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로부터의 자유 - 행복과 성공을 부르는 공간 창조법
브룩스 팔머 지음, 허수진 옮김 / 초록물고기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집안의 여기저기에 처박힌 그야말로 잡동사니, 아니 쓰레기 같은 것들을 치우는데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자는 지극히 단순한 의도로 집어든 책이다. 그러나 이게 그리 단순한 잡동사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혹스러움에 직면하게 된다. 잡동사니는 우리의 내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모습이 외부에 표출된 모습, 행동양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당돌한 주장에 다소의 저항감을 가지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방어심리를 가지고 읽어나갔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무슨 필요한 물건 좀 소유하고 있기로서니, 그리고 거의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는 나 같은 부류에게는 결코 소용에 닿는 말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말이다.

물론 오늘의 물질사회가 지니는 속성, 그 영역에서 생존하는 존재이기에 물질의 소유에 전혀 무감하다거나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하는 성자가 아닌 한 물질의 적정한 소유와 필요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물질 그 자체의 소유에 혈안이 된, 또한 물질을 팔아대기 위해 무진장 쏟아내는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광고의 환상과 거짓에 기만당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종 물건들을 도처에 쌓아둬서 사용치 않고“쓰레기 사탑, 무용지물 타워, 엉망진창 신전, 뒤죽박죽 언덕을” 만들고 있거나 틈틈이 창고나 이 방 저 방에 처박아 둔 것도 아니니 나는 잡동사니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준과는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 방어체계가 읽어 나갈수록 허물어진다. 내 마음 속 진정한 것을 들여다보게 하는데,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어떤 내면적 잡동사니가 혹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이 지금 책상서랍, 기타 수납공간, 아니 책장, 장롱, 창고, 차 트렁크 등에서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그것들이 집안 곳곳, 방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빈 공간을 잠식하는데도 내 잠재된 의식의 어느 곳에서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방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저작은 물질의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의 통념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과 삶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을 피폐한 물질주의 환경에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그래서 그 물질들의 더미에 싸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를 오직 물질 축적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헛되고 일시적일 밖에 없는 그 한시적 마취상태, 불행의 악순환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건이 행복과 안정의 보증수표나 되는 양” 온통 물질에 취해있고 사방에서 경제, 정치, 문화적 논리를 들이대면서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그 물건들이 우리들의 인생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주기는 하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이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고작 과시하려하지만 자기 인생에 바쁜 인간들이 남의 과시에 눈 돌릴 틈은 없다. 그리고 그 물건의 소유가 과연 행복을 지속시켜 주는가하면 손에 넣는 순간, 아니 집에 들여놓는 순간 진부해지고 매력을 상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 처박아둔다. 다시금 공허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행복이라는 감정에 보상을 하기 위해 물질을 손에 넣지만 이 역시 해결되지 않는 욕망의 허기짐에 대한 확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비싼 값을 치러서, 고급 브랜드라서, 소유 그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서, 추억과 사연, 체취가 묻어있는 것이라서, 이 정체모를 욕망의 기운 탓에 처분을 겁낸다. 더구나 아무리“하찮은 것이라도 소유 자체가 의미 있다”고, 그것이 미덕이라고 터무니없는 환상을 배워왔으니 사실 개인의 의식을 탓할 것도 못 된다. 그렇다고 계속 쌓아두고 처박아서 방치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잡동사니가 되고 만 것들을 처분하여야만 하는 것일까? 처분하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일까? 버린다는 참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어떤 뜻이 내재하는 것일까?
혹, 그 잡동사니에는 무언가 감추고 싶은 두렵고 나약한 감정이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내 현재와 미래를 막아서는 어떤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내면을 허약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뿌리들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마음의 잡동사니들, 강박관념, 혼동, 분열, 서툰 언어, 불면증, 우유부단, 방향상실,,.이러한 것들. 바로 가혹한 목표치, 타인으로부터 배워 모방한 이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가치의 충족, 부정적인 언어들, 미래에 대한 불확실과 그 근심과 걱정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계속해서 누르고 있어야 집어넣을 수 있는 그 엄청난 힘을 요구하듯이 끊임없이 물건의 형태로 탈출하게 하고 우리의 관심을 일시적으로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내면의 본질적 감정을 회피하고 진정의 가치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게다. 인생에 조건을 다는 이러한 가치들이 잡동사니일 뿐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결코 미래에, 이상에, 남의 시선에 묶여 현재를 만끽하지 못하고 진실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스스로를 위장하는 물건에 집착한다.  

결국 치워버려야 할 잡동사니들, 진정 내 눈길을 애원하며, 주목을 끄는 물건이 아닌 것들, 지금의 내 인생에 결코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 아닌 것들은 잡동사니이다. 즉, “회피하고 싶은 내면적 감정이나 가치에서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며, 표면적 생활공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잡동사니이니, 우리의 내면을 옥죄며, 인생에 장애를 걸쳐놓는 이것들을 치워버려야 하는 당위성은 정말 중대한 것이 된다. 그러니 깔끔하게 정리된 내 책상과 서재와 방과 창고가 잡동사니가 아닌 것이 아니며, 더구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과거의 유물들이 내가 은폐하고 있는 내면임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제라도 내던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치쌓인 책 더미들, 잠자고 있는 무수한 사진들, 사용하게 될 까닭이 없는 서류뭉치들, 옷가지들, 전자제품들... 이젠 치워야 할 것 같다. 그것들이 내게 무엇인지 알게 된 이상, 본질을 뒤덮고 있는 감정의 껍질을 벗겨내야 할 터이다. 더 이상 내게 벌을 줄 필요도, 고통에 담금질을 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물건은 내가 아니다. 결코 나 일 수 없는, 신성한 바로 나의 현존을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지니는 의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그럼에도 사실 막상 수집한 내 소유의 물건들을 처분하려면, 물질의 집착을 버리려면 심리적 저항이 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막강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을 느낀다. 그 실체를 진중하게 살펴보면 그 속에 해결되어야 할 내면의 잡동사니가 보인다. 그 내면의 잡동사니가 불러 모은 외면의 잡동사니는 한결 버리기 쉬워진다.
진정한 삶의 가치, 내면을 일깨워주는, 물질로부터, 소유로부터의 탈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고마운 저작이다. 내 마음의 잡동사니들이여 안녕, 물질들이여 안녕~ 소박하고 단순한 인생이 삶을 얼마나 명쾌하고 행복하게 해주는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꿔주는 지혜가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랫폼
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미셸 우엘벡’이 초지일관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이상향이 있다. 그는 새로운 경쟁과 그칠 줄 모르는 물욕이라고는 없는 새로운 인종, 신인류가 꾸려가는 평화와 자유가 넘치는 미래세계를 희구하는『소립자』같은 작품에 이르기도 했으니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오늘의 인간사회에 지닌 회의와 역겨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역시 오늘의 서구물질사회가 안고 있는, 나아가 서구화를 맹목으로 지향하는 한국과 같은 사회가 받들고 있는 합리적 이성주의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의견, 취향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포함한 삶의 모든 방식들에 완벽한 표준화를 보장해준 돈에 대한 열정, 그래서 냉정해지고, 지나치게 개인의 존재와 권리에 집착하며,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 같은 것을 강요하고, 그에 열중하며, 마침내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한없이 비안간적이고 잔인해지는 오늘의 사회를, 그 치부들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비웃어댄다.

이런 연유에서 그의 소설은 오늘의 인간들이 위선 속에 은폐시킨 것들을 여과 없이 꺼내들고 마음껏 떠들어댄다. 인종에 대한 속내, 자신의 종교에 대한 편협성, 성적 취향 등까지 마구 쏟아낸다. 나 개인이 싫어하고 짜증나고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을 왜 말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는 오늘의 권위적 담론이 덮고 있는 억압의 기만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누군가인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는 냉정한 합리성이라는 척도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그래서 이를 거대한 규범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그 틀 안에 가두어두려는 사회의 암묵적 통념과 가치관, 윤리의식을 깨부수고자 하는 적극적인 저항 수단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소설 『플랫폼』에는 극사실적이고 과감한 성적묘사가 주제를 연결하는 문장이라 할 정도로 빈번하게 그러면서도 평범하게 이야기의 중심 틀을 구성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문화부 공무원인 ‘미셸’, 그리고 여행사와 호텔 간부인 ‘발레리’인데, 두 사람의 감각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 세상이 가야할 길을 상징함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현대사회의 속성과 절묘하게 대비되는 요소로 이 작품에서 비켜나갈 수 없는 핵심장치이다.
살갗이 직접 부딪히는 섹슈얼리티, 그러나 점점 이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의 정신작용과 행동양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기도 하며, 인간의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 남아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현대의 도시인들이 “이제 무엇이건 교환하고 싶은 욕망도 안 느끼고”, 또한 멘탈리티(mentality)에 맞지도 않게 된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 것, 자신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나르시시즘, 개인성의 강화된 느낌에 침몰되어가는 자본주의 물질사회, 끝도 없이 멈추는 것은 곧 종말이라는 삭막한 형식에서 어쩔 수 없이 출현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제각기 유일한 자기만의 감각들에 흠뻑 빠져 자기 살갗 속에 갇혀”지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세상을 보는 오늘의 사람들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타인과 일체화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고통을 찾고 잔혹해진다. 200여 년 전 꼭‘사드’가 한 말처럼 되어버렸는데, 혹여 우엘벡의 작품이 21세기 판 사드의 계보에 잇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 서로의 살갗을 부딪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저 유혹하고 과시하는 자기도취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그래서 사디스트들인 현대인들은 SM처럼 “모두가 장갑을 끼고 도구를 사용”하며, “결코 살과 살이 맞닿는 일도, 키스나 가벼운 스침, 애무도 없”는 “정확히 섹슈얼리티에 반하는” 행동 양식을 창안했을 것이다. 정확한 규칙과 선행적 합의가 되어 있는 순전히 지적인 세계의 역겨움 속으로. 그래서 이러한 피부 접촉이 없는 이상한 변태행위에 역겨워하는 나는 진정 성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정상인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그저 권태로운 삶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미셸을 스스로에게 회의적인 모습이 좋아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는 완벽한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인물들이다. 판에 박힌 관료 생활에 익숙한 미셸과는 달리 발레리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소위 잘나가는 워킹우먼이다. 그러나 그녀의 선량한 성품과 타인의 즐거움을 우선 배려하는 태도는 일종의 냉정한 현실주의에 종속된 요즘의 여성들과 다르기만 하다. 따라서 그녀는 섹슈얼리티의 근본을 상실한 SM을 싫어하는 지극히 성적이며 동물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른다.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는 쿠바의 푸른 바닷가, 그리고 태국의 매혹 넘치는 클럽 등에서 벌어지는 정사는 그 자체 그대로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이요 행복을 확인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의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론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에서 다른 무엇이 있는가를 진실 되게 고민해보면 그 답변은 그리 쓸만한 게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반증될 것이다.

사실 부분마다에서 비틀린 우엘벡의 시선이 제어되지 않은 채 극단을 치닫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서구 백인들의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지역서 벌이는 성적탐닉을 위한 만연한 관광이 마치 서구사회의 현대화가 만들어낸 건조하고 개인화된 세계를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제3세계의 순진한 관능을 찾는 보상심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더해 이슬람에 대해서는 “일신론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해집니다. 이슬람은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일신론을 강요”하고 있다면서,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구나 미셸의 연인, 발레리를 이슬람 테러범들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하여 그 증오심을 확인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그의 주장처럼 내 생각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식의 항변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발휘정도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개인의 행복을 도저히 보장 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상,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자주 의심이 생겨나는 것에 대한 그 근원을 드러내고 대안을 찾는 진심의 여정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물적 과시에 몰입하고 있는 현대인들, 근본주의적 교조적인 종교와 정치사상이 뿜어내는 광기, 이것에 휘둘려 성과 종족보존의 본능마저 이탈케 하는 현대사회는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녀의 육체가 내 몸 아래에서 전율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나는 종종 모든 악이 소멸된,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의식세계에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 (中略) 유보된 순간, 평안과 격동을 조장하는 신이 된 것 같은...”.... “이 몇 개월간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내가 행복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내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를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섹슈얼리티를 문학으로, 그리고 사회비평으로 마침내 철학으로 인도하는 그러면서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이 있는 그런 정말 기묘한 걸작이다. 우엘벡은 결코 그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루스트의 화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새로운 방법
유예진 지음, 유재길 감수 / 현암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보면 대체 이러한 묘사와 비유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는데, 많은 부분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예술역량을 쌓아갔는지, 특히나 프루스트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기까지 그리곤 마침내 완성하기까지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회화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조차 명화(名畵)속 한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라든가, 많은 소재들 또한 그림에서 차용된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호하게 여겨졌던 많은 구절들이 절로 선명해진다. 더구나 화자(話者)인‘마르셀’에게 예술적 영감은 물론 작가로서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인 인상파 화가 ‘엘스티르’가 ‘휘슬러, 모네, 르누아르, 마네’등의 이론이 혼합되어 구축된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마르셀의 예술론에 대한 지향점을 보다 명료하게 확인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 무엇보다 제 1권인 「스완네 집 쪽으로」를 펼치면 뒤죽박죽의 기억이 두서없이 전개되고 지루하게 긴 문장과 일관된 서사도 없어 아예 2권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질려버릴 정도로 곤혹스러운 독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 이 작품의 출간을 모든 출판사들이 거절하여 자비로 출판한 것이나, 출간되자마자 ‘개인적 인상의 나열이자 고작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예술과는 동떨어진 아무것도 아닌 시간 남아도는 사람들이 정말 시간을 잃어버리고 싶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 혹독한 비평처럼 낭패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권 「게르망트 쪽으로」,제4권「소돔과 고모라」등으로 이어지면 제법 사건같은 것이 발생해서 흥미를 만들기는 하지만 역시 여느 기성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과 내용 탓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제1권을 출간한 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머리로 사고해서 쓴 것이 아니라 책에 언급되는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저의 감수성에 의해 느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듯이 그의 오감에 의해 촉발된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어느 하나 극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기억들이 아닌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읽어내기가 만만찮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지만, 이 작품의 대부분이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예술은 회화, 즉 화가에 의한 회화감상법으로 이것이 곧 작가를 꿈꾸는 마르셀이 추구하는 그만의 작가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었다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다. 작품 전체에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주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어느 실존의 예술가이거나 그림 속 등장인물을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며, 인물의 성격역시 여러 회화 속 실재인물, 또는 신화가 말하는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만큼 작품에서 직접 언급되는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언급되는 문장을 통해 연관되는 화가나 그림을 떠올리면 이야기의 선명한 윤곽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제 1권의 제목이기도 한‘스완’은 어린‘마르셀’에게 최초로 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는 인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부유한 유대인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바로 인상파 화가‘르누아르’의 잘 알려진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에 유별나게 검은 정장을 하고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 당시 유명 미술잡지인 <가제트 데 보자르>의 편집장이자 미술수집가인‘샤를 에르퓌시’로, 르누아르가 자신의 후원자인 그에 대한 예의로 그려 넣은 것이다. 따라서 실존인물과 소설 속 허구인물은 이름만 다를 뿐, 유대인이며 미술품 수집가인 것 하고, 그 자신은 단지 예술의 감상자로서 진정한 예술가가 되지못한‘예술 미혼자’로 남는 것은 소설 그대로이다. 또한 스완이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엉뚱하게도 ‘보티첼리’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인 <모세의 삶>에 그려진 양치기의 딸‘시포라’의 표정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오데트’의 이미지나, 그녀의 동성애나 창부로서의 기질 등이‘바토’가 그린 한 쌍의 그림인 <무관심>과 <소녀>에서 차용되는 것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나 회화작품이 인물의 성격과 창조에만 차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진정한 주제와 이야기의 진행에는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소설의 외형적인 측면인 서사적 주제는 진정한 소설가로서 확신을 갖기까지의‘마르셀’에 대한 성장기로서 예술적 자기 능력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 그리곤 사랑과 예술의 열정 사이에서의 갈등, 마침내 일상적 소박함과 평범함에서조차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적 발견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은 바로 무수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은유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거대한 예술의 도시 베네치아는 도시 자체가 회화가 되어 예술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특히 “샤르댕, 베르메르, 램브란트”는 거의 절대적인 이상이 된다. 이들은 바로 “사물에서 초시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 낸”사람들이며, 내재적 측면으로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듯이 “시간의 공간화, 즉 소설이라는 정해진 틀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소설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한다. 즉 소설 속 인상주의 화가 ‘엘스티르’로 대변되는 프루스트의 인상주의적 시선으로 “영혼의 안식처”는 ‘잃어버린 시간’이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삶이 모험으로 가득 차 있지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극적인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지향은 항상 의기소침하고 회의적인 것과의 갈등이었기에 마침내 하찮은 소재인 정물들을 그린 ‘샤르댕’의 그림은 소재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며, ‘베르메르’의 <델프트의 풍경>에 그려진 “덧칠에 덧칠을 하고 여러 겹을 입혀 완성한 ‘노란벽의 작은 자락’”은 자신의 소설이 “다양한 원고 조각을 이어서 만든 수정에 수정을 가하여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해야 하는 작품”이 되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비의도적인 기억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회화예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해는 실로 상당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프루스트가 소설가,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고 궁극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되는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작가가 있다.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인데, 그의 저술 중 『아미앵의 성서』와 『참께와 백합』이라는 두 권을 번역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추를 이루는 화가, 소설가들과 그들의 그림과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소설의 흐름과 인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례가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루스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적취향이나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프스적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 회화에 녹아있는지도 발견하게 된다. ‘프루스트와 회화’에 대한 이 미학적이고 문학적인 저술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독해하는데 더 할 수 없는 긴요한 참고가 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 권의 책이 프루스트를 해설하는 여느 백 권의 책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싶다. 덮어두었던 제5권 「갇힌 여인」을 다시 펴들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선악과 정의의 무지(無知), 가치의 다원화를 타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형태를 바꾸었지만 말이다. 작중 인물인 고문 기술자, “물고문 전기고문 관절 꺽기의 명수인”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 불리는‘안부장’은 80년대에만 존재했던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처럼 일그러진 신념에 포획된 인간들이 꽤나 우리들의 눈앞에 많이 등장하긴 했다. 이런 것도 신념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가족의 안녕을 위한 진정 충성스런 애국심의 발로라고, 이 야릇한 애국심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면 지적 판단력이 성긴 인간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웃을, 동족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도구, 즉 자신들과 생각과 가치가 다른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돌과 같은 사물이라고 인식하는 괴물들로 무진장하게 양산되는 그런 사회였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도 권력을 행사하는 일부 인간들은 자신들과 다른 생각들이 권력에 위협이 되기만 하면, 상대를‘빨갱이’로 몰아세우면 그저 게임은 끝난다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60여년 넘게 진행된 전 국민적 세뇌는 뿌리 깊은 것이기도 하다. 독재에 반대해도 빨갱이, 민주적 헌정질서를 훼손하는 권력에 저항해도 빨갱이,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자연권적 기본권의 보장을 요구해도 빨갱이, 소외된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요구해도 빨갱이, 자원의 불평등한 제도의 시정을 요구해도 빨갱이가 되는 희한한 사회는 이승만이래 부도덕한 정권들의 자기보존을 위한 방책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실로 질기게 악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렇듯 심하게 왜곡된 용어로 훈육되어 경도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력의 한낱 소도구임을 알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이 사회를 수호하기 위한 충성이자 의무라고 여기는 것이니 그 무지와 분별없음을 누구 탓이라 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80년 중반 각종 지면과 각종 미디어에 연일 기사화되던 도피 고문기술자가 있었다.
이는 멀쩡했던 청년이‘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물고문 치사사건이 발단인데, 군사반란을 통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정부의 발표는 이정도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고 폭력적이며 무식했다. 그 발표는 그야말로 외국 언론들의 더할 나위없는 가십거리였을 정도로 기막힌 것이었는데, 국민 여론이 심상치 않자 사악하고 폭력적인 그네들의 더러움을 대리할 제물로서의 누군가로 고문경관은 제격이었지 싶다. 소설은 바로 이 인간백정인 고문기술자, 추악한 괴물로 변한 한 어리석은 인간의 도피행적을 쫓는다.

고문경관인‘안’은 충(忠)과 의(義)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자신의 정의를 말한다. 이 사회, 권력에 도전하는 인간들은 그에겐 모두‘개(犬)’에 불과하다. 외판원을 하다 그의 우악스런 폭력을 마음에 들어 한, 소위 비밀 대공(對共)수사기관의 간부에 스카웃되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찬란한(?) 고문기술을 발휘하는 것인데, 인간의 공포를 끌어내는 자신이 만든 고문 도구인 칠성판, 그리고 물의 채찍, 공포의 각성단계 등 주도면밀한 자기만의 고문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자가 고문 치사사건으로 도피행각을 벌이며 마주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 그리고 권력과 썩은 세상의 관성(慣性)들이 비추어진다. 여기에 그의 딸‘선’이 등장하여 모르는 것, 바로 무지함만큼 무섭고 사악한 죄악도 없음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안’의 도피 초기에 사회정의와 가족연대가 충돌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수를 권유하는 수사진들에게 그의 아내가 항변하는 소리다. “애국한 죄밖에 더 있어요? 빨갱이 잡는다고...”아마 이것이 우리사회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의 부재(不在)에 대해 묻는 딸에게 “빨갱이 새끼 뺨 몇 대 때린 것 뿐...”인데 죄가 되겠느냐고 위로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 정의에 대해 자칫 왜곡될 수 있는 문제로 비칠 수 있는데, 고문이란 상습적 폭력행위로 이 땅의 청년들, 무고한 시민들, 즉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서 자기가족,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 다시 말해 소위 인간을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그 자체인 목적,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공공선, 공적 이성을 부정하고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자못 무거운 주제를 이 소설은 비교적 가볍게 읽어낼 수 있게 하는데, 물론 오늘의 사회와는 다른 형태의 폭력을 그리고 있다는 시대의 간극으로 먼 과거의 일처럼 비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20대의 싱그럽고 발랄한 ‘안’의 딸, ‘선’과, 그야말로 표제처럼 “쌉쌀한 단 맛”이자 “달달한 쓴맛”의 ‘생강’같이 톡 쏘는 문장과 이야기 구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었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을 기대하던 여대생이 거대한 어둠의 장막인 도피자 아비의 실체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삶의 도리와 이 사회의 진실에 눈을 떠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아프기도하지만 사랑스럽게 성숙하는 과정에서 어떤 희망의 기대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신념이 사회에 보내는 악질적 메시지들에 대한 담론은 비록 과거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에 더욱 강력한 의미로 다가온다. ‘안’의 도주에 그의 은밀한 비호 연대세력이 마련한 도피처인 갱생원과 원장, 그의 충복들인 감시자들의 모습을 ‘안’이 외부자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쉬파리 새끼”, “그들은 완장을 차고 충성을 다하여 수용자들을 감시하고 제어한다.” 이들에게 버러지같이 파렴치한 놈들이라고 경멸을 보내는‘안’, 바로 그가 그들의 분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씨발놈, 백정 새끼가 거드름은...”하며 이를 지적하는 것이 바로 썩어빠진 갱생원 원장이란 자라는 것은 실소를 머금지 못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과 그에 아첨하고 기생하는 것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의 질서와 체계가 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권력의 무리를 구성한다. 진짜 개새끼들의 유치찬란한 향연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권력의 조직은 기막힌 전략을 갖는다. “이 조직이란 게 말이야... (中略) 불가사리 같은 거란 말이지. 잘려나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발이 생겨나는” 이것처럼 말짱하게 권력을 정의하기도 힘들 것이다.

인간의 믿음을 조롱하는 인간백정, 고문기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그래서 자신의 그 엉터리 신념을 지키겠다고 미장원 다락방에 은둔하는, 자신의 연대에서 추방당한 짐승의 몰골은 혐오스러움과 인간적 절망이라는 불쾌함만이 더해진다. 악마이면서 존경까지 받고 싶어 했던 이 백정이 쏟아내는 잘못의 부인, 직업적 신념이라는 주장에서 문득 대통령까지 해먹은 자와 그의 충복들인 장씨, 허씨들이 이후 정권의 청문회에서 주절대던 소리가 떠오른다. 무고한 시민을 대량 학살하고 폭력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그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소리는 ‘국가의 안녕을 위한 소신’이었다는 것이니, 게다가 그 읍소하는 모습은 소설 속 ‘선’이 아비에 보내는 말처럼 “근거 없는 원망과 터무니없는 투정”이요,  “어린애의 거짓 눈물, 자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진액, 지독한 자기애에서 나온 눈물, 불가사리의 썩은 진물”이상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 게다.

이들이 위했다는 정의는 고작 자신들의 이익, 권력욕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지키려 했다는 가족과 사회의 안녕은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살해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신념의 주장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공고해져서 작금의 기득 권력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제발 선량하고 양식있는 시민들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마라. 할 일을 했다고 말하지 마라. 그건 당신들을, 당신들의 구역질나는 사욕을 위해서한 것이라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여야 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불안해하는 권력유지의 두려움과 공포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또한 주구(走狗)들도 항변한다. 무식한 것, 즉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주구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언제든 잘라내도 되는 불가사리의 발, 소모품이라서가 아니라 다름의 인정과, 타자의 존엄성,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죄악의 실행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악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지의 신념을 깨부수지 못하는 아비와 무지를 뚫고 깨어나는 딸의 대비가 선명하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남는다. 짧고 탄탄하면서 사실적인 문장, 원초적으로 묘사되는 내면의 동요와 갈등, 아비와 딸이라는 세대의 교차가 보여주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기대의 메시지, 그리고 감정의 풍랑을 높고 낮게 쉴 새 없이 조종하는 흐름은 작품에 한껏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그야말로 일품 소설이다! 아~ 이 맛이 바로 생강 맛이구나 하고 무릎을 탁 내려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누구인가 -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
전준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31명의 걸출한 화가들이 그네들의 자화상에 표현하려한 의미들을 쫓는다. 자신의 치부를 남긴 솔직한 그림에서부터 구현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를 그리려고 했거나, 사회나 예술계를 향한 속내를 투영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의 여정을 자전적으로 담아내는가하면, 사랑과 배신 그리고 절망이란 현실적 감정을 투사하기도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이 풍부한 표현들과 그에 얽힌 한 인간으로서의 화가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은 어느덧 마음 깊은 저 아래의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무엇을 건드린다.

“나는 누구인가?” 이 당혹스런 질문이 가끔, 아니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올라 심란한 기분으로 내몰곤 한다. 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우주에서 스치듯 지나갈 도리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나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사람들마다의 답변은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을 할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아니면 웅대한 어떤 지향점이거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고흐, 렘브란트, 뒤러, 프리다 칼로, 에곤 실레 등 익히 잘 알려진‘자화상’들이 떠오른다. 더구나 수없이 많은 그들의 삶이나 작품마다에 도사린 에피소드들 덕택에 기계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을 줄줄 읊어댄다. 그러하다보니 자화상이란 주제 역시 이러한 설명의 범주를 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기우는 정말 쓸데없는 오만에 불과하여 어느새 눈빛이 책을 뚫어버릴 듯 흠뻑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부심, 고통, 자존감, 삶의 역사, 존재의 본질 등 한 인간의 의지와 내면을 표현하려했던 그들의 마음을 거니는 철학적 평온함에 휩싸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회오(悔悟)의 반성을, 드러난 외면의 불안정한 이 세계의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생의 마지막 겨울 미완의 삶을 죽음으로 정리하기에 너무 억울했던 그 심사를, 불온한 시대의 정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신적 양식을, 이상적인 인간의 의지에 대한 표상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욕망의 건조한 허탈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표현하려 했던 사람들, 화가들에게서‘나’에 대한 숙연한 답변을 발견한다.

49세에 화가에 데뷔한‘앙리 루소’의 기념 촬영하듯 화가의 소품을 들고 선 자화상은 시대를 훌쩍 넘어 격려를 보내고 싶은 충동이 일고,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듯한 <구운 베이컨과 부드러운 자화상>은 시대의 혼돈과 비합리성에 의지하려는 정신적 양식의 반영을 비로소 이해하게 하여준다. 또한 공산주의자‘프루동’의 영향을 받은‘귀스타브 쿠르베’ 의 <아틀리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의 예술적, 윤리적 생애 전반을 보게 하여주고, 영국 구상미술의 맥을 잇는‘스탠리 스펜서’의 권태롭고 공허한 눈빛의 남자와 여자의 정사로부터 어긋나고 건조하며 허탈한 욕망과 그 부질없음,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허우적댔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진솔한 반성을 보기도 한다.  왠지 가슴이 저릿저릿한 느낌이 다가오는데, 그들의 진실성, 진정함, 본질을 꿰뚫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폭의 회화가 지닌 이러한 무진장한 감동의 전달은 아마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빚어낸 감수성 짙은 설명으로 강화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인생의 진한 깨달음, 내 시선을 새삼스레 고정 시킨 그림이 있는데, 독일 화가인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뤼겐의 하얀 절벽> 이라는 풍경으로 담아낸 자화상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뒷모습, 배경일 뿐인 풍경이 아니라 경건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풍경이 내 마음을 시원의 어느 곳으로 데려다 주는 평온함에 한동안 가만히 빠져들었다. 그리고 ‘샤갈’의 유명한 <산책>에서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느낌의 본질이 바로 사랑의 바이러스, 따스한 인간애였음을 알게 된 것은 나름 수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롭게 바라봤던 그림은‘클림트’의 <키스> 에 대한 오마주인‘실레’의 <죽음과 소녀>로 이어진 플롯의 계보, 그 원조인 ‘오스카 코코슈카’의 심리적 자화상이다. “자신은 죽을 것 같은 열정이지만 알마(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에게는 한여름 꿈같은 사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사랑의 배신과 절망에 대한 결별의 갈등과 고통의 적나라함을 보았기 때문일까? 남자와 여자, 사랑은 아마 인류의 영원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도 없을 것이고, 무수한 답변들이 표현되는 것일 게다.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금 반추해본다. 결국 남자인 나로선 타자인 여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을 포함한 생물과 사물, 그리고 그 관계에서 그 답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에 말이다. 냉정하고 무심한 타인의 눈빛은 바로 ‘나’의 눈빛이요, 그의 영광 또한 ‘나’의 영광일 밖에 없는 것이기에.

미술, 자화상이라는 회화예술이 인문학적 해설과 자못 철학적인 성찰과 함께 감성적으로 구성된 이 저술은 미술사라는 역사적 조류는 물론, 세밀한 회화분석, 화가의 특성, 인간과 인생에 대한 심원한 통찰을 흥미롭게 버무려낸 모처럼의 유쾌하고 지적인 문학적 예술저작이라 하겠다. 위대한 화가들의 진솔한 내면인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일까? 연민과 동종(同種)으로서의 그 어떤 뭉클한 여운이 떠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