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가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나 바야흐로 봄이 왔음을 알린다. 기지개를 켜며 싱그러운 기운에 같이 휩쓸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어지간하면 묵고 낡아서 활력을 막아서는 것들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이고만 싶다. 그런데 여전히 케케묵은 프레임으로, 또한 범주화시켜 그 저의가 뻔한 스토리를 반복하며 이러한 봄의 생동에 중국발 황사처럼 마스크를 쓰고, 넌더리를 내게 하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말의 구린내가 기분을 싹 잡치게 한다.
교활한 언어게임을 통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역행적(逆推進;reaction)인 수사학적 전략들에 신물이 난다. 정말 끊임없이 계속되는 낡고 천박한 이데올로기를 씌워 고착된 틀(Frame)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지독히도 편협한 인식에는 이젠 오직 짜증만 올라오는 것이다. 마침 이러한 편협성이 어떤 ‘수사학적 전략과 인지적 태도’에 갇혀있는지를 통찰하는 연구 저술들의 연이은 출간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이 퇴행적 논리, 이 구렁텅이에 함몰되지 않고 살만한 세상,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준다.
1. 수사학적 주장과 그 기계적 반복
인류역사, 문명의 진보를 언제나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전형적인 수사학적 주장의 형식과 유형을 밝히면서, 그 기계적인 주장이 담고 있는 다분히 반동적인 명제들을 설명하고 있는 ‘앨버트 O.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저술은 보수가 지닌 퇴행성의 민낯,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
그는 이 퇴행적 세력들이 사용하는 명제, 그 전형적인 수사학적 전략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역효과의 명제’라고 하는데, ‘행동이 의도하지 않는 여러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에서 보듯이, ‘의도와는 달리 고용축소와 총임금 감소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즉 저소득층의 소득향상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사회통합의 고취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만을 야기하여 사회발전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반대한다.
둘째는 ‘무용론의 명제’이다.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즉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희화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다. 특사의 북한 방문과 북의 핵 폐기 의사, 남북, 북미정상회담의 추진을 시작할 때, 이를 두고 ‘쇼’를 하는 것이라고 콧방귀를 껴대던 사람들의 언행이나, 역사학자 ‘알렉스 토크빌’이 프랑스 혁명을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 수사학적 태도가 악질인 것은 ‘다수의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설득되고 세뇌당하기에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사용하는 교활함 때문이다.
셋째는 선(善)의 정책에 직접 반대하기 어려울 때, 제안된 변화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거나 이런저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위험론의 명제’ 이다. 서울시의 초등생 무료급식 정책을 시작하려할 때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거품을 물던 수사학이다. 즉 ‘이것이 저것을 죽일 것이다!’라는 제로섬 방식의 해석공식이다.
이 역행적 수사학들은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이 자기들만의 이익수호를 위해 정책이나 사상을 뒤집고 비난하기위한 논쟁태도나 전략, 그들의 설계된 위험신호를 우리가 조기에 알아차리고 경계를 삼도록 도와준다.
2. 믿음의 고착화, 그 인지적 태도의 무능(無能)성
아마 위와 같은 퇴행적 레토릭(Rhetoric)의 빛나는 ‘앨버트 O. 허시먼’의 통찰에 내재한 본성의 우아하기 조차한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 정치를 말하다』와 ‘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의 두 저술은 무능하기 그지없는 인지적 태도에 도사린 도덕적 모호성의 본질을 관통해내고 있다.
2-1. 『도덕, 정치를 말하다』
모든 사람이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도 없으며, 이유도 또한 없다. 이 다양한 시선과 관점이 인류 문명 진보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다름, 세계관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레이코프는 바로 이러한 개별자들의 믿음이 왜 달리 형성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즉 어떻게 사람들의 도덕체계, 도덕적 신념이 창조되고 형성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곧 오늘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정치적 신념이란 것의 내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답변을 제공한다.
그는 이러한 도덕적 패러다임의 원천을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가정의 두 중심 모델로 비유하여 이를 정치적 성향에 연장하여 설명한다. ‘엄한 아버지 모델’과 ‘자애로운 아버지 모델’이 그것인데, 전자는 “절제와 책임, 자립의 장려, 보상과 징벌, 외부의 악으로부터 보호,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힘과 권위, 자기이익, 질서의 중시”라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감정이입과 공정성 장려,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을 돕고, 인생에서 충만함을 장려하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양육”을 행동의 주요 카테고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결국 한 인간의 세계관이 양육된 환경에 지배되어 이것이 개별자에게 세상을 범주화하고, 해석하는 믿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육모델의 구분이 정당함을 갖춘 것이라면, 엄한 아버지 모델에 비유되는 보수주의의 행동 카테고리의 내용은 개념적 절대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만의 도덕적 경계를 짓고, 도덕적 힘과 권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인간의 번영과 접촉하지 않으며, 보편적 인간성과의 접촉을 거부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중을 ‘쓰레기’, ‘고려할 가치 없는 인종’이라고 서슴없이 지껄이는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보수 정치인들의 언어에서 쉽게 발견된다.
이들은 ‘우리와 그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할하고, 기계론적으로 인간을 징벌과 보상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지지되지 못하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들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세상을 끔찍한 곳으로 내몬다.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의 집단적 세력을 구성하고, 자신들을 쓰레기라고 칭하고 있는 이들에게 생존권을 의탁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체 왜 이러한 상황이 유지되는 것일까?
그 답은 실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지점에 있다. 보수의 전략적인 레토릭에서 보았듯이 다수의 순진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하는 지에 대한 술책의 능란함, 즉 수사의 반복적 사용으로 세뇌된 고정된 프레임(틀) 속에 진리를 왜곡하여 감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덕적 프레임을 장악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를 100년 가까이 장악한 ‘빨갱이’와 같은 타령이 적절한 보기일 것이다. 이 프레임에 가둘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보가 보장되는 기막힌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2017년의 시민들의 촛불 혁명이 이들의 프레임이 지닌 타락한 도덕의 실체를 보았기에 피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수사학적 전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어느 때부턴가 매우 흥미로운 조어가 떠돈다. ‘중도 보수’, 혹은 ‘진정한 보수주의’라는 야릇한 언어인데, 이러한 조어가 성행하는 시기의 특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의 실체가 도덕적 규탄을 받을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사법이라는 것이다. 때 맞춰 아시아권 어느 국가에서도 번역되지 조차 않은 ‘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진정한 보수의 첨병으로 나섰다. 여기서 저자는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사회의 질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언어적 유희를 시작한다. 마음이고 방법이라 부른다고 해서 보수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러셀 커크가 제시하는 보수주의 핵심가치 6가지를 보면 조지 레이코프의 엄한 아버지 모델의 그것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대척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중 하나인 “획일성과 평등주의를 배격하고 다양성과 인간 존재의 신비로움에 대한 애정”이라는 선언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여기에는 거짓과 진실이 마구 혼동된 자기기만적인 인식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가치인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 문명화된 사회에는 질서와 위계가 필요하다는 믿음”과 모순됨은 물론 충돌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위계, 즉 권위에 의해 나와 너를 분리하고, 평등주의를 배격하는 가치에 터를 두고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2-2.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조지 레이코프와’와 ‘엘리자베스 웨흘링’과의 공저인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레이코프의 전작인 『도덕, 정치를 말하다』의 두 아버지 모델의 토대위에 서있는 저술로서, 제목의 뉘앙스처럼, ‘왜 보수에 현혹되는 가’라는 인지적 태도에 대한 탐색이다. 즉 주요 논의는 ‘국가는 가정’이라는 은유가 전체 세계관을 구조화하며, 뇌 속의 전체 ‘프레임 체계’를 조직한다는 인식위에서 보수와 진보의 가치체계들을 주도면밀하게 도출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보수가 어떻게 진보의 프레임보다 더 활성화될 수 있는지를 풀어낸다. 레이건이나 도널 트럼프가 활용한 엄한 아버지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하는 것은 이것이 대중 배반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대중들을 장악하는 프레임의 위력을 확인시켜준다.
한편, 이 책의 특별한 미덕은 오늘의 우리네에게 더욱 근접한 묘사로 다가오는 소위 ‘이중 개념 소유자’에 대한 성찰이랄 수 있다. 실제의 우리네의 삶에 있어 양 극단으로 이분되어있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 더 이상 적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주택가격이 끝이 없다는 듯이 치솟아 사회 전체의 고통이 되어 돌아오면 정책 부재의 정부를 비난하다가도, 성공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능력이라는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양면적 모습을 보이는 자본주의 체제 속 우리에게서 두 모델의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이 양면적 특성을 지닌 다수의 대중을 어떻게 자기 세력화하느냐는 정치 논리만 남는다. 현실 세계에서 정말 강력한 것은 바로 ‘진실이 아니라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다. 보수는 ‘삶은 처절한 경쟁이며 사회는 각자도생하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진보는 ‘삶이란 모두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타자로부터 손상되거나 침해되지 않으며, 거짓과 위선, 기만의 정치적 논리에 희생되지 않고 마음껏 봄의 신선한 생동감을 만끽 할 수 있는 세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피곤함의 희생을 피할 수가 없다. 깨어나기 위한 대중의 노력,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펼치기 위한 공동의 가치를 일궈 나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 시민대중들의 몫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