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전쟁, 그 이념의 광기에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결코 잊혀져선 안 될 우리들의 아버지, 형제들의 목맨 울음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숭고한 역사적 작품으로서 거듭 읽혀져야 할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21125일 저녁 프라하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로봇과 조우했으며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봇에 절멸되었다.(1)”

 

 

위 문장은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던 사실에 대해 다소 위협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체코어 로보타(robota), 강제노동을 뜻하는 오늘날 공용어로 사용하는 로봇은 여기서 처음 쓰였다. 대략 1세기 전에 천재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력이 바야흐로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들의 삶에 다가왔다. 그는 과연 어떤 의도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은 어떻게 끝나는 것일까?

 

서막과 1~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의 줄거리는 일견 비관적이지만, 오늘의 표현인 포스트휴먼(Post human), 다시 말해 호모사피엔스보다 우월한 종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기술지상주의자들의 견해에서는 희망적이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현 인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류에게 지상의 삶이 이전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희곡의 마지막 문장은 불멸 하리라! 불멸!”이다. 이러고 보면 취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새로운 인간형 장치로 대체하려는 오늘의 신생기술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의지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 그것과 어떠한 차이도 없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차페크는 현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올 기술지상주의의 실천이 과연 인간적 진실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1. 희곡 속으로

 

늙은 발명가 로숨(Rossum)의 제조 공식, 그리고 그의 아들이 생산 공정을 완성한 로봇을 대량 생산하는 외 딴 섬이 무대이다. 생리학 연구부장 갈 박사, 로봇 심리학 연구소장 할레마이어 박사, 기술담당 중역 파브리 등의 기술진들과 이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강력한 주체인 회사 대표 해리 도민과 로봇의 인권보호를 위해 섬을 방문한 헬레나, 그녀의 유모 나나, 그리고 건축주임인 알퀴스트가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역이 되어 열연한다.

 

헬레나는 도민에게 묻는다. “로봇을 왜 만들고 있죠?” 그 답변은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스트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정말 대책이 안 설 만큼 불완전하며,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 현대 기술을 제대로 쫓아오기에는 효율성도 떨어지며”,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기란 완전히 난센스인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봇들은 세계의 시장에 무한히 팔려 나간다. 그것들은 인간을 대체하여 노동을 하고, 전쟁의 군대가 되어 전투 병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자아실현만을 위해서 살면 되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그 한계를 제어하는 데 무척이나 서툴다.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식하기 위한 작은 변화의 시험이 시도되고, “어느날 갑자기로봇들은 인간에 복종하기를 멈추고, 인간은 완전히 불필요한 유물임을 각성하며, 인간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한다.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음을 학습해 온 로봇은 세계의 모든 인간을 살해하고, 그것들의 본산지인 섬을 공격한다. 인간이 절멸된 로봇만의 세계,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로봇의 시대임을 선언한다.

 

로봇들의 공격으로부터 살해되기 직전의 도민을 비롯한 경영진과 기술진들의 자기항변과 사태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반성의 대화들은 가히 오늘의 진술들과 견주어도 어떠한 손색이 없다.

회사대표 도민은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었으며, 그걸 극복하려 한 건 정당했으며, 그 어떠한 장애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종, 인간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으로 살려한 것은 위대한 일이었다고 항변한다. 반면에 알퀴스트는 생체로봇의 생산은 돈, 보다 많은 이익배당을 꿈꾼, 자신들의 거대한 이익을 위해, 인류의 거대한 무언가를 위한다는 인간의 과대망상이 자초한 단순한 인류의 멸망뿐이라고 자성한다.

 

로봇들은 마침내 이들 모두를 살해하지만, 건축노동을 하던 알퀴스트만을 살려두고, 로봇들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한 제조공식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같으면 엄청나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비롯하여 디지털화되어 저장된 기술내용으로서 고도의 지능을 갖춘 로봇들에게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100년 전의 사람인 차페크에겐 이 갈등이 위대한 걸작의 중요한 반전 요소가 된다. 더 이상의 로봇제조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멸종뿐 아니라 새로운 종으로서의 로봇 또한 절멸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마 이 희곡의 대단원이야말로 백미(白眉)라 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의 이타성과 성()의 구분이 발생한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라는 한 쌍의 로봇이 출현하고, 인류가 절멸한 세계에서 새로운 종의 시대를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인데,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우상화에 대한 육신으로서의 생명이 지니는 가치를 향한 차페크의 염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에서이다. 형이상학적 고뇌가 결여된 현대의 과학기술과, 그 진보란 단지 산업적 생산의 진전이상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이지 않았을까?

 

2. 카렐 차페크의 의도

 

19236월 런던에서 개최된 이 희곡에 대한 토론에 당대 최고의 작가인 버나드 쇼’, ‘G.K.체스터턴등이 참석하여 차페크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해석과 비판을 하였던 모양이다. 차페크는 이에 대한 관대한 수용과 한편, 왜곡된 작품의 바른 의도를 알리기 위해 로봇의 의미라는 제목의 소고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작품의 의도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 첫 째는 과학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산업의 지배를 받게 되며”, “결국에는 인간의 손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한 기술적 특이점의 필연적 도래와 닮은 이 주장은 기술미래에 대한 동일한 예측이지만 그들이 딛고 선 영역은 서로 경계의 반대에 서 있다는 점이다. 기술지상주의자에겐 낙관적인 특이점이지만, 차페크에겐 과학의 희극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과학기술의 수용에 대한 인류의 이해에 어떤 편견이나 단정적 진실이란 방패를 씌우지 않는다. 그것이 의도의 두 번째 이다. 인간의 로봇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존재한다. “산업주의만이 현대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타락시킬 것이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다.”, “비인간적 기계화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육신과 마음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와 같은 다양하게 대립되는 이상론들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이렇듯 진실을 향한 견해들은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현대문명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이며, 바로 진실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좇아야 할 진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오늘의 기술은 점점 인간에 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하고 있다. 교체 가능한 멀티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에 맞춰진 불멸의 어떤 물체가 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진정한 욕망인가? 이것은 기술자본주의의 탐욕과 망상인 것은 아닐까? 1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이처럼 이 작품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사유케 하는, 성숙된 인간의 태도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성찰케 한다. 가히 경이로운 고전중의 고전이다.

 

*(1): 트랜스휴머니즘P150(마크 오코널 , 노승영 , 2018.2 문학동네 )에서 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랜스휴머니즘 - 기술공상가, 억만장자, 괴짜가 만들어낼 테크노퓨처
마크 오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이야기는 인간의 몸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에 대한 것이다.” - 본문 P 13에서

 

 

위 문장에서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의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노이로제에 걸린 종()이에요. 필멸(必滅)성 때문에요. 늘 죽음이 따라다니니까요.” 인간은 각종 질병과 부상과 사망에 취약하고, 매우 제한된 환경 조건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기억력에 한계가 있고, 충동조절 능력이 한심할 정도로 낮다. 이렇듯 조잡한 내재적 조건을 지닌 인간은 출생하고 번식하며 그리고 죽는다. 지금까지 이 범주를 벗어난 인간 종은 없다. 과학기술은 이젠 이 한심한 순환을 멈추자고 한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육체의 능력을 증강, 개선 할 수 있으며, 기술과 정보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무엇, 즉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책은 바로 이러한 호모사피엔스의 조건을 제거하여 궁극적으로 정신적, 물질적(육체적 성질) 능력을 무한히 증강 또는 대체시켜 영생하는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휴먼(Post human)이 되려는 욕망들의 섬뜩한 현장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 욕망의 실현을 위한 기술지상주의 운동이 곧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원 제목은 이보다 더 선정적이다. ‘To be a machine', ‘기계가 되려는이라는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에 기초한 탈신체화에 대한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시사한다. 실제로 가속화되고 있는 이 기술들은 인간 생명의 형식을 가공(可恐)할 정도의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이를테면 옥스퍼드 미래연구소의 안데르스란 인물은 뇌 임플란트기술을 뇌까린다. ‘전뇌(全腦) 에뮬레이션(whole brain emulation)’을 통한 자아의 무한 반복적 복사로 영원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기술이 완성되기 전에 죽을 경우 그의 머리는 냉동 보존되어 다시 깨어날 초월의 갈망을 달성해 줄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이란 곳에 보관된다. 더 이상 산 자에 속하지 않는 유예된 불멸자들이 이곳에 117명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희망찬 죽음학은 극단적 실증주의의 소름끼치는 욕망의 현주소를 일깨운다.

 

또한 카네기멜론대학 인지로봇공학 교수인 한스 모라벡은 무한한 가능성의 실재로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극한까지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 몸을 자신이 선택한 몸으로 교체키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중 플랫폼 몸, 즉 인체를 인간형 장치로 완전히 대체하고, 기질 독립적인 마음을 업로드 하겠다는 프리모 포스트휴먼 계획(Primo Posthuman)은 탈 신체화 전략의 끝을 보여준다.

 

책은 이 외에도 생명의 운영체제를 다시 쓰겠다고 약속하는 양자도약(quantum leaf)의 발견 추구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을 코드로 번역하고,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개발하며, 기술을 인간의 몸 안에서 원하는 대로 작동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고, 데이터로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자기수량화(Quantified Self Movement)에 이르는 기술들의 현장감 넘치는 기술(記述)들을 쏟아놓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은 고작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전제가 짙게 깔려있다. 따라서 더 효율적으로 강력하고 유용한 장치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라는, 지금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는 신생기술들은 인간을 이런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기술발전의 가속화에 따른 인간 생명의 형식에 대한 변화된 인식은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몸 없이 존재하는 것이나 3의 휴머노이드 하드웨어에 돌아가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구원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이야기 한다.’라는 표현을 나노기술 단백질 컴퓨터를 이용하여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라고 번역하며, 자극과 반응의 단순화 된 도구주의적 모형으로 전락시킨다. 나의 직관은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육체와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내겐 혐오와 두려움, 불신과 곤혹감만이 맴돈다. 지금의 기술들 - 인공지능, 합성생물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전산신경학 등 - 은 한결같이 절대적 유물론을 신봉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두부(頭部)를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하고, 뇌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이식하면 그것이 동일한 자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과 물질이 분리될 수 있다는 모순된 확신을 보인다. 내 육신을 떠나 복사된 마음이 과연 인가? 그렇게 불멸을 획득한 존재의 영원함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러한 진술들, 이러한 기술들이 마치 SF(Science Fiction)와 같은 먼 미래의 망상, 허구처럼 인식된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MIT 미디어랩, Google의 딥마인드, 미국방부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 DARPA, 3 Scan, 카본 카피스, 런던 퓨처리스, 휴머니티 플러스, 그라인드하우스 웨트웨어(GRINDHOUSE WETWARE), Google의 칼리코 등 세계 유수의 신생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과 정부기관은 물론 옥스퍼드, 하버드, 카네기멜론을 비롯한 최고의 대학 연구소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사태이다.

구글의 인공지능기술 개발 이사인 레이 커즈와일의 주장처럼 기술은 복리이자와 같은 속도(law of accelerating returns)로 증가한다. 기계의 지능이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고 생물학적 생명이 기술의 하위 범주가 되는 때를 일컫는 기술적 특이점 (Technological Singularity)’의 도래에 대한 필연성을 부인할 답은 내게 없다.

 

그러나 지금 불멸을, 구글이여 죽음을 해결해주소서! (Immortality Now!, Google, Please solve Death!)와 같은 인간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마치 기술적 문제로, 그래서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는 식의 사물적 인식에는 거부감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기계적 해결, 수학적 해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한 극단적 무관심과 무지, 인간가치에 대한 노골적인 도구화의 경향에 심취해 있는 것 같다. 과연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간의 육신에 깃든 생명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크 오코널의 이 세심한 인간 업그레이드에 대한 르포는 불멸이라는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욕망을 향해 치닫는 기술들의 현재를 저널리스트다운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풀어 놓고 있지만, 그 내용은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실존적 가치에 대해 사유케 한다. 생명이란 진정 무엇인가? 이내 다가올 20, 30년 후의 미래에 우리들의 자식들이 마주설 세계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아이를 등에 태우고 엉금엉금 기는 아내와 그 위에서 자지러질 듯 웃으며 소리치는 아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경이로운 신체적 이해의 장면은 나는 신체였다. 또한 나는 결코 몸이 아니라 의식이었다.”는 인식과 겹치면서 이 책을 인간 생명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을 때 추억하는 것 - 어느 소설가가 쓴 삶을 되돌아보는 마지막 기록
코리 테일러 지음, 김희주 옮김 / 스토리유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만물은 살다가 결국 죽는다. 의식의 시작이 있으면 의식의 끝도 있는 법이다...

의식이 어떻게 끝나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 본문 P 146에서

     

 

여전히 죽음의 실재를 삶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 느끼는 내게 죽음을 정상화한다는 것은 낯섦이고 어려운 무엇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내 삶에 착 달라 붙어있음을 알며,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이런 내가 왜 이 책을 펼쳐들었는지, 무엇을 알고 싶었는지, 아니 막연한 소멸의 두려움에 정작 마주했을 때의 황망(慌忙)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한 동류(同類)로서의 위로에 대한 기대였을지 모르겠다.

 

4기 흑색종이라는 암으로 이젠 그녀가 남긴 글로만 대화하여야 하는, “견딜만한 죽음을만들기 위해 준비된 이 책은 죽음의 문 앞에선 자로서의 그 절박성과 간곡(懇曲)함으로 더욱 더 인생에 대한 강력한 성찰로 이끈다. 생의 끝에 선 한 소설가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마지막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다가온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삶의 기분이란 어떤 것인지, 무엇을 후회하고 추억하게 되는지, 삶의 의미가 어떻게 새롭게 생각되는지를 자신과 가족들의 갈등과 실패의 고백과 같은 진솔한 이야기에 실어 들려준다.

 

 

그래, “이 책은 죽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언젠가 그런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한없이 외로워질 누군가를 위해 썼다.”는 그녀의 말처럼 생의 끝에선 혹은 화나고,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하며, 실의와 허망함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이내 그것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아니 대처하는 생생한 지혜이자, 살아있음으로서의 그 무수한 감정들의 소중함에 대한 솔직하고 강렬한 울림이다.

 

작가는 죽음이란 아주 외롭고 아무도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되뇐다. 그리고 그 앞에서조차 매일 새로운 아침과 희망을 갖기도 한다고 삶에 대한 진실한 애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문장을 앞에 두었을 때 숙연함에 그저 책에서 잠시 눈을 돌리게 되고 그것이 애틋한 호소가 되어 괜스레 마음이 진정되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설 미래의 누군가들을 위해 삶의 달콤함이 사라져 공허감만이 남아있을 때 삶의 추억들을 통해 새롭게 부여되는 삶의 이야기들이 들려지고, 그 의미들을 쫓는 여정에서 이내 위로를 되찾게 된다.

 

정작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의 나를 문득 생각게 된다. 정말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를 생각지 않을까? 그때 나는 나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마치 내 물음에 답이라 해주듯이 나를 위로한 것은 내가 한 일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한다. 못 한 일을 아쉬워하는 갈망이 아니라고. 살아있는 매일의 일상에서 맞이하는 그저 그런 경험들조차 삶의 의미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와 같이 산 신(남편) 그리고 아이들 얼굴...길게 대답하자면 세상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바람, 태양, , 눈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도.(P 76)”라며 제일 그리울 것 같은 것에 대한 물음의 이 답변 또한 생()에 대한 무지의 내 편협한 인식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죽어서 좋을 일은 없다. 죽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피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지구에 한 아이를 배달했다. ... 그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지키고 보살피는 ....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수년 동안 내가 살아갈 힘을 얻었고 변함없는 지원군이다.” 라는 영원한 생명성의 지혜에 경건하고 아름다운 지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아하며 더없이 지적인 마지막 삶의 회고를 덮으면서도 소멸의 두려움 앞에서 나는 죽어가는 여자이다. 내 몸이 살아온 인생 자체이며, 내가 보고 행동한 모든 것들의 진실한 기록이며, 내 모든 기쁨과 상심의 현장이며, 내 모든 오해와 눈부신 통찰의 현장이다. (P167)”라며, 영원한 현재성에 대한 자기 존재의 믿음에 대한 이 선언적 문장의 울림이 너무 커서 책을 손에서 한동안 내려놓지 못하기도 한다. ‘줄리언 반스의 추천사처럼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사려 깊게 바라본 삶과 죽음의 무작위성에 대한 지적 회고록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내 기억이 흐려지지 않는 한 절대 공감의 삶의 찬미로서 남아 있을 것 같다. Fade Ou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는 생전의 소설집(1) 말미에서 글을 쓰는 동안만은 언어와 빛이 동일해 진다. 언어로도 삶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붙들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미치도록 나를 매혹한다.”라고 썼다. 그래서인지 태양과 바람이 있는 그곳, 섬의 언덕에 도서관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들이 빚어내는 무언의 행위들에서 작가의 숨결을 읽는다면 혹여 외람된 것일까?

 

이 소설은 내겐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 사랑, 같은 이야기도 매번 새로운 듯이 들어주는 사람, 마주하기 버거울지라도 내 성장의 삶이 배어있는 고향, 그리고 바다와 섬과 바람과 몽돌들의 부딪힘 소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에 들려주는 유한자로서의 마지막 위로의 말들처럼 느껴졌다. 아니, 우리들에게 영원히 드리워질 빛이라는 삶의 언어로 다가왔다.

 

아무런 말()없이 누군가의 옆에 앉아 들어주는 판도처럼, 때론 모른 척 제 혼자 힘으로 이겨나가리라 기다려주는 정모와 같이, 혹은 혼자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겄다. 이거 좀 갖다주고 와라.”라며 반찬을 챙겨주는 이삐 할미처럼, 그리고 죽는다는 건 영혼이 저 멀리로 날아가는것이 아니라 여전히 곁에 나란히 있는 것이라 말하는 이우와 같이 사랑하는 이들의 손바닥에 따뜻한 체온의 글씨를 한 글자씩 써주는 어머니의 사랑의 언어, 그것만 같았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글자글 몽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역시.” (P 58)

 

실명의 두려움과 이후의 불가해함을 잊기 위해 고향 섬을 찾아든 정모의 이 말조차 내겐 혹여 어머니일까 스쳐가는 바람에 애틋한 그리움을 말하던 어느 시인의 문장에 가닿고 말았으니까.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할 것이라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 동굴처럼 커다란 구멍을 가슴에 지닌 열아홉 살 소녀 이우태이를 향해 끝없이 보내는 애절한 사랑의 음성과 사진, 문장들, 그리고 판도에게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사랑했던 이에 대한 그 수없는 말들에서 좀처럼 씻기지 않는 그리움이 아릿하게 스며들지만, 그 통렬(痛烈)한 애도 또한 떠나보내야 하는 이삐 할미와의 의식(儀式)으로서 또다른 사랑의 의미로 정화되는 위안을 얻게 된다. 남아 있는 이들의 아픔조차 안쓰러워했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래서였을까? 섬 언덕에 줄지어 서있는 소금창고, 기억보다 약간 더 무겁고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창고의 문을 열고, “시간도 중력도 없는 장소에 서 있는 느낌과 그곳에서 책들이 채우고 있는 풍경의 백일몽을 떠올리곤 그곳을 도서관으로 만드는 정모의 행위는 책들에 깃든 시간, 존재의 무한한 시간성의 축조처럼 다가온다.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도서관이라한 보르헤스의 그것처럼, “백 년 전이 바로 내 발아래 있고 천 년이 산자락에 남아 있는 섬의 자태처럼, 생의 일회성을 비웃는, 유구한 책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공간 만들기는 영원한 교감의 지대, 함께하고 있음의 또 하나의 위무(慰撫)로써.

 

이 마지막 위로 같은 이야기 속에 보이지 않는 듯 드러나는 인물, ‘모래 언덕 배()에 기거하는 판도를 쫓으면서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아주 먼 섬을 발견하게 된다. 옆에 앉아 그 누구든,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말없이 듣는 이, 하지만 에미 가난이 들어서 남의 에미를 훔쳐올 듯이 쳐다보는 그 누구보다 커다란 상실의 구멍을 가슴에 안고 사는 청년에게서.

 

판도 쟤, (태이)하고 닮은 데가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지. 들어준다기보다는 옆에 앉아 있어. .... 그렇게 떠들고 있으면, 잊고 싶은 순간들이 저만치 밀려가.” (P 103)

 

정모이우판도에게 자신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음껏 발설한다. 그가 말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만 해서일까? 비밀이 없으려면 그 대상에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만 하는 것이지 않은가? 서로 무한히 열린 마음, 아마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받아들임, 수용적인 태도가 두 사람에게 투명한 마음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게 하고, 그것은 다시금 판도에게 되먹임 된다. 모든 추오가 사라진 순백의 아름다움이 그득한 소설로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섬이 도서관이야. 시간의 도서관”, ‘아주 먼 섬은 이렇게 모든 것들을 안아주는 시간이자 공간이 되고,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는, “터무니없는 죽음도, ....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면 곧 일상이되는 순화의 장소가 된다. 어쩌면 바람을 보러 바다로 나가는 정모는 바람의 진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숨결과 손길임을. 결코 곁에 있음을.

 

 

(1)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정미경 2, 006, 생각의 나무) P338 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