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르디외’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의 사회인식에 유용한 통찰적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서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계급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내고 고착화 시키는 우리사회의 교육제도, 정치권력, 상징적 폭력으로서의 구별 짓기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틀로서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난해한 부르디외의 연구를 직접 접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작자의 지적처럼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학습 등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저작물은 부르디외 학문의 핵심개념을 이해하고, 우리사회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실천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학문적 개념을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독특한 병리현상과 정치변동의 흐름을 분석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 부르디외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사회투쟁을 위한 도구로서의 기초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저작은 부르디외의 학문적 핵심개념에 접근하기 전에 그의 사상적, 언어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아비투스(Habitus), 육체, 표상(도식)의 문제를 우리들 일상의 사례를 통하여 선명하게 이해케 하고, 한국사회의 현실에 접목하여 자성적 비판과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는 순서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사상은“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곳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수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표상)이며, 문화적 성향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다.

 

일례로“영화관에 가는 사람과 전이예술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작품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내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서 길들여져 강요된 것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여기에는 한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취향이 녹아있는 학교를 통한 미학교육 속에 일정하게 틀 지워진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예술작품에 대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코드와 암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지배문화가 피지배문화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사진작품, 음악작품, 소비방식 등을 통한 이러한 문화적 구별짓기는 미적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있으나 이들에는 사회체계와 분리 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계급적 구분을 만들어 내거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폭력의 한 양식이 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차별화(구별짓기)양식의 선행하는 체화단계로서 교육체계에 주목하고 있으며, 오늘의 교육체계에는 경제적 기술주의 논리가 깊게 각인되어, 오히려 학교가 계급적 불평등의 관계를 통하여 개인들을 선별적으로 배제하는 기관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학교의 중립성과 공정성이란 이데올로기 안에서 부르주아의 특수성과 불평등한 계급의 재생산을 은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사회에서 선명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서울대, 세칭 일류대를 지향하는 것은 구별짓기의 극단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육체계의 변화는 곧 사회구성체의 체질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을 위한 기득권 계층의 견고한 방어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행태는 명품, 강남지역, 외제승용차와 같은 천박한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는 여기에 더해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리현상으로 외국이 아닌 미국의 문화적 기준에 종속되어 있는 교육현장의 실태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라고까지 몰아댄다. 지식을 두고 전개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기능주의와 사대주의적 풍조는 우리사회의 변하지 않는 기득권계층의 몽매한 욕망의 집착을 보여준다.

이와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노동자(근로자), 분명 사회적 피지배계층임에도 선거의 행태는 보수기득계층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왜 대중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반하는 측에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마르크스의 허위의식이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뛰어넘는 것, 바로 “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중형 아파트와 자동차, 가전제품, 적당한 교외의 휴식, 여행 등 과 같이 노동자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 때문이다. 이렇듯 문화적 구별짓기는 교묘하고 은폐되어 자신들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공고화인 것이다.

 

“모든 개인들은 자신이 점유한 위치에 따라 상이한 행동전략을 보인다.” 부르디외의 새로운 자본개념인 경제자본, 정보자본(문화자본을 포함), 사회자본의 그 내재적 총량에 따른‘장(champ)이론’은 오늘의 계급을 분석하는데 명쾌한 이론으로서, 객관적 계급위치와 개인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불일치에 대한 주관적 계급의 개념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정치변동의 틀을 설명하는데 주효하며, 앞으로의 우리 정치사회의 변화과정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는 형식면에서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에서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여론조작에 의해서 왜곡된 비민주적 행태를 보인다. 또한 대중들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의 그물망에서 평등의 실체를 망각하고 계급적 불평등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부당성과 불의를 당하면 이들 기득계층의 탄탄한 욕망의 연결망이 쳐져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비분한다.

이 문화적 구별짓기, 상징적 폭력, 터무니없는 계급적 위계질서의 고착화는 불평등과 부정을 당위화한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교육체제를 위한 근원에서 시작되는 교육의 대개혁은 그래서 사회의 건강성과 진정성을 확보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와 정의실현의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작자인 홍성민 교수와 함께하는 부르디외의 짧은 탐구의 여정은 방대한 그 어느 사회학저술에 못지않는 충실한 지적성취와 냉철한 사회비판의 시선을 제공한다. 그가 주창하는‘문화민주주의’의 보다 내실있는 발전적 성과와 한국사회의 건전한 진보를 위한 기여에 기대와 공감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높이를 한껏 낮추어 10대의 청소년도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쓰려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굳이 유치한 문장과 언어를 고르고 골라 쓰고, 어떠한 비유도 상징도 배제하였으며, 책 읽기를 거부하는 시각화된 대중미디어에 각성된 사람들도 히죽거리며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통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마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정권시절과 80년대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의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사회였던 이 땅을 이야기하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대개 환상문학의 비현실적 터무니없음과 낭만으로 새기는 모양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한 노 작가의 통찰은 다분히 총천연색의 현란한 수사와 직설화법의 선정적이고 충격적 형상화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리라.

민주화운동시절 죽음을 희구해야했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의 희생자였던 세칭 386세대인 주인공‘허무성’이란 인물의 심리적 외상이 세월의 진행 속에서도 여전히 고문 받던 그 악몽의 기억이 그대로 얼어붙은 채 당시의 신경망에 갇혀 황폐화되어 가는 삶의 궤적을 좇는다.
인간으로서가 아닌 오직 본능만 살아있는 동물로 다루어지는 잔인한 뭇매와 물고문, 죽음의 원초적 공포만이 살아 꿈틀대는 그 느낌을 당하지 않은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찌 공황장애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로 배척당하고, 고문기술자의 조종은 발작적 두려움과 함께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쟁취된 이 땅의 민주화가 가져온 오늘의 현실은 무엇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을까.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세계화, 시장만능의 방임적 자유주의, 넘쳐나는 상품의 홍수, 모든 것이 희화되고 쾌락의 대상으로 변질되어야 생존하는 사회로 퇴락한 사회는 더 이상 진지함과 사유를 원하지 않는다.
“정신 연령이 십대수준인 사회”, 그저 TV를 보고 시시덕대고 왜곡된 뉴스에 현혹되어 온통 탐욕과 기득권 유지에만 일념 하는 기회주의적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그런 유아적 단순성에 자족하는 말 잘 듣는 대중만 양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노예가 되고 있다는 어떠한 자각도 없이.

포르노 아닌 게 없는 세상, 장사꾼의 나라가 되어버린 세상, 경박함과 경쾌함도 구별하지 못하는 우매하지만 교활한 군중의 세상은 더욱 지배하기가 용이해졌다. 소비와 향락에 중독된 인간 군상들에 기대할 것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보수당의 국회의원이 된 가해자인 고문기술자‘김일강’의 인형이 되어버린 피해자‘허무성’은 대학 강단에서, 동료집단에게, 사회의 깨어남을 기대하지만 이미 사고가 마비된 대중들에게 민주와 자유, 정의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기회주의자여야 하고 속물이 될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제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고통만을 남겨줄 뿐이다.

동족을 핍박하던 왜경(倭警)의 앞잡이는 고위관료로, 악랄한 고문기술자는 국회의원으로 이 사회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기득권세력으로 여전히 활개치고, 피라미드의 계단 저 꼭대기를 지향하는 욕망의 무리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어 이들의 원숭이로서 권력의 전위부대로 설쳐댄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88만원이란 공포 그득한 세상, 극한적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사유와 정의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이 더 이상 삶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는 신념이 지배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은 온통 거짓과 배신만이 자욱하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시정을 외치는 인간은 사회 부적응자의 꼬리표가 붙거나 빨갱이, 친북용공세력으로 몰린다. 페미니스트라는 외피를 쓴 여교수조차도 자신의 쾌락을 정당화하고, 지위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도덕적 정의를 활용할 뿐이다.
세상 어디에도 삶의 이유를 정당화할 가치가 없고, 존엄하다는 인간의 고귀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멀쩡하게 깨어있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존재치 않는다. 박정희의 파시즘에 경도된 보수권력의 중심세력이 된 고문기술자에게 바보대중들을 조종할 선전도구로서‘스펙터클’이란 개념에는 권력화 된 시각문화를 조롱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이 비관적이기만 한 세상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진정 살아있는 정신을 표현하려하는 여학생의 용기와 사랑에서 작은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려는 왠지 무기력한  행위에서조차 작은 신뢰와 사랑, 피폐해지고 부조리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도 없다면 삶을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이처럼 우리사회의 망라된 불합리와 불의, 부당성, 진리로서의 가치의 왜곡과 상실에 대해 노작가에게 이 혹독한 독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현실이 너무도 아프게 느껴진다. 한국사회를 향한 이 뼈저린 현상들의 노골적인 드러냄이 욕망의 끈으로 탄탄하게 결속된 기득권자들에게, 그리고 이기주의적 쾌락에 도취되어 노예가 된 줄도 모르는 시민들에게 진정 자성을 위한 작은 시작이 되게 할 수 있을 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저항 할 수 없는 약자를 무참히 유린하고 학대해온 자를 처벌 하지 않는 사회시스템의 그 추악한 생명력에 무감각해지고 또한 그 시스템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참여하지 않으면 배척되는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인가? 작품은 시스템의 그 견고한 벽을 향한 작은 희망과 정의의 불꽃을 발견하려 한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그 네트웍의 구성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온통 욕망의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그들에게는 어쩜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장애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교육시설, 보호시설에서 이들 시설의 운영주체인 이사장, 원장, 교장 등이 자신을 방어 할 수 없는 장애자들을 성적추행과 노동의 도구로 짓밟는 사건이 툭하면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때마다 어리석은 대중을 만족시킬 선정적이고 표피적인 언론의 일회성 정보를 보고 혀를 한번 차대는 것과 같이 짧은 연민과 공감을 보낸 것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에 만족하는 것이 고작이다.
왜 우린 그 부당하고 부조리하며 파렴치한 사건의 진실에 주목하지 않고, 피해자인 그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잘못된 시스템의 시정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지 않는 것일까.

작품은 청각장애아이자 지체장애자들의 학교이자 기숙원인‘자애원’의 교장, 행정실장, 교사가 이들 연약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으로 자행하는 강간, 폭력, 협박, 고문 의 참을 수 없는 추행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취급되는가하는 우리사회, 아니 인간사회의 비굴하고 야만적이며, 교활한 구조를 통해 적나라하게 해체하고 있다.
가장으로 가족의 부양이란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자애원의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강인호’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갈등은 바로 우리들이 생활인으로서의 부담과 사회정의를 위한 행동에서의 가치선택이란 어려운 딜레마를 성찰하게 한다.

교사들의 고용과 해고라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이사장이자 교장, 그리고 행정실장이라는 두 형제의 불의를 외면하는 교사들의 행동에서, 지역의 유지로서 행세하는 이들 형제를 비호하는 경찰과 사법조직에서, 그리고 관할 교육청과 시청 등 감시기관, 교회조직에 이르기 까지 욕망으로 연결된 네트웍은 사회적 불의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공고한 난공불락의 성벽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아이의 성적피해를 고소하지만 늑장을 부리는 경찰, 결국은 지역인권센터, 성폭력상담센터라는 시민조직이 나서야 하는 불온한 사회, 신뢰와 정의가 존재치 않는 사회. 약자가 피해를, 불의의 시정을 요구할 공적 기관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작품의 본질적 무대가 되는 재판과정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만 확인하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돈과 물질에 대한 취약함, 이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기득권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조차 맥없이 허물어뜨린다.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기득권자편에서서 위증을 하는 의사, 지역사회의 눈치를 보는 판사, 교회의 이익을 위해 사회정의를 호도하는 기업화된 종교집단까지.
이제 법정은 사회적 강자에게 합법적 면죄부를 발부하는 형식적 기관으로서만 작동한다. 소수의 사악한 이들 기득권 계층의 악행은 그렇다면 어떻게 처단할 수 있을까? 이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이 견고한 네트웍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달콤한 욕망의 쾌락에 사로잡힌 이들 인간군상에 일회적 맞섬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이미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실체적 진실’이자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회정의라는 것이 무참히 짓밟히고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 바로 우리 개인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악행의 시정을 부단히 요구하며, 정의를 위한 이웃과 약자들, 타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신뢰의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내내 화가 나고, 파렴치함에 치가 떨려오고, 불의에 영합하는 이 사회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게 하지만, 어디선가 작은 희망의 불씨들이 항상 피어오르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이 땅의 연두, 유리, 민수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그리고 서유진 같은 정의를 지켜내려 하는 사람들, 이들을 바라보고 응원할 수 있게 된 강인호 같은 이들의 존재가 있음이 위로가 된다.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연민이 신뢰하는 사회, 정의로운 사회의 밑거름이 될 터이다. 대중에게 또 하나의 사회적 통찰과 도덕적 양심의 각성을 선사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용 하나 없는 책도 팔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미디어의 힘이 강함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건물 지하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곤 제 나름의 허섭한 이유를 갖다 댄 잡기인데, 어쨌건 작자의 세상 네트웍이 인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그 흔한 노동을 피하고 유유(悠悠)할 수 있으니 그 또한 능력이다.

 

그의 자기만의 지하 공간 이름이 뭐라 지어졌건, 커피마니아로서, 음반을 수집하고 클래식에 심취하건 극히 개인 취향의 독백이다. 이 독백이 활자화 되어 재화로 변화되는 자본주의 흐름에 기생하는 것 또한 세상 살아가는 기술이다.

결국 출판이란 무수한 어떤 이유들이 있겠으나 타인과 공감(비판적 공감을 포함)을 갖겠다는 의지인데, 내 얘기만 하면 되지 너 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하는 데에는 그의 말처럼 말 섞기도 싫다.

 

내용 여기저기에 자신의 솔직한 표현이라고 열거한 것이 진정한 자기대면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용하나 없는 인간”, “떠돌이, 날라리, 사이비, 그리고 얼치기”의 잡설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작자의 말마따나 “키치는 가짜다.” 가짜가 보편적 진리의 측면에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 가짜는 더 추해보이고 천하며 경박한 것이다. 키치를 비난 할 처지에 있긴 한 건가?

그가 조우석의 『굿바이 클래식』에 보내는 거친 부정의 의사와 같이, 이 시시콜콜한 잡 글 역시 어떤 의견도 굳이 회피하게 만든다.

 

인간 누구나 “타자의 신체가 주는 위협”이 짜증나고, 자기만의 공간, 자기연민을 핥아댄다.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글이 되고 사유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 제멋에 살면 된다. 그런데 이 걸 팔아먹는 양심은 좀 아닌 것 아닌가? 아무튼 ‘버네이스’의 ‘Propaganda’이래 선전의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 덕을 톡톡히 보는 자들을 탓해 무어하겠는가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은 따로 팝니다
롤리 윈스턴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불임(不姙), 불륜(不倫) 그리고 결혼생활이란 이 작품의 선명한 소재에서, 이 각기의 의미들이 지닌 본질, 즉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라는 내재적 가치와 윤리도덕이라는 외재적 가치의 원초적 충돌을 보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진부한 정의이지만 결혼이란 두 남녀가 배우자로서 서로에게 충실하고 부부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 사회적 약속은 나름 공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화 심리학같은 거대 담론을 끌어대지 않더라도 인간의 본성을 압도할 만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바로 ‘불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불임’이라는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자연적 이치에 거스르는 단어 역시 결혼의 의미를 배반한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여인의 갈망에 어떤 가치척도를 갖다 대어 집착이라거나 지나치다는 평가를 한다는 것은 본원적 섭리에 반하는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이 자신들의 본성을 억제하고 질서라는 사회적 기준을 벗어난 어떤 행위를 정의하는 언어는 불완전하고 모호하며, 절대적 진리이지 못한 결핍이 존재하는 듯하다.

부부의 사랑의 행위가 오직 인위적인 생명의 잉태라는 목적에 맞추어질 경우 그 행위 자체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전환되어 본질적 가치의 훼손을 가져오기도 한다.
작품은 이처럼 결혼생활의 근원적 가치가 훼손당하기 시작한 부부의 일상적 내면을 투명한 창을 통해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심층을 들여다보게 한다.
불임치료를 위한 부부의 노력은 실패의 연속이고, 아내 ‘엘리너‘는 자신만의 공간인 세탁실로 칩거하고, 사랑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도구화된 잠자리는 그네들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급기야 남편 ’테드‘는 헬스센터의 트레이너인 매력적 여성 ’지나‘와 육체적 관계를 맺기에 이르고, 이들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엘리너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이야기는 이처럼 테드와 엘리너 부부의 갈등과 지나를 축으로 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여과 없는 진솔한 일상과 내면의 조명을 통해 삶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우리네들의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의식을 성찰한다.
10년, 20년,... 부부로서 세월을 함께하면서 누군들 갈등과 위기가 없을까.  결혼 초기의 떨림과 열정, 그리고 상대에 대한 성적기대가 어느 순간부터는 사라지고, 그 정염(情炎)이 단지 함께하고 있음으로 인한 평온함과 안락함, 위안으로 변이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 강렬한 욕망의 기억으로 불만과 고통이란 불행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뻔한 이야기와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관점의 시사라 하겠다. “유부남 하고 자는 건 부도덕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엘리너의 지나를 향한 조롱 섞인 방백(傍白)은 부부의 불륜대상인 지나라는 여성에 대한 내면적 갈등에 대한 탐색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이는 테드와 지나의 갈망이라는 거대한 축을 구성하여 ‘부도덕한 행위’로서 불륜의 관계에서의 시선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도덕적 판단, 논리적 거부와 인간의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적 끌림이라는 욕망에 대한 대결의 성찰로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우리의 삶을, 욕망을 통제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우리들은 결혼제도 속에서 도덕적 일탈을 억압하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반갑지만 흥분을 안겨주지는 않는 그 무엇”인 배우자에게서 위안과 위로가 되는 것, 혼자서 중년의 위기를 맞고 싶지 않아 서로 함께 해주길 바라는 그 어떤 것이 보상이 되어주고 또 그렇게 삶을 충실하고 건강하게 유지한다.
그럼에도 “내가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지게”하는 사람, 나를 특별하게 생각게 하는 사람에 대한 희구, 진정 인생에 충실함은 그 사람과 함께 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 만 같을 때, 과연 삶의 행복을 위해 어떠한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한편, “오전 10시 반 거실 바닥을 뒹굴며 수목기사와 섹스”를 나누는 유부녀, 엘리너의 행동은 남편 테드의 지나에 대한 미련에 질시를 보내는 그녀의 행위와 모순됨에도 정당한 행위로 인식되는 것은 굳이 동서의 문화적 인식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대한 부인 할 수 없는 본질적 구성요소, 즉 삶의 본원을 이루는 불가침의 사적 자유라는 관념으로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내 정신이 위로받는 곳, 내 육체가 위안 받는 곳, 우린 그곳을 찾는 것 아닐까? 그것에 과연 도덕적 잣대를 내미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 사랑이 바뀌어 다정한 친구, 친정엄마에 느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곳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닫는 사람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게 될 때, 우린 정말 아주 불행 해 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정말 쉽지 않은 논제이다. 갈망케 하는 사랑, 성적기대가 고조되는 사랑, 다정한 벗과 같은 위안과 평온을 주는 사랑, 이들 사랑의 귀천이 있을 수 있을까? 단순한 이야기 속에 수월치 않은 삶의 의문이 놓여 있다.
섬세한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여성적 시각에서 다루어진 결혼 한 여성들의 행복에 대한 고뇌와 갈등과 성취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의 공감을 높여준다. 스토리의 통속성이 주제와 어우러져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