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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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석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읽는다면 그 독서는 어떠한 것이 될까? 책장마다의 단어와 문장이 이미 쉬이 넘어 갈 수 없는 수많은 추억을, 연상되는 언어와 이미지들로 들어차 미소를 머금게도, 슬며시 눈물이 흘러내리게 하기도 할 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젠 처음 펼쳐든 책에서도 순수한 독서는 더 이상 가능치 않고, “문학적 암시가 빼곡해지면서”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과 복잡한 책으로 다가서는 것은 삶의 세월이 훌쩍 넘어선 제법이나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망구엘’이 50대 중반에 들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지배하기도 했던 추억이 담긴 열두 개 작품을 매월 한 편씩 1년에 걸쳐 읽어나가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일화, 인상, 사색을 스케치하듯 적어나간 일기이다. 주제가 되는 열두 작품의 대부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전이거나 명작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이나 ‘디노 부차티’의 『타르타르 스텝』, ‘호아킴 마리아 마차도 데 아시스’의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은 국내에는 낯선 작품들이다. 또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떠오름』은 국내에 『떠오르는 집』으로 번역되어 출간 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더 이상은 찾기 힘든 책이 되어버려 작자와 공명하기 어려운 아쉬움도 있다.

또한 인용되거나 비유, 연상을 통해 등장하는 낯선 200여 문학작품들도 ‘망구엘’의 사색의 길을 좇는 일을 여간 벅차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감상적인 환상에 영속적인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일기를 쓰듯이, 현재를 기반으로 하는 이 매력적이고 세련된 통찰과 사색의 여담은 삶의 성숙한 관조(觀照)와 달관(達觀)의 평온함을 선사한다.

사실 작자가 선정한 열두 작품의 대개는 디스토피아적 이거나 인생역정에 대한 회고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작품들이어서 삐딱하게 경사진 시선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적 인상과 염세적인 가치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소년 킴과 라마승의 여정을 담고 있는‘키플링’의 소설 『킴』에서,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영국의 무지한 이성을 야만에 견주기도 하며, ‘샤토브리앙’의 『무덤저편의 회고록』을 통해 오늘의 우리사회인 “짧은 속보, 반복, 즉시성, 시공간의 어떤 거리도 허용하지 않는 끝없는 순간 같은 것”을  지옥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에 빗대어 현재의 인류사회가 지옥의 다름 아님으로 고뇌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페르디난도 카몽’의 기독교의 ‘타인’에 대한 관계의 목적론적 접근의 성찰이나, 현대 정치사회의 방관자적 구경꾼인 시민들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여유로운 독서가 만들어내는 명상과 통찰의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내 시체의 차가운 살을 갉아 먹은 첫 번째 벌레에 헌정(獻呈)”한다는『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처럼 독특한 ‘여담의 책’이나 “정의를 성취하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로운 사람이 계속해서 정의를 추구해 나가도록 우리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어 놨는지도 모른다.”는 정의의 단상은 우리사회의 현실과 어우러져 새로운 연상을 낳기도 한다.

‘망구엘’의 자유분방한 독서일기가 새로운 독서를 추구하게 한다. 더구나 그의 사유의 날개를 자꾸 놓치는 탓에‘괴테’의 『친화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이리라.

“원하는 대로 읽어라! (LYS CE QU E VOU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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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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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를 청산하고,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며,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실현하려했던 바보 대통령의 시민을 향한 각성의 외침이다.

더 이상 (정치)권력이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지배하고, 특권을 누리려 하며, 반칙을 일삼을 때 분노하지 않고, 부당한 권리와 이익의 주장을 방관하여서는 안 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선출된 권력으로 시민과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은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작금의 미디어법의 강행처리, 4대강 유역개발과 같은 개인을 살찌우는 기술에 집중하며,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을 주도하는 특권구조를 해체하는데 시민의 조직된 힘, 시민들의 행동이 그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 당위화(當爲化)된다.

힘센 자에게 줄서는 권위주의와 기회주의가 결합된 특권의 유착구조는 불공정과 불균형,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만능의 경제정책과 세계화는 거대한 시장권력을 만들어내고, 국민의 권력인 정치권력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지배자 또는 지배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윤리의식, 가치 형성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어요. 그 윤리와 가치의 핵심이 신뢰입니다. - 中略 -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약속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기능적인 기대도 다 배반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바보 노무현의 신뢰에 대한 지적은 국민을 분열과 갈등에 내몰고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케 하는 현 정권의 평가에 적절한 도덕적 가치 기준이 된다.

부조리한 권력을 분산하고, 권위주의를 해체하여, 낮은 사람으로 정치권력의 대표자가 되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하려했던 인간 노무현의 정치적 의지와 정의의 사상이 이렇듯 진정함으로 시민정신을 일깨운다.

어느덧 시민의 편에 서있던 언론은 또 하나의 권력, 언론 권력으로서 시장권력의 편, 아니 스스로도 시장권력이 되어 국민의 권력을 겁박하기에 이르고, 정보의 장을 움켜쥐고 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민주주의를 퇴화시키는 불공정과 권위주의의 한 축이 되어있다.

오늘날 권력은“공권력과 정보(이데올로기), 그리고 돈,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이 중에서도 “유권자의 최종 선택을 결정짓는 정보(이데올로기)마당이‘결전의 장’이다.”그래서 미디어 공간, 언론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려는 시장, 언론 권력 등 특권세력, 특권구조의 해체는 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과, 계층간, 지역간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역사적 과제가 된다.  

 

“역사는 지배와 예속에서 발생하는 제반 갈등이다.”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느냐 아니냐는 이제 시민들의 도덕적 성숙과 능동적 참여에 달려 있다. “신뢰와 원칙을 위해서 자기이익을 포기한 사람”이 들려주는 시민정신과 시민사회는‘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사람들의 연대’를 요구한다. 바로 지금의 획일주의 정치문화, 진보와 보수의 극한 갈등,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대결주의, 지역간 대립구조는 시민의 인간적 자존심이 지켜지고, 정의와 공정이 승리하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청산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과제이다.

 

또한 노무현은 급진적인 진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스러운 사람들을 선동해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라 이야기하는 급진 지식인들은 뭉쳐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되어서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지를 마라.”고 말이다. 그리고 “투쟁 없는 역사도 없지만 그러나 관용과 배려가 없는 역사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투쟁과 절제가 함께 하여야 함을 조언한다.

이제 선출된 정치권력으로서 권력의 행사는 용인하되, 권력에 의한 지배, 권력의 사유화를 방관하는 시민이어서는 자유와 권리의 상실을 막을 수 없다. 권력과 지배를 분리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권력은 위임하되 지배는 거부하는 노력”,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행동과 개입, 참여는 우리 시민들의 소명이 된다.

시장 권력, 언론 권력에 대해서는 상대편에 서있는 소비자로서, 소비자(시민)권력을 조직화하고 정치권력으로 묶어내어 시민 정치권력으로 시장, 언론권력을 통제하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의 주인의식으로 깨어나야 할 것이다. 공정성과 자유와 희망이 넘치는 정의가 승리하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는 소비자 선택, 시민 선택에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부족한 우리들의 동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의식을 선명하게 일으켜 세운다.

역사 이어달리기,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급작스럽게 시름에 잠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여 더욱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여기 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 바로 독자와 바보 노무현간의 뒤 늦지만 고귀한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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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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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 극한경쟁, 소외, 억압, 그리고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21세기 오늘의 한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현 정권의 비(非)민주주의적 퇴행과 신자유주의 맹신의 경제적 부조리라는 정치경제적 삶은 물론,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탐색, 궁극적인 인간다운 삶을 위한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 사회문화,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환기와 자각에 대한 고뇌가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2인의 담론은 사실 우리들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성찰, 진단과 분석, 그리고 나름의 결론과 대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보여주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생태적 상상력과 공동체의 복원, 순환구조가 살아있는 농업으로의 회귀나, 지금의 경제적 공황(恐慌)에 대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만능의 자본주의의 체제적이고 근원적인 한계, 너무도 대중화된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에 따른 이상적 소통집단의 축조, 이러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마을’이라는 우리 농촌사회에 대한 검토, 민주주의를 역진(逆進)시키는 파쇼적 원숭이들의 파렴치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식견을 가진 국민들이 우리사회에는 이미 상당히 축적되어있음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 강연과 청자와의 질의응답이라는 구술적 대면의 내용을 문자화하다보니 그 내용의 깊이가 태생적으로 얕아져 심화되지 못한 측면이 있기에 그런 모양이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세계화란 흐름에 휩쓸려“사회적 자본, 즉 인간관계라고 하는 인생살이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망가진”극심하게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메마른 삶, 그리고 이를 심화시키는 권력의 독선에 대한 대항적 체제로서 중간 결사체(의료생협, 교육생협)의 활성화나 공동체(Commune)로서 농촌(귀농)의 제시는 민주주의를 살리고 근원적으로 안정적인 삶의 방안이 된다.
출발논리는 이와는 다르지만 ‘우정과 환대의 공간’으로서 “거대 권력 중심의 게임”보다는 “실제 삶의 언어에 신경”을 쓰라는 조언과 함께, 경직된 ‘사냥꾼의 질서’에 익숙한 현실을 탈피하여 안정성과 “공포심 없는 상식적 언어소통이 이루어지는” 기댈 언덕으로 농촌 마을을 ‘하버마스’式  공론장, 즉 민의(民意)의 소통과 큰 여론의 발전장으로의 주장은 보다 심도 있는 대안으로서의 검토과제로 기억된다.

한편, 오늘의 한국인, 나아가 현대인들의 ‘불안’에 대한 정신의학적 성찰을 통해 자기대면이라는 자신의 에너지 방향에 대한 인지(認知)와 현실에 대한 충실성의 교훈은 돈과 학벌과 같이 왜곡된 삶의 가치에 경도된 사람들에게 자아회복의 길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미시(微示)적 검토와 아울러, 경제적 삶의 대안으로서 “공공목적을 기업 방식으로 실현”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아름다운 커피’, 수익전액을 기부하는‘러그마크(Rugmark)'와 같은‘사회적 기업’에 대한 제시는 21세기적 새로운 가치와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준다.

 

끝으로 안타깝지만 독립운동의 부인(否認), 친일파의 건국유공자 둔갑, 분단현실의 불인정을 내용으로 하는 현 정부의 1945.8.15이 아닌‘1948.8.15’의‘건국절’지정과 같은 악질적인 민주주의 역진적 행위에 대한 현대사의 왜곡은 이 정부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생태분야에 이르는 12인의 오늘의 한국에 대한 진단과 해석, 그리고 보다 낳은 삶을 위한 대안의 모색은 작은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때론 전면적이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회정의와 공정성이 비어있는 이 정권의 파렴치함과 명령하는 사회, 경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 그래서 비판적 사고가 상실되고 호혜(互惠)의 감각을 잃어버려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과 사회,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의 미래와 희망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박한, 그러나 귀 기울여 경청할 이야기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 깨어있기를, 그리고 새로이 깨어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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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과 올로지 -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생각
아서 골드워그 지음, 이경아 옮김, 남경태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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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즘(Isms;~主義)과 올로지(Ologies;~論, ~說)가 이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 할 밖에 없다. 영문 표기상 이즘과 올로지만 이 정도이니, 학문 좀 한다하면 저마다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독특한 영역을 표시하고 싶어 하다 보니 아마 우리만의 ~주의(主義)나 ~론(論),설(說)까지 더하면 이들 모두를 기억하기에도 턱없을 뿐 아니라 의미도 시원찮은 것이 사실일 터이다.

이즘과 올로지가 들러붙은 세상의 어휘는 몽땅 수록된 것 같다. 정치, 역사에서 철학, 예술, 종교, 경제, 과학, 그리고 성도착 등 잡다한 일상의 분야에 까지 이르는 주의(主義)와 론(論),설(說)이 객관성과 저자의 주관적 의지를 왔다 갔다 하며 흥미롭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적 저술을 독서로 접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명색이 사전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니 짬짬이 여가삼아 훑어보아야 이 저술 특유의 독특한 구성과 해설, 주석의 묘미를 만끽 할 수 있기에 그렇다.

또한, 세상의 이즘과 올로지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주의나 이론과 관련하여 설명을 필요로 하는 용어가 발생하면 주석에 빼곡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그 비중에 따라 별개의 단독주제로 소개하기도 하여 지적 갈증으로 안달하는 일을 아예 차단할 정도로 친절하다.

 

책을 읽다보면 주의와 론,설 때문에 독해가 연속되지 못하고 끊기는 것이 이젠 다반사라 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미 익숙하게 학습된 자유지상주의, 형식주의, 이상주의, 실존주의, 다다이즘, 페티시즘, 마조히즘과 같은 용어들은 물론 머그웜프주의(Mugwumpism), 유퓨이즘(Euphuism), 빅토리아주의(Vctorianism), 노르딕 세계관, 우인론(Occasionalism)에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더구나 늘상 사용되는 파시즘, 보수주의, 상징주의, 인본주의, 근본주의와 같은 용어도 워낙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활용되다보니 모호하기 그지없는 정의를 다시금 정립하고 되새기느라 짜증이 몰려오고, 구태여 이즘과 올로지여야만 했을까 하는 회의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아서 골드워그’의 이 저술은 오늘의 독서인들에게 유용함은 물론 절대 필수적인 비치(備置) 도서가 될 것이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하면, 작은정부라는 당해 용어의 사전적 설명은 물론 유래, 관련 문학, 예술작품의 인용, 사회적 사건 그리고 미나키즘(Minarchism)같은 관련용어로의 연결, 더구나 저자의 위트와 유머가 은근하게 스며들고 조크까지 더해져 사전적 지식을 뛰어넘는 한편의 비평적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한다.

일례로 ‘기독교(Christianity)'의 설명에 이르면“현실에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인 딱 한사람 존재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니체’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오늘의 페쇄적이고 기만적인 종교에 살짝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또한 독불장군식의 부시 독트린을 지칭하는 ‘일방주의 (Unilateralism)’의 해설은 좌익지인 ‘가디언’지와 우익지인 ‘내셔널 리뷰’의 상이한 논쟁까지 곁들여 시사적 안목까지 배가시킨다. 그리고 ‘팽글라시언 (Panglossian)'을 통해 볼테르의 소설 ’깡디드‘를 새로이 떠올리게 되고, 진화학자인 ’스티븐 제이굴드‘의 ’팡그로스의 오류‘에 까지 의미를 두루 섭렵케 하여 주며, 부정적 사건이 연속되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 유사한 용어인 ‘소드의 법칙(Sod's law)' , '피네이글의 법칙(Finagle's law), 나아가 ’핸런의 면도날(Hanlon's razor)'의 일화에 이른다.

“돈 많고 무언가 불만을 품은 듯싶기도 하며 상상력이라고 없는 중년 남자”를 의미하는 ‘배비트리(Babbitry)', 천하고 무식한 유머의 의미를 가진 ‘라블레시언(Rabelaisian)', 위선적 시대의 대명사인 ‘빅토리아주의(Victorianism)’, 생시몽주의, 프리메이슨단 등등 흥미롭고 유익한 세상의 주장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종교편에 도달하면 유독 주의와 론,설이 무진장함을 목격하게 되는데, 역시 종교만큼 자기영역과 주장을 과시하려는 분야는 없다는 확신을 주는듯하다. 당분간 독서 할 때에는 이 방대하고 재치 넘치는 지식 키워드(keyword) 저술을 옆에 두고 수시로 참조해야 할듯하다. 충실하면서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망라된 21세기형 지식사전의 전범(典範)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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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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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 합리주의 이성에 대한 비판과 긍정의 대립적 시각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두 석학, ‘푸코’와 ‘하버마스’의 사상(思想) 입문서라 하겠다. 근대 이성(理性)을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에 대해 친절의 과잉으로 다소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푸코의 근대이성에 대한 억압과 지배 메커니즘의 비판과 하버마스의 부르주아(Bourgeois) 공론장에 입각한 의사소통 가능 영역을 위한 체계의 인식과 이성의 긍정을 매우 수월한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사회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논서(論書)들의 대다수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푸코와 하버마스의 저술들과 핵심사상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이해하는데 충분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실과 이격된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는 사회문제에 직결하여 사유케 하는 지식 실용서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해 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근대 서구사회의 지식이 보편적 진리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폭로하는 작업으로서 ‘푸코’는 근대이성의 은밀한 폭력성을 해부한 사상가로 이해되고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폭넓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시대마다 ‘광인(狂人)’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언어로 규정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이는 바로 “언어는 사물의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사물을 특정한 의미를 내재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도구”일 뿐 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이성과 비이성적인 분류란 국가권력과 과학적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구축된 지식-담론에 의해 관리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통제대상들이 내면의 윤리의식에 의해 스스로 통제하는, 즉 권력은 지식과 담론을 적극적으로 창출해 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특정한 도덕률을 축조해 냄으로써 그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적극적 힘이라는 것이다. 결국 근대는 과거와는 다른 특이한 억압과 지배의 메커니즘인 “도덕규범의 내면화를 통해 개인 각자가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근대인이라는 ‘종속적 주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는 “문화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시도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을 조직생활과 단조로운 소비에 매몰된 대중으로 전락시킨다. 궁극적으로 대중은 「객관적 이성의 소멸과 모든 내적 의미를 상실한 현실의 공허함에 대해 어떠한 유감도 표현하지 않는」 존재들이다.”라고 근대 이성에 대한 비관론적 사상을 전개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의 비판주의를 비판론적으로 계승하며, 오히려 서구 근대이성은 본래부터 해방적 힘을 발휘해 왔으며, 단지 그 해방적 힘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가라앉아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17~8세기 ‘부르주아 공론장’의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근거로 제시하며 근대이성을 긍정한다.

특히 오늘의 사회를 '체계(System)'와 ‘생활체계(lebenswelt: life-world)’로 구분하고,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는 합리성을 물질의 생산과 분배기능인 ‘체계’의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체계의 도구적 합리성(목적론적 합리성)을 막아낼 일종의 방어진지로 생활체계를 인식하고, 현대서구의 본질적 위기는 ‘생활체계의 식민화’, 즉 “국가권력과 과학기술의 합리성이 삶의 영역에 과도하게 침투함으로써 대중의 정치의식이 파편화되고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처럼 푸코와 하버마스는 근대의 목적론적 합리성과 이성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의 평행을 달린다. 그래서 체계 내에서의 언어가 아니라 의사소통적이라 할 수 있는 생활체계 내에서의 언어로 ‘타당성 요구’라는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 필요조건을 통해 완전한 의사소통 영역의 축조를 주장하는 하버마스는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푸코는 너무 비관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오늘의 억압체계를 온존시키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보수적이라는 회의를 낳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자기모순이 종속적 주체를 자신의 도덕규범을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로 전환하는 ‘윤리적 주체’, ‘파르헤지아(parrhesia)’의 도덕적 자질이자 태도로서 푸코는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하버마스는 신념, 담론, 행동의 공동체로서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를 위력적인 민주주의 동력으로서 완전한 의미의 참된 의사소통의 장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가치가 매몰된 목적 지향의 합리성에 경도된 오늘의 사회와 권력의 지식과 담론에 종속된 무지한 현대인의 권력의 주체로서의 전환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푸코와 하버마스의 사상적 계보는 물론, 관련 저술과 용어들의 인용과 해설을 중심으로 기술된 이 저술은 ‘촛불시위’를 소재로 한 두 석학의 가상대담 형식을 통한 근대 이성에 대한 선명한 이념적 대비, 그리고 ‘금기와 편견’, ‘매스미디어와 공론장’이라는 현실세계의 비유를 통한 두 사상의 이슈에 대한 정리는 실질세계의 비평적 시각을 제고시켜 주기도 한다. 푸코와 하버마스의 본격적 읽기에 앞서 이 저술의 정독은 이해와 연구의 효율을 분명 높여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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