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아라베스크 -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퍼트리샤 햄플 지음, 정은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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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내 시선, 내 맘을 멈추게 하는, 내게 직접 어떤 것을 얘기하는 대상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발길을 붙잡아 채는, 내 고동을 멎게 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너무도 급속하게 달려가는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느라 내 초조해진 육체가 이런 정신적 경험에 노출 될 여지조차 없었던 때문일 것이지만, 왠지 관조(觀照)라는 여유의 언어가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듯이 한가함과 쌍둥이인 은밀함, 관능성에 대한 위선적 거부의 습관에 절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멈추어서 응시하게 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붙잡는 그 미지의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까마득한 매혹의 순간,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그것, 그런 상황에 돌연 서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작가‘퍼트리샤 햄플’은 20대의 젊은 시절, 약속 장소인‘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앙리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의 <어항 앞의 여인>앞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영원처럼 서있었던 영혼의 전환적 순간을 얘기한다.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테이블에 손을 괴고 어항 속 금붕어를 응시하는 여인, 그리고 그녀의 뒤에 푸른색 아라베스크 문양의 스크린이 있을 뿐인 그다지 관심을 이끌 요소가 없어 보이는, 마티스의 명성을 얻은 작품 군에 속하지도 못하는 그런 그림에도 불구하고.
응시를 버리고 힐끗 보기에 자리를 양보한 현대인의 시선과는 자못 괴리된 한가함, 이국적인 스크린 뒤에 펼쳐질 상상의 방,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색채의 본질성을 굳게 믿었던 화가의 신성한 빛을 향한 여정, 특히 이국적 나른함이 물씬 풍기는 ‘오달리스크’들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여행, 영혼의 여행과 잇닿는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한 것일 터이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란 것이 그렇던가.  햄플에게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며 살도록 영감을 준 마티스는 인생의 은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녀를 붙잡아 주었으니 어항과 어항 속 금붕어, 어항을 바라보는 여인, 푸른 아라베스크 스크린이 어울린 바로 그 구조의 그림은 신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에 하렘의 여자들 - 오달리스크 - 을 그린 마티스의 그림은 무려 50점이나 된다.  서구인들의 눈에 동양의 신비스러움, 이국적 관능의 향기를 물씬 안겨준 오달리스크는 진정 어떠한 의미였을까? 그리고 마티스에게는 또 어떠한 것이었을까? 마티스의 오달리스크의 연원은 그보다 1세기 앞서 하렘과의 짧은 만남에 황홀경에 취해 사악한 오리엔탈리즘을 번득였던 ‘들라크루아’의 오달리스크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작‘레이디 메리’의 터키여인들과의 욕장의 단상에서 심상을 얻어 서구인의 식민지적 왜곡을 덧씌운‘앵그르’의 몽상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은 이들처럼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고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보는 행위를 그리는 그림”, 즉 재현된 게 아닌 창조된 세계, 자신의 정신에 대한 것이 되려는, 인지와 의식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계를 짓는다. 마티스에게 오달리스크는 한가함의 미학, 삶의 관조, 오랜 노동 뒤의 안식, 아름다움에 대한 꿈, 사치와 노동자의 자긍심과의 연계...그러한 것들이었다.

햄플의 에세이는 오달리스크들을 쫒아 잠시 동양을 서성인다. 중동지역의 관광여행, 관광여행의 속성이란 살짝은 가벼운 식민주의 아니런가? 공허하며 서성대고 하는 일 없이 종일 킁킁대고 돌아다니고, 별나고 맛난 것, 노천카페에서 거피를 마시고 무지한 눈빛을 하고는 미지의 땅에서 흘끗 본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  “소비의 쿵쿵대는 형판(型版) 아래에서 인간의 욕망의 마그마는 계속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왠지 은밀하고 속물적인, 흘끗 보기 속의 덧없는 순간 같은 경박함이 느껴지지만, 바로 이 편안한 겉핥기 관광이 스케치와 기록의 기술을 창출했으며, 이것은 내밀한 자아의 고통을 지탱하는 형식의 기술이라고 연결 짓는다.

1920년부터 1905년 <살롱도톤>에서‘야수’로 불리기 시작한 마티스는 소위 야수파의 영지‘폴리우르’, 프랑스 남부의 어촌인‘카시스’를 그의 영원한 예술 공간으로 삼는데, 그 지중해 빛, 낭만적 태고의 시원을 간직 한 곳, 이국의 꿈을 지닌 비현실적 땅이어서 그랬던지, ‘스콧 피츠제랄드’, ‘캐서린 맨스필드’부터, 일종의 문화그룹이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E.M.포스터’, ‘존 메이나드 케인즈’,‘로저 프라이’,‘버네사 벨’등 오늘날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문인, 사상가, 경제학자, 화가들의 무대로서 조명되고, 소녀시절의 기억을 다리 삼아  동네친구의 엄마였던‘도리스’라는 여인이 건네준‘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와 <서간집>, 그리고 실험영화인이자 거부(巨富)였던 ‘제임스 힐’의 <필름 포트레이트>라는 영화의 개인적 교감에 대한 추억들의 에피소드들을 정말 무심한 즐거움으로 묘사한다.

    

맨스필드의 “자신의 영혼을 발가벗길 수 있었던 사심없는 권위의 글쓰기”와 그녀의 자유분방함,‘버지니아 울프’가 “싸구려에 냉혹하고...파렴치하다.”고 편지글에 남겼던 맨스필드의 인상부터, 결핵으로 단명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유’시대에 걸린 진단 미확정의 임질”이 죽음의 원인일 것이라고 발칙한 소문도 살짝 퍼뜨린다. “레몬 빛 태양이 내리쬐는 방통의 빌라, 이졸라 벨라”에서의 맨스필드는 마티스의 태양과 신선한 빛과 조우한다. 색채와 빛, 에로티시즘과 오달리스크, 프랑스 남부를 맴돌며 예술의 창조성에 응시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오달리스크, 서양인들의 오만방자한 동양의 왜곡과 서구인의 하렘 바라보기를 뒤집어 놓는다. 오달리스크는 ‘방’,‘학교’의 뜻을 가진 터키어 오다(oda)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를 서양인들이 열을 올리며 상상하는 모든 성 노예의 이미지로 둔갑시켜 ‘타락’,‘순결을 잃다’와 같은 탐욕스러운 상상의 산물로 뒤바꿔 놓았음을‘바이런’, ‘제임스 조이스’까지 일조하며, 마침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유한여성, 첩으로 왜곡시켜 버리는 여정을 추적한다. 또한 유럽인이 하렘의 여인들을 구속된 성적 노예라는 음탕함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처럼, 코르셋을 입은 유럽인을 바라보는 터키의 여자들이 영국 여자들의 예속, 새장 속의 새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관찰자의 시선에 따른 역전을 보여준다.

새장 속의 새, 어항 속의 금붕어, 하렘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은 그런 것이었다는 점은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속 여인의 응시는 오히려 서구인의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인식의 촉구가 아니었을까? 기억과 기록, 여행의 여정, 에세이의 종착지는 마티스의 마지막을 지켰던 젊은 간호학교 학생이었던‘모니카 브루주아’, 훗날 ‘자크-마리’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예술적 혼이 배어있는 ‘로사리오 예배당’을 지키며,  마티스적인 얼굴을 한 그녀와의 만남은 허구의 공간을 맴돌던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을 순간, 현실로 돌려놓는다. 소설 같은, 회화와 문학을 오가는 햄플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녀처럼 성스런 무심함에 젖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을 그린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예술적 향취 그득한 에세이는 소소한 지적 즐거움과 함께, 아름다움, 열정, 재능,  묵상적 삶의 정수, 인생의 이미지들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힐끗 보는 경박한 삶과 세계가 아니라 햄플이 기대하는 인생,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 혼자 남겨져 끝나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것, 이따금 몇 분씩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 세계를 응시해 거기서 지나가는 이미지의 문장을 만드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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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항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오달리스크'의 원뜻이 저렇게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변질된 의미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보려면 그림에 대한 일정정도의 상식을 갖춰야 할 것 같은데요.

비의식 2011-03-05 09:32   좋아요 0 | URL
마티스의 그림이 플롯의 중심이긴 하지만 그림의 해독이나 작가의 일화보다는 <어항 앞의 여인>의 '응시'라는 관조의 모습이 시발점이 되어 삶의 진정한 미덕에 대해 문학,영화,문화적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과 추억들을 통해 더듬어보는 에세이에요. 그러나 그림에 대한 일정한 상식의 전제를 요구하는 책은 아니랍니다.
 
피터 드러커 강의 - 세기를 뛰어넘은 위대한 통찰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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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하면‘피터 드러커’를 떠올릴 정도로 그를 배제하고는 기업과 조직의 경영에 대해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의 시대에 따른 관심과 통찰의 결과물들 탓이긴 하겠지만 어떤 세대는 그의 경영학 일반에 대한 지혜에, 또 어떤 세대는 조직이론에, 그리고 자기계발의 조언에, 생태환경과 미래의 전망과 같이 조금씩은 다른 측면에서 접하고,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저작은 그의 이러한 각기 다른 시대적 통찰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여 그의 경영학 사상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조망하게 돕는다는 점에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 10년을 한 개의 장으로 하여 지금까지 미발표된 중요강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조각난 단편으로만 이해되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사상적 기반의 변화나 관점이 어떻게 심화되고 있는지, 또한 경영환경이나 기술의 변화와 같은 시대환경을 읽어내는 그의 통찰력과 이의 결과로서 제시하는 역량과 방법론들에 대한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된다.

특히 경영 관리자들, 최고 경영자들, 행정 관리자들을 향한 조언들은 급변하는 기업환경, 정치사회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에도 변치 않는 아주 중요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데, 기본의 중대성을 역설하고 본질을 꿰뚫고 있는 주의 깊고 세심한 관찰력, 그의 겸손한 말처럼 “예측하는 대신에 그냥 창밖을 본다.”는 탐구심, 바로 세상에 대한 열렬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학자로서 초창기에 해당하는 1940~50년대의 강의에서는 비교적 원론적이고 기원적인 관심을 볼 수 있는데, 19세기 인간 실존문제의 해결 되지 못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생명보험’이 탄생하였다거나, 신화에 대한 현실성과 기초적 경험으로서의 인식을 통해 ‘조직된 집단’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해나 인간 개인의 출현, 그 존재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후 그의 거대기업에서의 경영조직이론이나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입장을 구성하는 사상적 뿌리, 신념을 알게 해준다.

또한 수천 년 전 물의 공급 조절이라는 복합적이고 공학적인 시설의 건설인 관개(灌漑)문명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적인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과 기관들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기술적 성취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며, 기술적 성취에 지배를 받는다”는 기술 혁명의 교훈을 일러준다. 그리고 단지 이러한 기술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필요와 능력을 갖춘 제도의 개발이라는 문제를 넘어, 이의 결과로서 야기되는 보다 큰 문제로서 우리가“믿고 있는 가치를 구현하도록 보장하고 우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보장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과 목적에 봉사하도록 보장하는 과제들”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함을 지적하는 곳에 이르면, 오늘의 기술전능의 사고가 결여하고 있으며, 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50년 전의 그의 성찰에 절로 겸허해지게 된다.

이러한 드러커의 경영철학이 말하는 것을 경청하다보면 기본에의 충실, 근원적인 자기 성찰이 굳건한 사상적 골조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발표되고 있을 때 그 새로움에 대처하는 능력을 미처 갖추지 못해 우리는 혼란에 휩쓸리고 좌충우돌하지만,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교훈은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가 한 예를 들고 있는데, 해부학자가 인간의 해골을 꼼꼼히 연구하는 행위의 중요성으로 1680년 이래 뼈가 변한 건 없다는 것이다. 뼈가 추가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직들을 한번 둘러보면 기본이 부실해서 저지르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필요도 없는 수레바퀴를 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기본적인 가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가정이 포함하고 있는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교훈은 우리가 처한 경영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드러커의 이 미발표(단지 출간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임) 강의내용 중 어느 것도 인상 깊지 않은 것은 없지만, 비대해진 거대기업의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한 것이나, 정보사회에 이른 오늘의 정보에 기초한 조직에 대한 조언, 그리고 지식을 관리하는 법은 조직을 떠나서 생각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정독해야 할 만큼 끈질기게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수 일 전에 나는 모 대학의 이사장이 자신의 조직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를 묵묵히 들어주어야 했는데, 자기는 모든 것을 열심히 잘하고 있지만, 조직이 자기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규모가 비대해지면 복잡성이 점증할 수밖에 없다. 작은 조직에서는 의사소통이랄 것도 없다. 한 밧줄을 끌고 있으니 목적도 힘의 방향도 다를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이 다르고 전문성 또한 다른 여러 조직으로 분할 된 거대 조직에서 마찰이 가득하고 문제가 유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경영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고작 그가 하는 말은 조직을 뭔가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더구나 조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다. 이것이 아마 자본만 있으면 경영자 행세를 하려는 한국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구성원 개개인의 이해에서 시작하여 사람을 바꾸고, 보상(처벌)체계를 개선하는 것이 유연하고 역동적인 조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경영자가 태반이라는 얘기이다. 아마도 오늘의 대다수의 기업이나 조직들은 지식노동자로 구성되어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모두 각자 다른 지식작업을 하지만 하나의 공통된 가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조직’, 피아노, 바이올린, 호른, 등등 전문가들로 모여 있고, 계층은 극히 단순하지만 하나의 조화로운 연주를 만들어 낸다. 오늘의 조직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외에도 환경, 인구구조, 교육, 세계화, 비영리조직 등 이 시대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구성 인자들에 대한 귀중한 지침들, 조언들, 경영학적 성찰들, 미래의 예견들을 충실하게 들려주고 있다. 피터 드러커의 시대의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아니 세기를 관통하는 이 탁월한 통찰들은 정보의 선별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 결정적인 자원인 지식을 동원하는 능력이 생존을 가늠하는 오늘에 그 기본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고 있다 하겠다. 드러커를, ‘경영’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기본서라 하여도 결코 허영이라 아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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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 광狂, 폭暴 -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들의 기행
천란 엮음, 정영선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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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秦나라 영호해부터 明나라 희종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서 기행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20인의 왕과 황제들의 면모를 시시콜콜 엮은 책이라 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국가의 지존인 이들인 만큼 그네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과 일상, 또는 성향과 기질에 국가의 존폐를 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다만, 수록된 20명의 제왕들의 기괴한 면면과 관련하여 만들어 진 성어(成語)를 비롯하여 시(詩)와 사(詞), 회화는 물론 상업문물 등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다채로운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은 무성하여 일종의 문화사로서 이해하기에는 그 정보의 양이 풍성하다 할 수 있다.

일례로 수(隨)나라의 멸망을‘양제’의 호색(好色)과‘겉치레 공정’과 같은 개인적인 사치성향과 성적 탐닉과 결부시키고 있지만 이는 역사를 극단적으로 편협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 원정의 실패나 대운하 건설과 같은 국가재정 및 백성의 피폐를 야기한 결정적인 사건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집중된 일인지하의 통치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료와 제도, 국제질서 등 대내외 정치경제환경을 배제하고서는 역사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폭넓은 역사인식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엮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신뢰하기에는 부족하다.

성적 욕망과 폭력성 및 광기는 그 기원의 동일성을 말하는 서구문화처럼 동양에서도 그 기질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보면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굳이 회피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개되고 있는 제왕들의 기벽을 보면 대개는 이 세 가지는 거의 일체화되어 따라다닌다. 5세기 남송(南宋)의 폐제 유자업의 경우, 누이, 고모와 근친상간를 벌이는 광적이기조차 한 방탕, 음란함은 물론이고 사람 죽이는 것이 일종의 유희(遊戱)였다고 하니 삼위일체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특히 남송이란 나라의 경우를 보면 제위에 오른 유씨들이 모두 병적이고 괴팍한 난폭성으로 모두 신하들이나 자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유전적 기질의 연구에 대한 어떤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느껴진다.

색(色)은 본성이고 인간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문화적 영감을 탄생시킨 것을 우린 부인 할 수 없다. 폭력과 공포라는 色의 한 특징에서 그 본질을 탐색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움, 관능성, 미적 예술성이란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다. 6세기 진(陳)나라 후주 진숙보에게서 볼 수 있는데, 비록 정치적으로는 무능함을 떨쳐낼 수 없지만 그가 총애하였던 귀비(貴妃) 장려화에 대한 극찬, 그래서 「옥수후정화」라는 詩까지 전해져 오니, 그 나라 백성이야 안타깝지만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色의 그 절묘한 본성을 풍성하게 음미하도록 해주지도 않는가? 이러한 예술가 기질이 뛰어난 황제로는 12세기 송(宋)나라 휘종을 또한 들 수 있는데, 음악과 회화, 서화집의 편찬 등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당대에는 예술이란 경망스러움과 천박함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의 예술과 색의 지나침은 역시 국가의 쇠망으로 이어졌다하니 애석하다.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권력의 한 복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편 당(唐)나라 희종, 일명 환관들이 추대한 황제라는 의미에서‘문생천자’로 불린 이현을 통해 내관이 통치하는 나라에 불과했던 이웃에게 우리의 삼국이 지리멸렬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역사로 다가온다. 황제의 정치참여를 배제하기 위해 어린 황제의 등극을 도모했던 당의 권력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그들의 황제였다는 것인데, 결국 이들은 색(色)에 둘러싸여, 쾌락과 유유자적만을 위해 존재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제의(祭儀)의 희생양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五大十國(5대10국)의 분열이 시작되었다니 사실 황제의 색광폭(色狂暴)이 국가의 멸망이나 분열을 초래했다기보다는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환관정치의 비뚤어진 권력의 탐욕이 야기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어째든 BC 1세기의 한(漢)나라 성제의 육욕에 대한 탐닉역시 국가 멸망의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온유향(溫柔鄕: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 또는 미인의 처소, 미인의 부드러운 살결을 이르는 말)’, 그가 사랑했던 합덕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니 이승의 복은 모두 누리고 간사람 아닐까? 중국 제왕들의 내밀한 기록을 통해 엿보는 역사의 일면은 그자체로 재미있는 소재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하나쯤 은밀한 야설을 제법 멋스럽게 전달하기에 그만인 이야기들로 넘쳐나서 즐겁기도 할뿐더러, 틈틈이 인용되는 시와 사(詩詞)들의 풍미와 의외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들을 만날 수 있어 기대치 못한 지적 수확을 거둘수도 있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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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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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을 쫓는 측면에서 얘기하자면‘격차 사회’를 조성하고, 사회의 저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에 시달리는 오늘의 인간들, 사회의 보잘 것 없음을 어느 고급주택가에서 벌어지는 가족들의 히스테릭한 모습을 통해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계층의 차별화와 그 고착화를 위해 달려가는 사회를 격차사회라 부르는 모양이다. 여건이 되지 못하는데도 지니고 싶고, 오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글부글 끓어대는 속물적 갈망은 한국사회의 우리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의 묘미는 디테일, 즉 등장인물들마다의 심리와 행동,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가족 개체들만의 내면, 서로 다른 계층의 의식과 행위의 적나라한 포착에 있다고 하여야 할까.

‘히바리가오카’는 명문 사립학교들에 인접한 언덕길 위의 고급주택가의 이름이다. 또한 넓은 땅에 고급스럽게 지어진 양옥들이 들어선 이 주택가는 일종의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 기호이다. 이 지역에 진입하기만 하면 “나는 이런 곳에 사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믿게 되고 절로 걸 맞는 신분과 사회적 지위라는 사다리에 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곳의 자투리땅을 매입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생의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옹색한 면적의 땅을 구입하고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싸구려 주택을 지어 이사한 그 가족에게는 과연 행복의 웃음이 피어날까?
기대와는 달리 이 볼품없는 가족은 불란(不亂)이 그칠 날이 없다. 계집아이의 사립중학교 입학 실패는 콤플렉스가 되어 가족 갈등의 근원이 된다. 엄마에게 ‘당신’이니, ‘그쪽’이니, 아빠에게는 “아저씨는 빠지시지”라고 망발을 거침없이 내뱉는 아이의 폭력적 모습은 읽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울화가 치미는데, 아마 내 옆에 있었다면 싸대기를 올려 부쳐도 한참을 그랬을 것이다. 정말 인내가 필요할 만큼 못된 계집아이가 있다. 

사건은 이 점잖은 고급주택가의 정적을 깨는 계집아이 ‘아야카’의 천박한 소란과는 달리 이 보잘것없는 가족과 마주보는 고급저택에 사는 엘리트 의사와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자식들, 현숙한 아내로 구성된 가정에서 들려온 단 한차례의 고성에서 시작된다. 한없이 고상한 부인 같았던 의사의 아내가 남편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 것인데, 직접 신고하고 살인 당사자임을 진술했다는 것이다. 상류 계층의 상징인 동네의 명성을 둘러싸고, 게다가 사건의 진실에 대한 입방아는 물론이고, 사건 당사자의 자식들, 친척들에게 까지 죄의식을 뒤집어씌우는 악의적이고 치졸한 군중들의 언어폭력, 또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못난 계집아이처럼 “교만한 마음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모습은 더 없이 오늘의 추악한 인간들의 면모를 뚜렷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주택가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의 탈을 쓴 부잣집 사모님”의 주제넘은 오지랖에서, 그 대단함의 위세란 것이 무지하고, 하찮으며 천박한 속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가하면, 허영과 허위의식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온통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무리들의 구차한 의식이 다시금 까발려 진다. 자신들이 기를 쓰고 축조한 욕망이란 탑이 한 없이 부실하고 불완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발밑부터 허물어져 내릴 그 조악한 세상의 실체를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상류와 하류로 구분하고 욕망조차 차별 짓는 세상 둘 다  한 번에 굽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관람차의 설치를 기대하는 사내아이, ‘신지’의 격차 없는 세상의 공존에 대한 희구는 왠지 더욱 간절한 진정함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변덕스럽고 모순적이며 양면적인 심리들을 공감 할 수 있는 언어화하여 들려주는 작가의 역량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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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02 - 김사과 소설집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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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매장」이란 단편에는, 지도로만 이루어진 한 권의 책, “잡지이자, 여행기이자 소설이며(....)일기이자 사진이며 백과사전이 될 그러한 책, 그것은 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이상해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눈이 머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는 주인공‘나’와 ‘y'의 기획이 있는데,  ‘김사과’의 작품들에 대한 한 문장의 정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위가 상하는 무심한 살인과 흐르는 피, 그리고 도시와 세상을 향한, 인간인 자신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퍼붓는 증오와 분노는 낯선 괴이함이다. 다만 우린 이토록 이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겨운 공포 아닌 공포, 고통 아닌 고통과 함께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소설은 이러한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이며, 그 실체를 깨닫는 순간, 바로 그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에 내닫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타율성에 길들지 않으면, 사회가 요구하는 얽매임에 종속되지 않으면 결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구속적 삶의 존재가 감수해야하는 고통을 벗어나는 것, 즉 완전한 해방이란 것, 그것을 알아버리면 동공이 부채살처럼 확대되고 떡 벌이진 입과 같은 형상을 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평소에는 잊고 지내는 그 공포.

다리미로 민 것 같은 얼굴, 실리콘이 박힌 얼굴, “분홍색 푸들”처럼 하고선 뒤뚱거리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래 사실은 별 감흥조차 없지만, 잔잔한 멀미와 비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다.
물질의 풍요, 기계적 편의성, 신체를 한낱 부품정도로 이해하는 인간들에게서 진정“무지는 행복의 충분조건”임을 확신케 한다. “심지어 자신이 행복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괴물들은 “무지가 모든 오류의 충분조건”이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말이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여기서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고 싶은 충동이 왜 안 일겠는가? 소설 속 인물들의 정신 분열적인 심리와 행동들, 그 가학적이고 충동적인 폭력과 살인은 그 자체로서도 진실이지만, 반대 방향, 즉 오늘의 인간무리들이 보이는 작태 또한 정신병자이기는 매한가지 일 것이다.

차바퀴에 손이 깔려 엎어진 노파의 구원을 무시하고 지갑 속 돈을 훔쳐내곤 살해하여 상자에 구겨 넣고는 “이미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늙어빠진 할머니”이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잖아요?”하는 항변이나 그래서 그건 거의 살인도 아닌 것이고, 거의 살인이니까 정말 살인은 아닌 거라는 주장은 세상에 대한 그 증오의 강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데, 좁은 골목길의 버려진듯한 국밥집 여주인을 칼을 휘둘러 살해하는 순간 발기한 자신을 깨닫는 소름끼치는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가 난 자신의 감정에만 귀 기울이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오늘의, 한국사회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래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로 해 왔”으며,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 것이 ‘나’이니 내가 가책을 느낄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역설의 역설만큼 수록된 8편의 소설은 잔인하게 이 사회를 후려치고 있다. 아니 천연덕스러운 냉혹함으로, 그러나 명료한 사회분석적 통찰을 안고 말이다.

뉴욕의 어느 한 구석을 닮아가려는 그 머저리 같은 지향성의 도시, 서울, 그리고 그 속의 인간들, 과연 그 끝은 어디인지 알고는 있기나 한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는 것인지...그녀의 진단처럼 우리가 빠져나갈 그 어떤 구멍도 없다는 절망감은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역겨운 장치들을 거부하는 발작적 증상, 바로 정신분열의 상태로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그녀의 前作 장편『풀이 눕는다』에서 말하고자 했던 세상의 추레함과 비루함, 그리고 삶의 흉물스러움 대한 도발의 생생한 모습들을 이 작품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내겐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하겠다. 김사과에 자꾸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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