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 Mystery Best 1
엘러리 퀸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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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작품의 작가는‘엘러리 퀸’으로 공식 표기되어 있으나, 정작 집필자는‘버나비 로스’이다. 그런데 버나비 로스조차 본명이 아니고, 사촌형제인 ‘맨프리드 배닝턴 리(Manfred Bennington Lee) ’와 ‘프레더릭 더내이(Frederick Dannay)의 공동 집필명인 엘러리 퀸을 교대로 대표하는 또 하나의 가명이라니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 정도의 신비주의 전략이 필요했다면 당시 추리소설의 치열한 경쟁상황을 짐작케 된다. 그래서인지‘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과‘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세계 3대 추리소설로 이 작품이 불리게 된 것은 어쩜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장적 배경이나 평단의 평가에 현혹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작품을 전부 읽고 난 후에야 세간의 목소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 역시 최고 추리 걸작품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 고유의 스릴을 포함한 지적 쾌락과 이상심리학, 사회학, 병리학, 그리고 윤리학적 토대에 선 심원한 도덕적 메시지까지 더해 문학적 균형은 물론 독자의 지적 체면까지 배려하는 세심함에는 그저 그 완결성, 완벽성에 저항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소설의 첫 번째 매력적 특징으로 현란한 트릭이나 작위적 연결을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적 기반에 의해 서스펜스와 스릴 등 추리문학의 강박적 쾌락을 완전하고 유연하게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오직 독자 자신만의 추리력만으로 주인공들과 지적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사건 현장의 묘사나 수사 정보는 소설 속 수사관이나 독자가 공히 공유하고 있으며, 나중에 추가적인 단서나 증거가 있었다고 우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소한 전환이나 대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공감하면서도 자책하게 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박탈하지 않는 구성과 전개의 탄탄한 축조역량이라고 할 밖에 없다.


그 둘째는 사건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설정된 개성의 명쾌함이다. 언론의 가십(gossip)란을 단골로 장식하는 가문, 악덕과 천재성 등 세상의 이목을 모으는 기이한 집안으로서 추문으로 얼룩진 여성 부호‘에밀리 해터’를 중심으로 하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잔뜩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5주전에 실종 신고 되었던 에밀리의 남편인 화학자 ‘요크 해터’로 추정되는 사체의 발견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문에 휩싸였던 이 집안의 인물들이 세상에 노출되는 것이다.

요크와 에밀리 사이의 첫째 딸인 천재 여류시인‘바바라’, 알콜 중독의 방탕하고 성마른 아들 ‘콘래드’, 미모 뒤에 숨겨져 있는 악덕으로 뭉쳐진 막내 딸 ‘질’, 이 미친 듯한 해터 집안의 혈족이 아닌 아들의 아내 ‘마사’, 그녀의 두 아이들, 그리고 그 불구(不具)성으로 인해 더욱 주목 받는 벙어리이자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40세의 딸‘루이자’는 이들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이미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세 번째 미덕은 법이라는 인위적인 인간의 제도와 윤리 도덕적 관점의 충돌에 대한 성찰이랄 수 있다. 자칫 이러한 관념적 판단에 대한 내용이 소설의 흐름과 괴리되어 겉돌 수 있음에도 완전히 사건의 전개과정에 녹아들어 일체의 소설적 즐거움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사건이 영원한 미제(未濟)사건이면서도 동시에 해결된 사건이 되어버리는 결말에 이르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연민이 법적 경직성을 초월하여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처럼 즐거움 못지않게 인간적 본질에 대한 애정, 인간을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자로서의 이해라는 심원한 메시지에 절로 도달케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더해 사건의 중심축에 놓이는 인물인 장님이자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인‘루이자’를 통한 오감(五感)을 동원한 범인의 추정과정은 물론 의도된 살인 미수, 위장된 살인 등 치밀하게 설계된 악의적 행위의 이면에 은폐된 진실의 추적, 소위 밀실구조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사건의 연쇄적 발생이라는 안달이 나게 하는 구조는 사건에 투입된 뉴욕경찰의 강력반 ‘샘’경감을 돕는 유명 연극배우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드루리 레인’이라는 수사 자문역에 거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할 만큼 깊숙이 빠져들게 한다.


사실 수사관이 된 것처럼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직감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정황과 증거들의 무의식적 조합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사관들에게자신들의 저택이 장악된 침체되고 어두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미친듯이 악의를 발산하는 아이들’이나, ‘천재성과 광기’의 형질적 동일성을 야기하는 유전성의 질병과 같은 암시아닌 암시들과 전 남편의 딸인 불구자인 딸, 루이자의 가여움에 집착하는 엄마 에밀리에 대한 형제들의 적대감까지 한 집안의 광기어린 몰락을 예견케 하는 배경들은 사건의 동기를 다면화시켜 사실상의 무동기로 만들어버리는 발칙함으로 지적 경쟁심이 유발되게 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의 제목인‘Y의 비극’이 어떤 의미에선 이미 범인을, 소설의 모두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비극’이란 단어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운명적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Y'는 사체로 발견된 ‘요크 해터’의 이니셜 머리글자여서 이 Y가 실체화되는 곳에서 진실을 찾아야 할 것임이 암시되기도 한다.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수사 자문역 ‘레인’과 경감 ‘샘’의 듀오가 범인의 실체를 추리하는 매혹적 이야기가 탈규범적이며 존재론적이기 조차 한 인간의 성찰, 즉 범죄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유전론적 또는 환경론적 물음까지 하고있는 이 다층적 미스터리 작품은 추리소설 고유의 스릴과 지적 쾌락을 가히 완전하게 즐기게 한다. 예견된 반전조차 마치 그 지적 탐색의 동반자였다는 기분으로 즐거움이 될 만큼 어떠한 흠결도 지니지 않은 추리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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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취미의 권유 - 무라카미 류의 비즈니스 잠언집
무라카미 류 지음, 유병선 옮김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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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이 경험하고 사유하는 것들은 동일한 생물학적 기관, 즉 오감 탓에 보편성을 지니고 그래서 서로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러한 경험과 사색의 시간을 보다 더 확보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같은 것을 바라보더라도 판단력이란 개별화된 작업을 거치면 서로 다른 해석을 내 놓는다. 이것을 좌우하는 것이 소위 지식이란 것인데, 이 한계 때문에 편협하거나 잘 못된 이해로 치닫기도 한다.

 

일본의 방송인이자 소설가이고 영화인이기도 한 작가가 세상을 향한 삶의 이치에 대한 나름의 권유인 이 책은 때문에 그 광범위한 영역으로 인해 사유의 흠결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지리한 삶을 자극하고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도약의 언어들이 분명 존재하고 그것을 발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정신없이 달려 온 후 인생의 누적된 피로로 회의와 공허함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느낌을 덜어내기 위한 삶의 어떤 새로운 해석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무취미의 권유’라는 일견‘취미 없음’을 권유한다는 모순어를 지닌 표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야말로 맞춤이란 생각을 들게 하였다.

 

총 38개의 단상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이러한 내 시선에 들어 온 글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아마 자신이 처한 현실적 위치에 따라 그 받아들이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나는 작가처럼 취미(趣味)를 해석하지 않는다. 취미란“자신을 위협하고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결국 이것은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니 무취미라는 것인데, 취미가 반드시 삶의 위협과 격정을 초래하는 것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일 이외에 자기 내면의 성취를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극히 개인적이고 소박한 작업들이 취미로서 충분히 의미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첫 대문에서 이렇게 낙망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세계화의 적응에 관한 장에서 그 유명한 영화 <대부 II>에서‘마이클 콜레오네’가 했다는 대사 한 마디에서 작은 자극을 얻었다. “아버지는 친구와 가까이 하고, 적과는 더 가까이 하라고 날 가르쳤네.” 소통 능력에 대한 교훈인데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어서 였는지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이처럼 내 마음에 파동을 가져온 몇 개의 장이 있는데, 집중하기위해서는 이완(弛緩)이 필요하고, 더구나 당면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자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조언은 준비되지 못한 자의 긴장을 부끄럽게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직장 부하나 조직에의‘동기부여’라는 필요적 동력을 견인함에 있어서 정곡을 찌르는 “희망과 짝을 이룰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라는 한 마디나, “선택지 가운데 가장 까다롭고, 가장 어렵고, 가장 귀찮은 것을 고르는 게 정답”이라는 인생길의 결단에 대한 촌철살인의 문장은 내가 어떤 문제의 문턱에서 해매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도와준다. 특히 일본 무사도 정신 중 하나인 죽음에 철저히 임하는 결연한 삶의 자세를 말하는‘하가쿠레’는 내가 잊고 있던 ‘미셸 푸코’의 '멜레테 타나토(melete thanatou)', 즉 막 죽으려 할 때처럼 내 자신의 행동을 사유해 보려고 목표하는 것, 그럼으로써 ‘내 자신으로의 회귀, 내가 영위한 영원한 삶으로의 회귀, 죽음의 척도에 비추어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의 가치로 회귀’할 수 있다는 진정한 삶의 빛을 다시금 떠올리는 불꽃을 댕겨주어 어둡게 드리워졌던 어떤 장막을 걷어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촉매가 되어주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내 행동양식의 범주를 성찰하게 해준“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살펴보고 바깥을 향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기 위해서는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구절을 통해 잃었던 용기에 대해 생각게 되기도 한다. 내가 너무 안주하고 버티려고만 하지 않았는지, 이제라도 나도 모르게 둘러쳤던 벽의 존재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의외의 실마리나 단서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하고, 직장과 사회에서 요구되는 세련된 삶의 지혜를 담은 단상으로 세상에 대한 유용한 관점을 얻을 수 도 있다.

 

다만, 지나치게 경제주의(經濟主義)적 시류에 경도되어 효율화, 성공, 목표 지향과 같은 자칫 편향된 가치들로 분별없이 단정 짓는 일부의 단상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일례로 근대이전에도 노예, 병졸, 소작농으로 여유라는 개념과 무관한 삶을 강요받아왔으니 근대산업사회의 덕목인 효율화는 중요한 미덕이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효율화에 대해 시시비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살아가는데 성공, 돈 이외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품격과 미학’을 얘기하는 것은 생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생뚱맞은 발상이라고 폄하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더구나 월급쟁이들의 노후대비에 대한 불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유명 프로골퍼가 “한 번도 월급쟁이였던 적이 없어 모르겠네요.”라고 답변한 것을 솔직하다고 칭송하면서 “녹화 스튜디오는 상쾌한 공기로 가득 찼다.”는 사례는 사실 아찔한 현기증을 나게 하기도 한다. 이건 솔직함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관심, 무지라고 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감을 상실한 오늘의 개인주의 병폐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이 책이 우리들 인생의 조언, 혹은 마음의 위로, 세상의 이해에 대한 멋진 사유들이란 미덕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 할 수는 없다. 세대와 현실의 처한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이해와 감동을 분명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 된다. 그러나 삶의 가치가 오직 일과 효율, 성공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소의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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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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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제까지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어떤 연대감, 마음의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게 한다. 차곡차곡 우리 몸에 새겨진 수많은 세월의 사연들을 품고 있는 이해할 수 있고, 서로 토닥이며 들려주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애기들이며, 또한 우리의 삶 속에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모두가 잠든 고즈넉한 깊은 밤에야 비로소 그 생생한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기 때문일 터이다.

8편의 단편이 연작형태로 하나의 지향 - 아마 점점 잊혀져가고 상실된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깨우는 - 을 느끼게 하지만,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발산하는 색조와 형상은 몽롱하거나 때론 아련하고, 살짝 싫지 않은 열기를 지니기도 하며, 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위트와 유머의 속 깊은 의미와 같이 저마다의 독특함으로 다채롭다.

 

소설의 배경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1 세기가 지난 이스라엘의 개척자 마을, ‘텔일란’이라는 가공의 마을이다. 어딘지 모를 쇠락(衰落)의 기운, 그리고 쇄도하는 변화의 경계에 선 왠지 모를 불분명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그 분명치 못함,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삶의 정체들을 노련하게 보여주는 회화(繪畵)같은 이 작품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 마을을 처음으로 여는 「상속자」라는 작품에는 쇠약해진 노모와 함께 사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노쇠한 어머니에 대한 부담과 자기 생의 설계와 연민으로 고민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어린 조카의 보살핌이 자기 삶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여의사를 그린「친척」에서 정상의 외피 속에 감추어진 공허함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이 사는 이유에 직면하게 되는 것인데, 정작 삶의 진정한 가치, 행복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땅파기」란 작품은 이 소설에서 양적으로나 그 감성의 전달, 의도된 목소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여겨지는데, 은퇴한 전직 국회의원인 노인과 교사인 중년의 딸, 그리고 가난한 아랍 청년의 동거에서 빚어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의식들로 인해 다수자와 소수자,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과거와 현재의 몰이해, 이질화의 현상들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헛간을 빌어 사용하는 아랍청년의 하모니카 소리에 대해 “동양의 비탄으로 영혼을 쏟아내고 있어”라며,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담은 저의라고 비아냥대는 장면처럼 적의(敵意)조차 해학에 녹여내어 그 진중한 메시지를 감정적 격앙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한편 발전 지상적 논리에 의해 귀중한 고유의 것들을 잃어버리고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의 몰지각처럼 경제적 효익(效益)을 위해 고택(古宅)을 매입하려는 부동산업자와 고택을 안내하는 처녀와의 아슬아슬한 심리적 교환의 떨림 속에 지펴내는 가치에 대한 물음을 담은 「길을 잃다」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자기실현과 성취의 가치에 매몰된, 그러나 아내의 인생에는 무심했던 남자가 사라진 아내를 찾아 해매는 공허함 그득한 「기다리기」는 물질, 지위, 권력 등 끝없는 욕망의 무모함 뒤에 남게 되는 실체, 바로 부존재, 무(無)라는 인생의 풍경을 잔잔히 흐르게 한다.

 

30세 여인을 향한 17세 소년의 서툰 사랑의 열정, 그 표현의 미숙함과 연민을 덮는 고유의 불안과 슬픔들, 자식을 잃은 어느 부부에 대한 비릿한 연민과 그 아픔에 대한 인간적 소통의 한계와 무기력함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의 절대적 고독을 확인하게도 된다. 이해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덧“이기적인 동기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인간들로 변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이방인이 되어 서로에게 이질적으로 변해”의심, 비판, 피해의식으로 마음들이 정말 죽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대 소년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노인의 삶에 이르는 우리들의 일상성 속에 깃든 인생의 시원적 모습들에 이처럼 감성적 공감을 하게하는 것은 아마 자긍심 넘치는 작가의 선언처럼 연륜의 진실함, 진솔함 때문이리라.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무덤 파는 노인이 외치듯, “이런 수다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며, “해가 떴고, ....뜨거운 하루가 다시 시작됐고, 이제 일하러 가야하오.” “우리 할 일은 그게 다요.”라는 선언처럼 이제 입을 닥쳐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저무는 석양처럼‘기울어가는 그림자’일 뿐이 듯이, 서로 ‘고요한 동료애’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묻는 것 같다. 쓸데없이 부산을 떨며 움켜쥔 삶의 시간을 이제 관대하게 내려놓는 연습을, 시골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러한 심정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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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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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커다란 시선이 있다. 하나는 비극으로 치닫는 한 가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고, 또 하나는 한 남자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성향을 옹호하는 듯 함속에 교활한 조롱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의미심장함도 지극히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을 건드리는 통에 예사롭지 않지만, 이것들을 묘사하는 문장들, 무심한 듯하지만 결코 냉소적인 것만은 아닌 독보적인 비유의 수사(修辭)에는 그만 넋이 나갈 정도로 매혹된다. 인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 그리고 그것의 묘사가 너무 명료해서 불쾌할 정도에 이르는 감정적 자극을 받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인간들의 비천하고 야비한 본성을 가능한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를 노골화하려는 수단으로 등장인물들의 대다수에게 완전한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드 M...씨, 드 K...씨, V...씨, P...씨 등처럼‘익명의 숲속’에 파묻어 버린다.  고작“자기 보전의 본능에만 사로잡힌”인간들에게 이나마도 배려의 산물이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아니 소설은 오로지 그의 시선으로 써지고 있는데, 바로 그 화자(話者)인 당사자조차도 P...씨에 불과하다. 그것도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딱 한번 그의 신분이 스쳐 지나가는데 변호사가 맞는 것인지 확실치 않기까지 하다.


‘상류 사회’의 일원이라고 믿는 화자의 세상보기는 그의 믿음만큼이나 편협한 것이어서 그 옹색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시각이 은폐되지 않고 솔직하게 주장되고 있기에 이 자가 술회하는 이야기는 오히려‘사실’이라는 진실을 부여하게 된다.

작은 도시에‘조제프’라는 낯 선 인물이 들어온다. 우리들은 어디서나 텃세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굴러온 돌이 만만해보이면 변변찮은 인간들이 합세하여 더없는 악의를 가지고 괴롭히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 혹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자, 설혹 권력이나 부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자들을 배후 세력으로 한 자일 경우에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살갑게 다가가서 머리를 조아린다.


1. 

소위 이름 앞에 ‘드’라는 귀족임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자들, 그리고 상류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이 새로운 남자는 마구 씹어대고 찢어발기고 싶은 대상이지만, 이 속물들의 무리에게는 그의 고상한 품격, 대귀족이거나 국가의 고위층이 아니면 지닐 수 없는 화려한 식탁보는 섣불리 대할 수 없는 신비와 경외를 준다. 그리곤 저희들끼리 새로운 남자를 범접할 수 없는 지위와 신분의 인물로 숭배한다. 이는 조제프라는 사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런 속물들, 인간들의 비루함과 악의를 주물러 댈 수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


같은 이야기의 바깥 면이 되겠지만 웃기는 일화가 등장하는데, 귀족들과 돈푼이나 모았다는 가문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공원을 산책 하는 장면인데, 이들 사회에서 따돌림하고 조롱당하던 두 아가씨를 양 팔에 끼고 조제프가 그들 앞을 거닐면서 상류사회란 것들, 그 속물들의 집단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 사회에 모욕이 아니라 경외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큼 비굴하고 수치심도 잊게 만드는 이기심, 탐욕에 매몰되게 할 뿐이다. 화자는 인간사회의 본성이란 것 아니냐고 항변하듯 이러한 추악한 몰골들을 자주 묘사한다.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에 조제프란 인물이 주인이 된 ‘폴란드의 풍차’라고 불리는 영지의 가문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5 대(代)에 이어지는 한 가문의 참담하다고 할 밖에 없는 비극의 역사를 통해 운명, 사랑, 죽음, 즉 삶의 의미를 추적한다. 영지 폴란드의 풍차의  1대인‘코스트’는 두 딸을 둔 재산가이고, 딸들의 인생이 평온하고 안락한 삶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딸들의 혼인 대상자는 그야말로 평범한 인물들이기를 바라고 그 평범성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안정된 평범함이란 것이 인간의 삶에서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달리 말하면 평범함처럼 사실 비범한 것도 없다. 완전한 평범함이란 삶에서 오히려 지나친 기대, ‘과잉’이다!


결국 800년 동안 별 탈 없이 세대를 이어온 집안, 그 완벽한 평범함에 딸들을 시집보내지만, 운명이란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낚시 바늘에 찔려 죽고, 가출하고, 버찌씨가 목에 걸려 죽고, 기차폭발로 일가족이 몰살되는 죽음이 가문을 휩쓴다. 이 불운에 대해 이 집안사람들의 기질로 표현되는 심한 불균형적 성벽이라든가 지나친 열정, 광기가 죽음이라는 비운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둥 이러저러한 궁색한 이유를 갖다 댈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작품을 왜소하고 졸렬하게 만들 수 있다.


조제프란 인물의 등장과 어울려 마을 사람들이 보였던 인간 무리의 본성을 보여주는 연장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열차 폭발로 코스트의 첫째 딸 가족인 드 M...의 일가족이 몰살되자 사람들이 이 가문의 잔존자들에게 보내는 시선에 대한 화자의 설명은 이러한 점을 잘 말해준다. 기차의 제동기 과열로 인한 사고이건만 도시와 마을의 사람들은 “코스트 가(家)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이 비극, 코스트 가문사람들의 연속되는 죽음, ‘폴란드의 풍차’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이 “전염병이 돌 때와 흡사한 공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소위 ‘불온한’대상으로 낙인을 찍는 것인데, 알 수 없는 두려움, 그것이 마침내 자신들에 침투할까봐, 그래서 자신들의 삶조차 파괴할 것을 우려하는 근거 없는 적대감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칼이나 맹금보다도 우리가 삶에 대해서 품고 있는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라거나, “남을 증오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고 해서 비난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남을 증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라고 하는 화자의 말과 상통한다.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면 인간들은 그 대상에 한없이 잔혹해지고 악랄해진다. 꼭 요즘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그래서는 죽음까지 몰아대는 잔인함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인정사정없이 사람을 메말린다. 겸손, 연민이란“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라는 화자의 말에는 야비한 인간의 얼굴이 있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면 인간은 타인에 대해 가장 악랄해질 수 있음이다.


2. 

“이기주의, 그 극단의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다.”운명과 결혼한 추악한 이기심으로 뭉쳐진 여자는 자기 운명을 학대함으로써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죽지만 그것은 이기심일 뿐이었다. 우린 사랑을 오해한다. 이 오인한 사랑을 사랑이라 믿는 것이 이미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것일 게다. 코스트가에 평범성을 이식하려한‘오르탕스’란 여인의 운명의 집착에서 비롯된 사랑은 자기 학대일 뿐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그리고 이 대상을 위하여> 아낌없이 베푼다는 것”일망정 이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대상의 문제이다. 결국 사랑이란 비극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총 자살을 택한 오빠, 온갖 악의와 멸시와 조롱에 시달려온 코스트가의 4 대째 유일한 잔존자인 '줄리 드 M'이 죽음의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주변의 인간들이다. 음악에 열정을 쏟아 붙는 것은 인간 자신들의 집요한 공포를 은폐한 폭력의 결과로서 야기되는 것이랄 수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줄리의 노래는 광기, 죽음의 목소리이지만 그것을 통해 그녀는 운명에 응대하는 것일 수 있다.


상류사회와 하류사회의 화합이라는 위선적인 마을의 축제가 열리는 소설의 전환점이 되는 일화는 이러한 줄리의 자기 운명에 대한 정면의 도발을 보여주는데, 얼굴의 한쪽 면이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과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드레스로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이다. 마을의 모든 인간들이 내려다보는 현장에서. 이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을 대리한다고 할 수 있는 화자의 느낌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일그러진 얼굴에 자신의 욕망을 뻔뻔스럽게 드러내는 여자를 보니 나는 산(酸)에라도 데인 듯 몸이 타올랐다.”라는 것이다. 그 희한한 몸짓에 인간들은 순간 숨을 죽이고 웃지도 못한다. 무서움과 혐오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일종의 가면을 쓴 인간들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불온한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자신들의 세계에 침입한 것에 대한 불안과 조롱이란 양가적 감정이란 비천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좀스런 인간들의 사회에서 그녀의 운명을 향한 시도는 비참하게 실패하고, 그녀는 미지의 인간, 숭배되는 인간인‘조제프’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한다. 소수의 특권층이 비루함을 쌓아놓은 사회가 배제한 것들에 명예를 돌려놓는 사람, 그렇기에 더욱 경배되는 남자가 인간들을 보기 좋게 굴복시키면서 줄리를 구원한다. 줄리와의 결혼은 인간들이 소외시킨 가문을 가장 명예로운 가문으로 복원시키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즉 조제프가 하는 일이란 운명에 대해 과감하게 멸시를 던지는 작업이다. 잃었던 토지를 사들이고 폴란드의 풍차를 위대한 왕국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상류사회라는 특권층의 인간들을 모두 아내 줄리의 무릎아래 두는 것, 서로 먼저 다가와 아양을 떨고 친교를 과시하게 하는 것, 아내와 코스트가에 진정 평범한 운명을 돌려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물질적 위로는 되지만 깊은 정신적 상흔을 치유하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여기서 작가는 운명에 대해 멋진 정의를 내린다. “운명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끝없이 파괴당하는 운명에 처한 비운의 가문, 그러나 그 숙명과 같은 비극도 한 사람의 도전에 의해 복구된다. 물론 소설은 5 대에 이른 줄리의 아들조차 순탄치 못한 가출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우린 그 끝을 알지 못한다. 사랑, 열정과 광기, 죽음이란 인간의 영원한 언어가 운명이란 은밀한 저주와의 사투를 묵시적으로 그려낸 이 걸작에서 우린 엄청난 삶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본능을 떨쳐내는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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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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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방이 오밀조밀 기능으로 분리된 소박한 일본의 전형적 가옥과 그 안에는 세상과는 얼마만큼 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부부가 보인다. 도쿄 외곽의 한적한 셋집, 번화한 시내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적막함마저 감도는 그런 외진 공간. 대화는 없지만 아내는 뜨개질을 하고 남편은 길게 누워있는 어느 일요일의 장면은 밋밋하고 무료함 그 자체임에도 그 어떤 강렬한 모습보다도 마음 깊숙한 무엇을 자극한다. 소설은 이러한 일상적 흐름을 통해 삶의 원형들, 존재의 의미들, 생의 가치를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산사(山寺)길을 걷는 나그네의 모습처럼 그렇게 낮게 타박타박 그리고 있다.

 

교토(京都)의 대학생,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워가던 청년, 절친한 친구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고, 이 윤리적 불륜은 세상의 질시를 받으며 인생을 시작하게 한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무의식에 뿌리내린 죄의식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잊힐 것이라 여겨지지만 단지 잠복하고 있을 뿐, 남자의 삶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한 걸음 물러난 초연(超然)함으로 가려진 채 마치 체념처럼 일상이 흐른다.

그리고 유산과 사산으로 연이은 불운은 남자의 아내조차 세상과 단절된 듯한 변두리의 작은 그들의 둥지가 지닌 의미를 강화한다.

 

남편의 일과 행동에 판단을 내리지 않는 아내, 아내의 그러함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남편, 그래서 이들 부부가“서로 부둥켜안고 둥근 원을 그리고”,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지만 그것은“쓸쓸한 안정”이란 표현에 가 닿는다. 아내의 병약함, 그런 아내가 작은 셋집에서 시동생까지 뒷바라지 해야하는 상황에 애처로워 하는 남편, 남편의 우유부단과 자기 격리조차에도 배려와 격려를 하는 아내,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심연에 원죄의 의식처럼 침잠해 있는 무엇이 강한 유대와 고립, 불안의 배경처럼 그들의 삶을 쥐어틀고 있는 것만 같다.

 

하급관리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온통 자기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남자, ‘소스케’는 그러나 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생의 길, 자기 존재성에 대한 가능성마저 저버린 것은 아니어서, 대인관계가 거의 없는 그가 생활의 여유와 다양한 인간관계, 삶에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주인집 남자‘사카이’에게 호의와 동경을 보인다. 자신의 인생행로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사카이와 같은 삶의 행복을 가지지 않았을까하는 동일시의 기대에서 그것은 더욱 명료해진다.

 

급기야 주인집 남자로부터 우연히 튀어나온 자신과 아내가 배신한‘야스이’라는 이름은 자신들의 삶에서 지워버렸다고 믿었던 불안의 존재를 각성하게 한다. 상처 받을지도 모를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남자는 막다른 길, 삶의 장벽에 막혀버린 듯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종교, 불교의 참선의 장, 자기 존재, 삶의 행로에 대한 문(門)의 물음으로 달려가기에 이른다. “마음을 다스려 집중하면 일체의 감각과 지각이 끊어지고, 육신이 철봉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만큼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선불교의 좌선의 행위처럼 “혼자의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존재에 대한 힘겨운 물음에 인내하지 못한다. 결국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남자가 하는 행동은 집에 돌아와 혹 아내가 야스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불안만을 확인한다.

 

세상의 시선과 닿지 않은 도시 속 시골과 같은 공간, 그리고 극히 자기표현이 억제된 부부의 소박한 평온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 잠재하고 있는 쓸쓸함의 본질을 탐색하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쫓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에 뭉쳐졌던 무엇이 떠올라 하~아~하는 탄식이 뱉어진다. 닫혀져 있는 문 앞에서 나 역시 항상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왔던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어쩌면 끝내 소스케처럼, 또는 오요네처럼 인생의 문, 내 존재의 문을 열고 저 쪽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을 포기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본래 열지 말아야 하는 것일지도, 인생이란 그 모름의 불안과 고적함, 무력할 수밖에 없는 무엇일지도 모를 일 아닐까? 인적 끊긴 산사의 눈길을 마냥 걷고 싶도록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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