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정의사회의 조건 - 정의·도덕·생명윤리·자유주의·민주주의, 그의 모든 철학을 한 권으로 만나다
고바야시 마사야 지음, 홍성민.양혜윤 옮김, 김봉진 감수 / 황금물고기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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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동안 한국사회를 공정성의 담론으로 몰아넣었던‘마이클 샌델’의『정의;Justice(국역: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하여, 『자유주의 정의와 한계』, 『민주정에 대한 불만』,『완벽함에 대한 반론(국역;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공공철학(국역:왜 도덕인가)』등 주저(主著)를 중심으로 그의 정치철학적 신념을 해석하고 궁극적으로 도덕적 정의관에 기초한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의 재생에 대한 검토라 할 수 있다.

샌델의 정의론은 「하버드 강의」라는 부제 하에 방송으로도 수차례 방영되어『정의;Justice(국역: 정의란 무엇인가)』을 접하지 못한 독자에게도 비교적 친숙한 내용이며, 그의 생명관이나 공공철학에 대한 주장역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낯설지 않은 논의라 하겠다. 그럼에도 샌델의 정치철학을 지탱하는 구조물을 전체적으로 이해함으로서만 본질적 접근이 가능한 내용들을‘고바야시’의 설명을 통해 비로소 혹은 보다 명확하게 근접할 수 있는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일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정의관에 대한 비판자인 샌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의관을‘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뚜렷한 구별을 가능케 하여 일부 흐릿하게 이해하고 있던 부분들의 차이점을 제대로 납득하게 해주고 있다.
일례로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회계약설에 대한 새로운 자아(自我)를 상정함으로써 존재치도 않은 사회계약을 실제계약의 순화된 형태로서의 완전한 계약으로 자유주의적 정의를 설명한 것은 ‘무연고적 자아’, 즉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자아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책무를 지지않는 자아라고 비판한 샌델의 주장을 선명하게 이해케 한다. 이로부터‘미덕의 함양과 공동선’에 대한 고려가 없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의에 대한 미흡함의 발견은 자명하게 되고 이것이 이후 공동체의식과 연대를 기초로 한 공공철학까지 이어져 샌델의 인간사회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신념의 커다란 줄기를 잡아채는 데까지 이어지도록 돕는다.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한 논의에 있어, 롤스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과 해설을 통해 자유주의 정의론을 해체하여 오늘의 시대가 간과하고 있는 시민의식, 희생, 봉사, 도덕에 기초한 정치 등의 실체를 부상시키고 있는 것은 돋보이는 장점이다.

이러한 도덕적 정의(正義)론이 지니는 함의(含意)들 못지않게 내 사고를 장악한 것은 자유주의에 포획되어 오늘 우리사회가 상실한 “시민적 미덕에 기초”한 “자기통치를 지향하는 생각”의 복원의 주창으로서 공화주의의 재생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파고(波高)에 의해 민주주의의 쇠퇴, 공동의식의 파괴로 치닫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극복할 가치로서, 또한 보수적인 우파들이 자신들의 부족하고 무지한 논리를 돌파하기위해 즐겨 사용하는 파렴치한 언어들을 슬기롭게 압도할 수 있는 건강한 의식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의 헌법 1조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정치사회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로 흐르고, 공화주의는 사실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이런 인식이 옳다면 대한민국은 헌법1조가 말하는 국가의 정체성이 상당부분 훼손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진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런 상실감, 불안함을 초래한 것일까? 바로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다. 이들은 ‘정의’에 선(善)에 대한 문제, 즉 도덕성을 배제한다. 그리고 모든 정치경제적 판단에서 도덕적 논의는 선반위에 올려놓고 회피하는 것을 중립이라고 부른다. 이러하다보니 시민 공동체들의 자기 통치에 필요한 도덕적, 시민적 요소가 손상되고, 선의 문제를 정치적 담론으로 견인할 수 없게 만든다.

자기통치를 위해서는 동료시민과 공동선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논의에 있어서는 공공적 사항에 대한 지식이나 공동체의 귀속의식, 전체에 대한 관심, 공동체 사람들과의 유대가 필수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미덕이 필요하다. 그런 미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인격 형성이 필요하며, 따라서 공화주의적 정치란 인격 형성 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지금 어떤가? 개인이 자유의사에 의해 선택할 수 있다는 주의주의적 자유주의의 사유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다양한 선 사이에 국가는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민성이 필요로하는 미덕을 완전하게 제쳐둔다. 그러하다보니 가족, 지역, 연대 등 시민 공동체가 자기통치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고, 이는 곧 진정한 자유를 상실케 하여 사람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자기통치의 참여가 봉쇄되었으니 선의 미덕을 논의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 후퇴와 공화주의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샌델의 『민주정에 대한 불만』은 이처럼 공화주의의 자기통치 이념을 위기에 빠뜨린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시민적 미덕 같은 윤리적 정신적 요소의 강조와 자기통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 면에 주목하여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의 재생을 주창한다.

공화주의의 시민성의 정치경제라는 기반이 자유주의의 소비자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경제로 변화하여 성장이나 분배적 정의를 중시하게 되면서, 다원적인 연고적 자아, 즉 공동체들마다의 미덕을 훼손하고 국정이나 지방자치에 대한 정치적, 시민적 참가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로써, 자유주의의 복지수혜는 혜택을 받는 다는 점에서 고충을 덜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치에 관여하는 시민적 능력을 타락시킬 뿐이다. 정부에 의한 수입조장이 아니라 공동체, 가족, 국가에 관여하는 존엄성을 갖도록 고용을 늘리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시민의식을 되찾아주는 것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의식이나 책무의 지지를 받을 때 비로소 동포애, 공동선에 기초한 정의로서의 정치경제, 도덕성이 반영된 정의라고.

자유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불평등이 정의가 아닌 것은 부자의 부가 가난한자의 노동력 착취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가 쌍방의 인격을 타락시켜 공동체의 자기통치에 필요한 공동성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빈부차가 확대되면 부자는 공원, 대중교통으로부터 도망쳐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한다. 공립학교 대신에 사립학교(특목고), 대중시설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시설로, 대중교통이 아니라 자가용제트기로, 이로 인해 결국 공동의식이 부재하게 되고 공동의 선은 사라질 것이다. 극한의 분리와 의식의 균열, 국가와 공동체의 정체성이 파괴되고 민주공화국은 요원한 헛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시민의식을 희생시켜 자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요구하는 공공철학의 사유가 절대 필요한 것이고 더욱이 건전한 민주주의의 수행을 위해 절실한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보이지 않는 균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와 시장만능의 자유지상주의의 선(善)없는 경제정책은 롤스식 무연고적 자아에 기초한 미덕 없는 정의가 아니라 도덕성을 내재한 정의라는 정의관으로의 일대 전환을 요청한다. 또한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판단할 도덕적, 정치적 자립성을 보장하는 공동체, 공화주의의 복구가 실행되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공동선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유주의 논리로서는 우리가 잃고 상처받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존 듀이의 “자유는 개인들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사상”이라는 정의처럼 자신의 목적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생활에 참가하기 위해 중요하며, 사회적 커뮤니케이션과 자유로운 탐구 그리고 토론을 가능케 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유층보다는 빈곤층에 호소하여 노동, 빈민계층에 거짓 희망을 말하는 국영 복권처럼 근로나 민주적 생활이라는 도덕적 책임이라는 미덕을 파괴하는 정부의 자유주의적 상업적 접근은 근심스럽다. 공적 영역의 대상인 시민과 기업의 고객, 소비자로서의 성격을 구별치 못하는 실상이 너무도 안타까운 것이다. 공동선을 위해서 자본가, 기득계층을 포함한 모든 시민은 자신의 요구를 희생할 필요가 있다. 공적 영역의 존엄과 권위를 지키는 것은 우리들, 공동체의 건강성, 진정한 자유를 지켜내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희생을 공유하는 정신을 알지 못하는 자유주의는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정신으로 속히 복귀하여야 하는 당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이러한 선에 기초한 정의관에서 비롯한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의 재생이외에도 샌델의 생명관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포함한 자연을 다시 만들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열망”에 대한 비판론인 『완벽함에 대한 반론(국역;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시장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시장화하려는 인간의 오만을 성찰하고 있으며, 윤리적 미덕과 공동선을 토대로 한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샌델 논문의 해설이 수록되어 오늘의 우리들이 지향하여야 하는 도덕적 정의를 완벽하게 정리해내고 있다. 진정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향한 명쾌한 논의들이 정체의 한계와 궁지에 처한 오늘을 돌파하는 진지한 전환적 사유를 제공한다. 샌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저작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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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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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의 신랄함이란! 사람이라는 생물과 이 생물들의 사회에 대한 혐오가 깊고 짙다. 총 4부로 구성된 환상적인 이 여행기가 오랜 세월 금서로 묶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3부「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와 4부 「말들의 나라」가 삭제되어 출간되었던 이유를 확인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이 없을 만큼 명료한 경멸과 비판이 빼곡하다.
1부「작은 사람들의 나라」‘릴리퍼트’나 2부「큰 사람들의 나라」‘브롭딩낵’역시 그 본말(本末)은 제쳐둔 채 외형적 판타지의 서사만을 희화한 것들이 상업주의 책략에 의해 나도는 것을 보게 되면 아마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연실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야말로‘야후’다운 짓거리라고 자신의 판단과 예견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할지도 모르겠다.

형태나 모습, 사고나 관습 등 제도들, 그리고 종(種)까지 초월한 낯선 공간에 표류하게 됨으로써 이것들이 척도로 작용하여 이성적이라고 자칭하는 인간사회의 비이성과 악덕, 도덕적 일탈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1,2부는 온화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단지 관료의 채용방식이나 파당적 이기주의, 상류층의 무절제한 사치와 정치가와 종교인의 탐욕, 무지의 은폐를 상대적 시각으로 인간사회를 비판하게 하여 단정적인 결론에 이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릴리퍼트의 강제법규 중에는 “계란을 깰 때는 좁은 방향의 끝 부분을 깨도록”하고 있다. 넓은 방향의 끝부분을 깨거나 다른 방향에서 깨면 처벌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관습이나 제도라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런 것이고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이러한 비유적 일화를 통해 인간사회의 반성적 사유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제도적 결함을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릴리퍼트에서는 뛰어난 능력보다 훌륭한 덕성을 가진 사람을 관료로 채용한다고 하면서 사회에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자는 외려 능력을 가진 자들임을 그들의 교활한 은폐와 변호행태로 설명한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고위 관료들의 청문회를 보면 단 한명도 법을 어기지 않고 부정(不正)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릴리퍼트의 관료채용제도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만 같다.

브롭딩낵의 큰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행동양식을 닮은 작은 걸리버를 연구하고 나서 오랜 논쟁결과 ‘자연의 장난’으로 생겨났다고 결론짓는다. 자신들의 무지를 감추는 식자(識者) 연(然)하는 지식인의 천박성을 겨냥한 것이다. 또한 정치 관료들이 탐욕과 집착, 욕망을 벗어나 있는 자들인지, 뇌물을 받거나 하는 나쁜 자리는 없는지, 그들이 국민을 희생시킴으로써 자기들이 사용한 돈과 노력을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는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인지를 말하는가하면, “의원 자격을 갖추는데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그대의 나라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설명되거나 해석되고 있으며 적용된다는 사실...”의 구절에 이르면 우리사회를 콕 집어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그만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그리곤 걸리버로부터 인간사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큰사람은 인간사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는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이라고.

이 정도의 빈정거림이 온화한 것이라면 3,4부의 독설은 가히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혐오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부「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라퓨타’는 정신이나 마음이 온통 수학과 음악에 모두 갇혀 있는 사회로 묘사된다. 마치 과학과 합리주의적 이성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갇혀있는 오늘의 인간사회와 같다.
그리고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일반 국민의 불평에 따르면 국왕과 대신들은 모두 기억력이 짧고 무엇이든 쉽게 잊어버리는 질병에 걸려 있다.”는 구절인데, 부정하고 부패한 한국의 정치인,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심판대에 오르면 한결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을 기억나지 않는다고 읍소하는 파렴치한 장면들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국회가 결정하는 짓거리라는 것이 모두 국민의 의지에 반하는 것인 만큼 그들이 결정한 것을 정반대 방향으로 시행하면 반드시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이 될 것이라는 조언이나, 의원을 뽑을 때 그저 제비로 뽑는 것이 오히려 희망과 기대가 엇갈려 불평자가 줄어들 것이고, 그저 뽑히지 않은 자는 운명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훨씬 합리적이고 선한 것 아니냐고 조롱하는 대목은 당리당략, 개인적 이익에 함몰되어 왜곡된 오늘의 민주정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더구나 “아첨하는 자들에게는 성실을, 매국노에게는 진실을 부여”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이나 21세기 한국이나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동족을 수탈하고 배반했던 자들이 처단되지 않고 그대로 득세하여 오늘의 지배계층을 이룬 한국사회와 같으니 말이다. “얼마나 많은 악당들이 명예와 세력과 권위와 풍요로움이 보장되는 자리에 올랐으며...포주와 창녀, 뚜쟁이, 아첨꾼, 익살스러운 광대에 의해 도전을 받았는지...”하며 인간의 지혜와 성실성에 대해 경멸을 보내는 걸리버를 대하면 그대로 숙연해지기도 한다.
또한 “사치로 인해 로마제국의 부패가 그토록 빨리 진행되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이것과 비슷한 경우를 보고는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악이 훨씬 오래전부터 성행했으며,..”할 때에는 물신숭배와 소비지상의 오늘의 비이성적 광기에 그저 담담히 수긍케 된다.

아마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의 신념과 정치철학의 핵심은 4부, 「말들의 나라」‘뉴홀랜드’라 하여야 할 것이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말들의 나라, 자연의‘완전한 창조물’로서 이성적 존재로 행동하는 존재, ‘휴이넘’이라고 부른다.
인간에 대한 거부, 인간이 조성한 사회에 지극한 혐오가 책 전체를 휩쓴다. 공교롭게도 휴이넘이 지배하는 사회에 ‘야후’, 즉 길들여지지 않은 괴물인 인간이 종속되어 있다. 거짓과 위선, 아첨, 기만, 절도, 살해,...라는 단어의 복합체인 동물. 걸리버로부터 인간사회, 즉 이성을 지닌 야후의 사회를 전해들은 휴이넘의 평가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야말로 신랄하고 냉혹한 비판이 되어 꽂힌다.

“돈 때문에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은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 야릇한 사회가 바로 우리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나머지는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는 평가나, “구걸, 강도, 절도, 사기, 거짓맹세, 아첨, 위증, 위조, 도박, 거짓말, 아양, 허세, 투표, 잡문, 몽상, 독살, 매음, 위선, 인신공격, 자유사상 등... 많은 인간들이 이걸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열거는 분노와 수치스러움이란 감정이 교차케 한다.
제도를 사용해 나중에 있을 보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약탈한 걸 가지고 유유자적 은퇴하는 정치 관료와 자본가들, “교활함과 무례함에 의해 장관”이 되는 일례에 이르면 얼마 전까지 설쳐대던 광대가 떠오른다. 건방지고 야비하고, 배반 잘하고 복수심도 강하며, 게다가 겁 많은 정신까지, 야후 같은 인간은 이성을 사용해 악덕을 더욱 향상시켜왔으니 그 잔인함, 폭력성은 가히 견줄 대상이 없기도 하다. 마침내 휴이넘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이라 결론을 맺는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에 대한,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층적인 탐색기라 할 수 있다. 본성에 대해서,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사상과 사유의 상대적 고찰에 대해서, 각종 관습과 제도적 장치의 자의성에 대해서, 그리고 미덕으로서의 선과 옳음에 대해서 생각게 하는 윤리학이기도 하다. 비아냥, 조롱, 풍자 등 희화적 요소, 그리고 환상적 상상력이 기막힌 하모니를 이룬 문학사적 기념비작으로도 그 위상을 확인 할 수 도 있다. 혹, 이처럼 지독한 인간 혐오를 외친‘조너선 스위프트’를 염세주의자로 몰아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스트럴드블럭의 럭낵 사람들처럼 죽지 않음으로 생기는 무서운 절망 - 고집, 불평, 욕심, 침울, 허영, 수다, 사랑할 줄 모르고 후세에 애정도 없음...시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참 - 으로 자신들이 갈 수 없는 영원한 안식처를 보고 한탄하는 무지함을 계속하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과 인간사회가 해결하여야 할 영원한 과제들로 가득 찬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인과 영국사회보다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더 요구되는 것들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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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명작들을 한창 읽어대던 어린 시절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당시의 우리 출판 및 번역시장이란 지금에 비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독재정권의 금지 등 각종 출판규제와 같은 제도적 여건도 좋지 않았지만, 번역시장은 더욱 보잘것없었다. 완역된 1차 번역은 극히 드물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고작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된 책을 다시금 2차, 3차 번역한 것들이었고, 그나마 부분적이고 누락되거나 임의로 축약한 것들이 전부였다시피 했다.

이제 우리의 출판시장은 세계 어디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역량을 쌓았고, 번역자들의 역량도 높은 수준에 올라와있다. 더구나 예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완역'된 번역물들이 풍성하게 출간되고 있어, 미처 읽을 수 없었던 내용들이 수월하게 독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독서 여건의 개선은 다시금 고전명작들을 대하게되는 계기가 되어주고, 어린 시절 알지 못했던 경험들을 가지게 된 즈음에 예상치 못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도 높여준다. 당시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장마도 이제 한풀 꺾이는지 매미들이 제법 우렁차게 울어댄다. 땡볕이 내리쬐는 불볕더위인 바야흐로 본격적인 피서(避暑)시즌이라는 알림일 것이다. 이런 성하(盛夏)의 계절이 외려 독서하기에는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조용한 산속이나 외딴 섬 파란 바닷가 나무그늘 아래, 또는 모처럼 텅 빈 집안의 소파에 길게 누워 옛 시절을 회상하며 고전의 향기에 취하는 것은 일상에 지쳤던 심신에 새로운 활력과 어떤 전환적인 생기(生氣)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특히 고전(古典)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제아무리 영겁(永劫)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삶의 진실, 인간의 근원적 모습과 고결한 무엇들을 담고 있어 그 감동과 숭고함으로 내면의 엄청난 성장을 안겨준다. 사랑이 흐르고, 인간 개체와 인간사회의 속성을 말하며, 삶과 죽음의 진리에 내재하는 영원한 물음들의 답변을 들어 볼 수도 있다.
더구나 빼어난 문장들과 이야기로서의 수려함과 친근함, 재미를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절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최근 눈에 뛴 책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인데, 인류사회, 당대 영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그 혐오와 비판의식이 빼곡한 완역본이었다. 소인국과 거인국이라는 판타지가 아닌 그 실제를 읽어보는 유익한 여정이 된다. 또한 인간사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돋보이는 ‘볼테르’의 『낙천주의자, 캉디드』나, 천일야화 뺨치는‘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인간의 현세적 욕망의 구원을 보여주는‘괴테’의 『파우스트』또한 제법 독서의 진정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 인류의 지고한 선(善)인‘사랑’을 빼놓고서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해서,‘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그녀의 죽음에 가득 연민을 품어보기도 하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통해 사랑의 성스러움과 애틋한 사랑의 책략에 빠져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이러한 이상적 사랑을 넘어 현실적 삶이 그대로 투영된 자연주의적 작품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까지 더하면 아마 어지간한 인간세상의 이야기는 아쉽긴 하지만 섭렵 하는 게 될 법도 하다. 피서가 따로 있을 손가! 이것이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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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에밀 졸라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5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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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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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펭귄 클래식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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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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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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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을 비롯하여, 오늘날 추리소설의 전형을 이뤄내게 한 작가 10인의 30편 단편소설이 수록된 작품집이다. 특히, 저마다 그려낸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각기 독자적인 기법과 구성방식과 어울려 하나의 견고한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과학 발전 등 어느 시대보다 급격하게 삶의 방식이 바뀐 21세기 오늘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대적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 모델의 원류이며, 근간을 제시한 작품들이라는 탁월한 문학사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움이라 할 것이다.

결국 추리물의 고전적 반열에선 이들 작품이 만들어 낸 대표적 캐릭터들은 오늘의 작품들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래의 작품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상을 받게 되는 캐릭터와 구성적 측면의 친근함을 느끼게 될 때는 그 은밀한 쾌감으로 슬며시 환한 미소를 짓게 되기도 한다.
셜록 홈스의 직계라고 까지 불리는 ‘아서 모리슨’의 대표적 탐정 캐릭터인 ‘마틴 휴이트’의 과학적 증거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식 형사 수사물로 이어진 시조(始祖)격이 아닐까할 만큼 매력적이며, 여탐정 ‘러브 데이’를 완성시킨 ‘캐서린 퍼거스’의 작품은 여성 수사관의 원류를 한참이나 앞당겨 놓는다.

또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가 당대에 미친 영향력을 노골적으로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작가 ‘브레트 하트’가 셜록 홈스의 철자를 변경 조합하여 창조한 탐정 ‘햄록 존스’를 접할 때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외에도 코난 도일의 처남인 ‘어네스트 윌리엄 호넝’이 탄생시킨 걸출한 신사도둑‘래플스’가 활약하는 작품들은 오늘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빼어난 감각을 보여주며, 괴도(怪盜) ‘루팡’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그 흥미는 더욱 진작되기도 한다.
이러한 원형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한 권의 책에서 보게 된다는 매력 못지않게 작품의 배경이나 캐릭터의 성분을 범주화하는 관점을 통해 시대상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추리물이 대개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정의관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이들 작품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가 자본주의 완숙기에 접어듦에 따라 그 물적 풍요와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기 시작했던 연유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르주아 유산계급의 화려한 일상을 배경으로 하여 가난한 노동자, 빈공계층을 악인으로 묘사하여 유산층의 도락(道樂)거리에 치중함으로써 무비판을 견지하는 작품과, ‘클레이 대령’, ‘프링글’, 그리고 ‘래플스’같은 신출귀몰하는 괴도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본가들의 부를 강탈하지만 수사력이 따르지 못하게 하여 도덕적 일탈을 처단하지 않는, 다시 말해 부르주아와 지배질서를 조롱하는 비판적 작품으로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들 작품이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하지 않음으로서 도덕적 정의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특징이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추리’라는 과학적 입증주의에 모두 포획되어 그 기술적 방법론에 심취해 있었던 탓에 지적 쾌락이란 의도이외의 요소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아무튼 이와 같은 여러 특징적 구성을 한 이 소설집은 추리문학의 모델로서 그 문학사적 위상이 뚜렷한 작품들이 집대성된 책으로, 미스터리 문학을 즐겨 찾는 독자들에게 현대추리소설 인물들의 다양한 원형들을 만나는 풍부한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간 천재 작가들의 빛나는 작품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보상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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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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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게 ‘알리사’와‘제롬’은 40여년 가까이 이름을 잊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 인물이다. 모든 것이 첫 인식일 만큼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작품이어서 그 감성적 영향이 깊었던 탓일 것이다. 간절함과 애틋함이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알리사는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왜 제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제롬은 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것일까?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 라는 안타까움이 감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라는 것은 스스로도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지 못했던 이유를 탐색하게 된 것인데, 작가가 은밀하게 여기저기 뿌려놓은 장치들을 발견할 만큼 문학적 경험이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내심의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알리사 뷔콜랭’에 대해서... 

알리사란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의 미모(美貌)를 물려준 어머니 ‘뤼실 뷔콜랭’과 청교도적 엄숙주의라는 정신적 닮은꼴인 고모이자 사촌 동생 제롬의 어머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존재의 과시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경고격인 발작의 연기로 허위와 기만, 그리고 사치와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탕녀로서의 뤼실의 기질은 고모의 엄격함이라는 성스러움, 즉 도덕적 억압기제와의 결합을 암시하고 육체와 정신적 본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 그녀가 남긴 일기는 제롬을 향한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제롬에 대한 갈망이 깊을수록 그녀는 개인적 행복보다는 의무로서의 성스러움을 쫒으며, 결국 성(聖)이 속(俗)을 누른다는 것이고, 마침내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함으로써 성스러움을 완결한다. 세평(世評)은 이를 종교에 과도하게 매몰된 광신적 인물이라고도 하며, 사랑의 지고함에 이른 고결한 성녀라고도 하지만 구태여 이러한 양극단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젊은 애인을 따라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의 윤리적 배반에 대한 혐오만으로도 육체의 행복, 속세적 쾌락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녀의 종교적 신성함으로의 인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리사는 무의식적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상의 초월자로서 표현되지 않는다. 육신을 지닌, 오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발끝은 옷자락 아래로 삐져나와 한 줄기 램프 불빛을 받고 있었다.”라는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알리사의 관능적 자세나, 이를 보고 아버지가 “마치 네 어머니를 보는 것 같더구나.”라고 확인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내재된 욕망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결국 육체와 정신, 속과 성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로서 제롬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고 신비로우며 영원히 고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알리사의 믿음, 신을 향한 간구는 선택의 여지없는 당위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의 술책

알리사가 지향하는 성스러움, 그 당위적 결과의 수긍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다분히 기만적인 데가 있다. 알리사와 그녀의 아버지가 정원에서 자신(제롬)을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던 제롬이 후일, ‘쥘리에트’를 이용하여 알리사가 엿들을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그녀를 자극하는 것이나, 알리사가 ‘플랑티에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롬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내면적 진실을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책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전략은 시쳇말로 밀고 당기기의 술책인데, 자기 확신에 대한 불확실성이란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성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을 상대자가 읽는 것을 방해 하는 것이다. 오직 알리사에 대한 자기중심적 사랑에만 몰두하며, 자기와 주변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무관심과 무신경한 제롬의 결함도 일조하고 있으나 알리사의 자기 내면의 기만적 표현도 완벽하게 서로의 읽기를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쥘리에트’의 사랑과 좌절 
 
한편 제롬의 무관심과 무신경은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제롬을 향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랑이란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네 사랑의 실체를 되돌아보라는 알리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쥘리에트는 제롬으로부터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들어주고 알리사의 근황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되어야하지만, 제롬을 사랑하게 되고 언니와의 경쟁관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제롬의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확인 후에 사랑 없는 결혼을 진행한다. 알리사의 내적 갈등에 가려져 쥘리에트의 희생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의 고통은 결코 알리사의 그것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알리사의 요양원 죽음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나 쥘리에트의 집을 방문한 제롬과의 재회에서 알리사의 물건을 정리해 모아놓은 방을 소개하며, 쥘리에트가 제롬에게 하는 질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 쥘리에트"

“그걸 간직한 채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군요?”

또한 그녀의 딸을 대녀로 받아줄 것을 제롬에게 요청하면서, 아이의 이름이 ‘알리사’임을 말하는 장면이나, 여전히 알리사를 떨치지 못하는 제롬에게 “자! ~ 이제 깨어나야 해요...”라며,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는 쥘리에트에게서 그녀의 사랑이 알리사의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언니와 제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한 쥘리에트의 완전한 사랑, 신을 매개로한 성스러움을 지향한 알리사의 사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우며,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도구와 장치들 
 
이렇듯 타자읽기의 실패와 맹목성과 기만성의 교차, 완전한 행복의 추구라는 성과속의 갈등과 같은 플롯에 못지않게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치와 도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이 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것으로 제롬 아버지의 장례기간인 상(喪)중에 검은색 상복을 착용하지 않고, 뤼실 뷔콜랭이 흰 드레스와 붉은색 숄을 두르고 있는 것인데, 흰 색 위에 붉은 색의 조합은 엄숙함에 관능성을 더한 교묘한 파격이다.  

이것은 뤼실의 방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제롬의 묘사에서 뤼실이 끌어들여 서로 희롱하고 있던 젊은 애인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숄에 걸리는 것인데, 유혹과 쾌락의 세계를 암시하는 기막힌 장치로서 색(color)을 통한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돋보인다.
색이 하나의 상징체계인 기호로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앉아 제롬을 기다리는 알리사를 통해 그녀의 순결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내적 지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도구로 램프가 떠오르는데, 비스듬히 누운 알리사의 드러난 발을 비추는 램프와, 쓰러져 눈물짓는 쥘리에트의 방으로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램프는 육감을 두드러지게도 하지만 그 관능에 빛을 비춤으로써 현세적 욕망을 어떤 성스러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손길로 이해되기도 하며, 좌절과 사랑의 고통을 비추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방향등이란 작용을 완수하기도 한다.

1909년 발표된 작품이니 이제 100년을 넘어섰다. 종교적 색채를 떨쳐내지 못하고 성(聖)의 질서와 신념에 인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몰아댄 느낌이지만, 수많은 자아를 지닌 인간들의 사실적 드러내기와 주체와 타자성에 대한 발견처럼 오늘에도 그 신선함 을 잃지 않는 주제의식은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서 거듭 읽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연인의 죽음으로 속세적 결합에 실패하는 비극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합일, 완전한 사랑의 추구, 그리고 잿빛 땅거미가 방안 물건 하나하나를 덮어내며 복원하듯이 어떤 희망적 기대가 여운처럼 맴도는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의 낭만적 기운으로 설렘이 있던 옛 추억의 세계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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