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도서출판 은행나무의 문학지(文學誌) Axt 10(2017.1/2)부터 15(2017.11/12)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작가 김 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에 대한 리뷰입니다.)

 

 

월간, 격월간, 혹은 계간에 이르기까지 연재(連載)된 장편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내겐 손에 꼽는 극히 예외적인 독서 행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불편 때문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독서의 의지를 상실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가 있어,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마 떠도는 땅의 화자(話者)들이 실려 있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아기가 태어날 땅, 그 땅이 어떤 땅일지 금실은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 된다. 1937103,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죽음의 처형장인지, 삶의 무대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축운반용 열차에 실려 그저 끌려가는 여인과 그녀의 뱃속 아기, 그리고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임을.

 

팔다리를 접고 웅크린 사람들의 두루뭉술하게 뭉개진 윤곽으로 표현되는 조선인 무리로 그득한 열차안의 풍경, 그리고 뼈들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부서지고 마모되어서는, 마침내 열차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가루가 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이를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들이 토해내는 고독과 그리움과 생존, 안주(安住)를 향한 처절한 삶의 투쟁에 대한 기억들과 소회들이 흐른다.

 

지주의, 일본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그릇의 죽이라도 먹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버려진 이국의 땅을 찾아든 조선인들, 무리를 이끈 가장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도, 그리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생을 시작한 이들까지, 그네들이 이루어낸 환경에서 무참히 내쫓겨 가축처럼 실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차 안에서 꾸려진다. 그것은 그네들의 사연과 기억이란 기록 속을 오가며 , 삶의 뿌리가 내려지는 곳,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편견과 의혹들이 인종적으로, 때론 민족주의에 실려, 그리고 이념과 영토와 국가라는 허구적 실재가 사람들을, 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드러내 놓는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능숙하게 숙련된 지식인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순박함과 귀동냥한 소박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아기도 살수 없는 그 어떤 곳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처참한 가축용 열차 칸에 태운 스탈린의 처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유대인의 머리가 큰 것은 하도 머리를 쳐서라고 믿는 을녀, 오순, 백순, 공덕과 같은 사람들의 물음과 대답이 엮여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르고,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떠돌며 사는 거겠지에 도달한다.

 

소설에서는 그네들 자신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의 대립이 인설일천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련 내에 외국 스파이, 해충, 변절주의자....들로 가득하다....‘ 소련 정부가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떠들어대던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따지고 보면 반역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을 당하는 거 아니겠소?”

누가 반역자인가요?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던 조선인이 반역자인가요?”

 

고난의 여정인 강제이주 열차는 이러한 담론들의 격전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7개월 된 태아를 지닌 여인 금실인설에게 감도는 삶의 태동, 흐릿한 희망의 움, 그 잿빛 무대에서도 실낱같은 빛이 있다는 것이다. “금실의 눈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설을 향한다. 남편 근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미묘한 감정에 그녀는 어깨를 떤다.”

 

“103일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떠난 열차는 30여일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릉들과 갈대밭뿐인 버려진 땅. 다시 반복된다. “너희는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버려졌지?” “신조차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버려진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허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믿은 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죄..., 아니 죄 없이 버려진 죄. 떠난 자들을 망각한 자들의 죄....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무심히 하바롭스크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또한 알마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예기치 않게 위령비와 곡창지대로, 화려한 도시로 변화된 그곳들을 거닐게 된다. 소설 속의 후손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대한 그 절박한 필요가 있었던 삶들에 대한 찬연(燦然)한 애가(哀歌)를 이제야 들으려 하고 듣게 된 우둔함과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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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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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각자 그 집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나는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들 역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의 전모를 알 리 없다. 우리 모두의 모든 순간을 지켜본 건 집뿐이었다.”

- 1<율의 이야기 P23> 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진정 알기위해서는 그 미지의 것에 가닿으려는 정성과 충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진심이 꼭꼭 눌려 써진 작품이다!’ 라고 느끼게 된다. 소설 혹은 픽션에 대해 이런 설명이 있다. 작가와 독자가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묵계에 대한 것인데, “작가의 허구적 진술은 사실과 거짓을 나누는 판단의 체계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이 판단을 요구하며, 진실의 모습을 생각게 한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일 것이다.

 

소설의 표제 알제리의 유령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즉 플롯의 중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로소 숨이 불어넣어져 생기를 되찾게 하는 중심 제재(題材)로써 다층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알제리의 유령연극 대본이다. 누가 썼는지,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써졌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냈는지, 사건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말하게 한다.

 

1. 거짓의 이야기

 

연극대본 알제리의 유령자본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쓴 희곡 작품이다. 실제로 1882년 초, 마르크스는 요양을 위해 알제리의 빅토리아 호텔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국내 출간되었다가 지금은 절판된 알제리에서의 편지(정준성 , 빛나는 전망 )’라는 서간집은 이 시기의 마르크스를 통해 그의 사적(私的)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부터 허구(虛構)와 사실의 관계가 섞이기 시작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대화가 반복되는 대본의 내용과 이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해석이 진지하게 소개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진실 되다. 그러나 그 진실은 거짓이라는 토대위에 서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소설의 둘째 장인 철수의 이야기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로 가득한 청년이다. 연극무대를 기웃거리는 그에게 알제리의 유령을 쓴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를 연극계의 천재로 알려진 인물 탁오수를 찾아가게 한다. 진실을 찾아서,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이야기 역시 오롯이 사실들만의 나열일까? 게다가 알제리의 유령은 당시 마르크스가 처해있던 궁핍과 실의를 통해 그의 가족들과 그 구성원이 겪게 되는 물질적, 심적 고난과 절망에 대한 상념으로 이끄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 거짓된 이야기에서 삶의 진정함을 길어내는 아이러니에 매혹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진심은 어디에서도 절로 피어나는구나. 허구의 틀에서 허구를 직조하고, 그 허구가 허구가 아닌듯한 허구가 되어 사실로 승화하는 조화(Harmony)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 사실의 이야기

 

이렇게 작위적으로 거짓의 이야기와 사실의 이야기로 구분하는 것은 무식한 짓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의 범위에서 40년 전, 매양 매캐한 최루가스가 온 도시의 공기를 짓누르던 1980년은 내겐 지금도 날 것의 생생한 기억이니 예술인들의 한낱 문화적 놀음에 조차 폭력을 행사하여야만 했던 불의한 권력, 그것들의 제물이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에 포함시켜도 이해가 될 터이다.

 

알제리의 유령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1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율(한은조)과 징(박현가)의 부모들이다. 두 부부가 어울려 술과 농담과 진심이 부조리하게 뒤섞이고, 자신들의 대화를 희곡으로 쓰기로 한다.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이들은 동료배우들에게 멋진 사기극을 연출하는데, 마르크스의 희곡작품이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유령이란 제목까지, 게다가 그 입수경로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무지하고 불온한 권력은 여기에 고문과 죽음으로 답한다. 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곤 또 죽음. 이후 그들의 자녀, 그네들과 관계했던 인물들의 삶이 신산하게 펼쳐진다. 감히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딘가에 있을 터이다. 허구의 세계보다 더 허구 같은 인간사(人間史)란 사실이 어찌 이보다 솔직하게 그려질 수 있겠는가?

 

40년이 지난, 그것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황에 대한 과정이나 형편이 술술 연결되어 술회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허영(虛榮)이요, 허위(虛僞)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었을 것이다.”, “~었을 수도 있다.”, “아니, 모르겠다.” 라는 불명료한 기억의 인출로 시작되어, 단절되어 흐릿하기만 했던 것이 더욱 진정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소설은 황당(荒唐)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시대의 국가 폭력에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鎭魂曲;requiem)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네들 이후 세대를 위한 입당송(入堂頌;introitus)일지도.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이 사실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왜 알아야 하느냐고?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설혹 그 과거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지언정, 약간의 자유라도 있는 편이 낫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라는 말을 진짜배기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 『공산당 선언(이진우 , 책세상 ) P15 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中略)...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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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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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사물의 흥망성쇠여, 너 영원한 허망(虛妄)이여!”

-안드레아스 그리피우스, Leo Armenius에서

 

 

어떤 작품집을 읽어나가다 보면 불현듯 앞서 읽었던 작품의 문장들에 더해지는 새로운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는 김숨의 단편, 이혼에서였는데, 이혼의사의 확정 판결을 위해 법정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들려온, 터무니없는 언어에 대한 민정에 대한 묘사로 부터였다.

 

1. ‘우리라는 말을 하려면

 

생판 모르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우리라는 말이 낯설다 못해 폭력적으로 들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젓는다.”

 

우리라는 어휘는 단순히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그런데 이 말은 대개 자기보다 소위 사회적 위계가 높은 사람을 포함하지 않으며, 또한 친밀한관계 사이에 사용한다. 그런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라니? ‘나를 알아?’

오늘 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인에게 무심한지는 구태여 주절거릴 필요가 없을 터이다. ‘수전 손택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황정은웃는 남자로 다시금 내 생각이 널뛰기 시작한 것은 이 지점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무신경하기 그지없고 이 맥락 없는 언어 때문에.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 , 많은 이들이 떠나고 곳곳에 셔터가 내려진 쇠락한 세운상가에서 낡은 오디오를 수리하는 60대의 남자, ‘여소녀에게 그의 딸이 문득 물어 온 질문이다. 그냥저냥 살아 온, 삶인지 죽음인지 모른 채 지내 오는 동안 얼마나 둔감해졌는지, 알고도 굳이 개의치 않게 되었는지말이다. 나는 내 가족, 이웃, 타자를 모른 척하지 않았어! 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런 내가 그들에게 감히 어찌 우리라는 말로 친근함을 표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겐 파렴치한 언어로만 느껴진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여인 'dd'를 잃은 'd', 그가 권태, 환멸, 한 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을 읽어 낸 그의 아버지 얼굴이 내게 덧 씌워지는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곤 d처럼 내 입에도 힘이 들어가고 턱이 벌어지지 않는다. 나 역시 웃는 얼굴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웃음일까?”, 웃음 맞다. 자괴의 웃음. 단지 불편하게 구겨진 것일 뿐일 게다.

 

점포들의 택배를 수거하고 상차하는 d와 여소녀의 기억들이 펼치는 시대사(時代史)의 그 부조리하고 부정의(不正義)한 굴곡과 이에 익숙해져 무력하고 무감한 표정이 하나의 패턴이 된 사람들과 사회의 통찰이라는 담론보다는 내겐,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라는 피난시절의 일화를 읊조리는 노파의 주절거림에 외려 매달리고픈 심정이다. 어쩌면 공동화(空洞化)되어버린 거대한 시멘트 건물의 좁고 어둑한 점포 속에서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은 듯한 희미한 빛을 발하는 진공관을 놀라 바라보는 d의 시선과 같은 것인지도. 편리하고 단순하며 무신경한 자백같은 이해라는 말이 아닌, 그저 그냥 하던 대로가 아닌, 자신의 번영과 판단으로서가 아닌, 부끄럽고 놀라워하며 감히 우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겸허함, 타인을, 타자를 알려 하지 않아서, 알지 못해서 송구스러워 하는 그러한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2. 자아만 비대해진 인격들

 

이혼민정이 그녀의 직장 선배였던 영미의 부당한 소문과 이혼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이 일상화 된 엄마에 대한, 그리고 이혼 확정판결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낯선 타인들에 대한 그 너저분한 이야기들에서 다시금 웃는 남자'd‘의 방백(傍白)이 들려온다. “알아?”라는 기분 나쁜 말의 울림이 반복된다. 자아만 비대해진 형편없어진 인격과 몰이해가 진동하는 이 혐오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를 자문하게 하면서.

 

자기에 대한 이 자문은 이기호최미진은 어디로라는 단편에서 꽤나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자신이 쓴 소설책에 대한 중고 사이트 판매자의 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이라는 코멘트에 대한 적의(敵意)가 바로 그것이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 주려는 심경 말이다.

 

작품은 꼴사납게 부풀기만 한 오늘의 사람들이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반향(反響)일 것이다. 모욕을 되돌려 받을 타인, 그 타자의 자아 또한 동색인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아마 서글프고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의 자각이란 지점이 교점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서글프고 부끄럽다는 고백은 소설가의 자조로도 읽힌다. 중고 사이트라는 물질의 거래 공간에서 어찌 정신의 산물, 사람을 찾는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사물화 된 세계에서 사물이 아닌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이 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역시 정말 보잘 것 없는 하나의 물적 존재 되어 버린다.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사물이란 것이 있던가? 오늘날 인간은 사물의 구성 세계에서 하위 존재가 된다. 물질을 가진 자가 곧 권력자가 되고, 인간은 이 물질들의 권력에 머리를 조아린다. 사물화 된 세계에서 개와 인간의 차이란 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편혜영의 단편, 개의 밤서글픔이란 감상을 그대로 잇는다. “개는 훈련받은 대로 제 빨리 공을 향해 내달렸다.” 개는 주인의 칭찬을 위해 달린다. 자산을 불려 행세하는 장인을 비롯한 처가식구들의 무신경과 오만에 비위를 맞추며 머리를 조아리는 이라는 인물이 자신과 개의 상황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 개들의 짖는 행위에 그토록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개를 품에 안고 있던 사망자의 노모에게 건설현장 사고처리자인 , 거두절미 보상문제를

매정하게 던지곤 동석한 직원 에게 상황을 맡기곤 나와 버린다. 그리곤 안에게 묻는다. “아까 그 개요. 바닥에 떨어졌을 때 짖었습니까.” 사실 개가 짖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의 이 물음처럼 무기력한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 어느 지점에서 타자에 대한 무관심, 우리라는 허위의 언어를 끼워 넣을지 찾을 수가 없다. 온통 이것들 뿐인 곳에서.

 

김언수의 소설, 존엄의 탄생은 더욱 비참하다. 떠돌이 개에게 물리곤 동물학대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영화감독을 꿈꾸는 백수 진수의 이야기다. 15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지자 판사에게 항변한다.

 

저는 개를 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개에게 물렸지요. 어젯밤 그 개와 소동이 있었던 건 그 개가 저의 존엄을, 아니 인간의 존엄을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됐습니다. 뭔 인간의 존엄이 개에게 훼손된답니까. 다음.”

 

자기 존엄의 주장이란 것이 이처럼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다. ‘d'의 방백에 또다시 가닿는다. 아마 그저 비대해지기만 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심이 뒤죽박죽 섞인 오늘의 인격에 대한 조롱이지 않을까? 벌금이 없어 부른 선배와의 대화에서 이 시대 청년들의 초상을 읽게 된다.

 

잘난 사람이 되는 건 힘들어. 하지만 못난 걸 인정하는 건 쉬운거야. ...(中略)... 내 바람은 그저 못나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거다. 그것도 요즘은 이래 힘이 든다.”

“(前略)....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그렇게 노예처럼 살겠단 말이에요?”

개인의 열정과 세상의 허기를 맞춰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기형적으로 커지기만 한 자기연민만을 핥아대며, 타자가 있는 세상 바라보기를 하지 않는 이 유아적 사회가 어떻게 성숙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프랑스 소설가 다비드 포앙키노스책을 읽는 행위는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도취라 하였다. 내겐 이 도취가 작위적인 행위가 아니다. 때문에 작품을 읽어나가다 어느 어휘나 문장에 문득 시선이 멈추게 되어 생각이 널을 뛰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 소설집에선 바로 우리라는 단어와 존엄모욕이라는 상대적인 어휘였다. 아마 오늘을 사는 것이 상처를 받고 주는 행위의 연속이고, 그러면서도 감히 우리라는 언어로 소외를 외면하려는 기만의 삶이라는 자각이 내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와 사람들에 대한 섬세하고 적나라한 통찰을 들려준,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 조차 연민과 흐릿하지만 희망과 위로를 보여주는 이 작품집에 작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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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동서문화사 월드북 113
귄터 그라스 지음, 최은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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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반드시

최근에 일어난 이야기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 - 텔크테에서의 만남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고, 당혹스러울 만큼의 광기와 악의로 섬뜩하기도 하며, 야릇한 관능의 향기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도주(逃走)와 검은 마녀에 대한 강박적 번뇌를 반복하는 난쟁이 오스카에 이르면 시대에 대한 죄책감과 무기력, 역사의 망각에 대한 미래의 회의라는 거대한 담론의 서술임에 경외(敬畏)의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소설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있는 오스카 자신의 기원을 술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경찰에 쫓겨 네 겹의 치마를 입고 감자를 캐고 있는 여인의 치마 속으로 기어든 남자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는 오스카의 어머니인 아그네스를 낳고, 네 겹 치마 속에서 과감하게도 방사(房事)를 치룬 할아버지 콜야이체크의 방화범으로서의 이력과 그의 홀연한 사라짐의 전설, 성장을 멈추기 위해 지하창고 계단으로 구르는 세 살 아기 오스카의 발칙한 거부의 행위는 단치히혹은 그다니스크로 불리는 무대가 지닌 고된 역사 - 폴란드, 독일, 스웨덴 등 영토의 각축전장 - 의 배경을 알린다.

 

성장을 멈추고 94센티미터 단신의 아이가 되어 테이블 밑, 치마 밑처럼 어른들의 시선에서 제외 된 곳에 자리하여 어떤 방해와 장애도 없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를 갖게 되는 것은 실로 작가의 명민함으로 여겨진다. 아마 사실성과 객관성에 대한 보장조치 아니었을까?

실제로 어른들은 오스카의 이렇게 성장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그녀의 외사촌인 얀 브론스키가 식탁 밑에서 벌이는 불륜의 행각처럼.

그래서 오스카가 진술하는 것은 그대로 시대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거짓 없는 역사의 증언이 된다.

 

한편, 탯줄이 잘리기도 전부터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던 오스카에게 생의 기대를 심어주었던 양철북을 사주겠다던 어머니의 소망이 실현되던 세 살 생일 이후 혐오스럽기만 한 인간들의 행위에 보내는 보복이 시작된다. 북을 치면서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는 악마적 행위를. 여기에도 작가가 부여한 점진적인 의미의 확장을 읽게 되는데 유리를 깨부수는 개개의 장면들이 방어와 공격이라는 전투적 행태에서 정신 질환적인 분노의 발산이라는 행태로,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실험하는 다분히 유희적이고도 악의적 행태로, 급기야는 인간성의 약탈이라는 권력의 의미로까지 이어진다. 병원 유리를 박살내고, 시립극장의 유리를, 쇼윈도의 유리를, ‘먼지털이단을 위한 노략질의 수단으로. 이 모든 행위가 무력하고 부정한 사회에 대한 혐오와 반항의 은유임은 물론이다.

 

이와 달리 북치는 행위는 유리 깨는 행위와 또 다른 상징으로서 병행한다. 무능하고 비굴하며 무력하면서도 자신들의 집단적 광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기성의 세대와 사회에 대한 반항이라는 사회변혁 의지를 더하기도 한다. 따라서 추정(推定)상 자신의 아들인 쿠르트의 세 번째 생일날 북과 북채를 쥐어주려 하다 얻어터지고 북은 찢어져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은 전후(戰後) 세대에 대한 믿음의 후퇴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실의는 오스카에게 북을 손에서 놓게 하지만, 쿠르트의 어머니이자 오스카의 의붓어머니이며, 한 때 연인이기도 했던 마리아로부터 이 아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살잖아요.”라는 내침은 어머니 아그네스의 남편이었던 마체라트의 죽음과 함께 성장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124센티미터의 꼽추 오스카에게 돈벌이로서의 북으로 다시금 의미를 갖게 만든다.

 

재즈 음악가로서 북을 치는 행위는 전후 독일사회의 자본주의적 흥청거림을 연상케 하는데 오스카는 여기에 또 하나의 우화를 더한다. 술집 양파 켈러에서 양파를 자르면서 짜내는 지식층의 눈물, 이 기만과 허위의 행위를 중단시키고 그들을 지하의 계단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는 음악이 된다. 너희들, 아니 우리들을 돌아봐라. 벌써 잊었는가? 비루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적 태도가 야기한 불의의 광기와 폭력의 어제를! 이라고.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대단원이랄 수 있는 3부에 이르면 재즈 음악가로 명예와 황금을 쥔 성인 오스카의 통렬한 죄책감과 삶의 번뇌로 가득 채워진다. 어머니 아그네스, 추정상 아버지인 얀 브론스키, 어머니의 남편이었던 마체라트, 불륜이라는 부도덕성위에 세워진 이들 세 사람의 긴장된 평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자신이 아닌가라는 죄의식은 자기혐오와 이로부터의 도주라는 행위로 이행된다. 이 도주의 양식중 하나는 삶의 권태와 고독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놀이로 진행되는데, 자신을 살인자로서 신고하여 고등법원 법정에 피고로 소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른 번째 생일 날, 이조차 진범이 밝혀지면서 무죄로 석방되기에 이르고, 도주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이 부정하고 청산되어야 할 세계에서 돌아 갈 곳은 어디인가? 아마 그 답변은 이 문장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카슈바이의 감자밭에서 피난처를 제공해 줄 우리 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의 부풀어 오른 네 겹의 치마를 도주 목적지에서 제외 할 수밖에 없다. 하긴 나로서는 막상 도망친다면 할머니의 치마로 숨는 것만이 도주다운 유일한 도주라 할 수 있겠지만.”

 

무지하고 외곬의 단순함, 게다가 자신들의 부도덕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사회, 이 혐오의 세계임에도 그로서는 유일한 도주처가 네 겹의 치마 밑이라는 것은 번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부정하고 싶은 것, 청산되어야 할 대상임에도 그것이 자신의 뿌리인 것을.

정체성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던 곳, 시련의 반복적 역사를 기록한 곳, 자유시(自由市) ‘단치히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뒤셀도르프로 이어지는 전후(2차 세계대전) 독일의 고된 여정 속에 녹여낸 이 신랄한 꼽추의 시선은 매우 중요한 여러 첫 인상을 참으로 곰팡내 나는 소시민적 환경에서 모았다라는 오스카 그의 말처럼, 거대한 역사의 불길이 휘몰아쳤던 한 시대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기술하는 문장까지 거창 할 이유가 필요가 없음을 입증한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낮은 위치의 시선이 모여 거창하기만 한 거대 담론의 공허하고 망각적인 이성의 허위를 들춰내는 것이지 않았을까? 어느 외지(外紙)의 평론처럼 세속적이고, 고약하며, 불경스러운서민의 거친 문장이 역사의 민낯, 그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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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문관의 비망록 -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소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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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작인 첫 번째 비망록을 여는 주앙이란 인물의 착란적인 진술을 접했을 때, 이내 이 기묘하게 서술된 내러티브의 작품이 내 손아귀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흥분에 휩싸였다. 그리곤 주앙의 아버지이자 이젠 세상에서 지워진 채 요양원에서 너절한 육신을 마감하는 전직 장관인 프란시스쿠당신에게 부탁하니, 멍청이 내 아들에게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해주기를 부탁하니,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이라는 종료되지 않은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며 책장을 덮을 때, 내 책꽂이의 중요위치에 보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떤 문학작품을 접했을 때 강렬한 인상이 그대로 마음에 각인되는 흔치 않은 경우를 맞보곤 한다. 전체주의 독재 권력의 한 축을 나누었던 권력자를 중심으로 그와 관계한 주변의 시시콜콜한 인간들을 망라한 진술또는 추가 진술이라는 이름하에 술회되는 자기변명 혹은 기억의 인출(引出)은 무지하거나 몽매한 소시민적 삶에 대한 빛나는 통찰로 빚어진 진수성찬이다.

 

프란시스쿠의 아들 주앙으로부터 가정부, 하녀, 주앙의 아내, 아내의 삼촌, 혼외의 딸, 정부(情婦), 정부의 모(), 주앙의 동거녀와 그 딸, 운전기사, 아파트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사회구성의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이들의 진술들은 20세기 후반의 포르투갈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소설은 바로 이들의 진술’, ‘추가 진술이라는 명제로 구성된 진술의 책’, ‘비망록이자, 진짜배기 포르투갈의 현대사(現代史)이며, 민중 생활사이고, 권력과 그 이면의 고통스러운 인간의 비틀린 욕망들이 수놓인 정신분석학적 기록이 된다.

 

그런데, 이 비망록은 소설의 표제처럼 대심문관의 기록물이며, 누군가의 심판을 기대하는, 아마 그 판단의 몫은 오롯이 독자의 것이라는 듯이 모든 진술들은 단지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술회(述懷)이상의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인간들의 보잘 것 없는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의 편협함, 권력과 그 주변에 휘도는 무소불위와 공포, 아부와 아첨, 그리고 예외 없이 결탁한 불의한 금융자본가의 파렴치와 도덕적 몰염치, 소시민들의 무기력과 비굴, 이기심과 탐욕이 그 순수한 형태 그대로 발설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강요되지 않은 담백한 진술의 형식들이 모여 구성원들과 그 사회의 여과 없는 실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소설의 배경은 오랜 전체주의 독재정권을 유지해오던 살라자르 정권의 중심인물인 장관 프란시스쿠의 권력이 혁명에 의해 그 정치적 권력뿐 아니라 가계(家系)가 해체되고 몰락하는 역사과정 이랄 수 있다. 이 거대한 역사 담론을 담아내는 장소이자 그릇은 프란시스쿠의 팔멜라 저택이고, 이것은 권력과 그 몰락의 상징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부서진 석상이 정원에 뒹굴고 수영장은 물 한 방울 없이 텅 비었으며 잡초가 개집을 차츰 뒤덮고 마침내는 화단까지 완전히 망가뜨리면서....”

 

이 과정의 상황에서 지껄여지는 19인의 주절거림은 모두 자기 정당화요 합리화며,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개인들의 한계이다. 자기의 목덜미를 누르고 여성을 공략하는 권력이 사랑이라고 하녀는 말하지만 독자는 그것이 폭력임을 알듯이,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 이자벨, 그렇지?”라는 문장에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오직 불신과 집착 그리고 불안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또한 알듯이, 의미 없는 문장들이 발산하는 내재된 진실들이 모여 한 시대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의식과 그 사회의 실체적 상황들을 읽어내게 된다.

 

이를테면 프란시스쿠의 아내 이자벨의 불륜이 마초적 인간인 프란시스쿠를 무너지게 하는 것은 으레 불의한 권력이 지닌 속성의 자기반향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여자 아직 안 죽었습니다 장관님’ ....‘이 여자는 바닥에 추락하는 순간 죽은 것이 맞겠지요?’.... ‘이 여자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즉사한 것이 맞아요 장관님’” 과 같은 장관과 의사의 대화처럼 불의와 비굴이 야합하는 모양은 간통과 흡사하다. 불륜과 야합의 이 닮은꼴에서 전체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적 부당성이나 경제적 부패와 같은 사회적 부정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도덕적 타락, 윤리적 추오, 파렴치한 탐욕을 직접적으로 양산하는 양태를 띠고 있다는 것일 게다.

 

결국 이 위대한 문학작품은 오늘날의 사회적 위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계층의 자기변명을 통해 거대담론에서 소외되고 가려진 실체적이고 진실한 담론의 모습을 끌어내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진실을 말하는 인간들의 조잡한 내면을 까발리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포르투갈을 이해하는,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섬세한 자화상을 본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안투네스의 서술방식에 그 누가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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