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
필 토레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현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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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통 ‘4차 산업혁명의 중축을 이루는 기술-합성생물학, 사물인터넷(적층기술등), 인공지능(AI), 로봇공학-의 낙관론과 함께 인간의 생명과 삶의 질에 획기적인 편의를 제공할 기술 개발에 대한 경제적 경쟁에서 뒤쳐질까 안달을 해댄다. 그런데 내겐 이러한 소음이 왜 그리 어리석게만 여겨질까? 왠지 이번 세기는 우리 인간이 성큼 멸종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인지적 폐쇄성’, 그 알지 못하는 인류의 무지, 그래서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몽매성이 내 직관을 우울하게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팝 뮤지션이 부르는 노래가 이런 내게 종말적 비애감(悲哀感)까지 더한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인류의 대멸종 후 포스트휴먼이 된 듯한 아릿한 기분에 젖어든다. "I'm not discarding you like broken glass ... There's only tears when it's the final dance"라는 그녀의 외침이 유일한 구원의 목소리가 되어.....버려지지 않기를..., 눈물만이 있는 그때가 오지 않기를.... 마침 필 토레스인류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세밀화(細密畵)인 이 깊은 통찰의 저술, 디 엔드: THE END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한 외신에서는 사람처럼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감정을 느끼는 베이비 엑스라는 AI(인공지능)의 성과를 발표하면서 급기야 베이비 엑스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소리를 들으며 가상 도파민까지 생성했다고 한껏 들떠 전하기도 했다. 그리곤 기사의 마지막에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면서, “컴퓨터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경우, 그 결정에 인류에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달았다. (ChosunBiz.com 9.9일자 기사에서)

 

이처럼 기술에는 양면성이 있다. 물론 모든 기술의 귀결이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으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고도의 기술 자체가 인간의 재앙과 관련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기술의 영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고 일부의 경우 더욱 확대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증폭될 수 있는 경우에 말이다. 위의 기사처럼 컴퓨터로 인간의 중추신경 또는 유전체를 디자인하거나 폭탄 하나로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는 일도 가능해졌고 생물권을 먹어치우는 미세 로봇까지멀지 않아 등장할 것 같다.

 

필 토레스호모사피엔스가 도도새의 뒤를 이어 멸종할 가능성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번 세기에 인류의 번영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존재론적 위험을 20가지로 꼽고 있다. 세포조작기술(합성생물학), 초지능(AI), 나노기술, 초화산, 인지적 폐쇄성, 핵폭탄, 종교적종말론갈등, 기후변화(온난화), 시뮬레이션 종료, 등등. 이렇듯 인류의 존재론적 재앙을 만들어낼 위험들에 대한 현재라는 시간에서의 이해에 삶의 경쟁에 매몰된 우리들이 얼마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지, 마치 내일도 오늘처럼 삶을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각성(覺醒)하게 된다.

 

1. 인류의 존재론적 위기란?

 

이 저작은 종말의 공포를 확산하여 우리네 삶의 균형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력과 허무를 증폭시키자는 것이거나 기독교 세대신학처럼 종교적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번영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즉 인류의 운명을 가를 유력한 위협들의 실체를 인지함으로써 사전 대응과 예방 역량을 수립하고 어떻게 실천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이자, 요구라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위기란 현재의 인류나 미래의 자손들에게 발생 할 수 있는 최악, 즉 멸종의 시나리오라는 직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결국 이 위기는 아주 특별하다. 다른 재난처럼 거기서 교훈을 발견할 수도 없는, 위기가 닥치면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존재론적 위기란 다음 기회같은 게 없다는 얘기다. 그저 끝일뿐이다.

 

때문에 인류의 생존과 번영은 바로 지금의 인간들이 존재론적 재앙을 막아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까지 지구가 겪었던 다섯 차례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멸종이 될 이 위기는 전혀 성질이 다른 위기다. 자연적 사건이었던 이들 멸종과 달리 인간에 의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2. 실존적 위기에 대해서

 

위기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자 그 결과로 문제가 더욱 증폭될 수 있는 일이라 정의된다. 그런데 여기에 실존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인류 이외의 타자가 아닌 바로 우리로서의 인류, 그 자신의 존속에 관련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속으로 지금 인류가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고? 라는 반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필 토레스는 인류 종말의 숙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상에서 인류의 지적 능력이 차지하는 몫이 급속하게 줄고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실존 위기학이다. 우리는 오늘의 과학기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실제로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다고 하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나 아마 그것은 타고난 무지 때문일 것이다.

 

2-1. 과학의 비정상성, 탈숙련화

 

그러나 고도화되어 가는 기술은 역설적으로 소위 과학의 비정상성이라 일컬어지는 접근성과 조작성이 단순화되어가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검지 손가락으로 한번 스치듯 문질러 대기만 해도 완전히 다른 정보로 넘어가는 것처럼,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서 누구나 천연두 바이러스 유전체를 확보할 수 있는 세상인 것처럼. 전문지식가와 비전문가의 기술적 수준의 차이도 대폭 감소하는 탈숙련화현상이 점점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재앙(災殃)적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천년 왕국을 기다리는 어느 기독교 복음주의자가 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날을 당기고자 핵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으며, 합성된 전혀 새로운 치명적인 바이러스 세균을 퍼뜨릴 수도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협박하는 핵폭탄보다 더욱 예측 할 수 없는 위협이 너무도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인류는 지금의 국제 정치와 경제적, 종교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갈등보다 이러한 재앙으로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는 이 같은 세계 속에 있다.

 

2-2. 실존적 위기를 재촉하는 기술들

 

기술의 양면성을 새삼 되뇔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을 중지하는 것은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원천을 봉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원자력공학을 가르치는 어느 대학 교수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을 우린 매양 보고 듣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에서 인용한 기사의 AI도 이 점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양면성은 인간의 인지적 폐쇄성과 어울려 언제 인류의 통제력을 벗어날지 알 수 없는 그 임계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자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고 설명하는 위기들을 모두 열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처럼 기술에 대한 광신적 믿음과 인간의 무수한 불완전성이 불러올 그 미지의 사태에 대한 불신에 직접적인 점화를 하는 몇몇의 특정 기술, 특히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의 연장선에 있는 것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나노기술은 기술의 꽃이라고 한다. 분자의 자가 결합에 의존하는 기술, 분자제조기술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순식간에 자가 복제를 할 수도 있으며, 뇌의 미세구조를 완벽하게 포착하여 인지적 클론이 생겨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클론이 인간에 복종하는 존재일까? 인간은 이 클론을 통제할 능력을 지닐 수 있을까?

 

그리고 인공지능(AI) 개발의 현실이 어디에 와 있는지는 인터넷을 한 번 쓰윽 서핑하는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지원하고 보완하여 인류의 번영에 이롭기만 한 존재일 것인가? 지금의 과학자들은 AI가 인간과 같은 욕구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추정하기만 한다. 하지만 AI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인간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인간의 인지적 특성과는 전혀 다른 성향이 나타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우리가 인공지능을 인간과 동일시하려는 욕구에 빠질 경우 세상의 종말을 앞당기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런데 더욱 인간인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있다. ‘인지적 폐쇄성이라고 하는 인간 종()으로서의 사유(思惟)의 한계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질문할 수 있으나 그 대답을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더욱 무지한 것은 질문을 생각해 낼 수조차 없는 문제, 혹은 아예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것의 문제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 거리를 걷던 개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때 그 개의 문제처럼 말이다. 그 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부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 인지적 페쇄성의 문제는 AI, 로봇, 나노기술, 합성생물학에 걸쳐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모든 기술의 근저(根底)에 자리한 중대한 자기반성의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아마 이러한 인간의 자기 한계의 인지가 초지능의 요구를 절실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불가지(不可知)에 대해 초지능은 해결하게 될 것이고, 우주의 실체를, 인간이 봉착한 난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대한 동일시 욕구의 함정은 초지능에도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그 위기를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까? 지금의 과학기술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저명한 미래학자와 위기학자, 윤리학자들은 모두 ‘NO!'라고 답한다.

 

2-3. 또 다른 위기들

 

2-2.에서 기술(記述)한 실존을 위협하는 기술(Science & Technology)들을 세속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인식론적 토대가 완전히 다른 종말론이 있다. 세상의 끝에 관한 이야기는 신의 계시에 담긴 예언에 대한 믿음이라는 종교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아마겟돈 종말을 신봉하는 IS와 같은 집단들의 응용종말론은 종말을 그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절대 필요조건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들의 천년왕국을 위해 존재론적 위기를 구성하는 과학기술들이 결합할 때 인류는 부재, 그것일 것이다. 오직 광신적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자들이나 이들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류는 이러한 종말적 시계를 통제할 수 있을까?

 

3. 결 어(대응을 위한 사유)

 

지금 인류가 몰두하고 있는 고도의 과학기술들은 점점 강력해지는 동시에 접근성도 증대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생명공학 기술과 합성 생물학, 나노기술 분야에서 이와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더구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2008지구재난 위기협의회의 조사는 분자나노기술과 초지능 AI로 인한 인류의 멸종이 핵전쟁으로 인한 그것의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아마 여기에 종교적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과 결합한 기술의 재앙은 더욱 증대 될 것이다. 이러한 시급한 전 세계적 아니, 지구적, 혹은 우주에까지 미치는 우주적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가 아무런 실질적인 대책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데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린 무얼 준비해야 하는가? 우린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의 한 방법론에는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다 멸종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을 위해 현 인류가 퇴장해야 하는 거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보다 실질적인 접근을 해보자. 지금까지와 같은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방안들. “인공지능의 우호성과 적대감, 무관심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연구의 투자를 얘기하고 있다. 이 연구의 결과가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게 될까?

 

그래서인지 저자는 초지능을 최우선으로 개발하자고 한다. 그렇게 되면 초지능이 이 방안을 마련해주지 않겠느냐는 기대 같다. 그러나 이 초지능 역시 인간의 통제력이 미칠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초지능에 대한 믿음이 기초가 된다면 나노기술의 개발은 인류를 생산의 족쇄에서 해방시키고 그야말로 풍요의 유토피아가 성취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우주식민지 개척의 방법은 초지능이 개발된다면 이 역시 가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공감하게 된 대책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 인간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반지성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잃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능력이 바로 분석적 사고의 필요, 즉 비판적 사고라는 점이다. 인식론적 기본원리를 실제 세상에서 실행할 수 있는 비판능력, 이를 위해 교육과정에 응용인식론 기초과목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간의 육성은 오늘의 우리 세계에 중대한 필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 불완전함이 야기할 수 있는 무수한 위기들이 있다. 부주의, 실수, 사고, 기술적 결함, 합당한 사유로 인한 순간적 실책, 어설픈 기술, 그리고 불가지까지...

기술 낙관주의만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와있다. 냉정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집대성한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이 저작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중대한 사고의 전환을 모색케 한다. 위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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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9-1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블로거들한테 필리아 님의 윗글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님 인공지능이나 인류 종말론 같은 논제에는 관심이 좀 덜한 것일까요? 필리아 님의 윗글 혹은 서평 대상인 『디 엔드 - 과학과 종교가 재앙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깊이 생각해볼 만한 논제를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필리아 2017-09-15 05:54   좋아요 0 | URL
당면 과제가 아닌듯한 문제 제기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qualia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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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세계에 대한 확고한 전제(前提)악의 시대라는 표현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계기라 해야겠다. ()이 만연한 세상이라는 점에 무언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인류의 그 어느 시대보다 번성하는 악의 지배적 힘을 체감하고 고뇌와 고통, 분노 그리고 무력감을 돌파해내기 위한 지혜에 대한 갈구 탓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압박감으로 인한 삶의 혐오와 냉소를 떨쳐내기 위한 희구 그것이었을 것이다.

 

1. ()은 인간 내면의 본질이다

 

더구나 는 악(), ‘는 선()이라는 경계를 간단히 그어버리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그 편협성과 무지(無知), 이기심에 대한 두려움도 내겐 중요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인물에 대한 충격이 온 나라를 휩쓸어 댔으니 이 시의적절한 저작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저자는 말한다.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내는 상식에는 인간이란 이런 거다. 라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다고.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한다. 탐욕, 증오, 시기심, 성적갈망, 거짓, 분노, 폭력...심지어 죽음충동에 이르기까지 등등의 어둡기만 한 그것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어 침잠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린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 위해 통제하고 조절하며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악인(惡人)이란 별개의 종자가 아니다.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일 뿐이다. 이것의 외형적 발현은 소설가 정유정[종의 기원]에 그려진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며,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나치 독일의 아이히만과 같은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윌리엄 골딩의 소설 [핀처 마틴]의 에고이스트(egoist)처럼 무수한 형태의 우리들일 뿐이다.

 

2. 왜 오늘 악이 번성하고 만연하나

 

이해타산이 만연한 세계가 일반화되면 에고이스트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하다.” -P129

 

강상중자본주의의 개화는 악의 거래를 통하여 선을 낳는다. 라는 허구위에 축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악에 의해 부정적인 형태로 이어져 있는 사회의 연쇄가 긍정적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송두리째 도려내버렸기 때문에 자본축적에만 골몰하는 개인화의 가속화를 재촉하는 오늘 세계는 필연적으로 악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인간 연대(連帶)의 단절, 인간의 소외와 파편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라는 점이다. ‘인색하기 그지없는 욕망의 경쟁은 이제 생존조건이고, ‘만 믿어야 된다는 신념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에고이스트만이 살아 갈 수 있는 끔찍한 세계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주의, 즉 이런 해석도 가능하고 저런 해석도 가능하며, “사회를 지지하던 객관적 가치기준이 흔들리는 가운데 무엇이든 괜찮다는 식으로 변모하다 보니, 점점 의미가 자기증식하고 이 의미증식은 바로 의미의 공동화(空洞化)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믿어도 좋다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공허함, 텅 빔이 악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런 세계 속의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주위의 모든 것에서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타자는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자는 그저 물질인 것이다. 살아있는 구체적 실감이 없는 인간, 그 텅 빈 인간, 신체성(身體性)을 결여한 인간, 바로 악인이 양산된다. 자본주의는 악의 배양기가 된다.

 

3. 악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책 속에는 몇몇의 문학 작품 속 악인을 인용한 다양한 악의 실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실은 테리 이글턴[()]이란 저술과 패턴이 지나치게 유사하여 내겐 진부한 사례였다), 그 중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인 악인 핑키의 연인이었던 로즈와 사제의 대화는 악의 내재성과 인식에 대한 의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어요.” 라는 로즈의 말에 사제는 가장 선한 자의 타락은 가장 악한 타락이 되리니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신자는 누구보다도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악마와 접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자기 안의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무인식성, 무사고성으로 인해 가증스러운 인간이 된 인물을 최근에 우린 보지 않았던가? 자기 악으로부터 침식된 자아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인간,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만 되풀이하는 구치소의 인간을 말이다.

 

4.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악이란 바로 이처럼 인간과 세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생기는 꺼림칙한 공허감의 연쇄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던가?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귀를 닫고, 관계를 폐쇄한 인간, 이러한 연쇄가 없는 전능감(全能感)은 필연적으로 파탄을 낳지 않는가? 아마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한 상태에 끊임없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해 불가능한 악이란 이처럼 철저한 결여란 감정에 기생한다. 이 공허함을 품은 존재가 결여한 것은 바로 신체성이다. 신체의 결여는 곧 악이다. 악인이란 오늘 개인화와 물질적 욕망의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 공허감, 공동화에서 비롯된다. 용기 있게 내 안의 악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해야 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 인격을 덮어씌운 선한 페르조나(가면)는 내가 아니다. 나를 알아야 악을 제압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는 법을 체득한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사는 법이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충동()을 조금씩 길들여 제어하고 조절하는 작업이라고. 이것은 결코 외로운 작업이어선 안 된다. 바로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대의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연쇄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세상의 일부이며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만 한 가치있는 세상이라는 인식, 관계성의 회복, 이것이 악의 골짜기,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강상중은 악이란 관계를 결여한 병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곤 관계를 회복하기위한 단초는 용서 할 수 없다는 악까지 살려두는 연대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정의 연대가 결국에는 긍정의 연대로 변화하는 기회가 된다면 우린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는 분열되고, 개인화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이 책은 오늘 우리사회에 다시금 나와 우리들의 내면적 본질과 체제 시스템의 속성을 재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나가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귀중한 교사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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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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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속으로 사라졌다가 적당한 때에 수면 위로 튕겨 오르는 책

             - 모비 딕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책이었다.”   P 129에서

 

내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대한 기억이란 증기압력 솥에 가두어진 듯 내면의 고통과 분노로 가득 채워진 인물, ‘에이해브와 무시무시하고 신비스러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흰 고래를 떠 올리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읽어나가기가 꽤나 지루해서 이야기의 장면에 직접적이지 않은 부분은 건너뛰며 대결 국면의 화려한 장면으로 급하게 나아갔던 것 같다. 결국 스토리에 집착한 읽기였기에 작품에 대한 감동이나 이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 너세니얼 필브릭모비 딕에 바치는 이 경외(敬畏)의 찬가는 내심 부럽고 독서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이 때문인지 멜빌사고(思考)는 냉정함과 차분함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에 우리 딱한 심장은 쿵쾅거리고 모자란 뇌는 너무 심하게 고동친다.”라고 호손’(일곱 박공의 집著者)에게 작품 창조에 대해 자조(自照)처럼 한 말이 마치 내게 한 말처럼 다가온다.

 

또한 필브릭에게 모비 딕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을 가져다주는 생애(生涯)의 책이다. 나는 이런 책을 아직 가져보지 못했다. 아마 멜빌의 자조와 같은 이유와 무지가 겹친 탓일 것이다. 어쩌면 은폐된 오만 때문일지도. 그래서인지 내겐 멜빌의 책에 보내는 이 애정 그득한 저작이 진정성과 사랑으로 읽혀졌던 것 같다.

 

모비 딕이 노예제에 대한 갈등, 노동 착취, 야심가들의 위선, 길 잃은 젊은이들의 방황, 권력을 잡기위한 선동적 언어 등 19세기 미국 사회의 불안한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비로소 알게 된 행간의 의미이다. 소설 속 화자인 이슈메일(이스마엘)’의 그 많은 독백의 문장들이 21세기 오늘에 이식해도 전혀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의 정곡들이었음을 듣게 되는 것도 또 다른 깨달음이요 즐거움이 된다.

 

이 삶에서 사랑하고 일하고 행복해 한다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의 쇠락과 죽음 말이다. - 이 깨달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의 저주다. 이 진실을 인지하고 직접적으로 내면화한다면 에이해브처럼 미치게 된다.” P 64에서

 

멜빌이 소설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의 현실적 삶 내내 지배해 온 의문의 발설이기도 한 이 문장은 죽음으로 자신이 전적으로 소멸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천국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온통 태워버려야 했던 작품이었음을 상상하게 된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원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확신을 보이는 이슈메일의 믿음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한편 멜빌의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와 호손의 영향이 반영된 작품임을 알게 되기도 하는데, 에이해브의 가면 뒤에 있는 실재의 고통과 같이 호손의 불가해한 본질이 사방에 존재하며, “‘어둠의 위대한 힘에 사로잡힌 인정받지 못한 천재처럼 셰익스피어의 캐릭터에서 비롯된 차용 같은 것들이다.

 

이 밖에도 그저 스치듯 지나갔던 장면들의 그 현실감 넘치는 묘사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살잡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잡이들이 부들부들 떨며 숨을 헐떡인다....”와 같이 포경보트에 탄 선원들이 모비 딕이 일으킨 거대한 너울을 헤쳐 나가는 모습의 사실감이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모비 딕을 읽게 만드는 것이 관심사라고 말하는 저자 필브릭의 희망은 결코 헛된 욕심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책 장 저 밑에 꽂혀있던 700여 쪽의 책을 다시금 꺼내 들었으니까.

 

필브릭의 저술인 이 책의 미덕을 말한다면, “원조 황무지인 드넓은 대양(大洋)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멜빌의 책은 그야말로 거대하고 통 큰 주제들의 향연임을 보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도 그만한 크기로 팽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구명부표가 된 퀴퀘그의 관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문학으로 유혹하는 이 책에 겸허하게 갈채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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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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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 얼굴 없는 남자가 화자인 에게 약속했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인 프롤로그가 소설 속 실체로 등장하는 데에는 무려 일천 쪽 가까이 읽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로 인식 될 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은 폭력적이며 압도적이다.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초상화 전문화가인 일인칭 화자(話者)의 아홉 달 남짓한 기억의 술회(述懷)이지만, 그 경험의 세계가 너무 격렬해서 발을 디딘 현실을 잠시 벗어난 느낌조차 갖게 된다. 또한 소설의 표제이자 핵심 소재인 노()화가의 숨겨졌던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뫼르케가 쓴 프라하로 떠나는 모차르트라는 노벨레에서 정신없이 돈 조반니의 피날레인 저녁 성찬부분을 읊어대는 모차르트의 망아(忘我)적 장면과 겹쳐지면서 차갑게 파고드는 어떤 파멸과 죽음의 공포로 전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죽음에 주목하게 되는데, 심장판막 증세를 지닌 누이동생의 죽음을 안은 ’,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에 저항하다 처형된 연인과 난징 대학살에 참전했다 귀국 후 자살한 남동생을 지닌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그리고 엄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가 동시에 직면해야 했으리라는 세계에 대한 분노, 무력감, 그리움 등의 어렴풋한 공감을 갖게 된다. 삶의 시간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세계, 발설할 수 없는, 은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어둠이 비밀처럼 이야기 속에 내려앉아 있다.

 

아내로부터의 이혼 통보를 받은 의 무력(無力)과 무념(無念)의 여정, 방랑을 끝내고 거처가 된 오랜 친구인 미대(美大) 동창생의 아버지인 유명화가의 교외 산 속 외딴 저택, 생업이었던 상업적 초상화 그리기를 멈추려 하는 에게 제안된 고액을 대가로 한 의문의 인물로부터의 초상화 의뢰, 그리고 새벽이면 들려오는 방울 소리, 우연히 발견된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의 정사(情事) 장면과 함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방울 소리의 근원지를 파헤치고, 발견 된 방울과 삼 미터 깊이의 구덩이는 내겐 은폐된 음험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산도(産道)로 여겨졌는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에 일치되지 않아 거부하고 억압한 어두운 무엇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 이르는 곳, 혹은 그곳에서 나오는 곳으로서 이것은 구덩이를 개방한 이후 에게 발현하는 기사단장의 형상을 한 이데아로 인해 더욱 구체적 심상(心想)이 되었다.

 

결국 구덩이는 의 정사와 함께 이데아의 통찰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의 에로스를 말한 플라톤의 동굴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의 섹스는 인식의 확장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이기도 하며, 어두운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은폐된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으로 가는 출입구, 그래서 마주하기를 피했던 두려움의 그것들과 마주하고 삶의 균형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붙들렸다고 해야겠다.

 

이러한 맥락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 남짓한 화자(話者)의 방랑 여정 중 미야기현 해안 작은 마을에서의 일화가 꽤나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한 연인과의 격렬한 정사, 그리고 화자에게 깊이 각인되어 훗날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초상화의 인물인 가죽점퍼 차림의 남자는 다름 아닌 의 투사(投射)였으리라는 점이다. ‘아마다 도모히코, ‘의 그림은 그네들의 숨겨진 실체이다. 그네들에게 삶의 평온은 이것들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바닥에서 칼에 찔리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는 은유적 인물인 얼굴 긴 남자의 굴(어둠)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의 행동은 삶의 복원을 향한, 멈췄던 삶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하는 비로소의 용기이다. 때문에 아내 유즈와의 재회와 딸을 얻는 엔딩, 그리고 마침내 소실되는 두 개의 그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다. 나는 괜스레 화자 에게 시기(猜忌)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처절한 자기 내면의 응시를 지닐 수 있었던 그이기에,

 

이 소설의 묘미를 이처럼 몇 문장에 모두 설파해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작게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메타포로서의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들과의 매치, 정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천박하지 않은 이야기의 곳곳에 펼쳐지는 정사의 장면들, 자기희생이라는 이데아의 행위 속에 깃든 의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이어진 안슐루스와 193712월에 저질러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감춰진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사색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가히 생명력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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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거대한 서사를 단숨에 읽어나갈수 있는 것은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참맛이 아니었을까? 안개에 덮여있는 듯한 환상과 경계의 혼돈, 그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사랑의 간절한 울림이 떠나지 않으며, 신비와 스릴과 무수한 복선들의 얼킴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여운을 가져다 준 작품이랍니다.

 

1Q84년, 아오마메, 덴고, 공기번데기, 리틀피플...시간이 지나도 소설 속 단상들이 여전히 제 기억에 간직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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