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르 오르부아르 3부작 1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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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아주 비열한 장면의 세세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4년이나 지속되던 전쟁이 끝나기 채 열흘도 남지 않은 1918112,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귀족가문의 배경을 가진 장교 프라델은 자신의 병사 사살을 독일군의 저격 사망으로 위장하여 전투를 속개한다. 이후 증거인멸과정에서 프라델은 목격자인 병사 알베르를 흙더미에 매몰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한다. 다리부상으로 의식을 잃었던 병사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사력을 다해 알베르를 구조해 내지만, 얼굴 중 하악부(下顎部)가 날아가는 중상을 입는다.

 

이렇게 시작되는 발단, 이 사건적 장면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면면이 전후(戰後)의 사회 질서 속에서도 단절되거나 전복되지 않고 두려움과 도피, 곤궁함과 죽음의 노출로 혹은 의기양양과 협잡과 탐욕 등, 여전히 유효한 심리적, 사회 경제적, 정치적 관계들로 그들 삶의 행보를 결정짓는다.

 

1. 끝나지 않은 전쟁

 

종전으로 동원 해제된 알베르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얼굴의 반을 잃은 에두아르와 함께 한다. 알베르는 전우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몰핀의 조달과 생계를 위해 삶의 곤궁함에서 허우적댄다. 전쟁에 동원되기 전의 직장인 은행은 그의 복귀를 거절한다. “<우리의 소중한 병사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빚을 지고 있노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하던 국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내는 수단이었을 뿐,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이들을 공동체는 알지 못한다.

 

알베르는 흉괴(凶怪)를 은폐하기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졌던 프라델에 대한 두려움, 복귀한 사회의 냉담함으로 항상 경계의 눈을 치뜨며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인 불안의 일상을 피하지 못한다. 에두아르 또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을 포함해 모든 얼굴이 사라져 버린 얼굴 없는 세계에서집착할 것이 없는 삶을 지탱할 뿐이다.

등 돌린 사회는 이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서나 무겁게 그들의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내리누르는 것, 그들이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적과의 싸움이 종료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퇴락한 귀족가문의 프라델은 재계의 명망가인 페리쿠르가()의 여식인 마들렌과의 혼인에 성공한다. 쇠락한 성()과 이름뿐인 가문의 복원, 자신의 명예와 부의 축적을 향한 야비한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이 인물은 페리쿠르라는 배경을 통해 권력층의 연결고리를 획득하고, 전선에 묻힌 병사들의 유해발굴과 이장(移葬)이라는 막대한 이권 사업을 권력의 후광과 뇌물, 향응을 통해 획득한다. 승인받은 관의 나무 재질을 낮추고, 병사의 유해를 톱으로 잘라내서 입관시킬 정도로 관의 크기를 줄이고, 시신의 신분확인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처넣고, 유품은 절도하며, 빈 관에 흙을 집어넣어 이장 수량을 늘리는 등 악질적 물욕을 가차 없이 쏟아낸다. 이 인물 역시 전쟁은 진행 중이다. 이들에게서 전쟁이 전정 끝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유령사업과 기만사업

 

자기기만과 유대감과 원망과 반감과 형제애 등이 뒤섞인 지극히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알베르와 에두아르(외젠)는 갈등 끝에 각기 누추(陋醜)와 저열함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짜릿한 놀이로서 <애국적 회상>이라는 이름의 전사자 추모 기념비를 제작해주는 유령 사업에 착수한다.

 

착수금의 마련을 위해 알베르는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는 에두아르의 아버지인 재력가, 페리쿠르의 은행에 자리를 잡고, 횡령을 통해 카달로그 제작, 우편 발송비용 등을 조달한다. 알베르는 유족들의 애절함을 이용하는 자신들의 사기 행위까지 더해 삶은 피폐해져 가지만, 연인 폴린에 대한 열정으로 작은 위안을 갖는다. 이에 비해 에두아르는 그들이 은거하는 집 주인의 딸인 루이즈와 각양의 얼굴 마스크를 만들어가며, 비할 바 없는 도발의 쾌감을 즐기며 행복감에 도취한다. 예상대로 100만 프랑을 초과하는 신청금이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만, 사기 행각은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 부정과 위협을 통해 수익을 늘려가던 프라델은 군사묘지 조성사업의 관할 정부인 연금부에서 파견된 퇴물 관리 조세프 메를랭에 의한 감사에서 비위사실을 지적당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건네준 10만 프랑이 도리어 사업의 부정함을 자인하는 형국이 되어 돌아온다. 사업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장인 페리쿠르는 물론 아내에게까지 인맥을 통한 사법적 처벌의 회피 시도는 좌절되기에 이른다.

 

전쟁이 낳은 세상은 그 끝을 향해 달려 나간다. 알베르와 에두아르, 프라델. 어쩌면 비정한 세계, 얼굴 없는 세계, 싸울 대상을 알 수 없는 세계와의 싸움은 애초에 승산이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가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것들, 공동체라는 허구의 존재는 인간 개인의 삶에 책임지는 어느 누가 아니다. 그렇다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삶을 황폐화시킨 직접적 요인을 만들어낸 프라델의 야비함과 이기적 욕심만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 몬 장본인은 누구인가? 전쟁이 끝나고 이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수 없게 한 장본인은 또 누구인가? 이 순환적인 질문의 답은 무관심과 외면으로 자기 안위에만 몰두하던 기성세대의 이기심 아니었을까? 특정되지 않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3. 패배함으로써 끝나는 이야기

 

전사자의 유해 발굴과 이장사업의 비위를 조사하는 메를랭은 전쟁에 무관심과 냉소를 보내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버려지듯이 묻힌 젊은 병사들의 즐비한 유해와 돈벌이 수단으로 마구잡이 취급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억울한 희생자들로서 젊은 전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로소 얻게 된다.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전쟁, 그럼에도 그들의 취급은 부당함을 넘어 분노의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이젠 끝내버려야 해....,, 이 놈의 전쟁을 이젠 끝내버려야 한다고.”라는 그의 자조(自照)의 목소리에 실려 다시금 종료되지 않은 그들 사회의 전쟁이 외쳐진다.

 

이 같은 기성세대의 반성은 또 다른 관점에서 반복되는데, 도발적인 그림에 몰두하며, 성적 정체성까지 혼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되어버린 자신의 후계자이기를 기대했던 아들에 대한 재계의 권력자인 페리쿠르의 돌연한 회한과 죄책감이 그것이다. 전사자인 아들 에두아르에 대한 비로소의 애도에서 시작된 전사자 기념비 건립사업의 추진에 몰두한다.

이것은 아버지와 맞붙어 패배한 전쟁에 대한 반복임을 시사하는 에두아르의 유령사업이 예술가들과 부르주아들간의 영원한 싸움으로 선언되는 것에서 이미 페리쿠르의 사업은 실행될 수 없는 한계를 내재한다.

 

이제 이야기는 오직 한곳을 향해 모여든다. 종전(終戰)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나야만 한다. 폭죽처럼 다발적이고도 집중적으로 프라델, 그리고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사업은 대형 스캔들이 되어 터진다. 전쟁을 끝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의건 타의건 그 끝에 이른다. 에두아르의 아버지에 대한 전쟁, 페리쿠르의 아들에 대한 회한의 전쟁, 프라델의 탐욕의 전쟁, 알베르의 빈곤과 트라우마와의 전쟁, 메를랭의 소외와 정의의 전쟁은 패배하는 것이 인간적이라는 하나의 결말을 남기며 종지부를 찍는다.

이들 모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적수, 이미 적수가 될 수 없는 대상없는 싸움에서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얼굴을 한 마스크를 쓰고 천사의 날개를 단 채 달려 나오는 에두아르와 질주하는 페리쿠르의 차량이 부딪는 비극적 장면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흐릿하기만 했던 삶의 본질을 발견케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소설은 공동체의 무관심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채 빈곤과 자기경멸의 삶을 지탱해가야 하는 상이 병사들과 전쟁을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 부의 토대로 인식하는 계층의 혐오스러움은 동일한 광기의 흐름 속에서 경합한다. 그리곤 예견 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야기시킨 장본인일 수 있는 재계와 정치권력의 상부 층들의 무관심과 외면, 국민이라 불리는 개인들 또한 이러한 방임과 외면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 진지한 주제의식들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즐거움 또한 풍요롭다. 프라델이라는 인물을 통해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과 분개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얼굴 없는 사내, 에두아르를 통해 세상에 대고 우스꽝스러운 주먹 감자 한 방을 먹이며 그와 함께 미칠 듯한 행복감을 안겨 주기도 하고, 단지 생의 안정만을 희망하는 알베르의 연인 폴린과의 소박한 사랑과 평범성의 꿈을 쫓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로서의 몫을 다한다. 한편의 기막히게 잘 연출된 우아한 비극을 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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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쉼표까지도 팽팽한 긴장을 지닌 소설

 

 

밝은 햇살로 가득하고 모두 자유롭게 행복한 곳,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을 동경한 탓에 그 남자는 죽었다.” - 티저북 P 155에서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날이 선 채 살아있다. 이면의 진실이라는 정보를 가득 담고서. 초입부터 쇄도하듯 등장하는 각양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통화의 내용에, 신문의 사건 기사, 하물며 광고판에 스치듯 발설되는 이름, 인상, 캠페인 등등 모두가 어두운 베일에 가려진 빛처럼 보인다. 이 긴장이 더욱 작품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어느 종착역을 향해 추진력을 얻게 하는 흐릿하게 뿌려진 자기력을 지닌 단서들 무엇 하나도 놓칠 수 없게 한다. 아마 근자에 이처럼 집중하고 읽어 본 작품의 기억이 내겐 없다.

    

 

2005325일 금요일, 화창한 봄날의 한가로운 오후, 네 명의 죽음과 자상(刺傷)을 입은 한 명의 생존자를 발생시킨 전철역 앞 광장의 무차별 살인사건이 저예산 예능 프로그램의 농담처럼 비현실적으로 벌어진다. 그리곤 뜻 밖에도 필로폰과 헤로인의 투약으로 심부전을 일으킨 살인 용의자가 사망한 채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는 마약 중독자의 환각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 소위 아무런 이유 없이 수행된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종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편, “너 같은 놈은 빠져도 아무 문제없어.”라며, 수사 과정에서 배제되고 피해자 가족들의 형식적 조서나 받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형사 소마, 그리고 속물적 이익만을 탐하려는 인간집단에 깊은 혐오를 지니게 된 살인사건의 생존자인 청년 시게토 슈지’, 후일 소마, 슈지와 함께하게 되는 프리랜서 방송인 야리미즈는 집단 지성이라 부르며 의심 없는 지붕아래 무임승차하는 물신 숭배적 몽매성과 집단이기심의 밖에 서서 사회적 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을 쫓으려는 개인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다수라는 얼굴을 하고 집단적 견해와 그 안이(安易)성에 편승하여 휘둘러대는 폭력적 무지와 몰지각성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실을 쫓는 독자성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제 사건의 수사는 경찰조직을 떠나 독자적인 진실 추구의 과정이 되고, 사건의 이면에서 개인으로서의 소마와 슈지가 마주하게 될 진상, 그 실체는 더욱 위험하고,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조바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예측적 불안과 흥분에 맞추어 안면이 붕괴되는 미지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엄마, 노회한 정치가와 이 못지않은 술책과 모사의 달인 같은 비서처럼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산아 육성책인 스마일 키즈 캠페인의 슬로건, 항 안벽 근처 바다에 가라앉은 차량과 찾을 수 없는 차량 소유자의 직업, 뇌경색으로 의식불명에 빠진 괴물기업 타이투스 그룹 회장 등, 놓칠 수 없는 암시와 단서, 복선들이 미스테리 특유의 지적 자극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이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존자인 슈지를 집요하게 살해하려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강한 배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살인에 정통한 프로로서의 존재와 이를 피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려는 힘의 지원 없는 개인 간의 보이지 않는 긴박한 싸움이라는 구도이다. 또한 이 싸움에는 시간적 제한이 있다는 강한 추측이 더해져 그 강도를 극대화하기까지 한다.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 , “44일 건은 문제없나?”와 같은 구체적 시간은 있으나, 그 구체적 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은폐된 진실을 엮어가며 완성된 무엇으로 향하는 추론의 게임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원초적인 주제에 관통하는 이중적 발견의 즐거움으로 견인된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느 추리작품의 세련됨을 능가하는 미덕일 것이다. 미증유의 살인 사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피해자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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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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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른 새벽, 떠나는 아버지의 운구를 향해 부르짖는 한 여인의 소리를 들었다. ‘아빠, 나를 나아줘서 고마워요. 아빠’ , 지금도 이 목맨 울음을 떠 올리면 가슴 뭉클함과 눈시울이 젖어든다. 아내를, 여동생을 여윈,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더 이상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이별을 겪는 이들의 슬픔은 세상 모든 서글픔과 비통함으로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26편의 내면의 일기로 읽히는 이 에세이집은 슬픔 속에 숨 쉬는 사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이 발산하는 그 빛 때문에 진정 아름다운 사유들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슬픔의 비의(秘義)를 간직한 채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삶은 상실을 필수로 하는 고통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곁에 두고 아주 느린 속도로 읽어나가야겠다고 펼쳐든 이유는 공허함의 깊어짐과 의지가 소진되어가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와의 작은 대화의 시도였다고 해야겠다.

 

또한 슬픔이라는 공통의 감정을 지닌 누군가와의 유대감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분명 이러한 기대는 내가 향한 시선의 방향을 전환하는 데 깨달음과 위로와 격려, 공감으로 작은 성취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이미 나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자기와의 대화에 나서는 고독의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이었을 것이다. 토해내지 못하고 가슴 어딘가에 막혀 있는 슬픔에 저지당한 채 있는 사람들이 이겨내고 마침내 발견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이해는 반복하여 곱씹는 나만의 언어가 된다.

 

누군가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되고 나서, 그 사람을 만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말을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P 14~15)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절규하는 여인이 토해냈던 언어가 그토록 시리게 아름다웠던 이유를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안다. 그녀의 삶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인생을 바닥에서 지탱해주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희망, 사랑, 신뢰, 위로, 격려, 치유 ....”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존재들이 나의 외부에 있으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 속에 작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으로써 진심으로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 주선되는 닫힌 문의 열쇠를 발견하는 짧은 순간의 번쩍임이 있다. 아마 벗어나기 어려운 시련 속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시공을 초월하는 울림이 있음을 말하는 작가의 타인에 대한 깊은 유대와 이해의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내면에 잠들어있는 예지의 힘에 대한 일깨움, 어떻게든 견뎌냈기에 살아있는 그 내재된 삶의 용기, 특히 용기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구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P 52)는 구절은 내게 붙잡아야 할 미세한 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슬픔 속에서 다시 발견했을 때” (P 166), 그것을 환희에 넘치는 슬픔이라 묘사한 작가의 감성은 꽤나 오래 내 마음의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책은 내 시선이 닿는 책장의 한 곳에서 내 손길을 자주 받아야 할 것 같다. 진정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뿐인 경험인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와 무구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책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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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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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가 셋이나 있는 소설이다. 편지글의 주체인 로버트 월턴’, 저주 받은 창조주가 되어버린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분노와 악의에 찬 피조물로서의 괴물’. 이것은 또한 월턴이 누이인 새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프랑켄슈타인과 월턴, 월턴과 괴물의 대화라는 여러 겹의 서술 장치로 이야기가 뒤얽혀들면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지식의 오만, 가족의 가치와 사랑의 미덕, 소외와 소통 부재의 고립에 도사린 문제 등, 실로 복잡 다양한 주제의식을 발산하게 한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는 21세기 신생 과학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버리고 새로운 불멸의 존재, 인간 생명의 의식을 가공할 차원으로 옮겨놓으려는 기술지상주의가 지향하는 인간 욕망의 고전적 뿌리를, 그 오래된 연원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문학이란 것이 그렇던가! 인간의 본성과 삶의 가치에 대한 반성의 사유는 물론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니는 계급화, 범주화가 낳는 차별과 소외의 문제와 같은 그 풍성한 의미를 새삼 발견하는 즐거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1. 자연을 보는 시각

 

소설의 시작인 월턴의 편지내용은 의외의 흥미로움이 있다. 아마 18,9세기 당대 계몽주의 영향을 피해 갈 수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21세기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심화된 시각이기도 한 정복되어 지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인식이다. 월턴은 극점을 향한 미개척 항해의 여정에 나선 것인데, 그것은 극점 근처의 항로발견, 혹은 자기장의 비밀을 밝히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탐험을 통해 인류 최후의 세대까지 파장이 미칠 공헌을 하겠다는 열정이다.

 

이것은 월턴에게 흔들리지 않는 목표이며, “영혼이 하나의 초점에 지성의 눈길을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고향인 제노바를 떠나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지닌 학문, 그를 매료시킨 자연철학으로서의 화학, 생리학을 통한 과학적 탐구의 경악할 열정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게다가 내가 인간의 육신에서 질병을 추방하고, 그 무엇보다 폭력적인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영원히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그 발견에 따라오는 영예는 상상도 못할 것이 아닌가!” 라는 생명의 원리를 발견하겠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천명은 월턴의 그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인다.

 

극점이라는 지리, 환경으로서의 자연, 동물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은 이들에게 오직 지식으로서의 앎, 즉 파악되고 장악되어 소유될 수 있는 피지배적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며, 이 대상에 몰입하는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는 외곬과 몰입을 뜻하는 눈길의 고정이며, ‘경악할 열정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탈신체화의 욕망을 강렬하게 추진하는 극단적 실증주의에 심취한 기술자본주의의 지향성과도 아주 흡사하다. ‘메리 셸리는 그렇다면 이러한 물화된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를 견인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이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2. 생명에 대한 이해, 지식의 오만

 

개체 발생과 생명의 원인, 무엇보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의 창조에 착수한다. 그런데 이 조물주의 창조 작업이 온통 부패와 죽음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원인을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죽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라며, “시체 안치소에서 유골을 수집하고, 불경스러운 무덤의 습지를 허우적거리며재료를 취득한다. 이러한 묘사는 다분히 상징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완성의 존재에서는 악취와 죽음의 냄새만이 떠돈다.

 

이처럼 재료의 주된 부분들이 시신에서 추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창조의 과정이 생명력과 연루된 자연과는 먼 거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존재는 시초부터 다른 어떤 정상적 인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나 언어의 기반을 넘어선 이상한 부산물에 머무른다. 이것은 메리 셀리로부터 100년 후, ‘카렐 차페크에 의해 효율성과 기술적 관점에 기초한 생식력 없는 로봇(R.U.R)이라는 인간 대체물로 탄생하고, 다시 100년 후인 21세기 오늘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부르짖는 기술종교주의자들에 의해 포스트휴먼(Post Human)'이라는 모호하고 야릇한 의미를 산출하는 언어로 변주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에서 학문의 진로를 탐색하던 시절, 화학담당 교수인 발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천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21세기 오늘 우리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신봉이 헛소리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오도되는 즉시 인류에게 더없는 해악을 끼치는 산물임을.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적 정열이 책임감과 올바른 가치관을 동반한다면, 진실로 인류를 위해 바람직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의미는 될 수 있을까? 이건 보다 장고(長考)해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괴물은 인간의 모습과 닮지 않은 외형이라는 소외를 야기하는 다름의 원천을 떠나서라도 조물주, 즉 인간인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분노와 악의를 부르짖고, 인간은 자신의 지식, 기술로 제작된 피조물을 통제하지 못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 그의 지식의 오만은 자신의 실존적 위기, 통한(痛恨)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인간 대체물에 대한 기술적 측면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채 떠돌다 독일의 한 농가에 은신하며 언어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괴물의 자기 학습능력이다.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의 딥러닝(Deep Learning)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각성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고하고 추론하는 피조물은 인간의 의지에 결코 예속되지 않는다. 괴물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추한 모습이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지, 기형의 외모가 인간들에게 어떻게 배척되는지, 이것은 곧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분노와 원한으로 전환된다. 자신이 느껴야만 하는 불행의 고통, 그 크기에 대한 조물주를 향한 항변으로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동생을 죽이기에 이른다.

어쩌면, 작가 메리 셸리는 여기서 인간이 지닌 지식의 오만함에는 무지가 가득 차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3. 소외와 소통의 문제

 

소설에서 소외와 소통의 문제는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각개의 시점으로 언급되며, 전자는 가족의 가치, 혹은 공동체와의 유대감에 대한 환기로, 후자는 타자의 범주화, 차별화에 대한 인간 인식의 편협성의 비판으로 이해된다.

 

프랑켄슈타인이 잉골슈타트의 감옥같은 방에 처박혀 괴물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은 외부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이다. 그의 말처럼 지향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 오로지 전진하는 시간이며, 이것은 극단적인 이기성과 사고의 경직성, 편협성을 확장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심화시킨다. 결국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구나 괴물이 동생을 살해함으로써 자기 소외는 자기혐오와 우울을 동반하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를 반대측면에서 보면 소외의 극복, 삶의 균형을 위해서 가족의 사랑, 사회 공동체와의 연결은 인간의 보편적 삶에 있어 중대한 미덕임의 역설(力說)이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괴물은 기묘하게 낯선 존재로 이해됨으로써 소외의 의미를 명료하게 읽게 한다. 괴물의 기형적이고 끔찍한 몸의 묘사와는 상반된 프랑켄슈타인을 능가하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발휘하는 대립이다. 이 비정상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인간사회의 본능적인 핍박과 주변화의 폭력성을 선명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괴물이며, 악마라는 철저한 소외의 대상이 된다. 역겨움과 추방의 대상으로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와 자신과 같은 여성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성적 욕망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욕망, 소외와 소통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타당한 권리처럼 보인다. 비정상성을 바라보는 인간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은 곧 범주화와 차별이라는 폭력을 낳는다. 아마 당시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계급의식, 혹은 젠더의식에 대한 각성, 인간 존재의 평등성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자 비판이었을 것이다.

 

4. 욕망의 충돌, 그리고 죽음

 

지식의 오만이 불러일으킨 창조의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고통만을 안긴다. 이러한 프랑켄슈타인에 위로와 작은 평온을 주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괴물의 살해 위협은 또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야만 하는 역겨움과 혐오, 분노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괴물의 요구인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의 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던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존재, 다른 추론과 사유의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완성에 이르기 직전 그 피조물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만다. 괴물과의 협상은 깨졌다. 이 충돌은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삶을 앗아간다. 그의 전락(轉落)한 삶의 회복을 위해 우정을 잃지 않는 친구 클레르발, 사촌 누이이자 연인인 엘리자베트, 아들의 안위에 모든 배려를 쏟아주었던 아버지를.

 

마침내 분노와 증오의 화신이 되어 괴물을 쫓던 프랑켄슈타인마저 눈을 감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의 더러운 투영이며, 자신이 생명을 얻은 그 날을 증오한다며, 저주 받은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을 본 괴물의 성취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희망을 파괴하긴 했으나, 나 자신의 욕망은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라는 괴물의 독백처럼 허기진 욕망으로 남는다. 채워질 수 없는 것, 역시 죽음, 소멸만이 기다린다.

이 작품의 귀결은 소설 속 한 문장에 일찌감치 서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P 160)

 

이 위대한 허구의 산물에서 오늘 우리는 정신의 소산인 열의와 의지가 방향을 잃을 때, 인지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지식의 오만이 방종할 때, 인간 자신에게 돌아 올 위기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며, 뿐만 아니라 타자성에 대한 이해의 미성숙, 그로인한 인종적,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의 비판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마 이 작품이 발표된 이래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의미들이 풍화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한 채 더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막힌 직조 능력과 작가의 천재적인 지적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문학동네, 1818년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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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20세(19세?)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

필리아 2018-03-23 09:56   좋아요 0 | URL
네, 풍부한 의미로 넘쳐나는 위대한 작품이에요.
고맙습니다. 레삭매냐님~

꼬마요정 2018-03-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전히 궁금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수첩...
메리 샐리 진짜 멋져요^^

필리아 2018-03-23 17:35   좋아요 0 | URL
ㅎㅎ 빅토르는 생명을 어떻게 불어넣었을까요?
21세기 오늘은 ‘웨트웨어그라인드하우스‘ 같은 탈신체화, 기계와 인간의 결합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있어요. 그네들의 전망노트를 닮았을 것 같네요. 메리 셸리는 그야말로 천재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님 ^^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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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인생은 덧없이 끝을 향해 물러나고, 지상의 기쁨은 희미해지네,

영광도 지나가고, 사방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변하고 썩나니,

, 변하지 않는 그대여, 나와 함께 머무소서.” - P 432 에서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내가 지닌 언어는 이상의 표현이 가능하지 않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알지 못하는 어떤 그리움들이 깊어진다. 바다 같이 깊은 감동이 온몸을 감싸듯 휘젓는다.

 

모든 이의 필요에 대해 열린 마음을 함께 나누는 한 자연주의 공동체 아르카디아, 영혼의 양식을 구하려 카라반을 이끌고 이동하던 그네들에게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꼬마 비트가 태어난다. 소설은 바로 이 텍스트의 책임자인 가장 작은 히피 조각’, 비트가 삶의 신성한 존엄성을 의식하고 그것을 아끼고 가다듬으며, 충만한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끝없이 내몰리는 상실에 대한 도저한 발걸음, 삶이라는 그 견딤의 고독한 시간의 이야기이다.

    

자기 이야기에 대한 책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삶, 이것을 바라보는 내내 시리도록 순수한 것들이 뭉쳤던 내 숨을 크게 내 뱉게 한다. 춥고 배고프며 고된 노동의 일상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하는 친밀함, 무한히 개방된 마음들의 사랑이 흐르는 곳, 그러나 이 낙원은 서서히 붕괴해 간다. 끊임없이 유입되는 사람들, 대마초와 섹스와 방종, 자유의 방종은 열린 마음들을 굳게 걸어 잠그게 만들며, 깊어지는 갈등은 분열과 해체를 재촉한다.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쫓기듯 아르카디아를 떠나 도시로 향한다. 자신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조용하고 좋은 꿈, 사진을 찍으며 사는 삶을 포기해서라도 얻고 싶었던 헬레와 아르카디아를 떠난다. 그의 사랑, 삶의 태도를 형성시킨 터전을 상실한 어린 비트에게 도시의 삶은 고통에의 도전, 그가 자신의 삶에 쓰려는 이야기,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심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프고 쓸쓸하게 흘러간다.

 

어느덧 가난하지만 사진예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있는 비트, 그의 확실한 존재였던 부모, 버려진 아르카디아에 오두막을 짓고 돌아간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분노로 인한 어머니 해나의 별거, 그의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바깥세상에서 잘 생긴 성인이 된 아르카디아인들의 단단한 껍데기에 싸인 얼굴은 아프도록 부드럽고 숨김없는 아르카디아 시절의 얼굴과 대조되어 도시가 강요하는 영혼의 두꺼운 장막, 그 우울한 견딤의 아린 통증을 던져준다.

 

이 묵묵한 견딤의 시간에 자신의 삶을 버려서라도 얻고 싶었던 헬레와의 재회, 그녀와의 짧은 시간의 행복 속에 얻은 딸 그레테, 그리곤 다시금 그의 곁을 떠나버린 사랑의 상실은 삶을 온전히 파괴하는 아픔이 된다. “왜 울어? .... 아빠는 항상 울어. 왜 항상 우는 거야?” 라는 비트를 향한 그레테의 말에 이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르카디아 시절, 지붕 수리를 하다 떨어져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아버지, 근육위축경화증으로 점차 거동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 에이브와 해나는 비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죽음은 그의 기반암이자 세계의 중력이었던 에이브만을 먼저 거두어 간다. 딸 그레테와 아르카디아의 옛 친구들, 이웃인 아미시 사람들과 매일 한걸음씩 죽음의 늪으로 향하는 어머니 해나에게 아름다운 삶으로서의 기억을 위한, 진정한 삶의 복원을 위한 자연을 닮은 일상이 찬연하게 이어진다.

 

내 삶의 이야기, 내 삶이라는 소설의 첫 장에서 그 완결의 페이지인 마지막 장은 어떻게 덮여질까? 온통 사람들에게 열린 자신의 사랑이 마침내 소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빛이 그림자에 이르고, 다음 세대에 희망을 주는 그런 삶의 이야기를 써 낼 수 있을까를 생각게 된다.

흙의 달콤함이 나를 향해 피어오를 때, 비트의 황금빛 먼지가 앉아 빛나는 회고처럼 자기 이야기에 대한 숭엄한 책임의 인간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나도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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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구마 2018-03-19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표지는 뭐죠? 제가 받은 책의 표지와 조금 다른 데 느낌있네요.

2018-03-19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