한국경제는 대책 없이 불행과 궁핍에 직면할 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고령인구의 부양을 위한 재정적 준비만이 아니라, 소득세, 소비세 등의 균형적이고 절충적인 조세정책, 의료 및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재정비, 부족한 노동인구의 충당을 위한 세밀한 이민유입 정책, 기타 공공정책 등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여 할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준비와 재원, 제도정비를 위한 시간을 미룰 만큼의 여유가 없다. 이 저술에서도 지적하듯이 한국은 대만과 함께 연금 지출 등 재정적 압박으로 국가경제가 2010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하고 2035년 무렵에는 극심한 압박에 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사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의 자유시장 자본주의체제로는“빈곤층의 요구는 고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중산층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역부족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으며, “순조롭게 고령화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복지국가나 수정된 자본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한 과정이 될 것인데, 줄어든 생산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여성인력의 참여를 위한 보육시설의 확충등 환경적, 제도적 기반 마련과 싱가폴과 같이 55~64세 연령의 의무채용 등 적극적인 정책이 요구되며, 특히 노동력 공급부족이 가장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의 경우 이민의 적극적인 수용도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더해 부유층, 고소득자, 기업에 높은 세율을 적용해 사회보장재원을 확충하고 이의 일방적인 부담의 형평을 위해 일부분은 판매상품등에 소비세로 전환해 절충적이고 형평성 있는 조세정책으로의 개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모두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으로 다분히 준계획경제체제로의 돌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이처럼 단순히 영유아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인구의 증가라는 막연한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령화는 벌어들인 것을 지출하는 즉, 저축율의 하락을 동반하고 공공지출의 증가를 초래한다. “고령화 논란의 핵심은 돈”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지구촌이 마주한 최대의 경제적 시험무대이고 개인과 국가에 대한 압박이자 공포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위기인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세계화’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사실 세계화가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 선진국들로의 자본과 노동력의 유입으로 개발도상국들과의 공존이 그나마 가능했다는 긍정성도 존재해왔다. 다시말해 중국과 같은 신흥국들의 거대한 자본축적이 선진국들에 투자로 유입되어 지금까지는 상호 의존적인 안정이 가능했으며, 부족한 노동력이 못사는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이동하는 움직임을 자연스레 조장하여 균형을 맞추었으니 말이다.

한편 인구구조의 변화는 세계경제 및 정치적 위상의 변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젊은 층의 감소는 서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 영유아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젊은 나라들과는 달리 중위연령이 40세에 육박하는 나이든 나라들의 군사력, 국가 안보능력에 심각한 도전국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마 갈등에 관여할 능력이나 의지를 감소시키고 이는 새로운 패자의 부상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 한국사회는 심각한 노동인구의 부족과 고령인구의 부담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할 조건을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 명료하게 갖추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미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제 이민유입에 대한 정책도 보다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저축과 보험 등을 통해 더욱 늘어나야만 되는 사회보장 비용의 재원을 거둬들여 새로운 수입원을 조성하고, 특히 유입인력의 질적 수준에 대한 고려도 장기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도래하는 베이비붐세대의 고령화는 분명 당면한 심각한 과제이다. 그러나 베이비붐 이후세대는 더욱 끔찍한 사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심지어 “불안하고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으며 과도한 조세 부담을 안은 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세대라 하여‘아이팟(Insecure, Pressured, Overtaxed and Debt-Ridden)’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이들을 일생 내내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없다. 재원마련을 위한, 아니 경제적 혼란과 이로인한 사회적 불행을 차단하기위해서라도 진중한 정책적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사회가 직면한 고령화 시대를 진단하는 다양한 거시경제의 전망과 검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이 저작은 우리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국과 세계경제를 예측하고,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준비케 하는 강력한 지침이 되어준다. 이 시대에 반드시 검토되고 숙지되어야 할 경제가이드라 하겠다. 국민 모두, 그러나 특히 정책 입안자들, 정치인들이 꼭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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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심부름꾼 -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 김병화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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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릇된 인식으로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그리 멀리서 구할 것도 없다. 내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하는 법도 여전히 알 수 없으며, 내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리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아마 반복적으로 누구든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세상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더구나 이러한 오만을 토대로 멋대로 세상을 단정하고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류의 역사 내내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합일을, 한편으론 신체는 한 낱 몸뚱아리라는 껍데기이자 혐오의 물질과 고귀한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달리 이해하기도 하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바로 이러한 선택적 질문을 하는 것이 이미 단순하고 명료함을 쫒는 소위 ‘합리성’이라는 관점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일까? 분석적이고 무언가를 분명하게 확정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왜 발생한 것일까? 또한 오늘의 사회처럼 물질문명이 기승을 부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는 기계적 사고로 환원하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궁극적이고 기원적인 연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근대화와 산업화, 소비자본주의라는 속성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만 하면 이러한 체제를 바꾸면 합리화, 사물화하는 인간사회의 습속이 변화할 수 있을까? 이보다 근원적인 어떤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성질은 아닐까?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간, 즉 인간의 존재성과 수 천 년에 이르는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이 두뇌와 어떤 긴밀한 조응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성찰에서 시작되고 있다. 종교개혁에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강화를 말한‘막스 베버’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에 한 시대의 위치를 점유한‘헤겔’과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여느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뛰어넘으며, 신경생리학, 정신의학의 경험적이고 이론적 기반의 고찰까지 아우르는 이 위대한 저작은 아마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적 걸작이 될 것이라 감히 예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용되고 검토되는, 방대하고 면밀한 지적 통섭은 물론, 이로부터 규명하려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현상학적 분석은 가히 敬畏,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점, 아니 믿음은 우반구와 좌반구라는 두 개의 반구로 구성된 인간의 두뇌 작동으로 인간 세상의 문화적 현상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뇌 구조는 정신 경험의 본성에 대해서, 또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 뭔가 말해 준다는 것이며, 우리“경험의 상관 변수들이 두뇌 속에서 묶이고 조직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음이 밝혀진다면 인간 정신세계의 구조와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술은 우반구와 좌반구의 구조와 기능의 이해를 통해 각 반구가 경험하는 세계를 구분하고 바로 이 두 반구의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다. 이 두 개의 반구가 각기 어떤 기능들을 하는 것인지를 언어, 진리, 음악 등 그 발생학적, 생리학적, 철학적 탐색을 종횡하며 이루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적 성찰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화려한 지적 탐색을 통한 반구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랄 수 있는데, “우반구가 우선적으로‘새 자극’을 처리하고 일상적이거나 친숙한 것들은 좌반구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우린 그녀를 몇 마디 말로 온전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갸름한 얼굴이고 키가 크며, 쾌활하다고 한들 설명하려는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체험한 나는 그녀와 나사이의 관계라는 지식에 의존하여 그녀를 안다. 이처럼 나와 타자‘사이’의 관계에 의존하여 세계의 면모를 인식하는 것이 우반구이며, 키와 생김새와 같은 사실의 묘사라는 부분적인 지식들을 통해 짜깁기하여 추정하고 짐작하는 것이 좌반구이다. 여기서 우반구는 어떤 맥락속에서 세계를 인식하지만 좌반구는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을 인식한다. 이처럼 두 반구의 앎에 대한 방식은 완연히 다르다. 이러한 기능상의 구분이 현실의 세계에 어떻게 투영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찰은‘후설’의 정신현상학이나‘메를로 퐁티’의 “살아진 신체(lived body)"에서 심화되어 경험하는 신체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행하여 신체에 대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상이한 인식을 거듭 설명함으로써 두 반구의 상이한 존재론적 지위를 규명한다. 즉 여기서 좌반구의 추상성, 명료성, 범주화하려는 경향, 폐쇄성, 독단성, 체계화 경향, 일관성 등의 성향과 우반구의 묵시성, 현재성, 상호성, 포용성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구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저작의 본질적 논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반구가 항상 대칭적인 균형을 가지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대칭적이라는 통찰이다. 이 둘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투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 투쟁이 어떤 특정 비율에 의한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효율성이 높은 쪽에서 작업 전체를 맡으려는 승자독식 시스템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용적이며 포용적인 우반구와는 달리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좌반구가 우위를 누리게 될 경우 세상은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추상적이고 명시성을 중시하는 실용 중심의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이며, 우반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경우 협력과 공유, 공감, 생명력의 복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성격과 그들의 우위가 의미하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마치면, 우리 인간의 두뇌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경험 세계, 그 삶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인류 역사의 주요한 문화적 움직임에 따라 명쾌하게 제시하는데,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형성했는가?”하는 질문으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 산업혁명, 현대와 포스트모던 세계인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문화적, 정신적 전환시대들 마다의 시대의 본성과 두 반구간의 공존과 충돌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유형의 발견은 가히 인간 정신 통찰의 괄목할만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신체가 사물화 되고, 다시 우반구 우위, 즉 반구간의 평형이 이루어지면 감성과 상상력이 부활하고 새로움과 즐거움이 회복된다. 논리적 체계를 현상에 우선하여 모호성이나 모순을 거부하고 확실성과 정지상태를 달성하려한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구분되는 고대 그리스의 경우처럼 플라톤 이후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세계는 관념화되고 표상화되어 물질화되는, 생명과 공존 할 수 없는 분리와 해체로 이어지는 세상이 된다. 즉 획일화하고 명료화하고 신체를 거부하는 좌반구 우위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좌우반구의 우위의 결과는 르네상스라는 인간의 회복과 예술의 부흥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대두로 다시금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중심의 단순, 명료화, 개념화에 다시금 신체를 빼앗긴다. 이러한 반복은 산업혁명과 모더니즘이라는 자기 인식 과잉의 시대에 와서는 인간의 소외된 무기력을 양산하고 자아감각의 상실로 치닫는다.

한편, 이 두뇌와 세계현상의 동질적 상관관계의 서술에 동원되는 문학작품과 회화, 음악 등 예술의 비평적 해석은 그야말로 지적 성찬이며 주제읽기에 넘치는 덤이라 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들인 니체, 네르발, 달리,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베케트에서 발견되는 무관심과 공포, 불안과 지루함이 좌반구의 폐쇄된 거울 방에 갇혀 반복되어 증폭되는 인식의 과잉, 편집증적 정신의 양상임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우반구의 결함에서 나타나는 정신병적 소견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당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저자의 믿음이 하나의 문화 분석 방법으로 가치와 권위,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굳이 정리하려 한다면, 이 저작에서 규명한 좌반구의 성격을 그대로 나열하면 될 것이다.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말(語)중심의 사회이자, 조각난 부분에 열중이며, 그래서 명료성을 확인하려하고, 은유나 육화된 능력을 상실하고, 우반구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폐쇄될 수밖에 없는 자기 앎의 테두리에서 되돌이하는 지루함, 그래서 엄청난 자극과 충격이 아니면 자신을 확인 할 수 없는 곳, 은유나 미토스를 상실해서 정신적 물음에는 회피하는 세상, 기계적이며, 획득적이고 효용과 목표에만 염두를 두는 세계, 맥락이 박탈되다보니 조각의 순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계적으로 환원한 것이 세상의 모습인 줄 아는 허위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경험의 본성이 양분되어 있다는 이 저술의 논지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경험 형태에서 우반구의 우위를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외친 “두개의 영혼이여, 아아! 내 가슴에 깃들라”라는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우리의 세상은 불안과 물질적 경주를 종식하고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인식능력을 회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이 역사와 문화, 사회 분석적 통찰의 도구가 되고 시와 소설, 그림과 조각, 쇼팽과 바흐의 음악,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이 다시금 인간의 두뇌와 존재의 의미로 돌아와 나와 세계가 서로 조우하고 은유가 넘치는 감성의 사상이 되는 이 저작은 이 세기의 사상적, 문화적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철학서요, 신경과학서이자, 인류문화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위대한 역작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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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욘더 - Good-bye Yonder, 제4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김장환 지음 / 김영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사이에 우리 인간들은 아주 낯선 세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인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의식의 세계가 더 이상 무언가 전체적인 현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과 명료성을 요구하면서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모호하고 흐릿하며 선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실재의 세계는 무시하고 배제하면서부터 고작 자기가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는 한정된 지식의 단편들로 짜 맞추다보니 코끼리 코에 부엉이 눈을 하고 사자의 입을 한 얼굴과 같은 기이한 것을 창조라느니 상상력이라고 하면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마치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무지와 편협성, 편집증적 현상에 빠져있는 지금의 거침없는 세상의 모습 말이다. 


과연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이란 협소한 범주에서 이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정신과 마음이란 것이 내 몸을 떠나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나는 온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 감각을 통해 다가오는 세상은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교감과 전체성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사람들, 세상을 주도하는 힘은 신체는 사물이라고, 정신의 세계와 분리하고, 그래서 부품으로 대체 가능한 조립기계 정도로 치부하려 한다. 자꾸만 우리 인간에게서 생명성을 박탈하려고 한다.





배아 줄기세포를 통한 생명에 대한 교정적 간섭은 물론이거니와 실시간이라는 동시성을 구현하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이 융합하는 모바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과학기술 지상의 사유, 즉 합리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감성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간 마음의 세계는 쓰레기처럼 처리되고 있다. 소설 속‘욘더(Yonder)’의 세계는 그래서 분명 우리 인간 세상의 미래에 출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남긴 기억의 저장이 사후 사이버 공간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가상의 공간에서 실현되게 된다. 바이 앤 바이(by and by), 머지않은 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홀’의 아내‘이후’가 죽음의 고통을 회피하기위해 머리에 뒤집어쓰는 브로핀 헤드란 장치에서 나는 현실을 지우려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본다. 인간 정신의 승리, 자연의 섭리를 조작하고 통제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이 장치는 기술의 거침없는 추진을 통해‘브레인 다운로드’라는 인간 의식의 이식이 가능한 꿈의 기술로 표현되고, 급기야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 상에 구현되는 천국,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만족이 구현되어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가능"하다는 불멸의 공간, 욘더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신체와 분리되어 작동하는 정신의 존재에 동의할 수 없는 나는 소설의 결말에서야 겨우 화해 할 수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 부조리가 주는 고통이 이미 두려움인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죽음이 없는 불멸, 영원성이란 것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삶의 행복을, 아니 나아가 인간의 존재자로서의 의미에 어떤 것일 수 있을까하는 데에 이르면 아마 그것은 곧 존재하지 않음의 다른 의미 이상이 아닐까. 불멸을 쫒는 인간 군상들, 그래서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욘더의 세계로 향하기 위한 자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다시금 개념화와 물질화, 기계화에 몰두하는 오늘의 세계, 그칠줄 모르는 탐욕의 현실세계와의 교차를 본다. 


화자인 주인공 홀이 죽은 아내가 있는 불멸의 공간인 욘더로 향하기 위해 중개자를 찾아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타운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묘사에서 사물화의 극한을 치닫는 오늘의 정신세계를 거듭 확인케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신체의 기계화를 위해 소위 B.M.(Body Modification)이란 현상은 아마 현대인의 왜곡된 삶의 시선이 낳은 정신적 질환의 연장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신체통합 정체성 장애, 신체이형장애와 같은 질병으로서의 호칭은 기술지상의 오늘을 경계하는 장치로서 작가의 우려와 비판을 읽게 된다.

한편, 아내가 있는 세계로 가기위해서는 자살을 시도하고 자신과 아내의 의식이 이식된 욘더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사실 소설적 묘사임에도 사이버스페이스인 욘더의 생활 내용에서 내 사유가 끊임없이 거부하고 이탈하려고 했던 부분이 있는데, “몸이 없었다.(....) 의지가 있었다.”하는 것인데,  몸의 부존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존재라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적 사고, 즉 기계화, 사물화, 합리주의라는 오늘의 타락한 사유의 끈질긴 무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랄 수 있다. 더구나 “내 몸의 실체감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홀의 감각에 대한 동일성의 주장은 신체를 부인하는 앞 선 주장과 모순되고, “손톱으로 튀기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라든가, “재스민 향, 훌륭한 맛, 내 눈으로 확인”과 같은 신체의 감각에 대한 표현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신체를 잃어버린 소설 내내 비판되었던 물질화 기계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혼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자로서의 갈등도 잠깐 머물고 말게 하는 멋진 성찰의 구절이 등장하는데, 문득 홀이 욘더의 세계에서 어떤 것들이 없는 상태로서 “실존적인 우울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로서의 마음에 대한 깨달음인데, 결국 자라지 않는 그네들의 아이로부터 진행되지만 정지한 시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지, 즉 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라는 각성이다.  이에 더해 인간의 말이라는 불충분한 세상의 묘사에 불과한 기호, 바로 삶이 이 기호에 갇히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극히 왜곡되고 관념화되어 편협해져 있음을 총체적으로 해독해내고 있다.

오늘의 기술은 과학이라는 만능의 언어로 인간, 인간사회에 자신이 쏟아내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와 여파를 가져올지에 대해 어떠한 검토도 예측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오직 효용과 편익, 편리와 복지와 같은 긍정적 전망만 쏟아 놓는다. 그것이 인류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은 한번 적용되기 시작한 기술, 인간의 조작은 과거로 돌이킬 수가 없음을, 역행 불능의 현실에 대해 너무도 무감각해져있는 현대의 인간, 인간사회에 넓고 깊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생명을 팽개친 정신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신체를 멸실한 불멸의 삶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의 다른 이름임을 천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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