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나날
안윤 지음 / 시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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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6쪽에서]


이 산문집의 글들인 나날의 기록에는 제목이 없. 책의 마지막 글 속 단 한번뿐인 미지의 삶을/ 어떤 말로 대표할 수 있나/ 대표될 수나 있나라는 반문이 곧 제목 없음의 응답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나날의 기록들에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으려고 오래도록 찬찬히 들여다보는시선이 있다. 장식 또는 수식과 같은 작위가 혹여 끼어들었을까 하는 주의 깊은, 아니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노라면>이라는 글에서 자기 폭로의 압박에 저항하듯,

 

잊지마.

가진 것 모두를 제하고 남은

모든 수식어를 지운

텅 비어 있는

고요한

진짜

 

나를.” (144)

 

이라는 구절처럼 더는 뺄 것이 없는, 내려놓겠다는 꿈을 꾸는 것조차 욕심만 같아 낯부끄러워하는 사람(35)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책자의 몽상을 썼던 루소의 표현을 빌면 어떠한 허구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고, 어떤 정황도 윤색하지 않고,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으려고 애를 다 쓰는것이 곧 진실성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그러한 글들에서 진실을 느끼며, 평온한 공감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다.

 

외할머니의 장례와 화장, 그리고 수목장을 마치고 돌아가며 엄마와 마주하고 받아놓은 큼직한 고기가 든 갈비탕에 뒤늦게 입맛이 당겨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고, 후루룩 삼키는 엄마 얼굴을 바라보며 엄마 잘 가라며 목 놓아 울던, 엄마를 떠나보낸 엄마를 건너보는 작가를 나는 또한 본다. 어느 날의 이러한 순간들, 시간의 겹이라고 불러도 되나? 이 순간으로 겹겹이 쌓인 시간, 기억은 우리들 삶의 실존인 몸의 감각으로 되살아나, 새로운 시선과 이해가 되어 또다른 시간의 겹이 되고 몸의 기억이 되는가보다. 어쩌면 이 산문집 전체를 관류하는 제목 없는 나날의 기록들은 이처럼 시간이고 몸이며, 생의 실존에 대한 감각이고,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쓸쓸한 사랑과 그리움, 타인을 향한 헌정의 마음일 것이다.

 

세 번의 부고 소식이라는 글에는 장례식에 나서기 전 검은색 단화의 구두코를 닦으면 매끄러운 어둠이 반짝반짝 윤이 난다는 문장이 있다. 그것이 찰나 같은 / 생 같은것이듯, 죽음은 어쩌면 준비되는 것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장만해야지 하면서 마냥 미루는 검은 색 정장 한 벌처럼. 나는 본가를 다녀오는 길이라는 산문에 조금 긴 감정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명절을 본가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 온 날, 작가는 남겨두고 오면 안 되는 무언가를 남겨두고 와버린 것 같은 감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인다.

 

나는 거의 매주 노부모가 사시는 1시간 30분 남짓한 곳을 감시병처럼 오가고 있다. 그때마다 두 분을 남겨두고 돌아올 때면 마음 한 구석이 편치 못하다. 작가를 매번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며 다섯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손을 잡는 엄마의 손길을 언젠가는 놓아야만 한다는, 아니 놓치고 말거라는 선명한 예감그것과 유사한 것일 게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하듯,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음을 알기에 그 안타까움은 슬그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안다고 마음이 준비되는 것은 아닐 게다. 그저 다가오는 운명, 생의 순환을 그대로 수긍할 뿐이다. 생에 대한 뭐 별난 겸허함이 아니다. 다만 나눌 수 없는 고통이지만 누군가 곁에 있다는 생각을 그분들이 마지막까지 지니기만을, 결코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를 그저 바랄 따름이다.

 


<눈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을 비롯, <소설 쓰며 배운 것>,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노라면>, <소설 쓰기의 두 가지 곤란한 점>이라는 글들에는 작가의 글쓰기 지향이나, 다짐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원칙들, 소명을 엿볼 수 있다. 눈을 쓰는 일은 자신의 움직임과 온기, 시간을 바쳐 길을 지나다닐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헌정의 마음임을 작가는 읽어낸다. 눈을 쓰는 마음이 글을 쓰는 몸과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 그리고 글을 쓰며 살게 된 나는/ 잠시 가지게 된 / 아주 잠깐 맡아 둔/ 누군가를 대신하는 목소리, 쓰임일 뿐.”임을 잊지 않으려는 애씀은 그 때문에 겨우겨우 (글쓰기를) 밀고 나갈 때 떠오르는 누군가들, 독자들에 닿아보려는 작가 고유의 의지를 확인하게도 된다.

 

책의 후반부에 있는 <쑥 뜯는 엄마>에는 공원이나 산길에서 쑥을 뜯는 엄마가 창피해서 이제 가자, 그만 뜯어, ?”하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있다.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딸이 엄마에 가지는 내면화된 수치심일지도 모른다. 그때면 못 먹고 자라 그래라는 엄마의 답변은 작가를 매번 주눅들게 하였다고 쓴다. 아마 시간의 새로운 겹에 새로운 해석, 자기화해의 다름아닌 연민과 사랑의 시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닮은 듯한 빛바랜 어느 시골 소녀의 사진을 통해 엄마의 소녀 시절, 그 시간 속 자그마한 아이의 등을 가려주고 싶은 마음, 맘 놓고 뜯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발견한다. 우리들은 그러면서 생의 사랑을 배우게 되고, 삶의 그러해야 함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자리, 자기 확인이라는 생을 버텨낼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소설 쓰기의 두 가지 곤란한 점> 중 한 가지로 소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전까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로, 쓰는 사람만이 간직한 비밀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임을 말하듯, 소설 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는 <쑥 뜯는 엄마>의 이야기처럼 써짐으로써 비로소 누군가에게 닿아 공감과 감정과 생각의 미세한 변화를 은연히 촉발한다. 이 산문집은 모든 무제의 날들에”, “그 평범 앞에 내내 겸허한 단 한번 뿐인 말할 수 있는 생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더는 뺄 것이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러한 나날의 기록들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이 기다려진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충만한 그 어떤 이야기를, 작가의 온기와 몸의 움직임이 온통 바쳐진 삶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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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경의 빛
박형숙 지음 / 강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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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집은 육십년 남짓 하는, 이 땅의 현대사를 관류하는 가족 연대기(chronicle)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배경으로만 읽으려 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어내야만 했던 가난과 가부장적 권위주의, 여성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그 내면화, 물질 자본주의의 세례로 흠뻑 젖은 군상들의 습성화된 성공주의, 허영과 차별의식의 폐해 등에 대해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대적 조류의 토대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 아니 마땅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오히려 감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소설집을 여는 첫 단편 너의 기원은 이러한 나의 읽기를 너그러이 승인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화자인 항암치료를 받는 오십대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몸을 놀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며, 너의 몸이 너의 주인이 되었다.”. 몸이 시간성 그 자체임을, 실존의 온전한 실체임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거울 앞에선 자신의 모습에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고도 말한다. 환히 빛나던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가 아니라는 것은 당혹스러움이었을 것이다. 이 두 상황이 작품 전체를 읽는 방향을 지배하였다고 해야겠다.

 

시간 덩어리인 몸의 실존성, 보여지는 나와 다른 나의 감각은 아마 순간의 시간들로 켜켜이 쌓인 기억의 회로를 작동시키게 되었을 게다. 그 최초의 인식이 처음 알게 된 한자 努 力 成 功이다. 너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로 머릿속 일부가 된, 엄마의 눈길을 받기 위해 성공에 목을 맸던 순간, 그 순간이 암세포 성장의 순간이었다는 것이라고 떠올리는 것처럼, 성공을 향해 달려야만 했던, 삶을 지배했던 자신의 행위가 곧 암세포의 성장인 어둠속에 암약하던 고통의 근인이라 말하는 것이리라. 이제 오십대가 된 화자(話者)는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안다. 화자는 산동네 작은 방 여덟 살의 기억이 되고, 그 시절 찬란했던 어느 날 봄날 속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넘치는 빛이자 상처며 아픔과 고통의 기원이 되었던 공간과 사람들을 찾아 떠난다.

 

그것은 너의 삶에 있어서의 어떤 공백이자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며 빨리 내려놓고 싶은 짐 덩어리(오십 원만)“로 여겨졌던 아버지와, 엄마는 희생적이라는 데, 왜 우리 집 엄마는 그러지 않을까?(모경)“의 어머니에 대한 미완의 애도에 대한 확인이고,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네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생각하지 못했어.(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큰언니, 쌔앵하고 찬바람이 느껴지곤 하 집안의 수재, 경기여고, 엄마를 일찌감치 만족시켰던 존재(란이 언니와 은행 잎 한 장)“인 언니, 막상 만나고보면 서로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던 자매들에 대한 응시를 통한 고통으로 들끓게 하던 자기화해의 여정이다.

 

특히 시선을 묶어두었던 장면은 단편 명동 성당약하고 현실 도피적이고 결국 실패하고 말 인간으로 기억되는 낙오자로 여겨졌던 오빠가 내가. 점수 따기의 입시공부나 두꺼운 책을 펼친 채...추상적인 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사람공부, 더 큰 공부를 하고있었다고 인정하게 되고, 마침내 밤샘 농성에 지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껴안고 있었던 그 얼굴이, 이제야 초점을 맞춘 듯 또렷이 보였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장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오빠였다., 경계 없이 손을 잡고 어깨에 팔을 걸쳤던 그때만큼 세상이 활짝 열리고 나 또한 세상을 향해 열렸다고느꼈던 그것일 것이다. 이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오빠 삶에 대한 긍정의 뿌리는 바로 곁에서 마음을 후벼파는 구슬픈 울음과 노랫소리로 숨 쉬고(모경 있었을 엄마에 대한 미완의 애도를 완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린 가슴에 맺힌 기나긴 회한이었던, 상장을 내밀고 오십 원만 줘요, 히잉하는 아이가 있는 오십 원만은 노동기계와 사상계만큼이나 다른 세계를 살았던 딸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묻어난다. 뺑끼쟁이를 경멸과 천시어린 시선이 교묘히 감추어진 도장업이라 기록해야했던 마음은 아버지라는 장애물, 인생의 걸림돌로서 기록된다. 때문에 임종의 순간 아버지의 두 눈에서 생생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공포, 하지만 그 공포는 너의 마음에까지 덮치지는 않았으며,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했던 장례식, 어떤 애틋함도 그럴듯한 상징적 의미도 떠오르게 하지 못한다.

 

이 단편의 멸시와 천대로 나약해진 마음, 눈치와 비겁 속에 굳건해진 비굴만이 있을 뿐. 오랜 노동으로 단순해진 뇌와 무감각만이 있을 뿐인 아버지라고 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아니 에르노가 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는데, ‘사회와 타자를 의식해 스스로 자기 목소리와 행동을 억제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도 모른 채 자기 실존을 그대로 드러낸 침묵을 말하며, 지식인 중산계급에 진입하고서도 빈곤과 계층의 열등감이 한 존재의 내면을 차지하게 된 기원과의 불화의 기억을 소환한다. 에르노는 그 수치스러운 장벽들의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삶의 방식을 사실화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사실 애도의 완결을 통한 자리찾기 또는 자기확인은 어쩌면 이미 글쓰기 자체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의 한 사례일 것이다.

 

열일곱 살의 강은 분노의 글쓰기로 아버지의 이해를 완결했다고 여겼으나 그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작년 겨울부터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어디에선가 나는 막혀 있었다.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침묵이고 공백이었기에 그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음에 대한 고통을 말한다. 이러한 부정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사람은 화자뿐 아니라 한 울타리에서 성장한 다른 자매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미자씨의 기나긴 하루의 자매인 미자언니의 살아 온 태도가 저자세로 명명되듯이 말이다.

 

나는 아버지 또는 큰언니를 말할 때 숙명이나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수용의 언어가 반복됨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대결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라는 운명의 겸허로 납득되는 것, 그래서 임종 몇 시간 전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열다섯 고아가 되어 홀로 궁벽한 고독 속에서 세상에 대항하여만 했을 소년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만큼 절실해 보였다.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던 우리들의 한계에 대한 이해였을까? 자기 확립을 위한 또 다른 방어의 필요였을까?

 

몸의 시간성과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이 불러온 자신의 정체에 의심을 갖게 하는 지나온 자리에 대한 끊임없는 불편함은 자신도 알지 못하던 힘 또는 불쾌감, 분노, 혐오의 징표들을 가지고 살았던 환경이라는 잊고 있었던 시간을 되찾게 하는 모양이다. 사상계를 읽으며, 지식인 중산계급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이 삶의 제자리를 확보하는 중대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소설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고 수없이 반복된 성찰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때문에 읽기에서 배제했던 60년 남짓한 시대성 파편들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폭넓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이 시대가 품고 있는 굳이 들추어내지 않고 묻혀있는 물어야 하는 실체들, 혹은 본질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나의 읽기가 향한 한 사람의 자기 찾기, 또는 온전한 자리 찾기라는 실존적 평온을 위한 여정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소설가 델 주디체는 모든 소설은 무엇을 결정한 것, 즉 글을 쓰겠다고 결정한 동기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집은 치열한 기억의 복기의 긴장이 자리잡고 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쓰기, 나의 정체성을 새로이 해석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그토록 고되고 거칠고 격렬한 것일 게다. 이 소설들에는 소리없이 격렬하게 살아 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고, 치밀하고도 주의깊은 자기 성찰적 인간의 깊은 시선이 있다. 소설에 배어있는 고뇌를 보았기에 어쭙잖은 감상을 쓰는데 망설였다. 늙어가는 자의 두뇌가 점점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가소로운 수사적 상찬은 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 소설집이야말로 진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는 말은 꼭 들려주고 싶다. 시대의 기억을 온전히 담고 있는 몸인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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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 -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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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초상, J. G. 슈라이너의 목탄 드로잉, 1826

 

생명(生命)정치를 주창해 온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이 책은 부제인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가 말하듯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 횔덜린(Hölderlin, 1770-1843)의 시적 삶의 나날을 통해 인류의 삶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비록 진지한 문학비평의 언어로 진술되고 있지만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책의 구성이 이미 그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까닭인데, 횔덜린의 1806년에서 그가 운명(殞命)하는 1843년까지의 연대기와 상당한 기간을 겹쳐 동시대인인 괴테의 연대기적 일기와 병행한 것이 지닌 의미이다. 인간의 삶이란 고작 거주하는 것일진대. 그것을 마치 소유 가능한 것처럼 지껄여대는 인간과의 대비를 통해 시적(詩的) 정신의 궁극적 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독서로 이어지기 전에 발저의 산문에 빠져있었다, 발저의 산문들에 진열된 인물들은 그가 누구를 말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모습이었는데, 1915년에 쓴 산문 횔덜린에서 선배 시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횔덜린은 자유를 잃었으므로 자신의 행복이 파괴되었다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을 칭칭 감은 사슬 (...) 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는 이 절망에 빠진 상처투성이의 예술정신은 수려한 의상을 걸친 무용수처럼 높이 솟구쳤다고 쓴다. 파멸하고 있다고 느끼는 동안 황홀한 절창의 시를 썼다고. 발저는 횔덜린의 하나의 끝자락이다. 또한 횔덜린은 루소의 산책자의 몽상의 한 자락이다. 물론 이러한 계보는 소위 문화를 규정해 온 범주들의 대립 - 능동/수동, 공적/사적, 이성/광기, 가능성/현실성, 의미/무의미, 통합/분리 등 - 을 무력화하는 전형이라는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아감벤이 기술한 이 책의 연대기로 돌아가자. 1806년부터 책장의 좌우로 왼쪽 지면에는 괴테의 일기를 중심으로 하는 소유적 삶의 세계의 기록으로 읽힌다. 그리고 오른 쪽 지면에는 횔덜린의 삶의 기록들이 연대기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독자들은 지면의 좌우를 번갈아 읽으며, 왼쪽 지면의 괴테의 삶의 형식에 불쾌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 아감벤의 의도였을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특별히 괴테를 별도의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연대기의 몇 부분만 소개하면 이렇다.

 

18061014, 프랑스군대가 프로이센군을 크게 격파했다는 소식을 들은 괴테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성문으로 프랑스 군대를 마중 나가 포도주와 바이마르에 프로이센군이 없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하겠다고 통지하는 계략을 통해 자기 재산의 약탈과 소실을 피한다. 적극적인 적국에 대한 부역이다.

 

1015일 나폴레옹 군대가 바이마르에 도착한다. 괴테는 일기에 황제(나폴레옹)가 도착하여 궁정에 갔다고 쓴다. 괴테는 나폴레옹이 바이마르 공국을 해체할 때 자신의 연금과 자기 소유 아닌 집과 원고들을 잃을까 걱정하여 급하게 결혼을 치른다. 이때 횔덜린은 그의 어머니의 조치에 의한 정신병원에 강제 유치된다. 왕실 재무부는 불우한 여건의 장학생이었던 횔덜린의 회복을 위한 150플로린의 지원금 제공을 허락한다. 괴테는 체로 불을 붓듯 자신의 돈이 줄줄세고 있다며 포크트 장관에게 200탈러의 돈을 요구한다. 1112괴테는 쇼펜하우어 부인이 집에서 유난히 기분이 좋았고...“, 횔덜린은 광증 환자의 치료를 위한 수은치료 약물을 삼키고 있었다.

 


1809년 괴테의 편지는 그가 사는 형태의 또 다른 민낯이다. 귀족 및 최고 부르주아 인사들이 게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이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궁정 안내원을 적절히 배치해야하며..., 이후의 내용들은 가히 역겨운 계급의식과 차별의식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런 기록들을 지속하는 것은 내 수고의 낭비일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이때(18095) 프로이센군으로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전했던 횔덜린의 친구들 제켄도르프, 야코프 츠빌링 등이 전사한다.

 

제켄도르프가 케르너에게 보낸 전사하기 2년 전인 18072월의 편지에는 관계도, 보살핌도 없이 고통 받는 마음에 위로와 만족이 될 우정도 없이 버려진 친구 횔덜린의 운명에 마음 아파하는 심경이 쓰여 있다. 18075,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횔덜린은 네카 강변 슈타인라흐 계곡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목수 에른스트 침머의 탑이 있는 집 꼭대기 층에서 1843년 폐질환으로 사망할 때 까지 36년을 살았다. 36년에 걸친 한 위대한 시인의 연대기는 그것에 그 어떤 수사나 설명, 해석이 불필요하다. 날들의 일기와 편지, 방문객들의 소소한 기록들, 그네들의 저술에 표현된 횔덜린과의 일화와 횔덜린이 써준 시들, 만남의 인상들이 그대로 심오한 하나의 일관된 철학, 거주하는 삶이라는 시인이 몸소 실천한 삶의 태도와 형식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모범으로 다가온다.

 

아감벤은 이러한 나날의 일상적 기록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계 전체와의 관계 안에서 고유한 방식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지닌 삶으로서의 습관적 삶혹은 거주하는 삶무한한 연결”, “무한한 통일이라 해석하고 있지만, 그렇게 현학적 언어로 구태여 고상을 떨 것까지는 없다. 횔덜린은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몰고 온 소유하는 삶에 부착된 그 탐욕스럽고 타자의 세계를 몰살시키는 문명적이라 일컫는 인간의 인위적 형태의 삶에 혐오와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며, 이를 위한 자신의 그 어떤 시도도 전환을 가져 올 수 없음의 직시였다. 여기에서 아감벤의 특출함이 있다면 시종일관 횔덜린의 광기에 대해 의심을 보내는 눈초리다. 횔덜린의 광기는 그가 의도했던, 순수하게 연출된 의지로서 시대의 인간들이 보이는 삶의 태도와 다른 형태를 보였다고 해독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독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태도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삶의 태도이다. 생애 만년에 이르기까지 노쇠에 의한 흐림은 있을망정 시인 횔덜린의 명료함과 총기는 사라진 적이 없다. 그의 시가 이를 입증한다, 다만, 그의 시어들, 즉 단어와 문장들의 논리적 연결 부재를 광기로 보았던 사람들의 이해는 그 연결 부재가 지닌 언어에 대한 시인의 시적 의지를 오해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립의 교대 속에서도 연결성과 동일성을 이뤄야 하며, 시적 정신의 궁극적 과제는 (...) 하나의 순간을 보존하는 데 있다는 횔덜린의 말 속에 이미 진실이 있음이다. 즉 횔덜린의 시 문장들은 분열되어 나오는 다양한 대립과 통일성 사이의 두 대립적 요소가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변증법, 혹은 휴지(休止)이론으로 말할 수 있는 단어와 리듬의 중단은 표상의 교체가 아니라 표상 그 자체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는 말이다. 횔덜린의 시구들을 접해 본 사람들은 갑작스레 고립되어버린 듯한 동떨어져 보이는 단어와 문장들이 병렬로 연결된 문장에 당혹스러워하곤 한다. 횔덜린이 과감하게 중단하는 이러한 문장 형태는 의미의 흐름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독자적으로 드러내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횔덜린은 헤겔식의 -의 반성적 통합으로서의 합의 변증법이 아니라 두 순간의 화해 불가능한 분리라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횔덜린은 궁극적인 -형식’, 즉 문자 그대로 자연(自然)(Naturpoesie)’를 직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횔덜린의 시적 삶이란 그래서 그의 시대가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사유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이를테면 인간적 삶이 무엇인가와 같은)을 향한 실천이자 예언으로서 수용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이 위대한 시인의 삶과 글로 구현된 일생의 행동은 오늘을 사는 우리네에게도 그대로 하나의 궁극적이고도 본질적인 삶의 형식을 가리킨다. 실패하게 운명 지워진 우리들의 삶의 형식에 대한 사랑 말이다. 아감벤이 괴테의 일기를 축으로 하는 연대기를 횔덜린의 그것과 병행하여 구성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삶의 형식에 대한 뚜렷한 대조를 읽어내기를 기대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그 대비를 그대로 발췌 인용한다. 대체 인간의 삶이란 거주하는 삶일 뿐, 그것이 소유의 삶이라는 불가능한 형식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출처: 본문 에필로그 341쪽 부분 발췌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그래서 습관적 삶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주어짐에 따른 삶으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횔덜린의 광기는 사회전체가 깨닫지 못한 채 빠져든 광기에 비한다면 완전히 무해한 것이라는 아감벤의 말은 모든 인간이 인간다움을 상실했을 때 유일한 인간이 하는 삶의 모습을 이르는 것일 게다. 횔덜린이 운명하기 전에 쓴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로 여겨지는 시 전망, Die Aussicht으로 책의 여운을 달래련다.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회복할 대안적 영역으로서 문학을, 시를 고뇌하는 사람들, 언어로 표현한계를 실감하는 삶의 총체성을 쓰기위해 애쓰는 사람들, 삶의 비밀에 다가가고자 그 열쇠를 찾는 사람들은 이 책을 발판 삼아 횔덜린을 읽어보세요 라고 감히 권한다.

 

전망, Die Aussicht

 

인간의 거주하는 삶이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포도 넝쿨의 시간이 저 멀리 빛날 때,

여름의 텅 빈 들판도 그곳에 함께 있고,

숲은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네.

자연은 머물고, 시간은 스쳐 지나간다.

완전함에 비롯된, 하늘의 드높음이 인간에게 빛나네,

마치 나무들이 꽃으로 치장한 것처럼.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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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7-27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두루두루 이해하며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보고 싶네요. 필리아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비의식 2025-07-27 17:17   좋아요 1 | URL
에밀 시오랑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프레임과 형상에 갇혀 모든 것을 위장하는 세련된 문화의 경직성˝을 삶의 빼어난 기술이라고 칭송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삶의 의미라는 걸 굳이 들추어내려 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죠. 삶이란 살아지는 것임을. 미쳐야만 했던 횔덜린의 은둔의 시간을 읽다보면 동류 인간으로서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그는 삶이란 것의 총체에 어느 만큼 다가섰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산다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일까요....
곰돌이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꼭 읽어보셔요. ^^
 
세 개의 푸른 돌
은모든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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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인연으로 맺어진 나이 서른을 맞이하는 루미, , 반희, 세 여성 각자가 헤쳐나가는, 마주한 삶의 이해와 조율에 대한 성장의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는 이 작품 세 개의 푸른 돌에서 나는 다시금 소설 속 인물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작가의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라는 체화된 진정성일 것이다. 은모든 작가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다.

 

작가의 말을 맺는 마지막 문장인 줄곧 고생만 하고 자란 갸륵한 아이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10년 전 학창시절 어느 날의 한 토막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너희 아빠는 자기 편해지려고 너를 팔아먹겠다는 거네?”, 책상에 엎드려 수업은 물론 반 급우들과의 소통도 일체 없던 전학 온 루미반희가 작게 나누던 대화를 엿듣고 큰 목소리로 루미를 향해 뱉어낸 말이다.

 

학교 앞에 내 걸린 아이를 입양시켜주면 그 부모에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역겨운 현수막의 유혹에 홀아비인 루미의 아빠가 현혹되어 루미에게 넌지시 건넨 사연에 대한 반응이다. 심청전의 21세기 버전, 자식의 죽음과 같은 극단의 희생을 요구하는 당대 효의 윤리에 스며있는 비도덕성에 대한 반기의 목소리일 것이다. 자기 고통, 자기 연민에 매몰된 루미 아빠라는 인간에 대한 반감, 그러나 현의 느닷없는 외침은 급우들의 성토로 돌아온다. 루미의 처지를 급우 모두들에게 발설하여 난처하게 만든 무신경에 대해서. 현은 자기감정에 충실해 친구의 체면을 돌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한때 아역배우로 대중의 시선을 받았으나 그녀의 행동에 낙인이 찍히게 됨으로써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전학 온 학교에서 현은 외톨이다.

 

배우의 세계에서 내려 온 현으로 인해 그녀의 유명 덕에 의존했던 가게는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현의 아빠, 그의 가계(家系) 일원들은 어린 현의 탓으로, 그리고는 루미의 아빠와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연민의 나락에서 방황한다. 현은 이러한 가족들의 면모에서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무에 대항하여 자기 삶에 철저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현의 말처럼 오염된 평균치, 세상이 딸에게 부여하려는 그 괴이한 의무가 강요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한 딸이 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 결정적 방향을 제시한 강릉 단오제에서 조우하게 된 제주 무속 신화 <가믄장애기>를 말한다. 얄팍한 효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주인공 가믄장애기의 당찬 주체적 삶, 아니 그 이상인 이야기가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현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말을 건네고 허물없이 대해주던 반희의 모든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관대한 태도, 어떠한 미움이나 짜증이 고일 공간이 없어 보이는 그녀와 친교를 나누지만, 그 감정은 복잡 미묘한 것이다. 절망, 언제든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파도 앞에 서 버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반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속 쓰림, 모든 것을 가진 삶의 안락함에서 연유하는 넉넉한 여유에 대해 느껴지는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현은 반희에게 말한다. 네가 가진 거 안 뺐기고 안 망하고 울고불고할 일 없이 그대로 잘 살면 좋겠어, 진심으로.” 이 세상의 딸들을 향한 기원의 말처럼 여겨진다. 너만이라도 세상의 그 기이한 윤리적 부담이란 명목으로 강요된 삶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원의 목소리일 것이다.

 


학창 시절이 끝나고 서른을 목전에 둔 크리스마스 전날 현은 루미를 찾아온다. 간호대학을 나와 내과의원에 안착한 루미는 검정색과 창백한 얼굴의 뚜렷한 선명함이 도드라진 현과 마주한다. 여전히 아버지의 돌봄에 붙들려 자기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못하는 루미는 자신이 참여한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현과의 만남 속에서 집과 병원만을 오가는 삶을 살고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도피한다. 매 시간 딸을 닦달하는 전화를 하는 루미의 아빠, 딸의 돌봄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인간, 자식의 삶에 대해서, 그 자유의 대해서 무신경한 이기적 삶을 현은 꿰뚫어본다. 지적능력, 혹은 인격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에 매인 친구에게 자신의 믿음에 기초한 이야기를 토해낸다.

 

한없이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마냥 기대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야. (...) 자식 위에 드러눕는 부모들 널렸다고. (...) 20년 동안, 너는 이렇게 컸는데, 너희 아빠는 계속 그 상태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루미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탈주하고 싶다고. 현은 이런 루미에게 시도를 해 볼 용기를 제공한다. 읽는 이들마다 세 인물에 대한 매력이 달리 다가오겠지만, 내겐 현의 단단함, 스멀스멀 내면을 갉아먹는 사회적 강제들과 자기 연민을 성찰하며, 자신의 생활이 생각보다 허술한 토대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 스스로 추스르는 당참이 매혹적이었다. 집에서도 검은 옷을 입으며,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라며 자신의 불행을 발산하는 인물. 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 무의식의 발현인 검정색 옷을 벗어던지는 날은 그녀 자신이 루미에게 건넨 말처럼 시도를, 그 무엇과의 마주하려는 시작의 행위로만 가능할 것이다. 반희는 네 존재 자체가 속 쓰리다는 현의 말을 언제 이해하게 되었을까. 여성이기에 겪어야하는, 피해갈 수 없는 울고불고할 일은 기어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반희는 처절한 상실의 아픔 속에서 비로소 현의 말뜻을 이해한다. 소설은 이렇게 세 여성들이 서로를 반면교사로 함으로써 그 투영된 상()의 의미를 해독하고, 직접 겪으며 삶의 구체적 행동을 학습한다.

 

그 여정은 현이 친구 루미를 위해 가르쳐주는 세상에 펼쳐진 다양한 장소들, 음식들, 사람들이고, 현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속 인물의 해석 속에서, 그리고 고통의 원 장소인 제주와 같이 루미와의 동행한 공간이며, 어느 한옥 숙소의 노천탕 느낌 나는 욕조다. 작가는 이들, 특히 루미에게 그 얽매인 틀 속을 뛰쳐나와 일말의 불안감도 느끼지 않으며 얕은 탕 속에서 안전과 평온감, 아마 그녀를 옥죄던 것들로부터의 해방감을 비로소 느끼게 해주는 작가의 위무가 온화하게 전해져 옴에 반응하게 된다. 그래 우리들의 행복은 타인의 고통완화와 행복증진임을 확인케 한다. 진정 좋은 윤리, 진짜 좋은 삶을 만드는 인륜이란 재산가치나 강요된 굴레로서의 복종이나 순응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아비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효라는 이상을 실천하는 비장미라며 심청을 선전하는, 효를 거대한 사회적 이벤트처럼 홍보하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희생논리를 강요하는 관성이 이 사회에 여전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 명령의 부당성을 이 땅의 세 딸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장면들을 통해 항의하는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현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는 게 서러울 때 꼭 알리고, 연락하면 반드시 받아주자고.” 언제든 대화상대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연락해달라고. 작가의 2020년 발표작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에서의 경진의 목소리와 겹쳐 들려오는 듯하다. 은모든 작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듣고 그들에게 눈을 맞추며 진정으로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귀 기울여 듣는 이야기다. 그것을 배우는 이야기다.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지도록 하는 이야기다. 21세기 심청전은 은모든에 의해 이렇게 새로운 윤리, 참담하고 극단적으로 강요된 희생의 윤리로부터 정당한 탈주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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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5 소설 보다
김지연.이서아.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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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계절이 다가올 즈음이면 세 작가의 작품이 수록된 이 계절의 소설 선정 작품집인 소설보다를 읽는 것이 내겐 거의 습관적 독서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좀처럼 책장을 펼치지 못하고 한 달 남짓 묵힌 끝에 책장을 열었다. 김지연 작가의 무덤을 보살피다의 어떤 낭패감을 느끼게 하는 화수는 길을 잃었다.”는 문장에 이어지는 뒤늦은 후회겨울이 시작되고도 썩지 않은 낙엽들이 불현 듯 내 후각을 자극해왔다. 아마 이 기분 나쁜 후각 때문이었겠지만 이 자극적 인상이 곧장 책장을 넘기게 했으니 내 취향도 조금은 특이한 모양이다.

 

이서아 작가의 방랑, 파도는 이젠 시간 덩어리가 되어 세계에서 점차 소외되어가는 나에게는 통통 튀는 문체의 발랄함이 기분 좋은, 아니 잃어버린 기억의 시간을 되살리는 기분이었다. 아마 장소라는 한 공간을 점유하던 이들로부터 계승되는 공터’, 그 무한히 열린 가능태로서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화자 파도를 타기 위한 노력이 부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무언가 익숙해지기 위해서 배우지 않게 된 내 체념에 스쳐가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작품이었다고 할까?

 

함윤이 작가의 작품은 내겐 두 번째 만남이다. 왠지 치밀하게 준비된 꼼꼼함이 떠올랐는데,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역시 이러한 내 선입견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단편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3부작인 연작 중 두 번째가 되는 것 같다. 소도시 산길의 천문대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의 노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이 낯선 소리에 스며있는 적의와 호기심의 이중적 감각의 공간을 거닐게 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세 작품은 낯설거나 혹은 새롭거나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경계를 생각게 한다는 점에서 닮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의 내적 이해는 조금씩 다른 곳을 가리킨다. 김지연 작가의 성묘(省墓)를 풀어 쓴 무덤을 보살피다가 대체 무엇을’ ‘보살피자는 것인지와 같이 주관적 믿음의 자의적이고 모호함을 빗대 산속 외딴 곳의 기이한 양어장의 썩은 비린내가 진동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공존해야만 하는 악의에 대한 직시를 감각케 하고 있다면, 이서아 작가의 화자인 마을의 외지인이자 젊은이 는 그 낯섦을 해석해야 할 삶의 의미이자 무의미의 무게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익숙함과 낯선 것의 마주침에 엮여들어, 이를테면 변증법적인 출현인 적극적 호기심으로서의 새로운 세상의 상상적 시도처럼 보인다.

 

이처럼 이들 작품들은 함윤이 작가의 말처럼 낯선 것이란 결국 내가 자주 보거나 듣거나 겪지 못한 것은 나로부터 먼 것 일뿐임을 통해서 그것들의 실체에 다가가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밝혀내고 알아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장소, 생각 등의 세계를 규명하는 작업일 것이다. 무덤을 보살피다의 화수가 산속 성묘길 하산에서 길을 잃어 도달한 곳,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있는 양어장의 먹이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검은 입들의 징그러움은 그것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인물과 어울려 그 부정성의 존재가 풍기는 악의가 확 끼쳐온다.

 

이 기이한 장소를 배경으로 자기 믿음에 대한 패배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공고(鞏固)하게 엮여있는 거미줄 같은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아마 사촌지간인 듯한 화수와 수동이 가족집단으로 기피되었던 삼촌이란 인물로 이해되는 양어장의 인간, 두 사람에게 알지 못할 악의를 내뿜었던 인간이 화수네 집 안에서 어서 와라며 그들을 맞이하는 장면은 어떤 기시감처럼 낯익은 불쾌감이 몰려온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 내면에 축적된 악의를 발산할 기회만 나면 이 세계를 어지럽힐 그것들을 피해 갈 수 없음의 경고인 것만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발호하는 추악한 기득권자들의 그악스러운 악의를. 언제든 우리집 거실에 출몰할 수 있는 혈연으로서의 악처럼 피할 수 없는 공존을 버텨내야 하는 그것들을 직시케 하면서 이 소설은 내게 충격적으로 각인된다.

 

방랑, 파도는 균형을 잡고 파도와 일체가 되어 그 흐름에 올라타 서핑을 배우는 외지인 의 내적 성장의 기록으로 읽힌다. 요양원, 백반 식당 등 에게 곁을 내어 준 사람들과 함께하며 삶의 무게를 배우고, 그 의미 혹은 무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한가한 백반 식당의 무료한 시간을 유익하게 활용키 위해 자신이 좋아서 하는 요양원 할머니들을 돌보는, 아니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배우며, 향자 할머니의 공원을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공터로 계승하듯 잔잔하게 이 세계를 성찰하는 시선이 있다.

 

 

【「방랑, 파도본문 82쪽에서

 

소설에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반 식당 주인 남매와 가 파도를 타는 이미지가 있다. 파도 위에서 서핑을 타는 인간의 동작은 매우 역동적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우리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대형이 한없이 고요하게 느껴지듯 매우 정적인 것처럼, 그 시선, 사유의 낯설게 하기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허무와 반항으로서의 인간 행위를 모두 아우르는 우주적 관점을 선사해준다. 향자 할머니가 남긴 밑줄 그어진 책과 보잘것 없는 반지와 같이 유산 아닌 유산이 주는 기쁨과 부채감이라는 이중성이 그것일 것이다.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소도시 면사무소 신입 공무원 이노아가 졸린 개처럼 생긴 눈으로 훑으며 어디를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과장의 말에 따라 선배 공무원 박녹원 주사와 민원 속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진 천문대를 향한 첫 외근업무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괜스레 주변이 온통 적의감에 물든 것 같은 느낌이다. 민원인들의 목소리에 스며있던 불안”, “너무 오래 눈 마주치 마세요,” 와 같은 경계의 적의와 낯선 장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교접하는 삶의 신비적 흐름이 독자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며 모호한 마음을 깨운다.

 

소설에 등장하는 독수리들처럼 무섭지만 매혹적인 것이 비밀 종교인들의 이벤트로서의 천문대의 행사와 서로 교호하면서 그 낯섦의 정체로부터 출현하는 것의 수용을 도전케 자극한다. 그 결정은 김지연 작가의 악이 점유하는 불쾌일수도 있고, 이서아 작가의 이 공터는 내거야, 내가 하늘이랑 계약했거든처럼 활짝 열린 드넓은 공간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며, 함윤이 작가의 소설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이 번 계절의 소설들은 내겐 그 낯섦에 대한 긍정과 부정성을 모두 함축하는 이해의 폭을 조금 넓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작품집에서도 나는 또 한 명의 작가를 내 마음에 심어둔다. 좋은 작가로 성장하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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