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전사 - 여자는 왜 포르노보다 로맨스 소설에 끌리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6
도널드 시먼스.캐서린 새먼 지음, 임동근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무언가에 어떤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 비용을 낭비하면서 고안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계는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발견되는 경험칙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를 이루는 어떤 보편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은 이 메커니즘을 생산했던 과거의 어떤 인지과정과 이 생산이 발생했던 환경들의 존재를 함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전제하에 “인간의 심리적 적응도 일반적인 자연선택의 산물이다.”라는 진화론에 기초하여 현대사회의 논쟁적 이슈일 수 있는 ‘슬래시(slash) 소설'의 존재론을 고찰하고 있다.

 

즉 소년 또는 청년들 간의 연인관계 발전 모습을 그리는 남/남 커플의 로맨스 소설인 슬래시 소설이 왜 여성들을 위한 독자적 문학 장르로서 발생하고 확산되고 있는가에 대한 진화론적 탐색을 통해,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짝 짓기’전략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선택의 압력과 적응주의의 현상의 한 형태임을 추론하고 있다.

짝짓기에서 남녀가 서로 다른 방식의 선택압력을 받았다는 것인데, 바로 이 다른 압력에 적응한 남녀의 성적 심리에 그 차이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1. 남녀의 짝짓기 전략

 

짝짓기는 모든 동물의‘재생산’전략이다. 수컷은 이 재생산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면 어떤 방법을 취할까? 인간 수컷은 사실 재생산을 위해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정자를 암컷에 주입하는 짧은 시간이면 충분하다. 이처럼 저비용의 재생산구조를 가진 수컷은 가능한 많은 수의 암컷과 관계를 통해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채택한다.

그러나 인간 암컷이 이러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은 거의 재앙에 가깝다. 임신하면 9개월 동안은 자신의 몸 안에서 태아를 키워야하며, 또한 출산하고서도 젖을 물려야 하는 등 얼마간의 양육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만일 신중하지 못하게 자신과 아이를 위해 충성하지 않는 수컷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자신의 아이의 생존은 물론 자신의 생존조차 위태롭게 되는 자멸이라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여성은 자원을 계속 제공할 수 있고, 자신과 자식에게 충성을 다할 남성을 선택해야 생식 성공률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성에 대한 선택압이 달랐던 것이다. 남성에 비해 고비용 구조를 지닌 여성의 성은 아주 신중하게 자신에 적합한 남성을 찾고, 그에게 마음을 얻어 완전하게 자신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짝짓기에 이르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반면에 남성에게 있어서 짝짓기는 되도록 많은 수의 젊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생식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다. 짝짓기는 이처럼 남녀에게 확연히 다른 압력이 주어졌고 이에 잘 적응하는 개체만이 자연에 의해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모순이 있다. 가능한 많은 수의 짝짓기를 필요로 하는 남성과 자신과 자식만을 위해 헌신할 남성이 필요한 여성의 전략은 상충한다. 만일 한 여성만을 위해 충성하게 될 경우 남성이 부담할 위험은 증가한다. 여성이 낳을 자식은 확실히 그 여성의 자식이 분명하지만 그 자식이 남성의 자식일 확률은 보장되지 않는다. 만일 자기의 자식이 아님에도 충성하게 된다면 남성의 재생산성은 제로(zero)라는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효과적인 남성의 재생산 전략은 자기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는 방식뿐이다. 오늘의 대다수 인간들이 1부1처를 유지하는 것이 근대적 이성과 법제도에 근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선택압과 이의 적응이라는 진화적 산물임을 의미한다.

 

2. 슬래시(slash) 소설, 로맨스 소설과 포로노그래피

 

 

슬래시 소설이란 스타트렉(star trek)의 커크/스포크나 셜록홈즈의 홈즈/왓슨처럼 이름 사이에 사선을 그어 그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습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남/남 커플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을 일컫는다. 왜 뜬금없이 슬래시 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이들 남자들의 동성애적 이야기가 여성들을 위한 고유의 장르로 부상하고 있는 것을 과연 진화론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도발 때문이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문학인 로맨스 소설부터 그 특징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래서 이 책은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로맨스 소설들에 나타난 남성상과 여성의 심리를 통계학적 자료들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그 결과는 우리의 상식을 전복시킨다. 자상하고 감수성 높은 남자? 아니다! 더구나 돈과 사회경제적 지위보다는 근육질의, 잘생긴, 힘센, 키가 큰, 햇볕에 그을린, 강하고 뻔뻔한 남자를 그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또한 여성 독자들은 성적으로 대담하고 자신만만하며 추진력이 있는 남자로서 여자 주인공의 사랑에 의해서만 길들여지는‘위험한 남자’(한국식으로 말하자면‘나쁜 남자’쯤 될까?)에 대한 판타지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맨스 소설과 슬래시 소설이 어떤 관계에 있기에 여성들이 이 낯선 남/남 커플의 연애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일까? 남/남 커플 중 한 남자는 여성적 역할을 수행 한다. 그러나 우리도 알고 있듯이 스타트렉의 커크와 스포크는 물론 홈즈와 왓슨은 이성애자다. 그런데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슬래시 소설은 이들을 다중적 정체성(남성와 여성의 정체성을 모두 인식하는)이 가능한 이성애자로 그리며, 세상의 험난한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인생의 동반자라는 강한 우정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미몽에서 깨어나 서로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바로 이 점이 여성들을 매료시키는 요인이라고 한다. 여성 독자는 여성성을 보이는 남성 인물에 동질감을 느껴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성애자인 그 남성을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로맨스 소설은 남성을 자기의 헌신자로 만들긴 하였지만 그 남성은 언제라도 타 여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으나 슬래시 소설의 남성은 서로 사랑을 깨닫기 전부터 이미 동지였으며, 바위 같은 토대로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기대 때문에 더욱 안전한 낭만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슬래시 소설은“여성의 기준에 맞게 남성성을 가상적으로 변형 시킨” 소설이라는 것이다.

 

점점 전통적 여성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남성적 역할까지 함께하려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다른 여성의 유혹을 극복하리라는 믿음을 가진‘짝 가치’가 높은 전사를 선택하는 오랜 짝짓기의 적응주의 산물은 이제 전사(warrior;戰士)의 부인보다는 동료 전사(co-warrior)라는 판타지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슬래시 소설이 지니는 진화론적 유익성이다.

 

그렇다면 포르노그래피라는 스토리도 없고, 실제적 주인공의 시점도 없으며, 어떠한 감정적 교감도 없이 단지 성관계에만 몰두하는 시각적, 청각적 자극물이 남성에게 선호되는 이유를 이것이 남성성의 진화론적 적응의 산물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진다. 즉 가능한 많은 여성과의 성관계가 유익한 전략이었으므로 남성이 “저비용에 감정 없이”성교하는 것은 매우 적응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극단적인 남녀의 차이를 독해 해낼 수 있게 된다. 짝 짓기 행위가 여성에게는 신체적 반응이나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며, 감정의 교환이라는 것임에 비해, 남성에게는 신체적 흥분이라는 성적 자극이라는 것이다. 결국 포르노토피아가 남성의 성적 환상이라면 “남성의 육체 위에서 남성 육체에 의해 행해지는 섹슈얼리티의 여성적 버전(version)”인 슬래시 소설은 이에 대한‘대응-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자연 선택이 짝짓기 선택의 맥락에서 짝 가치와 관련된 신뢰할만한 정보를 찾아내고 활용하기 위해 특화된 심리적 적응을 생산”했음을 새롭게 여성 독자층을 확산시키며 부상하는 슬래시 소설의 특징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이 다윈주의자들의 도발적 저술은 생명을 구성하는 문제해결의 진화론의 장치인 적응주의의 해석을 통해 인간 행위의 보편적 메커니즘을 흥미롭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사실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들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나 입증이 흐지부지 사라지는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가설과 추정을 견고하게 해줄 연구가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작이라는 느낌 말이다. 다만 이러한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성(性) 선호와 행위의 차이에 대한 사회문화적(문학) 소재와 과학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고 유익한 정보로서 유의미한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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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4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슬래시 소설'이라는 문학장르도 있었군요. '성선택'을 풀어내는 진화심리학은 언제나 흥미로운데,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이라는 책 속에서도 (동물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식물들까지 포함하여) 온갖 생명들이 '자손의 번식'을 위해 펼쳐내는 온갖 오묘한 장관들이 정말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는데 생명의 신비로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더군요.

* * *

투자의 차이가 성차이의 원인

수컷의 경쟁과 암컷의 선택은 동물계 전체에 보편적이다. 다윈은 이 두 장관을 지적하고 성선택이란 명칭을 붙였지만, 왜 경쟁이 수컷의 몫이고 선택이 암컷의 몫인지에 대해서는 당혹스러워했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부모 투자 이론이다. 많이 투자하는 성이 선택을 하고 적게 투자하는 성이 경쟁을 한다. 결국 투자의 차이가 성차이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의 모든 것-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음경, 질, Y염색체, X염색체-은 부차적이다. 수컷들이 경쟁을 하고 암컷들이 선택을 하는 것은, 암컷임을 규정하는 난자에 아주 조금 더 투자한 분량이 그 동물의 나머지 번식 습관들과 곱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몇몇 동물종은 난자와 정자의 초기 투자분의 차이가 역전되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암컷들이 경쟁을 하고 수컷들이 선택을 한다. 물론 이런 예외들도 투자 이론의 법칙을 입증한다. 몇몇 물고기들은 수컷이 육아낭 속에 새끼를 품는다. 몇몇 새들도 수컷이 알을 품고 새끼를 먹인다. 그런 종들의 경우에는 암컷이 공격적이고 수컷에게 구애를 하며, 수컷이 파트너를 신중하게 고른다.(713쪽)

* * * * *

쿨리지 효과

새 파트너를 만나면 남성의 성적 욕구가 깨어나는 현상은 유명한 일화 덕분에 쿨리지 효과라고 불린다.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와 그의 아내가 한 농장을 방문하던 중 따로 시찰을 하게 되었다. 닭장을 둘러보던 쿨리지 여사는 수탉이 하루에 몇 번이나 암탉과 관계를 하는지 물었다. "몇 십 번 합니다"라고 안내원이 대답했다. 이번엔 대통령이 닭장을 보고 수탉에 관해 물었다. "매번 같은 암탉과 합니까?" "아닙니다. 각하. 매번 다른 암탉과 합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영부인에게도 그 말을 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많은 수컷 포유동물들이 교미를 할 때마다 암컷이 바뀌면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과시한다. 실험자가 이전 파트너에게 가면을 씌우거나 냄새를 없애도 속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수컷의 욕망이 '무차별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수컷들은 어떤 부류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어느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이것은 내가 2장에서 관념연합론을 비판할 때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개인과 범주 간의 논리적 구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다.

남자들은 수탉 같은 정력을 갖고 있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들의 욕망에서도 쿨리지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문화를 포함하여 많은 문화에서 남자들은 아내에 대한 성적 열망이 결혼 후 몇 년 내에 시든다고 보고한다. 남성의 성욕 감퇴를 촉발하는 것은 아내의 외모나 그 밖의 특징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개념이다. 새 파트너에 구미가 당기는 것은, 딸기에 질리면 초콜릿 케이크에 끌리는 경우처럼 다양성이 인생의 양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예가 아니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불운한 녀석 먼저〉에서, 첼름이라는 가상의 마을 출신인 한 숙맥이 여행을 떠나지만 길을 잘못 들어 뜻하지 않게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다른 마을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겹기만 했던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 매력을 느끼고 황홀해한다.(723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비의식 2012-01-24 09:38   좋아요 0 | URL
네, 남성의 포르노그래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슬래시소설을 여성의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짝짓기에 내재한 심리적 동기를 진화론으로 풀어낸 책이지요. 친절한 참고문헌과 보충적 인용글들 감사합니다.~~

휘오름 2012-03-0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아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영화에서 슬래셔 무비 이러면 좀비물같은 잔인하고 파괴성향의 영화를 지칭하는걸로 아는데요 소설에서는 또 다르게 쓰는 모양이군요. 리뷰 잘읽고 또 하나 배워갑니다..^^

비의식 2012-03-09 12:13   좋아요 0 | URL
슬래시 란 문자그대로 ' / ' (slash)를 말하는 것이고요, 이는 커플들을 쓸때 '아무개/아무개'로 표현하는 미국의 관용적인 표기에서 비롯된 것이랍니다. 그래서 연인사이임을 뜻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남커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기초로해서 연애소설로 변용한 것을 슬래시소설로 부르게 된 계기라 하네요. 미국을 비롯한 유럽사회및 일본에서는 슬래시소설이 나름 정착하고 여성들의 주요 문학장르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답니다...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가 타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런데 그 누군가란 가해자가 중학2년의 10대 소년들이다. 피살자는 4살짜리 여자아이고 아이를 여윈 엄마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범죄를 저지른 소년들은 단순 사고사로 처리되자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우린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형법의 적용연령을 개정해서 응분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가해자는 무력한 타인의 생명을 해친 것에 대해 반성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아이들의 부모, 보호자들 또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일 사회적 형벌도 취해지지 않고 반성도 없다면 지역, 집단 공동체가 나서 이들에게 어떤 도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여기엔 또 다른 도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항상 수많은 도덕적 질문들을 토해낸다.

 

소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당사자들의 고백(告白)이다. 피해자의 엄마이자 가해자의 담임선생, 가해 학생들, 가해자의 엄마와 가족, 그리고 제3자인 학생들의 급우인 사회적 연대자의 목소리로 사건의 동기와 의미, 당사자들의 도덕적 관념, 부모의 양육환경, 소년 범죄의 처벌과 관련한 사회적 공감대와 반대라는 법규범과 도덕률의 갈등과 충돌 등의 다면적 시각이 꽉 조인 탄탄한 구조위에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사건의 진실, 궁극의 당위로 접근해 간다.

 

싱글 맘이라는 편협한 사회적 시선을 감당하며 삶의 모든 의미를 담아낼 만큼의 사랑으로 키우던 네 살 딸아이가 자신이 맡고 있는 반의 학생에게 살해되었음을 형언할 수 없는 내적 고통과 극도의 압력으로 눌린 분노를 내면화시킨 채 담담하게 사건의 과정에 이르는 진실의 고백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뒤틀리고 역겹고 야비한, 그리고 도덕적인 불쾌감으로 살인자인 두 소년에 대한 적의를 극대화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버젓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두 학생의 태도는 피해자의 어미로서 감당키 어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이 억제된 분노와 살의(殺意)는 억압되어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두 학생에게 예정된 죽음의 정신적 고통이란 가공할 속죄의식의 부여로 전환되어 외부로 강렬하게 표출되는 분노보다 더욱 무서운 보복행위로서 지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자신들의 살인 행위를 단순한 사고사로 위장하고 어떠한 죄의식도 갖지 않는 소년들, 사회가 죄를 묻지 않는 이들 소년들에게 피해자들이 선택 할 수 있는 수단이란 것들은 무엇일수 있을까? 용서와 관용?, 도덕적 인간으로의 인도를 위한 교정교육?, 아니면 형법조항의 변경을 통해 성인과 동일한 처벌을?, 아니면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두려움의 등가적 정신적 고통을 가해야 할까?

 

 

 

자기과시, 자기애만 주입된 괴물이 된 아이들...

 

그런데 가해자인 소년들의 내면, 그들의 고백으로 들어가면 살인의 동기가 재능의 과시욕, 우월성의 확인, 시선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라는 자기과시, 자존감의 확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며,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타자를 죽음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물질화, 즉 단순한 도구적 대상화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온통 자기애에만 집중하도록 양육되고, 도덕적 선악에 대한 이해조차도, 법이라는 사회적 약속에 대해서도 “도덕관념이 단지 학습효과일 뿐이라는 얘기는 선악의 분별은 애초에 없다는 말”이라고 할 만큼 타자의 존중과 이해는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다는데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가해자인 두 소년의 이러한 성벽의 원인을 가정이라는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듯하다. 한 아이는 자기욕구에만 충실한 어머니로부터 오직 총명함에 대한 자긍심만을 배운다. 더구나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자식까지 버리고 떠나는 비정함을 보이고, 어미로부터 재능의 가치만을 배운 아이는 인간적 자질인 사랑과 배려, 존중과 같은 덕목을 갖추지 못한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죽어도 아쉬운 인간이란 없다.”는 정신적 기형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아이 역시 이기심과 의존성, 그리고 자기 책임의식이란 없는, 자존감만 극대화된 괴물로 양육되고 있다.

 

아마 요즘의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인간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이기적이고 극단의 개인주의적 교육열이란 광기에 휩싸인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어떤 인간들로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애가 눈을 떴는데도 수영장에 던진 건 무서워서 그랬던 거지.”라며, 자기 자식의 범죄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가해 소년의 어미의 심정처럼 피살된 아이와 피해자 부모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식의 손상된 마음을 먼저 어루만지는 빗나간 도덕성이 이 사회를 흉악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일 게다.

 

비록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총명함을 물려준 어딘가에 있을 어미의 관심을 끌기위해 타자인 어린 생명을 단지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사용하기에 이르고, 공범자인 아이는 굴욕감에 대한 보복이라는 자기 우월성의 확인을 입증하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 생명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그리곤 살인의 책임을 타자에게 전가, 회피하고 범죄 행위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반성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누이의 임신과 조카의 탄생에는 감동에 겨워하며, 자신의 살아있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는 고백에는 늑대의 눈물, 사악함의 본질을 보는 것처럼 몸서리가 쳐진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한편 도덕적 결론에 이르는데 항상 어려움을 겪는 진부한 질문이 이들의 동급생 입을 통해 던져진다. 살인자에 대한 군중의 히스테리, 즉 범죄자에 대한 집단적 따돌림이나 혐오, 나아가 린치에 이르는 처벌행위에 대해 이 권리가 군중에게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형제, 아들과 딸을 죽이고 미성년자이기에 법적 책임을 면했다고 도덕적 뉘우침조차 없는 인간이 우리 앞에 고개를 쳐들고 앉아있다면 이러한 인간에 대해 공리적이랄 수 있는 인간의 약속을 파괴하는 자에게 나머지 인간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린 도덕적 공리를 수행하고 이행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그를 수호한다. 그러나 미성년자라는 연령적 모호함의 기준으로 인간으로서의 근본, 본질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자를 처단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고, 오류가 아닐까?

인간을 벌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다면 인간을 죽일 자격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타인을 죽일 자격은 있는데 벌 받을 의무는 없다는 것처럼 모순이 어디 있겠는가?

 

급기야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자기 과시를 통한 존재의 드러냄이, 어미의 자기 욕구일 뿐이라는 진실을 보는 순간, 그 보복으로 종업식장인 학교 강당에 폭탄을 설치해 자기감정과는 무관한 타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살인을 준비하는 소년에게서 자기애(自己愛), 나르시시즘, 자기 욕구의 가치만이 주입된 우리 사회의 뒤틀린 가정교육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살인자인 소년의 “생명의 무게는 똑같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감성을 겸비하지 못했다.”라는 고백처럼 우린 정작 인간다운 인간들을 양육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자를 이기기 위한 경쟁의 기계,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는 사라져버리고 타인은 자신을 위한 도구, 즉 대상으로만 여기게 하는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연민에만 몰입하는 기형적 인간으로 구성된 이 사회는 공존과 상생의 덕목은 마치 사회 부적응자, 낙오자들이나 하는 소리로 치부할 정도로 피폐화되어 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양태가 갈수록 흉포화 되어가고, 범죄행위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자각도 없는 소년 범죄를 증가시키고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중학교 여교사의 선뜩한 고백에서 시작하여 살인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아무런 죄의식도 없는 소년들의 혐오스러움, 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의 뒤틀린 역할과 환경적 양태 등을 고백이라는 여과되지 않은 심리적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면전에 무서우리만치 들이대고 있다. 그래서 마음 깊이 파고드는 그 사실성의 위태로움과 당혹감, 불편함이 문제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인식하게 한다. 특히 소설의 첫 장을 보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는 것이 가능치 않다고 강요되듯이 문장의 강박적 흐름은 가히 압도적이고, 사실성이 뿜어대는 사건적 마력과 은폐되어 있는 인간들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서사적 압박은 몰입을 피할 수 없게 한다. 감추어 둔 것을 숨김없이 말한다는 이‘고백’의 형식미로 발산 할 수 있는 최고 내용의 문학작품이라 함에 주저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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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에 달 - 작은 일상의 크리에이티브한 발견
김은주 글.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자유롭고 소박한 기분 좋음, 그런 그림들과 새콤달콤하면서도 진지한 삶의 성찰이 담긴

진짜배기 ‘생각’들이 여백을 완성하고 있는 이 책이 왠지 쑥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몰래 ‘김은주’라는 여자의 마음속 일기를 훔쳐보고 있는 소년 같은,

혹은 청년 같은 순수함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독히 치열한 삶의 격전장에서 돌아와 모처럼의 나른한 심정으로

 따뜻한 차를 옆에 두고 소파에 길게 누워 그간 예사로이 흘려버렸던 내 삶의 정경들을

 하나씩 천천히 느린 동작의 장면으로 꼼꼼하게 그러나 느긋하게 살펴보는 시간이랄까?


거기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나타나

삶의 거름이 되고 방향이 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즐거움, 보람, 행복, 진실의 울림들을 주는

 바로 긍정의 사유의 얘기가 되어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 책의 말미인 에필로그를 채운

“ 내가 쓰는 글만큼 나는 강하지 못하다. ~

내가 쓰는 글만큼 나는 용감하지 못하다. ~

내가 쓰는 글만큼 나는 너그럽지 못하다. ~

내가 쓰는 글보다 나는 늘 뒤에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글이 나를 이끈다.”

는 작가 김은주의 고백은 간결하게 압축된 이 글들이

왜 그렇게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으로 다가왔는지,

그 발견한 삶에 내재한 진실의 이야기들에

왜 그렇게 친근감이 들고 애정이 솟구쳤는지를 알게 된다.


가끔 격렬한 삶터에서 돌아와 치열함, 분주함, 소란스러움, 두려움, 공허감, 무력감, 실망감...이런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이 책의 글들과 그림들이 기운을 돋워줄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한 진실들 - 남자와 여자, 사랑, 욕망, 드라마, 여행, 예술, 라면, 선물... -

이 아름답고 풋풋한 사색의 글들이 되어 지친 우리들의 마음에 흰 눈송이처럼 살포시 내려앉는 평온한 마음의 세계를 여기서 보았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난 이글과 그림 뒤에 자주 웅크리고 있을 것 같다.

내 마음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들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위해, 정말의 생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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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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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작품을 읽는 중에도 후속 작이 기대될 정도였다고 하면 허풍이 될까? 아니 이 작가라면 그런 기대를 해도 된다는 생각을 품어도 허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 소설로서 현재의 누적된 과학의 성과를 이 만큼은 소화해야 될 것이란 신뢰를 갖게 된다. 진화론을 기반으로 유전공학, 분자생물학,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등에 대한 탄탄한 이론적 초석위에 현실 가능한 완벽한 허구가 창작되어있다.

 

엄밀한 과학적 추론이 창조해 낸 소설의 세계는 가히 매혹적이다 못해 숭배하고픈 심정이다. 이 소설은 인간 종(種)의 신성화, 생태계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면서 이제는 “유전 공학으로 직접 생명 코드를 파괴하고”, 게다가 “수십 억 년에 걸쳐 만들어진 진화회로를 배배꼬아서 역병처럼 환경을 통해 순식간에 창궐될 수 있는 유전적 붕괴 상태로 내몰고” 있을 정도로 오만해져 있는 인간 지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고립된 독자적 진화의 생태계로 이끌어 진지하게 숙고케 하고 있다.

 

동,식물학자를 태우고 세계 자연 생태계의 탐험을 주제로 한 리얼리티 쇼프로그램, ‘시 라이프(Sea Life)'를 촬영하는‘트라이던트 호’는 200여 년 전 영국 전함이 발견했다고 알려진 당시 선장의 이름을 딴 ‘헨더스’섬에 상륙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혹은 거부되었던 미지의 섬, 카메라맨, 과학자들, 쇼프로그램의 스태프들이 상륙하자 곧 지금까지 지구 생태계에서는 접하지 못한 괴생물체들의 공격을 받고, 처참하게 몰살된다. 여성 식물학자‘넬 덕워스’와 카메라 맨 단 두 사람만이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갑각류와 포유류가 뒤섞인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괴생물체의 잔혹한 공격과 무참하게 죽음을 맞는 대원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이는 곧 미국 정부의 정보차단 조치와 함께 항공모함을 비롯한 대규모 군사작전과 NASA를 비롯한 최고의 과학자들을 파견한 조사로 이어진다.

 

순간적으로 방영되었던 헨더스 섬에서의 생물체와 인간의 죽음을 한낱 쇼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은 현지에서 마주한 존재들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진화 세계를 구축한 생명체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 전혀 새로운 생명체들의 섬, 암수 한 몸으로 절지동물과 갑각류, 그리고 규정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무한 번식을 하는 미지의 생명체들과 섬의 지질학적 조사에서 5억 년 전‘고대륙 파노티아’의 한 조각이 분리되어 완전한 고립 속에 독자적인 진화과정을 겪은 것으로 판단한다.

이 생물체들은 오직 무한한 공격성만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들이 모든 걸 먹는”, 포식자가 피식자이며 피식자가 포식자인 무한 파괴의 생태계이다. 식물은 낯 과 밤의 환경에 따라 광합성과 동물의 포식이란 이중적 양태를 보이고, 동물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번식하며, 태생 중에도 번식하는 가공할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다.

 

소위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 생명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은 “성공적인 생태계는 협력을 지향하고 강탈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자신들의 이성이 자유의지를 통제할 정도로 인간 자신의 고귀함을 신뢰한다고 하지만, 과연 이 말이 과학적 진실을 내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5억년 동안 지구상의 다른 어떤 세계와의 교류도 없이 단절되어 고립된 새로운 생태계인 헨더스 섬은 이러한 과학적 가설들을 여지없이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인간의 조잡한 오만과 편견, 수많은 과학적 주장들은 폐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협력이나 공존은커녕 무한한 살육전이 반복되는 생태계가 5억 년 간 진화를 거듭하며 온전한 생태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공격과 포식을 위한 행위를 위해 진화한 섬의 이름을 딴‘헨더스 쥐’, ‘헨더스 원반 개미’, 인간의 몇 배 크기인 거미 모양을 한‘스피거’등은 지구상의 가장 날렵한 동물인 ‘몽구스’조차도 순식간에 갈가리 찢어발긴다. 지구상 어떤 치명적 식물이나 동물도 헨더스 생태계의 생물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정부와 과학자들은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는 헨더스 섬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스토리는 긴박하게 흐르고, 헐리웃 영화와 같은 감각적 이야기의 구조가 더해져 인류의 과학적 오만과 인간의 어쭙잖은 지성에 대한 진중한 물음들이 심각하다거나 무겁지 않게 전달되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미덕중의 미덕이랄 수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생각이 들 만큼 재미에 빠져든다.

 

그러나 표본조사를 위한 엄중한 괴생물체들의 사체를 수집하고 임박한 섬의 파괴를 위해 철수 하던 중 식물학자‘넬 덕워스’와 동물학자인‘제프리 빈스뱅거’, ‘대처 레이먼드’ 등은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지적인 존재가 하나뿐인데도 이 지구가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종이 하나가 더 생긴다.”면 과연 인류를 비롯한 기존의 지구 생태계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인간의 지성이 스스로 종말을 회피할 정도로 겸허해 질 수 있을 것인가? 의 딜레마이다. 헨더스 섬의 완벽한 생태계가 포유류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구각류의 형태를 지닌 지적 생명체를 탄생 시킨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계획하며, 선택 할 줄 아는 생명체, 그러나 그렇기에 인류에게 더 위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이들을 파멸에서 구해 인간과 동승한 채 생존한 것으로 장면의 막을 내리지만, 과연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소설의 남녀 주인공인 넬과 제프리가 다시금 등장하는 『pandemonium(가칭; 지옥의 수도 혹은 대혼란』이란 작품의 출간이 예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급하지만 국내의 동시 출간도 기대하게 된다.

 

이렇듯 소설에는 화려한 지적 성찬이 그득하지만 단연 눈길을 끌었던 과학적 가설이 있다. 모든 생명체의 수명은 그것들의 세대 간 교배 가능 기간의 대략 두 배라는 이론이다. 즉 세대 간의 교배를 방지하도록 모든 타이머 스위치가 장치되어 한 유전 계통은 건강한 상태로 남아있는 기간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무한 번식을 하는 종은 수명이 그만큼 짧아진다. 반대로 교배를 할 만큼 성숙하기 위한 기간이 오래 걸리는 생명체는 그에 따라 수명이 길어 질 것이다. 소설 속 지적 생명체인 일명 ‘헨드로’들은 수명이 수백 년 이상으로 묘사되며, 따라서 개체의 수도 극히 적고 독자적인 생활을 한다.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우리가 고이 지켜온 상당히 많은 사회적 관습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러한 흥미진진한 진화생물학의 추론들을 비롯한 과학적 상상력이 이 작품 전반의 지적 구조를 풍성하고 탄탄하게 한다. 2002년 작고한 진화론의 거장인‘스티븐 제이 굴드’와 다윈의 적자로 자타가 인정하는‘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의 증거들이 완성도 높은 소설로 재구성되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사이언스 스릴러이자 액션 어드벤처의 진정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읽는 내내 절로 수많은 몽상과 상상의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게 한다.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지적 교만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라는 것의 조잡함에 대해서, 진화론적 증거들이 말하는 생명체의 기원에 관해서, 생명체 수명의 수수께끼에 대해서,...소설 한 편이 이 만큼 인간, 인류의 본성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갖게 했다면 위대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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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센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0
서머셋 모옴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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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서머셋 몸(W. Somerset Maugham) 자신의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지역 영국첩보원으로서의 경험 일부분을 토대로 하고 있어 그의 소설 중 독특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굴레』나 『달과 6펜스』를 떠올리면 첩보물이란 미스터리 소설을 그와 연결하는 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그만큼 강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을 부인키 어렵다. 또한 이 작품과 더불어 1937년 발표된 『공포의 배경』은  소위 첩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심리적 스릴러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니 문학사적 위치도 간과할 수 없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1928년에 최초로 발표되었으며,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을 전후한 세계대전 기간으로, 영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지역과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혁명이 완성되는 1911년의 러시아를 무대로 하고 있다. 특히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반영된 듯 보이는 내용들의 사실성으로 인해 인물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작품의 특징이랄 수 있겠다. 그리고 모호한 이야기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총 16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각각이 하나의 인상적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전체는 연결되어 한 편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몇몇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완성도 높은 하나의 단편소설로서 완벽한 기능을 수행한다. 사랑을, 허영심의 본질을, 조국애를, 전쟁과 첩보전의 비정함을, 소시민적 삶에 대한 연민을, 전쟁이란 혼돈과 위험의 특수한 시공에서 펼쳐내기에 보다 다양한 인간의 양태를 발견하게도 된다.

 

영국 첩보원이 된‘아센덴’은 ‘제임스 본드’류의 민완하고 다재다능한 이상화된 스파이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하고 있어, 오히려 진지하고 내용의 신뢰를 갖게 된다.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맛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위험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적대적 상대자에게조차 보내는 인간적 연민, 위선을 걷어내고 진솔하게 드러내는 감정들로 인해 비정하다거나 냉혹한 첩보원이란 도식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이란 적의와 증오에 희생자일 밖에 없는 첩보원들, 그들 역시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내이며, 자식이자 어버이다. 어센덴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동료 스파이나 적의 스파이 모두에 대해 그네들 본연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내면과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국 영국을 배신하고 적국인 독일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는 영국인에 대해서 증오와 분노라는 적의보다는 삶의 수단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나 독일인 아내를 위한 곡진한 사랑을 발견하는 식이다. 전쟁 중인 조국에 위해를 가하고 영국 첩보원을 죽음에 몰아넣은 배신자일지언정 그를 함정에 빠뜨려 처단해야만 하는 첩보원으로서의 애환이 진실 되게 그려지고 있다. 영국으로 향한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두절되자 기다림의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첩보원의 아내를 묘사한 장면은 압권이다. 반면에 독일의 첩자인 인도인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연인을 이용하는 정보기관의 비정한 일화는 사랑조차 한낱 죽음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착잡한 인간애로 갈등하는 첩보원을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인간적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어센덴이라는 스파이로서의 인물 자체에 시선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미스터리 액션,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들과는 근본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스릴이나 박진감, 긴장감을 요소로 하고 있지 않으며, 허황된 영웅을 탄생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위 스파이를 구성하는 임무의 본질들이나 활동 내용, 그 추진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사실성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본원적 모습들, 시대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것은 결정적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는데, 임무를 위해 파견된 국가의 주재영국대사가 사랑과 결혼, 그리고 허영에 대해 들려주는 인생의 회고담이다. 고급 외교관 신분이었던 청년이 천박한 무희에 불과한 여성에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열정에 빠져들지만, 신분과 권력, 명예에 대한 지향으로 사랑을 떠나 자신의 야심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것이다. 사실 통속적인 스토리라 할 수 있으나 이 회고에서 발산되는 ‘허영’, ‘인생에서 진정 중요 한 것’에 대한 문장들은 가히 문호다운 사색적 명문들로 채워져 있기에 압도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괴롭히는 여러 감정 중 가장  파괴적이고 보편적이며 뿌리 깊은 허영심이란 감정이 우리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허영심의 속박에서 구출되지 않는” 이유들...(정말 매혹적이랄 수 있다.)


사랑, 배신, 삶과 죽음의 기로 등이 무대를 바꾸며 스파이 활동에 녹아 흐르다, “인생에서 노인이 되어 후회할 수 있는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회적 성공을 했다는 인물의 고백에서 절정을 이루고, 블라디보스톡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어지는 러시아 횡단열차의 이동과 볼셰비키 혁명 전야의 불안한 정세 속에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예술과 사랑, 폭력과 무참한 희생이 한 평범한 미국인 가장의 소심하기조차 한 세탁물로 상징되는 자기애의 집착이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작가의 말처럼 전쟁의 현실감이 상실된 시기에 전쟁 첩보활동은 단지 소재에 불과 하게 된다. 그 환경,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삶의 심연을 공감어린 인간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로하며 인생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작업이야말로 변화하지 않을 문학의 본성 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기쁨이 분명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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