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린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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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수필집 수기 手記를 썼습니다.“

-안윤, 물의 기록에서

 

이 작품집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이겠지만, 수록작 단편 의 한 구절이 아마 어느 만큼은 대표하리라 생각되어 옮겨본다.

 

일기를 쓰듯, 때로는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셔터를 눌렀다. 황량하고 덧없는, 무위에 가까운 풍경을, 자신의 내면과 어딘가 닮은 대상들을 포착했다. (...) 사희는 철저히 관찰자가 되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건너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위안을 줬다.” - 단편 , 240쪽에서

 

그래, 소설집은 철저한 관찰자, 인생을 조망하는 시선들, 다시 말해 자기 인생의 궤적과 곡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시야와 거리를 가짐으로써, 의 사희 말처럼, 인생에서 열기 두려웠던, 여전히 열지 못한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감정과 대화를 나누도록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이끄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 자기 내면의 그 변덕스러운 실체를 마치 다른 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나 행동 또는 그 주체라고 여기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불변하는 무엇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는존재임을 망각하곤 한다.

 

표제작인 단편 모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하는 미란과 장애인 영은의 반걸음 만큼 떨어진 사랑의 이야기가 흐른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요제프 코발스키라는 무명의 작가가 쓴 보이지 않은 것들 Invisible things이라는 수필집의 문장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서술자인 미란 혹은 영은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인생 조망자의 시선이기도 한 듯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라는 문장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강렬한 아픔 때문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들이란 주의깊고 세밀하게 총동원된 감각의 종합이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 영은으로부터 배우는 팔꿈치를 내어주는 반걸음 앞선 자연스러운 동작, 왼쪽 빗장뼈 손바닥만큼 내려오면 깨알 같은 두 개의 점을 스쳐가도록 자신의 몸을 하나의 텍스트로 내어주는 마음, 어느 일방적인 보호와 의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유일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는 첫 문장은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남으로써 비로소 해독되는 소설이다.

 

작가 안윤은 이 세계에 펼쳐진 야만적 문제들을 배경으로 삼아 그것에 내재된 현재의 실상을 노출하면서도 그보다는 그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내면화된 인간성을 관찰하게 한다. 단편 핀홀 Pinhole은 단란한 가정과 무관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보라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훼손 된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기 일 것이다. 그녀는 동거하는 승원의 가족과 자신을 위한 결혼선물로 천에 수를 놓지만 자신의 얼굴만은 빈 공간으로 남겨놓고 주저한다. 누군가를 아는 일에 그 대상을 두고 앎의 정도를 따져보는 일에 사실 나도 서툴다. “(당신은 그를 혹은 그녀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물음은 참으로 심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소설은 어느 중증장애인이 자신의 온 몸을 투쟁하듯 더디게 완성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떨리는 집게손가락 끝을 문자판 글자에 가리키고 그리고 비로소 원하는 글자에 멈춰 톡, 한 번 건드리며 완성하는 문장, ‘하 여 행 복 을 산 다 오 로 지. 이것은 승원이 싱크대 밑, 소파 밑처럼 아무 곳에나 처박아놓아 집쥐처럼 보이는 양말뭉치의 무신경처럼, 삼십일 년을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 갇혀 있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한 승원의 형, 정원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보라와 승원은 결코 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내 앞에 나타난 이 구멍들은 무엇으로 이어야 해, 할머니?” 보라가 죽은 정원이 갇혀 지내던 폐쇄된 시설을 찾아들고, 정원이 남긴 쉴 새 없이 떨리며 남긴 불운의 증명, 행복의 위치 이동을 쫓는 글과의 대면은 자신과의 만남과 다름 아니었을 것만 같다.

 


담담은 양성애자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혜재의 자신 안에 도사린 의심과 불안의 실체 마주하기라 해야 할까? 스스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멀리서 보기, 철저히 관찰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결혼과 출산 생각은 없다고 못 박은 자신에게 묻는다. 결혼은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일까, 나는 약속이 싫은 건가, 조금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사랑은 믿지도 않으면서 욕망만 채우는 것뿐일까에 대한 이 모호한 자기 불일치에 대한 응답을 향한 여정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바이예요라는 무심한 발설에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라는 예상치 못한 응답으로 둘은 가까워진다. 이 두 문장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깨달음이 모두 있다. 대체 정체성이라는 것, 뭔가 고정된 불변의 근본이 있다는 생각처럼 인간에 대한 몰이해도 없을 것이다. 혜재는 은석과의 만남, 동행을 통해 잔잔하게 흘러들어오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둘이 마주한 설렁탕의 맛을 은석이 담담한 맛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삶의 형식이며, 내용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작은 눈덩이 하나는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다 이내 돌아서는 사람의 서글픈 허기, 울적한 공허감을 상상하게 했다. 지난 시절 한 때의 아련하게 남은 기억, 그래서 쓸쓸하지만 아름다웠던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자기위로를 삼는 씁쓸한 기억. 첫 장편으로 해외 영화제 수상을 한 영화감독이 된 친구 세진, 전문대를 졸업해 세진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의선이 함께 살았던 대학시절의 시간이 흐른다. 사년 제 대학을 다니는 세진의 영화동아리 일원들은 세진으로 인해 의선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어울린다.

 

의선은 영화 앞에서 울고 웃는 날것의 활기를 뿜어내는 그들의 열기와 함께하면서도 은근한 소외감을 떨어내지 못한다. 표현하기 어렵고 정량화가 불가능한 내면화된 계급의 주관적인 정신적 상처는 실로 복잡하면서 더러운 사회적 감정이다. 세진의 동아리 선배인 준수는 단편 영화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해 질 때 여기 빛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의선의 자취방을 찾아오고,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몇 차례 만남을 갖는다. 준수의 궁핍을 발견한 의선은 이백만원을 꾸어주고 그가 단편을 마무리하도록 성원한다. 그러나 준수는 단편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둔 채 소식이 끊기고 만다. 의선에게 갚지 않은 돈, 훗날 세진의 수상 축하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준수를 보지만, 둘은 그저 조심스러운 몇 마디만을 주고받은 채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울숲 근처에 카페를 냈다는 소문을 듣고 의선은 찾아가지만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의선은 스스로의 행동을 미학적 영상미를 흉내 내듯, 몇 발짝 뒤로 물러난 닫힌 카페 문과 유리창 너머에 고인 짙은 어둠을. 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본다.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의선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첫눈을 봉하여 지인의 집 앞에 갖다놓는 약이(藥餌)’의 옛 이야기를 따라한다. 묶인 듯 사로잡힌 정신을 풀어놓는 일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관찰자의 시선을 얻기까지.

 

거듭, 반복의 의미를 지닌 부사가 제목인 단편 는 유효기간이 육년인 행복주택 계약기간이 일 년 남짓 남은 시점부터 도수진에게만 들리는 불신과 의혹을 가득 품은 듯한 소리다. 수진은 연인이었던 치완과의 이별에 일말의 미련도 죄책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삼년 반이 지난 시간, 아마 소리가 들리고부터인가? 혹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휴가계를 내던 직장 동료 강주임이 겪는 전세 사기의 고통을 알고 나면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비로소 유사한 불안에 맞닥뜨려야 감응의 심장이 작동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도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내면화된 계급사회의 언어가 스치듯 준수에 의해 발설되어 배경이 되듯, 에서도 인간에 대한 무심코 저지르는 모멸의 장면이 배경처럼 반복되어 출현한다. 도수진 대리는 대리로, 강주임은 주임으로 부르는 직장 상사인 과장이 있다. 직원의 성을 된소리로 발음함으로써 상대방을 은근히 멸시하는 기만적이고 흉측스런 괴물같은 계급권위를 으스대는 행위 말이다. 물론 소설은 이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작가는 이러한 던적스러움을 배경에 삽입하며 이 사회에 만연한 민낯을 풍경처럼 풀어놓는 듯하다. 전세사기로 인한 대출금을 갚기 위해 퇴직금이 필요해 나타난 강주임이 자신의 짐을 정리할 때 그 순간 들려오는 라는 소리는 와 함께 삶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그들 내면의 소리인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동시에 , 라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하지 夏至는 어느 순간 자신이 운영하던 일인(一人)빵가게를 접고, 타향인 서울과 삼십대와 이별하는 수림이 오랜 벗 지언과 함께하는 이별 캠핑에서의 나지막하지만 삶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의 목소리들이 깊은 여운을 지닌 작품이다. 자기 성찰이란 상상력이라는 저 밑바닥에 연원을 지닌 무의식과의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한 자기로부터의 거리가 주는 시차는 타인의 행위가 의미하는 투영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상상력, 진실에 가까이갈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네” “인간은 모순 그 자체 내라며, 허상인 이유를 쫓으며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의 조금은 서글프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수림이 고향 부안의 바닷가에 낮춰 앉을 수밖에 없는 캠핑용 의자에 앉음으로써 더 높은 하늘을 보며 흩날리는 하얀 가루 입자의 반죽과, 컨벡션 오븐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을 상상하며 그 모든 게 전생처럼 아득하다.”고 말 할 때, 그 이미지의 힘들이 발산하는 부드러운 걸음과 평온함의 강렬한 물성이 수림의 마음 깊숙이에서 스며든 것을 불현 듯 본다. 살아있음, 현존을 실감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느끼는 감응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한 안정감을 공유케 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치유와 세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킨츠기 공예와 사진 작업이 어우러져 조각조작 깨진 마음의 상처와 충동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채 자신을 속여 왔던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마주함으로써 그 깨어짐의 실체를 말하는 은 아마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을 모린과 함께 대표하는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다.

 

나만의 기억으로 삼기 위해 내 너절한 감상은 여기서 맺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한 작품도 소홀히 읽을 수 없는 정화되고 고귀한 느낌이다. 작가의 책()으로는 네 번째이다. 책을 사놓고는 몇 개월의 뜸을 들였다. 냉큼 읽어버리기에 아까워서였다. 이 작품집 또한 내게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고이거나 흐르거나 때로는 나를 넘어 범람하던 말들,

당신에게 무자비하게 뱉거나 묵묵히 삼가던 말들,

내게로 쏟아지거나 증발하던 말들,

나의 언어는 형태를 갖기에 희미하거나 무르다.“

- 안윤, 물의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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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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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자신의 증오에 완전히 먹혀버렸거나, 적어도 그것에 그대로 사로잡힌 한 존재의 증오가 차가운 바람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는 화염처럼, 인간의 모든 시도와 포부를 녹여 없애는 독액을 질질 흘리는 산성 물질의 구체처럼 이야기 속을 휘감아 돈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에 대한 불신, 그들이 자초한 조잡하고 기만적인 허구의 세계가 기어코 초래한 종말적 실체에 대한 이가 빠드득 갈리는 증오와 분노, 무한한 살육과 파괴가 지면을 흥건히 적시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선혈이 낭자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모데란(Moderan)1960년대 발표된 40편 남짓한 장,단편(,短篇)으로 하나의 서사적 연결을 하고 있는 작품들이 엮인 일종의 우화적 사변(思辨)소설이다.

 

이 작품의 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 데이비드 R.번치1965에메이징 스토리즈6월호에 남긴 유명한 선언은 그가 쓰고자 한 이야기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좌표가 되기에 짧게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저는 뭔가를 서술하거나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고 이 업계에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여기에 섰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버린 대가로. (...) 제가 원하는 독자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커다란 흑십자에 올라갈 독자입니다....”

 

, 그가 묘사한 끔찍하다는 지옥같은 세계는 소설의 주인공인 신금속으로 교체된 강철인간 10번 성채에게는 기쁨이요,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니 오히려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까운 세계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계는 지독한 오염과 잔혹하고 무참한 전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신세계 모데란은 독성 물질로 오염되고 파괴된 폐허를 로봇들이 단단하게 평탄 작업을 하고, 그 위에 무균 플라스틱 층으로 매끈하게 덮어버리고, 오염된 공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대기층을 파괴하고는 증기 방어막을 월별로 쏘아올리는 인공의 세계다. 사실 소설의 배경인 모데란의 세계는 오늘 우리들이 망가뜨리고 있는 이 지구 생태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양과 대륙 어디에든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매일 대기오염도가 발표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대기의 악화는 어쩌면 이들과 같은 무한한 과학기술의 낙관성, 그 임기웅변과 매우 닮아있다.

 

이야기는 이미 또 다른 종말에 이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임을 증명하겠다고 울부짖었던 존재,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남긴 테이프를 발견한 그네들의 후손이랄 수 있는 일종의 빛줄기인 미래 종족이 그 테이프를 해독해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존재 역시 인간이란, ‘체제를 무너뜨릴방법을 찾아 헤매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듯, 인간이라는 꾸러미는 자기 파괴성이 그 요소라고 설명한다.

 

이 소설과 병행하여 읽던 책이 계급의 숨은 상처였는데, 나와 너로 위계의 등급을 만들어내기 위해 능력이란 해괴한 가치체계를 사회화하고 다수에게 상처를 주며 권력을 독차지하는 끈질긴 인간 세계의 파국적 현상을 규명하는 저술이다. 그 책에는 손상된 자기 존엄과 억압된 자유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의 세계가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경쟁의 심리는 곧 모데란 최고의 전사인 10번 성채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 읊조리는 매일이 경쟁으로 구성, 서로에게 고약하게 구는 일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인의 일과라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은 양심의 경향성, 도덕관념을 정신적 장애물이라 일컫기까지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채를 부수거나 이웃의 머리를 망치를 내리치는 것이야말로 쾌락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작가가 부여한 ‘10번 성채라는 존재는 바로 오늘의 인간들과 이 세계의 소수 엘리트들이 주장하는 능력주의, 경쟁주의, 과학중심주의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교양인의 가늠자이며 파괴는 곧 창조의 다른 이름이라고 외친다.

 


소설은 작가의 선언처럼, ‘설명하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완전히 배반할 만큼 서사적이고 블랙유머로 무장된 재미가 넘쳐흐른다. 10번 성채가 되어 모데란 최고 전쟁의 신이 되는 존재의 외관도 주목할 필요가 상당한데, 그가 아홉 달에 걸친 신체 훼손수술을 통해 92.5%의 신금속과 결합한 7.5%의 살점을 너덜거리며, 그 살점이 바로 인간성, 인간으로서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임을 말하는 것은 정말 괴기스럽고도 우스꽝스럽다. 여기에는 과학은 인간을 만들었다! 신금속 인간을!”하며 과학에 대한 무한한 찬양의 의미에 못지않게 일말의 완전성인 7.5%로 의미되는 인간성이란 것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다. 외전의 한 작품인 언제나 조금씩에서 내구성은 강철보다 견고해졌지만, 그럼에도 증오하고 기쁨을 누리는 능력에서는 그대로 인간이었다.”는 금속인간의 자긍심 어린 선언은 역설적으로 과학실증주의의 낙관성에 대한 은밀한 의심과 조롱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이 소설 40여 편의 작품들 면면을 관류하는 사유의 제안들은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케 하려는 물음들의 연결인 듯하다. 그 첫째는 충동조절에 실패하기 일쑤고, 각종 질병과 부상에 취약하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의 욕망’, 이에 편승한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대한 선견적인 소름끼치는 인간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우는 것일 게다.

 

한때 붉은 양탄자가에서 과학은 지저분한 흙덩이 구체에 플라스틱을 입혀 매끈하게 만들어 신금속 인간이 딛고 설 자리를 마련했노라.”라고 외치는 것이나, 신금속에서 궁극의 물질, 신금속, 플라스틱...시간을 뒷전으로 몰아내 우리의 꿈이 살아 움직이는 물질이었다.”라거나, 마음 약하고 망설임이 심하며, 감상적이고 불안하며, 죽기 직전까지 모든 시간을 겁에 질려 보내며 쉽사리 감상에 빠지는....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꿈틀거리는 공포를, 불안을, 위험을, 죽음을! ....”이라고, 살점 인간에서 금속 인간으로 거듭남을 긍정하는 과거에의 일별등이 그러한 과학기술 실증주의에 대한 역설, 혹은 반어적 조크일 것이다.

 

둘째는 모두에서 잠깐 언급했던 경쟁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능력주의 신화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념의 반도덕적 무양심적 사회적 무의식의 관성에 대한 자성일 것이다. 모데란의 일상이란 끊임없는 전쟁이다. 영원을 마주하며에는 이웃 사람을 찍어 누르고 우리의 주도권을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 불멸의 존재가 된 금속 인간은 영원을 마주하기에 실패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고 보상이 되는 일거리는 단연 계속되는 전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특히 반구형 거품 주택이라는 수백만의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단독 거주공간을 설명하는 단편에서는 이들 연약한 존재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모두 낭비일 뿐이며, “이 얼마나 한심한 낭비인가! 라고, ! 번쩍! 하고 검은 얼룩으로 변할 것이다, 강철 관리인이 한번 쓸어버리면 간단히 사라질 것이다.”라며, 고작 신체 교체술로 최강의 능력을 지녔을 뿐인 자신을 망각하고, 다수의 존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려도 될 사회적 잉여로 취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인간, 생물학적 신체를 지닌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염오(厭惡)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였는지, 망치와 인간에 대하여에서는 올데란, 즉 구세계의 살점 인간인 구도자가 삶의 의미를”, 소문난 위대한 불멸의 전사로서 그 의미를 현현하는 10번 성채의 초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들지만, 10번 성채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좌절하고 이내 왔던 길로 돌아간다. 그런데 더욱 악취미인 것은 그가 폭탄에 맞아 사망하자 개들에게 구도자에 보내는 선물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뼈다귀를 물게하여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마 양심에서 해방되고 도덕을 말끔히 씻어낸, 현대의 내면화된 계급주의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인간성을 환기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셋째는 과학실증주의자들의 그 낙관적 실체가 실현되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의 실존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낡은 살점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영구히 지속되는 매일 매일의 삶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재회라는 200년이란 시간이 흐른 강철인간이 옛날 살점인간이던 시절의 신앙과 자립심을 키우고 약속을 신뢰했던 옛 친구의 방문을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대지를 폄하하는 논리에 반박하려면, 그리고, 자기 신체를 버리고 강철로 교체된 존재에 대한 의심에 답하기 위해 고심하는 것인데, 그를 폭사시키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이 모데란이라는 신공정 땅 전체는 기억에 의존해 세워진 곳이다. 그렇다! 신공정은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온갖 것들로부터의 도주 과정이고, 그 안에는 기억자체로부터의 도망이라는 뜻이 내포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러,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 비교를 견딜 수 있을까하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둘은 서로 만나 눈물만을 주고받고는 바로 이별의 걸음을 걷는다. 돌아서는 친구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200년 강철의 시대가 흘러간 지금, 그의 길이든, 나의 길이든 전부 슬픔과 의심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말하려던 것일까?“라고. 어쩌면 그의 삶은 고작 희망찬 죽음학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反問)인 것만 같다. 의심이나 유령이나 공포가 들어앉을 자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벌이는 극한의 살육과 전쟁. 종말에는 전조(前兆)가 있다. 사랑과 자기 의심의 상실, 무한 폭력, 금속에도 내려앉는 금속세균의 점진적 침투, 그리고 아주 작은 우연의 돌발성이 그 어떤 불멸도, 쾌락도, 의미도 확신해주지 못한다. 이 강렬하고 독특한 이야기 속 지성의 웅변에 집중하다보면 작가의 말처럼 저 높은 흑십자의 고지에서 인간 세계의 그 흉물스러움을, 그 던적스러움을 옴팍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이 세계는 이대로는 괜찮지 않은 것인데, 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것일까? 뒤틀린 계급의식과 감정을 내면화시켜 합리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세계,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인공지능과 탈신체화의 욕망으로 치닫는 과학실증주의의 세계, 보편적 심원한 사색에 매진한다는 지식인들의 편협성 등 파국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인간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내모는 소설이다. SF계의 혁명적 작품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경험의 지대를 벗어나 우리의 선험적 이성, 그 도덕의 근원을 헤쳐 보게 한다. 이대로 우리들의 인간성은 손 댈 필요가 없는 것인지, 이 사회에 내재된 가치들은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자성해보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6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21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정말 문제작이다. 이제라도 읽게 되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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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 記:

이 작품을 왜 이처럼 증오로 가득한 전쟁놀이에 광분한 세계로 창조해야만 했을까하는 대목에 대한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말세의 징후(오늘의 전지구적 극우정치화, 전쟁과 민족주의의 부활, 자기이익 우선주의 등 극단적 탐욕과 같은)가 보일 때,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심판 증후군이나 데카당스, 어떤 극단적 형태의 돌발적인 사건을 성찰케 하는 시선들이 있어왔다는 점이다.

 

철학자 이광래 교수가 미술철학사에서 지적하였듯, 아마 16세기 60세의 노구를 끌고 6년여 천장화에 매달려 최후의 심판을 그렸던 미켈란젤로가 성스러운 제단에 굳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저승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실세계에 광란하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망을 심판하려했듯  '가학적피학애(sadomasochism)'를 숨기지 않은 것은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데이비드 R.번치가 창조한 신금속 인간 10번 성채가 읊조리는 극단적 폭력성이나 그의 신체는 바로 인류와 인류사회에 대한 하나의 강박적 치유과정의 역설적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아마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는 성큼 인류 종말의 시간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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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 (양장) - 필사로부터의 질문, 나를 알아가는 시간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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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그의 소품 중 스스로 사고하기라는 글에서 많은 독서는 정신의 탄력성을 모두 빼앗아 간다.”라고 시인 알렉산더 포프를 인용하며, 쉴 새 없는 다독(多讀)이 사고를 못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책 읽기의 태도를 되돌아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산더미 같은 책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읽고 있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 愚人列傳3.194, Alexander Pope

 

진리나 통찰이 어떤 책에 그대로 쓰인 것을 편리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저 남의 생각을 읽기만 하면 독자적 사고와 자발적 사고의 샘이 막혀 자신의 원초적 사유의 힘을 잃어버리게 됨을 경고하는 말이다. 이 책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의 취지도 이처럼 그저 한 줄의 문장을 읽는 순간에 공감하고 머리로 이해한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공감과 이해의 글 앞에 멈춰 질문을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생의 현실과 미지의 미래를 성찰할 것을,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멈춰면밀히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책은 총 14(Part), 112개의 문장 또는 한 절의 글귀들로 엮여, 인생의 안목과 센스, 인간관계, 시간의 주재자(主宰者)가 되는 법,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는 위무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현재 직면한 불안이나 살아오며 고민해 본 주제들은 독자들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자신의 현재와 공명하는 Part에 수록된, 오랜 성찰을 통해 견인된 문장들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기대치 않은 생각의 흐름을 만들고, 어쩌면 어떤 방법적 실마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전체의 문장들을 모두 읽으며, 내 마음에 다가온 12개의 글귀를 필사했다.

 

그리고는 해당 필사의 문장으로 돌아가 내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기 위한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아마 이들 물음에 대해서 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홀로만의 고독한 사색의 흐름을 쫓아보아야 할 것 같다. 책의 14번째 글귀는 컨셔스에서 발췌된 문장인데, 바로 고독하게 사유할 시간의 엄중함을 제안한다. 고독해야 사유할 수 있다. (...) 고요히 생각할 마음이 주어진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내 몸을 일으키고 나의 주체성을 되찾고 내가 해야 할이 무엇인지 계획할 수 있게 된다.”.

 

종일 관계의 소요 속에 휘말려 지내다 지친 몸을 눕히기에 급급한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보니,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58번째 글귀에 이르면 Change Way 변화, 그 아름다운 선택에서 발췌된 시간 전망(tome perspective)’, 즉 현재의 행동과 의사결정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을 얼마나 길게 내다보는가의 헤아림 역량과, 당신의 시간은 곧 당신의 인생이다라는 오프라 윈프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대하게 된다. 내 인생을 위한 시간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는 무책임한 말일게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요즘 나는 부모님들의 노환을 옆에서 바라보며 더없이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해인 수녀의 꽃이 지고나면 앞이 보이듯이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는 문장이 내 가슴에 치밀어 들어온다. 보물같은 부모님, 이 생()에 함께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는지 이 필사집을 통해 새롭게 읽어본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비록 내 마음이 그려낸 사랑이 환상일지언정, 나는 현실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반백년 넘어 살았음에도 사랑의 환상에 현실을 걸 수 있는 나는 아마도 아이의 마음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변화를 도모해야할 만큼 진부함의 깊은 골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데 마침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속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 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심리학자 토니 로빈스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 공명한다. 아무래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그 여정에서 내 삶의 행로에 놓인 물음들의 응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권유로 들린다.

 

책의 72번째 글귀는 아네테 블라이가 쓴 날아라 펭귄의 한 구절이 있다. 어린 펭귄 브루노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내가 갈매기처럼 날 수 있을까요?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날개 될 거야, 브루노.“ 그래, 우리는 우리만의 비행법이 있다. 남과 다른 고유한 나만의 비행술이 있음을, 아마 이 비행술이 무엇인지 나를 더듬어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 걷다보면 내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낸 무의식으로 변해버린 어떤 고집스러운 상태를 발견하게 될 터이다. 변화를 위해 그것을 끊어내는 시간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 삶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과 상황들, 이 모두에 겸손해지는 시간이 된다. 겸허함으로 이 책의 문장들의 울림에 귀 기울이고, 천천히 그 글귀들을 필사하며 작은 위로도 받고, 조금은 더 삶에 관대해지는 그런 시간이 된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책의 문장들을 통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다 더욱 스스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느낌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의 프롤로그 글처럼 백년의 질문 베스트셀러 필사노트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고독하고 고귀한 시간이 되어 주는 길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모든 선견을 잠시 묻어두고 겸양의 시선으로 다가가면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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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 얼굴로 본 인간 진화의 기원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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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구조에 대한 21세기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미시간해부학교수를 지낸 도널드 엔로(Donald H. Enlow)인간의 얼굴은 특이하다. 일반적 포유류의 기준에서 인간의 이목구비는 이례적이고 전문화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며 그 특이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아 온 인간 얼굴의 익숙함은 한 번도 왜 이런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해부학자의 말처럼 그 어떤 포유류와도 닮지 않은 피부가 드러난 얼굴과, 주둥이가 길게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며, 한 평면에 나란히 눈과 코, , 그리고 이마가 수직으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 인간 얼굴(Making Faces)은 바로 이러한 인간 얼굴의 형태가 왜 오늘의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의 물음에 대한 지난한 추적의 기록이다. 그것은 5억 년 전 눈도 코도 없는 동물로부터 시작되어 눈과 입, 턱과 뇌를 지니는 동물로 변화하는 진화적 사건들과 그것들을 촉발한 자연의 선택압들, 그때 이러한 선택압에 대응하여 변이를 만들어내고 적응케 하였던 유전자와 세포들, 유전자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가한 선택압에 대한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기능과 역할, 작용을 탐사한다. 고생물학에서 시작하여 생물의 본질인 유전자와 세포의 기능과 역할, 그 구조와 형태의 발현에 이르는 진화론적 이론들과 증거를 파헤치고 추정하며 규명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그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완벽함의 과정을 따라가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1장에서 4장에 이르는 얼굴을 만드는 유전자와 유전적 기반, 발생학적 이론들의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야말로 5장에서 10장에 이르는 흥미진진한 얼굴의 진화역사와 얼굴 형성에 작용하는 정신적, 사회적 역할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 얼굴이 품고 있는 그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물학적 의미는 물론 역사성과 사회성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 책의 논지, 즉 지향점은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형태로 진화했다는 것으로 압축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문장은 척추동물 문에서 그 하위 계통인 포유동물 아문으로 분지하면서 영장류인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인 호미닌의 진화에 작용한 힘을 시사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눈도 코도, 얼굴이 없는 동물이 눈과 턱, 이빨이 있는 얼굴을 지니게 되는 5억 년이란 긴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진행된 진화 과정에서의 유전자의 기능과 역할을 보는 것은 이후의 진화적 사건을 이해하는 과학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고, 다시금 두뇌와 사지(四肢)가 발생하고, 그 생성에 작용하는 유전자 기반을 이해하는 것도 쏠쏠한 생물학적 유전학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얼굴의 형태가 지닌 함의(含意). 왜 다른 포유동물들은 주둥이가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있는데 유독 인간을 비롯한 호미닌 계열의 종은 주둥이가 퇴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이나, 왜 얼굴에서 털이 사라졌을까?, 한 쌍의 눈과 입, 작은 턱이 대칭으로 구성되고, 이마를 지니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수직적인 평면에 정면을 보도록 모아져 있을까? 의 물음에 대한 경이로운 응답이 바로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형태상의 차이점들은 진화적 변이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징후이자

변이가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인류가 하고 있는 지금의 얼굴에 이르는 데는 놀라운 다양성을 가진 모든 복잡한 유전자 조절 시스템의 진화를 통한 발현이 있다. 진화 과정은 어떤 계획에 의한 제작물의 일사천리식 조립이 아니다. ‘어설픈 땜장이의 작업’ 처럼 기존의 유전적 장치의 일부를 차용하고 조정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행착오의 반복이다. 실패하면 자연계에서 버려지고, 성공하면 남아 후손에 그 형질을 전달하면서 살아남아 지속되는 적응의 존재들이다. 침팬지는 눈 위부분이 뒤로 경사면을 이루어 이마가 거의 없다. 반면 인간은 이마가 앞으로 튀어나와 얼굴 전체의 수직면 상부를 이룬다. 뇌 특히 대뇌피질의 발달 때문이다. 대뇌피질의 발달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주둥이의 퇴화도 단지 입으로 사냥감을 묻어 뜯을 일이 없어졌다거나 나뭇가지나 풀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이유만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다리가 아닌 이족 보행과 앞발의 손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손의 사용으로 턱과 입의 형태가 돌출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고, 이러한 선택압은 유전자의 돌연변이, 형질 변이를 통해 점진적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주둥이의 퇴화는 눈이 정면으로 모이고, 손에 자유를 주었을 것이다. 이로써 감각 수신 정보는 더욱 입체적이 되었고, 손은 사회적 동물인 조상 호미닌들의 몸짓과 손짓이라는 의사소통의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 구성원 간의 상호작용의 증대는 정보의 해석과 활용을 위한 신경계의 증가를 압박했을 것이며, 이는 다시금 두뇌의 크기를 증가토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의사소통의 증대는 단지 눈과 코와 턱의 조정과 손의 사용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닐 것이고, 얼굴에 있던 털이 제거된 일부 종이 성선택에서 유리한 혜택을 지니게 됨으로써 변이 형질로 폭넓게 채택되었을 것이다. 털이 사라지고 드러난 입과 눈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상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이는 의사소통을 더욱 증진시켰을 것이며, 두뇌의 신경세포들과 연결망 확장의 강한 선택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언어의 사용과 뇌 규모의 물리적 한계에 이르면서 지금의 얼굴 형태로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이 간략하고 거칠게 표현된 인간 얼굴의 진화과정은 일관되게 하나의 현상으로 향하고 있다. 얼굴은 의사소통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정신적 능력의 되먹임 과정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저자 애덤 윌킨스는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강조처럼 사회적 두뇌가설 동물의 문화적 진화를 기반으로 인류 진화의 비밀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야기된 상태의 등장, 이 상태가 세대를 넘어 지속된다면 이를 생명체의 고정된 부분으로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되어 유전되고, 결국 표현형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지금의 인류 얼굴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한 적응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얼굴 의식이라는 개성과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동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새롭게 획득된 특성으로써, 사회적 정보 교환을 위해 얼굴 인식이 증가했음을 그 방증으로 세우고 있다. 즉 문화가 지속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더 많고 다양한 사회적 접촉이 발생하고 이러한 되먹임은 얼굴 의식을 더욱 성장하고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아울러 얼굴 이미지의 과잉시대가 된 현대사회의 얼굴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말한다.

 

, , 입술, 턱에 이르는 미용 성형의 증가라는 자신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얼굴에 물리적 변화를 가하는 최초의 동물로서 인간의 얼굴에 대한 집착을 성찰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세계화의 물결 속에 민족적으로 다른 생김새를 한 사람들의 이동은 이들 교배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균질화되어 아마도 아시아인에 가까운 생김새로 수렴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결국 민족 집단의 차이들을 만드는 표현형 요소도 감소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민족 집단에서 타자의 다른 얼굴들을 구분할 줄 안다. 아마 70억 인류의 얼굴은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모두 다르다. 이러한 다양성의 존재 이유는 물론 차이의 인지 능력 또한 적극적으로 선택된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유전자 총 개수 21천개 중 단 32개면 70억 인간이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증식 가능성과 조합 능력을 우리들은 지니고 있다. 정말 경이로운 것은 겉모습은 전부 다르지만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이 가진 수없이 다양한 얼굴은 바로 이러한 잠재된 엄청난 유전적 능력의 소산이다. 그저 이 신비로운 자연선택의 과정에 경탄을 내지를 밖에 없다. 인간 개개인 모두의 존엄함의 생물학적 표현이라 해도 될 것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대표하는 신분증이다. 그 어떤 타자도 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얼굴을 대신할 수 없음이다. ‘자네 얼굴 한 번 보여주게.’라는 말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이 품격 있는 인간 진화의 책은 바로 인간 삶에서 얼굴이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다. “인간의 얼굴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광범위하게 표현 할 수 있도록 매우 정교하고 민감하게 진화한 도구라 할 수 있다.

 

획득 형질도 동물 행태의 변화에 기여하는 진화적 힘일 수 있다.”

 

이제 라마르크의 개선된 후성 유전에 대한 설명으로 야기된 하나의 돌발 상상으로 감상을 마쳐야겠다. 발생 생물학자 C.H. 와딩턴은 환경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발달 변화들이 새로운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형태를 바꾼다면, 그래서 적응적 가치를 가진다면, 발달적 변화들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돌연변이를 위한 선택압이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행동들이 유전적 변화들을 위한 선택압을 만들어내, 이 변화들이 새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태변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싶은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성형을 하는 인간 집단의 세계에서 그 행동들로 인해 변화된 얼굴 형태의 유전자 변이가 발생하고 세대로 이어질까하는 상각이었다. 일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행동이 유전자 변형의 선택압으로 작용했으며, 진화의 적응 산물이라면, 즉 동물의 문화적 진화도 하나의 선택압으로 작용한다면 왜 후성 유전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하는 상상이었다. 과연 자연은 이러한 인위적 인간의 행동에 어떤 적응으로 화답할지 모르겠다. 미래 인류의 얼굴은 정말 균질화 될까?

 

인간 얼굴의 진화를 담은 이 책의 현실적 실익은 무엇일까를 계산하는 독자들은 그 이해판단을 멈추어도 될 것이다. 영장류 진화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런 진화의 연속적 사건들을 발생시킨 다양한 선택압과 아울러 사회적, 정신적 요소들이 얼굴의 신체적 진화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천기누설에 가까운 이 성찰적 연구 성과를 읽게 되면, 우리 인간 사회는 물론 인간 개체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관대함과 애정이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사회적 소통의 촉진을 위해 진화되어왔다, 바로 그 산물이 우리들의 얼굴이다. 미래에 민족적 다름이 감소하고 인류가 균질화된 얼굴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면 비과학적 용어인 인종이란 언어의 멸실과 아울러 보다 사회 응집력이 촉진되는 세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인류라는 집단 구성원들의 생존을 높이는 변화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게 된다.

 

수없이 증가하는 사회적 소통망(SNS)의 증가는 표현력의 증대를 가져오면서 그 상호작용의 증가만큼 갈등의 골도 깊어졌다. "사회성이 사회성을 부른다."고 했지만, 그 사회성이란 것이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적 자기 강화과정으로만 작동한다면 인간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진화의 동역학을 폐기하고 다른 선택압, 단절의 선택, 분열의 선택을 또다른 선택압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과연 어떤 얼굴이 미래 인간의 얼굴이 될까, 자못 궁금해진다. 이 흥미진진한 인류 진화의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적극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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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포켓 에디션) - 생물.도시.기업의 성장과 죽음에 관한 보편 법칙
제프리 웨스트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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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생명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621

 

스케일(scale, 규모)’이라는 언뜻 모호하고 낯선 제목을 한 책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생뚱맞지만 그저 익숙한 삶의 반복성에 매여 이 복잡다단한 세계에 대해 더 이상 알고자하는 의욕조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어떤 반항, 혹은 의기소침해진 정신의 전환 필요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책은 복잡계 연구의 선도적 연구기관인 샌타페이연구소()를 한때 이끌었던 물리학자 제프리 웨스트 교수의 대중을 위해 쓰인 복잡성 과학, 즉 물리학을 비롯한 생물학, 수학, 생태학, 화학, 경제학, 경영학 등 학제를 아우르는 복잡적응계 과학의 역작이다. 나는 이 번뜩이는 통찰로 가득한 책에 홀랑 빠져버렸다.

 

왜 세상이 이 모양일까? 왜 생명은 노화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닫힌 세계인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지금처럼 자원의 무한정 소비가 언제까지 가능할까? 도시는 왜 자꾸 비대해지고, 사람들은 도시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토록 하는 어떤 궁극적 법칙이란 것이 있을까? 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들에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법칙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이들 물음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까?

 

후기(後記)에서 제프리 웨스트교수는 이 책의 주된 메시지를 담을 적절한 핵심단어나 짧은 문장을 고심할 때 크기는 정말 중요하다”, “생명나무 스케일링”, “만물의 척도등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모두가 바로 이 책의 주제라 할 것이다. 세포에서 도시, 기업에서 생태계에 이르는 생명의 복잡성에 담긴 단순성과 통일성에 대한 탐구가 책을 관통하는 기본정신이며, 원대한 우주적 관점과 현실세계의 더 구체적인 문제들 사이의 중요한 상호작용을 포착해 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저술이다. 책의 부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해주는데, 생물, 도시, 경제, 기업 모두에 적용되는 성장, 혁신, 지속 가능성, 삶의 속도에 관한 보편 법칙이다. 탐구 대상으로 생물, 도시, 경제, 기업을 삼고, 이것들의 성장과 혁신, 지속가능성, 삶의 속도의 동역학인 보편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규모(scale)라는 렌즈를 통해 이들 탐구대상을 들여다보면 그 밑에 놀라운 통일성과 단순성을 지닌 우리네 직관에 반하는 어떤 일관된 법칙성에 제약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규모라는 관점에서 개념적 사고의 힘을 정량화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요인)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그것들의 동역학과 관계망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예측, 판단하여 우리가 직면한 이 세계에서의 삶이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의 몸부터 도로와 건물과 각종 상하수배관, 교통망으로 이루어진 도시에 이르기까지 이들 집합구성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며, 그 까닭은 그 각각의 계()들을 이루는 요소들이 상호 얽혀 작용하는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몸을 구성하는 100조개의 세포 중 어느 하나도 그 집합구성의 총체인 몸인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특성을 지닌 것은 없다. 즉 내가 내 자신이라 여기는 것은 세포의 단순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세포들 상호작용의 집단적 표현 형태인 것이고. 여기에는 이들의 단순 집합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계의 내외부를 망라한 끊임없는 되먹임과 상호작용 과정들의 통합이 있다.

 

크기와 규모는 고도로 복잡한 진화하는 계의 일반적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다.”  -36

 

여기에 모든 복잡계의 신비로움이 있다. 하나하나의 세포가 지니지 않는 특성이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는 무수한 창발적 행동과 현상, 자기 조직화와 자기 회복성 등 적응의 역학은 우리들 직관에 몹시 반하는 반응을 현시(顯示)한다. 복잡계란 계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나 교란이 어떤 다른 부분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강된 반응을 일으키는 행동을 지닌 체계를 이른다. 따라서 우리 인간 개체도 세포의 단순 집합체가 아닌 것은 복잡계의 이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개별 구성 요소나 행위자가 모이면 대개 그 개별 구성요소나 행위자의 특성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그 특성으로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집합적 특성이 드러나는 전형적 복잡계인 것이다.

 

100조개의 세포는 순환계, 호흡계, 배설계, 세포내 연결망,...등 상위의 계들로 이어지고 이들은 다시금 상호 망()들을 통해 에너지, 대사산물, 정보를 공급하고 나눈다.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한 다윈의 진화론을 알기에 개별 생명체의 형태와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친 진화적 산물임을, 그래서 그것들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지만, 왜 그런 형태와 구조를 지녀야 했는가, 그것에 어떤 생물학적 기원을 넘어서는 다른 초월적 제약이 가해진 것은 아닌가는 묻지 않았다.  『스케일(Scale)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응답이다. 크기와 규모가 진화의 결정 인자라는 것이다. 가장 작은 포유동물인 땃쥐에서 인간, 코끼리, 대왕고래 등 수십 그램의 동물에서 수십 톤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무게는 10, 10², 10³, 10, 10배에 이르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 수명은 작은 동물은 엄청 짧은 반면에 대왕 고래같은 대형포유 동물의 수명은 상대적으로 엄청 길다. 왜 그럴까? 스케일링(Sacling)은 크기가 변할 때 계()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을 규명하는 일이며, 이것은 자연의 기본 힘들, 진화의 동역학, 보편적 원리나 구조를 밝히는 지금까지의 최고의 방법적 수단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묻는 것이다. 동물의 먹이가 반으로 줄어들면 먹이를 먹는 양도 절반으로 줄어들까?, 도시의 인구가 2배로 늘어나면 범죄건수나 특허 건수도 2배로 늘어날까? 실제 측정하면 계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체계적으로 에너지가 절약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저선형 스케일링이라 부른다. 몸집이 커질수록 필요한 단위당 에너지양이 더 적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에서 나타나는 수확체증, 초선형 스케일링의 정반대 행동이다.

 

이러한 비선형(저선형, 초선형) 행동의 기원과 그 행동이 과학, 기술, 경제, 경영 뿐 아니라 일상생활, 과학소설,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들에서 이끌어낸 폭넓은 범위에 걸친 오랜 연구노력의 성과가 풍부하게 담겨있다. 코끼리는 땃쥐보다 1만 배 더 무겁고, 세포수도 1만 배 더 많다. 세포수가 1만 배 많으니 음식 소비량도 1만 배 더 많을까?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1,000배 많이 먹는다. 즉 땃쥐보다 10분의 1만큼 덜 소비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어떤 자연의 법칙이 있을까? 있다. 대사율은 지수가 43에 아주 가까운 거듭제곱법칙(멱법칙)에 따라 증가한다는 것이다. 대사과정에서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덜 쓰며 활용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세포의 손상율도 줄어들고 수명도 길어진다. 이 대사율 스케일링 법칙을 발견한 생리학자의 이름을 따라 막스 클라이버(Max Kleiber)법칙이라 부른다.

 


한편 어떤 포유동물의 크기가 2배되면 심장 박동수는 4분의 1만큼 줄어든다. 4분의 1제곱 스케일링이 널리 퍼진 보편적 법칙이라는 것이고, 이는 자연 선택이 개별 생물의 설계를 초월하는 물리학적 원리들에 제약을 받아왔음을 시사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생물학의 망 동역학은 생물의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삶의 속도가 4분의 1제곱 스케일 법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감소하도록 제약 받음을 의미한다. 4분의 1스케일링의 비선형 함수는 생물의 진화에 중요한 제약으로서 하나의 법칙성을 갖는다.

 

이 중대한 물리법칙은 우리들의 몸은 물론, 도시와 기업의 운명, 그 계의 부침을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체중이 100배 증가할 때마다 대사율은 동일하게 32배 높아진다. 거듭제곱 법칙은 일반적인 자기 유사성의 대표적 사례다.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이 형태는 생명의 다양성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화된 설계에 상관없이, 즉 땃쥐가 되었든 대형 고래가 되었든 생물의 측정 가능한 특징들 중 상당수를 결정하는 데 근본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 놀라운 스케일링 법칙은 생물이 진화하면서 얻은 개별적 설계와 독립되어 망 설계의 궁극적 동역학으로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거듭제곱 법칙 스케일링은 자기 유사성을 하나의 특성으로 지닌다고 했다. 여기서 자기 유사적 프랙털 구조는 어쩌면 자연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프랙털 구조란 요철이 심한 해안선이나 국경의 모양이 동일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는 것이고, 이에따라 직선과 대비하여 그 울퉁불퉁한 선들의 길이를 지수로 표시하면 노르웨이 해안선은 1.5에 가까운 즉 1.5배를 보인다고 한다. 프랙털 구조는 다시 공간 채움이라는 물리적 속성으로 데려다놓는데, 표면적을 최대화하여 대사나 에너지 흡수, 혹은 열 발산과 같은 기능의 최대 효율을 위한 산물이다.

 

겹겹이 이어진 다층적 분자나 주름, 정보, 에너지와 자원이라는 생명의 본질적 요소들이 흐르는 표면적을 최대화함으로써 운반을 최적화하려는 기하학적, 물리적 원리의 실현이다. 허파꽈리 총면적은 테니스장 면적만하며, 우리의 모든 동맥과 정맥, 모세혈관을 한 줄로 늘어놓으면 총 길이가 10만 킬로미터에 이른다. 공간을 충분히 채우는 주름진 선은 마치 면적인 양 규모를 증감한다. 우리 신체의 이러한 프랙털성과 공간채움의 물리학은 성능을 최적화하려는 오랜 진화시간의 결정이다. 대왕고래는 땃쥐보다 세포 하나에 피를 공급하는 데 에너지가 겨우 100분의 1밖에 안 된다.

 

결국 대사에너지의 사용 효율을 높이고, 세포와 계의 구성 요소들의 피로도를 최소화하도록 진화했다. 하나 의문이 든다. 이왕 효율을 높이고 세포의 손상을 최소하도록 진화하는 김에 그 손상을 ‘0’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영생하는 존재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의 존엄함을, 그 위대성을 보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음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죽음은 생명의 최고 발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변화 촉진자입니다. 낡은 것을 없애서 새로운 것을 위해 길을 엽니다.” -127

 

개별 생명체인 우리 개인들에게는 죽음은 부조리하게 여겨지겠지만, 자연은 개체의 번식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형질과 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한 적응을 거쳐 종의 다양성을 낳도록 제약한 것이다. 자연은 죽음을 생명의 최고 발명품으로 만든 것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서 새로운 것의 길을 열도록 죽음을 생명의 변화 촉진자로 형성한 것이다.

 

성장과 노화, 그리고 죽음 또한 자연의 물리적 제약의 산물인 것이다. 생물의 크기가 2배로 늘어나면 세포수도 2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대사율은 앞서 언급했듯 43 제곱 스케일링에 따른다. 즉 대사율은 1.75배만 증가할 것이다. 대사 에너지의 공급되는 속도보다 에너지가 증가하는 속도가 더 낮다. 더구나 성장에 쓰일 에너지는 체계적으로 줄어들다 이내 0으로 수렴해서 멈추고, 세포의 재생과 손상된 세포의 수리와 유지안정에 쓰기 바쁘다. 노화는 대략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미 세포의 유지보수와 재생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할 만큼 세포의 손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노화는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생물학적 마모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의사이자 소설가였던 안톤 체홉은 엔트로피만이 쉽게 해낸다.”며 인간 생명이 결국 죽음에 굴복하는 엔트로피와 국지전에서의 패배를 오래 전에 말하기도 했다. 왜 인간은 20세 정도에서 성장이 멈추고, 이후 안정된 모습을 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는 바로 이 거듭제곱 스케일링의 저선형 법칙 때문이다. 손상되는 세포의 유지보수 에너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4분의 3 대사율! 이 지엄한 물리법칙은 우리를 에워싼 지구 내 모든 인위적, 자연적 산물을 막론하고 강력한 제약 조건이다. 죽는 다는 것은 진화과정의 핵심이며, 좋은 일이고 중요한 역할인 것임을 시사하는 것일 게다. 죽음에 대한 부조리는 해결되었다! 부조리가 아니라 닫힌 공간 지구에서 만물이 살아내기 위한 빼어난 본성으로서의 법칙인 것이다.

 

이 책의 일부분인 생명의 단순성과 통일성에 내재된 법칙을 위와 같이 극히 부분적 내용을 대표적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우리 뇌에서부터 종이뭉치, 심전도와 주식시장의 시계열도에서 공히 발견되는 거듭제곱의 법칙을 따라 반복되는 자기 유사적 프랙털 구조를 비롯해서 도시의 성장과 사회경제적 망의 동역학, 기업의 성장과 쇠퇴와 죽음, 인류 경제의 전망에 이르기까지 각 계들의 행동과 그 미래의 예측 가능한 이해의 지표를 제공하는 데에까지 확장된다.

 

이 기계학적 물리학에 기반한 초학제적 연구의 산물인 정량화 결과에 의심의 눈초리를 지닌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야를 크게 넓히고 편협한 단일 학제의 마음가짐에 작은 관대함을 가진다면 엄청난 도전과제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수많은 노벨상 수상 석학들의 연구결과가 누적된 이 저술은 샌타페이연구소의 복잡계 연구에서 이룩한 업적의 집적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읽다보면 우리들이 마주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다가서는 어떤 연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상상으로부터 실제의 연구와 노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시도 대사하고 성장하고 진화하고 잠을 자고, 늙어가고 질병에 걸리며, 손상을 겪고 스스로 수선을 한다. 즉 성장에 쓰일 에너지양과 수선, 유지에 쓰이는 에너지양의 스케일링 법칙이 생명의 비선형 거듭제곱 스케일링 법칙과 동일하게 제약받고 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도시와 기업에 관한 무수한 스케일링 법칙의 현상들의 사례는 책에 맡기기로 하고, 내게 아주 중대하게 이해된 지속가능성에 대한 숙의를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인상을 마쳐야 할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려다 보니 지면이 무한정 늘어날 것 같다.)

 

바로 유한시간 특이점((finite time singularity)’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 인류 사회는 열린 경제, 다시 말해 자원이 무제한 제공되는 성장 일변의 세계를 낙관적으로 상정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와 혁신의 초선형 스케일링으로, 때로는 지수적 차원도 넘어서는 성장으로 이어지며, 붕괴 가능성이 실현되기 전에 시계를 리셋팅(재설정)하는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성장을 이어왔다는 것이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창의와 혁신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 증기, 석탄, 컴퓨터, 인공지능을 포함한 오늘의 디지털 정보기술 등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혁신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열린 성장을 유지하고 붕괴를 피해왔다. 이러한 크고 작은 발견은 인류가 비범한 창의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 증언하지만, 불행하게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지금 인류의 사회 경제를 이끄는 동역학은 지속적인 적응 상태가 표준이라는 것이고, 이는 초선형 스케일링을 통해 추진된다는 것이다. 허지만 아주 근원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초선형 스케일링에 의한 성장 함수가 생물의 규모 경제인 저선형 스케일링의 토대에 서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유한시간 특이점이라는 뜻밖의 특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불가피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아마도 문제가 생길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유한시간 특이점은 GDP, 특허건수든, 범죄 건수든 해당 대상을 통제하는 증가(성장) 방식의 수학적 해()가 어떤 유한 시간에 무한히 커진다는 것의 가리킴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유한한 도서관 진열실의 무한한 방향으로의 지속되는 도서관처럼 소설적 표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이러한 신호는 바로 지금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어떤 획기적 혁신을 통한 위상학적 상전이가 없다면 붕괴될 것이라는 의미다.

 

오늘의 성장이란 것이 거듭 제곱의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함수이지만 이것은 무한한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다. 즉 특이점을 미래로 무한정 연기시키면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한 특이점은 사정이 다르다. 이것은 초선형 스케일링 성장이 유한시간 특이점에 접근하는 지수 성장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문제에 있다. 이 말은 풀어쓴다면 성공적인 혁신간의 시간 간격이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린 성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소비하는 한, 삶의 속도도 불가피하게 빨라질 뿐 아니라 점점 더 빠르게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이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혁신의 주기가 놀라울 정도로 그 간격이 극도로 짧아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현상 때문이다. 파국에 앞선 창의적 혁신이 우리 눈앞에서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도 그 이유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 열린 성장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다가오는 초지수 성장이 몰고 오는 정체와 붕괴의 파국을 회피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혁신이란 지금까지 계가 작동하고 성장해 온 조건들을 바꿈으로서 시계를 사실상 다시 맞추는 것이다. 지금까지 창의성, 독창성, 발명 능력이 붕괴의 허용을 막음으로써 특이점을 미래로 미루어왔다. 그런데 패러다임의 전환은 혁신의 주기가 지속적으로 더 빨리 되풀이되어야 함을 압박하고 있다. 새로운 혁신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속도로 새로운 상태로 옮겨가야 한다. 오늘 우리 한국인의 삶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한국인의 빨리빨리 특성을 마치 민족적 DNA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바로 짧은 산업화 기간에 이루어진 혁신간격의 압축적 속도, 그 급진적 성장 속도 때문이랄 수 있다.

 

이제 전체 과정은 놀랍고도 기이할 만큼 정신병적 행동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집단적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처럼 기괴한 것이다. 사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한 번 굴러 내려온 돌을 산으로 올리는 주기가 점점 단축되어야 하는 시시포스가 아연실색할 정도의 국면인 것이다. 미래학자인 레이커즈 와일은 1993년에 특이점이 온다에서 낙관적 미래 전망을 내놓으면서 2023년이면 초인공지능을 창조할 기술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이 전망은 빗나갔지만, 어쩌면 가까운 시간 안에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잘못을 하고 있는데, 바로 단순한 지수성장을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수성장만으로는 결코 특이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초지수 성장이 유한 특이점을 몰고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성장도 지속불가능한 성장이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 시기의 도래가 좀 늦추어지겠지만 말이다.

 

본문 576, <지속 가능성의 대통일 이론> 중에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특이점들은 순차적으로 계속 쌓이고, 미루어지지만 70년 전에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인 폰 노이만은 인간 활동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인류 역사의 어떤 '진성 특이점(essential singularity)'에 다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말했다. 오늘처럼 살아간다면 인류는 궁극적 특이점의 위협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가속화되는 변화속도는 도시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어쩌면 지금 한국정치사회가 처한 이 위기의 혼란의 여러 원인 중 이 속도의 스트레스도 하나의 지대한 영향 요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제 전체는 심각한 파괴와 붕괴를 향해 질주해 갈 것이다. 우리의 도전 과제는 명료하다, 우리들 자신이 진화해 온 더 나은 생태적 단계에 상응하는 지점으로 돌아가서 어떤 저선형 스케일링 판본과 자연적 한계나 성장이 전혀 없는 안정적 형태에 만족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것일까? 이 실질적 가속이 오늘날의 사회관계망에 내재된 지속적인 양의 되먹임 메커니즘을 통해 생성되는 창발적 현상임은 책의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크기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상호작용은 더 많은 상호작용을 낳고 더 많은 착상을 자극하며, 부는 더 많은 부를, 범죄는 더 많은 범죄를 야기한다. 이 끊임없는 초선형 스케일링의 사회적 연결성의 상승 강화는 인간을 비롯한 생태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진다. 우리의 생물학적 시간은 이 사회경제적 시간의 초지수적 시간을 따라가지 못한다. 정확히 수학적 물리학의 규칙을 따른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무수한 창발적 착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착상의 가속화가 생물학적 저선형 스케일링을 위한 인류의 공존을 위한 것이라면 긍정적일 것이다.

 

왜 실물교량이나 대형 선박의 설계에서 축소한 모델을 통한 실험의 결과를 선형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는지, 30년이 지난 뒤 남아있는 기업은 5퍼센트도 안 되는지, 왜 생물의 크기는 무한히 커질 수 없는 특정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지, 전쟁과 국제 갈등이 주로 무엇에 의해 촉발되는지와 같은 개발된 정량적 이론을 통해 그 유사한 형태의 인위적 조성물- 정치체, 종교집합체, - 과 같은 대상에 대한 숨겨진 스케일링을 발견하는 사유의 토대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놀라운 통찰이 담긴, 복잡하게 보이는 이 세계에 담긴 비밀을 건져 올리는 가히 위대한 지혜의 보고다. 나는 이 책에 설명되고 있는 기업의 스케일링 법칙을 통해 특이점에 도달한 한 정당(政黨)의 운명을 상상했다. 도시계획, 기업경영, 도시행정, 생명의학, 경제전반, 사회학, 그리고 물리학과 생물학 등 학제를 망라한 모든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적어도 몇 가지의 번쩍이는 착상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이제야 이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강력추천!

 

A.R. :

1) 코로나 19의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자 계엄령이 앞을 가로 막았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이은 희곡작품 계엄령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왜 역사는 이렇게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우리를 실험하는가? 이러한 세계에 대한 예측 가능한 법칙은 없을까? 만일 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역사적 반복성에서 스케일링 법칙을 발견한다면 인간 사회는 훨씬 건강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2) 크기가 생명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하니까 빅데이타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겠기에 스케일링에서 말하는 크기란, 물론 많은 데이터를 선호하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의 필요성을 없앤 그저 무작위한 양적 크기로서의 작금의 정보업계에서 말하는 빅데이타가 아니라 거시적 개념틀, 기계론적 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개념틀에 속박된 크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차이를 지니고 있는 개념임을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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