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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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재촉하는 사랑이야기, 금지된 사랑의 저주와 그래서 더욱 고양되는 사랑이야기, 쾌락과 복수로 이어지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비극적 사랑이야기이다. 또한 폐쇄되고 가부장적이며, 폭력과 기만, 억압과 공포로 이어지는 사악한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독재정권의 나라, 알바니아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애처로운 저항의 은유이기도 하다. 열정과 조바심, 죽음과 같은 쾌락과 사랑의 그 절실함이 작품전체를 격정적 분위기로 몰아댄다. 이해 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 표정들의 아련한 기억들이 음울함과 내재적인 은밀함을 더욱 강렬하게 하고, 까무룩하게 눈이 절로 감기는 어떤 환각적 상태에 빠져들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외부와 차단되고, 가부장적 권위, 근엄한 공포의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에 갇힐수록 그 반작용은 더욱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질서일 것이다. 소설은 스페인내전,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알바니아의 한 지배권력자인 ‘자눔 라드지크 가문’에 저주처럼 내린 사랑과 죽음의 비밀, 그리고 그 황폐화를 향해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근원을 좇는다. 작품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카눈의 전설’을 소재로 한‘이스마일 카다레’의 장편소설 『부서진 4월』에서와 같이‘피는 피로 갚는다’는 보복의 순환은 비극을 예고하지만, 인간의 본능이란 금기(禁忌) 앞에서 더욱 초연해지는 것,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추동력은 격렬함, 간절함, 죽음의 불사를 초래한다.

우리들, 인간성이란 것의 본질인 욕망을 가두는 것, 그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제도와 장치는 인위적으로 가둬지는 것이 아니다. 제지되고 폐쇄될수록, 아니 자연의 질서를 작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이미 오만이고 무지이며 왜곡을 부르는 것일 게다. 고립과 차단의 질서화는 오히려 정신과 현상을 손상시키고 무질서와 황폐화만을 야기한다는 것을 우린 우리의 불행했던 현대사를 통해 아픈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자비한 종교같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암흑의 세계, “시체 애호가들의 나라이자 무덤을 찾는 자들의 나라”라 불릴 정도의 폭압성과 엄격함만이 작용하는 폐쇄적 공간인 1960년대 알바니아의 사회상은 라드지크 집안과 교차하며 비극의 본질을 공유한다.

소설은 라드쉬크 가문의 가장인 대(大)자눔의 둘째 아들인‘이스마일’의 어린 시절의 흐릿하고 몽환적인 기억들과 그의 성년으로서의 현실, 즉 과거와 현재시점을 오가며 비극적 기원의 비밀스런 윤곽을 드러낸다. ‘그 여자’로 지칭되는 엄마의 죽음에 숨겨진 이면의 진실, 엄마의 죽음과 동시에 가족과 항시 함께했던 의사 기오르크 박사의 사라짐은 시대의 폭력성과 가문의 비극성을 동시에 표출해낸다. 여기서 엄마와 기오르크의 관계가 지니고 있는 금기의 파괴가 낳은 결과는 은밀하고 잔인한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것은 곧 권력의 저항이자 관습의 순응이라는 대자연의 질서로의 회귀를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동시에 금지된 사랑, 그 금기에 도사린 부인 할 수 없는 절대적 쾌락, 죽음까지 수용 할 수 있는 사랑, 그 죽음의 부름 속에 살아있음과 깨어있음을 찾았던 부조리의 격렬함이 거친 숨결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형 빅토르의 아내인 형수 헬레나와의 초조함과 은밀함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이스마일이 쓰다듬는 형수의 등은 이스마일을 빅토르의 우주로 접근시켜주는 작은 우주였고, 사랑하는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에게 죽음과 같은 쾌락을 일깨워주었다.”라고 하듯이,  금기의 파괴는 질서와 제도, 권력의 중심을 파괴하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적 질서인 자눔과 그를 닮아가는 형 빅토르라는 기존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행위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의 행위는 그 어떤 사랑보다 극한의 격정과 강렬함을 내 뿜는다. 그 격렬함,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서로에게 넘겨주게 되는” 사랑의 침대 속에 내재하는‘죽는다’라는 내밀한 고백처럼 쾌락과 죽음이 분리 할 수 없는 일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총소리, 그러나 쾌락과 복수에 대한 갈망이 혼재된 적대감 앞에서의 침묵과 순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바타이유’를 연상시키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행위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하게 한다. 육체적 달콤함, 욕망의 본능,  그 촌각을 다투는 심장의 떨림, 그것이 추억을 이루는 물질들과 연결되어 설혹 상상의 세계일지언정 절실함이 만들어내는 삶의 진리로 이끈다.  에로티즘에 실린 그‘저주의 몫’을 이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는 작품도 없을 게다. 자유를 향한 연인들의 질주가 더 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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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 문화.소비.진화의 경제학 e시대의 절대사상 25
원용찬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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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 계급론』은 고전경제학의 전제인 기계적이고 의인화된 애니미즘적 사고를 전복시킨 최초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복잡계경제학이나 행동경제학의 준거점을 제시하였으며, 희소성과 산술적 효용 같은 수동적으로 맞추어지는 인간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 행동을 통찰한 선견을 지닌 이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古典으로서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과시적 소비현상을 설명하는데 이처럼 직접적인 이론적 배경과 영감을 제공하는 책도 없다는 측면에서 그 학문적, 실용적 가치는 아무리 존중해도 모자라다 할 것이다.

또한 과시적 여가와 소비라는 상징체계에 근거하여 소비와 문화에서 기호의미론을 최초로 열었으며, 경제학을 단순한 물질주의에서 해방시켜 해석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소비 상징의 해석학’이라 불릴 만큼 현대사회의 특성인 소비중심의 경제행동을 분석하는데 중대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를 형성하는‘베블런’의 인간본성에 대한 정의는 ‘제작본능’과 ‘경쟁심’으로 대별된다. 인간의 영원한 특유의 본성으로서 제작본능이란 인간생명의 존속이나 증식에 직접적 도움이 되는 활동을 말하며, 경쟁심이란 자신과 남을 비교해 뽐내거나 공훈과 명성을 얻으려는 인간본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베블런은 이 두 개의 본능을 중심으로 하여 인류의 습속을 고고학적 기원에서 발굴해 낸다.

특히 이러한 인류의 역사에서 사유제도, 즉 소유가 어떻게 출현하였으며, 계급적 서열질서가 발생했는가에 대한 그의 고찰은 소위 상류계층, 그의 표현대로 유한(有閑)계급의 행동과 심리적 양태를 설명한다. 수렵과 채취를 통한 자급자족과 공정한 배분을 기초로 한 협력 중심의 공동생활 시대에서는 소유나 서열의 개념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폭력을 통한 약탈을 행동양식으로 한 무리에게는 그 약탈의 성과물, 즉 전리품을 많이 획득한 자일수록 존경과 명예의 각광을 받게 되었음을 추측하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다. 이는 결국 피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 없이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만으로 생존과 지위를 획득하는 사회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약탈자가 존중받는 시대, 그래서 이 약탈적 행위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부러워할 만한 양식으로서의 사고습관으로 확산되고 당위화 되었다. 바로 야만의 시대, 야만적사고가 인간의 습속으로 체화되어 버린 것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폭력과 야만을 칭찬하는 야만사회에서는 더 이상 인간의 땀과 노고가 미화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약탈과 폭력으로 획득한 공훈(exploit)은 집단 전체에 존경과 미덕의 기준이 되고, 이에 근거하여 계층의 차별화, 서열화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전리품은 소유, 즉 사적소유가 개인의 생산적 노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도덕적 인간이라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당혹스러운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된다. 바로 이러한 사고 습관이 인간행동의 본성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습관화된 문화적 상징체계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에 여실히 내재되어 있다. 겉으로 노동은 신성하다고 하지만 내심으론 생산 활동을 비천한 것으로 경멸하며,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소비하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서 자신은 일하지 않아도 소비생활을 넉넉히 즐길 수 있다는 과시적 행태를 지향하는 것이 오늘의 소비행태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소비를 과시하는 행동은 나는 너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음을 자랑하는 것이며, 비천한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존재임을 주변에 드러내 서로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방식이 된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보다 물질주의에 경도되어있고 유교적 선민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사회에 유독 심하게 표출되고 있는데, 공학이나 기술을 도외시하고, 공장, 농업 등의 노동을 천시하는 기질이나, 고가의 해외 브랜드 가방을 사기위해 늘어선 길고긴 행렬, 내 자식만큼은 노동을 회피하고 유한계급의 부르주아적 대열에 진입하기를 희망하는 학부형들의 망국적 과외열기 등 헤아릴 수 없는 양태가 입증하고 있다. 이는 바로 타인에 대한 우월함과 성공을 표현하고자 하는 관습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이 생산한 재화는 원하지만 생산하는 노동은 회피하려는 욕구, 바로 야만인의 약탈적 습속의 발현이라 할 것이다.

이러하다보니 중, 하류층의 너도 나도 상류층의 과시를 모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소비에 참여한다. 모두 똑 같은 브랜드 가방을 메고, 주말이면 차를 몰고 교외로 해외로 여가를 위해 떠난다. 그러나 정작 상류층은 이들이 멘 가방, 이들이 보내는 노동과 다를 바 없는 여가에는 관심이 없다. 중하류층이 쉽고, 단기간에 따라하거나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들을 하며 과시한다. 경주마에 투자하고, 요트를 타고 자기들만의 선상 파티를 하며, 고가의 예술을 감상하고 식별하는 안목을 키워나간다. 골프채 메고 해외나가면 상류층이라고 착각하는 졸부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문화적 생활도식을 가지고 구별하고자 하는 차별을 극복할 길은 없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이 넘을 수 없는 상류층들의 아비투스는 단시간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베블런식으로 말한다면, “제작본능은 생산노동의 불참 속에 매몰되고 경쟁심과 합체하여 명예를 뽐내는 과시적 행동으로 표출”되어,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부러움을 자아내는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자랑”함으로서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문화적 자본에 질식케 하는 것이다. 인간 생활에 직접적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결코 생산적 여지가 없는 비생산적인 것들, 쓸모없는 지식과 취향을 세분화 시켜 발전시킨 구입 불가능한 예술들, 노동과 시간이 쓸데없이 낭비된 불완전한 수제품들이 더욱 비싸다는 역설이 실현된 기형적 사회로 내달리고 있다. 상류층을 모방하기 위해 안달하는 중하류층의 계층 도약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인간을 지배함으로써 노동 없이 사는 상류층의 점점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소비로 적대감이 아닌 동반의식으로 조작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이 도저히 상류층을 흉내 낼 수 없게 될 때 그 갈등과 파괴적 양상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 것이다.

베블런이 비난하는 것은 과시적 소비와 여가를 통해 타인의 시샘어린 비교를 하고 차별화하려는 유한계급의 행태이지, 사치와 낭비가 아니다. 갈수록 극단화되어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 제작본능이라는 인간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양식의 멸시환경, 모두가 비생산적 낭비를 통해 과시하려는 소비주의적 풍조의 위협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상류층이자 기업영리계층은 중하류층의 소득과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과시적 소비를 전파함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켜 자신들의 소유를 더욱 늘려나간다. 그럼에도 중하류층은 자신들의 살을 깎아 먹는 줄 모르고, 여전히 상류층의 교활한 행동을 추종한다. 그러나 영원히 이들 중하류층이 상류층의 술책에 놀아나지만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제작본능과 경쟁이라는 약탈적 본능의 두 본능의 비중이 오늘은 분명 약탈적 본능이 앞서 자기 해체와 파괴라는 타나토스의 세계에 우리 사회가 몰입하고 있지만 이 오염된 체계는 반드시 정화될 것이다.

“자기중심적, 질투, 시기, 자기도취, 타인과의 공감결여, 속임수 등으로 자기를 확장하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오늘의 사회,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 자기 자신들의 내면을 불편하더라도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신분상승의 무형적 가치, 즉 위신재(prestige goods)를 생산하려는 눈물겨운 중하류계층의 과시적 여가는 노동행위에 불과하다. 이 여가노동에서 귀환할 때 마치 자신이 유한계층인양 착각의 덫에 빠져들지만, 실체와 진실을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양하고 배제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이 지향하여야 할 제작본능,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우린 쾌락과 고통의 재빠른 계산기도 아니며, 더 이상 엄청난 광고마케팅 비용으로 낭비를 제도화시켜 지속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이 체계를 마냥 수동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될 것이다. 베블런의 문화자본과 제도로서의 경제에 대한 이 고찰은 오늘의 인간행동과 사회현상을 해석하는데 여전히 유용한 지혜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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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다 - 우리시대 시인 서른다섯 명의 내밀한 고백
이재훈 지음 / 팬덤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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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詩)는 비교적 대중과 친한 문학 장르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응축되고 은유된 그리고 중층화된 언어에 깃든 의미나 이미지를 읽어내기 위해 요구되는 시간이 현대의 속도와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직설적이고 직접적이어서 빠르게 흡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이성인 효율성과 맞지 않는 까닭이다. 여기에 더해 격렬한 자기대면과 같은 내면화되고 심화된 의식세계에 맞닥뜨리면 이를 성찰하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시는 오히려 후자에 더 가깝다. 문학의 전문가도 아니어서 시론(詩論)까지 읽어보아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되는 시를 읽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고 더구나 그럴 필요성을 지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시와 시집을 멀리하지 못하고 가까이 두고 읽게 되는 데에는 무언가 나와 공명하고, 그래서 나와 같은 느낌과 물음을 하는 누군가의 미적(美的) 사유에 위안과 호감을 갖게 되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 책은 시인 이재훈이 우리의 시문학을 대표하는 35인의 시인을 직접 대면하여 그들의 시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위해 그야말로 꼭 필요한 물음을 통해 진솔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 저술이다.

시인 김춘수, 오규원, 박찬 등 그네들이 애석하게 작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려준 자평(自評)의 육성을 들을 수 있음은 물론 이승훈, 정호승, 최동호, 이재무, 김명리, 배한봉, 여정 등 이해하고 싶은 작가들의 의식세계와 작품의 지향점을 한 권의 책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귀중한 가치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특히, 내게 있어 이 책은 여느 시인들의 간략한 해설을 곁들인 대중적 시선집이나 시평집과 달리 막연하게 느끼던 시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이고 선명한 감각으로 갖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진다. 시인들, 그들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납득의 시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또한 시작(詩作)에 대한 근본적 관점이나 방법론, 서로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로 그 작품의 외형은 다를지라도 궁극에는 그 보편적이고 공통된 것, 바로 존재에 대한 물음, 원초적인 시원에 대한 앎의 욕구라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라 하겠다.

시인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대담에서 느껴지는 시인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진리에 대한 애틋한 집착, 문단의 동향과 문학사적 평가, 언어와 형식에 대한 근원적 고통, 자기의 허위의식과 치열하게 싸워내는 모습들을 대하는 과정으로부터 자연스레 그들의 시 작품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시문단의 추이나 그 정신적 공통성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현대 시들이 고민하고 표현하려는 세계에 가깝게 다가 갈 수 있는 시간이 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 그 어느 때보다 존재론적 성찰의 시들이 많은 요즘의 현상을 말하는 한 시인의 설명은 비로소 그 당위성, 그 까닭을 이해하게 하는데, 외부에 선명한 적이 있어 싸우기 용이했던 70,80년대를 지나자 우리들 안으로 들어온 적(물질주의, 소비주의 망령 등등)이나, 눈에 띄지 않으며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교묘하고 전술화된 적과의 싸움은 결국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관계를 성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처럼, 궁극에 실존의 문제와 대면하고 그 문제에 부딪치며 깨달아가는 과정이 삶이고 요구라는 이해에 절대 공감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가 말하는 것은 깨달음을 향한 여정이며,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 할 수 없는 그 어떤 표현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격렬한 반응이라는 점으로부터 시를 보는 눈이 한층 성숙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시인들로부터 직접 그들의 세계관과 시작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듣다보면 이와 같이 수긍과 이해, 친밀감, 호감, 사유에 대한 동질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미처 자기 허위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한 사람, 자기가 깨달은 것 이상을 말하는 사람, 자기가 알게 된 길이 오직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오만과 무지, 어리석음을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이 대담집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내면을 활짝 드러내고 있어, 해체주의니, 정신주의니, 생태주의니, 서정적인 우리 고유의 전통적 감성이니 하는 시와 시 형식세계의 면모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식 세계와 조응하는 시인들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시간도 된다. 읽어 나갈수록 삶을 바라보는 보배같은 시인들의 의식세계에 매혹된다. 존재의 비의(秘義)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들려달라고 재촉하는 그들, 시인들에게 말이다. 우리의 시를 접하는 데 하나의 장벽을 허물어 버린 듯 가까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시를 내 세계에 친근하게 가져다 준 고마운 저작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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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5-1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책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35명의 시인들 각각이 말하는 시에 대한 의견이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비의식 2011-05-17 20:27   좋아요 0 | URL
시인들의 의식 심층의 근원, 말하고자하는 세상의 본성 등등 한국의 현대 시(詩)의 세계를 알 수 있었답니다. 강추! ^^
 
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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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아름다운 작품을 읽으면서 한 젊은 여성을 부정적으로 떠 올렸다. 영어학원 강사로 소위 성공이란 걸 하였다고 자부심 가득한 성공담까지 책으로 펴내면서‘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반추하는 인간은 실패자’라는 얘기를 그 말에 담긴 불행과 어리석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뱉어내는 무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무언가의 “답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의 불쌍함인데, 그럼으로써 비로소 삶이 지니는 귀중한 가치에 조금씩이나마 가까이가게 된다는 진리를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기 삶에 대해 의문을 하는 것이 생을 얼마나 고귀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답게 하는지, 그리고 고요함과 평온함,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대자연의 숭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되면 너무나 안타깝지 않을까?

‘제르맹 샤즈’라는 마흔 다섯 살 남자는 그야말로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면 달려간다는 그 자체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무슨 생각이 필요하며,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차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차는 기름만 넣으면 움직인다. 인생을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어떠한 앎도, 질문도, 반추도 필요치 않다는, 단지 재화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꼭대기로 위만 바라보고 치달으면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쾌락을 획득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여자와 자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좁쌀만 한 지식으로 아는 채를 하며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 도움이 필요한 애들만 골라서 기막히게 모욕을 주는 이상한 이 땅의 교육 현장 같은 것,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과 주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는 것, 산다는 것과 삶을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제르맹이다. 아니 제르맹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일 것이다.

아비의 사랑도, 어미의 사랑이란 것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 상소리와 음란한 우스개로 술자리를 채우는 그런 사람, 하물며 책을 읽는다는 것,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볼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를 주변의 친구들은 바보, 어머니는 골칫덩이라 부른다. 그런 그의 일상이란 가끔씩 있는 잡일로 버는 몇 푼의 돈으로 선술집을 오가고, 엄마 집 마당 한 구석에 세워둔 카라반에서 살며, 그리고 공원에 앉아 비둘기를 무심하게 세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삶에는 어떤 불편도 없다. 그러나 그를 바보라 생각하는 인간들,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인간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잘났기에 인간을 구별 하는 것일까? 제르맹의 말은 두서도 없고 그래서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아 선술집 동료들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 그렇다면 주변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은 과연 뜻있는 말들일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공원의 비둘기를 세다 우연히 마주한 여든여섯 살의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결코 이런 노인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제르맹이 아니지만, 할머니 마르게리트와 우연히 비둘기를 같이 세게 된다. 각자 어떻게 세어볼까요? 하는 마르게리트의 제안에“각자 머릿속으로 세어보죠”라는 제르맹을 과학적인 기지가 있다고 칭찬한다. 그 칭찬의 말은 순수한 격려와 진실한 마음의 표현 이상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것은 두 사람 우정의 시작이 된다. 한 사람을 단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는 사람으로 꺼내는 순간이 되는 것이며, 공원에서 만난 낯선 노인에게 저항 할 수 없는 호감과 그녀의 젠체하지 않는 지적 세계의 덫, 심상치 않은 인생의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접어들게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상의 얘기 끝에 마르게리트는 소설의 한 구절을 읽어줘도 될지 조심스럽게 제르맹에게 묻는다. 이를 시작으로 ‘카뮈’의 『페스트』,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쥘 쉬베르비엘’의 『난바다의 아이』가 공원의 벤치에 하얗게 샌 머리를 한 할머니와 거구의 장년남자가 나란히 앉아 읽는 장면은 지극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마음에 들어오고,  제르맹의 순박함과 무지에 대한 어떤 내색도 없이 순백색의 사랑, 앎에 대한 빛의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은 그 어떤 고결한 감동으로 스며든다. 급기야 제르맹은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마 그것은 엄청난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앎이 지니는 환희가 뒤섞인 그런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쥐들과 그 생생한 삶의 묘사들, 로맹가리가 말하는“삶은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보면서 인간 의식의 동질감과 사유와 삶의 무한한 영역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지식의 우물”같은 존재, 자신의 삶에 “근원과 샘물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깨우치게 하여준 사람, “삶에 대한 허기”를 비로소 알게 해준 사람에게도 불행은 피해가지 않는다. 노화에 따른 망막 퇴화증으로 더 이상 책을 읽어 줄 수 없다는 마르게리트을 위해 제르맹이 처음으로 용기라는 걸 내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읽기 훈련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주는 데 이르면, 제르맹의 독백인 “책 읽기가 그리워지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내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오다니...”처럼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이 어떻게 주어야 하는 것인지, 독서와 앎이란 것은 또 어떻게 쌓아나가는 것인지, 그리고 안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사랑을 나누는 것,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갑자기 연약한 존재가”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과일 잼처럼 달콤한 감동이 되어 잔잔하게 밀려들어 옴을 느끼게 된다.

어눌한 말(語) 같지만 단어와 어휘에 대한 고지식하리만큼 꼼꼼한 정의를 다지는 주인공에게서 말이 지니는 그 진중한 선택의 중요성과 인간을 고립시키는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진짜 지식이란 무엇인지, 책 읽기의 즐거움과 그 세계에 대해서, 그래서 삶의 이해가 왜 필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며, 생명과 지속성, 존중과 그 무한한 행복을 의미하는 사랑을 나누는 것의 고귀함까지 깨우치게 한다. 해학과 재치 넘치는 문장들, 어수룩한 가운데 톡톡 튀는 풍자와 총명함이 청결한 지식과 감동을 가지고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을 떠나지 않게 하는 기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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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해결되지 않은 수학의 난제 중 난제,  1과 그 자신으로만 나누어떨어지는 소수의 패턴 함수인 일명 제타함수 “ζ(s)는 s=x+iy에 대해서 생각할 때 x>1/2로 0은 없다.” 라는‘리만 가설’은 신비로움, 경이로움과 어떤 미지세계로 들어가는 은밀한 암호코드 같기만 하다.  리만의 이 가설은 물질세계의 정확한 묘사 도구임이 판명되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는 직접적 영향이 되기도 하였으니 150년 전의 천재 수학자의 직관력은 마치 신의 영역에 도달한, 아니 우주의 경계를 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상상까지 하게 한다.

리만가설은‘소수’의 일정한 성질을 파악하려는 것이고, 이를 설명하려다보면‘복소수’, 실수 사이에 숨어있지만 존재하는 수가 아닌 '허수i'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 추상적인 수가 되어 우리들이 직관하기에는 어려움을 겪는 수이다보니, 현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 개념에 대해 무심할 밖에 없기도 하다. 아마 이 소설의 매력은 언뜻 이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용이하지 않은 세계의 비밀스런 그 무엇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왠지 우리의 원초적인 그 무엇, 삶에 본질적으로 숨어있는 어떤 것에 대한 비밀 같은 것, 그런 것 말이다.

소설의 구조 또한 은밀하기 짝이 없다. 실종된 수학교수의 컴퓨터 파일에 기록된 내밀한 일기와 작업일지를 훔쳐보는 것 같은 구성이다. 내용 또한 일탈의 열정과 환상, 관능적 향기가 배어있어 그 은밀함을 증폭시키다보니 자못 냉철한 이성만을 요구하는 건조하고 지루한 수학과 수학자의 자취를 좆는 이야기를 저항 없이 따라가게 된다. 비범하기를 희망했지만 어느덧 마흔 세 살의 중년이 된 평범한 수학교수는 자기 성취와 인생의 확신 과정으로서 19세기 독일의 천재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 집필에 착수한다. 그러나 인문학적 글쓰기에 서툰 그는 작문수업에 참가하고, 남아있는 기록과 자료가 별반 없는 온통 비밀에 싸인 고독했던 리만의 삶과 수학적 성과를 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고뇌는 단순히‘리만 평전’을 잘 써내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절대적인 추상적인 수인 음수 -1 은 같은 음수인 -1을 곱하면 미지의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에 그 실체인 실수 1을 드러낸다. 그러나 허수i는 결코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수학교수는 이 미지(未知)의 세계에 동화되고 어쩌면 함몰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허수의 세계로. 그래서 현실의 세계와 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그 복소수의 세계, 일탈된 심연의 그 어느 세계를 유영하는 것이다. 작문수업에서 알게 된 여인‘잉빌드’는 이러한 그의 삶과 평전작업에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20년을 함께한 아내와 나눌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에 담긴 목소리를 단 한차례의 만남에서 들려줄 수 있었고 또한 귀담아 들어주며 스스럼없이 자기 의견을 건네는 여인에게 편안함과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커가고 두 사람은 더욱 농밀(濃密)한 관계로 공고해지는데, 소위 “제곱해서 -1이 되는 허근i 처럼, 양과 음으로 형성된 우리의 인식 가능한 시스템의 경계를 벗어난 불안한 영혼”이란 개념과 어울리면서 잉빌드와의 관계는 과연 현실이며 현실세계의 실체적 상황인지에 대해 의문이 피어나기도 한다.

중년의 지극히 평범한 가장,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 곧 성년이 될 아이, 그리고 작은 몸짓만으로도 상대의 상태를 알게 되는 그런 아내를 둔 남자, 사회적으로는 어떤 성취의 결과를 수확하고 짐짓 안정되고 존경받는 명예를 향해 이동해야 하는 그런 나이여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압박감은 이 수학교수를 결코 피해가지 않은 것이다. 그 심리적 동요와 번민들, 공허함과 뒤에 따르는 불안함은 가난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린 괴팅겐의 천재 수학자 리만의 고독한 인생과 겹쳐 시간적, 공간적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자기 힘으로 나누어야 하는 가엾은 수, 소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복소수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위험하고도 불길한 존재로서의 죽음, 저 피안의 세계도 보았을 것이다. 아니 수학을 제외하고는 그 풍경을 묘사하지 못하는 4차원 세계, 그 휘어진 공간, 이도 아니면 잉빌드와 헤어진 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자신들의 또다른 형상, 즉 평행 우주의 세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 소설은 중년의 현실적 번민과 고통이라는 심리적 갈등을 통해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욕망과 일탈의 다양한 모습들을 조명하는가하면,‘베른하르트 리만’이란 천재 수학자의 삶의 기록을 기반으로 그의 수학자로서의 성장에 영향을 끼친 가우스,  베버, 디리클레 같은 대 수학자들과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리만의 가설을 담고 있는 당시에는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주어진 수보다 작은 소수의 개수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얽힌 사연등 마치 평전의 듬성듬성한 초록을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두 가지 맛을 전해준다. “환상은 미지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라는 이 다의(多義)적 구절처럼 수학적 성취를 향해 내 달렸던 한 천재수학자의 그것이 제시한 가설의 세상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갈망은 어쩜 환상, 이성이 도달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수학교수가 그의 작업파일에 기록하였듯이 “내 생각, 양심, 그리고 모든 죄가 흘러내렸다.”고 되뇔 만큼 설혹 그에게는 믿음에 반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죄악일지언정 복소수의 세계, 차원이 다른 세계의 허구, 상상의 세계가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절반에 이른 자의 자기 삶의 증명을 위한 아주 도발적이고 지적인 도전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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