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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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클럽의 무대에서 쉰일곱 해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두 시간 가까이 주절거린다면 관객인 나는 이내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의 작품에서 영문학 교수인 데블런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려고 나서는 재능이란 아무리 색다르더라도 지루하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듯이 그 지리멸렬한 타인의 삶을 듣고 있기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쳐 모두들 안녕히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되었다. 40 여 년 전 1년 남짓 우정을 나누었던 옛 친구에게 자신의 쇼에 와주기를 부탁하던 하나의 문장,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 이 말이 울려대는 어떤 정직하고 여실(如實)한 느낌에 울컥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봐주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자신의 정말의 인생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다는 부탁이 얼마나 거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쾅 하고 심장에 박혀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의 맞춤처럼 네타니아 클럽무대의 쇼에서 펼쳐지는 비극으로서의 삶과 뒤틀린 삶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한 마치 위기 극복의 수단처럼 발화되는 농담의 향연은 그야말로 농축된 삶의 한 시사처럼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삶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옛 친구의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있는 전직 지방판사인 아비샤이 라자르의 모습 - “사실 너 같은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만만한 대상이지. ?” - 과 같이 남의 인격을 범주화 해 버리고 인생을 단 번에 재단해 내는 태도가 지금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더욱 코미디언 도브 그린스테인’(도발레 G.)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옛 친구의 부탁에 이러한 대응을 하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아비샤이가 더 이상 개그 쇼가 아닌 그냥 살아있자는 기획에 불과했던 한 인간의 실패한 삶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갈등하는 객석의 반응에 동화되고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 과정은 마치 독자인 나의 소설 속 행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외면하지 않는, 감히 진짜배기 삶을 응시하기 위해.

 

동년배들로부터 따귀를 얻어맞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소년 도발레는 땅에 손을 집고 거꾸로 돌아다닌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물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어머니의 모습에 보내는 비열한 시선들을 자신의 우스꽝스런 행위로 차단하려했던 의도이다. 그럼에도 물구나무로 걷는 행동이 아버지의 채찍에 의해 중단되어야 했던 고통의 이야기를 발설 할 때, 아비샤이의 기억은 내향적 소년이었던 자신에게 활기와 의욕을 꺼내주었던 행복과 웃음으로 커지는 눈을 지닌 도발레로 이어진다. 유쾌함과 미소로 자기 고통을 보여주지 않았던 도발레를.

 

또한 군사훈련을 위해 강제된 캠핑에서 체구가 작은 도발레를 가방에 넣어 던지고 패대기치며 비웃어대고 폭력을 가하는 동년배들의 행위를 외면하고, 하사관에 불려 가방을 메고 홀로 캠프장을 떠나게 되는 도발레에게 끝내 다가가지 않았던 아비샤이는 소녀 리오라에게 열중하고 있었기에 다른 모든 감정이 자신의 생각을 무디게 한 것뿐이라고 당시의 자신을 합리화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기만인 것은 캠핑이 끝나고 부모를 설득하여 도발레와 같이 하던 수학 과외를 중단하는 행위에 있다. 이 기만의 행위는 친구에 대한 비탄과 참혹한 상실을 털어내기 위한 자기 보호였을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지옥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처럼 고통이고 외면하고픈 충동을 불러오지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유혹 또한 병행한다. “마음의 아픔, 양심의 고통, 악의 사절들, 미래의 악몽을 꾸고 전전반측하는 광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도 이와 같이 떨리기 시작한다. 객석을 떠나는 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남은 자가 옳은 것인가? 대체 어떤 태도가 더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것인지 갈등하게 한다. 코미디 극이니 그냥 웃어넘기면되는 것인가? “결코 더럽혀지지 않은 거라는 인생의 이야기”, 그의 고통의 근원을 마지막까지 따라가기 위해 인내심을 쥐어 짜낸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불편한 무엇이 저항하게 한다. 정착촌에 사람들을 내몰고,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군사 훈련을 강제하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멸시하며,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회와 자신은 마치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신체와 멀리 팔을 뻗쳐 손끝에 자신의 대변 샘플 통을 쥐고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도발레의 개그가 당신들도 공범이야.’라는 말처럼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허공에 다시 레프트 훅을 날린다.”

 

캠프를 떠나 장례식에 맞추어 가기위해 군용차에 실려 집으로 향하는 소년 도발레의 회상은 혼란과 불안과 두려움,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었음이 차 유리에 머리를 부딪는 드----! 이며, 드르르르르! 뇌가 휘저어져 모든 생각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는 괴로움으로 들려진다. 그는 도착 할 때까지 나는 인간의 삶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토로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을 직면한 소년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보자 물구나무를 서서 도주하는 모습은 소박한 영혼조차 지니기가 불가능했던 삶을 마주보게 한다.

 

소설은 이처럼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생애를 지배했던 모욕과 폭력의 비극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유대인의 정신적 외상의 역사, 이스라엘 중부도시 네타니아로 상징되는 범죄와 불의의 공간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녹여내어 그냥 살아있자는 것조차 얼마나 놀라운것이었는지를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집요하게 길어낸다. 어쩌면 이야기의 기록자가 된 아비샤이가 이 장소에서 자신을 빼내기를”, 혹은 자기 기억의 소환을 거부하려는 의식이야말로 진실에 가 닿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한 자기 삶의 이야기인 병든 타마라와의 추억이라는 내면에 침잠하는 아비샤이의 모습은 나의, 우리네의 한계를 보는 것 만 같다.

 

반면에 쇼의 시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발레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어린 시절 그를 기억하는 피츠라는 여성의 눈물과 이야기의 부정과 수긍과 얼굴을 가리며 몰입하는 모습은 타인의 이야기, 더구나 그것이 오직 견딤, 존재의 이유만을 갖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감히 바로 볼 용기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사람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 무엇인지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넓혀나가는, 타인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한 것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공감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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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 지도로 본 도시의 역사
제러미 블랙 지음, 장상훈 옮김 / 산처럼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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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뇌가 황홀해지는 진귀한 사료들 - 도시와 지도 등 - 과 높은 인문학적 성찰이 어우러진 가히 수준높은 도시역사의 노작(勞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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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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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이지만 유쾌 발랄하고 담담하게 무심히 뱉어내는 진술은 역사적 진실에 가닿는다. 시종일관 킥킥대느라 배가 아프고 눈물이 다 찔끔 날 지경이지만 이 소설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할 만큼 예외 없이 진지한 사유가 넘쳐흐른다.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라는 부제가 작가의 겸손한 표현에 불과하며, 단 한 페이지의 읽기만으로도 그 농축된 박학(博學)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소설은 20세기 인간 정신이 배설해 놓은 사상과 사건과 물질들이 어떻게 다시금 인간 정신에 되먹임 되어 왔는지를 수백 장의 스냅사진이 초스피드로 눈앞을 지나가는 현기증나는 파노라마처럼 들이댄다. 21세기 오늘, 우리들을 만들어 낸, 우리들의 정신과 물질세계의 현재를 이해케 한다. 그것이 때로는 한 없이 유치한 빈정거림 속에서, 또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해박함의 진지함 속에서 화려한 재치의 문장으로 지성을 자극하기에 170쪽에 불과한 작품이 1000여 쪽을 읽어낸 것처럼 녹초를 만든다. 지금도 다문 입에서 김빠지는 풋, 풋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20세기 시작에 대한 역사가들의 논평부터 시작되는데,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혹은 사실상 산업혁명과 함께였다느니,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라고 말한다며, “몇몇은 자기들이 더 빨리 발달했으므로 원숭이 혈통이 남들보다 덜 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1차 대전 전사자의 시체 길이가 15508Km에 이르는 야만성과 물질 자본주의와 인종 구별짓기(우생학)가 바로 20세기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현상의 토대였다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에 착수한다.

 

그래서 작가와 시인들은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궁리한 끝에 “1916년 다다이즘을 발명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미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며, 당대의 문화현상을 소개하고, “사람의 판단력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결과물이며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형이상학은 헛소리라고 선언했던 실증주의 철학을, “이제 여자들은 쥐를 보고도 기절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선입견에 맞춰주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다.”라며 피임기구의 발명이 여성 해방의 기폭물이 되었다는 기록들을 더듬기도 한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말하고 ‘~왜냐하면이라고 이유를 기술하는 단순한 문장의 구조가 그침 없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이어지는데, 그 이유의 설명이자 작가의 주석이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진수를 이룬다. 여기 이 소설 주제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역사와 기억의 관계에 대한 한 문장 단원을 발췌 인용해 본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기억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기억은 역사적 영역에서 심리적 영역으로 옮겨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기억이 마련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기억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의 내면화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어떤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무슨 빚을 갚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holocaust)나 쇼아(shoah)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 엄밀히 말해 인종 학살이 아니라 인종 학살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하며

이 특수성을 표현할 만한 다른 이름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P 144 에서)

 

이것은 역사가 정체성의 시대를 마감하고 인식론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주장하는 일종의 선언적 문장이며,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표현 불가능한 잔혹성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가 기억이라는 인식의 지평으로 넘어왔을 때 그것이 과연 인간 개체 혹은 공동체에게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의 본성만큼은 우릴 깨어있게 해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비사실성이라는 내재적 성질과 자의적 조작성이야말로 20세기의 정신임을 비틀어 까발리는 다음의 문장은 유치하지만 진실의 민낯에 주춤거리게도 한다.

 

한편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개인의 기억은 어차피 현실과 상응하지 않으며

객관적 현실을 조작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방어기제로

사람들이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빨리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P 112 에서)

 

소설은 20세기의 시시콜콜한 과학적, 산업적 발명품과 발견들,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의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노선과 그 갈등들, 대중 매체와 인터넷 등 소통의 수단이 지닌 문명적 현상들과 문제성의 비판들, 그리고 문학, 심리학, 철학 등 인간 정신의 표현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거대한 인간 극장의 농축된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20세기 인간사에 대한 기념비적 헌사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혹 오늘의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쾌락주의와 무수한 양의 정보로 인한 망각과 어떤 반응이나 저항의지도 촉발시키지 않으며 그 대신 피로와 체념을 불러일으켜 기억의 소멸에 일조한다지만 그렇다고 기억에 호소하는 기념비의 축조를 멈 출 수는 없을 것일 게다. 역사는 살아있는 과거를 시간 속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정당성을 없애버리지만 기념비는 기억에 호소하니 말이다. 웃기지만 그 진지함을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통찰력과 감히 견준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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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말한다. 마르크시즘(Marxism)은 더 이상 오늘의 사회에는 유용하지 않으며, 폐기되었다고. 헛소리!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순, 인간과 인간사이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질서를 논의하는 것이며, 인간 개체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이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며, 바로 이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형태의 힘으로 자신과 유리되지 않도록 하여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키려는 시도라는 그의 사상 중 극히 일부만으로도 너무도 많은 것들을 인간과 인간사회에 시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당대의 문학거인이었던 빅토르 위고가 그의 소설에서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회의 인간 소외를 개인의 악으로 그릇된 통찰을 하였다고 작품전체가 폐기되지 않는 이유와 같다. 마르크시즘을 구성하는 핵심적 사상의 하나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서로 대립 충돌함으로서 역사의 모순이 발생한다는 통찰,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관계의 전 체계가 정치적 상부구조 및 사회 형태와의 연관성을 가진다는 지적은 여전히 사회의 권력관계를 분석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더구나 마르크시즘을 형성하고 있는 무수한 저술들과 실천행위의 기록들은 한낱 낡아빠진 독단론의 집합이거나 기회주의의 은신처에 똬리를 틀고 있는 현실의 삶과 괴리된 이론적 이념이 아니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의 하부에서 임금 노동을 하는 절대 다수의 대중이 스스로 삶의 주체임을 깨닫게 하고 그러함으로써 자기소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인간 존재에 끊임없는 모욕을 가하며 인간정신을 공허와 환멸에 차도록 방치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을 제거하려는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 우리네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제시되었던 그의 사상에서 여전히 배워야 할 것, 이해하여야 할 것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실천적 가치로서 적용할 수도 있다.

 

201855일이면,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이 된다. 19세기 인류 사회를 온통 적셔댄 자본주의의 발흥에 수반된 계급 전쟁, 사회관계의 상층부를 장악하려는 첨예한 갈등으로 점철된 시간의 족적들을 더듬어가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 노동자인 21세기 오늘을 투영해보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알지 못한 채 마르크시즘은 실패한 이론이기에 이제는 관심을 가질 가치조차 없다고 떠벌리는 우매함과 오만을 넘어 무지의 편협은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인용, 재인용하거나 해석 또는 비판의 글들이 난무하다보니 그 왜곡과 몰이해가 지나치게 판을 치는 모양을 보게 된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1989년 번역 소개된 이래 절판과 복간을 반복하다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편집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마르크스 전기 1, 2가 재출간 되었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 이해의 척추를 세우는 최고의 저작이 되어주는데, 마르크시즘을 개관(槪觀)하는 역작(力作)으로서 그가 집필하고 발표한 저술들의 동기는 물론 이것들의 주체적 사상과 의도와 해설을 포함한 내용 소개까지 더해 갈증을 느끼던 무지를 거의 완벽하게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저술이 빛을 발하는 첫 번째의 가치는 헤겔 법철학 비판, 1844년 경제학철학초고,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비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 비판, 프랑스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자본등 위대한 저술들이 역사적 시간과 어울려 가히 풍부하고 참된 의미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둘째는 1840년대의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혁명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공산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최초의 국제 노동계급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의 결성과 이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실천적 행동가의 전략과 전술은 물론 그 사상적 토대의 발현을 목격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마르크시즘(Marxism)의 본질을 이해하는 견고한 기초의 터전이라 해도 그릇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특히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와 관념론적 이론이 아닌 실천 행위로서의 이념이라는 어휘는 마르크시즘을 여타 유사 이데올로기와 구별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한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몰고 온 사회적 모순의 대두는 유럽사회 정치체제의 급변을 요구하게 되는데, 자본 계급의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계급적 충돌의 불가피한 귀결을 내재한다. 결국 자본주의가 지닌 내적 모순에 대한 대안은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만, ‘공상적, 혹은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진정한 사회주의와 같이 감상적, 관념적 인류 해방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지니지 못한 기회주의적 이해에 머무는 것들이다 이같은 실태가 바로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과학적 공산주의를 정식화시키려는 마르크스의 저술들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현장에서의 지도적 역할이라는 행위이다.

 

이러한 단적인 예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를 주창하던 프루동과의 논쟁으로부터 철학의 빈곤이라는 유명한 저술이 집필되는 것으로 확인하게 된다. “역사가 객관적 조건과는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의주의적 역사개념에 입각해 있으며, 사적 소유의 기원은 물론 소유 집중 이유도 알지 못하는 프티부르주아의 한낱 심적 열망에 불과한 빈곤의 철학이라는 프루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가치와 화폐 이론을 포함한 자본이론의 맹아(萌芽)로서의 위치를 갖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행위는 이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자기인식의 명료화와 심화, 대중 확산을 위한 실천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지닌다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인 포이어바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변증법은 또한 헤겔을 피할 수 없는데, 청년기 헤겔 좌파로 불리는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으로서, 인간의 실천행위, 특히 집단적 행동을 과소평가했다고 헤겔의 주관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한 헤겔 법철학 비판이나, 인간을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존재로 파악한 포이어바흐와 달리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역사에 뿌리박은 사회적 제 관계의 산물로 파악하며, 유물론적 관점을 정식화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이해하는 관문임을 알게 되기도 한다.

 

또한 청년헤겔학파의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한 비판으로 작성된 신성가족,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제공한, 마르크시즘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저작이다. 노동자의 자기 소외의 원천으로서 재산, 자본, 산업, 그리고 임노동임과, 모든 역사적 시대마다 특정한 경제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헤겔의 완전한 극복을 이뤄낸다. 훗날 혹자들은 이를 두고 헤겔 논리학의 병기창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편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게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당시 임박한 분노도 보게 되는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자기 이해를 방해하는 진정한 사회자들과 같은 이념적 반대파들을 잠재우기 위한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가 내재한 인간 존재에 대한 모욕의 본성과 모든 계급간의 충돌 대립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기인한다는 역사성의 발견을 비롯한 정치적 상부구조와 사회적 의식 형태와의 연관성 규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와의 연대나 이용행위에 대한 환상을 차단하기 위한 도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마르크시즘의 정식화는 물론 인류 사상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1848년 프랑스 6월 혁명이 지닌 역사적 의미로부터의 깨달음인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인류 최초의 내전이다. 프랑스공화국의 심화된 내부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민주공화국 확립 요구에 대한 반혁명세력인 부르주아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처참한 학살로 맺은 피의 투쟁이 준 교훈이다. 여기에는 사상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 각 계급들의 서로 다른 지위, 즉 사회적 관계의 우열인 물질적, 경제적 생활조건이 만들어낸 자본주의가 애초에 내재하고 있는 적대관계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니고 있던 환상, 프티부르주아가,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계급적 믿음이란 공허한 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산업, 금융 자본의 임금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자기 인식의 필요를 절실하게 각성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저서로 표현되고 있는데, 노동계급 결집의 강한 필요성을 이들 집단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 작업은 역사 현장에서의 체험과 통찰이라는 실천적 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848~1849년의 독일에서의 혁명운동 또한 융커 등 대지주 봉건세력과 부르주아세력의 연대, 프티부르주아의 노동계급에 대한 배반과 같은 반혁명 세력과 노동계급의 계급의식 미성숙 등 혁명의 좌절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 공산주의자동맹의 일원들을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로, 벨기에 브뤼셀로, 지속되는 추방과 체포 구금의 위협으로 내몰고, 마침내 마르크스는 영구 정착지가 될 영국 런던의 망명길로 오르게 한다.

 

따라서 혁명의 좌절과 반혁명 세력의 승리 이후, 1850년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반동의 시기로서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며 그들 이론의 정교화와 저술 작업을 위한 시간이 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저술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그의 자본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주의 체계가 다시 부활한 반동세력이 유럽을 지배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곤경의 시기였던 바로 그 시간의 덕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을 비롯한 정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자료를 수집하고, 노동계급의 연대를 복원하는 이 역사적 시간이 안타까운 한편 숭고한 시간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오늘 우리네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제시되었던 그의 사상에서 여전히 많은 배움을 얻는다. 마르크스 전기 1, 2는 역사적 인물의 사적 생활을 묘사한 단순한 전기(傳記)물이 아니다. 마르크시즘의 형성과 정식화의 여정에서 서술된 위대한 저작물들의 핵심 내용의 도출과 그 역사적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우리들은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을 향한,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해방을 위한 인류애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들을 읽으려는 모든 이들의 유용한 안내서이자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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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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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집은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몇몇 작품 덕에 7편의 작품 모두를 읽게 되었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임성순, 최정나, 박민정, 박상영 네 작가의 단편은 오랜 만에 즐거운 읽기를 가능하게 해 준 우리문학 작품이라 하고 싶다. 특히 최정나의 한밤의 손님들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 1942>에서 느껴졌던 불안정성과 몰입의 거부와 같은 내가 기억하는 감성과 같은 호흡이라는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임성순의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은 어떠한 진부한 소재라도 그만의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문장으로 전환시켜 독자를 압도해버리는 솜씨에 다시금 매혹되었다고 해야겠다.

 

수상작인 박민정의 세실, 주희는 읽을수록 반하는 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다시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라 부르고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인 주희가 듣기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예쁜문장이라는 느낌인데, 그것은 어떤 표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극성 강한 의미들이 날카롭게 꽂혀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뾰족함이 감추어진 듯 드러나 있는, 말 없을 것 같으면서 할 말 다하는 그런 것신작 알리미에 이 작가를 등록 해둬야 할 것 같다.

 

동성애 코드를 그려낸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그야말로 젊은 색채가 톡톡 튀어대는 감각을 갖게 한다. 무얼 하지도, 되지도 못한 퀴어영화 감독 지망생, 현대 무용가의 보란 듯한 실패 선언이 그 어떤 소설들과는 다른 맺음 방식의 신선함이었다고 해야 할까? 괴팍하게도 어떤 파괴적인 모양에 끌리는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써 내는 산다는 것의 솔직한 면모들의 장면들에 반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을 발견할 때에 공감의 정도가 높은 것처럼, 수록 작품들에 대한 관심의 고저는 순전히 알고 있는 익숙한 것에 대한 선호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영국의 문예비평가인 올리비아 랭이 쓴 외로운 도시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대한 감금과 노출이라는 쌍둥이 메커니즘에 대한 해독은 내게 깊숙이 각인되었던 이해였기에 유사한 배경을 지닌 한밤의 손님들의 묘사들은 친근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소설 도입부의 한 장면인 몸에 힘을 주고 버텨보지만 누군가에 의해 잡아채어지듯이 식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뭔가 부적절하게 배척하고 싶은 것에 끌려가야하는 끔찍한 불쾌감이 느껴진다. 결국 지극히 속물적인 오리와 돼지로 불리는 엄마와 여동생의 천박한 요구와 위협의 이야기들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주인공이 식당의 유리벽이라는 견딜 수 없도록 노출된 더러운 기분과 닫힌 구조의 식당이라는 고립성에서 발산되는 감정에 뒤섞여 식당 벽의 그림과 옆 테이블의 사람들, 유리창에 붙어 핸드폰의 불빛을 비추는 아이를 오가는 불안정한 시선의 의미를 절로 수긍하게 된다. 한 편의 기막히게 연출된, 고독의 기묘하고 소외적인 마법의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끝으로 미술작품 에이전시가 주인공인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단상으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이 단편은 자본과 현대미술의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도마뱀 같은 구조를 통해 미학적 쾌감, 돈과 시간의 높은 장벽을 세워 새로운 미학적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시시껄렁한 생태계를 들춰낸다. 아마 우연이야말로 섬세한 계산에 의해 이뤄진 필연적 결과물이라는 문장처럼 우리네 주변에서 시침 뚝 떼고 펼쳐지는 많은 현상들의 은폐된 본성에 대한 일종의 대중 고지(告知)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고발적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 명쾌함과 적나라함을 무기로 한 도발성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써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록된 일곱의 작품 모두 나름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발산하고 있다. 모처럼의 재미있는 문학 읽기의 시간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작품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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