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내전 맑스 엥겔스 에센스 3
칼 마르크스 지음, 안효상 옮김, 최갑수 해제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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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다급히 프랑스 내전을 펼쳐야 하는가!  

이 사회의 힘, 이제 국민이라는 신체가 돌려받아야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8715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협회 회원들에 보내는 담화문 형태로 발표된 글로써, 같은 해 613프랑스 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다. 이 글이 써진 시기를 무엇보다 주목할 이유가 있는데, 바로 파리 코뮌의 국민방위군을 포함한 추산 3만 명이 무참하게 도륙되던 523일에서 530일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 점이다.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기술된 당대사(當代史)라는 이례성이다. 역사는 이 기간 521일에서 528일까지를 피의 일주간이라 부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잔인한 대()학살극에 대한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중립적인 명명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난폭한 기득 권력이 시민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가의 역사적 증거다.

 

대략 150년 전 유럽의 한 장소에서 발생한 국가 권력을 독점한 역사에 대한 반동 세력인 소수의 권력이 시민을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대살육 한 것은 가히 인류 역사에서 발견하기 드문 사건이다. 부르주아 측에 서있던 에밀 졸라같은 작자도 이 시기를 묘사한 소설 패주를 썼는데, 시체가 마구 버려져 산더미처럼 쌓인 파리 시가지와 불에 탄 시체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배경처럼 묘사할 정도였으니 그 끔찍함의 정도는 아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18713월부터 10주 남짓 노동자시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이 세운 최초의 정부였지만 이 코뮌정부는 실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상념을 넘겨준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의 이 책 해제(解題) 말미의 글처럼 2025년 지금 프랑스 내전을 다시금 펼쳐 읽는 이유는 인민대중에 대해 오만한 주인행세를 하며 이 땅에 기생충처럼 몸을 박아 넣고 이권으로서의 권력을 빨아대는 관료제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족속들의 행태가 극단에 이르고 있는 까닭이다. 썩어빠지고 무책임하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1870년의 프랑스 권력집단들의 행태가 마치 2025년 오늘의 한국 사회로 옮겨온 듯 하기 때문이다.

 


1871년 피의 일주간을 내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전이었지, 쌍방의 전력이 동등한 총력전으로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뮌군은 방어전은 펼칠 수 있으나 공격전을 전개할 군사적 능력도 조직도 없는 시민저항군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코뮌의 국민방위대라 하지만 상당수가 배신하여 오히려 적군이 되어 시민 살육에 합세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실상을 프로이센(독일)군에 대항하여 함께 했던 어제의 국민방위군 동료가 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감상적으로 쓰고 있는 졸라의 상기 작품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사실 동료 시민의 잔혹한 살육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혹독한 사태가 일어나야 했는가와 코뮌이 후대에 남긴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코뮌이 일어나게 되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배경에 대한 이해는 실로 중대할 것이다.

 

18707월에 개전된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제국)의 전쟁발발에 대한 원인은 역사학자들마다 제각각이어서 단 하나의 중대 원인이 전쟁을 촉발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제 2제정 황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권력의 연장을 꾀하려다 실패한 전쟁이라는 마르크스의 판단에 동의하려 한다. 한 자연주의자의 소설이긴 하지만 패주또한 이 전쟁의 초기를 묘사하며, 권력 연장에 집착하며 서서히 고립되는 보나파르트와 독일을 향한 선제공격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미적거리는 무력한 프랑스군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판 함정에 프랑스가 걸려들었다는 시각이나, 룩셈부르크 지역 등에 대한 양국 간의 영역 다툼으로 인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표면적이고 결과론적 판단일 뿐 모두의 이면에 도사린 궁극의 원인이 있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즉 프랑스 내부에서의 권력 암투와 무모한 해외 식민지 쟁탈 전쟁으로 인한 이권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상층부의 부패로 인한 분열의 심화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로 고립된 보나파르트로서는 만회할 명분이 필요했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마치 윤씨가 전쟁을 유발하려 했던 것과 같은 동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의 전력이 월등하게 압도적이었음에도 아군 전선 지휘관들의 상호 눈치 보기로 공격의 기회를 실기하기가 일쑤고, 그나마 전투에서는 먼저 도주하는 지휘관들이나 전략적 무능과 더불어 파리 제정 고위관료들과 황제의 주변 권력들의 중앙정부에서의 힘의 이동상황을 주시하는 지휘 장군들의 기회주의가 판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권력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던 소위 엘리트라는 소수 집단의 깊은 부패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사회의 집단 내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겐 가장 중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인데, 바로 인민대중의 인식수준이다. 졸라의 작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교양을 가진 지식인 청년 모리스로 대변되는 당대 중산계층의 의식이다. 과거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이 인물이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한 것은 애국주의의 발로다. 참전 초기부터 사고할 줄 아는 이 인물은 개인 화기는 물론 병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 않으며, 전선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이끌고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는 이 무슨 해괴한 작전인가!” 라고 당혹스러워한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모리스는 민족적 퇴화라고까지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회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의 부패가 과거 제국의 환영에 도취한 프랑스인들의 정신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자각일 것이다. 이 전쟁(일명 보불전쟁;普佛戰爭)은 애초에 승리 할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항복 협상에 이르는 과정 또한 인민대중, 즉 국가의 이익과는 무관한 상부 계층들의 자리 보전이라는 권력 유지에 맞추어져 진행된다. 개전 두 달도 되지 않은 92일 보나파르트가 포로가 됨으로써, 제 2제정 몰락과 함께 95일 공화정이 선포된다. 그리고 들어선 자가 아돌프 띠에르라는 교활한 인물이 프랑스의 수장이 된다.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인민을 향해서는 떠들고 뒤에서는 독일과 항복 협상을 벌여 나라를 팔아먹는다.

 

1871128일 파리가 독일에 항복하자, 파리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기 시작했고, 민중의 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2월 패전 끝에 파리에 집결해있던 국민방위군은 연맹을 결성하고, 임시중앙위원회를 결성, 새로운 혁명기구를 탄생시킨다. 사실 파리의 코뮌은 1871315일 이전인 18712월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띠에르 정부가 파리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오직 코뮌만이 파리의 치안과 정치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1871315일을 파리 코뮌의 단독 정부출발로 보는 것 같다. 띠에르는 코뮌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면서 뒤로는 비스마르크와 코뮌의 파괴 지원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득권을 누려왔던 권력집단이 하고 있는 짓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뮌의 역사와 그 참살에 이르는 과정은 역사서들의 기술에 맡기기로 하고, 다시 인민대중의 보편적 인식 상태로 돌아가 살펴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까지 불의와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소수 권력에 저항한 당시 파리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이념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 우리네의 인식 교정에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하는데,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대에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성립되기 이전이고, 그들은 이러한 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온전히 교차한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들 또한 소위 애국주의(일종의 민족주의적 이해에 기반 한),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애국주의의 믿음에 기반 한 다수의 시민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에 무관심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코뮌을 지지하고 코뮌군이 되었을까?

 

이들은 가시적인 실상을 읽을 수 있을 뿐이기에, 독일에 항복, 적에 국토의 할양, 그리고 군주제의 부활을 꾀하는 띠에르 정부를 혐오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그저 소박한 공화주의를 원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러한 정서적 신념이 바로 애국주의의 저류를 지탱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시민들의 대학살이 자행되던 시점에,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근간을 보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파리 시민들의 의식에 폭넓게 자리한 정서적 공감은 자신들의 국가에 대한 애착이었다는 점이다.

 

국민과 국가를 배신하는, 국민의 의지를 배반하는 권력은 이 보수적 애국주의자들까지도 저항의 무기를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의 문제도 아니요, 공무원의 연봉 상한제, 무상 의무 교육의 확대, 영세 상인의 보호와 같은 제도 개혁의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계급이 보인 계급적 속성에 대한 환멸과 그 권위의 청산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작금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상층부로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검찰, 법원의 인력들을 비롯한 권력의 상층부 곳곳에 숨어있던 이러한 비루한 권력기생충들이 확연하게 추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 부패가 심화되고, 이것을 비추는 거울이 말끔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 거울을 깨부수려 못하는 짓이 없어진다.

 

항시 이것들은 누려오던 권력의 유지에 위협이 발생하면 그 민낯을 드러내고 거침없이 흉측함과 폭력성, 잔인성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파리 코뮌은 바로 이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파리 코뮌은 시민들 자신에 의해 창출된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의 모습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적 분투의 현장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한 걸음 벗어나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재라는 역사의 위치를.

 

법치주의의 야바위꾼들에 우리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운영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은가? 일제의 권위주의적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은 한국의 사법부와 검찰이라는 강고한 기득권력이 더 이상 국민의 삶을 자신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게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들이 지금까지 빨아먹은 모든 힘은 이제 국민들, 이 사회의 신체가 돌려받아야 할 중차대한 지점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기득권의 카르텔로 연결된 저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수술은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들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 개혁과제일 것이다. 대법관, 검찰총장과 같은 임명직 자리는 국민이 선출하는 선출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하시라도 소환하여 해임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대법관 10인의 탄핵이다! 서둘러야 할 일이다. 저것들의 정의를 신뢰하는 것은 바보 짓이라는 것을 프랑스 내전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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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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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는 고통과 참담한 상처는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통절하게, 그 이해를 지닐 수 있는 지극한 살핌의 능력을 일깨웠던 작품으로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기억한다. 그건 아마도 시인의 물음처럼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네의 삶에 와 닿은 고뇌어린 과제요, 각성의 문제일 것이다.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통해 이렇게 답하는 듯하다. 어떤 한 순간에는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건너 올 수 있지 않을까라고. 우리 둔감한 자들은 어렴 풋 이 글을 통해 그 순간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이후, 작가 내면의 풍경에 보다 다가가고 싶었다. 이 작은 책이 그러한 욕심을 조금은 충족시켜주었을 것이다. 시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 출간된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계기나 동기, 의도했던 글의 방향이나 그 여정에서 지녔던 감성과 생각들, 쓰기의 행위 자체로부터 파생되었던 사념들을 통해 시인과 작품의 숨결에 보다 더 다가가는 읽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북향 방, (고통에 대한 명상), 소리()등 몇 편의 시()들과, 산문 북향 정원정원 일기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구해지는 부수적 결과였음을 말하듯, 시인의 글쓰기가 생명 쪽으로 가게 되었음의 증거들로 이해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시인의 이 세계에 대한 인식은 햇빛 아래 고요히 마주 앉아 있을 때조차 비명 소리와 신음, 울부짖음 속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하루 더 사는 자신(소리(),단성부에서)을 매 순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산문 출간 후에에서 말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것들에 대한 시인의 이후의 글쓰기는 작별 할 수 없는 고통의 목소리에서 연원하는 사랑에 대한 희망이라는 고된 작업일 것 같다.

 

그것은 소리()이성부의 마지막 연(), 살아있는 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상상하는 일/ 그런 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희망은 있어의 산 자로서 가지는 희망에 대한 상상, 어쩌면 정원 일기속 벌레에 괴롭힘을 당하면서 기어이 일곱 송이 불두화를 피어내는 그 경이로움에 이르는 손길인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잎사귀를 마르게 하는 응애를 없애기 위해 잎사귀 하나하나의 뒷면에 약을 뿌리고, 닦아내는 손길, 그것이 곧 생명의 이야기이고, 희망이 아닐까?

 

열다섯 평 대지와 열 평의 집, 작은 마당(중정)이 있고, 옥잠과 불두화, 호스타, 소나무가 심겨져 있는 북향집, 그래서 빛을 주기 위해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 여덟 개를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맞추어 각도를 조절해주며, 함께 속도의 감각을 배우는 대지와 일체가 된 한 섬세한 존재를 보게 된다. 시인의 글쓰기와 닮았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 씀으로써 빛을 느끼는 작가의 행위가 곧 독자와 이 세계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가 되어 수시로 반사해 사각의 빛을 쬐어주는 그것일 것이다.

 

산문 북향 정원, 97쪽에서

 

그것이 곧 생명의 얘기이지 않겠는가?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둥글레에서 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꼭 죽은 것처럼 보여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알게 되듯, 네 평짜리 정원이지만 들어 올만한 곳이라고 새들이 생각했음에 으쓱해지는 시인의 기분처럼, 20213월의 어느 날에서 20235월에 이르는 정원일기는 외부, 하늘로 열려있는 시인의 내향적 집에 온전히 흐르는 평화의 기분을 공유케 된다. 처음에 들어선 순간 시인이 사랑에 빠진 집의 온화함, 그 태곳적 안전함과 고요는 시인이 말하는 북향의 사람’, 바로 그만이 아는 변하지 않는 빛,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 바로 그것 일 것이다.

 

시인의 소품 집이라 표현할 이 빛 같은 책자는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 거의 근원적이라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시인은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거울이 되어 우리네에게 반사시켜준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도록, 생명의 힘을 넘겨준다. 절망의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임을 아는(, (고통에 대한 명상))시인은 그래서 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기다린다.(”, 북향 방)이제 독자인 나는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생명을 말하는 작품을 기다리게 되었다. 고통을 함께 앓을 수 있게 된 많은 독자들 또한 시인이 온 정성을 다해 시시각각 빛의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쬐어주는 거울, 그 거울의 글을 기다릴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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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에 대하여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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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고뇌하며 산다, 진정한 평등은 이것 말고 다른 근간이 없다.”

- 76,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에서

 

라헬 베스팔로프’(1895~1949)는 자유와 윤리의 사유를 치열하게 고뇌했던, 잊혀진 사상가이며 비평가이자 문필가다. ‘지성과 영혼자체라 일컬어졌던 인물이 어떻게 50년 이상 도서관 아카이브에 잠들어, 사장되어 있어야 했는지 참으로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는 차고 넘치는 듯하다. 그녀가 비평 활동을 하던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를 대표하는 여성 사상가로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와 시몬 베유와 대비하면 말이다.

 

Rachel Bespaloff, 1895~1949

 

프랑스어로 글을 쓴 유대계 사상가와 문필가들의 글을 수집하던 텔아비브대학 교수 모니크 쥐트랭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수년 전에 시몬 베유가 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와 동시대에 동일한 대상을 주제로 발표된 글이라는 점이었고, 베스팔로프는 이 동일한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러한 호기심을 훌쩍 뛰어넘는 독창적인 깊이와 또 다른 윤리적 통찰을 보게 됨으로써 한 지성의 지난한 통회(痛悔)의 응시에 잠겨들었다.

 

아름다움과 힘에 관해서는 충분하다가 절대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과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의 지혜다.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 힘 자체는 죄과(罪科)의 결정에서 벗어나 있다.” - 6쪽에서

 

베스팔로프 또한 일리아스서사의 궁극을 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시몬 베유와 같이한다. 그러나 시몬 베유가 말하는 은 힘 자체라기보다는 힘의 불순한 행사, 힘의 비윤리적 행사에 기초하지만, 베르팔로프는 힘 자체, 그 무엇으로부터도 비난당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본질적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에서 발견한 힘은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이지만, 베스팔로프는 삶의 궁극적 현실이고, 궁극적 환상인 존재들의 심원한 본성이다. 그래서 시몬 베유가 말하는 아킬레우스의 야만적 힘에 대한 저주 섞인 비난의 말은 여기서 자리를 잃고 만다. 헥토르의 지키려는 힘이나 다 부숴버리고 자신마저 부수는 아킬레우스의 힘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된다. 고대 음유시인 호메로스에게는 지키는 것과 파괴하는 것은 하나로 구성된 세계 일 뿐이며, 그들의 불행한 행위로 인해 생이라는 평등함, 경험을 통해 생성된 본질, 존재로의 생성의 소산을 보게 한다.

 

베스팔로프는 여기서 인간이 처한 세계의 현실을 마주보게 한다. 해결도 구원도 없는 우주적 공포의 토대가 되는 악몽같은 세계.제 힘을 마음껏 뽐내기 위해 원한을 돌보며 위대함을 향한 의지를 마구 휘두르는 아킬레우스인가, 아니면 백성,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행복을 향한 의지에 나서는 헥토르인가는 사실 무용한 물음이 되고 만다. 생 자체를 바쳐서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고 묻고는, 헥토르의 용기가 아킬레우스의 영웅심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은 괜한 생각이 된다. 하지만 인류사의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행복의 의지라는 수호자의 도약은 거칠고 억센 공격자의 쉴 새 없는 힘의 의지, 위대함을 향한 의지에 패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치의 공포에 좌절했던 유대인 베스팔로프는 어느 한 편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인간 세계의 실체를 그대로 들여다보고 바로 그 실재의 양상으로부터 인간의 윤리와 종교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베스팔로프는 호메로스가 전사들의 아름다움을 기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결코 이상화하거나 양식화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생성 그 파괴적 창조의 원천으로써, 혹은 이 원죄적 실체를 통해서 윤리의 원천을 발굴하는 것이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에 이르는 가히 공포의 전율이 지속되는 장면이 있다. 아킬레우스는 그날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헥토르를 따라 잡지 못했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약탈자의 추적과 피해자의 도주가 영원히 계속되는 악몽에 이어, 아레스는 공평하시니 죽이는 자들을 죽이신다.”는 말이 맴돈다.

 

베스팔로프는 이러한 힘의 공격적 행사가 없는 세계는 평화의 권태로  마비될 것이라 말하지만, 아마 이것은 겉보기일 것이다. 힘의 아름다움은 생기를 불어넣고 고양하지만, 동시에 불길하고 두려운 것이다. 결국 인생의 부침이란 정복하고 파괴하지만 풀어주고 해방하는 심오한 필연적 숙명이라는 것일 게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한 해독은 헥토르, 테티스와 아킬레우스, 헬레네....프리아모스와 아킬레레우스의 만찬과 같이 인물 개인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하듯 그녀는 개인의 의지에 중심을 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신들의 희극, 두 글이 있지만, ‘힘의 숙명을 말하기 위해 비교 작품으로써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공통점과 차이를 부각하여 호메로스의 정신을 선명하게 말하거나 신이라는 한 존재자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테티스와 아킬레우스에서는 우주의 힘과 인간의 정념에 동시에 연결하는 이중의 유대를 지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우화와 실존에 맞닿게 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한편 헬레네는 완벽한 미모가 어떻게 완벽한 불행의 의미가 되는 지, 흰 베일을 두르고 통렬한 고뇌에 싸인 노예보다 자유롭지 못한 신세의 여인이어야 하는지를 읽게 된다. 아름다움이 죽음과 기묘하게 들러붙는 그 필연, 아름다움이 닿은 것은 전부 시커멓게 타버리거나 돌처럼 굳어졌다.”, 아름다움에는 힘의 아름다움과 같이 필요악이 있음이다. 호메로스가 아름다움에 힘의 준엄성을 부여하고 숙명의 부류에 넣었다고 해독한다. 아름다움은 마치 힘이 그렇듯 정복하고 파괴한다. 헬레나의 아름다움이 숙명 앞에 서 생성의 막연한 죄의식에 휩쓸리는 것은 그렇기에 불가피한 것이 된다.

 

어쩌면 베스팔로프가 일리아스에서 읽어낸 정말의 사유는 신들의 희극이라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평화의 사교계 파티 장면처럼, 신들이 모여 전쟁터가 된 도시 트로이아를 내려다보며 그 어떤 진지함도 없이 웃고 떠드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의 원인이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전쟁과 평화속 귀족들이 보여주는 이 세계의 희극성과 같은 것이라는 말일 게다. 진지함의 부재는 호메로스나 톨스토이에게 인간 이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책임은 모순의 승리를 승인하는 신들의 웃음 속에 흩어지고 만다고.

 

아마 호메로스의 탁월한 장치였을 것이다. 제우스를 비롯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이들 신들은  선동분자이고 영리한 선전가이며, 살육의 냄새와 비극적 정념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싫어하지 않는.  그들은 안전하기에 전쟁이 없으면 심심해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스팔로프는 관조 하는자 제우스를, 다만 정신적 외관으로서 나타내긴 하지만 결코 구현하지 않는 현실의 상징임을 읽어낸다. 역사를 힘의 비극들, 집단적 정념의 연극이 벌어지는 장소로 본다고,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높은 곳에서 담담하게 내려다보는 시선만으로도 전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우주적 차원으로 되돌려 놓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에 형이상학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즉 호메로스가 고양하고 신성화했던 것은 힘의 승리가 아니라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희생당한 영웅의 영광,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임을 통해 숙명에 패하지만 여전히 숙명에 도전하고 뛰어넘으려는 존재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존재의 소멸에 임박한 순간 가장 자기 자신답다.” -65쪽에서

 

아마 인간은 극단적 위협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자기 세계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존재인 모양이다. 때문에 죽음으로 가득한 서사시는 끊임없이 개조되는 생성으로서의 존재, 세상을 변모시킬 진실, 새로운 현실을 수립하겠다는 원동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제한된 시각의 오류들을 발견하고, 그 널브러진 잔해 속에서 구해낸 시험 재료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사실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그녀의 사후인 1945년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의 번역자는 1939년이라 쓰고 있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1943년 출간 발표되었다. 장 그르니에를 통해 베스팔로프는 1941년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하지만, 발표되지 않은 책을 베스팔로프가 읽었으리라는 억측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읽는 이의 관점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베스팔로프의 글은 철학적 이해와 깊이에서 시몬 베유의 그것을 몇 차원 능가한다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장 발의 서문이나 모니크 쥐스랭의 짧은 베스팔로프에 대한 전기와 그녀의 미출간 원고- 하이데거, 샤르트르, 카프카, 카뮈 등의 비평문 등 - 에 대한 소개와 비평의 글, 베스팔로프가 남긴 또 하나의 사유인 비극의 정신에 대한 성찰은 자유가 명확해지는 시련과 자유가 휘청거리는 함정을 동시에 제공함을 통찰한 실존주의자로서의 인간조건에 대한 절창의 글도 수록되어있다. 나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것은 내가 신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다. 다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신의 몫이다.”, 이 문장에서 베스팔로프의 쇼아에 대한 무기력과 신의 침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뇌를 우리는 읽게 된다. 비극을 무시하고 생명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이 윤리적 물음에 우리는 답할 수 있을까? 최후의 선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가스실에서, 인간이 자신의 파괴를 넘어서까지 과연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궁극적 방편을 찾아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일리아스에 대한 6편의 글과 이 글들의 총체적 윤리적 사유인 한 편, 그리고 두 철학자의 각기 한 편씩의 글로 구성된 힘의 이원성이 투쟁하는 인간 세계의 진실을 엿보는 탁월한 저술이다. 또한 한 편의 대()古典 작품에 대한 절대적 침묵의 장면에서조차 힘의 사태를, 인류의 오래된 힘과 협잡사이의 협약까지 읽어내는 가히 독보적인 문학비평이기도 하며, 실존주의의 비판적 수용자로서의 심원한 윤리적, 종교적 사유를 읽을 수도 있다.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로써 숙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그것의 영원성을 생각게 하는 호메로스(일리아스)를 이 책을 참고 삼아 읽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취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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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평짜리 숲 트리플 30
이소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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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소설은 또 하나의 사고(思考)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적 사회와 삶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문학작품들이 수많이 등장했음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그것들에서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곤 한다. 평등이 주어지면 자유가 실종되고, 자유가 주어지면 계급과 불평등, 착취의 구조가 은연히 드러나기 일쑤다.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해설에서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말한 사회적 적대들(antagonisms)'을 인용하여, 사회 체제 속 내재된 모순과 균열, 틈이 바로 사회의 원동력을 지속케 하는 조건 그 자체임을 말하듯, 우리들이 희구하는 이 세계의 무수한 균열들과 모순을 깨끗이 없애는 것이 과연 정말의 이상적 사회일까 하는 물음이다.

 


소설집은 3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궁극에는 이 같은 하나의 물음으로 모아지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열두 개의 틈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미 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틈이란 지구가 자전축을 잃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과 공기층이 무너져 난파된 구조선 같은 열두 개의 에어포켓에 난민처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임시 거주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 단편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이처럼 더는 살 곳이 못 된 지구에서의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상황을 선명하게 인식한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신이란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거나 앎의 의지가 없기에 자신들의 믿음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추앙하며 자신들 몫의 앎을 떠넘기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알량한 생을 이어간다. 만일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천문학자라는 아감마는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학을 그들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신적 존재로 군림한다. 이 맹목성은 눈먼 재물을 빼앗는 더없이 좋은 방편이다. 소설은 궁극적 물음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아진이린이라는 열일곱 소녀들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에어포켓이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되기에 두 곳의 장소, 데저트랜드와 아이스랜드로의 이주라는 최후의 선택이 주어진다. 낮만 지속되는, 가끔 비가 오고, 몸 뉘일 공간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지만, 돈이나 다른 재산을 내면 보다 넓은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데저트랜드와, 식사와 직업도 제공되고 시설은 아주 좋지만, 극야로서 밤만 계속되는 영하 58도의 아이스랜드에서 택일하여야 한다. 가족 간의 논의 끝에 아진네는 데저트랜드로, 이린네는 아이스랜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아진이 헤어지기 전에 이린에게 건네는 책이 바로 이 소설 세 평짜리 숲이다. 이 책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만 남기기로 한다.

 

단편 세 평짜리 숲은 데저트랜드로 이주한 아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진 모녀가 할당받은 공간은 각자 한 평의 마굴이다. 몸을 뒤척일 수도, 화장실도 없는 공간, 일자리도 구하기가 어려워 생계도 곤란해지는 그야말로 철저한 각자도생의 세계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반타 빌리지라는 철저히 경계가 세워진 궁전 같은 주택들이 있는 부유층의 거주지가 있다. 돈을 벌지 않으면 한 평의 공간마저도 잃고 죽음의 길만이 열려있는 이주자들의 삶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진은 아감마가 에어포켓에서의 대중들을 기만하고 착취한 재화로 반타 빌리지에서 고고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믿음조차 연명할 수 없는 곳임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아진은 생존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을 하는 데드샌드에 가입한다. 광케이블을 훔치는 일의 망보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이내 공기가 희박한 에어포켓에서의 삶에 익숙한 신체를 이용하여 심해에서 케이블을 찾아 훔쳐내는 일을 맡고, 목숨을 건 행위의 대가로 방 한 평, 두 평을 모은다. 그곳은 오직 자본에서만 비롯되는 삶의 영위만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진과 데드샌드의 보스와 주고받는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돈으로 못사는 자유가 있다고 그랬어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를 사, 바보 아니야?

자유를 주지, 돈이 있어야 자유를 살 수 있을 거잖아. 난 돈을 줄게. 넌 그걸 착실히 모아서 자유를 사는 거야.“ -66


아진은 보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충성을 다한다. 반타 빌리지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대가로 받은 부동산을 절약하며, 악착같이 모아 스물 네 평짜리 집을 가졌을 때, 아진은 보스가 나누던 대화를 엿듣게 되고, 돈을 다 모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상층과 하층을 연결하는 브릿지 노릇을 하며 부를 모아 반타빌리지에서 살며, 자유와 부의 여가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주인과 하인의 그 시원적 원칙인 춘권과 엘리스의 이야기를 실천에 옮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서술하고 보니, 아진이라는 인물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철두철미한 자본지상의 세계, 자유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세계, 아진은 그 체제가 지닌 모순에 직면해 주저앉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런데 그 부딪침이란 모순과 부조리를 전복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저 자신만의 돈이자 곧 자유의 권리를 위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돌파한다. 결국 내재적 한계를 지닌, 즉 모순과 균열을 그대로 유지하는 체제내적 홍길동식 출세주의로 보인다. 모든 것이 봉쇄된 삶의 조건을 가진 자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싶지만, 그런 세계는 결국 다수의 노예화와 약자의 착취와 희생을 거름으로 한 악취가 맴돈다. 지극히 경쟁과 이기주의를 기초로 한 체제내적 보수적 선택.

 

세 번째 단편인 창백한 푸른 점은 아이스랜드로 이주한 이린네 가족의 생활기이며, 소설의 대단원이자 세 편 소설의 주제를 하나로 결집한 장이기도 하다. 이린은 아홉시부터 다섯시까지 컨베이어벨트를 오가며 단순노동을 한다. 엄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밥공장에서 밥순이를 한다. 가족 모두 동일한 일을 단순반복하며 살지만, 아주 깜깜한 밤만 지속되고, 일렬로 무한한 듯 길게 열 지어져 지속되는 컨테이너 밖은 별을 보러 나가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다른 꿈도 허가되지 않으며, 오직 아이슬랜드 설비사인 YK건기라는 기업의 규칙뿐이다. 이 규칙에 도전하는 자는 맨 몸으로 밖으로 나가 얼어 죽는 형벌이 기다린다. 얼어붙어 부서져 존재조차 찾을 수 없는 형벌.

 


어느 날 아버지는 딸 이린에게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인데, 어째서 여기는 전부 하나처럼 보일까? 넌 이상하지 않니?”, 이 체제 저항적인 말은 쥐가 듣고, 재판에 부쳐진다. 재판관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 시간이란 내가 원하는 때에 가지는 것이고 진정한 상상이란 내가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꿈에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다 같이 가난한 것이 다 같이 잘 사는 것인가요?”라고 항변한다. 재판관은 답한다. 그럼 버는 만큼 부자가 된다는 데저트랜드로 가지, 왜 이곳에 왔나? 최소한의 인권보장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나?” 이 대화만을 보면 분명 딜레마다.

 

그러나 그 보장된 인권이란 것이 오직 샌드위치와 하룻밤 자는 것이고 꿈꿀 자유의 박탈과, 평생 단순노동이며, 오직 밤만 존재하는 삶의 지속이라면 과연 그것이 정말 보장된 인간의 권리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의 것을 훔쳐 자기 배만을 불리는 것이 버는 만큼 부자라는 그릇된 정의에 기초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순이고 부정의다. 부정의를 전제로 한 자유의 박탈에 기초해 오직 생존의 가능성만 주어진 평등을 평등이라 부르는 것도 이율배반이고 모순일 것이다. 아무튼 아진의 아버지는 밖으로 내쳐져 이내 바닥에 얼어붙어 다리조각만 남긴 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삼일간의 가족 애도기간인 휴가가 주어지고 이린은 특수복을 입은 채 컨테이너가 늘어선 길을 걸어본다. 그때 아진은 인공 햇빛을 구현한 가짜 창문도 달려있는 컨테이너를 발견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던 이곳에도 결국에는 계층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끼게 된다. 이린은 아진이 주었던 책과 샌드위치를 한 덩이 특수복 안에 넣은 채 컨테이너의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무엇이 있는지, 그가 발견할 앎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발길을 걷는다. 그녀가 향하는 미지의 미래를 향한 걸음은 아진과 같이 주어진 시스템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 맞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여리고 작은 걸음의 행보에 더 마음이 간다. 설혹 그녀가 미래를 향한 걸음 중 얼어붙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작가도 나의 믿음에 기울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단편인 아진의 시스템 내 단순한 자리바꿈을 향한 투쟁이 아니라 이린의 미지를 향한 걸음을 마지막이자 서사의 총체를, 그 최종적 이야기로 삼은 것은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걸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운명이며, 후대를 위한 책임의 행보라고 말이다. 샹탈의 체재 내 균열과 모순이 사회의 항구적 존속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말은 일견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그 모순과 이율배반에 저항함으로써 인간 사회는 조금씩 윤리적으로 진전해 나가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직 시적 정취로서 푸르고 창백한 지구를 우아하게 표현했던 칼 세이건은 아마도 상처로 시퍼렇게 멍든 상흔, 오직 어둠의 그림자와 극한의 추위로 얼어붙어 시퍼래진 손상된 지구, 해수면 상승으로 온통 바닷물만 넘실대는 지구를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은 두 개의 커다란 축을 지닌 물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그 한계에 이른 생태계 파괴로 인한 근미래에 닥칠 위기라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와 평등, 즉 자본이라는 물질 만능과 이의 공평 분배라는 그 끝없는 조화와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일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아마 자유와 평등, 생태계 파괴의 물음은 동일한 근원에 대한 다른 관점의 의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모든 것, 인간도, 자유도, 평등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방임되는 생태계, 즉 자연 자원의 화폐화라는 동인이 있으니 말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인 이 소설을 읽으며 오늘의 우리네 삶의 태도와 세계의 정의와 자유, 평등,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막론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젊고 발랄한 기운이 넘치는 문장들이 주제의 무거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경쾌하다. 그리고 호흡이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어느새 작품을 내쳐 읽는 자신을 발견케 하는 작품이다. 트리플 시리즈는 일상에 바쁜 사람들도 출퇴근시간, 짧게 주어지는 짬에 읽을 수 있는 책형과 분량으로, 부담 없는 한국문학의 접근 통로이기도 하다. 시인이 쓴 첫 소설이 아닌가 한다. 건강한 r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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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역사를 말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역사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모멘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항시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또는 불변하는 정상(正常)이라 일컫는 것에서는 예외없이 반작용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발자크가 말했던가,  생리학은 병리학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발전한다고. 세계에 병리적 현실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할 때 역사는 새로 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금의 한국사회 현실은 바로 이러한 역사교체의 적절한 하나의 보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은 한 점의 회화, 1812년 프랑스 화가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권력층의 충동적 본능과 야망이 낳은 비이성적 욕망의 극단에 대한 폭로이자 비판이었다.

 

나는 여기서 역사 교체 분수령이 되는 세칭 말세(末世) 현상을 읽었는데, 아마 21세기 현재의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정치와 경제, 문화사회의 주소가 이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종말의 세계에 기술과학주의에 의해 가공된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를 축조하고 제한없는 분노와 증언으로 오직 파괴와 죽음만이 실존을 가능케 하는 세계, 모데란을 읽고 있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고, 생명의 참을 수 없는 충동적 표출이 가져온 파멸의 비극적 서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반복되는 순환인 것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선악의 논쟁 따윈 이미 무의미한 언설이 되고, 오직 실존에 대한 사고 실험으로 일관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이러한 폭력적 잔인성에 의존해야 하는 세계가 지금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출처: 이광래 , 미술 철학사 1, 도판118,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제리코호의 뗏목은 모래톱에 좌초한 프리깃함의 선원을 모두 태울 구명보트가 부족해 선상에 있는 나뭇조각으로 뗏목을 만들어 보트에 밧줄로 연결하고, 그것에 149명을 태운 것이다. 뗏목으로 인해 보트가 나아가지 못하자 밧줄을 끊어 뗏목 위의 149명은 표류하게 되었고. 구조되기까지 단 7일 만에 악의에 찬 동료 선원의 살해와 식인의 야수성으로 단 15명만이 살아있었다는 충격적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공포와 절망, 그리고 광기로 채워진 그림은 당대의 난파된 인간성의 적나라한 폭로였을 것이다. 이 파멸적 인간 군상의 얘기는 200년 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자성과 비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으며, 또한 지역을 불문하고 동시적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 그 비이성적인 욕망과 광기의 폭로와 경고는 세기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오늘에도 무수히 읽히고 있는 고전(古典)이 그 실례일 것이다. 16세기 영국 헨리 8세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지적하는 당대 영국사회 상류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야만성의 비판이나 18세기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가 묘사한 것도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 욕망의 광기 아니겠는가. 20세기 조지 오웰의 1984도 사실 이러한 인간성 말살의 세계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중엽부터 홍수처럼 배설된 문학작품들은 거의 모두 인간 세계에 만연한, 아니 만연함이 넘쳐 현실을 벗어난 환상과 가공의 세계로 넘어가 이 던적스러운 인간성을 떨어내려 몸부림치고들 있음을 본다.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에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인간 본연에 대한 물음을 통한 자기 성찰의 사유를 촉구하는 문학과 미술 등 예술작품들이 그 영향력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어쩌면 괴팍한 취향 아니냐고 시비를 삼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末世라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지속하여 말세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경고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은 곧 동질과 동일의 반복이고, 그것은 차이와 다름에 대한 갈라치기고 차별과 분리, 계급이라는 이원화된 불평등의 고착이요, 야만과 폭력의 안주이며 승인일 것이다. 같음의 반복은 정체이고, 타락이며, 부패이고, 착취이며, 탐욕이자 폭력이다.


1790~1794년에 잇달아 발표한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에서 이 세계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국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가 인간 타락의 근원을 대립을 강요해 온 이원론적 가치 체계임을 지적하였듯, 이 오래된 인간의 분리주의적 욕망은 환상적 세계에서나 그 개념 감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의 부식과 마비로 인해 일어나는 오늘 한국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극단적 상황은 아마 결코 새로운 인간세계의 현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대안의 창조적 모색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본질상 동일과 동질을 통한 기득적 권력의지의 항속화의 욕망을 위해 자기와 다른, 차이에 대해 억압과 구속을 정체성으로 하는 수구(守舊)주의자들에 대해 근원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자유와 해방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인간의 태생적 본성을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그 동일성을 반복만 하려는 나르시시즘의 욕망에 역겨움을 느낀다. 끊임없는 자기회귀, 그 극한의 자기애에 대한 욕망은 타자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본질이란 결핍이고 부족이다. 빼앗겨 상처받은 자들은 그 결핍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주를 시도하기 마련이고, 바로 그 시도의 역동적 동태성이 역사적 전환을 생산한다. 잃어버린 욕망의 억압과 구속에서 풀려나려는 자유와 해방의 추구가 거대한 새로운 흐름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탈주의 욕망, 문화적 불안정성과 영혼의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는 인간 세계를 간파한 흔치않은 철학적 사유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을 나는 사랑한다. 19세기 산업사회화 된 프랑스의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피폐와 야합하여 무관심과 몽매성에 빠져들었던 것은 21세기 오늘의 인류 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부정(不淨)한 나르시시즘,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나를 사랑하기는 사실 탈출구가 막힌 부패한 영혼의 망상적 헛소리처럼 들린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는 라는 없는 것에서 대체 새로운 무엇이 발굴될 것이라는 것처럼 황당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출처: 이광래, 미술 철학사 1, 도판 321, 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


내가 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작품 우는 거미, 1881는 종()이나 생명의 일탈 같은 수구적 질서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은 그 낯섦만큼이나 강렬하게 인식된다. 마치 카프카의 오드라데크(가장의 근심)나 갑충(변신)처럼 말이다. 즉 생리학의 지식이 병리학이라는 일탈로부터 얻어지듯, 그 어떤 인식론적 장애도 넘어서려는 초월적 욕구의 의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르동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미라보나 불편해했던 졸라와 같은 기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들의 비난이란, 역사라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보잘 것 없음이 보이듯, 우리는 역사의 조망 속에서 무엇이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나는 권력 담론을 휘두르던 에밀 졸라의 당대 예술인들을 향한 자의적 비난의 목소리들에서 권위와 동일성을 강요하려는 타자에 대한 억압을 본다. 자연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당대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하고 참혹한 삶에 주목케 하려던 사실주의에 대한 잔혹한 말들이 얼마나 일방적 언어였는지, 그 자폐적 언어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감을 지우지 못한다. 때문에 즉물주의(卽物主義)의 그 발가벗은 사실화들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쿠르베의 반()부르주아적 그림들을 좋아한다. 파리 코뮌의 적극적 선봉자로서 민중의 고통을, 지배층의 위선과 기만의 폭로에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로 나는 기억한다. 어쩌면 이렇듯 인류는 소수의 눈 밝은 이들의 말세에 대한 통각(痛覺), 그 경고의 메시지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지역적으로 고립된 시공이 아니다. 세계 어느 한 귀퉁이에서 발생한 현상이나 사건도 곧 세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을 누려왔던 친일 반민주적 일군의 소수집단은 변태적 극우화, 아니 사대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권력과 재화의 욕망 집단임을 수치심을 잊은 채 광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비단 동아시아의 귀퉁이 작은 반도 국가의 현상만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이러한 우경화된 탐욕의 정치 세계를 항해하고 있다. 일종의 말세(末世) 현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말세에 대한 자각, 소수의 민감한 통찰자들은 역사 교체시기에 여지없이 등장해왔다. 그것이 특정한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거대한 조류처럼 예술과 문학, 철학 등 인문적 흐름으로부터였다. 물론 자연과학도 인간 계몽의 한 축이었으나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힘(반영)에 실려 왔다,

 

세계의 병리적 현상이 폭넓게 인류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역사의 시대로 교체를 요구하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신권에 의한 1000년의 억압, 그리고 잠시의 소생시기인 르네상스, 다시 절대왕권에 의한 폭압, 인권과 평등의 시기, 또 다시 독재와 전체주의의 광기, 불안정한 평화, 오늘의 우경화된 광범위한 기술과학주의와 물질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우리들은 인간의 파멸적 본성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것은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말세 현상을 직감할 때마다 선인들이 지적한 인간성의 본류가 변화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불과 10여년 만에 두 차례의 몽매한 선출권력을 탄핵하였으며, 다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는 시간이 당도했다. 헛된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사로잡혀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려 나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낯설어 멀리하려 했지만 그 낯섦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향하는 시발점이 되기 위해 머리를 맞댈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말세의 예언이 결정어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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