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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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간직하는지...” - 59

 

소리, 지우, 채운, 소설의 세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오직 자신만이 답할 수 있거나, 스스로가 깨고 나와야 하는, 제 각기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묻혀 있다. 그것은 폭력 가장에 대한 분노이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며,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원망이기도 하다. 마음에 버거운 물음들이란 그 정답이란 것이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고, 어쩌면 생의 여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여물게 되는 것일 게다.

 

지우는 뇌종양을 앓던 엄마가 실족사하고, 엄마의 남자 선호아저씨 집에 의탁하여 산다. 지우는 작은 도마뱀인 용식을 돌보며, 서로 의지하는 삶을 산다. 지우는 엄마의 실족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엄마로부터의 버림받음과 희생이라는 원망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소리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손이 닿은 사람들의 윤곽이 흐려지면 상대가 죽는다는 느낌을 갖게 됨에 따라 쾌활한 성품에서 사람들과 차츰 멀어지는 고립된 삶 속으로 들어간다. 소리는 오랜 투병을 하던 엄마를 잃었다.

 

채운은 지우와 소리가 있는 학급의 전학생이다. 그는 축구 선수의 삶을 의도된 부상으로 중단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아버지의 살의에 대항하다 사고가 난다. 엄마는 채운을 대신하여 수감된다. 채운은 엄마의 수감, 그리고 사고의 불가피성과 응징하고 싶었던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번민한다. 채운은 그의 반려견 뭉치에 의지하며 이모 내 신세를 진다.



소설은 그렇게 각자의 작은 재능과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며 자기 이해를 넓혀나간다. 고사리 숲 사이로 노란 홍채가 고요히 빛나는용식이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듯, 세 사람은 그렇게 자신들 밖의 세계를 겪어내며,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해 나간다. 지우가 연재하는 많은 지문을 지닌 만화 <내가 본 것>을 통해 채운이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읽어내고, 공사장 노동현장에서 하루하루 악착같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로소 인식하며, 자신이 그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깨닫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는 세 사람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은 남의 불행을 바라는 저열함도 있으며, 상대적 약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려는 유치하고 가혹한 놀이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부모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는 사람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를 향한 따뜻한 손길도 존재하며, 순간의 비뚤어진 감정을 관대하게 용서하는 엄마와 같은 마음도 있다. 이 작품도 많은 성장소설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세상의 편력을 거친 끝에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지위를 이루었네 하는 얘기는 아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냥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 안의 무언가 작은 변화를 깨달은 그 마음을 지니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어느 순간부터 지우, 소리, 채운이 자신들의 물음을 쫓아 내딛는 발걸음들을 숨죽이고 응원하게 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른들이 할 일이 아주 많다. 내부자의 시선은 많을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경계 너머의 타자의 세계를 생각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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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내게 책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고, 물어봐도 되겠냐고 한다. 하라고 했다. 도대체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에요?’,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말하는 데,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시도)한다는 말인가요?’라고 묻는다. , 쉬운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수없이 이와 같거나 유사한 문장들을 접했었으니 말이다. 언뜻 칸트가 떠올랐지만, 그의 형이상학을 무턱대고 아이에게 들이민다면 더욱 난감하게 만들 공산이 컸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다보니 몇몇 생각이 더불어 엉켜 떠올랐기에 몇 글자 적어두기로 했다.

 

1.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

 

왜 말 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려는 것일까? 그저 할 수 없다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말 할 수 없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정신(지성)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아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경우다. 아이가 질문 하듯 그 문자적 내용의 이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이 없어서거나, 회피하거나 배제해버려 알지 못해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도 다양하게 많아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은 것, 이를테면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혹은 지극한 도)이거나, 가톨릭 등 유일신 종교의 신의 존재에 대한 것과 같이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경우에 따라 그 말 할 수 없음의 의미는 달리 표현 될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자기 앎, 자기 정신에 의한 해석으로서 지평(地平), 즉 자신의 정신적 시야가 작동하는 범주를 초과하는 낯설고 모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철학이나 여타 종교적 언어에서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t) 혹은 *내재적(內在的)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나 성자, 부처를 접하는 경험과 같은 신성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각에 나타난 성스러운 감각을 초월적 경험이라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감각이나 정신을 넘어 다가오는 경험이다.

 

이를 자기 지평 밖의 세계, 자신의 정신 너머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어서 초월적이라 말하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나 양태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결국 평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주함을 자신의 지평 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익숙한 지평 안에 끼워 맞춘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라는 마치 지평 밖으로 자신의 정신 너머의 체험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범주, 즉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가닿고 의지하는 생각으로 이해한 것 이상이 아니다. 이 말은 결국 내재적 인식의 범위, 근본적으로 자기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두 번째 말 할 수 없는 경우는 낯설고 전혀 알지 못하는 지평 밖의 마주함으로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의문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물음만이 있는 경험이다. 이것이 초험적(超驗的, transcendental) 경험(인식)이다. 지평의 진정한 넘어섬, 자신을 넘어선 것을 넘어선 그 자체로 대면하는 인간 인식의 넘어섬(이진경 ,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이다. 그 낯설고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에 물음을 제기하며 자신이 지닌 지평 밖으로 나아가는 처절한 고투의 체험이다. 이 초험적(선험적) 경험으로서 넘어섬은 결코 쉽사리 가능한 접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아집이라는 세계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 지평에서 배제된 이 세계의 수많은 존재자들과 양태들의 그 이질적이고 생경함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지평 밖의 세계를 자신들이 아는 범주, 지평 안의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접하곤 한다. 자기 앎의 언어로 말하려보니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거나 편벽됨을 면치 못하게 되고, 지평 밖의 진정한 의미는 여전히 배제되고 만다. 이것이 내재성, 또는 소위 초월적 인식의 한계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이처럼 내재성(초월성)과 선험성(초험성)에 따라 그 시선은 극명하게 다르다. 아전인수격 이해와 모름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접근을 통한 참된 본질을 향한 길은 이 세계에 확연히 다른 질서와 체계, 삶의 질을 만들어낸다. 갈라치기, 양극화,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등등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협하는 내재성(초월성)의 인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진정 말 되지 말아야 할 말이 출현하는 데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여야 하는 것은 오히려 초험성(선험성)의 그 곤혹스런 표현 불가능한 지대의 무엇이다. 그것이 진정 말 할 수 없는 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

 

내재적 경험(인식)과 선험적 경험(인식)은 자기 앎의 인식 한계에 대한 문제이고, 지평(地平) 넘어서 출현하는 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를 그리스 두 철학자의 짧은 대화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고질적인 사후세계의 물음, 인간의 참된 본질이 죽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담론이다그 핵심 물음과 답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트라시마코스내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고도 간단히 말해 보게.

  필라테스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가 되기도 한다네


트라시마코스는 필라테스의 대답을 낡은 계략이라고, 모순투성이의 뻔한 말이라고 비아냥대지만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이 이미 초험성(선험성)을 담고 있어, 내재성, 즉 인간 인식을 위해 창조된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하는 외에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대응한다. 그러고는 선험성과 내재성을 설명하는데, 선험적이란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려 애쓰는 인식이고, 내재적이란 경험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말 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을 각기 선험적 인식과 내재적 인식에 따른 표현 가능한 말을 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 답변은 무한한 것과 무()라는 마치 극단의 표현처럼 여겨지는 말만이 가능했던 것일 게다. 우선 내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개체성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즉 무로 소멸한다. 반면에 선험적 인식으로 죽음을 이해하려하면 개체란 궁극의 본질이 아닌 질료의 임시적 형태이고, 본질의 시간적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이라는 전체로의 회귀다.

 

한 존재자의 죽음이 사실 무도 되고 무한도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순을 말하는 인식은 인간의 내재적 인식이라는 지평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을 초험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면 그저 말 할 수 없는 모든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형용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선험성의 표현 불가능한 양태를 어떻게든 말하려하면 그 말의 논리 속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들 말의 궁지(窮地) 탓이다.

 

대승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한 인도의 고승(高僧) 나가르주나(龍樹,150~?)어떤 것에 대해서도 본성이 없이 공()하다.”고 궁극의 진리, 지극한 도를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했으니 이 문장 자체도 공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궁극의 진리를 말로 표현하다보니 궁지에 이른 것이다. 문장이 말한 바가 자신에게 돌아와 작용되는 것을 자기 언급이라고 한다. 자기 언급을 통해 스스로가 부정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에도 거짓말의 역설이라는 유사한 사유가 있다. 무언가 우리의 인식 너머를 말하려 할 때면 우리는 이러한 궁지에 이르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말 할 수 없는 것의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커다란 심연이 있다. 이 심연을 우리는 말하려 애쓰는 것이다. 자신을 무력화하는 피할 수 없는 역설이 우리들의 말에는 있다.

 

3. 맺는 말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차려야 할 것은 이 피할 수 역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어둠이다. 그 어둠의 지대에 있는 존재를 말해야 우리는 그나마 우리들의 지평 밖에 있는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비록 명료한 언어가 되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불명확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접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지적하는 인류가 그 엄청난 지식의 축적을 으스대면서도 전혀 지혜는 축적시키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지평 안으로 지평 밖의 낯섦을 들여와 그 알량한 인식의 범주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익숙한 습성 때문이다.


아마 이 지평의 경계라는 분별심에 의해 나누고 구분해서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세계란 지평 안과 밖이라는 그 어떤 간극이나 위계란 것이 없다. 자기 안의 앎의 세계와 외부로 가르면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진장하게 늘어날 것이다. 이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좁아터진 자기의 언어로 말하다보면 그것은 거짓과 기만, 무지의 언어가 되고, 세계의 진실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어쩌면 작금의 한국 정치사회에서 펼쳐지는 이 혼돈의 상황도 이 지평의 문제요, 선험적 인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아이의 당연한 의문이 여기까지 왔다. 말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 그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것은 아마 이러한 것이지 않을까. ()

 















*내재적 경험(인식): 이 표현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으로 그는 인식(경험)을 내재적, 선험적으로 분류하고 이 둘을 초월성의 두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 쇼펜하우어의 논문,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8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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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이진경 교수의 선불교를 철학하는(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8세기 당대(唐代) 선승(禪僧) 마조와 그의 제자 남전의 일화가 있다. 마조도일(馬組道一; 709~788)은 부처와 동격으로 추앙받는 지엄한 선종(禪宗)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승이다. 그런 스승을 향해 거칠게 입을 막아버리는 일견 제자의 무례함으로 보이는 대화 장면이다. 남전(南泉普願: 748~835)이 대중에 죽을 돌리는 데 마조가 묻는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그러자 마조는 그만두었다.

 

이 짧은 대화의 장면에는 스승의 권위와 제자의 복종이라는 수직의 격차는 사라지고, 동등한 인간의 관계만이 넘실댄다. 아마 이 장면에 대해 권위자들을 대신해서 니체라면 고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의 결여, 고귀한 것에 대한 경외심의 결여, 그리고 안목 없는 자의 불신과 무례만을 발견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태도를 눈과 손의 안일한 후안무치 선악의 저편, 263라 비난했던 그것이다. 그러나 고귀한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조가 제자의 욕설을 듣고 그만두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마조가 통 속에 든 죽을 물은 것이 아님을 남전이 모르지 않았으며, 통 속에 든 당체(當體), 즉 직접적 그 본체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이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욕설로 스승의 입을 거침없이 다물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조 또한 제자의 거친 말에 담긴 의미를 이미 헤아렸으며, 침묵으로 그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두 사람의 깨달음의 지혜가 오고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이 공안의 해석은 주제넘은 짓이기에 논외로 하기로 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 사상을 비롯한 학문과 문학, 예술의 세계에 넘쳐나는 담론지배 권력을 가진 이들의 행태에서 보이는 고형화(固形化)된 권위가 이 두 고승에게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분야에서 높은 곳에 이른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권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권위관계가 지속되는 속에서는 가르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무비판의 세계를 낳는다. 지엄한 위계 관계의 틀을 넘어서는 그 어떤 말이나 행위도 니체의 말처럼 무례로, 안목 없음으로 불신으로 비칠까 염려되는 마음에서 몸을 도사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고와 행동의 여지를 열기위해서는 지고한 안목을 얻은 자, 경외 와 존경을 얻은 자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엎어버리는, 권위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는 경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망각하고 수직적 권위 속에서 자신의 의사를 밀고 나가면 그것이 바로 독재와 전제적 권력이 되고, 수많은 진실의 목소리가 억압되어 멸실되게 된다. 외곬의 독선으로는 결코 그 어떤 진리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게 됨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마조는 바로 그 권위를 허물어 욕설마저 주고받는 스승과 제자의 고식적인 위계가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럼으로써 제자, 배움에 있는 자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기틀을 펼치고 밀고 나갈 수 있으며. 스승과 제자는 진리에 보다 견고하게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와 달리 경외감으로 시작되는 존중의 태도에 올라타 고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관습과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에 복종과 경배를 요구하며, 급기야 권력을 장착한 권위로 고형화되는 담론지배자들의 행태가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횡행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하다보니 무수히 다양하고 창의적인 견해들이 권위의 그늘에 의해 지워지고, 폐기되어 사장되어버려 지식이 성장할 수 없는 불모지대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세계를 선도하는 학문의 출현이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앨프리드 레드클리프-브라운(Alfred R. Radcliffe-Brown 1881~1955)은 그의 대표저술인 원시 사회의 구조와 기능(Structure and Function in Primitive Society)에서 특정한 종류의 언행 회피(금지) 여부에 따른 인간관계를 농담관계회피관계로 두 분류하였다. 무례와 비격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관계를 농담관계로, 지위고저가 뚜렷하고 위계와 권위가 지배적이어서 특정한 언행이 금지된 관계를 회피관계로 구분한 것인데, 바로 이 회피관계의 태도가 한국의 학문과 문화계 전반을 잠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내게 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바로 이 같은 권위의 수직관계에서 이탈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문학 담론권력의 질서에 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마조와 남전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야기의 논의를 마쳐야겠다.

 

담론 권력들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회피관계가 만들어내는 특성을 모른 체 하기로 일관한다면, 자연발생적 경외감과 존경심은 차단되고, 고귀한 것을 알아볼 기회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사고는 제약되고, 정해진 규칙들, 관습화된 권위의 규칙들이 사고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그 어떤 진실과 진리도 출현하지 못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 진정한 존경이란 모든 비판을 견뎌낸 것에 대해서만 주어진다.”는 글은 바로 이러한 관습화된 제도적 권위관계, 담론지배 권력의 권력을 깰 때만 진리의 가능함의 역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웃음관계의 회복이다. 심각한 권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웃음에 거리를 두었던 권위적 담론가였다. 이 같은 진지함, 딱딱하게 굳어진 관념이나 가치를 가볍게 넘어서고 흔들어 버리는 힘, 권위를 타고 넘어가는 힘으로서 웃음의 관계가 관(貫流)류 할 수 있도록 회피관계가 열려야 한다. 웃음은 여유와 유연성에서 나오는 확고함에 거리를 둔 능력이다. 또한 내가 확신하는 가치와 믿음이 망가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웃음은 집요하게 나라고 주장하는 아상(我相)을 깨드리는 시도이고 권위에 반항하는 행위이다.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한 담론 권력 앞에서 주눅 들은 젊은 천재들의 목소리가 죽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정말 소름끼친다. 이진경 교수가 이 웃음의 능력을 위해 소환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가상의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불타죽으며, 쉽게 웃는 놈들을 그냥 두지 마라!”는 호르헤의 외침은 오늘의 담론 권력자들의 독불장군식 권위의 집요한 탐욕의 소리로 들린다. 작가는 그의 죽음으로 더 큰 진실의 목소리인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만 들리도록 한다. 진정 세계적 사상을 주도하고자 하며, 과학적 진리의 새로운 형상을 말하고자 한다면, 회피관계 속 권위놀음이 아니라 농담관계, 그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마조와 남전, 스승과 제자의 그 허물없는 진리를 향한 대화의 장면이 우리 담론세계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진경 교수의 번뜩이는 혜안에 의존해서 짧은 의견을 끄적여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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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2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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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일체(一體). 풀잎 하나도 나의 동포이며, 경외의 대상이라는 자각이 없으면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구현할 길이 없다.” -23쪽에서

 

대표 저자인 백낙청 선생과 유학연구자의 대담 중 세계 정신의 지도국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력, 군사력을 토대로 다른 나라의 자발적 복종이나 수긍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념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러한 사상의 씨알을 우리는 일찍이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 근 현대 사상의 뿌리인 개벽 사상’, 특히 후천개벽의 사상으로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개교 표어는 물론, 동학과 천도교 등 20세기를 전후하여 등장한 종교 사상들이 현실의 냉철한 직시와 그에 부합하는 정신의 각성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특히 산업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몰고 온 인간의 노예로의 전락이라는 심각성에 주목하고, 정신 주체를 바로 세워 물질을 선용할 주인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는 원불교 소태산(少太山) 대종사의 사상이야말로, 오늘 인간 사회가 마주한 긴박한 문제들을 모색하기 위한 보편적 사상의 길을 열어놓았다고 수용하는 것 같다. 결국 후천개벽의 사상이 작금의 세계 - AI의 세계 침투로 인한 인간 삶의 변화, 기후 변화에 따른 인간 태도,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인간정신의 물신화 풍조, 사회적 양극화 심화 및 성 평등의 문제 등등 - 를 올바르게 진단 해석하고 그 대응을 위해 한국과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의 태도에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가의 모색이다. 인류가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일지 탐구하기 위해 동학과 원불교, 천도교의 사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시야를 광대하게 넓혀 보편성을 가지는 우리의 사상, K사상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책은 앞서 출간된 개벽 사상과 종교공부에 이은 보완으로서의 공부 과정으로, 대표저자인 백낙청 선생의 주제 하에 비교 종교학자, 원불교 교무, 유학(儒學) 연구자, 그리고 개벽 사상의 공부를 함께했던 두 전문 독자와의 대담을 담고 있다. 두 전문 독자는 대표 필자의 두 저술인 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서양의 개벽 사상가 D.H. 로런스를 전제로 후천 개벽 사상과의 연결된 논리, 서양 사상 특히 하이데거와의 충실한 만남을 통한 K사상의 나아갈 길을 성찰한다. 사실 서양 사상의 계보와 흐름은 근대라는 과학 계몽과 식민제국주의와 더불어 과격하게 흘러 동양의 사상을 제압하고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그들의 철학과 사상 이외에 보편적 사상이라고 세계에 제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도 동양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한국의 철학자, 일본의 철학자라 해도 서구 철학의 아류로서 그네들의 철학 논리 하에서 답습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사회의 담론과 사상의 주도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되살려 서양 사상이 좌절하거나 실패하고 있는 지점에서 동양의 사상이 바로 그 지점에서 사상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알게 된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서양 사상가들의 주객 이원화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현상학의 출발 이래 그 계보의 흐름은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 등의 관점 하에 직면한 이 세계를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대한 대표 저자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사고에 관해서는 무슨 커다란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는 듯이 그러는 게 좀 가당찮다는 생각은 서구 사상과의 충실한 만남이라는 태도를 의심케 한다.

 

또한 K사상의 세계 선도사상으로의 모색처럼 이웃 나라인 일본의 경우에도 이미 서양의 상투적 형식논리를 벗어나 자신들의 정토신앙과 선불교, 그리고 대중에 내재된 민간신앙에 의해 사물과 주변 환경 속에서 일상의 경험을 조직하는 것으로서의 애니미즘을 융합한 J 사상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여타의 것들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갖추는 것,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소중히 여기며 풍부하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보편성의 철학을 사유하고 있다. 그들도 동아시아의 이중과제인 서구의 근대과학문명과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인식은 공히 우리와 다르지 않다. 대표저자의 지적처럼 모든 생명이 존귀하고 살생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벌써 수천 년 동안 해 온 것이 사실일지언정, 서구 휴머니즘과 하이데거의 존재론 또한 존재론의 부활을 위한 시도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시도는 존재론의 의미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의 존재론은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존재에 대한 존재에 관한 탐구가 되어 인간에-대한-존재에 관한 탐구로 변화되어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서라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바로 오늘의 시대에 인간인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관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폄훼할 것이 아니다. 그동안 이러한 사유가 우리에게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주도하지 못하지 않았나? 공부는 겸허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남의 생각을 보다 깊고 넓게 되새겨 볼 수 있는 것 아닐까하고 여겨지는 지점이라 잡설을 늘어놓게 되었다. 대표 저자의 설명처럼 존재론은 결국 모든 존재자가 공유하는 그 존재성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토론이듯, 현재 진행 중인 서양과 동양의 사상 속 존재론에 대한 탐구에 보다 열린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원불교가 중시하는 독트린의 하나인 무아윤회(無我輪廻)또한 그렇게 독특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개체의 해체이자 새로운 형성으로 환생을 정의하며, 개체는 단순한 결합으로 소멸하지만 본질 자체는 형이상학적으로 존속한다는 서양 사상의 흐름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중 한 논문으로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과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Ⅱ43<특성의 유전성>은 무아유전의 서양인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K사상을 어떻게 세계 보편 사상의 길로 걷게 할 수 있을지에 탐구인 동시에 공부이기에 특정 종교와 신앙에 갇혀 사상이 독불장군식 편협함으로 기울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서 얕은 생각을 소개해 보았다.

 

끝으로 공부하는 책으로서 탐구의 한 과정이라 인식하기에 한 가지 납득하기 거북한 지점을 제기해 본다. 인과보응에 기반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정도를 걸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인생은 무너진다. 세상은 답이 없는 혼란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구절이다. 과학성과 과학적 지식의 구별을 설명하는 여정에서 인식이 과학적이어야 함의 강조와 어쩌면 관련된 물음이기도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된 철학적 논의라서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만일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라는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과학적 인식의 주장은 과학적 인식이 약화되거나 사라지면 곧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 일체가 와해된다고 결론짓는 것인데, 여기에는 중대한 결점이 있어 보인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 법칙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 가이다.

 

대체 그 정당성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자연의 안전성과 필연성을 동일시하는 연역은 심하게 그릇된 것 아닌가? 필연성, 즉 인과성의 부재를 곧바로 안정성의 부재로 확장하는 그 무의식적 추론에 대해 그 출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과연 과학적 인식의 세계는 정말 선물인가에 대한 위험을 동일하게 지각하지만 그 근원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차이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사유를 위해 과학적 인식이란 정말 요구되는 것인가에서 바로 갈라질 것이다.

 

나는 은혜 속에 살고 있으면서 보은의 생각이 없는 오늘의 우리네에게 요구되는 타력(他力)의 지적이나, 공변 될 공()과 빌 공()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 원불교의 사상, 물질개벽이라는 현실 체제의 이해와 그에 맞춘 필요개념과 인재를 만들어 내려는 정신이 이미 우리네 사유에 깃들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아무쪼록 후천개벽 사상을 토대로 하여 보다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세계의 사상으로 내딛는 걸음걸이가 확고하게 다져지고, 그 정신에 깃든 양성평등과 민초들이 역사의 주체임과 배타성이 사라진 모든 사상이 하나의 진리로 구현 될 수 있기를 진정 응원하고 기대하는 마음이다. 퇴계의 충고처럼 부디 치열한 부석(剖析)’의 과정을 통해 당당히 K사상이야말로 당면한 인류의 현안을 분석 규명하고 그 대안적 가치를 제안할 수 있는 보편 철학으로 거듭 나기를 기원한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한 ()창비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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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관하여
요한 G. 치머만 지음, 이민정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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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없다.

더불어 우리는 고독을 통해서만 자신을 파악해 낼 수 있다.” - <서문>중에서


나는 고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오래 전 서울대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 가로수 길의 작은 카페 오감도의 실내에서 타오르던 난로와 적막한 고요를 더욱 깊어지게 하던 책 장 넘기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던 분위기에 대한 기억으로 향한다. 지금은 그 풍부한 적요함의 풍광이 모두 사라져버려 더는 찾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때만큼 마음을 가득 채운 충만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소음과 관계로부터 차단된 느낌, 오직 세계에 홀로 내 존재로 가득해진 마음, 그 평온과 온전함의 순간을 다시 찾기 위해 내 상상은 달려가곤 한다.

 

그렇게 달려가곤 했던 회수만큼 나는 고독의 상념이 고착화되어 있다. 때문에 그 고독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사상가의 고독에 관한 이 에세이를 읽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가 고독을 찬미할 때 잠깐 언급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줄곧 고독(solitude)’에 대한 그리움의 의지였을 것이다. 나는 고독을 사회관계를 위한 열정의 회복이나 활기의 충전과 같은 사람들의 세계 진입의 휴식으로 말할 생각도 없으며, 심원하고 고매한 사색의 방법론과 같은 삶의 유별난 지혜라고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어쩌면 오래도록 봉인되어 적절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기를 기다려 온 젊음의 감정, 혹은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내 달콤한 회상에 젖어들고 싶어 하는 욕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저자 요한 게오르그 치머만은 고독을 말하기보다는 고독의 영향, 고독의 이점과 같은 실리의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다. 물론 고독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정신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부수적 과실로 효과와 효용성을 말할 수 있다. 아마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그 삶의 유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행위라면 고개를 돌릴까 저어되는 마음에서 혼자 하는 시간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을 늘어놓은 것일 게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명상에 잠기다보면 일상의 상태와는 다른 더 고양된 상상력의 촉진과 고상한 구상의 산물이 출현하기도 하고, 순수하고 정제된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지적 즐거움에 몰입함으로써 존재에 들러붙었던 세상의 오물들을 생각에서 떨어낼 수도 있다. 더구나 자기 내면의 힘을 마음껏 즐기는 가운데 고양된 정신은 자연스레 고결한 주제의 사색으로 더없이 행복한 느낌을 가져다주며 삶의 시간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깨우치게 한다.

 


혹자들은 말하곤 한다. 바삐 살아가는 지엄한 경쟁사회에서 한가하게 고독 타령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감상(感傷)에 불과하다고, 서둘러 정신 차리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고, 더욱 현실에 매진하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삶이라 부르는 바쁜 경쟁의 한복판에서 지속하려면, 그 소진과 소멸의 억제를 위한 휴지기가 있어야하고, 나아가 삶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열정의 충전이 필요하다. 잠시의 오롯한 사색의 시간, 고독한 시간을 상실한 오늘의 우리네 얼굴들은 텅 빈, 내면의 공허로 그득한 그 결핍을 반증하듯, 온통 마음공부니, 자기사랑이니 하는 책들과 강연이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치머만의 지적처럼 고독은 인생이란 험난한 바다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타고 나갈 수 있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이처럼 삶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것은 마음의 평온이고,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지고(至高)한 행복일 것이다. 어느 한 때, 바위 들 사이에서 작은 물줄기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평원을 거닐며 신선한 미풍을 들이마시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 그 순간 속에서 잇따르는 사유의 세계를 헤아리는 시간만큼은 완전한 자유와 고고한 우수(憂愁)의 경외와 황홀의 기쁨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옆에 누군가 있어도 좋다. 서로의 침묵 속에서 고독의 기쁨을 이해하고 다정한 눈빛의 교환만으로 사랑과 축복의 시간이 되어 줄 터이다.

 

치머만의 고독에 대한 찬미의 많은 에피소드와 단상들을 읽다보면 절로 고독의 시간, 그 내밀하고 기품있는 시간에 시샘이 일어날 것이다. 세상과 관계의 번잡스러움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치머만의 책 어느 곳을 펴들고 읽다보면 어느 덧 행복의 고요한 열기가 맴돌던 장소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깨끗하고 고결한 마음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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